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강론」12.수여전쟁(隨麗戰爭)과 당여전쟁(唐麗戰爭)

개마기사단201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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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륙 서북부 서안(西安)에 주둔한 수(隨), 당(唐)이 만주 지역에 있는 고구려(高句麗)와 제국의 운명을 건 혈투를 벌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중원의 패자(覇者)였던 수, 당과 북방의 패자였던 고구려 사이의 천하관의 충돌이었다. 중원에 들어선 통일왕조는 동아시아 전체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고, 고구려 역시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에서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을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딸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지나(支那)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 하면, 반드시 피차 내부의 분열과 불만이 있어 각기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일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를 간파한 것이었다.

●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전쟁.

① 수(隨)의 중국 통일과 고구려(高句麗) 영양태왕(嬰陽太王)의 대비책

고구려의 스물다섯번째 임금인 평원태왕(平原太王)은 영강(永康) 13년(서기 557년)에 태자에 책립되었다가 2년 후인 559년에 부왕(父王)인 양원태왕(陽原太王)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평원태왕의 즉위 당시 고구려는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의 북진정책(北進政策)으로 함경도 유역까지 일시 신라에 빼앗기는 등 국력이 위축된 상태였다. 31년 동안 재위에 있었던 평원태왕을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담력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전사 집단으로 출발한 고구려의 국왕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평원태왕의 즉위는 거대왕국 고구려의 부활을 위해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평원태왕은 즉위 이듬해 졸본(卒本)에 거동하여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사형수를 제외한 죄수들을 풀어주어 왕권의 위엄과 자비를 과시했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에게 왕권 강화가 생존의 필수 요건임을 말하고 있었다. 대덕(大德) 23년(서기 581년)에 건국된 수(隨)는 후한(後漢) 이래의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제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평원태왕(平原太王)은 그 해 12월, 사신을 수나라에 파견한 데 이어 이듬해 정월 또 다시 사신을 파견하는 등 수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남진(南陳)에도 사신을 파견해 중국 남북조(南北朝)의 분열을 이용, 고구려의 위상을 강화하는 이이제이(夷以制夷) 방책을 수행했다.

그러나 대덕(大德) 31년(589년) 수나라가 남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자 평원태왕은 전쟁 준비에 나섰다. 수서(隨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개황(開皇) 초에는 입조(入朝)하는 사신이 자주 있었으나 진(陳)을 평정한 뒤로는 탕(湯)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평원태왕은 수의 중국 통일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전쟁에 대비했다. 그는 수의 통일 이듬해인 서기 59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맏아들 원(元)이 즉위했으니 그가 고구려의 스물여섯번째 임금인 영양태왕(嬰陽太王)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서는 영양태왕을 "풍채가 준수하고 일찍이 제세안민(濟世安民)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영양태왕은 재위 2년과 3년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이는 조공(朝貢)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정보 수집의 성격이 강했다.

홍무(弘武) 8년(서기 597년)에 수황(隨皇) 문제(文帝)가 고구려에 보낸 국서가 이를 말해준다. 문제는 대덕(大德) 26년(584년)만 해도 수나라를 찾은 고구려의 사신을 위해 대흥전(大興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줄 정도로 고구려를 우대했었다. 그러나 통일왕조를 이룩하고 난 다음에는 태도가 달라졌다. 영양태왕 또한 수나라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문제는 597년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 불만을 토로한다.

'고려왕(高麗王)이 남의 신하가 되엇으면 모름지기 짐(朕)과 덕을 같이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말갈(靺鞨)을 못견디게 괴롭히고, 거란(契丹)을 금고(禁錮)시켰다.(중략) 우리 나라는 공인(工人)이 적지 않으니, 그대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짐에게 주청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여러 해 전에는 몰래 재물을 뿌려 소인을 움직여 사사로이 노수(弩手)를 빼앗아갔다. 병기(兵器)를 수리하는 목적이 나쁜 생각에서 나온 까닭에 남이 알까봐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중략) 고려왕은 짐의 사자(使者)를 빈 객관(客館)에 앉혀놓고 삼엄한 경계를 펴며, 눈과 귀를 막아 끝내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했다.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관원(官員)을 막으며 그 살피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또 종종 기마병을 보내 짐의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후략)

수서(隨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조.

이 국서의 내용 가운데 "말갈을 괴롭히고 거란을 금고시켰다."는 표현은 당시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구려는 만주를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천하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지나(支那)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 하면, 반드시 피차 내부의 분열과 불만이 있어 각기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일 것이다."라고 말한 대로, 중원에 통일제국이 수립된 이상 두 강국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문제(文帝)이 국서는 바로 이런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高句麗)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수(隨)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에 만족하지 않고 수나라를 먼저 선제 공격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해당 기사를 보자.

'태왕이 말갈의 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 지방을 공격하자 영주(營州)의 총관(摠管) 위충(韋沖)이 이를 격퇴시켰다. 수황(隨皇) 문제(文帝)가 듣고 크게 노해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績)을 원수(元首)로 삼아 수륙군(水陸軍) 30만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영양태왕(嬰陽太王) 9년조

영양태왕은 자신의 친위대인 정예군이 아니라 말갈의 군사를 거느리고 통일제국 수나라를 선제 공격한 것이다. 구당서(舊唐書)가 고구려의 귀족들이 대대로(大對盧)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툴 때 "군왕은 다만 궁문(宮門)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이들을 제어하지 못한다."라고 적고 있듯이, 국왕은 자신의 친위군을 가지고 있었으나 비교적 약체인 말갈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나라에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이는 수의 기세를 꺾는다는 대외적 측면만이 아니라 고구려 국내를 겨냥한 대내적 측면도 함께 지닌 의도적인 행위였다.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선 이상 천하를 건 한판 승부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영양태왕은 수나라가 체제를 완전히 정비하기 전에 싸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다 선제 공격을 통해 국내를 전시체제로 재편함으로써 국내의 귀족들을 왕권 아래 편제하려 한 것이었다. 영양태왕의 선제 공격은 이런 다각적인 목적을 지닌 의식적인 군사활동이었다. 이 전시체제의 정점에는 당연히 영양태왕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② 제1차 수여전쟁(隨麗戰爭)

수황(隨皇) 문제(文帝)는 중원 통일을 이룩한 지 7년만에 고구려가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하자 격분했다. 그는 이를 통일제국 수(隨)에 대한 부정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넷째 아들인 한왕(漢王) 양(諒)과 장수(將帥) 왕세적(王世績)에게 육군과 수군 30만의 대병력을 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제1차 수여전쟁(隨麗戰爭)이 시작된 것이다.

