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왕(鄒牟王) 주몽(朱蒙)이 세운 고구려(高句麗)는 한반도 북부, 만주, 시베리아, 몽골초원에 걸친 대륙의 강대국으로 태조대왕(太祖大王)대에 이르러 고대국가로서의 위세를 갖추게 되었다.
고구려가 자리잡은 압록강 중류 동가강(冬佳江) 유역은 대륙 금속문화 전래의 주요한 통로이기는 하나 척박한 산꼴자기여서 애초부터 농경만으로는 자급자족할 수 없었고, 북쪽으로는 부여, 동북쪽으로는 읍루(揖婁), 서쪽으로는 한군현(漢郡縣) 등 대립세력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강건하고도 호전적인 기질을 키워 활로를 개척하고 양곡이나 어염(漁鹽) 등 부족한 물자를 확보해야 했다. 이것은 강력한 무력(武力)을 바탕으로 한 타부족(他部族)에 대한 정복과 영역의 확대로 나타났다.
고구려의 영토확장사업(領土擴張事業)은 초대 추모왕(鄒牟王) 때부터 비류국(沸流國)을 복속하는 것을 시작으로 행인국(行人國), 북옥저(北沃沮), 선비(鮮卑), 구다국(句茶國), 낙랑국(樂浪國) 등을 차례로 병합하였고, 모본왕(慕本王) 때에는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까지 진출하였으며, 태조대왕(太祖大王) 때에는 갈사국(曷思國), 조나국(藻那國), 주나국(朱那國) 등을 병합하였고, 또한 동쪽으로는 동해안의 동옥저(東沃沮)를 정복하여 남쪽으로는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동해안의 풍부한 물자를 확보하였고, 배후 및 측면의 위협을 제거하여 후방기지를 확보함으로써 요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53년인 서기 105년에는 한(漢)의 요동군(遼東郡)과 현도군(玄萄郡)을 공략하여 요동지방의 6개 현(縣)을 빼앗고, 압록강 유역에서 소자하(蘇子河) 유역으로 쫓겨와 있던 현도군을 다시 무순(撫順)지방까지 쫓아냈다. 태조대왕 재위 66년에 다시 요동 진출을 꾀하였을 때에는 후한, 부여 연합군에게 저지당하기도 하였으나 그 후에도 요동지방에 대한 고구려의 공격은 여전히 계속되어 압록강 입구의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가족을 생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건국시부터 시작된 영토 확장 사업과 중원 왕조와의 대결은 고구려의 성장과정 그 자체였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이러한 영토 확장과 맞물려서 지배체제가 정비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왕권 강화와 국가체제의 중앙집권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처음에 고구려의 국왕은 그 중심세력인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이상 오부족(五部族) 가운데 소노부에서 나왔으나 계루부로 바뀐 후 계루부 고씨(高氏)의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고 처음 왕위계승권이 형제상속이었다가 나중에 부자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왕후도 특정부족 출신으로 국한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층 세력인 오부족(五部族)이 제가평의회를 두는 등 중앙집권적인 체제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계루부 등 동부 세력의 지배에 대하여 소노부로 상징되는 서부지역의 사람들이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에게 투항하는 등 동서간 민족분열이 초래되자 고국천왕(故國川王)은 동서화합의 차원에서 소노부의 무명선인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194년에 대민정책(對民政策)의 일환인 진대법(賑貸法)을 시행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국력이 급속히 신장할 무렵, 요동의 공손씨(公孫氏) 일파는 중원 대륙이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三國)으로 분열, 혼란스러워진 틈에 낙랑군(樂浪郡)을 점령하고 그 남부에 새로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다. 그 후 중국 북부의 위나라가 공손씨 세력을 무너뜨리고 동쪽으로 국세(國勢)를 뻗어옴에 따라 요동을 놓고 고구려와 위나라 간의 일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요동은 철이 풍부하게 매장된 곳일 뿐만 아니라 중국 동방진출의 근거지이자 한반도의 방패라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동천왕(東川王)대인 242년에 요동반도의 서안평을 선제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행동은 금새 위(魏)의 반격을 초래하여 마침내 관구검(管丘儉)의 침공으로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고 동천왕은 동해안의 옥저지방으로 피난하였지만 곧 수도로 돌아와 국세(國勢)를 만회하였다. 그 후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은 위의 뒤를 이은 진(晉)의 세력이 미약해지자, 서안평을 점령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였다. 이로써 한군현(漢郡縣)은 완전히 소멸되어 고구려는 고조선의 고토(古土)를 수복하는데 성공, 314년에 이르러 한반도 북부와 만주, 시베리아 일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고국원왕(故國原王)대에 이르러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니 북쪽의 선비족(鮮卑族) 왕조인 전연(前燕)과 남쪽의 백제(百濟) 사이에서 위협을 받게 된 것이었다. 342년에 전연의 국왕인 모용황(慕容晄)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을 함락시키고 미천왕릉(美川王陵)을 훼손하였으며, 이어서 371년에는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평양성(平壤城)에서 전사하는 등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내부결속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임무를 띠고 등장한 제왕이 소수림왕(小獸林王)이었다.
오부족(五部族)을 중심으로 한 부족연맹체 단계에 있던 초기 고구려에는 국왕 밑에 수상(首相)격인 패자(沛者) 또는 대로(對盧)가 있고 그 밑에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선인(早衣仙人) 등이 있었다. 각부의 족장들인 대가(大加)들도 각기 국왕과 마찬가지로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가신(家臣)을 거느리고 있어서 정치실권은 오히려 국왕보다 대가들에게 있었다.
