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太祖)와 혜종(惠宗), 정종(定宗)의 유산을 상속한 광종(光宗)은 강력한 왕권 강화책을 펼쳐 나갔다. 광종은 후주(後周) 출신의 귀화인 쌍기(雙冀)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아 그의 개혁이론을 국정에 반영했다. 광종의 이런 개혁정치는 그 목적이 전제군주제의 강화에 있었다. 이는 곧 무지비한 호족 숙청작업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종(景宗)의 뒤를 이은 성종(成宗)은 고려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를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로 바꾸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태조의 유훈과는 배치되는 측면이 있었다.
● 광종(光宗)의 등장과 왕권 강화책
개경세력과의 치열한 다툼 끝에 서경세력의 지원을 얻어 왕위에 오른 정종(定宗)은 재위 4년만인 949년 9월 중광전(重光殿)에서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정종의 사망으로 서경천도작업도 중지되었다. 정종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25세의 동복동생 소(昭)에게 제위를 넘겼는데 그가 바로 고려의 네번째 제왕인 광종(光宗)이다.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가 낳은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종이 광종을 후사로 삼은 것은 경춘원군이 어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호족세력에 맞서 왕권 강화작업을 추진하다가 많은 반발을 겪은 그로서는 어린 아들을 즉위시켰을 경우 호족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것이라 우려했을 것이다. 때문에 성인이 된 동생 소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이 왕권 강화의 현실적 대안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광종은 정종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정사(政事)를 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정종을 후원했던 서경세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데다가 외가 측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종(光宗)은 두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번째 부인인 대목황후(大穆皇后) 황보씨는 태조(太祖)와 신정황태후(神靜皇太后) 황보씨 사이에서 난 딸로서 황주(黃州) 지역의 유력한 호족가문이었다. 신정황태후의 부친 황보제공(皇甫悌恭)은 태조의 제22비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강씨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강씨는 태조의 한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자 광종을 길러 아들로 삼았던 것이다. 강씨(康氏)는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인데 이 지역도 패강진(浿江鎭)의 관할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태조와 혜종, 정종의 유산을 골고루 받을 수 있었던 광종은 비교적 안정적인 세력 기반 위에서 정책을 펼쳐 나갈 수 있었다. 광종이 우선적으로 시행하려 한 정책은 왕권 강화책이었다. 그러나 광종은 황형(皇兄)인 정종의 실패를 목도한 탓도 있어서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 못했고, 실제로 왕권 강화의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재위 초기에는 호족들과의 타협을 추구했다.
광종은 재위 원년(서기 950년) 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는 사건이 발생하자 사천대(司天臺)에 재앙을 물리치는 방법에 대해 하문했다. 사천대에서 덕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하자 광종은 덕을 쌓기 위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속독했다. 당(唐)의 오긍(吾兢)이 편찬한 정관정요는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 당(唐) 태종(太宗)의 치세를 기록한 책으로 군주의 자세와 치자(治者)의 기본적 자세를 기술하고 있다. 태종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는 영예스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중국 역사상 가장 왕권이 안정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했던 바람직한 시대로 꼽히고 있다. 광종은 당나라의 태종 재위기와 같은 왕권의 안정 및 민생의 편안함을 실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태종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그가 생각해도 무리였다. 단시일 내에 중국 전역을 무력(武力)으로 통일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여전히 호족들의 전횡에 시달리는 군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광종의 정치행위는 재위 7년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한다. 광종은 이 때를 기점으로 왕권 강화의 구체적 방법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광종은 재위 7년까지 온건한 방법으로 호족세력을 무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서히 왕권의 안정을 모색해 나갔다. 그러다 재위 7년째에 접어들면서 보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즉위 직후 광종은 대광(大匡) 박수경(朴守卿)에게 국초(國初)에 공훈(功勳)이 있던 자들을 네부류로 나누어 이들에게 쌀을 지급하라고 명령한 바 있었다. 가장 공이 많은 4역자(役者)에게는 쌀 25석, 3역자 20석, 2역자 15석, 1역자 12석을 하사하고 이를 예식(例食)으로 삼게 했다. 이는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각 지역의 호족들을 무마하고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서 광종 역시 이들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광종은 원보(元甫) 식회(式會) 등을 파견해 지방 주현이 해마다 중앙에 바치는 세공(歲貢) 액수를 정하게 했다. 이전까지는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방의 호족들이 백성들에게 공물을 납부받아 중앙에 상납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호족들은 백성들을 자의로 수탈했다. 광종은 호족들이 백성들을 수탈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해 호족들을 통제함으로써 백성들에 대한 과도한 착취를 방지하려 한 것이었다.
광종이 즉위년에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칭제(稱帝)를 선포한 것은 고구려 같은 거대왕국을 재건하려는 그의 야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독자적인 연호 사용은 안으로는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고, 밖으로는 중국과 대등한 자주의식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종은 중국과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독자적인 연호 사용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광종은 재위 2년(서기 951년) 12월에 후주(後周)의 연호를 사용하고 재위 3년에는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달(徐澾)을 사신으로 보내 후주를 중국의 전통왕조로 인정했다.
그런데 후주와의 교류는 통상적인 사신 교환 이상의 큰 영향을 광종에게 끼쳤다. 한 지식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후주가 953년 위위경(衛慰卿) 왕연(王演)을 보내 광종을 고려왕(高麗王)으로 책봉하자, 광종은 재위 6년 대상 왕융(王融)을 보내 후주의 두번째 제왕 세종(世宗)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러자 후주에서는 956년 장작감(將作監) 설문우(薛文遇)를 보내 광종에게 관직을 더해주면서 백관의 의복을 후주의 제도에 따라 하도록 권고했다. 그런데 이 때 설문우를 따라온 수행원 중에 전절도순관대리평사(前節度巡官大理評事) 쌍기(雙冀)가 있었다. 쌍기가 고려에서 병이 걸리는 바람에 귀국을 늦추게 된 것이 광종과 쌍기의 관계를 운명으로 만들었다.