수군(隨軍)은 산해관 서북 지역 임유관(臨楡關)을 지나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군사 30만명이 동원된 이 대전(大戰)에 대한 기록이 별반 없다. 이는 김부식(金富軾)이 중국 측 기록에 의존해 전쟁 기사를 수록했기 대문이다. 즉, 중국 측의 문헌에는 이 대전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삼국사기는 같은 해 9월에 수군이 철수했는데 죽은 자가 10명 가운데 8,9명 정도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철수 이유가 기후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수나라의 육군은 장마를 만나 군량의 수송이 끊어지고 전염병이 들었으며,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으로 향하던 수군도 폭풍을 만나 군선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서(隨書)는 기후 외에도 수나라의 대군을 두려워한 영양태왕(嬰陽太王)이 사신을 통해 보낸 표문을 예로 든다.

"원(元)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렸는데 '요동(遼東) 분토(糞土)의 신 원(元) 운운'하여서 고조(高祖)는 이에 군사를 거두어들이고 과거와 같이 대우했다."

삼국사기도 "영양왕(嬰陽王)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의 글을 전했는데 요동 분토(糞土)의 신(臣) 모(某)라고까지 일컬었다."면서 수서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장마나 폭풍, 그리고 분토의 신 운운은 참패를 감추기 위한 수나라의 의도적인 기록에 불과하다. 수나라 군사들이 철수한 음력 9월이면 장마, 폭풍 등은 이미 다 지난 때다. 즉, 겨울이 본격적으로 다가오기 전으로서 활동하기 가장 좋은 때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제1차 수여전쟁은 고구려군이 기후와 지리 등을 이용해 수나라 군사들을 격파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참패를 뼈아프게 여긴 문제(文帝)가 그 내용을 숨기기 위해 자연재해와 영양태왕의 표문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대동운해(大東韻海)와 서곽잡록(西郭雜錄)이라는 고서(古書)를 인용해 수나라와의 첫번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고구려 장수의 이름을 강이식(姜以式)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당시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사의 출발지인 임유관 유역에서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는데 수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패배를 감추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기후와 영양태왕의 '요동 분토' 운운하는 표문 때문에 수나라 군사들이 철수했다는 수서나 삼국사기의 기록보다는, 수나라 군사들이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해 철수했다는 신채호의 이런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수여전쟁(隨麗戰爭) 결과 수나라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반면, 고구려는 세계 최강대국의 30만 대군을 단번에 격퇴시켰다는 커다란 자부심으로 충족되었다. 영양태왕(嬰陽太王)이 2년 후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역사서인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도록 한 것이 그 표현이다. 신집(新集) 5권은 국초부터 있어 왔던 100권짜리 유기(留記)를 수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승리의 내역이 기록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수여전쟁의 승리는 고구려에게 새로운 역사서를 기술하게 할 만큼 자부심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자리에서 천하의 중심은 수나라가 아니었다. 고구려가 북방의 중심이라면 수나라는 남방의 중심이었다. 적어도 고구려 중심의 천하와 수나라 중심의 두 천하는 대등한 것이었고, 그 사실을 고구려는 수여전쟁으로 입증해 보였다.

③ 제2차 수여전쟁(隨麗戰爭)과 살수대첩(薩水大捷)

수황(隨皇) 문제(文帝)의 패배는 수나라 정세에도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수나라 황실은 내환(內患)에 시달렸고, 그 끝에 문제는 재위 24년(604년) 7월에 태자 광(廣)에게 살해되고 광이 즉위했으니 그가 곧 양제(煬帝)였다. 이에 반발해 다음 달에는 고구려 침공에 참전했던 동생 한왕(漢王) 양(諒)이 거병했으나 양제의 측근 양소(楊素)에게 진압당하는 등 내부 혼란이 계속되었다. 양제는 부황(父皇)인 문제가 실패한 고구려 정벌을 성공시킴으로써 부황 독살설에 대한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고 문제도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에 성공한 천하의 패자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수서(隨書)에는 영양태왕(嬰陽太王)이 전쟁 후에도 "해마다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해 제1차 수여전쟁(隨麗戰爭)을 자신들의 패배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려 했으나 이는 패전(敗戰)의 수모를 감추기 위한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영양태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수나라 군사들을 전멸시킨 2년 후인 재위 11년 단 한차례뿐이었다. 고구려는 승전(勝戰)을 바탕으로 수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수황(隨皇) 양제(煬帝)는 낙양(洛陽)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 중국의 강북과 강남을 잇는 대운하를 만들고, 만리장성을 수축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취해 나갔다. 만리장성의 수축은 한편으로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한 것이기도 했다. 양제는 이런 불안한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다. 무엇보다도 고구려를 복종시키지 못하는 한 왕권 강화는 요원하다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잇었다. 따라서 두 나라 사이에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또 한번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수나라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쪽의 백제와 신라도 상대해야 했다. 세계 최강의 국력을 지닌 수나라와 싸우면서 남방의 백제, 신라와도 대적하는 등 두개의 전선(戰線)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고구려의 딜레마였다. 수서는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첫번째 전쟁 때 백제(百濟) 혜왕(惠王)이 수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벌군의 길잡이가 되겠노라 자청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는 수군(隨軍)이 고구려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패퇴해 철수한 뒤였으므로 실제 종군(從軍)은 이뤄지지 않았다. 즉 문제(文帝)는 "고려왕(高麗王) 고원(高元)의 군신(君臣)이 두려워하여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복종하므로, 짐은 벌써 죄를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토벌할 수가 없다."라고 허세를 떨면서 백제의 호의를 거절했었다. 이에 영양태왕은 수나라의 길잡이를 자청한 백제를 공격하는 한편, 홍무(弘武) 14년(603년)에는 장수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가 장악한 북한산성을 빼앗기 위해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직접 나서서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양태왕은 홍무(弘武) 18년(서기 607년) 5월 다시 군대를 파견해 백제의 송산성(松山城)을 치게 했다. 이때 송산성 함락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다시 석두성(石頭城)을 쳐서 남녀 3천여명을 포로로 잡아들였다. 이듬해 2월에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영토를 공격, 군민(軍民) 8천여명을 사로잡았으며, 4월에는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를 빼앗았다.

