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수군 총사령관인 평양도행군대총관 장량(張亮)은 비사성을 점령한 뒤 부총관 상하(常何)와 좌난당(左難當), 그리고 장문간(張文幹)·방효태(龐孝泰)·구효충(丘孝忠)·설만철(薛萬徹)·장금수(張金樹), 그리고 비사성 함락에 수훈을 세운 정명진(程名瑨)과 왕대도(王大度) 등 수하 장수들과 앞으로의 작전계획을 논의했다. 작전계획의 요지는 어떻게 하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요동의 황제에게 군량을 제때에 안전하게 보급하고, 해로를 통해 평양성으로 진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석성에서 당군이 비사성을 점령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연수영은 그때까지 자신의 첩보망으로 입수할 수 있었던 요동반도의 육상과 해상 전투의 모든 상황을 대막리지부(大莫離支府)에 보고하는 전령을 보냈다. 비록 육상에서 방어선이 어느 정도까지 무너졌는지 정확한 전황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묘도 해역에서 수군 군주 겸 비사성주 우소가 전사하고 비사성과 인근 작슨 성들이 적군에게 실함된 사실은 비교적 상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연수영은 전황이 매우 위급하니 신속히 지원군을 보내주도록 요청했다.
그로부터 닷새 뒤에 평양성에서 전령이 달려와 대막리지의 명령이 적힌 죽간(竹簡)을 전달했다. 연개소문의 지휘명령은 지권군을 편성하는 대로 곧 보낼 터이니 현재 가용할 수 있는 병력과 전함을 가지고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당 수군의 동진(東進)을 저지하라는 것이었다. 지원군이 언제 모집되고 편성되어 이곳 최전선 장산군도 앞바다까지 도착할지는 기약할 수 없었다.
우소의 함대가 무너지고 비사성이 함락된 이제 남은 짐은 고스란히 연수영과 석성 수군의 몫이 되었다. 수군 총사령부가 있던 비사성이 침략군에게 점령당하고, 수군의 주력군이 무너진 지금 연수영이 거느린 석성 수군의 힘만으로 수십만명, 수천척의 당 수군을 막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연수영이 이끄는 수군의 군세는 대선·중선·소선 등 군선이 약 1백척, 탐망선이 10여척, 그리고 연수영이 석성 도사로 부임하여 지난 3년 동안 육성해온 약 5천명의 수군 장졸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5천명의 병력 가운데 전투원은 3천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2천명은 전함의 격군과 잡역부로 부리는 노예와 죄수들이었다.
그러나 연수영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며 걱정하는 부하 장수들을 강하게 타일렀다.
“싸움에 지는 것보다 나라를 잃은 것이 더 두려운 일임을 어찌 장군들은 모르시오? 우리가 전투에서 져서 모두 죽을 수 있으나 나라가 망하고 우리 백성들이 당적들에게 무참히 도륙된다면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오! 우리의 칼이 지금껏 어디를 향하고 있었소? 바다로 들어오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날카롭게 갈아온 칼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칼을 쓸 때가 다가온 것이오! 나는 승리를 사치라 여깁니다. 군인에게는 전투에 이기는 것보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고 목숨을 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오. 이제 우리가 죽을 자리를 찾을 때입니다.”
연수영의 당차고 호쾌한 훈시에 그의 부하 장수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그리하여 645년 6월 초사흘 진시(辰時)에 연수영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의 첫번째 출정이 개시되었다.
그 당시 연수영의 함대 규모는 군사 60명과 노수 40명 등 1백명이 탈 수 있는 대선이 20여척, 군사 40명과 노수 20명 등 60명이 탈 수 있는 중선이 30여척, 군사 20명과 노수 10명 등 30명이 탈 수 있는 협선이 40여척, 그리고 5~10명이 타는 탐망선과 전령선이 20여척 등 100여척이었다. 이 대소 전함들은 전위·중위·좌위·우위·후위·돌격대·유격대·척후대·독전대 등으로 나뉘어 각각 소형(小兄)과 선인(仙人) 등 하위 장수들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연수영 함대의 주요 장수들은 참좌(參佐)에 대형(大兄) 장운형(張熉炯), 후위장에 을사(乙奢) 고대수(高大樹), 척항문에 소형(小兄) 고성운(高成雲), 좌위장에 말객(末客) 담열(曇烈), 전위장에 제형(諸兄) 강철우(姜鐵牛), 돌격장에 선인(仙人) 모청호(牟靑虎), 후군장에 말객 안고(安固) 등이 맡고 있었다.