광종은 그가 가진 개혁의 의지에 비해 개혁이론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쌍기가 바로 광종에게 부족한 개혁이론을 보유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쌍기와의 대화를 통해 이를 확인한 광종은 후주에 표를 올려 쌍기를 자신의 신하로 삼게 해 줄것을 청했고, 이것이 허락되자 쌍기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아 문병(文炳)을 맡겼다.
쌍기가 광종에게 제시한 정치개혁의 요체는 전제군주제의 강화로서 광종의 평소 생각과 잘 맞아 떨어졌다. 신분보다는 능력에 의해 등용하고 제왕의 지배를 받는 일반 양인들을 확대하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인데 이를 관철하는 과정이 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과거의 왕권 강화책과 달랐다.
956년부터 시작된 광종의 개혁정책은 이렇게 쌍기라는 개혁이론가의 이론을 광종이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956년에 실시한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은 호족이 아니라 국가의 직접 지배를 받는 양인층의 확대를 겨냥한 정책이었다.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이나 빚 때문에 호족의 노비가 된 자들을 판별해 다시 과거 신분으로 환원시킨 것이다. 노비안검법은 백성들을 국가가 직접 지배함으로써 국가 수취체제(收取體制)의 확대와 함께 호족과 공신들의 사적 군사 기반을 해체하는 효과도 있었다. 호족과 공신들에게 예속된 노비들은 때에 따라 호족과 공신들의 사병으로 기능하기도 했던 것이다. 노비안검법은 이렇게 호족 출신 공신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기에 호족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심지어 황주의 유력 호족 출신인 광종의 부인 대목황후 황보씨가 시행 중단을 요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광종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958년에는 과거제(科擧制)를 강행 실시했다. 한림학사 쌍기를 지공거(知貢擧)에 임명해 실시한 과거에는 시(詩), 부(賦), 송(訟)과 시무책(時務策)으로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광종은 직접 위봉루(威鳳樓)에 나아가 방(榜)을 발표하고 갑과(甲科)에 최섬(崔暹) 등 2인, 명경(明經)에 3인, 복업(卜業)에 2인 등을 급제시켰다. 광종이 과거제를 이토록 중시했던 이유는 과거제가 관료 선발에 있어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기존 관료들은 대개 개국전쟁 와중에 공을 세운 무인들로서, 이들은 국가 수립에 필요한 군사적 실력은 있었지만 개국 후의 정치, 행정체제를 구축해 나갈 능력은 부족한 인물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소유한 군사력은 왕권 강화에 부담이 되었다. 반면 과거제를 통해 배출된 신진 관료들은 지방 중소호족 출신들로서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제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신진 관료들은 개국무훈공신(開國武勳功臣) 세력의 전횡을 견제하는 새로운 지배층의 형성을 뜻했다. 과거제 시행 이후 관료제사회 혹은 문벌귀족사회라는 명칭이 나올 정도로 과거제는 고려의 지배층을 교체하는 획기적 전기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이는 왕권 강화의 획기적인 계기였다.
960년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한 것도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원윤(元尹) 이상은 자삼(紫衫), 중단경(中壇卿) 이상은 단삼(丹衫), 도항경(都航卿) 이상은 녹삼(綠衫)으로 품계에 따라 다른 색깔의 의관을 착용하게 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계급과 질서를 부여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군주와 신하 사이 분명한 계선을 긋는 효과가 있었다. 공복 제정은 이 무렵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 지배체제가 거의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같은 해에 광종은 개경(開京)을 황도(皇都), 서경(西京)을 서도(石)로 부르게 하고, 후주가 쇠퇴하고 송나라가 중원의 패자가 되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적극 이용해 고려 황실의 위엄을 높이고 고려의 자주적인 측면을 강조할 목적으로 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새로 지정해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종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대립하면서까지 자주노선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중국 5대(後周, 後梁, 後唐, 後晉, 後漢)의 혼란기가 송(宋)에 의해 통일되자 962년에 이흥우(李興祐)를 송에 보내 방물을 바치고 이듬해 12월부터는 송의 연호 건덕(乾德)을 사용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결국 광종의 몇 차례에 걸친 연호 제정이나 황도 선포 등은 국내 정치적 요인에 무게를 둔 것이었다. 국내적으로 황제를 자칭함으로써 호족들의 도전의지를 꺾으려 함이었다.
광종의 이런 왕권 강화작업이 호족세력에 대한 숙청을 수반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광종은 이속(吏屬)으로 추측되는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과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했다."고 고발하자 이를 받아들여 준홍 등을 내쫓았다. 이속의 고발을 받아들여 대신들을 축출한 것은 고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런만큼 변화를 불러왔다. 고려사(高麗史)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때부터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충성스럽고 현량한 사람들을 모함했으며 노비가 그 주인을 고소하고, 자식은 그 부모를 참소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 차게 되어 임시 감옥까지 생겨났다. 죄 없이 죽는 자가 계속 생겨나고 시기하는 버릇이 날로 심해 갔다. 왕실 일족들도 많이 잡혀 죽였는데 왕은 외아들 주(綢)까지 의심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잘 아는 두 사람끼리도 감히 서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고려사(高麗史) 광종(光宗) 11년조'
이는 광종의 개혁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에서 기술된 것이다. 광종의 개혁정책에 가장 큰 비판자였던 최승로(崔承老)가 성종(成宗)에게 올린 상소문에 의하면 "경종(景宗)이 즉위할 때 옛 신하로서 살아 남은 자가 40여명뿐이었다."고 할 정도로 호족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광종이 이런 정책들을 시행하면서 지방 각 주, 현에서 건장한 자들을 뽑아 시위군에 충당한 것은 호족들의 반발을 의식한 것으로서 광종의 개혁정책이 어느 정도의 긴장 속에서 실시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런 개혁정책들은 쌍기(雙冀)가 후주(後周)에 있을 때 임금이었던 태조(太祖)와 세종(世宗)이 실시했던 개혁정책과 비슷했다. 당시 고려와 후주는 둘 다 독자적인 무력(武力)을 지닌 호족들의 존재가 왕권 강화에 장애가 되는 상황이었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층이나 국가의 과세권 밖에 이쓴 유망 농민 및 노비들이 다수 존재하는 상황 또한 같았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통해 노비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킨 것이나 후주의 세종이 유망 농민들의 전토를 환원해주어 귀향케 한 것은 모두 왕권의 강화와 국가 조세수입의 증대를 위한 것이었다. 광종의 과거제 실시는 후주의 태조가 문신(文臣)들을 대거 등용하고 세종이 그들을 우대한 것과 마찬가지 정책이었으며, 광종이 시위군을 강화한 것도 후주의 세종이 전국에서 무예에 능통한 자들을 봅아 친위군인 전전군(殿前軍)으로 삼아 왕권의 수호자로 삼은 것과 동질의 성격이었다.