607년에는 수황(隨皇) 양제(煬帝)가 지금의 몽골 지역인 돌궐족의 임금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장막으로 거동했다. 이때 공교롭게도 고구려의 사신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영양태왕(嬰陽太王)의 입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영양태왕은 입조는 커녕 수나라의 사신이 백제나 신라로 가는 길까지 막았다. 이는 북방 전역을 아우르는 고구려의 천하에 대한 수나라의 영향력 행사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611년에 양제는 군사를 일으켜 직접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이때 수나라의 정벌군은 전투병력만 해도 113만 3천 8백여명으로서, 통칭 2백만 대군이라고 일컫는 역사상 유례없는 대군이었다. 게다가 군량과 기타 군수품을 운반하는 보급부대의 숫자는 이것의 배가 되었으니 무려 3백만~4백만의 인력이 고구려 침략에 동원된 것이었다. 양제의 친위군을 빼고 좌, 우 각기 12군으로 편성되었고, 각 군이 출발 간격을 40리 정도로 유지했는데 선두 부대에서 마지막 후미 부대까지의 거리가 40일 거리이자 그 대열의 길이만 해도 960리에 달했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표현대로 '근고(近古)이래 보지 못하던 장대한 출진'이었다.

같은 해 백제 무왕(武王)은 수(隨)에 사신을 보내 출병 시기를 물었고 양제는 이에 기뻐하면서 상서기부랑(尙書起部浪) 석율(席律)을 보내 공격 시기를 알려주었다. 고구려는 자칫 수나라와 백제라는 두 세력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요하(遼河)를 최전선으로 삼아 수나라의 대군과 맞섰다. 양제는 공부상서에게 명해 다리를 만들어 도강(渡江)하려 했으나, 그만 다리가 짧아 뭍에 닿지 않는 바람에 수군(隨軍)의 선봉장인 맥철장(麥鐵杖)과 전사웅(錢士雄) 등이 전사하고 말았다. 강 서안(西岸)으로 군사를 옮겨 다시 부교(浮橋)를 제작한 수나라 군사들은 드디어 요하를 건너는 데 성공했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서북방의 요충지인 요동성(遼東城)을 포위했다.

수나라 수군의 총사령관인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는 7개 군을 이끌고 뱃길로 대동강 하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평양성 60여리 밖까지 진군해 고구려군을 격파했다. 내호아는 내친 김에 평양성까지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나성(羅城)의 빔 절에 군사를 숨겨두고 거짓 퇴각하는 영양태왕의 아우인 건무(建武)의 유인전술에 걸려 생환자가 수천명에 불과할 정도로 대패를 당했다.

양제는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 우중문(于仲文) 등에게 9개군 30만 5천여명을 주어 자신이 요동성을 포위하는 동안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게 했다. 우중문이 이끄는 이 부대는 수나라의 정예군이었으나 문제는 보급이었다. 아무리 정예군이라도 보급선이 확보되지 않으면 장기전을 치를 수 없다. 우문술, 우중문이 거느린 수나라 군사들도 대릉하 하류와 요하 서쪽에서부터 평양에 이르는 긴 거리를 보급선으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양제는 결국 군사 개개인이 100일분의 양식과 장비를 지니고 평양으로 가게 함으로써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무게 때문에 중도에 식량을 몰래 버리는 군사들이 늘면서 막상 압록강 유역에 도착했을 대에는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는 자가 많았다.

식량 보급에 문제가 있음을 간파한 고구려군의 총사령관인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수나라 군사를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하룻동안 일곱 번 교전하다가 퇴각하는 작전을 펼쳐 수나라 군사들을 더욱 피로하게 만들었다.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 북쪽 30여리 되는 곳에 진지를 베풀자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그만 만족하고 돌아가라[知足願云止].'는 도교(道敎)의 경구를 인용한 시를 적어 보냈다. 계략에 빠진 것을 알아차린 우중문이 철수하기 위해 살수를 건너자 을지문덕은 미리 매복시켜 놓은 고구려의 기병들과 궁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려 수나라 군사들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30만에 달했던 수나라 군사 중 불과 2천 7백여명만이 살아서 요동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우중문의 패전(敗戰)은 제2차 수여전쟁(隨麗戰爭)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이로써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정복전(征服戰)을 계획했던 양제는 참패만을 당한 채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패전을 뼈아프게 여긴 그는 이듬해인 613년 4월에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3차 수여전쟁을 감행한다. 이 때에도 요동성을 포위했으나 6월에는 다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양제가 고구려를 향한 친정(親征)에 나선 틈을 이용해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켜 10만 대군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수나라 내부에는 고구려 정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중국인들은 수나라의 수백만 대군을 몰살시킨 고구려의 저력에 근본적인 공포감을 갖게 되었고, 이런 공포감이 정벌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후방이 불안해진 양제는 곧 군사를 돌려 반란군 토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양현감의 반란을 겨우 진압한 양제는 이듬해인 614년에 다시 거병하여 고구려를 공략했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수나라가 전력을 기울인 수여전쟁이 결국 수나라의 패배로 끝나고 만 것이다.

