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 위안부 .. 일본은 사죄하라 ★★ (꼭 읽어주세요...충격적 사진,증언 有)

딩동2011.09.24
조회25,669

톡됬네요 감사합니다!!

쓰고 나서 톡됬으면 좋겠다 ..하고 다시 와봤었는데 추천이 별로 없더라구요..

그래서 아..걍 묻히는가보다 했는데 또 와보니까 댓글도 많이 달아주시고 추천도 많이 해주셨네요 반대도 하나도 없네요..

진짜 감사합니다.ㅠㅠ 댓글 달아주신 분들 다들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할머니들을 위해서 뭐 할 수 없냐는 분들

수요집회 나가서 도와드리세요... 저도 그 이외엔 잘 모르겠어요..ㅠㅠ

 

http://www.hermuseum.go.kr/main.asp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

여기 들어가면 정보가 좀 나올듯..

 

위안부 박물관도 생긴다 합니다 (처음에 지으려고 했던거는 정부가 허락을 안했다네요 ㅡㅡ )

이번에 시사매거진 그 티비프로그램에 위안부를 주제로 다뤘던데 보고싶은 분들은 다시 보세요.

 

우리나라가 이 사실을 숨기려고만 하지 말고 진짜 어떻게든 해서 할머니들 돌아가시기전에 일본한테 사죄받았으면 좋겠어요...ㅠㅠ

 

일본 대사관도 수요일마다 커튼 치지 말고 뭐라 하는지 좀 들어라 ㅡㅡ 연세도 많으신 할머니분들이매주 와서 집회하는데 커튼치고 나몰라라 진짜 재수없다 ㅡㅡ

 

더많이많이 추천 부탁드릴께요 ㅠ0ㅠ...

 

아 글구 이글 뭐 허락같은거 없고 아무곳으로나 퍼가셔도 됩니다..

 

▲ 임신을 해 일본군들에게 살해당한 한국 여성

 

 

(놀라셨나요?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조금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걸로 시작을 해야 많이 읽어주실 것 같아서요)

 

 

안녕하세요 톡커님들 ^^

들어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처음 판을 쓰는18살 여고생입니다.

 

 

조금 길지만 우리 나라를 위해서 ,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서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위안부'라고 들어보셨나요?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군들은 한국의 어린 여성들을 납치해 강간했습니다.

 

이 여성들은 "쌀밥을 많이 먹을 수 있고 돈을 많이 번다" 는 얘기에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일본군 위안소'였습니다.

이 내에서 이루어진 강간 행위는 강제로 위안부 피해자가 된 수 많은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으로 여성을 비인간화하였습니다.

 

 

소녀들은 당시 16~ 24 세 였습니다.

 

중국숭산의 한 언덕에서 연합군에 포로된 네명의 일본군 성노예 여성들과 중국 국민당 정부군 병사가 대피소 앞에 서 있다. 맨 오른쪽의 임신한 여성이 북한의 박영심 할머니(2006년 8월 7일 작고)

 

전선의 이동으로 일본군 무개트럭에 실려 이동하는 조선인 위안부들

 

전쟁 당시 전쟁이 확대되고 군인의 수가 점점 증가하면서 일본군 위안부도 더욱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본은 식민지의 여성을 손쉽게 동원함으로써 위안부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옛 일본군 군의관인 아소 테츠오의 증언에 따르면 1938년 12월 상해 위안소에 있던 대부분 피해자들이 조선인이었다고 합니다.

 

위안소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일본 군인들     위안부 피해자들은 규칙과 상관없이 군인을 상대해야 했으며, 군인의 요구를 거부하기라도 하면 매질을 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규정상 군위안부를 구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군인이나 관리자들의 폭행은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피해자들은 그때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으며 폭행으로 인한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 .. 일본은 사죄하라 ★★ (꼭 읽어주세요...충격적 사진,증언 有)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 할머니.    “일본 정부가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위안부 피해자들이 다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려는 속셈인가 봅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눈을 못 감을 것입니다.”  

“일본군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짐승처럼 부려 먹었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습니다. 아직도 내 등에는 군인이 칼로 찌른 상처가 있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 .. 일본은 사죄하라 ★★ (꼭 읽어주세요...충격적 사진,증언 有)

 

베를린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 모임에서 길원옥 할머니

 

 

 

 

 

 

 

<전 일본군 위안부였던 정옥선 할머니의 증언, 74세>


나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에서 1920년 12월 28일에 태어 났어요.

13세 였던 6월 어느 날

논에 나가서 일하시는 부모들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물을 길러 마을로 갔습니다.