한편 광종은 이런 일련의 개혁들을 단행하는 과정에 이를 수행할 문사들이 부족하자 멀리 외국에서 수입해 개혁세력을 보강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은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쌍기(雙冀)가 귀화한 이후부터 문사를 존중해 읂?ㅖ와 예가 너무 융숭하니 재주 없는 자가 외람되이 진출하여 계급을 뛰어 갑자기 승진해 1년도 안되어 바로 경상(卿相)이 되었다. (중략)멀리 중국 남방과 북방의 용렬한 사람들[南北庸人]까지도 특별한 예로써 대접하니 이 때문에 젊은 무리들이 다투어 진출하고 옛 덕망있는 사람들이 점차 쇠진했다. (중략) 중국의 선비는 예로써 대접했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는 얻지 못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최승로(崔承老) 편'
이는 광종의 개혁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기술한 것으로서, 광종이 개혁 추진 세력을 중국에서 영입하고 우대한 사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광종의 이런 외국 지식인 우대정책은 그들에게 살 집을 취택해 배정해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처녀마저 택해서 줄 정도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광종이 단순히 쌍기의 조언에만 의지하여 개혁정책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광종은 불교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다. 대목황후 황보씨와 같은 황주 출신의 승려 균여(均如)의 성상융회사상(性相融會思想)이 그것이다. 성상융회사상이란 교종(敎宗) 중에서 성종(性宗)에 속하는 화엄종(華嚴宗)과 상종(相宗)에 속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융합돤 사상체계를 말한다. 화엄종은 모든 것이 하나로 귀일된다는 사상으로서 국왕의 전제왕권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이었다. 반면 법상종은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해 귀일점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의 차이점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상이었다. 즉 개인이나 개체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여 각각의 처지에 맞는 설법을 듣거나 수행을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으롯, 고려 초기 이래 주로 지방의 중소호족들에게 수용되었다. 균여는 원래 화엄종의 승려였는데, 그의 성상융회사상은 화엄종의 견지에서 법상종을 융회하려는 것이었다. 균여의 이러한 사상은 대호족들을 억압하고 지방의 중소호족들을 등용하여 전제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광종에게 수용되었다.
광종은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이 개혁철학을 담고 있음을 간파하고 균여를 중용했다. 963년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빈민구제제단인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해 균여에게 맡겼다. 광종은 균여 다음에는 탄문(坦文)을 중용했는데, 968년에 왕사(王師), 국사(國師)라는 직책을 설치해 탄문을 왕사에 임명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재위 19년에 귀법사의 승려 정수(正秀)가 균여를 참소한 이후, 균여가 광종과 멀어지면서 균여를 대신한 승려가 탄문이었다.
흔히 광종의 숭불정책(崇佛政策)을 개혁정치 수행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인 죄업을 씻기 위한 것이라 설명해 왔으나, 광종에게 불교는 그런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을 넘어선 사회적인 의미를 띠는 사상이었던 것이다. 즉 개혁의 사상적 토대를 바깥에서는 쌍기에서 찾고 안에서는 불교에서 찾았던 그였기에, 숭불신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6년간 재위했던 광종은 975년 51세의 나이로 정침(正寢)에서 사망했다. 그가 행한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 공복 제정 들은 모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삼은 일련의 개혁적 조치들이었고, 이를 통해 목표했던 바가 어느 정도 진척을 본 것이 사실이다. 성종(成宗) 때 최승로의 비판처럼 한편으로 많은 반발을 받기도 했으나, 광종의 정치, 제도적 개혁 조치들은 고려왕조의 안정과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간과될 수가 없는 것이다.
● 과도기 경종(景宗)과 유교정치를 확립시킨 성종(成宗)
광종(光宗)의 뒤를 이은 인물은 광종과 대목황후(大穆皇后) 사이에서 난 만 20세의 맏아들 경종(景宗)이었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선황 광종이 전혀 예상치 못했을 조치들을 명했다. 사면령을 내려 광종 재위기에 귀양 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었으며, 승진하지 못한 사람들을 발탁하고 관직을 빼앗긴 사람들을 복직시켜 주었다. 그리고 조세를 감면해 주고 임시 감옥을 헐어 버렸으며, 참서를 불사르도록 했다.
국왕이 새로 즉위한 후 대사면을 베푸는 것은 의례건 있는 일이지만 경종 즉위 초의 이런 조치들은 경우가 달랐다. 이들은 보통 통상적인 법률과 범죄에 의해 처벌받은 인물들이 아니라, 부왕 광종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의도적으로 정국에서 배제된 인물들이었다. 광종은 이를 개혁정치라고 판단했었다. 광종은 이런 정책들을 통해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를 실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후사 경종이 귀양 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거나 복직을 시키고, 임시 감옥을 헐어 버리고, 참서를 불사른 일들은 명백히 부왕의 개혁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행위였다.