220년 조비(曺丕)가 후한을 멸망시킨 후 무려 370여년에 걸친 삼국시대(三國時代)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남북조(南北朝)의 분열시대를 종식시키며 중원을 통일했던 수는 이제 고구려 공략의 실패로 통일 과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문제(文帝)와 양제(煬帝)의 거듭된 패배는 통일제국 수(隨)의 내부를 무너뜨려 사방에서 봉기(蜂起)가 잇달았다. 결국 양제는 제위 14년만인 618년 3월, 호위대장이었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고, 이와 함께 통일제국 수나라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건국한 지 불과 30여년만이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북방의 패자(覇者) 고구려와 남방의 패자 수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수여전쟁(隨麗戰爭)은 결국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고구려는 북방의 여러 민족, 국가를 다스리는 자신들의 천하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천제(天帝)의 자손을 자청했던 시조 추모왕(鄒牟王)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전쟁

① 영류태왕(榮留太王)의 대당(對唐) 저자세 외교에 대한 반발

수나라의 붕괴는 중국 정세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양제(煬帝)가 죽고 두달 후에 북방의 유주자사 출신 무장인 이연(李淵)이 남하해 칭제(稱帝)를 하고 당나라를 건국했다. 그가 곧 당(唐)의 초대 황제인 고조(高祖)였다. 그리고 그의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은 무덕(武德) 9년(서기 626년)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으로 자신의 형인 태자 건성(建成)과 동생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부황(父皇)으로부터 양위받은 태종(太宗)은 내부의 반란을 모두 진압한 후 정관(貞觀) 7년에는 돌궐(突厥)까지 정복해 주변의 이민족들까지 복속시켰다. 태종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불리는 안정된 평화시대를 구가했다. 주변의 모든 이민족들이 태종에게 굴복했다.

영양태왕(嬰陽太王)의 이복동생으로서 고구려의 스물일곱번째 임금이 된 영류태왕(榮留太王)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북방의 패자로서의 고구려를 유지하려 하기 보다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영류왕조(榮留王條)에 따르면 함통(咸通) 2년, 4년, 5년, 6년, 7년에 거듭 당에 사신을 보냈고, 함통 8년에는 당에 불교와 도교의 교법(敎法)을 구했으며, 함통 9년에는 신라와 백제가 당나라에,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다."고 항의하자 당에 사과하는 글월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행위들은 당의 천하관에 맞서온 고구려의 천하관을 포기하는 행위였다.

영류태왕(榮留太王)은 함통(咸通) 11년 당황(唐皇) 태종(太宗)이 돌궐(突厥)의 국왕인 힐리가한(詰利可汗)을 사로잡은 승전(勝戰)을 치하하면서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를 바치기까지 했다. 이는 수나라와 전쟁을 치른 지 몇년 안 되는 상황에서 그 뒤를 이은 객관적 적국(敵國)에게 군사기밀인 지도를 보낸 것으로서 이미 대립을 포기한 행위였다. 한편 영류태왕은 당나라의 침략을 우려해 함통 14년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완성한다. 하지만 이 역사(役事)는 선왕(先王)인 영양태왕(嬰陽太王)이 시작한 것으로서, 영류태왕이 이를 계속한 것은 단지 국내 항전론자들의 반발을 우려한 데 지나지 않았다.

같은 해에는 또 대수(對隨) 전승기념탑인 경관(京觀)을 당나라의 요청에 의해 헐어 버렸다. 경관이란 수나라와의 전쟁 당시 전사한 고구려 군사 혹은 수나라 군사들의 유골을 한데 모아 만든 거대한 무덤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전몰 기념무덤, 또는 기념탑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이를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전공(戰功)을 기리기 위해 고구려인들이 세운 승전(勝戰) 기념물로 보고 있다. 즉 세계 최강대국 수나라와 전쟁을 벌여 이겼으며, 끝내는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던 고구려인들의 자부심이 담긴 성역으로서 오늘날의 국립묘지 같은 곳이 경관이었다. 이런 성지(聖地)를 당나라의 요청에 의해 헐어 버린 영류태왕에 대해 수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했던 무장들이 주축을 이룬 대당(對唐) 강경파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처럼 대당 굴욕외교를 거듭하던 영류태왕은 급기야 함통(咸通) 23년에 당나라에 태자 환권(桓權)을 보내 조공하기에 이른다. 태자까지 보내 입조(入朝)하자 당황(唐皇) 태종(太宗)은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답례사로 보냈다. 그러나 진대덕은 답례사(答禮使)라기보다는 당나라의 간첩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대덕은 역로(歷路)의 성읍마다 그 관수자(官守者)에게 예물을 주면서 고구려의 산천과 지형을 염탐했다. 심지어 고구려와의 전쟁 때 포로가 된 중국인들을 만나 중국 내 친척들의 동향을 전해주기도 했다. 삼국사기는 '진대덕은 사신을 받드는 예절에 의해 아국(我國)의 허실을 엿보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쓰고 있지만, '진대덕이 가는 곳마다 사녀(士女)들이 길 좌우에 늘어서서 보았다.'는 그 다음 구절은 진대덕의 행위가 비밀리에 진행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귀국한 진대덕이 "고구려가 고창(高昌; Turfan)의 멸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사신 접대가 보통 이상으로 후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태종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고구려는 본래 사군(四郡)의 땅이다. 내가 수만의 군사를 내어 요동(遼東)을 치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모든 국력을 기울여서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 때에 수군을 동래(東萊)에 보내 바닷길로 평양으로 가서 수군과 육군을 합치게 하면 고구려를 빼앗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산동(山東) 주현(州縣)들이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려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영류왕(榮留王) 24년조