고구려가 고대국가로 성정하는 동안 이들 오부족의 족장 후예들은 귀족층을 형성하였다. 초기에 이들은 대가라 불렸으나 고대국가가 형성된 후에는 대인(大人)이라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계루부(桂婁部), 절노부(絶奴部), 소노부(消奴部)의 적통대인(適統大人)에게는 고추가(高雛加)라는 최고의 존칭을 주었고, 독자적인 종묘(宗廟)와 영성사직(靈星社稷)을 갖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부족 나름대로의 전통을 그대로 지니면서 최고 신분으로서의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고구려가 고대국가로서의 관료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율령정치(律令政治)가 시작된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였고 평양 천도 이후 더욱 정비되었다. 고구려의 관료등급은 대체로 12등급으로 분화, 발달되고 뒤에 그 등급이 더 증가되어 14등급까지 있었다. 그때 관료의 관계(官階)와 관직(官職)은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관료체계는 대소 족장세력의 전재왕권에의 예속과 수취체계의 정비과정에서 점차적으로 갖추어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관료체계는 원래 족장세력을 의미하는 '형(兄)'의 계열[諸兄, 小兄, 大兄, 頭太兄, 太大兄]과 공부(貢賦) 징수의 직역(職役)을 의미하는 '사자(使者)'의 계열[太大使者·大使者·收位使者·上位使者·小使者]의 관등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사자, 조의선인 등 원래의 부족장의 가신체제가 분화되면서 패자, 대로, 주부, 우태 등 중앙관료체제 속에 흡수되어 일원적인 집권체제로 편제되었다. 이와 같은 관등의 분화, 정비에 따라선 어떤 신분체제가 형성되어 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그 상위의 5등급을 차지한 귀족관료가 중앙에서 중요한 국사(國事)를 논의, 총괄하였던 것 같다. 최고위의 대대로(大對盧)는 원해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귀족의 선거에 의하여 임명되고 3년마다 교체되었다.
지방행정구역은 수도와 비장을 각기 동부, 서부, 남부, 북부, 내부의 오부로 나누고 지방의 오부(도)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과 처려근지(處閭近支) 즉 도사(道使)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각부(도)의 여러 성(城)을 통솔했다. 본래 성은 왕국의 군사적, 행정적 단위로 통합되어 성주 지휘하에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또 징세 등 지방민에 대한 통치가 행해지게 되어 있었다. 군사조직은 국왕 자신을 최고사령관으로 일원적으로 편제되어 몇 등급의 장관(將官)이 잇었다. 고구려는 수도를 환인(桓仁), 국내성(國內城), 환도성(丸都城), 평양성(平壤城) 등으로 네차례 옮겼으나 국내성(통구), 한성(재령), 평양성 등을 정치적 군사적 요지로 삼는 삼경제(三京制)를 실시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토지제도와 수취체제는 왕권세습의 확립과 율령정치의 시행에 따라서 중앙집권적으로 정비되어갔다. 왕국 내의 모든 토지는 왕토(王土)라는 의미에서 토지국유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에 입각하여 처분되었다. 왕실 직속령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사전(賜田)이나 식읍(食邑)이 있어 귀족들의 대토지소유(對土地所有)의 원천이 되었다. 사전은 세습적 상속이 인정되었으나 식읍은 상속될 수 없었고, 이들 토지에 대한 지배는 조세(租稅), 공부(貢賦), 역역(力役) 등의 수취에 있었다. 귀족들에 의한 토지사유화 과정은 처음 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정복전(征服戰)에 의한 영역의 확대로 토지의 사유화가 일반화되었다. 전쟁 포로는 전공(戰功)이 있는 무신(武臣)에게 노예로 분배되어 이들 귀족들은 그들의 예민(隸民)이나 노예를 이용한 황무지의 개척, 점탈 등에 의해서 토지를 확대시켜 나갔다. 일반 농민들은 원래의 자신의 소규모 경작지를 경작하였으나, 국가의 각종 수탈과 빈번한 요역에 의하여 경작지를 잃고 고농(雇農)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율령은 관제와 아울러 수취제도의 정비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인두세(人頭稅)로서 매인(梅人)에게 해마다 포(布) 5필이나 곡식 5섬을 거두고, 자경지가 없는 고농(雇農)에게는 소액의 세포(稅布)를 3년에 한번씩 공동부담케 하였으며 민호(民戶)를 3등급으로 나누어 호별로 조세를 징수하였다. 농민에 대한 부세의 기반은 토지에서보다 오히려 역역노동에 더 의존하였는데 그러한 역의 의무는 15세 이상 남자에게 주어져 징발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토지, 가옥, 노비, 우마 등의 매매행위가 자유로웠다. 빈민에 대한 구제책으로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갚게 하는 진대법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 고구려의 종교와 문화
단군조선의 신선도(神仙圖)는 부여를 거쳐 고구려에 전승됐으며, 불교가 고구려에 처음 전래된 것은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2년인 서기 372년으로 전진(前秦)의 국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을 보내게 한 이후였다. 2년 후에는 아도(阿道)가 들어왔으며 소수림왕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지어 이들로 하여금 전교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방에는 이보다 앞서 불교가 전해졌다. 즉 가야에 서기 48년 장유화상(長遊和尙)과 허황후(許皇后)에 의해 처음 불교가 전해졌던 것이다.