이렇게 경종이 부왕의 개혁정치를 원점으로 돌리는 조치를 취한 배경에는 그의 외가인 황주 황보씨가 있었을 것이다. 즉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시행 중단을 요청할 정도로 광종의 개혁에 적대적이었던 대목황후가 광종의 사망과 더불어 각종 개혁 조치들을 원점으로 돌리도록 경종을 압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조치들은 광종 재위기에 타격을 입었던 호족 개국공신세력을 다시 등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경종은 재위 원년(서기 976년) 광종 때에 참소당해 죽은 자의 자손들에게 복수를 허락했다. 이 조치는 고려사(高麗史) 경종(景宗) 조에서 "서로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해 또 억울한 일이 생겼다."고 기록할 정도로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심지어 왕선(王詵)이 원수를 갚는다며 태조(太祖)의 아들인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죽이는 일까지 발생해 최승로(崔承老)가 "천안(天安), 진주(鎭州)의 두 낭군(郎君)만은 본래 황가의 후손이어서 광종 황제께서도 너그럽게 대우하여 마침내 처형하지 않았는데, 경종 때에 와서 울타리가 될 만한데도 문득 권신의 해침을 당했으니 어찌 원통하고 애석하지 않겠는가?"라고 한탄할 정도였으니 여타의 복수극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경종은 왕선을 외방으로 내쫓고 복수법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작용과 반작용이 반복되면서 혼란이 거듭되자, 경종과 고려의 지배계급은 국가의 질서체계 내에서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경종이 재위 원년 11월에 제정한 전시과(田柴科) 제도는 이런 시도였다. 이는 관료들에 대한 제왕의 지배권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이지만, 관품의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않고 인품에 따른다는 점에서 자의적 요소가 개재된 것이었다. 인품은 결국 세력의 크기에 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세력 있는 호족들이 보다 많은 토지를 지급받게 되어 있었다. 나아가 이듬해 3월 개국공신 등에게 훈전(勳田)을 지급했는데, 이는 세습이 가능한 토지로서 호족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해 주는 조치였다.
그렇다고 경종이 광종의 모든 조치들을 원점으로 돌린 것은 아니었다. 호족들의 이해와는 배치되었지만, 같은 해 경종은 과거제(科擧制)를 재개했다. 경종의 이러한 상반된 조치들은 일면 호족과의 타협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포석이겠지만 일관성이 결여되어 두가지 모두 실패할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상반된 두가지 정책을 모두 성공시키려면 강력한 왕권과 비상한 정치력이 요구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경종은 그렇지 못했다. 경종 재위 말년의 "정사(政事)를 게을리하여 날마다 오락을 일삼고, 주색(酒色)에 바지고 바둑을 즐기고 소인을 가까이하여 군자를 멀리하면서 정치와 교화가 쇠퇴했다."는 기록은 두가지 상반된 정책 목표를 이루려다 모두 실패한 듯한 모습을 봉보여주고 있다.
경종(景宗)은 만 26세 때인 재위 6년(서기 981년) 6월에 병들어 누웠고, 다음 달에 위독해지자 이복동생 개령군(開寧君)을 불러 제위를 물려준 뒤 사망했다. 제위를 이은 개령군이 바로 고려 제6대 황제인 성종(成宗)이다. 왜 그가 선택되었는지에 대해 고려사(高麗史)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그의 혈통에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성종의 아버지는 태조(太祖)와 신정황태후(神靜皇太后) 황보씨(皇甫氏) 사이에서 태어난 대종(戴宗) 욱(旭)이다. 왕욱은 황제가 되지 못했으므로 묘호가 없었는데, 그 아들 성종이 제위에 오르면서 대종이라는 묘호가 추존되었다. 성종의 어머니는 태조의 딸인 선의황후(宣義皇后) 유씨(柳氏)로서 아버지 대종(戴宗)과는 이복남매 사이였다.
성종은 어머니 선의황후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할머니인 신정황태후의 품에서 자랐고, 광종의 딸 문덕황후(文德皇后) 유씨(劉氏)와 결혼했다. 문덕황후 유씨는 초혼이 아니라 태조와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 사이에서 난 홍덕원군(弘德院君) 규(圭)에게 시잡갔다가 성종과 재혼한 경우였다. 광종의 딸이라지만 광종에게 유씨 성을 가진 후비가 없었으므로 그녀의 성씨가 유씨인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이런 혈통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성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태조와 황주의 유력 호족인 황보씨의 손자에다 광종의 딸이 부인인 혈통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성종의 치세는 한마디로 고려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를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로 바꾸는데 있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태조가 사왕(嗣王)들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팔관회(八關會)는 천령(天靈)과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며, 이를 잘 지키라고 당부했었다. 그러나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팔관회의 잡기들이 떳떳하지 못하고 번잡스럽다는 이유로 폐지한다.
성종은 또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삼성육부제(三省六部制)를 실시했다. 982년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 및 어사 6관을 설치했다가 995년에는 관제를 개편해 내사문하성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어사도성을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개 창하면서 3성(省)6부(部)체제를 본격화했다.
983년에는 지방에 12목(牧)을 설치해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써 기존에 호족이 지배하던 지방을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지배하는 형식으로 진일보시켰다. 성종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식 유교정치체제의 틀 속에서 이를 달성하려 한 점이 달랐다. 성종은 역대 황제들의 신주를 모시는 중국식 태묘(太廟),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社稷), 공자(孔子)를 제사하는 문묘(文廟) 등을 설치하는 등 유교에 바탕을 둔 중국식 유교정치체제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고려는 제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성종은 개국 이래 사용해 오던 조서(詔書)라는 용어를 제후의 용어인 교서(敎書)라고 개칭해, 스스로 제후국으로 격하시켰다. 이는 송나라와의 관계가 불편해질 것을 우려해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에 편입됨으로써 고려의 안정을 꾀하려는 현실적인 정책이기는 했지만 태조가 지향했던 황제국 체제의 공식적인 폐기라는 문제점이 있었다.
고려의 전통적 체제를 중국식으로 바꾸는데 대한 반발도 물론 있었다. 중국식 정치체제가 숭무정신(崇武精神)을 약화시켜 국력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반발이었다. 993년에 요(遼)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할지론(割地論)에 맞서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던 이지백(李知白)은 "경솔히 국토를 떼어주기보다는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타국의 색다른 풍습을 본받지 말아 국가를 보전하자."고 주장했는데, 여기에서 타국은 물론 중국을 말하는 것이었다.