창려 앞바다는 오늘날 요령성 대련부근으로 추정되며, 고대에는 난하하구로 불리웠던 곳이다. 요동성을 노리는 당 육군에게 보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 수군이 반드시 이곳을 장악해야 했다. 장량은 부하 장수인 설만철과 염입덕(閻立德)에게 신속히 창려 일대를 점령하여 이곳을 통해 최단시간내에 당군 주력부대에 대한 보급을 위해 애쓰게 했다. 창려에 정박한 당나라의 군선은 대선이 무려 120척, 중선이 270척, 협선이 4백여척 정도였으며 군사의 수도 4만명이 조금 넘었다.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이 정면으로 상륙하여 창려를 점령하고 있는 정예군과 접전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자살행위였기에 우선은 들어오는 당군 약 2만명에 대선 1백척 남짓으로 중·협선과 보급선을 포함, 4백여척의 함대 규모로 들어오는 당 수군을 주위의 협수로와 섬에 매복하여 쳐부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다.
“적군이 우리보다 3·4배는 많으나 절대 겁먹지 마라! 아군은 협수로와 군도에 매복하고 있으니 전세는 우리에게 유리하다.”
연수영은 철저하게 탐망선을 계속 띄워서 당 수군의 움직임을 매우 면밀히 관찰했고, 곧 당군이 창려의 좁은 협수로로 들어온다는 첩보를 받자 이곳에 진을 쳤던 것이다. 척항문 고성운이 적정을 탐지하고 돌아와 적군이 나타났다고 보고하니 연수영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함대는 결진(結陳)하라! 방원진(防圓陳)을 펼쳐라!”
군령이 떨어지자 고구려 수군의 60여척 대선은 협수로에 촘촘이 배치되어 방원진을 형성하였다.
“포노(砲弩)를 쟁여라!”
“전함대, 이자방진(二字方陳)으로 진격하라!”
전고(戰鼓)가 울리기가 무섭게 각자 자신의 함대를 이끌던 제장(諸將)들은 군령에 따라 사각형 모양의 진형을 갖추며 공격 태세에 들어갔다.
고구려 수군이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공격을 전개하는 줄은 생각도 못한 채 설만철이 이끄는 당 수군은 창려의 협수로에 들어오고 있었다.
“전함대, 방포(放砲)하라! 궁수들은 수사(水射)를 개시하라!”
연수영 장군이 패검(佩劍)을 뽑아 전방으로 내지르며 호령하자, 붉은색 군기가 휘날리며 전열의 전함들에서 일제히 포거와 쇠뇌가 발사되었다. 석포에서 날아간 어른 머리통만큼 큰 커다란 돌덩이가 적선에 떨어졌다. 강철 쇠뇌에서는 2장이 넘는 길이의 철전(鐵箭)이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다. 고구려 수군의 위력적인 신무기 창노(槍弩)였다.
고구려군은 이밖에 공포의 불항아리 화토병(火土甁)도 발사했는데, 이것은 기름과 유황과 철편 따위를 쟁여 넣고 봉한 토기 항아리였다. 여기에 불을 붙여 석포로 발사하는 당대의 가공할 신무기였다. 화토병이 적진에서 폭발, 작렬하면 탄착점 주변의 적군 오륙명은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고구려 수군이 발사한 화토병은 3백보 이상을 날아가 적선 갑판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폭발했고, 적선은 순식간에 불이 붙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화염지옥이 따로 없었다.
갑작스런 급습에 당 수군은 어찌할 바를 몰라 혼란에 빠졌다. 포거에서 발사된 돌에 맞아 선박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쇠뇌에 명중된 군사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멍하니 있던 당병들은 화살에 맞아 무수히 바다에 빠져 혈해(血海)가 만들어졌다. 이 엄청난 기세로 몰아붙이는 고구려 수군의 험악한 공격에 협수로에 완전히 갇힌 당 수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장군, 고구려 수군의 기습입니다!”
“고구려 수군은 묘도에서 전멸하지 않았는가?”
“저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궁수들은 대체 뭘하고 있는게야? 어서 응사하라! 적선은 얼마되지 않는다. 포노를 쟁여 즉시 방포하라!”