고대 왕국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불교가 왕실에 의하여 환영받았던 것은 때마침 국민에 대한 사상통일의 요구에 불교가 부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가 지녔던 호국적 성격이 왕실에 크게 영합되었기 때문이었다. 불교 신앙을 통해서 국가나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고 국가나 왕실이 수호된다는 생각은 왕실이 국가적으로 불교를 비호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불교는 종래의 민간신앙과도 결부되어 질병과 재앙에서 개인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 나라를 보호해주는 현세 구복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
불교는 전래 당시 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가 함께 들어왔으나 고구려에서는 대승불교, 특히 그 중에서도 삼론종(三論宗)이 크게 발전하여 일본과 중국의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 때에 활약한 명승(名僧)으로는 승랑(僧朗)과 혜랑(惠亮),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대에 경률(經律) 수십부를 가져온 담시(曇始), 일본 쇼토쿠세자[聖德世子]의 스승이었던 혜자(惠慈), 일본 호류사[浩隆寺] 금당벽화를 그린 담징(曇徵), 일본 삼론종의 개조(開祖)인 혜관(惠灌), 인도 구법승(求法僧) 현유(玄遊) 등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영성(靈星), 귀신(鬼神), 사직(社稷)에 제사 드리기를 좋아하며 단군조선과 부여의 신선도를 이어받아 하늘에 천제(天祭)를 지냈고, 조상신으로 고등 신(高登神)과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어머니인 유화부인(柳花夫人)을 여신으로 모셨다. 대무신왕(大武神王) 2년에는 시조신사인 동명성왕묘(東明聖王廟)를 졸본(卒本)에 세우고, 이후 역대 제왕이 행궁하여 시조신사에 제사를 지냈다. 또 추수감사제인 10월 국중대회 종교의식을 동맹(東盟)이라 하여 백성들이 감사의식을 치르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즐겼다고 한다. 동맹은 양서(梁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동명(東明)으로 되어 있어 시조(時祖) 동명제(東明祭)를 말한 것임이 틀림없다.
고구려에는 또 신선도를 수련한 많은 선인이 배출됐는데, 고구려의 재상 을파소(乙巴素)는 신선도 경전인 참전계정(參佺計定)을 집대성하였고 신선도의 표본으로 검은 조복을 입은 조의선인(早衣仙人)을 양성했다. 을파소는 준수하고 영리한 젊은이를 선발하여 선인도랑(仙人徒郞)이라 하고 교화 관장자를 참전(參佺)이라 했으며 무예를 관장하고 솔선수범하는 사람을 조의선인이라 했다. 명림답부(明臨答夫)도 조의선인 출신의 국상(國相)이었고, 9세 때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연개소문(淵蓋蘇文)도 신선도를 펼쳐 성기(成己), 자유(自由), 개물(開物), 평등(平等)의 도를 실천하였으며, 보장왕(寶藏王) 때는 신선도가 중국화한 도교가 역수입되자 정책적으로 함께 장려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동천왕(東川王) 8년 조의 문헌에는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영혼이 무자(巫者)를 통하여 강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유학이 유입되면서 372년에는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이 설립되었고, 사립학교로는 경당(慶堂)이 세워졌다. 국사(國史)의 편찬도 행해져 일찍이 유기(留記) 100권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이문진(李文眞)에 의해 신집(新集) 5권으로 개수되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장수태왕(長壽太王)은 건흥(建興) 2년인 414년 통구(通溝)지방에 부왕(父王)인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영락기공비(榮樂紀功碑)를 세웠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져 민족의 웅혼을 전달하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 비문에는 한자 약 1800자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학작품으로는 유리명왕(琉璃明王)이 쌍쌍이 놀고 있는 꾀꼬리를 보면서 읊었다는 황조가(黃鳥歌)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애담으로 손꼽히는 온달(溫達)과 평강공주(平岡公主)의 설화가 있다.
고구려인들은 음악을 좋아했는데 특히 왕산악(王山嶽)이 거문고를 만들고 100여곡의 악곡을 지었으나 이들 악곡은 현존하지 않는다. 고구려인들은 또 건축, 미술면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고구려인이 남긴 문화재로는 우선 여러가지 성곽을 들 수 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말기에 176개의 산성이 있었다고 전한다. 집안(集安) 산성자(山城子)에 있는 환도산성(丸都山城), 환인(桓仁)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 황해도 신원군 남평양에 있는 장수산성(長壽山城), 평안남도 용강군 옥도리에 있는 황룡산성(黃龍山城), 평안남도 승안군 어중리에 있는 자모산성(慈母山城),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溫達山城) 등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고구려의 성곽 건축물이다. 또 38만여m2에 52개동의 건물이 동양궁제를 바탕으로 배치된 안학궁(安鶴宮), 북한의 국보 1호로 평양성 남문인 대동문(大同門), 사찰건축인 안국사(安國寺), 금강사(金剛寺), 정릉사(定陵寺) 등의 금당, 8각목탑 등이 유명하다. 고구려의 기와(와당)는 장려하고 강건한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불상으로는 평양 대성산에서 발견된 석재불감(石材佛龕), 금도지장보살좌상(金度地藏菩薩坐像), 금은관음보살(金銀觀音菩薩), 평천구역에서 발견된 금동인왕상(金銅仁王像),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및 평남 평원군 원오리에서 발견된 흙불상 등이 있다.
고구려의 고분은 석총(石塚)과 토총(土塚) 두 종류가 있는데, 고구려가 처음 일어난 환인(桓仁) 지방에 석총 715개 등 750개가 있고, 환도성과 국내성이 있는 집안 통구지방에는 4973기의 석총 등 1만 2358군데가 있으며, 평양 대성산 부근에는 100여기의 무덤이 있는데 석총보다 토총이 압도적으로 많다.