이때 무장한 일본군 한명이 나를 붙잡아 끌고 갔습니다.


부모님은 딸에게 무슨일이 일어 났는지 전혀 모르시고 계실 겁니다.


트럭에 실려 주재소로 끌려가서 거기서 여러 명의 헌병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내 입에 양말을 쑤셔 넣고는 계속 그 짓을 했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울자 주재소장이 내 왼쪽 눈을 갈겼고,

그 후로 왼쪽 눈은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지요.

열흘 쯤 지나서 혜산시의 군부대 막사로 옮겨졌습니다.


그 곳에는 약 400명의 조선의 어린 소녀들이 있었고

우리는 매일 성 노예로 일본군 5,000명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에 40명까지....


저항하면 그 놈들은 두들겨 패고 입에 넝마를 집어 넣었습니다.
한 놈은 내가 굴복할 때 까지 내 성기에 성냥을 그어 댔습니다.
밑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지요.


한 조선소녀는 왜 하루에 40명까지 되는 많은 병사를 상대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그 벌로 야마모도 일본군 사령관은 그녀를 칼로 벨 것을 명령하였지요.


우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소녀는 발가 벗겨진 채, 손발이 묶여 못이 밖힌 판이
살점과 피로 범벅이 될 때까지 그 위에 몸을 굴렸습니다.

결국에는 그 소녀의 목을 베었지요.


다른 야마모또는 우리들에게

' 너희들을 죽이는 건 개를 죽이는 거 보다 쉬운 일이야'

라고 말했지요.

그놈이 '배가 고파서 너희들이 울고 있으니 인간 살점을 끓여서
먹여라' 고 하는 소리를 들었지요.


다른 조선 소녀는 수차례의 강간으로 인해 성병에 걸려

50명 이상의 일본군에게 전염이 되었지요.

병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놈들은 뜨겁게 달구어진 쇠막대를
소녀의 성기에 집어 넣었습니다.


어느 날 우리들은 40명을 트럭에 태워 멀리 뱀이 들어 있는 웅덩이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한 명씩 웅덩이에 빠뜨리고 흙으로 덮어서 생매장을 하였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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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 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 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그 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 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 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 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이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문신은 온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또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천황의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 일본군 위안부 .. 일본은 사죄하라 ★★ (꼭 읽어주세요...충격적 사진,증언 有)

 

생존 할머니의 신체사진

 

 

 

 

 

 

정서운 할머니의 증언

 

저는 경상남도 하동에서 꽤 부자집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는 나를 일본학문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일본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정교사를 통해서 한자와 한글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또 창씨 개명도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무기로 만들기 위해 놋그릇을 공출하게 했는데, 저의 아버지는 그것도 하지 않고, 밤에 남몰래 집에서 일하는 일군 몇을 데리고 논을 깊이 파서 그 곳에 녹그릇을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들통이 나서 아버지는 경찰서에 끌려가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매일 저는 면회를 갔지만 면회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박 구장(현 이장)이 집으로 와서 제가 일본 방직공장에 가면 아버지는 석방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공장으로 가는 그 날, 아버지는 바로 석방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지 않으면 저의 아버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15세였습니다. 

저와 함께 악양면 면장딸도 함께 갔는데, 그 면장은 주재소 소장으로부터 악양면에서 처녀공출량을 할당받자 주재소 소장의 따귀를 때리고 사표를 냈습니다. 

그 이유로 면장의 딸도 저와 함께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에 의해 부산까지 와서 부산에서 큰 배를 타고

일본의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였습니다.

내려보니 보초가 있는 큰 창고에 약 천명정도 되는 처녀들이 갇혀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그런 창고가 여러개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이 공장이 아님을 금방 알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제 길게 따내린 머리를 짤렸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3번씩 김으로 싼 주먹밥을 받았는데, 저는 아버지 생각과 집을 떠나온 두려움에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그러나 3일 정도가 지나자 배가 너무 고파서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얼마나 김밥을 질리게 먹었는지 지금도 김밥은 물론 김도 보기 싫어 합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약 15일 정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우리를 번호대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차례대로 굉장히 큰 배에 태웠습니다.

그 배에는 수천명의 여자들이 함께 탔습니다. 

우리가 시모노세키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대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광동으로 갔고, 태국, 방콕, 사이공, 싱가폴을 경유하여 인도네시아 쟈카르타에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뉴기니아, 스마트라, 마랑 등지로 배치되었는데, 배치시키기 전에 자카르타 육군병원에 우리 모든 여성들을 데리고 가서는 자궁속에 뭔가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는지 아래배가 너무나 고통스럽게 아팠습니다. 