설만철은 절규에 가까운 음성으로 소리치며 자군에게 응전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군령이 먹힐 상황이 아니었으며 군사들은 돌덩이와 화살을 피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어디서 이런 신출귀몰한 적군이 왔는지도 모르는 채, 어떻게 이렇게 당해야 하는지 이유조차 모르는 채 맥없이 무너져갔다. 접전한 지 불과 한 시진도 못 되어 당군 전함 10여척이 불에 타고 부서져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으아, 이게 뭐야! 이 자라새끼들아, 빨리 쏘지 않고 뭐하는 거야?”
설만철도 무차별 쏟아지는 화살과 쇠뭉치, 돌덩어리를 피하느라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군사들은 죽어 나자빠지기에 바빴다. 연수영 장군의 대장선에서 돌격을 명령하는 군기가 펄럭이자 전위장 강철우가 1천여명의 돌격병을 동원해 중·협선에 나눠 태우고 적선에 올라가서 갑판 위에서 아우성치던 적병들을 쓸어 버렸다.
바다는 삽시간에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늘은 시커먼 연기로 햇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신시(辛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이어진 격렬한 전투는 고구려군의 일방적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당군은 이미 5천여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누선만 해도 50여척이 불타고 가라앉았다. 중선과 협선도 1백여척 이상이 파괴되었다.
“밀어먹을… 후퇴하라!”
설만철은 막대한 군량과 물자를 실은 수송선을 모두 포기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645년 6월 5일 하루 동안에 벌어진 창려해전(昌黎海戰)은 제1차 여당전쟁(麗唐戰爭)이 발발하고 나서 고구려군이 최초로 거둔 승리였다. 이 때에 고구려군의 피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단 한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경미한 부상자만 수십명이 났을 뿐이었다. 또한 단 한척의 전함도 잃지 않았고, 십여척의 전함이 다소 손상을 입은 것에 불과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완벽한 승리였다.
고구려 수군이 첫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연수영의 지휘 능력이 출중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장졸들이 그녀의 지휘에 일사분란하게 잘 따라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군의 전함과 무기가 상대적으로 강력하고, 군사들의 전투력이 적군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동안 실전과 다름없는 맹렬한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성으로 돌아온 연수영은 자신의 정무소인 소장루(梳壯樓)에서 평양 장안성의 대막리지부에 승전 보고를 띄웠다.
「 ‘바다의 여왕’ 연수영 」3제1차 여당전쟁의 개전 ⑶
● 창려해전(昌黎海戰)
당나라의 수군 총사령관인 평양도행군대총관 장량(張亮)은 비사성을 점령한 뒤 부총관 상하(常何)와 좌난당(左難當), 그리고 장문간(張文幹)·방효태(龐孝泰)·구효충(丘孝忠)·설만철(薛萬徹)·장금수(張金樹), 그리고 비사성 함락에 수훈을 세운 정명진(程名瑨)과 왕대도(王大度) 등 수하 장수들과 앞으로의 작전계획을 논의했다. 작전계획의 요지는 어떻게 하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요동의 황제에게 군량을 제때에 안전하게 보급하고, 해로를 통해 평양성으로 진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석성에서 당군이 비사성을 점령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연수영은 그때까지 자신의 첩보망으로 입수할 수 있었던 요동반도의 육상과 해상 전투의 모든 상황을 대막리지부(大莫離支府)에 보고하는 전령을 보냈다. 비록 육상에서 방어선이 어느 정도까지 무너졌는지 정확한 전황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묘도 해역에서 수군 군주 겸 비사성주 우소가 전사하고 비사성과 인근 작슨 성들이 적군에게 실함된 사실은 비교적 상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연수영은 전황이 매우 위급하니 신속히 지원군을 보내주도록 요청했다.
그로부터 닷새 뒤에 평양성에서 전령이 달려와 대막리지의 명령이 적힌 죽간(竹簡)을 전달했다. 연개소문의 지휘명령은 지권군을 편성하는 대로 곧 보낼 터이니 현재 가용할 수 있는 병력과 전함을 가지고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당 수군의 동진(東進)을 저지하라는 것이었다. 지원군이 언제 모집되고 편성되어 이곳 최전선 장산군도 앞바다까지 도착할지는 기약할 수 없었다.
우소의 함대가 무너지고 비사성이 함락된 이제 남은 짐은 고스란히 연수영과 석성 수군의 몫이 되었다. 수군 총사령부가 있던 비사성이 침략군에게 점령당하고, 수군의 주력군이 무너진 지금 연수영이 거느린 석성 수군의 힘만으로 수십만명, 수천척의 당 수군을 막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연수영이 이끄는 수군의 군세는 대선·중선·소선 등 군선이 약 1백척, 탐망선이 10여척, 그리고 연수영이 석성 도사로 부임하여 지난 3년 동안 육성해온 약 5천명의 수군 장졸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5천명의 병력 가운데 전투원은 3천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2천명은 전함의 격군과 잡역부로 부리는 노예와 죄수들이었다.