대표적인 석총으로는 고구려의 웅지를 드러내 거대한 피라미드식으로 7층까지 돌을 쌓아올린 광개토호태왕릉(廣開土好太王陵)과 장군총(將軍塚)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은 평남 중화군 무진리에 있는 동명성왕릉(東明聖王陵)이다. 장군총은 알타이계 물질문화로서 이집트의 큰 피라미드, 수메르의 지구라트, 일본 큐슈고분, 신세계로 이주한 몽고족의 아즈텍, 마야의 태양신전, 인도의 수미산형대찰 등 태양과 지기(地祈)를 숭배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관을 안치한 큰 석산을 축조하고 그 위에 봉토를 덮은 토총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쌍영총(雙楹塚)이 있다.
고구려 고분에는 동양회화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벽화가 남아 있어 고구려인의 예술적 기량을 엿보게 한다. 쌍영총 천정의 장식벽화, 안악 3호 고분 주인공상[안악 3호 고분 피장자에 대하여는 동수설(冬壽說), 미천왕릉설(美川王陵設), 고국원왕릉설(故國原王陵說)로 학계의 의견이 나뉜다] 덕흥리 고분 주인공상과 마상궁술대회(馬上弓術大會) 연못도, 진파리 4호 고분 연못도, 국내성 무용총(舞踊塚)의 태권도, 장천 1호고분 씨름도, 통구(通溝) 12호 고분 무사도 등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연화총(蓮花塚) 등 불교적인 요소가 주축을 이뤘으나 신선도(神仙圖) 사상을 나타낸 것도 많았다. 벽화의 중심이 신선도에서 인물풍속도나 승지사상, 풍수지리의 방향 및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과 관련되는 사신도(四神圖; 靑龍, 白虎, 玄武, 朱雀)로 바귀어갔는데,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으로 만주 집안 무용총을 비롯해 삼실총, 용강 쌍영총, 대안리 1호 고분, 대동 덕화리 1.2호 고분, 은산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 평양 내리 1호 고분, 진파이 1.4호 고분, 고산리 1.9호 고분, 호남리 사신총, 남포시 강서대묘(江西大墓), 온천 수렵총, 성총(星塚), 황해도 안악 복사리(伏獅里) 고분(古墳) 등이 있다.
●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과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대외정책(對外政策)
전연과 백제의 침공으로 큰 타격을 받은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이 등장하면서 흥륭(興隆)의 기운이 일어났다. 소수림왕은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어 전진의 국왕 부견(符堅)이 보내온 순도(順道)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太學)을 설립하였으며 373년에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불교수용은 국가의 정신적 통일을 위한 것이었고 태학의 설립은 새로운 관료체계를 위한 관리양성에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율령의 반포는 국가조직을 정비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에 중앙집권적 체제가 완료되어 전성기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조카로서 고국양왕(故國壤王)의 뒤를 이어 1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재위 22년 동안 강력한 군사력으로 만주벌판과 한반도 남부 등에 대규모 정복전쟁(征服戰爭)를 전개하여 고구려의 국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서쪽으로는 오랫동안 한족(漢族)과 항쟁해오던 요동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고, 동북쪽의 숙신(肅愼)을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정벌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0여군데의 성을 빼앗은 것을 비롯, 한강유역의 여러 성읍(城邑)을 차지하였다. 광개토호태왕은 또 396년 봄에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여 58성(城) 700촌(村)을 함락시키고 아신왕(阿辛王)의 항복을 받았으며, 가야와 더불어 신라를 침범한 왜국의 군대를 낙동강 유역에서 섬멸하였다. 그리고 402년에는 후연(後燕)이 점령했던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탈환하고 후연의 군사적 요충지인 평주(平州)를 함락시켰다. 이렇듯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과감하고 적극적인 대외원정(對外遠征)에 힘입어 고구려의 국력은 크게 증진되었고, 북쪽으로는 흑룡강(黑龍江), 남쪽으로는 한강(漢江),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내몽골지방과 중국의 동북지방에 걸치는 장대한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광개토호태왕의 위대한 업적은 그 아들인 장수태왕(長壽太王)이 건흥(建興) 2년에 세운 것으로 지금의 만주 통구(通溝)에 있는 영락기공비(榮樂紀功碑)가 잘 말해주고 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長壽太王)은 재위 79년 동안 부왕(父王)의 위업을 계승하여 남진정책(南眞政策)을 취하는 등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희대의 호걸군주 장수태왕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깊은 안목을 가지고 중국의 북위(北魏) 및 동진(東晉)과 외교관계를 맺고 견제, 조정하면서 고구려를 동북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427년에 수도를 토지가 척박한 산골짜기의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비옥한 평야에 자리잡은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기고, 안학궁(安學宮)을 세우며 중앙집권적인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나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던 선대왕(先代王)인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원한을 푸는 길이기도 했다.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역시 고구려의 성장을 불안한 상황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신라와 동맹관계를 맺어 고구려의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를 구실삼아 고구려의 장수태왕은 475년에 군사 3만여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한 백제는 수도를 남쪽인 웅진성(熊津城)으로 옮기게 되었고, 고구려의 판도는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선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처럼 장수태왕(長壽太王)대 말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의 거대왕국을 형성하면서 중원 왕조와 자웅을 겨루게 되었으니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비중은 막강해졌다. 이는 충북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나타나 있듯이 5세기 중에 신라를 '동이(東夷)'라 지칭할 뿐만 아니라 신라 국왕 및 중신들에게 의복을 주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文咨明王) 역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명왕이 사망한 뒤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여러 세력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아 정국이 불안해지고 왕권 또한 약화되었다. 이러한 불안정은 안장태왕(安藏太王), 안원태왕(安原太王), 양원태왕(陽原太王)대에도 수습되지 못하고 결국 백제,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의 영토를 상실하고 말았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한국사 강론」6.고구려의 영토 확장
● 고구려의 사회적 특성
추모왕(鄒牟王) 주몽(朱蒙)이 세운 고구려(高句麗)는 한반도 북부, 만주, 시베리아, 몽골초원에 걸친 대륙의 강대국으로 태조대왕(太祖大王)대에 이르러 고대국가로서의 위세를 갖추게 되었다.
