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공지영'도가니'='양을 쫓는 모험'하루키

박은정201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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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살찌고 말은 높은?!

이 가을 시작하며 권장하는 소설

최근 출간된 <도가니> 공지영의 소설은 정말 오랜만이다.

더불어 무라카미 하루키 1995년 작 <양을 쫓는 모험>을 함께 권한다.

 

조금 전 MBC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며, 이 두 권의 소설을 되새기게 됐다.

"사람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두 부류로 나뉜다"라는 대사

모두가 의심하지만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그 얘기를 다룬 두 소설

 

결국 문화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그리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앞서 말하자면, 두 소설은 무척 깊은 내용을 담고 있기에 내용을 싣지는 않겠다.

다만 그것에서 알 수 있는 것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연관성을 얘기해보고 싶다.

 

공지영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이 강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상이야 어떻든 내 알 바 아니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작가로 보인다.

하지만, 이 두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지켜본 바로 공통점이 무척 많다.

고요하지만 강력하게 삶의 모순과 세상의 비합리적 구조를 비판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의 작품이 출시와 동시에 품절 상태가 되는 것은 그 정신을 높이 사는 이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도가니>_안개로 뒤덮인 이 세계의 축소판

 

 

책을 읽기 전 저자의 약력과 출간배경을 먼저 살피는 나로서는 작가의 의도에 관심이 갔다.

공지영이란 작가는 분명 큰 목소리로 외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글을 써왔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왔던 작가의 작지만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키는 힘있는 글의 이유

이번 작품 집필의도는 한 신문기사의 짧은 한 줄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작가는 그 기사를 가볍게 스쳤을 뿐인데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파왔다고 한다.

장애인을 둘러싼 법정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이번 작품을 보며 나 역시 참 따뜻했다.

인간 모두의 삶에 연민과 애정을 지니고 있는 작가 공지영은 사람을 위해 글을 쓴다.

동정은 자신이 더 우월함을 인정할 수 있는 위안이라고? 누군가는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한 마음이란 길러질 수 있다. 우리가 상실하고 있는게 무엇인지도 알아야한다.

그 선함을 전파시킬 줄 아는 작가 공지영은 이번에도 그 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불의와 맞서 싸우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안 이후, 나는 평화의 한 끝자락을 잡은 듯했다."_공지영

 

 

누구든지 폭력과 위선 앞에 분노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하지만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온 힘을 다해 무서운 폭력과 거짓이 세워놓은 안개감옥으로 뛰어들어 죽어가는 진실을 구해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도가니>라는 작품은 단연 난세에 빛이 되는 글이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의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들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쯤.....궁금해지지 않는가?

어떤 내용이길래. 상당히 정치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우리 사회 하부구조의 모순을 말한다. 그러니 독자에게는 따끔한 지침, 경고성 글이 될 수도 있으니, 이런 종류의 글을 배타하는 분들에게는 감히 권장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것이 지닌 핵심이 결국 인간의 마음이 지닌 본능과 같은 것이기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며, 누구나 양심을 되돌아 보게 되는 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양을 쫓는 모험>_현대 사회의 인간성 상실에 대한 아름답고 슬픈 노래

 

 

목차만 봐도 내용 전반을 알 수 있는 요즘 책들에 비하면 이 책 참..무례하기 짝이 없다.

 

열여섯 걸음 걷는 것에 대하여

실지렁이 우주란 무엇인가?

그녀는 솔티 독을 마시면서 파도 소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대체 뭔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외계어 같기만 하다.

주인공은 이름도 모른다. 그냥 '나'는 '그녀'와 양을 찾아 나서고, 양 박사를 만나고..어쩌고

그런 내용들이다. 추리소설 못지않게 많은 플롯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긴박하며 흥미롭다.

개인적 의견으로 <해리포터>시리즈 저만큼 가라 할 만큼 비현실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 어이없는 픽션 속에 작가는 공지영과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손'의 지배를 받는다. 그건 권력일 수 있고 돈일 수 있고 규범일 수도 있다. 그 힘에 짓눌린 나약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이 작품에서 그렸다. 힘의 지배. 남성 작가여서인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좀 더 구축적인 필체와 논리로 권력을 논한다. <양을 쫓는 모험>을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오로지 글로 세상의 헛점을 짚어내고 있다. 무척 일관성 있는 작가이다.

 

이미 전세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난 그가 철학가 정도로 느껴진다.

그의 글은 지나치리만큼 철학적이고 난해하다.

동시에 위트와 대중성을 지녀 인기가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긴...아시아에 이만한 작가는 정말 드물다.

가능하다면 이 작가의 책은 모두 읽어보시길 바란다.

그래야 생을 통해 보여주는 작가의 발자취를 진정 받아들일 수 있다고나 할까?

실로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어떤 연속성을 지니며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그 행보를 지켜보기란 더욱 흥미롭다.

음악을 듣는 것만큼에서는 능력자인 그

그는 읽는다는 것과 듣는 것의 상호성을 알고있다.

최신작 <1Q84>에서 책장을 넘기며 듣는 음악 CD를 함께 선보였으니 이 책도 읽어보시길..

 

하하...이거 너무 여러 작품을 한번에 소개한 것 같아서 송구스럽다.

그리고 이제 본격 이 작품들을 소개하게 된 본뜻을 내비춰보겠다.

 

 

 

<두 소설을 통해 볼 수 있는 현실이란>

 

 

난 불의에 맞서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다만 여러 문화를 접하고 또한 살아가면서 불의에 맞서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결국 한결같은 말을 하고 있다.