광종(光宗)의 개혁정치가 쌍기(雙冀)의 이념 제공으로 수행되었다면 성종(成宗)의 그것은 최승로(崔承老)를 비롯한 최지몽(崔知夢), 최양(崔亮), 이양(李陽), 김심언(金審言) 등 유학자들의 이념 제공으로 수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경주 출신의 6두품 계열이거나 후백제 지역 출신들인데, 그 중 최승로의 유명한 '시무28조'를 통해 그 이념적 성향을 분석해 볼 수 있다.
최승로는 경주 출신의 6두품 계열로서 아버지는 신라에서 원보(元甫)를 역임한 최은함(崔殷含)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소문나 12세 때 태조(太祖)가 불러 논어(論語)를 시험할 정도였다. 이 때 태조는 그에게 염분(鹽盆), 안마(鞍馬), 쌀 20석을 상으로 내리고 원봉성(元鳳省) 학생(學生)으로 재학하게 했다. 이렇듯 12세에 이미 논어에 막힘이 없을 정도였다는 점에서 유교에 대한 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종 때까지 문서 작성을 주로 하는 문한(文翰)을 맡아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그러던 성종 재위 원년 3월에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은 각각 글을 올려 현행 정치의 득실을 논하라."는 성종의 구언(求言)에 응해 장문의 상소를 올림으로써 두각을 나타낸다.
상소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앞부분의 오조정적평(五朝政積評)은 태조부터 경종까지 다섯 황제의 치적을 논한 글이다. 최승로는 태조에 대해서는 극도의 예찬으로 일관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군주임을 밝혔고, 나머지 네 임금에 대해서는 공과(功科)를 함께 지적하고 있다. 이 중 광종에 대해서는 '즉위 후 7년 동안은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삼대의 이상시대에 비길 만큼' 높이 평가했으나, 재위 7년(서기 956년)부터 "쌍기와 같이 쓸 데 없는 사람을 중용해 측근 세력을 제외하고는 군신 사이의 대화가 막히고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어 커다란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뒷부분의 '시무28조'는 성종이 새 황제로서 해야 하 당면 과제들에 대해 지적한 것으로서, 고려사(高麗史) 최승로전(崔承老傳)에는 22조만이 전한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견지에서 그는 불교의 폐단에 대해 여러차례 지적한다. 그런데 최승로의 불교 비판은 불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불교에서 파생된 폐단에 의한 비판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즉 '불교는 수신(修身)의 도(道)이고, 유교는 치국(治國)의 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유불(儒佛共存)의 철학이다. 따라서 그가 비판한 것은 불교 자체가 아니라 불보전곡(佛寶錢穀)의 폐단 및 승려의 궁중 출입과 역관(驛館) 유숙, 불상 조제 때 금은(金銀) 사용 문제 등의 표면적인 것이었다.
광종의 개혁정치에 커다란 반감을 갖고 있던 그는 광종 재혁 이전 상태로의 환원을 희구했다. 군주는 근면하되 교만하지 말고 신하를 대할 때 공손히 하며 죄는 경중에 따라 법에 의할 것을 청한 것은 광종의 호족 숙청을 비판한 것이었다. 또 광종 때 급속히 늘어난 시위군졸(侍衛軍卒)의 감원을 요청하고 황실 내속 노비의 감소를 요구한 것도 왕권의 제한적 사용을 요구한 것에 다름 아니며, 광종 때에 몰락한 삼한공신 자손의 복권과 양천(良賤)의 구분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한 것 역시 광종 개혁 이전 상태로의 환원을 주장한 것이었다. 팔관회와 연등회의 축소와 음사(淫祀)와 번잡스러운 제사의 중지를 요청한 것은 유교정치체제의 수립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의 이런 시무책(時務策)은 최승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를 바라는 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로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유학정치체제를 지향했던 성종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성종은 16년의 치세 동안 중앙에는 3성 6부제, 지방에는 12목을 설치해 내외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유교를 고려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시키려 노력했다. 이는 성종 혼자만의 의지라기보나는 최승로, 최지몽 등 유교정치체제를 운영해 갈 유학층의 성장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골 개국 초기의 비체계적인 정치제도의 개편을 요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는 긍정적인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종(成宗)은 그 시호처럼 고려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임금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제도가 중국식 유교정치체제 일색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만 평가될 수는 없다. 이후 고려의 문약(文弱) 현상의 시저에 성종(成宗)대에 완성된 중국식 유교정치체제가 있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한국사 강론」20.호족 숙청과 유교정치체제의 지향
태조(太祖)와 혜종(惠宗), 정종(定宗)의 유산을 상속한 광종(光宗)은 강력한 왕권 강화책을 펼쳐 나갔다. 광종은 후주(後周) 출신의 귀화인 쌍기(雙冀)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아 그의 개혁이론을 국정에 반영했다. 광종의 이런 개혁정치는 그 목적이 전제군주제의 강화에 있었다. 이는 곧 무지비한 호족 숙청작업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종(景宗)의 뒤를 이은 성종(成宗)은 고려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를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로 바꾸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태조의 유훈과는 배치되는 측면이 있었다.
● 광종(光宗)의 등장과 왕권 강화책
개경세력과의 치열한 다툼 끝에 서경세력의 지원을 얻어 왕위에 오른 정종(定宗)은 재위 4년만인 949년 9월 중광전(重光殿)에서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정종의 사망으로 서경천도작업도 중지되었다. 정종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25세의 동복동생 소(昭)에게 제위를 넘겼는데 그가 바로 고려의 네번째 제왕인 광종(光宗)이다.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가 낳은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종이 광종을 후사로 삼은 것은 경춘원군이 어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호족세력에 맞서 왕권 강화작업을 추진하다가 많은 반발을 겪은 그로서는 어린 아들을 즉위시켰을 경우 호족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것이라 우려했을 것이다. 때문에 성인이 된 동생 소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이 왕권 강화의 현실적 대안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광종은 정종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정사(政事)를 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정종을 후원했던 서경세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데다가 외가 측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종(光宗)은 두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번째 부인인 대목황후(大穆皇后) 황보씨는 태조(太祖)와 신정황태후(神靜皇太后) 황보씨 사이에서 난 딸로서 황주(黃州) 지역의 유력한 호족가문이었다. 신정황태후의 부친 황보제공(皇甫悌恭)은 태조의 제22비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강씨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강씨는 태조의 한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자 광종을 길러 아들로 삼았던 것이다. 강씨(康氏)는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인데 이 지역도 패강진(浿江鎭)의 관할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태조와 혜종, 정종의 유산을 골고루 받을 수 있었던 광종은 비교적 안정적인 세력 기반 위에서 정책을 펼쳐 나갈 수 있었다. 광종이 우선적으로 시행하려 한 정책은 왕권 강화책이었다. 그러나 광종은 황형(皇兄)인 정종의 실패를 목도한 탓도 있어서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 못했고, 실제로 왕권 강화의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재위 초기에는 호족들과의 타협을 추구했다.