고구려가 자리잡은 압록강 중류 동가강(冬佳江) 유역은 대륙 금속문화 전래의 주요한 통로이기는 하나 척박한 산꼴자기여서 애초부터 농경만으로는 자급자족할 수 없었고, 북쪽으로는 부여, 동북쪽으로는 읍루(揖婁), 서쪽으로는 한군현(漢郡縣) 등 대립세력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강건하고도 호전적인 기질을 키워 활로를 개척하고 양곡이나 어염(漁鹽) 등 부족한 물자를 확보해야 했다. 이것은 강력한 무력(武力)을 바탕으로 한 타부족(他部族)에 대한 정복과 영역의 확대로 나타났다.
고구려의 영토확장사업(領土擴張事業)은 초대 추모왕(鄒牟王) 때부터 비류국(沸流國)을 복속하는 것을 시작으로 행인국(行人國), 북옥저(北沃沮), 선비(鮮卑), 구다국(句茶國), 낙랑국(樂浪國) 등을 차례로 병합하였고, 모본왕(慕本王) 때에는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까지 진출하였으며, 태조대왕(太祖大王) 때에는 갈사국(曷思國), 조나국(藻那國), 주나국(朱那國) 등을 병합하였고, 또한 동쪽으로는 동해안의 동옥저(東沃沮)를 정복하여 남쪽으로는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동해안의 풍부한 물자를 확보하였고, 배후 및 측면의 위협을 제거하여 후방기지를 확보함으로써 요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53년인 서기 105년에는 한(漢)의 요동군(遼東郡)과 현도군(玄萄郡)을 공략하여 요동지방의 6개 현(縣)을 빼앗고, 압록강 유역에서 소자하(蘇子河) 유역으로 쫓겨와 있던 현도군을 다시 무순(撫順)지방까지 쫓아냈다. 태조대왕 재위 66년에 다시 요동 진출을 꾀하였을 때에는 후한, 부여 연합군에게 저지당하기도 하였으나 그 후에도 요동지방에 대한 고구려의 공격은 여전히 계속되어 압록강 입구의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가족을 생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건국시부터 시작된 영토 확장 사업과 중원 왕조와의 대결은 고구려의 성장과정 그 자체였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이러한 영토 확장과 맞물려서 지배체제가 정비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왕권 강화와 국가체제의 중앙집권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처음에 고구려의 국왕은 그 중심세력인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이상 오부족(五部族) 가운데 소노부에서 나왔으나 계루부로 바뀐 후 계루부 고씨(高氏)의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고 처음 왕위계승권이 형제상속이었다가 나중에 부자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왕후도 특정부족 출신으로 국한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층 세력인 오부족(五部族)이 제가평의회를 두는 등 중앙집권적인 체제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계루부 등 동부 세력의 지배에 대하여 소노부로 상징되는 서부지역의 사람들이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에게 투항하는 등 동서간 민족분열이 초래되자 고국천왕(故國川王)은 동서화합의 차원에서 소노부의 무명선인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194년에 대민정책(對民政策)의 일환인 진대법(賑貸法)을 시행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국력이 급속히 신장할 무렵, 요동의 공손씨(公孫氏) 일파는 중원 대륙이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三國)으로 분열, 혼란스러워진 틈에 낙랑군(樂浪郡)을 점령하고 그 남부에 새로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다. 그 후 중국 북부의 위나라가 공손씨 세력을 무너뜨리고 동쪽으로 국세(國勢)를 뻗어옴에 따라 요동을 놓고 고구려와 위나라 간의 일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요동은 철이 풍부하게 매장된 곳일 뿐만 아니라 중국 동방진출의 근거지이자 한반도의 방패라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동천왕(東川王)대인 242년에 요동반도의 서안평을 선제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행동은 금새 위(魏)의 반격을 초래하여 마침내 관구검(管丘儉)의 침공으로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고 동천왕은 동해안의 옥저지방으로 피난하였지만 곧 수도로 돌아와 국세(國勢)를 만회하였다. 그 후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은 위의 뒤를 이은 진(晉)의 세력이 미약해지자, 서안평을 점령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였다. 이로써 한군현(漢郡縣)은 완전히 소멸되어 고구려는 고조선의 고토(古土)를 수복하는데 성공, 314년에 이르러 한반도 북부와 만주, 시베리아 일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고국원왕(故國原王)대에 이르러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니 북쪽의 선비족(鮮卑族) 왕조인 전연(前燕)과 남쪽의 백제(百濟) 사이에서 위협을 받게 된 것이었다. 342년에 전연의 국왕인 모용황(慕容晄)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을 함락시키고 미천왕릉(美川王陵)을 훼손하였으며, 이어서 371년에는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평양성(平壤城)에서 전사하는 등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내부결속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임무를 띠고 등장한 제왕이 소수림왕(小獸林王)이었다.
오부족(五部族)을 중심으로 한 부족연맹체 단계에 있던 초기 고구려에는 국왕 밑에 수상(首相)격인 패자(沛者) 또는 대로(對盧)가 있고 그 밑에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선인(早衣仙人) 등이 있었다. 각부의 족장들인 대가(大加)들도 각기 국왕과 마찬가지로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가신(家臣)을 거느리고 있어서 정치실권은 오히려 국왕보다 대가들에게 있었다.
