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강론」18.신라의 몰락과 후삼국시대의 전개

개마기사단201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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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실패한 반면 왕건(王建)이 후삼국통일에 성공한 요인은 대신라(對新羅) 정책과 호족정책의 차이에 있었다. 견훤과 궁예가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강력한 왕권국가를 지향했다면 왕건은 호족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하는 호족 연합정권을 받아들였고 이런 정권의 대표가 되는데 만족했다. 후삼국시대 신라는 종속변수에 불과했으나 신라의 지지는 정통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내부의 군사적인 실력은 견훤이 더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이 고려를 開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정치력의 차이에 있었다. 그러나 호족 통합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결혼정책은 왕건 사후 왕실에 커다란 암운을 드리운다.

● 진골(眞骨)의 내부 분열

통일 후 신라가 그에 걸맞는 체제 창출에 실패한 데에는 삼국통일을 군사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데 근본 원인이 있다. 통일체제에 걸맞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체제를 갖추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것이다. 신라가 백제 멸망의 길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가 김춘추의 딸 고타소 내외의 죽음에 있었던 것도, 통일 후에도 수도를 한반도 동남부 귀퉁이의 서라벌(徐羅伐)로 고수한 것도 신라 삼국통일의 이러한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또한 통일 후 인적 구성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개방적인 사회체제로 나아가지 않고 진골귀족들의 배타적 특권을 보장하는 골품제(骨品制)를 그대로 유지한 것은 골품제 폐지를 요구하는 사회적 흐름과의 충돌을 낳았다. 이런 모순은 김춘추의 무열왕계(武烈王系)가 삼국통일의 기세를 몰아 확고한 장악력을 지니고 있을 때에는 은폐될 수 있었지만 신라 하대 들어 무열왕계의 지배권이 약화되면서부터는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진골들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6두품의 정사(政事) 핵심 참여도 거부할 정도로 배타적, 폐쇄적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이런 배타적 특권은 동시에 지방에서 스스로 성장한 호족(豪族) 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호족의 성장과 농민층의 봉기는 신라 말기와 후삼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다.

무열왕계가 집권하던 신라 중기에는 비록 진골이 왕위를 이었지만 통일의 주역이라는 점과 우세한 군사력 때문에 신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전제왕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무열왕계의 혜공왕(惠恭王)이 시해된 것을 계기로 왕권은 급격히 약화되어 갔다. 혜공왕 때에 일어난 쿠데타의 주역 김양상(金良相)이 왕위에 올라 선덕왕(宣德王)이 되었는데, 그가 후사 없이 죽자 무열왕 직계의 대표 주자인 김주원(金周元)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리라고 예상했지만 정작 즉위한 인물은 혜공왕(惠恭王)대 쿠데타의 또 다른 주역 김경신(金敬信)이었다. 이후 신라는 김경신 즉, 원성왕계(元聖王系)가 계속 즉위하게 된다.

원성왕은 무력항쟁(武力抗爭) 끝에 권좌에 올랐고, 이후 원성왕과 태자 인겸계(仁謙系)가 왕위를 이어갔지만 원성왕계의 하대(下代) 왕권은 무열왕계의 중대(中代) 왕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왕위 다툼에서 패배한 김주원이 처형되는 대신 명주(溟州) 지방으로 내려가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진 것이 왕권 약화의 단적인 표현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주원의 둘째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무열왕계의 왕위 계승권을 빼앗긴 데 불만을 품고 헌덕왕(憲德王) 재위 14년(서기 822년)에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여 일으킨 군사봉기(軍事蜂起)는 한때 신라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장악했을 정도로 큰 기세를 이루었다. 이는 신라 왕실의 권위를 크게 추락시켰으며 지방 세력들이 자립을 생각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런 총체적 위기를 맞아 신라 왕실과 지배층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자기개혁을 단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진골귀족 내부의 왕위 계승 다툼에 전력을 투구하면서 자신들의 배타적 특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 호족의 대두와 신라 사회체제의 붕괴

진골귀족 상호간 이전투구(泥田鬪狗)는 진골들의 지방 장악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그리고 지방을 세력 기반으로 하는 호족들이 대두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지방 세력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호족이 되었다.

