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조선 땅을 지배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를,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수탈을 강제로 실시했는데, 이는 조선의 주요 경제 명맥을 장악하여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는 토지 강탈과 봉건적 착취를 확고히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1910년 3월에 총독부는 이완용에게 ‘임시 토지조사국 관제’를 제정하도록 한 뒤, 일본인들로 구성된 조사국을 만들어 토지 측량을 하기 시작했다. 1912년 8월에는 ‘토지조사령’과 ‘시행규칙’을 공포했다. 토지를 수탈하여 봉건적 지주들의 토지 소유를 보호하고 토지의 상품화를 촉진하여 지속적인 토지 강탈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토지세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토지조사 과정에서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그리고 일본인 지주가 주로 토지의 소유자가 되었다. 철산군의 수많은 토지도 동척(東拓)이 교묘한 수단과 힘으로 빼앗아 갔다. 양세봉이 세를 내어 경작하던 토지 주인도 파산하였고, 토지는 동척 명의로 넘어갔다. 양세봉은 동척과 계약을 하고 계속 농사를 지을 수는 있었지만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 땅에서 농사 짓는 걸 포기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양세봉은 다른 조선인 지주의 소작농이 되었다. 하지만 이 지주는 악독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땅을 빌린 대가로 수확의 70%를 가져갔다. 그 밖에도 곡물세, 탈곡세, 국세, 지방세, 부가세, 인두세, 애국세 등을 내야 했다. 이런 여러 명목의 세금은 세봉의 가정에 많은 부담을 안겨 주어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는 세봉 말고도, 동생인 원봉과 시봉은 외지에 나가 품을 팔아야 했다. 탈곡이 시작될 무렵에 지주는 소작농들이 수확을 속이거나 곡식을 숨기지 않을까 걱정되어 탈곡을 감시하려고 아예 세봉의 집에 와서 묵었다.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세봉의 어머니는 1916년에 봉녀를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봉녀의 시댁은 의주군 월화면 마용동에 있었는데, 세리면에서 몇십리 떨어진 산골로 벼농사를 지을 논도 없는 곳이었다.
세봉은 어머니를 모시고 봉녀의 시댁이 될 최숭치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아주 외진 산골로 방이 셋인 외딴 초가집이었다. 제일 가까운 이웃집도 2리는 가야 했다. 봉녀의 시아버지 최숭치는 젊었을 때 대장장이 생활을 했는데, 농민 중에서는 세상물정을 좀 아는 사람이었다. 또 글도 어느 정도 알았다. 자작농으로 집에 소도 기르고 생활도 넉넉한 편이었다. 시어머니인 백씨는 소박한 아낙네였다. 이미 두 딸은 시집을 갔고 맏아들 최인종도 결혼하였다. 봉녀의 남편 최인세는 그 집안의 둘째 아들인데 청각장애인이었다. 셋째 아들인 최인협은 최인세가 결혼할 때 18세로 봉녀보다 네 살 많았다.
봉녀는 결혼하여 모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큰딸 최원숙, 큰아들 최원석, 작은아들 최원갑, 작은딸 최원향이다. 최인세는 1939년 맹장염으로 사망하였다. 1941년 집안이 몰락하여 생활이 힘겨워지자 최숭치는 며느리 봉녀를 비롯해 가족을 모두 데리고 중국 동북지방의 청원현으로 이사해 원봉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여동생이 출가하자 어머니는 세봉과 재순의 혼사를 치렀다. 재순은 민며느리여서 약혼·예물·함들이와 같은 형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그들을 위해 몇 가지 요리를 마련해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상에는 여러 종류의 김치와 입에 붉은 고추를 물고 대가리를 곧추세운 결혼식용 삶은 수탉 한 마리도 놓여 있었다. 숙부 가족들과 이웃에 사는 몇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한 소박한 결혼식이었다. 상견례·맞절·폐백 등 식을 간소하게 올리고 함께 식사를 하고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세봉이 결혼한 후 식구들은 더욱 부지런히 일했다.
1917년 봄, 세봉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양운도의 집에 불행이 닥쳤다. 양운도와 그의 동생 양운항은 세봉과 6촌 형제간으로 같은 증조부의 자손들이다. 운도의 아버지는 운도가 다섯 살, 운항이 세 살 때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운도의 어머니 문씨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영향을 받은 아낙으로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문씨의 오라버니가 문씨에게 개가를 하라고 강요해도 이에 응하지 않자, 그는 운도의 두 누이를 인신매매(人身賣買)로 팔아 버리고 문씨와 그의 아들 둘마저 팔려고 했다. 이에 문씨는 대성통곡을 하며 두 아들과 함께 자살을 시도했다.
마음이 넓고 대장부 기질을 지닌 세봉이 이런 사실을 알고는 어머니와 상의했다.
“같은 양씨 집안으로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러니 우리 집으로 모셔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니 알아서 하여라.”