고구려가 고대국가로 성정하는 동안 이들 오부족의 족장 후예들은 귀족층을 형성하였다. 초기에 이들은 대가라 불렸으나 고대국가가 형성된 후에는 대인(大人)이라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계루부(桂婁部), 절노부(絶奴部), 소노부(消奴部)의 적통대인(適統大人)에게는 고추가(高雛加)라는 최고의 존칭을 주었고, 독자적인 종묘(宗廟)와 영성사직(靈星社稷)을 갖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부족 나름대로의 전통을 그대로 지니면서 최고 신분으로서의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고구려가 고대국가로서의 관료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율령정치(律令政治)가 시작된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였고 평양 천도 이후 더욱 정비되었다. 고구려의 관료등급은 대체로 12등급으로 분화, 발달되고 뒤에 그 등급이 더 증가되어 14등급까지 있었다. 그때 관료의 관계(官階)와 관직(官職)은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관료체계는 대소 족장세력의 전재왕권에의 예속과 수취체계의 정비과정에서 점차적으로 갖추어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관료체계는 원래 족장세력을 의미하는 '형(兄)'의 계열[諸兄, 小兄, 大兄, 頭太兄, 太大兄]과 공부(貢賦) 징수의 직역(職役)을 의미하는 '사자(使者)'의 계열[太大使者·大使者·收位使者·上位使者·小使者]의 관등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사자, 조의선인 등 원래의 부족장의 가신체제가 분화되면서 패자, 대로, 주부, 우태 등 중앙관료체제 속에 흡수되어 일원적인 집권체제로 편제되었다. 이와 같은 관등의 분화, 정비에 따라선 어떤 신분체제가 형성되어 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그 상위의 5등급을 차지한 귀족관료가 중앙에서 중요한 국사(國事)를 논의, 총괄하였던 것 같다. 최고위의 대대로(大對盧)는 원해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귀족의 선거에 의하여 임명되고 3년마다 교체되었다.
지방행정구역은 수도와 비장을 각기 동부, 서부, 남부, 북부, 내부의 오부로 나누고 지방의 오부(도)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과 처려근지(處閭近支) 즉 도사(道使)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각부(도)의 여러 성(城)을 통솔했다. 본래 성은 왕국의 군사적, 행정적 단위로 통합되어 성주 지휘하에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또 징세 등 지방민에 대한 통치가 행해지게 되어 있었다. 군사조직은 국왕 자신을 최고사령관으로 일원적으로 편제되어 몇 등급의 장관(將官)이 잇었다. 고구려는 수도를 환인(桓仁), 국내성(國內城), 환도성(丸都城), 평양성(平壤城) 등으로 네차례 옮겼으나 국내성(통구), 한성(재령), 평양성 등을 정치적 군사적 요지로 삼는 삼경제(三京制)를 실시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토지제도와 수취체제는 왕권세습의 확립과 율령정치의 시행에 따라서 중앙집권적으로 정비되어갔다. 왕국 내의 모든 토지는 왕토(王土)라는 의미에서 토지국유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에 입각하여 처분되었다. 왕실 직속령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사전(賜田)이나 식읍(食邑)이 있어 귀족들의 대토지소유(對土地所有)의 원천이 되었다. 사전은 세습적 상속이 인정되었으나 식읍은 상속될 수 없었고, 이들 토지에 대한 지배는 조세(租稅), 공부(貢賦), 역역(力役) 등의 수취에 있었다. 귀족들에 의한 토지사유화 과정은 처음 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정복전(征服戰)에 의한 영역의 확대로 토지의 사유화가 일반화되었다. 전쟁 포로는 전공(戰功)이 있는 무신(武臣)에게 노예로 분배되어 이들 귀족들은 그들의 예민(隸民)이나 노예를 이용한 황무지의 개척, 점탈 등에 의해서 토지를 확대시켜 나갔다. 일반 농민들은 원래의 자신의 소규모 경작지를 경작하였으나, 국가의 각종 수탈과 빈번한 요역에 의하여 경작지를 잃고 고농(雇農)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율령은 관제와 아울러 수취제도의 정비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인두세(人頭稅)로서 매인(梅人)에게 해마다 포(布) 5필이나 곡식 5섬을 거두고, 자경지가 없는 고농(雇農)에게는 소액의 세포(稅布)를 3년에 한번씩 공동부담케 하였으며 민호(民戶)를 3등급으로 나누어 호별로 조세를 징수하였다. 농민에 대한 부세의 기반은 토지에서보다 오히려 역역노동에 더 의존하였는데 그러한 역의 의무는 15세 이상 남자에게 주어져 징발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토지, 가옥, 노비, 우마 등의 매매행위가 자유로웠다. 빈민에 대한 구제책으로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갚게 하는 진대법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 고구려의 종교와 문화
단군조선의 신선도(神仙圖)는 부여를 거쳐 고구려에 전승됐으며, 불교가 고구려에 처음 전래된 것은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2년인 서기 372년으로 전진(前秦)의 국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을 보내게 한 이후였다. 2년 후에는 아도(阿道)가 들어왔으며 소수림왕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지어 이들로 하여금 전교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방에는 이보다 앞서 불교가 전해졌다. 즉 가야에 서기 48년 장유화상(長遊和尙)과 허황후(許皇后)에 의해 처음 불교가 전해졌던 것이다.