당황(唐皇) 태종(太宗)은 이처럼 고구려가 아무리 저자세 굴욕외교로 나와도 내부 여건만 갖추어지면 언제든지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대덕이 돌아간 이듬해인 함통(咸通) 25년 정월에 영류태왕(榮留太王)은 또 다시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고, 같은 해 대당 강경파의 우두머리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장성(長城) 축조 감독으로 보낸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무력(武力)으로 영류태왕을 축출할 것을 결심하고 정변(政變)을 일으킨다. 정변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그 부친인 동부(東部)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蓋蘇文)이 마당히 그 자리를 잇게 되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 성품이 잔인하고 모질다고 미워하여 그 자리를 얻지 못했다. 개소문은 여러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그 자리에 임시로 있어 보아서 만일 불가한 일이 있으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간청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가엾게 여겨 허락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자리를 이은 개소문은 흉포하고 잔인하여 부도(不道)하므로 여러 대인(大人)들이 군왕과 몰래 의논해 그를 죽이려 했는데 일이 누설되었다. 개소문이 동부의 군사를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면서 성의 남족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베풀어 놓고 모든 대신들을 초청해 함께 관람하고자 했다. 그러나 손님들이 오자 개소문은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 때에 피살된 자가 1백여명이나 되었다. 개소문은 이어 궁중으로 달려가 군왕을 시해한 다음 그 몸을 몇 토막으로 잘라 개천 속에 버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연개소문(淵蓋蘇文) 편

대당(對唐) 화친책을 추구하는 영류태왕과 그 측근들이 대당 강경파인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이 역습하여 영류태왕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정변 이후 연개소문의 모습에 대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말에 오르내릴 때마다 항상 귀족이나 장수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으며...", "출행할 때에는 반드시 대오(隊伍)를 벌려서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긴 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구렁텅이나 골짜기라도 가리지 않고 달아났으니, 나라 사람들이 심히 괴롭게 여겼다."고 부정적으로 묘사했으나 "나라 일을 제멋대로 하는데 매우 위엄이 있었다."는 또 다른 묘사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이는 연개소문이 정변 후 강력한 대당 항전체제를 갖춘 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은 단순한 쿠데타라기보다는 대당 굴욕외교로 일관한 영류태왕(榮留太王)과 이를 다르는 권신들에 대한 대당 강경파의 군사정변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고구려의 천하관을 포기한 대당(對唐) 저자세 외교세력에 대한 고구려 독자의 천하관이라는 세계관을 가진 고구려 전통세력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영류태왕은 고구려 독자의 천하관을 포기한 정치세력의 대표였는데, 이들은 개국 이래의 독자적 천하관을 포기하고 당나라에 대한 유화정책으로써 존속을 도모하는 정치세력이었다. 서로 세계관이 다른 두 세력의 충돌이 바로 연개소문의 정변이었던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은 왜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을까?

유교적 사관을 가진 김부식은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한 연개소문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할 때 참고한 자료들이 대부분 연개소문을 적대시했던 중국 측 문헌이었던 점도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 묘사에 한몫을 했다. 삼국사기는 중국의 사서(史書)인 자치통감(資治通鑑)과 북사(北史), 수서(隨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을 자료로 인용해 연개소문과 대당항쟁(對唐抗爭)에 대해 기술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11세기 후반에 편찬한 자치통감에 많이 의지했다. 물론 당시 고구려 측의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의 시작도 이런 사관을 반영하는 증거의 하나다. "개소문(혹은 개금(蓋金)이라 한다.)의 성(姓)은 천씨(泉氏)인데, 자칭 수중(水中)에서 출생했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을 미혹하게 했다."

연개소문의 성을 천(泉)으로 기록한 것은 현재 중국 하남성 개봉도서관(開封圖書館)에 있는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男生) 등의 묘지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는 당(唐)의 건국자인 고조(高祖)의 이름이 이연(李淵)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천씨라고 기록한 것뿐이다. 자치통감은 '고려(高麗)의 동부대인(東部大人) 천개소문(泉蓋蘇文)이 그 국왕을 시해했다. 천(泉)은 성(姓)이다. 신서(新書)에서 말하기를, 개소문이란 자는 혹 개금으로도 불린다. 성이 천씨인 것은 그 스스로 물속에서 출생했다고 해서 여러 사람들을 미혹시켰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신당서의 내용을 그대로 베낀 것뿐이다. 즉 삼국사기에 그려진 연개소문의 모습은 고구려인들이 그린 연개소문의 참모습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적국인 당나라 사람들이 덧칠한 모습인 것이다.

일례로 물 속에서 출생했다고 여러 사람들을 미혹케 했다는 기록도 중국인들의 의도적인 폄하이고 사실은 고대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이 가지고 있던 시조전설의 하나로서 연씨 집안에 내려오는 가문 전설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연개소문의 성이 연씨(淵氏)인 것은 주몽(朱蒙)의 어머니가 물의 신 하백(河伯)과 관련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조가 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② 고구려 중심과 중원 중심, 두 세계관의 충돌

대당(對唐) 강경파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집권 후 영류태왕(榮留太王)의 대당 화친책을 버렸다. 그러나 무작정 강경책만 쓴 것은 아니었다. 연개소문은 개화(開化) 2년(서기 643년) 3월 보장왕(寶臧王)에게 "삼교(三敎; 유교, 불교, 도교)는 발이 셋 있는 솥[鼎]처럼 그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유(儒), 불(佛)은 성하지만 도교(道敎)는 그렇지 못하니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도교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고 요청했다. 이는 연개소문이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유지하면서도 전술의 유연성을 구사할 줄 아는 노련한 정치인이었음을 보여준다. 당황(唐皇) 태종(太宗)은 이에 응해 도사 숙달(淑達) 등과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주는 정치적 제스처로 맞섰다. 그러나 그는 연개소문 집권 후 고구려의 정치체제가 급변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영류태왕 체제가 당나라의 천하관에 포함되어 존속을 도모하는 체제라면 연개소문 집권체제는 당나라와 맞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려는 체제라고 느낀 것이다. 태종은 당나라와 고구려, 즉 두 천하가 병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해 윤6월 태종이 "연개소문은 그 임금을 죽이고 국정(國政)을 제 마음대로 하니 진실로 참을 수 없다."며 고구려 침공 의사를 보인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에 대해 측근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연개소문은 자기의 죄가 큼을 스스로 알고 대국(大國)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엄하게 수비하고 있으니 폐하께서 아직 꾹 참고 계시면 그는 스스로 안심하고 반드시 교만하고 나태해질 것이니, 그런 뒤에 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말려 일단 중단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중지였다.

