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어머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7년 동안 저는 단 한번도 어머니의 미소를 볼 수 없었습니다. 7년이 지난 지금 저는 그때 그 시절의 어머니의 미소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어머니가 저희 곁을 떠나기 일주일 전, 어머니와 저는 짜장면과 짬뽕을 시켰습니다. 어머니는 짜장면을 몇 젓가락 하시다 저에게 짬뽕을 좀 먹어보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작은 반항심으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말 못할 큰 빚을 지셨던 어머니는, 미소를 잃었던 그때의 어머니는 제 작은 고집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식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짬뽕을 보면 그때 당시 어머니께서 제게 “내가 이렇게 힘든데, 그깟 짬뽕 한 젓가락 주는 게 그토록 싫으냐”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저희 곁을 떠나시던 날, 방에 있던 저를 어머니께서 부르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며 제게 꾸깃꾸깃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쥐어주셨습니다. “성종아, 아버지 말 잘 듣고 몸 건강하게 공부 열심히 하면서 살아. 이제 엄마가 줄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다. 이게 마지막 용돈이다.” 저는 “엄마 제발 가지 마. 같이 살자. 내가 엄마랑 같이 있을게” 와 같이 따뜻한 말 대신 표독스럽게 어머니를 몰아 부쳤습니다. “엄마가 뭘 잘했다고 집을 나가는건데? 아빠가 빚 다 갚아줬잖아. 아빠한테 잘못했다고 하고 열심히 살 생각을 해야지, 집을 나가서 어떻게 할 건데.” 그게 저와 어머니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어머니는 만나던 남성분과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와 누나와 저는 빚에 내몰려 옥탑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보일러를 틀어도 입김이 나오는 촌동네 옥탑방 구석에서 매일 밤 눈물로 찬 몸을 덥히며 떠난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곱씹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머리가 굵어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길수록 어머니에 대한 갈증이 났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그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호로자식이 자기 변명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발길을 끊었던 외갓집에도 가보고 마지막으로 호적이 등록되어 있던 구미 일대의 식당 집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맸습니다. TV는 사랑을 싣고,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라는 사람 찾는 프로그램에도 신청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돌아온 말은 호적이 말소되어 찾을 수 없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경찰서에서 제공하는 가족 찾기 프로그램에도 등록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전화 연락도 온 적이 없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나이가 있으시니 몸이 편찮으십니다. 얼마 전 팔순 잔칫날 외할머니께서 저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생전 기옥이 얼굴 한 번 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면서 말입니다.
누나는 삼 년 반 동안의 미국 생활과 자신의 꿈까지 접어둔 체 오직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마른 눈물을 쥐어짜며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하루를 살아갑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입니다. 여타의 4학년과 마찬가지로 취업 준비를 하며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저만 바라보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뒤를 돌아볼 여유는 커녕 옆을 볼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어떻게 얼마나 이렇게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생존여부도 모른 체 살아가야 합니까.
저도 이런 제 사정을 숨기고 싶지만 할머니의 소원과 누나의 꿈과 못난 불효자, 못난 놈의 한을 풀 방법이 있다면 말 그대로 쥐푸라기도 움켜잡고 싶습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아픔을 안아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다시 어머니의 환한 미소를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저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현재 다시금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보고 계신 여러분이 조그만 관심과 시간을 내어주셔서 지인들이 볼 수 있게 해주신다면 진심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사진有) 7년 전 집을 나가신 어머니를 찾습니다. 여러분 제발 좀 도와주세요!
언제부터인가 어머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7년 동안 저는 단 한번도 어머니의 미소를 볼 수 없었습니다. 7년이 지난 지금 저는 그때 그 시절의 어머니의 미소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어머니가 저희 곁을 떠나기 일주일 전, 어머니와 저는 짜장면과 짬뽕을 시켰습니다. 어머니는 짜장면을 몇 젓가락 하시다 저에게 짬뽕을 좀 먹어보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작은 반항심으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말 못할 큰 빚을 지셨던 어머니는, 미소를 잃었던 그때의 어머니는 제 작은 고집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식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짬뽕을 보면 그때 당시 어머니께서 제게 “내가 이렇게 힘든데, 그깟 짬뽕 한 젓가락 주는 게 그토록 싫으냐”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저희 곁을 떠나시던 날, 방에 있던 저를 어머니께서 부르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며 제게 꾸깃꾸깃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쥐어주셨습니다. “성종아, 아버지 말 잘 듣고 몸 건강하게 공부 열심히 하면서 살아. 이제 엄마가 줄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다. 이게 마지막 용돈이다.” 저는 “엄마 제발 가지 마. 같이 살자. 내가 엄마랑 같이 있을게” 와 같이 따뜻한 말 대신 표독스럽게 어머니를 몰아 부쳤습니다. “엄마가 뭘 잘했다고 집을 나가는건데? 아빠가 빚 다 갚아줬잖아. 아빠한테 잘못했다고 하고 열심히 살 생각을 해야지, 집을 나가서 어떻게 할 건데.” 그게 저와 어머니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어머니는 만나던 남성분과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와 누나와 저는 빚에 내몰려 옥탑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보일러를 틀어도 입김이 나오는 촌동네 옥탑방 구석에서 매일 밤 눈물로 찬 몸을 덥히며 떠난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곱씹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머리가 굵어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길수록 어머니에 대한 갈증이 났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그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호로자식이 자기 변명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발길을 끊었던 외갓집에도 가보고 마지막으로 호적이 등록되어 있던 구미 일대의 식당 집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맸습니다. TV는 사랑을 싣고,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라는 사람 찾는 프로그램에도 신청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돌아온 말은 호적이 말소되어 찾을 수 없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경찰서에서 제공하는 가족 찾기 프로그램에도 등록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전화 연락도 온 적이 없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나이가 있으시니 몸이 편찮으십니다. 얼마 전 팔순 잔칫날 외할머니께서 저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생전 기옥이 얼굴 한 번 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면서 말입니다.
누나는 삼 년 반 동안의 미국 생활과 자신의 꿈까지 접어둔 체 오직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마른 눈물을 쥐어짜며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하루를 살아갑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입니다. 여타의 4학년과 마찬가지로 취업 준비를 하며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저만 바라보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뒤를 돌아볼 여유는 커녕 옆을 볼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어떻게 얼마나 이렇게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생존여부도 모른 체 살아가야 합니까.
저도 이런 제 사정을 숨기고 싶지만 할머니의 소원과 누나의 꿈과 못난 불효자, 못난 놈의 한을 풀 방법이 있다면 말 그대로 쥐푸라기도 움켜잡고 싶습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아픔을 안아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다시 어머니의 환한 미소를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저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현재 다시금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보고 계신 여러분이 조그만 관심과 시간을 내어주셔서 지인들이 볼 수 있게 해주신다면 진심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못난 저를 한 번만 도와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