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신드롬을 어떻게 봐야 할까? 숱하게 쏟아진 정치 공학적 논평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신드롬의 원인은 정치개혁에 대한 요청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개혁이라는 말은 곧 기성 정당정치에 대한 불만을 암시한다. 일부의 진단과 달리, 이런 불만은 한국의 정치제도가 후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형식에 내장되어 있는 모순 때문에 발생한다.
모든 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 과두제인 것이고, 그러므로 소수가 다수를 대변하는 ‘재현’일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정당이라는 ‘재현의 제도’는 끊임없이 ‘재현’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개혁을 요청받는 것이다. 이런 갈등의 구조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이고, 정치를 지속시키는 원인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는 민주주의의 원리로 인한 정당한 현상이지, 정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정당은 정당 밖의 정치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이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당정치로 모든 정치가 수렴되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인 것이다. 우파 정치인들은 이런 정당정치의 약점을 이용해서 손쉽게 정치적 입지를 유지해왔다. 성희롱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강용석 의원 제명을 둘러싼 정치인들의 야합이 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안철수 신드롬이 놓여 있는 배경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전자를 쓸모없는 과잉으로 비난해온 우파 정치의 이데올로기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정치인이 아니라 행정가를 선출해야 한다거나, 일만 잘한다면 부정부패 따위는 상관없다고 주장해온 정부 여당의 프로파간다가 안철수 신드롬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다. 노무현 정부의 ‘정치’를 거부하고, 이명박 정부의 ‘실용’을 선택한 지난 대선의 기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서 이명박 정부가 기치로 내걸었던 ‘실용’이라는 개념은 ‘일 잘하는 행정가’라는 실천적 내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런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했다. 일을 잘할 것이라고 기대한 정부가 일을 잘 못하니 당연히 돌아오는 반응은 ‘무능’이라는 평가이다. 한마디로 지금 현재 목격할 수 있는 반이명박 정서의 핵심에 잠복해 있는 것은 무능한 정부에 대한 혐오인 것이다. 이런 정서가 때로 정치에 대한 혐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본심은 ‘유능한 정부’에 대한 요구이다.
기성 정당정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안철수 신드롬은 정부 여당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정을 알고 나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안철수 신드롬이 현실정치로 성공적으로 진입해서 정치개혁세력을 결집할 수 있다면, 가장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박근혜 대세론이다. 박근혜 대세론을 떠받치고 있던 ‘비정치인’의 이미지는 변별성을 가지기 어렵고, 안철수라는 개인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무능한 이명박’을 대체할 대안으로 ‘유능한 안철수’가 호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큰 그림을 놓고 본다면, 이 상황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이념지형도를 구성해왔던 ‘정상국가’에 대한 진보의 요청과 ‘선진국’에 대한 보수의 요구가 서로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합리적 보수와 성찰적 진보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명박 정부가 초래한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보수주의의 재편이라는 관점에서 안철수 신드롬을 본다면, 새로운 진보에 대한 고민이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는 당위도 새삼 확인할 수밖에 없다.
‘안철수 신드롬’ 어떻게 봐야 할까?
[경향신문 2011-09-06]
안철수 신드롬을 어떻게 봐야 할까? 숱하게 쏟아진 정치 공학적 논평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신드롬의 원인은 정치개혁에 대한 요청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개혁이라는 말은 곧 기성 정당정치에 대한 불만을 암시한다. 일부의 진단과 달리, 이런 불만은 한국의 정치제도가 후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형식에 내장되어 있는 모순 때문에 발생한다.
정당은 정당 밖의 정치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이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당정치로 모든 정치가 수렴되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인 것이다. 우파 정치인들은 이런 정당정치의 약점을 이용해서 손쉽게 정치적 입지를 유지해왔다. 성희롱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강용석 의원 제명을 둘러싼 정치인들의 야합이 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 과두제인 것이고, 그러므로 소수가 다수를 대변하는 ‘재현’일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정당이라는 ‘재현의 제도’는 끊임없이 ‘재현’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개혁을 요청받는 것이다. 이런 갈등의 구조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이고, 정치를 지속시키는 원인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는 민주주의의 원리로 인한 정당한 현상이지, 정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안철수 신드롬이 놓여 있는 배경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전자를 쓸모없는 과잉으로 비난해온 우파 정치의 이데올로기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정치인이 아니라 행정가를 선출해야 한다거나, 일만 잘한다면 부정부패 따위는 상관없다고 주장해온 정부 여당의 프로파간다가 안철수 신드롬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다. 노무현 정부의 ‘정치’를 거부하고, 이명박 정부의 ‘실용’을 선택한 지난 대선의 기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서 이명박 정부가 기치로 내걸었던 ‘실용’이라는 개념은 ‘일 잘하는 행정가’라는 실천적 내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런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했다. 일을 잘할 것이라고 기대한 정부가 일을 잘 못하니 당연히 돌아오는 반응은 ‘무능’이라는 평가이다. 한마디로 지금 현재 목격할 수 있는 반이명박 정서의 핵심에 잠복해 있는 것은 무능한 정부에 대한 혐오인 것이다. 이런 정서가 때로 정치에 대한 혐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본심은 ‘유능한 정부’에 대한 요구이다.
기성 정당정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안철수 신드롬은 정부 여당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정을 알고 나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안철수 신드롬이 현실정치로 성공적으로 진입해서 정치개혁세력을 결집할 수 있다면, 가장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박근혜 대세론이다. 박근혜 대세론을 떠받치고 있던 ‘비정치인’의 이미지는 변별성을 가지기 어렵고, 안철수라는 개인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무능한 이명박’을 대체할 대안으로 ‘유능한 안철수’가 호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큰 그림을 놓고 본다면, 이 상황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이념지형도를 구성해왔던 ‘정상국가’에 대한 진보의 요청과 ‘선진국’에 대한 보수의 요구가 서로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합리적 보수와 성찰적 진보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명박 정부가 초래한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보수주의의 재편이라는 관점에서 안철수 신드롬을 본다면, 새로운 진보에 대한 고민이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는 당위도 새삼 확인할 수밖에 없다.
〔경향신문 이택광 경희대학교 교수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