고대 왕국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불교가 왕실에 의하여 환영받았던 것은 때마침 국민에 대한 사상통일의 요구에 불교가 부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가 지녔던 호국적 성격이 왕실에 크게 영합되었기 때문이었다. 불교 신앙을 통해서 국가나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고 국가나 왕실이 수호된다는 생각은 왕실이 국가적으로 불교를 비호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불교는 종래의 민간신앙과도 결부되어 질병과 재앙에서 개인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 나라를 보호해주는 현세 구복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
불교는 전래 당시 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가 함께 들어왔으나 고구려에서는 대승불교, 특히 그 중에서도 삼론종(三論宗)이 크게 발전하여 일본과 중국의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 때에 활약한 명승(名僧)으로는 승랑(僧朗)과 혜랑(惠亮),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대에 경률(經律) 수십부를 가져온 담시(曇始), 일본 쇼토쿠세자[聖德世子]의 스승이었던 혜자(惠慈), 일본 호류사[浩隆寺] 금당벽화를 그린 담징(曇徵), 일본 삼론종의 개조(開祖)인 혜관(惠灌), 인도 구법승(求法僧) 현유(玄遊) 등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영성(靈星), 귀신(鬼神), 사직(社稷)에 제사 드리기를 좋아하며 단군조선과 부여의 신선도를 이어받아 하늘에 천제(天祭)를 지냈고, 조상신으로 고등 신(高登神)과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어머니인 유화부인(柳花夫人)을 여신으로 모셨다. 대무신왕(大武神王) 2년에는 시조신사인 동명성왕묘(東明聖王廟)를 졸본(卒本)에 세우고, 이후 역대 제왕이 행궁하여 시조신사에 제사를 지냈다. 또 추수감사제인 10월 국중대회 종교의식을 동맹(東盟)이라 하여 백성들이 감사의식을 치르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즐겼다고 한다. 동맹은 양서(梁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동명(東明)으로 되어 있어 시조(時祖) 동명제(東明祭)를 말한 것임이 틀림없다.
고구려에는 또 신선도를 수련한 많은 선인이 배출됐는데, 고구려의 재상 을파소(乙巴素)는 신선도 경전인 참전계정(參佺計定)을 집대성하였고 신선도의 표본으로 검은 조복을 입은 조의선인(早衣仙人)을 양성했다. 을파소는 준수하고 영리한 젊은이를 선발하여 선인도랑(仙人徒郞)이라 하고 교화 관장자를 참전(參佺)이라 했으며 무예를 관장하고 솔선수범하는 사람을 조의선인이라 했다. 명림답부(明臨答夫)도 조의선인 출신의 국상(國相)이었고, 9세 때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연개소문(淵蓋蘇文)도 신선도를 펼쳐 성기(成己), 자유(自由), 개물(開物), 평등(平等)의 도를 실천하였으며, 보장왕(寶藏王) 때는 신선도가 중국화한 도교가 역수입되자 정책적으로 함께 장려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동천왕(東川王) 8년 조의 문헌에는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영혼이 무자(巫者)를 통하여 강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유학이 유입되면서 372년에는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이 설립되었고, 사립학교로는 경당(慶堂)이 세워졌다. 국사(國史)의 편찬도 행해져 일찍이 유기(留記) 100권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이문진(李文眞)에 의해 신집(新集) 5권으로 개수되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장수태왕(長壽太王)은 건흥(建興) 2년인 414년 통구(通溝)지방에 부왕(父王)인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영락기공비(榮樂紀功碑)를 세웠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져 민족의 웅혼을 전달하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 비문에는 한자 약 1800자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학작품으로는 유리명왕(琉璃明王)이 쌍쌍이 놀고 있는 꾀꼬리를 보면서 읊었다는 황조가(黃鳥歌)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애담으로 손꼽히는 온달(溫達)과 평강공주(平岡公主)의 설화가 있다.
고구려인들은 음악을 좋아했는데 특히 왕산악(王山嶽)이 거문고를 만들고 100여곡의 악곡을 지었으나 이들 악곡은 현존하지 않는다. 고구려인들은 또 건축, 미술면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고구려인이 남긴 문화재로는 우선 여러가지 성곽을 들 수 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말기에 176개의 산성이 있었다고 전한다. 집안(集安) 산성자(山城子)에 있는 환도산성(丸都山城), 환인(桓仁)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 황해도 신원군 남평양에 있는 장수산성(長壽山城), 평안남도 용강군 옥도리에 있는 황룡산성(黃龍山城), 평안남도 승안군 어중리에 있는 자모산성(慈母山城),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溫達山城) 등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고구려의 성곽 건축물이다. 또 38만여m2에 52개동의 건물이 동양궁제를 바탕으로 배치된 안학궁(安鶴宮), 북한의 국보 1호로 평양성 남문인 대동문(大同門), 사찰건축인 안국사(安國寺), 금강사(金剛寺), 정릉사(定陵寺) 등의 금당, 8각목탑 등이 유명하다. 고구려의 기와(와당)는 장려하고 강건한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불상으로는 평양 대성산에서 발견된 석재불감(石材佛龕), 금도지장보살좌상(金度地藏菩薩坐像), 금은관음보살(金銀觀音菩薩), 평천구역에서 발견된 금동인왕상(金銅仁王像),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및 평남 평원군 원오리에서 발견된 흙불상 등이 있다.
고구려의 고분은 석총(石塚)과 토총(土塚) 두 종류가 있는데, 고구려가 처음 일어난 환인(桓仁) 지방에 석총 715개 등 750개가 있고, 환도성과 국내성이 있는 집안 통구지방에는 4973기의 석총 등 1만 2358군데가 있으며, 평양 대성산 부근에는 100여기의 무덤이 있는데 석총보다 토총이 압도적으로 많다.