그리고 아마 약 3일동안 하혈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를 쉬고 다시 배를 타고 가는데 저는 심한 통증과 하혈로 말할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23명 정도의 여성들과 마랑의 육군부대에 배속되어,

그 부대가 이동하는 대로 따라다니며 운명을 같이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대 안에서 살았으며, 식사도 군인들과 같은 식당에서 함께 하였습니다. 

저하고 함께 간 면장 딸은 뉴기니아로 배치되어 갔습니다.

위안소는 대대마다 하나씩 있었고, 한 위안소에 여자가 20-30명씩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여럿이 한 방을 썼는데, 군인들이 올 때는 포장을 친 각방을 이용하였습니다. 

하루 평균 5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50명 이상을 상대하다 보면 지치고 기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후 다시 군인을 상대하게 합니다. 

그래도 성기가 부르트고 도저히 아파서 걸음도 걸을 수없게 되고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게 되면 주사를 팔에다 놓아주었는데, 알고 보니 마약주사였습니다. 

그 주사를 맞으면 덜 아팠습니다. 

토,일요일에는 100명도 넘는 군인들을 아침 9시부터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시작하기 전부터 4-5대의 마약주사를 제게 맞혔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양쪽 팔에는 이렇게 흙덩이로 뭉쳐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지금도 피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팔은 지금 잘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일본군은 그 짓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0시 이후에는 장교들이 들어와 그들은 술을 먹고 폭력을 휘두르고 자기들 뜻대로 응하지 않는다고 칼을 찌르고 해서 제 온 몸에는 칼자욱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한 장교가 칼자루로 제 팔을 쳐서 뼈가 으스러져 지금 제 팔의 뼈는 제뼈가 아닌 다른 뼈입니다. 가슴에는 아직도 칼자국이 크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담배불로 지져서 제 아래배 양쪽에는 큰 흉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지낸지 한 1년정도 지났을 때 사는 것보다 죽음이 더 나을 것같아 저는 죽을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라리아 병에 걸리면 먹는 약인 ‘근결합’을 한알 한알 모았습니다. 40알이 모이자 저는 그것을 한입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천정이 기우뚱 하더니 그 뒤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깨어났을 때 제 주변에는 제 동료들이 저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2일 동안을 누워 눈,코,입,귀로 피를 쏟으면서 기절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휴유증으로 소화제가 아니면 지금도 음식을 소화해 낼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 위안소에서 저는 기꾸꼬(菊子)로 불렸습니다. 

거의 속옷은 입지도 않았으며, 먹는 것이라고는 알랑미밥에 콩나물 된장국 정도였습니다. 

군위안소에서 가끔 중국인이나 인도네시아 민간인을 불러 부대 내 청소와 빨래 등을 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남양군 총사령관 아베가까가 항복 직전에 폭격을 맞아 죽었으나 산 낭떨어지에서 부딪혀 죽었다고 하는 소문을 퍼뜨린 것을 들었습니다.

그 즈음 23명의 여성들 중 14명은 죽고 9명만 생존해 있었습니다.

일본군인들은 여성들이 몸이 병들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는 몰랐습니다.

어느날 영국군인지 미군인지 모르지만 연합군이 우리를 인수했습니다.

그것도 패전이 임박하자 우리를 방공호에 가둬서 아마도 몰살하려고 했나봅니다.

일본군인 중에도 양심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한국인 군속에게 얘기해서 연합군에 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몰살을 막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또 이 서양놈들에게 당하는가 하고 크게 놀랐습니다.

자카르타로 우리를 데리고 와서 수용소같은 시설에서 약 1년동안 배를 기다리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호열자가 발생했다면서 우리를 한달동안 배안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달이 지난후 연합군 인솔자는 제게 1000원을 주면서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마치 귀신이 나오는 흉가같았습니다.

이웃사람들 얘기로는 아버지는 결국 석방되지 못하고 옥사하셨고, 어머니는 목매달고 자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 혼자였습니다. 반겨주는 사람도, 붙잡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때 저는 마약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결심을 했습니다. 

일본놈들에 의해 마약중독자가 되었는데 돈을 들여 마약을 사먹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두문불출하고 마약을 끊었습니다. 