광종은 재위 원년(서기 950년) 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는 사건이 발생하자 사천대(司天臺)에 재앙을 물리치는 방법에 대해 하문했다. 사천대에서 덕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하자 광종은 덕을 쌓기 위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속독했다. 당(唐)의 오긍(吾兢)이 편찬한 정관정요는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 당(唐) 태종(太宗)의 치세를 기록한 책으로 군주의 자세와 치자(治者)의 기본적 자세를 기술하고 있다. 태종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는 영예스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중국 역사상 가장 왕권이 안정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했던 바람직한 시대로 꼽히고 있다. 광종은 당나라의 태종 재위기와 같은 왕권의 안정 및 민생의 편안함을 실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태종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그가 생각해도 무리였다. 단시일 내에 중국 전역을 무력(武力)으로 통일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여전히 호족들의 전횡에 시달리는 군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광종의 정치행위는 재위 7년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한다. 광종은 이 때를 기점으로 왕권 강화의 구체적 방법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광종은 재위 7년까지 온건한 방법으로 호족세력을 무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서히 왕권의 안정을 모색해 나갔다. 그러다 재위 7년째에 접어들면서 보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즉위 직후 광종은 대광(大匡) 박수경(朴守卿)에게 국초(國初)에 공훈(功勳)이 있던 자들을 네부류로 나누어 이들에게 쌀을 지급하라고 명령한 바 있었다. 가장 공이 많은 4역자(役者)에게는 쌀 25석, 3역자 20석, 2역자 15석, 1역자 12석을 하사하고 이를 예식(例食)으로 삼게 했다. 이는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각 지역의 호족들을 무마하고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서 광종 역시 이들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광종은 원보(元甫) 식회(式會) 등을 파견해 지방 주현이 해마다 중앙에 바치는 세공(歲貢) 액수를 정하게 했다. 이전까지는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방의 호족들이 백성들에게 공물을 납부받아 중앙에 상납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호족들은 백성들을 자의로 수탈했다. 광종은 호족들이 백성들을 수탈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해 호족들을 통제함으로써 백성들에 대한 과도한 착취를 방지하려 한 것이었다.
광종이 즉위년에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칭제(稱帝)를 선포한 것은 고구려 같은 거대왕국을 재건하려는 그의 야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독자적인 연호 사용은 안으로는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고, 밖으로는 중국과 대등한 자주의식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종은 중국과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독자적인 연호 사용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광종은 재위 2년(서기 951년) 12월에 후주(後周)의 연호를 사용하고 재위 3년에는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달(徐澾)을 사신으로 보내 후주를 중국의 전통왕조로 인정했다.
그런데 후주와의 교류는 통상적인 사신 교환 이상의 큰 영향을 광종에게 끼쳤다. 한 지식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후주가 953년 위위경(衛慰卿) 왕연(王演)을 보내 광종을 고려왕(高麗王)으로 책봉하자, 광종은 재위 6년 대상 왕융(王融)을 보내 후주의 두번째 제왕 세종(世宗)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러자 후주에서는 956년 장작감(將作監) 설문우(薛文遇)를 보내 광종에게 관직을 더해주면서 백관의 의복을 후주의 제도에 따라 하도록 권고했다. 그런데 이 때 설문우를 따라온 수행원 중에 전절도순관대리평사(前節度巡官大理評事) 쌍기(雙冀)가 있었다. 쌍기가 고려에서 병이 걸리는 바람에 귀국을 늦추게 된 것이 광종과 쌍기의 관계를 운명으로 만들었다.
광종은 그가 가진 개혁의 의지에 비해 개혁이론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쌍기가 바로 광종에게 부족한 개혁이론을 보유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쌍기와의 대화를 통해 이를 확인한 광종은 후주에 표를 올려 쌍기를 자신의 신하로 삼게 해 줄것을 청했고, 이것이 허락되자 쌍기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아 문병(文炳)을 맡겼다.
쌍기가 광종에게 제시한 정치개혁의 요체는 전제군주제의 강화로서 광종의 평소 생각과 잘 맞아 떨어졌다. 신분보다는 능력에 의해 등용하고 제왕의 지배를 받는 일반 양인들을 확대하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인데 이를 관철하는 과정이 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과거의 왕권 강화책과 달랐다.
956년부터 시작된 광종의 개혁정책은 이렇게 쌍기라는 개혁이론가의 이론을 광종이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956년에 실시한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은 호족이 아니라 국가의 직접 지배를 받는 양인층의 확대를 겨냥한 정책이었다.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이나 빚 때문에 호족의 노비가 된 자들을 판별해 다시 과거 신분으로 환원시킨 것이다. 노비안검법은 백성들을 국가가 직접 지배함으로써 국가 수취체제(收取體制)의 확대와 함께 호족과 공신들의 사적 군사 기반을 해체하는 효과도 있었다. 호족과 공신들에게 예속된 노비들은 때에 따라 호족과 공신들의 사병으로 기능하기도 했던 것이다. 노비안검법은 이렇게 호족 출신 공신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기에 호족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심지어 황주의 유력 호족 출신인 광종의 부인 대목황후 황보씨가 시행 중단을 요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광종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958년에는 과거제(科擧制)를 강행 실시했다. 한림학사 쌍기를 지공거(知貢擧)에 임명해 실시한 과거에는 시(詩), 부(賦), 송(訟)과 시무책(時務策)으로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광종은 직접 위봉루(威鳳樓)에 나아가 방(榜)을 발표하고 갑과(甲科)에 최섬(崔暹) 등 2인, 명경(明經)에 3인, 복업(卜業)에 2인 등을 급제시켰다. 광종이 과거제를 이토록 중시했던 이유는 과거제가 관료 선발에 있어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기존 관료들은 대개 개국전쟁 와중에 공을 세운 무인들로서, 이들은 국가 수립에 필요한 군사적 실력은 있었지만 개국 후의 정치, 행정체제를 구축해 나갈 능력은 부족한 인물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소유한 군사력은 왕권 강화에 부담이 되었다. 반면 과거제를 통해 배출된 신진 관료들은 지방 중소호족 출신들로서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제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신진 관료들은 개국무훈공신(開國武勳功臣) 세력의 전횡을 견제하는 새로운 지배층의 형성을 뜻했다. 과거제 시행 이후 관료제사회 혹은 문벌귀족사회라는 명칭이 나올 정도로 과거제는 고려의 지배층을 교체하는 획기적 전기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이는 왕권 강화의 획기적인 계기였다.