그러나 연수영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며 걱정하는 부하 장수들을 강하게 타일렀다.
“싸움에 지는 것보다 나라를 잃은 것이 더 두려운 일임을 어찌 장군들은 모르시오? 우리가 전투에서 져서 모두 죽을 수 있으나 나라가 망하고 우리 백성들이 당적들에게 무참히 도륙된다면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오! 우리의 칼이 지금껏 어디를 향하고 있었소? 바다로 들어오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날카롭게 갈아온 칼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칼을 쓸 때가 다가온 것이오! 나는 승리를 사치라 여깁니다. 군인에게는 전투에 이기는 것보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고 목숨을 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오. 이제 우리가 죽을 자리를 찾을 때입니다.”
연수영의 당차고 호쾌한 훈시에 그의 부하 장수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그리하여 645년 6월 초사흘 진시(辰時)에 연수영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의 첫번째 출정이 개시되었다.
그 당시 연수영의 함대 규모는 군사 60명과 노수 40명 등 1백명이 탈 수 있는 대선이 20여척, 군사 40명과 노수 20명 등 60명이 탈 수 있는 중선이 30여척, 군사 20명과 노수 10명 등 30명이 탈 수 있는 협선이 40여척, 그리고 5~10명이 타는 탐망선과 전령선이 20여척 등 100여척이었다. 이 대소 전함들은 전위·중위·좌위·우위·후위·돌격대·유격대·척후대·독전대 등으로 나뉘어 각각 소형(小兄)과 선인(仙人) 등 하위 장수들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연수영 함대의 주요 장수들은 참좌(參佐)에 대형(大兄) 장운형(張熉炯), 후위장에 을사(乙奢) 고대수(高大樹), 척항문에 소형(小兄) 고성운(高成雲), 좌위장에 말객(末客) 담열(曇烈), 전위장에 제형(諸兄) 강철우(姜鐵牛), 돌격장에 선인(仙人) 모청호(牟靑虎), 후군장에 말객 안고(安固) 등이 맡고 있었다.
창려 앞바다는 오늘날 요령성 대련부근으로 추정되며, 고대에는 난하하구로 불리웠던 곳이다. 요동성을 노리는 당 육군에게 보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 수군이 반드시 이곳을 장악해야 했다. 장량은 부하 장수인 설만철과 염입덕(閻立德)에게 신속히 창려 일대를 점령하여 이곳을 통해 최단시간내에 당군 주력부대에 대한 보급을 위해 애쓰게 했다. 창려에 정박한 당나라의 군선은 대선이 무려 120척, 중선이 270척, 협선이 4백여척 정도였으며 군사의 수도 4만명이 조금 넘었다.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이 정면으로 상륙하여 창려를 점령하고 있는 정예군과 접전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자살행위였기에 우선은 들어오는 당군 약 2만명에 대선 1백척 남짓으로 중·협선과 보급선을 포함, 4백여척의 함대 규모로 들어오는 당 수군을 주위의 협수로와 섬에 매복하여 쳐부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다.
“적군이 우리보다 3·4배는 많으나 절대 겁먹지 마라! 아군은 협수로와 군도에 매복하고 있으니 전세는 우리에게 유리하다.”
연수영은 철저하게 탐망선을 계속 띄워서 당 수군의 움직임을 매우 면밀히 관찰했고, 곧 당군이 창려의 좁은 협수로로 들어온다는 첩보를 받자 이곳에 진을 쳤던 것이다. 척항문 고성운이 적정을 탐지하고 돌아와 적군이 나타났다고 보고하니 연수영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함대는 결진(結陳)하라! 방원진(防圓陳)을 펼쳐라!”
군령이 떨어지자 고구려 수군의 60여척 대선은 협수로에 촘촘이 배치되어 방원진을 형성하였다.
“포노(砲弩)를 쟁여라!”
“전함대, 이자방진(二字方陳)으로 진격하라!”
전고(戰鼓)가 울리기가 무섭게 각자 자신의 함대를 이끌던 제장(諸將)들은 군령에 따라 사각형 모양의 진형을 갖추며 공격 태세에 들어갔다.
