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별님201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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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MARGIN-TOP: 2px; MARGIN-BOTTOM: 2px}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한옥이란 우리 고유의 건물 양식이다. 직접 둘러볼 수 있는 대표적 한옥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양반 집이 대부분. 따라서 조선의 유교적 도덕의 하나인 절제가 외관으로 발현한다. 유학자 중 청빈함으로 잘 알려진 인물 ‘윤증 선생’ 그의 고택으로 향했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왼쪽] 만개한 배롱나무 너머 노성산 기슭에 자리한 윤증고택이 보인다
[오른쪽] 고택 정원과 연결된 연못


윤증 고택 앞마당, 배롱나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유생이 모이는 향교, 서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수목이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매우 얇은 편이다. 덕분에 줄기 속이 비치는 듯한 투명함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선비는 이 나무의 겉과 속이 같은 모습을 배움의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학문이 있는 곳에 배롱나무를 심었다. 제때 찾아온 것 같다. 꽃이 절정으로 피었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윤증 고택의 대문과 사랑채


윤증 고택은 18세기 순종 때 지어졌다. 상공에서 보면 ㅁ자형 가옥 구조다. 사랑채를 전면으로, 안채를 후면으로 구성했다. 안채만 놓고 보면 ㄷ자형이다. 대문방향 담을 넘어 사랑채가 자리한 것이 윤증 고택의 독특한 점 중 하나다.

윤증 고택이 세워진 계기 또한 유별나다. 윤증 고택이 세워지기 전, 선생이 머물던 집은 세 칸짜리 초가로, 초가지붕도 기울어져 기둥 몇 개를 보태서 따로 받쳐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윤증의 제자들이 합심해 마련한 것이 지금의 윤증 고택이다. 이 같은 배경, 이야기를 알고 보면 고택을 둘러보는 재미가 배가한다. 고택 근처 아담한 서가, <작은 도서관>에 주재한 해설사와 고택 답사 시작이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사랑채 전면


윤증 고택에 도착해 처음 보인 것이 사랑채다. 젖을 뗀 아들, 아버지, 할아버지 3대가 머무는 곳이다. 낮은 산비탈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평지에서 꽤 높이 만들어진 느낌이다. 지붕의 끝은 살짝 올라가는 곡선을 타는데, 이를 두고 과거 선비들은 “노성산에서 학이 날개를 펼친 모습”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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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황금비율로 만들어진 사랑채의 누마루창
[오른쪽] 창문을 접어 올리면 걸쇠에 매달 수 있다


전면으로 보이는 사랑채의 왼쪽, 누마루 창문에서 조상의 수준 높은 안목을 발견할 수 있다. 황금비율이 적용된 창으로, 최근 영상 출력기기의 큰 흐름인 와이드형 ‘16:9’이다. 또한, 창의 4문을 옆으로 젖히고 윗틀을 축으로 밀면, 처마 아래 걸쇠에 고정할 수 있다. 바람 불어도 창문이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사랑채 내부에는 미닫이와 여닫이가 적용된 4짝문이 있다. 공간을 용도에 따라 개방 또는 분리해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담겼다. 다른 고택에선 볼 수 없는 문이라고 한다. 마루에 앉아 눈을 감는다. 시원한 바람과 산에서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 앞에 섰다. 약 1.5m 간격을 두고 내외벽이 세워져 대문 근처에선 안채를 볼 수 없도록 했다. 양반 집의 특징으로, 여성의 공간인 안채를 대문 밖에서 살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내외벽과 대문 아래 빈틈                            안채 대청마루에서 보이는 내외벽, 대문 아래 모습


조선시대는 계급사회다 보니 방문자 신분에 따라 대우를 달리해야 했다. 그래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일일이 가서 신분을 확인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윤증 고택에선 불편하지 않다. 대문과 내외벽 아래 손 한 뼘 정도의 빈틈과 집 구조 덕분. 안채 대청마루에 앉으면, 대문과 내외벽 아래 틈을 통해 오는 이의 신발이 보인다. 윤증 고택은 일일이 방문자를 대문에서 확인하지 않아도 대청에 있으면 어떤 신분의 사람이 왔는지 알 수 있는 구조다. 여성을 위한 배려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검게 탄 흔적의 목재가 그대로 남았다


대문 우측 기둥 위 목재가 검게 탔다. 농민군 궐기가 일어나던 당시 흔적이다. 해설사에 의하면, 양반집을 노린 농민군이 기둥에 불을 붙이자 “이 양반 집은 건들지 마라”라고 마을 사람들이 농민군을 설득시켜 바로 진화됐다고 한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부엌과 창고 사이 공간감이 낯설다. 이유는 일정한 폭의 간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성산쪽이 좁고 대문 쪽이 넓다. 창고에 들어가는 물건을 분류하는 크기의 기준이 그 길의 폭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이런 간격 덕분에 우기엔 물 빠짐이 용이하다고 한다.










[왼쪽] 부엌과 창고 사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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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랑채에서 보이는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와 장독대
[오른쪽] 작은사랑방


고택 여기저기를 살피면서 즐기는 또 다른 재미가 풍경담기다. 기둥, 마루, 천장, 지붕, 담장 등을 액자 삼아 풍경을 담는 재미가 쏠쏠하다. 파라노마 풍경에 뒷산, 나무, 연못이 알아서 자리 잡는다.

대부분을 둘러보고 대문을 나설 때, 해설사가 “아차 한 가지가 더 있다”며 알려준다. “윤증 선생은 이 집에 산적이 없어요. 새집을 보고 자신에게 과분하다며 다시 초가로 되돌아갔다고 해요”

답사하는 과정에선 집을 만들 당시의 신중함과 안목, 지혜에 감탄했다. 하지만, 해설사 마지막 설명이 큰 의문을 남긴다. 당대 최고 학문 집안으로 통하던 윤증 선생 아닌가. 그의 장례는 전국 유명한 선비들이 모두 모였을 정도라고 알려졌는데…. 도착했던 자리로 돌아와 배롱나무 옆에서 다시 윤증 고택을 바라본다. 제자들이 만들어 준 새집을 앞에 두고 “과분하다”라며 뒤돌아서는 윤증 선생을 상상해 본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윤증 고택에 윤증이 ‘있었다? 없었다?’
                            윤증 고택 전경                           해설사가 추천하는 고택 정원 속 비경, 직접 가서 찾아보시라


주인이 있지만 주인은 정작 머물지 않았던 윤증 고택, 지금 우리의 아름다움이란 잣대를 들이대면 본인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참고로, 유교는 아름다움에 대해 ‘외관의 꾸밈이 아닌 개인의 다듬어진 속마음으로 인한 인격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글, 사진 : 한국관광공사 국내스마트관광팀 안정수 취재기자(ahn856@gmail.com)

 
 

 

TIP | 윤증 고택 찾아가는 방법


* 서울 및 수도권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톨게이트 → 23번국도에서 논산방면 약40km → 노성면 → 노성중학교앞 우회전
  → 고택 (서울양재 - 고택 약150km)

* 호남권
  호남고속도로 → 논산천안고속도로 → 탄천 → 노성 → 노성중학교앞 좌회전 → 고택

* 영남 및 대전권
  대전 → 논산국도 → 논산 → 노성(공주방향 23번국도) → 노성중학교앞 좌회전 →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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