태종은 고구려가 확실하게 신속(臣屬)하지 않는 한 고구려를 정복함으로써 당나라 중심의 세계 질서를 수립해야 한다고 믿었다. 태종이 644년, 드디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군신들이 이 전쟁에 반대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근본을 버리고 곁가지[末]를 취하며, 높은 데를 버리고 낮은 데를 취하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는 이 세가지는 모두 좋지 않은 것이다. 고구려를 치는 것이 이러함을 나도 안다. 하지만 개소문(蓋蘇文)은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했으니 한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늘이고 구원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보장왕(寶臧王) 3년조

그런데 연개소문을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했다."며 비난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역시 전술한 대로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한 인물이다. 그는 626년, 수도 장안(長安)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에서 형인 태자 건성(建成)과 동생인 제왕(齊王) 원길(元吉)을 직접 살해하는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놀란 부황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양위의 형식을 취했으나 실제로는 강제 축출된 셈이었다. 태종이 재위했던 시기를 중국에서는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여 태평성대(太平聖代)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시대를 다룬 정관정요(貞觀政要)가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지만, 아버지를 내쫓고 친형제들을 살육한 그가,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한 것'을 들어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것은 진정 명분이 될 수 없었다.

사실 연개소문과 태종의 격돌은 예고된 것이었다. 그것은 두 개인의 충돌이라기보다는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세계관의 충돌이었다. 중국 대륙에서 통일왕조가 들어서면 동아시아 전체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려 하게 마련이었다. 중국인들은 중화사상(中華思想)으로 표현되는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건흥(建興) 3년(서기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훈적비(勳積碑)인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은 "옛날에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물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이었다."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 왕실이 중국의 황실처럼 스스로를 천자(天子)로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에는 또 "영락대왕(永樂大王; 廣開土好太王)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력은 사해(四海)에 떨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또한 고구려가 사해(四海)의 주인공이라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아신왕(阿辛王)의 항복을 받아내고 60여개의 성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나아가 신라에 침범한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복속시켰고, 북쪽으로는 거란(契丹), 숙신(肅愼), 동부여(東扶餘)를 정벌하고 후연(後燕)과의 전쟁에 승리하여 요서 지역까지 고구려의 세력권을 넓혔다. 이처럼 고구려가 주변국과 이민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고구려의 자국 중심 천하관이었다.

이에 대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이렇게 설명했다.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公理)요, 정리(定理)다.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서 비록 다수한 종족이 대립했으나 다 무무미개(貿貿未開)한 유목의 만족(蠻族)들이라 (중략) 토착의 민족으로 장원(長遠)한 역사와 발달한 문화를 가진 자는 지나(支那)와 조선이니,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 하면, 반ㄷ시 피차 내부의 분열과 불안이 있어 각히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일 것이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고구려(高句麗) 대당전역편(對唐戰役編)

이 때는 수나라와 당나라가 모두 강력한 정치체제를 갖춘 때였으므로 신채호의 말대로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물론 고구려가 중국에까지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다만 자신들이 만주 일대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천하의 주인공이라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중국으로서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중국의 통일왕조들은 고구려까지 자신들이 관할하는 천하의 범주에 넣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양자의 세계관이 충돌한 것이 수여전쟁(隨麗戰爭)과 당여전쟁(唐麗戰爭)이었던 것이다.

당초 당나라의 초대 황제인 고조(高祖)는 고구려 정벌을 회피하려 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고조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실(名實)은 서로 상부해야 한다. 고구려는 수(隨)에 칭신(稱臣)했지만 끝내 양제(煬帝)를 거부하고 말았다. 어찌 이런 신하가 있겠는가? 짐은 만물 중에 공경받지만 교귀(驕貴)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영토 안에서 모든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힘쓸 뿐이지 어찌 반드시 (고구려로 하여금) 칭신하도록 하여 스스로 존대(尊大)함을 자처하겠는가?"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조

고구려를 자국의 천하관 내에 두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통일왕조 당나라로서는 고구려를 예외적인 존재로 인정하면 중화적 세계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고민이 있었다. 고조의 이런 언급에 대해 신하들이 "고구려 땅은 주(周) 왕조 때에는 기자(箕子)의 나라였다."든지 "한조(漢朝) 때에는 현도(玄菟)였다."는 논리로 일제히 반박하고 나선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황(唐皇) 고조(高祖)는 수나라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 정벌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집권한 태종(太宗)은 달랐다. 그는 고구려를 정벌해 명실상부한 천자(天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무문의 정변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해 주리라고 믿었다.

당황(唐皇) 태종(太宗)은 고구려 정벌의 구실을 고구려의 신라 공격에서 찾았다. 고구려로 출병하던 해인 644년에 태종은 현장(玄裝)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를 이렇게 위협했다.

"신라는 우리 나라에 귀의하여 조공이 끊이지 않으니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각기 전쟁을 중지하라. 만일 또다시 신라를 친다면 내년에는 군사를 발하여 너희 나라를 정벌할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보장왕(寶臧王) 3년조

신라와의 전쟁을 중지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앞서 장수태왕(長壽太王)이 427년에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遷都)한 이후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신라는 진흥왕(眞興王) 재위 12년(서기 551년)에 한강 유역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했으며 함경도 일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잃어버린 한강 유역의 영토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가 홍무(弘武) 14년(603년)에 북한산성을 공격한 것도 이 지역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자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은 608년과 611년에 거듭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했고, 수황(隨皇) 양제(煬帝)는 이듬해인 홍무(弘武) 23년(612년)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하였다.

