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대진재(는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최대 진도 7, 규모 매그니튜드 7.9의 대규모 지진을 말한다.
지진의 피해는 도쿄를 중심으로 가나가와ㆍ지바ㆍ사이타마ㆍ이바라키ㆍ시즈오카ㆍ야마나시의 1부 6현에 이르렀다. 피해자 수가 약 340만 명으로 추정될 정도로 일본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그런데 이 지진은 단순히 자연 재해로 끝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일본 내부에서는 민중 운동이 점차 조직화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반대하는 우익이 대두되고 있었다. 또한 하라 다카시 총리 암살 등으로 천황 제도에 대한 부정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한편 외부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반일 민족 해방 운동이 한층 강화되고 있었고 시베리아로의 출병이 고전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자국 내ㆍ외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관동 대진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즉, 일본 정부는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재일 한국인이 폭동을 일으켜 방화했다고 조작, 민간에 유포함으로써 일본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급기야 일본인들은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 곳곳에서 한국인들을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재일 동포 6,000 여명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하였다.
◆ 관동 대지진 학살 사건
일본 육군과 경찰은 이 지진을 이용, 날조된 유언(流言)을 퍼뜨려 무고한 한국인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일본 기상청 자료에 의하면 사망자 9만 9331명, 행방불명 4만 3476명, 가옥 전파 12만 8266동, 반파 12만 6233동, 소실 44만 7128동, 유실 868동의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특히 대도시인 도쿄·요코하마에서는 화재로 인한 피해가 대부분이었으며, 건물 붕괴로 인한 압사자는 도쿄에서 확인된 수가 2,000명 안팎이었으며, 화재에 의한 사망자는 6만 명에 달했다. 도쿄 혼조에 있는 육군 피복창 자리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난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스미다강 쪽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 피난보따리에 불이 붙기 시작하여 4만 명이 소사하였다.
이 지진은 일본의 중심지인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영향이 컸다.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경제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던 일본은 이 재난으로 인하여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지진 발생 다음날 발족한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계엄령을 선포해야 했고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위기의식을 조성해야 했는데, 이 위기의식을 조성하는 데 재일한국인이 이용된 것이다.
즉,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민심의 불안이 극도에 도달한 이날 오후 6시를 기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들 당국자들은 유언비어의 전파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민중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유언반, 지휘반, 실행반 등의 공작대를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화·독물투입·투탄 등의 테러 행위를 감행시켜 그것이 마치 조선인들이 자행한 것처럼 조작하였다.
일본 국민은 한국인 폭동설을 그대로 믿고, 그 보복책으로 각 지방별로 자경단을 조직하였다. 그 수는 도쿄에 1,593, 가나가와에 603, 사이타마에 300, 지바에 366, 이바라기에 336, 군마[群馬]에 469, 기타 16, 합계 3,689개의 자경단이 조직되었다. 이리하여 군경과 자경단에 의한 한국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된 한국인의 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요시노 사쿠조는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6066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9월 3일에는 일본인 노동운동 지도자 히라사자와 게이시치 등 9명이 가메이도 경찰서에 검거되어 학살되었고, 16일에는 오스기 사카에[사회주의의 거물]와 그의 처 이토 노에 등이 헌병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일본이 이 지진에서 입은 총피해액은 65억 엔이며, 그후 일본은 제도부흥심의회·부흥원 등을 설치, 재해복구에 노력했으나,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일본 군벌의 잔악한 행위는 일본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제발 읽어주세요 [1923. 9.1 칸토대지진]★★
1923년 9월 1일
일본 칸토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당국자들의 유언비어에 의해 조선인이 대학살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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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진재(는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최대 진도 7, 규모 매그니튜드 7.9의 대규모 지진을 말한다.
지진의 피해는 도쿄를 중심으로 가나가와ㆍ지바ㆍ사이타마ㆍ이바라키ㆍ시즈오카ㆍ야마나시의 1부 6현에 이르렀다. 피해자 수가 약 340만 명으로 추정될 정도로 일본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그런데 이 지진은 단순히 자연 재해로 끝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일본 내부에서는 민중 운동이 점차 조직화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반대하는 우익이 대두되고 있었다. 또한 하라 다카시 총리 암살 등으로 천황 제도에 대한 부정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한편 외부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반일 민족 해방 운동이 한층 강화되고 있었고 시베리아로의 출병이 고전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자국 내ㆍ외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관동 대진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즉, 일본 정부는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재일 한국인이 폭동을 일으켜 방화했다고 조작, 민간에 유포함으로써 일본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급기야 일본인들은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 곳곳에서 한국인들을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재일 동포 6,000 여명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하였다.
◆ 관동 대지진 학살 사건
일본 육군과 경찰은 이 지진을 이용, 날조된 유언(流言)을 퍼뜨려 무고한 한국인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일본 기상청 자료에 의하면 사망자 9만 9331명, 행방불명 4만 3476명, 가옥 전파 12만 8266동, 반파 12만 6233동, 소실 44만 7128동, 유실 868동의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특히 대도시인 도쿄·요코하마에서는 화재로 인한 피해가 대부분이었으며, 건물 붕괴로 인한 압사자는 도쿄에서 확인된 수가 2,000명 안팎이었으며, 화재에 의한 사망자는 6만 명에 달했다. 도쿄 혼조에 있는 육군 피복창 자리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난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스미다강 쪽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 피난보따리에 불이 붙기 시작하여 4만 명이 소사하였다.
이 지진은 일본의 중심지인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영향이 컸다.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경제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던 일본은 이 재난으로 인하여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지진 발생 다음날 발족한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계엄령을 선포해야 했고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위기의식을 조성해야 했는데, 이 위기의식을 조성하는 데 재일한국인이 이용된 것이다.
즉,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민심의 불안이 극도에 도달한 이날 오후 6시를 기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들 당국자들은 유언비어의 전파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민중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유언반, 지휘반, 실행반 등의 공작대를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화·독물투입·투탄 등의 테러 행위를 감행시켜 그것이 마치 조선인들이 자행한 것처럼 조작하였다.
일본 국민은 한국인 폭동설을 그대로 믿고, 그 보복책으로 각 지방별로 자경단을 조직하였다. 그 수는 도쿄에 1,593, 가나가와에 603, 사이타마에 300, 지바에 366, 이바라기에 336, 군마[群馬]에 469, 기타 16, 합계 3,689개의 자경단이 조직되었다. 이리하여 군경과 자경단에 의한 한국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된 한국인의 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요시노 사쿠조는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6066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9월 3일에는 일본인 노동운동 지도자 히라사자와 게이시치 등 9명이 가메이도 경찰서에 검거되어 학살되었고, 16일에는 오스기 사카에[사회주의의 거물]와 그의 처 이토 노에 등이 헌병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일본이 이 지진에서 입은 총피해액은 65억 엔이며, 그후 일본은 제도부흥심의회·부흥원 등을 설치, 재해복구에 노력했으나,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일본 군벌의 잔악한 행위는 일본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출처: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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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때 상황을 알수있는 사진입니다.
http://blog.daum.net/dandakhan/16545911↑ 대학살 당시 광경을 그려낸 회화
http://blog.daum.net/ranthia/12148341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때 학살당한 우리 동포들을 잊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