그리하여 문씨와 운도·운항은 세봉의 집으로 왔다. 세봉과 재순, 남동생들은 운도와 운항을 친동생처럼 대해 주었고 숙모 문씨도 친어머니처럼 모셨다. 식솔이 많아지자 이들 양씨 일가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2. 만주 땅을 유랑하다 ⑴
★ 여동생 같은 재순과 결혼하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조선 땅을 지배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를,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수탈을 강제로 실시했는데, 이는 조선의 주요 경제 명맥을 장악하여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는 토지 강탈과 봉건적 착취를 확고히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1910년 3월에 총독부는 이완용에게 ‘임시 토지조사국 관제’를 제정하도록 한 뒤, 일본인들로 구성된 조사국을 만들어 토지 측량을 하기 시작했다. 1912년 8월에는 ‘토지조사령’과 ‘시행규칙’을 공포했다. 토지를 수탈하여 봉건적 지주들의 토지 소유를 보호하고 토지의 상품화를 촉진하여 지속적인 토지 강탈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토지세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토지조사 과정에서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그리고 일본인 지주가 주로 토지의 소유자가 되었다. 철산군의 수많은 토지도 동척(東拓)이 교묘한 수단과 힘으로 빼앗아 갔다. 양세봉이 세를 내어 경작하던 토지 주인도 파산하였고, 토지는 동척 명의로 넘어갔다. 양세봉은 동척과 계약을 하고 계속 농사를 지을 수는 있었지만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 땅에서 농사 짓는 걸 포기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양세봉은 다른 조선인 지주의 소작농이 되었다. 하지만 이 지주는 악독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땅을 빌린 대가로 수확의 70%를 가져갔다. 그 밖에도 곡물세, 탈곡세, 국세, 지방세, 부가세, 인두세, 애국세 등을 내야 했다. 이런 여러 명목의 세금은 세봉의 가정에 많은 부담을 안겨 주어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는 세봉 말고도, 동생인 원봉과 시봉은 외지에 나가 품을 팔아야 했다. 탈곡이 시작될 무렵에 지주는 소작농들이 수확을 속이거나 곡식을 숨기지 않을까 걱정되어 탈곡을 감시하려고 아예 세봉의 집에 와서 묵었다.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세봉의 어머니는 1916년에 봉녀를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봉녀의 시댁은 의주군 월화면 마용동에 있었는데, 세리면에서 몇십리 떨어진 산골로 벼농사를 지을 논도 없는 곳이었다.
세봉은 어머니를 모시고 봉녀의 시댁이 될 최숭치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아주 외진 산골로 방이 셋인 외딴 초가집이었다. 제일 가까운 이웃집도 2리는 가야 했다. 봉녀의 시아버지 최숭치는 젊었을 때 대장장이 생활을 했는데, 농민 중에서는 세상물정을 좀 아는 사람이었다. 또 글도 어느 정도 알았다. 자작농으로 집에 소도 기르고 생활도 넉넉한 편이었다. 시어머니인 백씨는 소박한 아낙네였다. 이미 두 딸은 시집을 갔고 맏아들 최인종도 결혼하였다. 봉녀의 남편 최인세는 그 집안의 둘째 아들인데 청각장애인이었다. 셋째 아들인 최인협은 최인세가 결혼할 때 18세로 봉녀보다 네 살 많았다.
봉녀는 결혼하여 모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큰딸 최원숙, 큰아들 최원석, 작은아들 최원갑, 작은딸 최원향이다. 최인세는 1939년 맹장염으로 사망하였다. 1941년 집안이 몰락하여 생활이 힘겨워지자 최숭치는 며느리 봉녀를 비롯해 가족을 모두 데리고 중국 동북지방의 청원현으로 이사해 원봉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여동생이 출가하자 어머니는 세봉과 재순의 혼사를 치렀다. 재순은 민며느리여서 약혼·예물·함들이와 같은 형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그들을 위해 몇 가지 요리를 마련해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상에는 여러 종류의 김치와 입에 붉은 고추를 물고 대가리를 곧추세운 결혼식용 삶은 수탉 한 마리도 놓여 있었다. 숙부 가족들과 이웃에 사는 몇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한 소박한 결혼식이었다. 상견례·맞절·폐백 등 식을 간소하게 올리고 함께 식사를 하고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세봉이 결혼한 후 식구들은 더욱 부지런히 일했다.
1917년 봄, 세봉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양운도의 집에 불행이 닥쳤다. 양운도와 그의 동생 양운항은 세봉과 6촌 형제간으로 같은 증조부의 자손들이다. 운도의 아버지는 운도가 다섯 살, 운항이 세 살 때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운도의 어머니 문씨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영향을 받은 아낙으로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문씨의 오라버니가 문씨에게 개가를 하라고 강요해도 이에 응하지 않자, 그는 운도의 두 누이를 인신매매(人身賣買)로 팔아 버리고 문씨와 그의 아들 둘마저 팔려고 했다. 이에 문씨는 대성통곡을 하며 두 아들과 함께 자살을 시도했다.
마음이 넓고 대장부 기질을 지닌 세봉이 이런 사실을 알고는 어머니와 상의했다.
“같은 양씨 집안으로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러니 우리 집으로 모셔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니 알아서 하여라.”
그리하여 문씨와 운도·운항은 세봉의 집으로 왔다. 세봉과 재순, 남동생들은 운도와 운항을 친동생처럼 대해 주었고 숙모 문씨도 친어머니처럼 모셨다. 식솔이 많아지자 이들 양씨 일가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