960년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한 것도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원윤(元尹) 이상은 자삼(紫衫), 중단경(中壇卿) 이상은 단삼(丹衫), 도항경(都航卿) 이상은 녹삼(綠衫)으로 품계에 따라 다른 색깔의 의관을 착용하게 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계급과 질서를 부여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군주와 신하 사이 분명한 계선을 긋는 효과가 있었다. 공복 제정은 이 무렵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 지배체제가 거의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같은 해에 광종은 개경(開京)을 황도(皇都), 서경(西京)을 서도(石)로 부르게 하고, 후주가 쇠퇴하고 송나라가 중원의 패자가 되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적극 이용해 고려 황실의 위엄을 높이고 고려의 자주적인 측면을 강조할 목적으로 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새로 지정해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종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대립하면서까지 자주노선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중국 5대(後周, 後梁, 後唐, 後晉, 後漢)의 혼란기가 송(宋)에 의해 통일되자 962년에 이흥우(李興祐)를 송에 보내 방물을 바치고 이듬해 12월부터는 송의 연호 건덕(乾德)을 사용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결국 광종의 몇 차례에 걸친 연호 제정이나 황도 선포 등은 국내 정치적 요인에 무게를 둔 것이었다. 국내적으로 황제를 자칭함으로써 호족들의 도전의지를 꺾으려 함이었다.
광종의 이런 왕권 강화작업이 호족세력에 대한 숙청을 수반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광종은 이속(吏屬)으로 추측되는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과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했다."고 고발하자 이를 받아들여 준홍 등을 내쫓았다. 이속의 고발을 받아들여 대신들을 축출한 것은 고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런만큼 변화를 불러왔다. 고려사(高麗史)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때부터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충성스럽고 현량한 사람들을 모함했으며 노비가 그 주인을 고소하고, 자식은 그 부모를 참소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 차게 되어 임시 감옥까지 생겨났다. 죄 없이 죽는 자가 계속 생겨나고 시기하는 버릇이 날로 심해 갔다. 왕실 일족들도 많이 잡혀 죽였는데 왕은 외아들 주(綢)까지 의심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잘 아는 두 사람끼리도 감히 서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고려사(高麗史) 광종(光宗) 11년조'
이는 광종의 개혁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에서 기술된 것이다. 광종의 개혁정책에 가장 큰 비판자였던 최승로(崔承老)가 성종(成宗)에게 올린 상소문에 의하면 "경종(景宗)이 즉위할 때 옛 신하로서 살아 남은 자가 40여명뿐이었다."고 할 정도로 호족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광종이 이런 정책들을 시행하면서 지방 각 주, 현에서 건장한 자들을 뽑아 시위군에 충당한 것은 호족들의 반발을 의식한 것으로서 광종의 개혁정책이 어느 정도의 긴장 속에서 실시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런 개혁정책들은 쌍기(雙冀)가 후주(後周)에 있을 때 임금이었던 태조(太祖)와 세종(世宗)이 실시했던 개혁정책과 비슷했다. 당시 고려와 후주는 둘 다 독자적인 무력(武力)을 지닌 호족들의 존재가 왕권 강화에 장애가 되는 상황이었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층이나 국가의 과세권 밖에 이쓴 유망 농민 및 노비들이 다수 존재하는 상황 또한 같았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통해 노비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킨 것이나 후주의 세종이 유망 농민들의 전토를 환원해주어 귀향케 한 것은 모두 왕권의 강화와 국가 조세수입의 증대를 위한 것이었다. 광종의 과거제 실시는 후주의 태조가 문신(文臣)들을 대거 등용하고 세종이 그들을 우대한 것과 마찬가지 정책이었으며, 광종이 시위군을 강화한 것도 후주의 세종이 전국에서 무예에 능통한 자들을 봅아 친위군인 전전군(殿前軍)으로 삼아 왕권의 수호자로 삼은 것과 동질의 성격이었다.
한편 광종은 이런 일련의 개혁들을 단행하는 과정에 이를 수행할 문사들이 부족하자 멀리 외국에서 수입해 개혁세력을 보강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은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쌍기(雙冀)가 귀화한 이후부터 문사를 존중해 읂?ㅖ와 예가 너무 융숭하니 재주 없는 자가 외람되이 진출하여 계급을 뛰어 갑자기 승진해 1년도 안되어 바로 경상(卿相)이 되었다. (중략)멀리 중국 남방과 북방의 용렬한 사람들[南北庸人]까지도 특별한 예로써 대접하니 이 때문에 젊은 무리들이 다투어 진출하고 옛 덕망있는 사람들이 점차 쇠진했다. (중략) 중국의 선비는 예로써 대접했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는 얻지 못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최승로(崔承老) 편'
이는 광종의 개혁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기술한 것으로서, 광종이 개혁 추진 세력을 중국에서 영입하고 우대한 사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광종의 이런 외국 지식인 우대정책은 그들에게 살 집을 취택해 배정해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처녀마저 택해서 줄 정도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광종이 단순히 쌍기의 조언에만 의지하여 개혁정책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광종은 불교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다. 대목황후 황보씨와 같은 황주 출신의 승려 균여(均如)의 성상융회사상(性相融會思想)이 그것이다. 성상융회사상이란 교종(敎宗) 중에서 성종(性宗)에 속하는 화엄종(華嚴宗)과 상종(相宗)에 속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융합돤 사상체계를 말한다. 화엄종은 모든 것이 하나로 귀일된다는 사상으로서 국왕의 전제왕권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이었다. 반면 법상종은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해 귀일점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의 차이점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상이었다. 즉 개인이나 개체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여 각각의 처지에 맞는 설법을 듣거나 수행을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으롯, 고려 초기 이래 주로 지방의 중소호족들에게 수용되었다. 균여는 원래 화엄종의 승려였는데, 그의 성상융회사상은 화엄종의 견지에서 법상종을 융회하려는 것이었다. 균여의 이러한 사상은 대호족들을 억압하고 지방의 중소호족들을 등용하여 전제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광종에게 수용되었다.