첫째, 중앙 진골들이 지방에 내려가 호족이 되기도 했다. 김주원의 예가 그렇듯 왕위 쟁탈전에서 지거나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그 지역을 장악하다가 중앙의 지방 통제가 약화되는 하대에 이르러 독립적 지방 세력이 된 것이다. 왕건에게 귀순해 왕씨 성을 하사받은 왕순식(王順式)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명주장군(溟州將軍) 김순식(金順式)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명주군왕 김주원의 직계 후손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 세력 기반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둘째, 지방 군진(軍鎭)이나 해상세력들이 호족으로 성장했다. 신라 하대에는 해상 벙어를 위해 해안 여러 요지에 군진을 설치했는데, 예성강 유역의 패강진(浿江鎭), 완도의 청해진(淸海鎭), 남양만 지역의 당성진(唐城鎭), 강화도의 혈구진(穴口鎭) 등이 이런 군진들이다. 패강진 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왕건(王建)과 청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장보고(張保皐), 혈구진을 기반으로 성장한 정주(貞州)의 유천궁(柳天弓) 등은 모두 해상, 군진세력들이었다. 이 외에도 강주(康州)의 왕봉규(王逢規), 혜성(蕙城)의 박술희(朴述熙), 복지겸(卜智謙), 그리고 전납 압해도의 능창(能昌) 등은 모두 군진이나 해상을 배경으로 호족으로 성장한 인물들이었다.

셋째, 촌주(村主)에서 성장해 호족이 된 경우도 있었다. 지방 사회에서 행정을 담당하던 토착 제지세력인 촌주 중 일부가 중앙 권력이 약화된 틈을 타 호족으로 성장한 것이다. 진보성주(眞寶城主)를 자칭한 홍술(洪術)이나 재암성장군(載巖城將軍)을 자칭한 선필(善弼) 등을 이런 유형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진보성주 홍술은 사신을 파견해, 왕건에게 투항을 요청했으며, 제암성장군 선필은 왕건이 신라와 통호하는 것을 막을 정도의 세력이었으나 왕건에게 협조했다. 사실상 왕건이나 유천궁 등도 촌주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들은 중앙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에 결정적 변수가 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장보고(張保皐)다. 흥덕왕(興德王) 재위 3년(서기 829년) 당나라에 있던 장보고가 귀국해 자신의 고향 완도에 군사력을 갖춘 무역기지인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고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에 임명되었다.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가 되는 과정은 이 당시의 사회 동향 이해에 중요한 예가 될 것이다.

장보고(張保皐)는 국제무역을 통해 획득한 재산으로 제정난에 시달리던 신라 조정과 협상을 통해 이런 합의에 도달했다. 조정과의 협상을 통해 청해진을 설치하고 그 대사로 임명되었음은, 신라 서남해 지역을 관할하는 권한을 승인받았음과 동시에 장보고가 사실상 신라 조정에서 독립된 세력임을 뜻하는 것이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신라 조정으로서는 불가피한 조치였겠지만 배타적 특권의식을 지닌 진골들이 한낱 섬 출신에게 청해진 일대의 지배권을 위임한 것은 왕실 스스로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일부 포기했음을 인정한 것으로 커다란 권위의 손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흥덕왕(興德王) 사후 발생한 왕위 계승분쟁은 신라 왕실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836년 흥덕왕이 승하하자 왕제(王弟) 김균정(金均貞)과 조카 김제륭(金悌隆)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여기에 김균정을 지지하는 김양(金陽)과 김제륭을 지지하는 김명(金明) 등이 가담하면서 진골귀족 전체의 분열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김명이 지지하는 김제륭이 권좌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희강왕(僖康王)이다. 김균정은 이 와중에 피살되었고 그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김양과 더불어 청해진으로 도망가 장보고의 군사 보호를 받으며 복수를 계획했다. 김우징과 김양 등이 청해진으로 도망가 장보고에게 의탁했는데도, 희강왕이 이를 처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신라 왕실의 실력 약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청해진의 김우징과 김양 등을 처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2년 후인 838년에는 상대등 김명이 정변을 일으켜 자신이 세운 희강왕을 죽이고 직접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민애왕(閔哀王)이다. 이를 복수의 호기로 여긴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민애왕 토벌을 요청했다. 장보고가 이를 받아들여 정연(鄭年),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등의 장수로 하여금 군사 5천여명을 거느리고 김우징을 돕게 했는데, 김우징은 내륙으로 상륙해 무주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민애왕을 살해했다.