대표적인 석총으로는 고구려의 웅지를 드러내 거대한 피라미드식으로 7층까지 돌을 쌓아올린 광개토호태왕릉(廣開土好太王陵)과 장군총(將軍塚)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은 평남 중화군 무진리에 있는 동명성왕릉(東明聖王陵)이다. 장군총은 알타이계 물질문화로서 이집트의 큰 피라미드, 수메르의 지구라트, 일본 큐슈고분, 신세계로 이주한 몽고족의 아즈텍, 마야의 태양신전, 인도의 수미산형대찰 등 태양과 지기(地祈)를 숭배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관을 안치한 큰 석산을 축조하고 그 위에 봉토를 덮은 토총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쌍영총(雙楹塚)이 있다.
고구려 고분에는 동양회화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벽화가 남아 있어 고구려인의 예술적 기량을 엿보게 한다. 쌍영총 천정의 장식벽화, 안악 3호 고분 주인공상[안악 3호 고분 피장자에 대하여는 동수설(冬壽說), 미천왕릉설(美川王陵設), 고국원왕릉설(故國原王陵說)로 학계의 의견이 나뉜다] 덕흥리 고분 주인공상과 마상궁술대회(馬上弓術大會) 연못도, 진파리 4호 고분 연못도, 국내성 무용총(舞踊塚)의 태권도, 장천 1호고분 씨름도, 통구(通溝) 12호 고분 무사도 등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연화총(蓮花塚) 등 불교적인 요소가 주축을 이뤘으나 신선도(神仙圖) 사상을 나타낸 것도 많았다. 벽화의 중심이 신선도에서 인물풍속도나 승지사상, 풍수지리의 방향 및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과 관련되는 사신도(四神圖; 靑龍, 白虎, 玄武, 朱雀)로 바귀어갔는데,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으로 만주 집안 무용총을 비롯해 삼실총, 용강 쌍영총, 대안리 1호 고분, 대동 덕화리 1.2호 고분, 은산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 평양 내리 1호 고분, 진파이 1.4호 고분, 고산리 1.9호 고분, 호남리 사신총, 남포시 강서대묘(江西大墓), 온천 수렵총, 성총(星塚), 황해도 안악 복사리(伏獅里) 고분(古墳) 등이 있다.
●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과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대외정책(對外政策)
전연과 백제의 침공으로 큰 타격을 받은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이 등장하면서 흥륭(興隆)의 기운이 일어났다. 소수림왕은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어 전진의 국왕 부견(符堅)이 보내온 순도(順道)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太學)을 설립하였으며 373년에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불교수용은 국가의 정신적 통일을 위한 것이었고 태학의 설립은 새로운 관료체계를 위한 관리양성에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율령의 반포는 국가조직을 정비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에 중앙집권적 체제가 완료되어 전성기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조카로서 고국양왕(故國壤王)의 뒤를 이어 1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재위 22년 동안 강력한 군사력으로 만주벌판과 한반도 남부 등에 대규모 정복전쟁(征服戰爭)를 전개하여 고구려의 국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서쪽으로는 오랫동안 한족(漢族)과 항쟁해오던 요동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고, 동북쪽의 숙신(肅愼)을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정벌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0여군데의 성을 빼앗은 것을 비롯, 한강유역의 여러 성읍(城邑)을 차지하였다. 광개토호태왕은 또 396년 봄에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여 58성(城) 700촌(村)을 함락시키고 아신왕(阿辛王)의 항복을 받았으며, 가야와 더불어 신라를 침범한 왜국의 군대를 낙동강 유역에서 섬멸하였다. 그리고 402년에는 후연(後燕)이 점령했던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탈환하고 후연의 군사적 요충지인 평주(平州)를 함락시켰다. 이렇듯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과감하고 적극적인 대외원정(對外遠征)에 힘입어 고구려의 국력은 크게 증진되었고, 북쪽으로는 흑룡강(黑龍江), 남쪽으로는 한강(漢江),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내몽골지방과 중국의 동북지방에 걸치는 장대한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광개토호태왕의 위대한 업적은 그 아들인 장수태왕(長壽太王)이 건흥(建興) 2년에 세운 것으로 지금의 만주 통구(通溝)에 있는 영락기공비(榮樂紀功碑)가 잘 말해주고 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長壽太王)은 재위 79년 동안 부왕(父王)의 위업을 계승하여 남진정책(南眞政策)을 취하는 등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희대의 호걸군주 장수태왕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깊은 안목을 가지고 중국의 북위(北魏) 및 동진(東晉)과 외교관계를 맺고 견제, 조정하면서 고구려를 동북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427년에 수도를 토지가 척박한 산골짜기의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비옥한 평야에 자리잡은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기고, 안학궁(安學宮)을 세우며 중앙집권적인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나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던 선대왕(先代王)인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원한을 푸는 길이기도 했다.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역시 고구려의 성장을 불안한 상황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신라와 동맹관계를 맺어 고구려의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를 구실삼아 고구려의 장수태왕은 475년에 군사 3만여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한 백제는 수도를 남쪽인 웅진성(熊津城)으로 옮기게 되었고, 고구려의 판도는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선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처럼 장수태왕(長壽太王)대 말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의 거대왕국을 형성하면서 중원 왕조와 자웅을 겨루게 되었으니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비중은 막강해졌다. 이는 충북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나타나 있듯이 5세기 중에 신라를 '동이(東夷)'라 지칭할 뿐만 아니라 신라 국왕 및 중신들에게 의복을 주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文咨明王) 역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명왕이 사망한 뒤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여러 세력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아 정국이 불안해지고 왕권 또한 약화되었다. 이러한 불안정은 안장태왕(安藏太王), 안원태왕(安原太王), 양원태왕(陽原太王)대에도 수습되지 못하고 결국 백제,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의 영토를 상실하고 말았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