현장이 고구려 경내에 들어선 것과 같은 시기에 연개소문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두 성을 쳐서 빼앗았다. 이는 당나라의 황제 태종에 대한 군사적 시위였다. 현장이 연개소문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타이르자 연개소문은 현장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신라와 간극이 벌어진 지는 벌써 오래다. 지난번 수나라가 쳐들어왔을 때에 신라는 그 틈을 타서 우리 땅 5백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차지했으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아마 싸움을 그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보장왕(寶臧王) 3년조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말과는 달리 신라가 그 땅을 빼앗은 것은 수나라가 침공했을 때가 아니라 551년의 일이었지만 이 땅을 되찾는 것은 고구려의 숙원이었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때에 신라의 권신 김춘추(金春秋)가 백제 공략을 요청하자 그 땅을 되돌려줄 것을 선결요건으로 제시하며 억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즉 당나라로서는 고구려가 들어줄 수 없는 요구 조건을 내건 것이었고, 예상대로 연개소문이 이를 거부하자 태종은 전 국력을 기울여 직접 대군을 몰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려 하자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때에 종군했던 전 의주자사 정천숙(鄭天璹)이 "요동(遼東)은 길이 멀어 양곡을 수송하기가 어렵고 동이(東夷)는 수성(守城)을 잘하여 갑자기 항복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반대했으나 태종은 "지금은 수(隨)에 비할 바가 아니니 공(公)은 나의 뜻을 쫓기만 하라."며 침공을 강행했다.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한 진정한 이유는 그 자신이 지금의 하북(河北)인 정주(定州)에 도착해 시신(侍臣)들에게 한 말에 잘 드러난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隨)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지만 취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동정(東征)함은 중국을 위하여 자제(子弟)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하여 군부(君夫)의 치욕(恥辱)을 씻으려 할 뿐이다. 또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아직 늙기 전에 이를 취하려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보장왕(寶臧王) 4년조

여기서 태종이 말하는 '군부의 치욕'이란 연개소문이 정변으로 영류태왕(榮留太王)을 시해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군부의 치욕' 운운은 그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를 배앗은 점에 미루어 볼 때 자기 합리화를 위한 명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 침공의 진정한 이유다. 그리고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려는 고구려로서는 당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두 나라는 이렇게 충돌했던 것이다.

③ 당(唐)의 고구려 침략과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

당황(唐皇) 태종(太宗)이 서기 645년 3월 대군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건너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당여전쟁(唐麗戰爭)이 개시되었다. 태종은 양제(煬帝)가 병력이 많은 것만 믿고 무작정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로 하여금 당군의 진로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세적(李世勣)의 군대가 유성(柳城)을 떠나 크게 형세를 벌이고 회원진(懷遠鎭)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여 군사를 숨겨 북쪽으로 용도(勇道)로 가서 우리가 예상치 못한 때에 나타나려 했다. 4월에 이세적의 군대가 통정(通定)에서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니 우리의 성읍(城邑)이 크게 놀라 모두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기만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보장왕(寶臧王) 4년조

교모한 기습전(奇襲戰)에 놀란 고구려군이 '성문을 닫고' 어쩔 줄 모르는 틈을 타서 당나라 군사들은 개모성(蓋牟城)을 공격, 함락시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태종은 성민(城民) 1만명을 생포하고 양식 10만석을 탈취했으며, 개모성을 당나라의 행정구역인 개주(蓋州)로 편입시켰다. 개모성을 개주로 편입시켰다는 고구려에 조공(朝貢)을 기본으로 하는 형식적인 왕조체제마저도 두지 않고 자신들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당황(唐皇) 태종(太宗)의 친정군(親征軍)은 개모성 함락의 여세를 몰아 고구려 서북방 최대의 요충지인 요동성(遼東城)을 포위, 공격했다. 이 때 연개소문은 신성(新城)과 국내성(國內城)에서 4만의 군사를 차출해 구원병으로 보냈지만 실패하고, 그 해 5월 하순 요동성은 함락되어 1만의 군사가 전사하고 남녀 백성 4만여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50만석의 군량을 빼앗기고 만다.

요동성이 함락되자 동북쪽의 백암성(白巖城) 성주 손대음(孫代音)은 스스로 항복하고,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卑沙城)도 장량(張亮)이 지휘하는 당나라의 수군에 의해 정복되는 등 불운이 잇따라 고구려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된다. 태종은 그 해 6월 20일 지금의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측되는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했다.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는 당과 고구려의 운명을 건 대회전(大會戰)이었다. 연개소문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과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에게 15만 대군을 주어 안시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 때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가 "지연전술을 쓰면서 당군의 보급로를 끊어 식량이 떨어지게 하자."고 제안했으나 고연수는 이를 무시하고 정면승부를 벌이다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패배로 고연수와 고혜진은 무려 3만여명의 군사를 잃고 3만 6천여명의 군사와 함께 항복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패전(敗戰)에도 안시성을 지키는 고구려의 군사들은 굴하지 않았다. 태종은 운제(雲梯), 투석기(投石器), 충차(衝車) 등 온갖 공성구(攻城具)를 동원해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자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해 60여일간 쉬지 않고 흙을 쌓아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土山)을 만들었다. 그런데 고구려군은 토산 일부가 무너진 틈을 타 오히려 이를 빼앗아 버렸다. 당군은 토산을 다시 빼앗기 위해 3일간 총공세를 펼쳤으나 실패했고, 토산을 탈취당한 것은 당나라의 모든 공성작전(攻城作戰)이 실패로 끝났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로써 태종은 안시성 공취(攻取)를 포기하고 그 해 9월 18일에 철군을 결정했다.

태종이 철군하는 이유를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당주(唐主)는 요동지방이 일찍 추워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兵馬)가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하려 하므로 군사를 거두게 했다.'고 중국의 기록을 인용해 적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김부식은 태종의 사망(649년) 사실을 전하면서 유공권(柳公權)의 말을 인용해 당군의 진짜 철군 이유를 적고 있다.