실권을 장악한 장보고(張保皐)는 김우징을 왕위에 올렸으니 그가 바로 신무왕(神武王)이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아 2천호의 실봉(實封)을 내려 군사력 지원에 보답했다. 그러나 신무왕은 불과 반년도 채 못되어 승하하고 태자 경응(慶膺)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문성왕(文聖王)이다.

이 왕위 쟁탈전은 신라 왕실이 무열왕계와 원성왕계로 대립된 데 이어 원성왕계 내부의 분열이 더해졌음을 뜻한다. 또한 이 사건은 진골귀족들의 왕위 계승권이 장보고라는 지방 해상세력의 실질적 군사력에 의해 좌우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즉 신적인 권위를 붕받던 신라의 왕위가 지방세력에 의해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신라 진골귀족들은 이런 결과물을 통해 진골 내부 쟁탈이 상대편뿐만 아니라 진골 전체를 약화시키는 주범임을 깨달아야 했다. 나아가 현 상황이 진골의 위기를 넘어 국가의 위기임을 깨닫고 진골계급을 뛰어넘어 국가 전체를 바라보는 사고를 가다듬었어야 했다.

왕위 쟁탈전 직전인 832년, 833년에는 잇단 기근과 전염병으로 좌절한 농민들이 초적으로 변하는 등 신라는 사회체제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골 지배층에게는 이를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의 다음 기록은 당시 신라 사회의 문제점을 잘 말해준다.

재상(宰相)의 집에는 녹(祿)이 끊이지 않으며, 노비가 3천여명이나 되고 갑병(甲兵)과 소, 말, 돼지도 이에 맞먹는다. 가축은 바다 가운데의 산에 방목을 했다가 필요할 때에 활을 쏘아서 잡는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 주어서 늘리는데, 기간 안에 다 갚지 않으면 노비로 삼아 일을 시킨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전(東夷傳) 신라(新羅) 조

농민들은 소수 귀족들의 부(富) 독점 때문에 기본 생활의 파탄을 겪었으며 노비로 전락하기도 했다. 진골귀족들의 금입택(金入宅)이나 사계절 별장인 사절유택(四節遊宅) 등은 신라 농민들의 이런 희생의 대가로 누리는 영화(榮華)였다. 이런 영화는 지배체제의 사회 통제력이 제구실을 할 때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하층민에 의한 반란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농민 생활이 피폐한 가운데 사회의 재화를 독점한 진골귀족들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가지 항쟁과 분열을 계속하자 신라 사회는 총체적으로 붕괴되어 갔다.

이런 총체적 붕괴 현상이 표면화된 때가 진성여왕(眞聖女王) 때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죄수들을 대대적으로 사면하고 여러 주군의 조세 납부를 1년간 면제했다. 그러나 889년 여러 주군의 공부(貢賦) 납부를 독촉하자 사방에서 도적들이 봉기했다. 앞서 말했듯 이때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원종(元宗)과 애노(哀奴)를 진압하러 출진한 내마(奈麻) 영기(令奇)가 적군의 성루를 바라보고 두려워 진격하지 못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의 기록은 당시 신라 사회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껏 신라 붕괴의 원인을 진성여왕의 황음(荒淫)에서 찾았지만 이는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국가 멸망의 원인을 한 여인에게 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사회는 이미 웬만한 방법으로는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진성여왕의 뒤를 이은 효공왕(孝恭王)이 당나라에 보낸 책문(冊文)에서 "지금 군읍(郡邑)은 모두 도적의 소굴이 되었고, 산천은 모두 전장(戰場)이 되었으니 어찌 하늘의 재앙이 우리 해동(海東)에만 흘러드는 것입니까!" 라고 한탄한 것은 신라 사회의 붕괴가 여왕의 황음 문제를 넘어서는 체제의 문제점을 말해주고 있다.

● 후삼국시대의 치열한 통일전쟁.