고구려 수군이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공격을 전개하는 줄은 생각도 못한 채 설만철이 이끄는 당 수군은 창려의 협수로에 들어오고 있었다.
“전함대, 방포(放砲)하라! 궁수들은 수사(水射)를 개시하라!”
연수영 장군이 패검(佩劍)을 뽑아 전방으로 내지르며 호령하자, 붉은색 군기가 휘날리며 전열의 전함들에서 일제히 포거와 쇠뇌가 발사되었다. 석포에서 날아간 어른 머리통만큼 큰 커다란 돌덩이가 적선에 떨어졌다. 강철 쇠뇌에서는 2장이 넘는 길이의 철전(鐵箭)이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다. 고구려 수군의 위력적인 신무기 창노(槍弩)였다.
고구려군은 이밖에 공포의 불항아리 화토병(火土甁)도 발사했는데, 이것은 기름과 유황과 철편 따위를 쟁여 넣고 봉한 토기 항아리였다. 여기에 불을 붙여 석포로 발사하는 당대의 가공할 신무기였다. 화토병이 적진에서 폭발, 작렬하면 탄착점 주변의 적군 오륙명은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고구려 수군이 발사한 화토병은 3백보 이상을 날아가 적선 갑판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폭발했고, 적선은 순식간에 불이 붙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화염지옥이 따로 없었다.
갑작스런 급습에 당 수군은 어찌할 바를 몰라 혼란에 빠졌다. 포거에서 발사된 돌에 맞아 선박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쇠뇌에 명중된 군사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멍하니 있던 당병들은 화살에 맞아 무수히 바다에 빠져 혈해(血海)가 만들어졌다. 이 엄청난 기세로 몰아붙이는 고구려 수군의 험악한 공격에 협수로에 완전히 갇힌 당 수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장군, 고구려 수군의 기습입니다!”
“고구려 수군은 묘도에서 전멸하지 않았는가?”
“저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궁수들은 대체 뭘하고 있는게야? 어서 응사하라! 적선은 얼마되지 않는다. 포노를 쟁여 즉시 방포하라!”
설만철은 절규에 가까운 음성으로 소리치며 자군에게 응전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군령이 먹힐 상황이 아니었으며 군사들은 돌덩이와 화살을 피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어디서 이런 신출귀몰한 적군이 왔는지도 모르는 채, 어떻게 이렇게 당해야 하는지 이유조차 모르는 채 맥없이 무너져갔다. 접전한 지 불과 한 시진도 못 되어 당군 전함 10여척이 불에 타고 부서져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으아, 이게 뭐야! 이 자라새끼들아, 빨리 쏘지 않고 뭐하는 거야?”
설만철도 무차별 쏟아지는 화살과 쇠뭉치, 돌덩어리를 피하느라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군사들은 죽어 나자빠지기에 바빴다. 연수영 장군의 대장선에서 돌격을 명령하는 군기가 펄럭이자 전위장 강철우가 1천여명의 돌격병을 동원해 중·협선에 나눠 태우고 적선에 올라가서 갑판 위에서 아우성치던 적병들을 쓸어 버렸다.
바다는 삽시간에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늘은 시커먼 연기로 햇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신시(辛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이어진 격렬한 전투는 고구려군의 일방적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당군은 이미 5천여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누선만 해도 50여척이 불타고 가라앉았다. 중선과 협선도 1백여척 이상이 파괴되었다.
“밀어먹을… 후퇴하라!”
설만철은 막대한 군량과 물자를 실은 수송선을 모두 포기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645년 6월 5일 하루 동안에 벌어진 창려해전(昌黎海戰)은 제1차 여당전쟁(麗唐戰爭)이 발발하고 나서 고구려군이 최초로 거둔 승리였다. 이 때에 고구려군의 피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단 한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경미한 부상자만 수십명이 났을 뿐이었다. 또한 단 한척의 전함도 잃지 않았고, 십여척의 전함이 다소 손상을 입은 것에 불과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완벽한 승리였다.
고구려 수군이 첫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연수영의 지휘 능력이 출중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장졸들이 그녀의 지휘에 일사분란하게 잘 따라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군의 전함과 무기가 상대적으로 강력하고, 군사들의 전투력이 적군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동안 실전과 다름없는 맹렬한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성으로 돌아온 연수영은 자신의 정무소인 소장루(梳壯樓)에서 평양 장안성의 대막리지부에 승전 보고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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