7개월이 걸렸습니다.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제 이와 잇몸은 모두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신문에 날때마다 저는 그것을 오려서 모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국가가 그런일 없다. 강제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등의 망언들을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저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고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제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제가 아니라 일본 정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부끄러워 할줄은커녕 범죄를 인정도 하지 않고 있으며,

사죄도 배상도 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민간 모금을 해서 우리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하더니 위로금을 반대하니까 이제는 쯔구나이를 지급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돈받기 위해 그렇게 아픈 과거,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리고 꿈마다 나타나는 그 악몽같은 과거를 얘기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40년의 침묵을 깨트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본이 바른 역사,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범죄에 대한 정당한 사죄와 법적 배상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상을 받으면 받는 즉시 찢어버린다 할지라도 죄에 대한 정당한, 합법적인 배상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해야 제 명예도, 제 동료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며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병에 걸려 희생당한 우리 동료들이 고이 잠들 수 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중국 상해위안소 전경 오키나와 포로수용소의 조선인위안부 중국 동충지역의 위안부로 추정되는 여성들의 학살현장 해방후 중국에서 귀환하지 못한 채 50여년이 지나서야 고국으로 돌아온 (故) 문명금 할머니 일제에 의해 정신대로 동원된 전라북도여자근로 정신대           위안부 할머니들의 그림     [김순덕]못다핀 꽃

 

 

 

김순덕-못다핀 꽃     [강덕경]빼앗긴순정     강덕경 - 빼앗긴 순정             이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은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십니다.    

★★ 일본군 위안부 .. 일본은 사죄하라 ★★ (꼭 읽어주세요...충격적 사진,증언 有)

 

수요집회를 한지 이제 20년이 되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제외한 참석자들은 늘어가지만

이제 위안부피해자할머니들은 여덟 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은 86 세 입니다...

 

이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이제 누가 증언을 합니까?

누가 매주 수요일 집회에 나오겠습니까?

 

 

이제까지 166 명의 할머니들이 돌아가셨습니다.

"사과 받기 전까지 눈 못감는다" 라고 하시던 할머니들은 사과는 커녕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 .. 일본은 사죄하라 ★★ (꼭 읽어주세요...충격적 사진,증언 有)

위안부 피해자 김옥순 할머니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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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본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대지진 참사 앞에 눈물을 보였습니다.

 

"집도 잃고 가족도 잃고 다 잃었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아무리 우리가 피해자라도

마음이 아픈건 다 똑같아요, 다 피해자니까..."

 

 

"이웃나라니까 .. 빨리 잘 됬으면 좋겠어요"

 

 

 

"이거는 사람이 힘으로 막지 못하는 일이니까.. 그거는 좀 가슴이 아프죠.. 그거는 우리가 마음이 많이 아프죠.문제를 해결 못하고 제명에 못사는 우리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서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이것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건 정말 우리가 가슴이 찢어집니다"

 

 

 

 

 

 

 

 

밑에는 조금 충격적인 사진들...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입장을 들어볼까요?

 

 

 

 

 

일본의 긍지를 되찾으시겠답니다.

 

 

증거나 문헌이 없다고요?

저 위에 할머니들의 증언은 그럼 뭔가요?

 

일본 정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조차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준 돈은 고작 99엔.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닌 '사과' 입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 한마디면 마음속 응어리가 풀릴 것 같다는 위안부 할머니들.

 

이런 사과를 아직까지 받지 못한 채 남아계신

여덟 명의 할머니들.

 

죽기 전에 일본의 사과를 받으면 더이상 바랄게 없다던 166명의 할머니들은 이미 세상을 뜨셨습니다.

 

남은 여덟명의 할머니들마저 돌아가시게 된다면, 그땐 어떡하죠?

 

그 전에 반드시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그저 남은 할머니들이 돌아가실때를 기다리고 있는것 같습니다.

 

이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게 되면,

일본인들은 아예 정신대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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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상은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이렇게 사죄를 했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 .. 일본은 사죄하라 ★★ (꼭 읽어주세요...충격적 사진,증언 有)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아침 호텔을 나설 때부터 무엇인가

진심에서 우러나는 표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독일의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를 증언하는 곳에서, 나치에 희생된 수많은 영령들을 대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빌리브란트 독일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했을때 그가 무릎을 꿇으며 한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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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입장을 다시 한번 보여드리죠.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 할 때입니다.

더이상 위안부 할머니들의 억울함을

보고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더이상 일본이 오리발을 내미는 모습을

보고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할 때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도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일본과의 외교에 방해가 된다고 하지 말고

일본의 사죄를 위해 앞장서 나가야 합니다.

 

 

 

 

 

저 정말 어렵게 썼습니다...

처음 판을 이런 주제로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승연 위안부 누드화보집 에 관한 기사를 보다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써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써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습니다.

이 판을 쓰면서 정말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보고계실 톡커님들도 저처럼 분노와 슬픔을 느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더럽고 추잡한 만행을 널리 알려주세요..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맻힌 삶을 널리 알려주세요..

톡커님들의 관심 하나하나가 일본이 사죄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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