자기 혁신의 시기를 놓친 결과 신라 사회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전면에 선 세력이 호족과 농민들이었다. 새로운 전국시대(戰國時代)인 후삼국시대에 돌입했던 것이다.

후삼국시대의 전단을 연 인물 중 하나인 견훤(甄萱)은 892년 완산주(完山州)에서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하고 연호를 정개(正開)로 정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진성여왕(眞聖女王) 조에서는 "무주(武州) 동남쪽의 군현(郡縣)이 모우 이에 항속(降屬)했다."고 적어 신라가 실제로 옛 백제 지역 대부분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견훤의 이력 중 특이한 것은 농민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상주 가은현(加恩縣)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견훤(甄萱) 조에는 그가 갓난아이였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주려고 아이를 수풀 아래 놓아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이니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견훤이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음을 말해주는 기록이지만 그의 부친이 일개 농민 출신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연(一然)은 삼국유사에서 고대 기록인 이비가기(李碑家記)를 인용해 아자개를 진흥왕(眞興王)의 혈통이라면서 그 혈통을 기록하고 있다. 진위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실제로 아자개는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사불성(沙弗城)에 웅거해 장군이라고 일컫는 등 평범한 농민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혼란한 세상에서 꿈을 실현하는 데에는 군인이 제일이라는 생각에 무관(武官)이 되어 서라벌에 갔다가 중앙의 통제권에서 떨어져 나간 서남해지방의 해상세력과 맞서 변경을 지키면서 출세의 계기를 잡는다. 삼국유사는 '(견훤이) 변경을 지키는데 창을 배개삼아 적군을 감시하니 그의 기상(氣象)은 항상 사졸(士卒)에 앞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군공(軍功)으로 장수가 된 그는 신라 중앙의 권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립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6년(서기 892년)에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는 진성여왕 재위 3년(서기 889년)에 무진주를 습격해 군왕이 되었으나 공공연하게 군왕이라 일컫지는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견훤(甄萱)이 은근히 반심(反心)을 품고 서울 서남쪽 주현들을 치니, 가는 곳마다 호응하여 그 무리가 달포 사이에 5천여명이나 되었다.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 이르기를, "(중략) 내가 지금 도읍을 완산(完山)에 정했으니 어찌 감히 의자왕(義慈王)의 숙분(宿憤)을 씻지 않으랴." 하고 드디어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자칭하며 관부(官府)를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어주니, 당(唐)의 광화(光華) 3년(서기 900년)이요, 신라 효공왕(孝恭王) 재위 4년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견훤전(甄萱傳)'

견훤은 889년 무렵 사실상 독립된 세력을 구축했으나 실제 후백제 건국을 선포한 때는 효공왕(孝恭王) 재위 4년(서기 900년)이었던 것이다. 견훤이 의자왕(義慈王)의 숙분(宿憤)을 씻겠노라 공언한 것은 앞으로의 대신라(對新羅) 정책의 방향을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삼국시대 또 하나의 축, 궁예(弓裔)의 성(姓)은 김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전(弓裔傳)은 "궁예의 아비는 제47대 국왕인 헌안왕(憲安王)이거나 제48대 국왕인 경문왕(景文王)"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궁예는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선종(善宗)이라는 법명(法名)을 지닌 승려가 되었는데 신라 말년 '여러 주현(州縣) 중 반기(反旗)를 든 곳과 복속한 곳이 서로 반반이고, 멀고 가까이서 여러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처럼 모이듯 하자' 그는 '세상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진성여왕 재위 5년(서기 891년) 기훤(箕萱)에게 귀의했다. 그러나 기훤이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이듬해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에게 가서 본격적인 장수(將帥)의 길로 들어섰다.