고민하지 않고서는 살아낼 수 있는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은 어쩌면 어떤 선택이나 판단을 해야할 수 밖에 없는 불운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런 고민의 답은 나올런지도 의심스럽다. 난 이제 겨우 세상을 인식하는 눈을 가졌을 뿐

앞으로 100여년의 세상을 대하는 시각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지,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어제와 오늘의 내가 다르니 내일은 또 다른 나의 세계가 펼쳐질 것을 믿는다.

그리고 어제는 몰랐던 오늘의 것을 얘기해보겠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많는 선택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결정하는 일일 것이다.

 

영국 시인 콸스는 이렇게 말했다.

"현명하게 세속적이어라. 세속적으로 현명하지 말고"

 

어른들 말치고 틀린 것이 없듯, 옛 선인들의 말치고, 특히 이렇게 기록으로 오래도록 남겨진 말치고 믿어 나쁠 것은 없다. 그리고 지금은 부정한다 할지라도 언젠가 살아가며 스스로 깨우치게 될 것들이다. 그래서 먼저 산 사람들이 그것을 깨우치는 시기를 좀 앞당겨서 조금은 덜 당황스럽게 살 수 있도록 고맙게도 지침을 내어준 것이라고 본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세속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모두 세속적 성공을 열망한다. 사람이 사회를 이루어 살기 시작한 뒤 사회적 위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생계에서 유리했고 낮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불리했다. 선과 악을 구분지으려는게 아니다. 역사가 보여주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국가가 왜 존재하고, 통치자는 왜 있으며, 전쟁은 왜 일어나겠는가? 세상은 그런 것이다.

 

유기체들의 목표가 성공적 생계를 사는 것이고, 생계에서 사회적 위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므로, 사회적 자리 다툼은 늘 나오고 늘 치열하다. 다른 편으로는 우리는 모두 세속적 성공에 대해 약간의 그러나 진정한 경멸을 품는다. 세속적 성공의 전형인 정치가들은 부러움을 많이 사지만 존경은 별로 받지 못하고, 가난한 예술가가 되라고 자식에게 권하는 부모는 없지만 모두 가난한 예술가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 사정의 큰 부분은 세속적 성공의 대상인 '사회적 위계에서의 높은 자리들'이 본질적으로 '위치재(position goods)'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위치재는 가치의 큰 부분이 특수한 위치 덕분에 생긴 재화를 가리킨다. 모든 면들에서 똑같은 땅인데, 한 곳에 지하철 역이 생기면, 다른 곳들보다 가치가 부쩍 높아진다. 진품들도 짝퉁들에 대해 그런 이점을 누린다. 사회적 위계에서 높은 자리들은 전형적 위치재들이다. 위치재의 본질적 특질은 더 생산될 수 없고 재분배될 수만 있다는 것이다. 높은 자리들이나 훈장들을 더 만들 수는 없다. 더 만들면, 가치가 희석되어 가치의 재분배가 이루어질 따름이다. <선덕여왕> 미실이 말하지 않는가? "통치하는 자는 통치받는 자를 통해 존속한다"고..모두 귀족인 사회에서 귀족의 가치는 거의 없다. 당연히 위치재들에 대한 다툼은 치열하다. 그리고 이 다툼은 사회적 비용이 무척 큼에도 불구하고 창출되는 가치는 거의 없다. 사람들이 그런 위치재들의 재분배에 기를 쓰고 참여하는 정치가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약간은 그러나 진정한 경멸을 품고, 가치를 창출하는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나는 문화에서 이런 면들을 발견한다. 어떤 목적이란, 결국 반론과 반박에 치닿는 것이며, 예술은 그 선두에서 맞서 싸운다. 물론 학문과 철학과 과학도 그것과 연관된다.

 

그리고 다시 현실

현실에서 세속적 성공은 물론 중요하다. 살아가고 뜻을 이루는데 사회적 위치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너무 낮은 자리를 차지하면, 당장 살아나가기 어렵고 뜻을 이루는 일은 더욱 어렵다. 궁핍은 예술적 창조에도 학문적 발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자식들을 낳아 기른다는 생명체들의 기본적 임무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하지만,

비록 우리의 천성이 사회적 위계를 크게 인식하고 그 위계 안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모든 힘을 쏟도록 되었더라도, 우리는 의식적 노력을 통해서 그런 천성을 억제할 수 있다. 세속적으로 현명한 삶이 유난히 추구되는 우리 사회에선 그런 노력이 특히 절실하다.

 

사르트르는 <구토>의 성공 이후 말했다.

"배가고파 우는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내 책은 한 조각 빵의 무게도 나가지 못했다"

장 리카르두는 이렇게 반박했다.

"어떻게 빵과 문학 작품을 같은 저울에 놓을 수 있는가. 배고픈 아이에게 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배고픈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문으로 만드는 것이 작가이다."

 

모든 것은 그 추문을 목적으로 탄생한다.

예술과 문화의 기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를 추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보기보다 훨씬 중요하다. 불의한 질서가 무너지려면 먼저 그것이 추문이 되어야 한다. 많은 작가들과 감독, 미술가, 음악가, 철학가 누구든...이들이 추문으로 만드는 것은 실은 사회적 약자 혹은 대중, 일반인들의 실상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 상태다. 깊고 거대한 악을 우리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 우리 앞에 내놓는다. 우리의 마음을 느닷없이 방문하여 후벼파고 든다. 그것이 예술의 힘이며, 그것이 [담론들]을 펼쳐나가는 의도이다.

 

 

 

잘 생각해보라.

 

당신이 하는 모든 것들이 이것을 빗겨갈 수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