유공권의 소설에, "주필산(駐馝山)의 전투에서 고구려인과 말갈족을 합친 군대가 40리에 뻗치었는데, 태종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또 육군(六軍)은 고구려에 패배해 거의 떨치지 못했고, 염탐하는 자가 고하기를 "이세적(李世勣)이 거느리는 흑기(黑旗)가 포위되었다고 하자 당주(唐主)가 크게 두려워했다."고 했다. 비록 스스로 빠져 나왔으나 저처럼 위험했는데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위하여 수치를 감춘 것이 아닌가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보장왕(寶臧王) 8년조

즉 당군은 매번 승리하다가 단 한 차례 안시성에서의 패배로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당나라 황제 자신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구당서(舊唐書)는 오대(五代) 후진(後晉) 때 편찬된 사서고,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송(宋)에서 편찬된 사서인데, 편찬의 토대가 되는 기본 사료는 둘 다 당(唐)에서 작성한 사료다. 당연히 당의 기록에는 태종의 패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 후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당황(唐皇) 태종(太宗)이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눈이 멀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1천여년이 흐른 후에도 중국에서 태종이 당한 치욕적인 패배에 관한 구전(口傳)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나라 군사의 철군 이유 중 '양식이 다하려 하므로 군사를 거두게 했다.'는 기사는 고구려군이 당군의 보급로를 차단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당나라의 수군에 관한 기록이 비사성을 점령한 것 외에는 없다는 사실은 당 수군이 더 이상 승리하지 못했고, 이는 당 수군이 고구려 수군에 패해 식량 보급이 차단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앞서 개모성과 요동성에서 당군이 무려 60만석의 식량을 빼앗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양식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겠으나 '양식' 운운하며 철군을 단행한 것은 두 성에서의 승전(勝戰) 기록이 과장되었거나 이 양식을 다시 고구려군에게 빼앗겼기 때문일 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이 때 연개소문이 북경 북쪽의 상곡지방을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군이 안시성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중국 대륙을 기습 공격했음을 의미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태종이 커다란 두려움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 자신들이 요동에서 고전하는 동안 고구려군이 중국 내지를 공격하면 자신들은 그야말로 양쪽에서 포위당하는 처지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수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나라가 망할 수도 잇었기 때문에 부랴부랴 철군한 것이었다.

안시성주(安市城主)의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전하지 않는데, 김부식(金富軾)도 "그 성주는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史記)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않으니 (후략)"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의 유신(儒臣) 송준길(宋俊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에는 현종(顯宗)이 안시성주의 이름을 묻자 '양만춘(梁萬春)'이라고 대답하는 기록이 나온다. 현종이 그 근거를 묻자 "돌아가신 부원군 윤근수(尹根壽)가 중국에서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을 봤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또한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안시성주는 양만춘(梁萬春)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윤근수는 1572년 명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고 박지원도 1780년에 청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 때 중국에서 들은 내용들이다.

태종은 결국 굴욕을 무릅쓰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태종은 안시성주 양만춘에서 비단 100필을 주고, 또 연개소문에게도 궁복(弓服)을 주었다고 사서의 기록이 전하는데, 대륙의 황제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살리려 한 것이지만 이는 패장(敗將)의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태종이 철군길을 요하 하구로 잡은 사실도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물론 요하 하구가 안시성에서 중국 대륙으로 철군할 때 거리상으로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기는 하겠지만 이 곳은 갯벌이 펼쳐진 늪지대여서 많은 장비를 지닌 군사들이 지날 만한 길은 아니었다. 실제 이 곳은 '진흙과 물이 있어 마차가 통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아야' 건널 수 있는 곳이었고, 태종 자신이 '스스로 말의 칼집에다가 장작을 매어 일을 도와야 할' 정도였고, '풍설(風雪)이 사나와 사졸(士卒)이 얼어 죽는 자가 많았다.'는 험로였다. 굳이 이런 길을 선택한 것은 이 길 이외의 다른 길은 고구려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대문이라는 걸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당황(唐皇) 태종(太宗)과 연개소문(淵蓋蘇文) 사이에 동북아시아의 운명을 두고 벌어졌던 이 대회전(大會戰)은 태종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만을 안긴 채 연개소문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중국 측 기록들은 승자인 연개소문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당주(唐主)가 돌아가려고 할 때 궁복(弓服)을 주었는데, 연개소문은 이를 받고도 사례하고 않고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후략)'라는 기록은 한 예다.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난 후 장안으로 돌아와 이정(李靖)이란 신하에게 "내가 천하의 군사로서 작은 오랑캐에게 괴로움을 당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작은 오랑캐란 물론 고구려를 말하는 것이고, 직접적으로는 연개소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645년 11월 장안으로 돌아온 태종은 연개소문에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2년 후인 647년에 이세적 등을 시켜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에도 설만철(薛萬徹)을 시켜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泊灼城)을 공격하게 하지만 이 역시 실패하고 만다. 드디어 649년 5월 태종은 재위 23년만에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시에도 고구려 정벌을 후회하며 "만일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다면 나에게 이 원정을 하지 못하게 충고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여전쟁(隨麗戰爭), 당여전쟁(唐麗戰爭)의 승리는 고구려가 자국의 힘으로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켜냈음을 의미한다. 남방의 패자(覇者) 수(隨), 당(唐)에 맞선 북방의 패자 고구려(高句麗)는 지력으로 두 통일제국과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앞서 고구려 장수 고연수(高惠眞)와 고혜진(高惠眞)이 3만 6천여 군사와 함께 항복했을 때 태종(太宗)은 고구려 군사들은 살려주는 대신 말갈군사 3천 3백여명은 따로 골라내 생매장으로 학살했다. 이는 당나라가 아닌 고구려의 천하관에 복속하는 이민족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의미가 포함된 것이었다. 그만큼 당나라는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의 존재에 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승전(勝戰)의 대가 또한 너무 컸다. 당황(唐皇) 태종(太宗)이 죽은 후에도 당나라와 고구려 간의 국지전(局地戰)은 계속되었는데 당황(唐皇) 고종(高宗)은 658년 6월 정명진(程名振), 설인귀(薛仁貴)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으며, 이듬해 11월에도 설인귀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665년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사수(蛇水) 언덕에서 접전을 벌여 당나라 군사 1만여명을 전멸시키고 적장 방효태(龐孝泰)와 그의 아들 13형제를 모두 전사하게 하는 승전(勝戰)을 올렸다. 그렇지만 계속된 전쟁은 고구려의 국력을 소진시켰으며, 동아시아에서 독자적 천하관을 유지하는 대가는 그만큼 컸다. 그리고 이것이 고구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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