궁예는 '사졸(士卒)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같이 하여, 주고 빼앗는데 있어서도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평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를 추종해 장군으로 추대했다. 그는 양길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901년에 군왕을 자칭했는데, 이때 사람들에게 "옛날에 신라가 당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해져서 풀만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신라 왕족 출신이라던 그가 오히려 고구려 부흥을 꿈꾸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가 실제로 헌안왕이나 경문왕의 아들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궁예는 또 남쪽의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가서 벽에 그려진 신라 군왕의 상(像)을 보고 예검(銳劍)을 빼어 쳤는데, 삼국사기에는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 이력이 신라 왕실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을 만하다고 해도 실제 신라 왕족 출신이라면 자연스런 행위는 아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정하고, 국도(國都)를 철원(鐵原)으로 정했다. 이후 송악군(松嶽郡)의 호족 왕륭(王隆), 왕건(王建) 부자가 투항하자 철원군 태수를 제수하고 "송악군은 한수(漢水) 북쪽의 이름난 군(郡)으로 산수가 기이하고 수려하다."며, 도읍을 옮겼다.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궁예는 서라벌을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했고, 심지어 신라에서 오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 911년 궁예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궁예와 견훤은 둘 다 신라에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호족정책에 있어서도 호족들의 세력권을 인정하기보다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다.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한 궁예가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가사를 입고 큰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 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로 삼았으며, '외출할 때에는 항상 흰 말을 탔는데 말갈기와 꼬리를 고운 비단으로 장식했고, 소년 소녀로 하여금 깃발, 일산(日傘)과 향기로운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했다. 또 비구니(比丘尼) 2백여명을 시켜 범패(梵唄)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가 불법(佛法)에 의지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모든 관료, 장수 아전들 및 아래의 백성들까지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왕건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으로, 실상은 궁예가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 했던 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궁예의 이런 강력한 왕권 강화책은 호족들의 커다란 반발에 부딪혔다. 918년 6월 궁예의 휘하에 있던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왕건에게 모반을 권유할 때의 표면적 명분은 왕창근(王昌瑾)의 경문(鏡文) 사건 등의 요인이었지만 그 핵심은 궁예가 '신료를 斬首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료들은 왕건이 송악 지역에 기반을 둔 호족이었던 것처럼 대부분 특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삼는 호족들이었다. 궁예는 이런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것이 내부 반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부인 유씨(柳氏)까지 직접 갑옷과 무기를 갖자 주며 가세하자 왕건이 비로소 수락했는데 이때 여러 장수들이 그를 옹위하고 문을 나섰다는 기록은 왕건의 쿠데타가 여러 호족들의 합의에 의해 거행된 것임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호족들이 가세해 '앞뒤에서 분주하게 달려와 따르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먼저 궁성의 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사람이 또한 1만여명에 달했다'는 백주의 쿠데타를 막을 방법이 궁예에게는 없었다. 궁예는 결국 왕건을 대표로 하는 호족들의 반란에 의해 발흥한 지 28년만인 918년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산속으로 도망갔으나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당하고 말했다. 궁예의 뒤를 이은 왕건은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견훤도 일부 호족들은 회유하려 했으나 호족들에 대한 기본 정책은 궁예와 마찬가지로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910년 금성(錦城)의 호족세력이 궁예에게 투항하자 보기(步騎) 3천명을 동원해 공격한 것도 이런 사례다. 견훤은 자기 휘하 호족의 독자적 결정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견훤은 주로 군사력을 통해 각 지역의 호족들을 정복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920년 보기(步騎) 1만명을 동원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해 12월 거창 등 20여성을 공취(攻取)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견훤과 왕건 간의 한반도의 주인을 둘러싼 쟁패는 초반에는 군사력이 앞섰던 견훤의 우세로 전개되었다. 925년 조물성(曺物城)의 회전(會戰)에서 불리함을 느낀 왕건이 화친을 청하면서 사촌동생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낸 것은 양 세력 간 전력의 우열을 잘 보여준다. 견훤도 이에 호응해 사위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했는데, 2년 후 진호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고려에 대한 화친정책을 철회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는 독립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할 수 없는 종속변수로 전락했으나 신라의 지지를 얻는 것은 대세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요소였다. 그리고 외교정책에서 왕건은 견훤보다 한수 위였다. 견훤이 적대적인 정책으로 일관한 반면, 왕건은 시종일관 신라에 대해 유화적인 정책을 견지했다. 외교정책에 대한 양자의 이러한 차이가 결국 군사력의 간극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고려와의 화친정책이 붕괴된 927년 9월, 견훤은 근품성(近品城)과 신라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고 서라벌(徐羅伐)까지 진격했다. 서라벌을 점령한 견훤은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한 후 왕제(王弟) 김부(金傅)에게 왕위를 잇게 했으니 그가 바로 경순왕(敬順王)이다. 이때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정예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개선하는 견훤의 군대를 맞아 대구의 공산(公山) 아래서 교전했으나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이 전사하고 병력을 거의 잃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신라의 왕위를 마음대로 갈아 치운데다 왕건의 군대까지 전멸시킨 이 사건은 견훤의 압도적 우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신라 전체를 적으로 돌린 견훤에게 이 사건은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는 패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건은 비록 패배하고 두 장수까지 잃었지만 그 대가로 천년왕국 신라의 민심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각지를 장악한 호족들은 천년왕국의 임금까지 죽여 버리는 견훤의 무자비성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왕건은 이와는 달리 즉위하자마자 각지의 호족들에게 '후한 선물과 함께 자신을 낮추는 글(重幣卑辭)'을 보내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점이 왕건(王建)과 궁예(弓裔), 견훤(甄萱)의 차이점이었다. 궁예나 견훤이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강력한 왕권국가를 지향했다면 왕건은 호족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하는 호족 연합정권의 수립을 지향했다. 왕건은 이런 호족 연합정권의 대표가 되는데 만족했다. 이런 호족 연합정책의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결혼정책이다.

935년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이 항복하자 왕건은 경순왕의 백부인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취해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로 삼고 자신의 두 딸을 경순왕에게 출가시켜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었다. 신라 왕실과 중첩된 장인, 사위관계를 맺음으로써 왕건은 신라라는 전통세력의 지지를 획득한 것이었다.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두는데 나주 오씨 등 특수한 예를 빼면 이들 모두는 각지의 유력 호족 출신이었다.

왕건이 신라 왕실은 물론 각지의 호족들과 결혼정책을 매개로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동안, 견훤이 다스리는 후백제는 극심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 견훤은 여러 부인에게서 낳은 10여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략이 많다.'는 이유로 왕위를 전해주려 했는데, 이 후계구도에 그의 형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반발하고 나서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왕위 계승 다툼에 휘말려든 견훤은 935년 3월 신검의 쿠데타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6월에 탈출해 왕건에게 항복했다. 이때 왕건은 특유의 외교적 자질을 충분히 발휘했다.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10년 연장자라 하여 그를 높여 상부(尙父)로 부르게 하고 남쪽 궁궐을 주어 유숙하게 했으며, 지위는 백관의 최상위로 하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는 등 크게 우대했다. 후백제의 건국자 견훤이 왕건 편에 가담한 것은 후백제의 명을 재촉시켰다. 견훤의 아들들은 견훤과 왕건의 합동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936년 왕건은 10만 대군을 동원해 견훤을 앞세우고 후백제 공략에 나서 일리천전투(一利川戰鬪)의 승리로 삼한(三韓)을 통일하게 되었다. 후삼국 통일의 주역은 고려의 시조 왕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건의 통일은 강력한 군사력의 우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각지 호족들의 연합전선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후에 많은 과제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호족들은 비록 고려라는 테두리 내에 있었지만 작은 소왕국의 국왕과 비슷한 지위를 갖게 되었고, 이들을 고려 왕실의 체제 내로 흡수하는 것은 커다란 과제였다.

이를 위해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사심관(事審官)과 기인(基人) 제도를 도입했다. 각지 호족들에게 이는 당근과 채찍이었다. 즉 왕건은 각 호족들의 지배권을 인정해 그들을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삼아 지배하게 하는 한편, 이들이 세력을 키워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자제들을 국도(國都)로 불러들여 불모로 삼았다.

왕건은 또 신라 사회 붕괴의 중심 원인 중 하나였던 골품제를 폐지하고 이에 불만을 가진 6두품 지식인들을 대거 흡수해 새로운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게 했다. 또한 삼한 통합에 만족하지 않고 고구려 계승의식에 따른 북진정책을 강조했다. 고구려 계승을 국시로 삼은 왕건으로서는 당연한 주장이었으나 실행하기에는 왕권이 너무 미약했다. 호족 연합정권의 수장에 불과한 그에게 북진(北進)은 이상일 뿐이었다.

왕권의 호족 연합정책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는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으나 일단 통일에 성공한 순간부터는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각지를 장악한 호족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한 조치는 호족들 사이에 세력 확장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 발생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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