광종은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이 개혁철학을 담고 있음을 간파하고 균여를 중용했다. 963년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빈민구제제단인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해 균여에게 맡겼다. 광종은 균여 다음에는 탄문(坦文)을 중용했는데, 968년에 왕사(王師), 국사(國師)라는 직책을 설치해 탄문을 왕사에 임명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재위 19년에 귀법사의 승려 정수(正秀)가 균여를 참소한 이후, 균여가 광종과 멀어지면서 균여를 대신한 승려가 탄문이었다.
흔히 광종의 숭불정책(崇佛政策)을 개혁정치 수행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인 죄업을 씻기 위한 것이라 설명해 왔으나, 광종에게 불교는 그런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을 넘어선 사회적인 의미를 띠는 사상이었던 것이다. 즉 개혁의 사상적 토대를 바깥에서는 쌍기에서 찾고 안에서는 불교에서 찾았던 그였기에, 숭불신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6년간 재위했던 광종은 975년 51세의 나이로 정침(正寢)에서 사망했다. 그가 행한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 공복 제정 들은 모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삼은 일련의 개혁적 조치들이었고, 이를 통해 목표했던 바가 어느 정도 진척을 본 것이 사실이다. 성종(成宗) 때 최승로의 비판처럼 한편으로 많은 반발을 받기도 했으나, 광종의 정치, 제도적 개혁 조치들은 고려왕조의 안정과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간과될 수가 없는 것이다.
● 과도기 경종(景宗)과 유교정치를 확립시킨 성종(成宗)
광종(光宗)의 뒤를 이은 인물은 광종과 대목황후(大穆皇后) 사이에서 난 만 20세의 맏아들 경종(景宗)이었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선황 광종이 전혀 예상치 못했을 조치들을 명했다. 사면령을 내려 광종 재위기에 귀양 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었으며, 승진하지 못한 사람들을 발탁하고 관직을 빼앗긴 사람들을 복직시켜 주었다. 그리고 조세를 감면해 주고 임시 감옥을 헐어 버렸으며, 참서를 불사르도록 했다.
국왕이 새로 즉위한 후 대사면을 베푸는 것은 의례건 있는 일이지만 경종 즉위 초의 이런 조치들은 경우가 달랐다. 이들은 보통 통상적인 법률과 범죄에 의해 처벌받은 인물들이 아니라, 부왕 광종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의도적으로 정국에서 배제된 인물들이었다. 광종은 이를 개혁정치라고 판단했었다. 광종은 이런 정책들을 통해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를 실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후사 경종이 귀양 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거나 복직을 시키고, 임시 감옥을 헐어 버리고, 참서를 불사른 일들은 명백히 부왕의 개혁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행위였다.
이렇게 경종이 부왕의 개혁정치를 원점으로 돌리는 조치를 취한 배경에는 그의 외가인 황주 황보씨가 있었을 것이다. 즉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시행 중단을 요청할 정도로 광종의 개혁에 적대적이었던 대목황후가 광종의 사망과 더불어 각종 개혁 조치들을 원점으로 돌리도록 경종을 압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조치들은 광종 재위기에 타격을 입었던 호족 개국공신세력을 다시 등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경종은 재위 원년(서기 976년) 광종 때에 참소당해 죽은 자의 자손들에게 복수를 허락했다. 이 조치는 고려사(高麗史) 경종(景宗) 조에서 "서로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해 또 억울한 일이 생겼다."고 기록할 정도로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심지어 왕선(王詵)이 원수를 갚는다며 태조(太祖)의 아들인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죽이는 일까지 발생해 최승로(崔承老)가 "천안(天安), 진주(鎭州)의 두 낭군(郎君)만은 본래 황가의 후손이어서 광종 황제께서도 너그럽게 대우하여 마침내 처형하지 않았는데, 경종 때에 와서 울타리가 될 만한데도 문득 권신의 해침을 당했으니 어찌 원통하고 애석하지 않겠는가?"라고 한탄할 정도였으니 여타의 복수극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경종은 왕선을 외방으로 내쫓고 복수법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작용과 반작용이 반복되면서 혼란이 거듭되자, 경종과 고려의 지배계급은 국가의 질서체계 내에서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경종이 재위 원년 11월에 제정한 전시과(田柴科) 제도는 이런 시도였다. 이는 관료들에 대한 제왕의 지배권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이지만, 관품의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않고 인품에 따른다는 점에서 자의적 요소가 개재된 것이었다. 인품은 결국 세력의 크기에 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세력 있는 호족들이 보다 많은 토지를 지급받게 되어 있었다. 나아가 이듬해 3월 개국공신 등에게 훈전(勳田)을 지급했는데, 이는 세습이 가능한 토지로서 호족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해 주는 조치였다.
그렇다고 경종이 광종의 모든 조치들을 원점으로 돌린 것은 아니었다. 호족들의 이해와는 배치되었지만, 같은 해 경종은 과거제(科擧制)를 재개했다. 경종의 이러한 상반된 조치들은 일면 호족과의 타협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포석이겠지만 일관성이 결여되어 두가지 모두 실패할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상반된 두가지 정책을 모두 성공시키려면 강력한 왕권과 비상한 정치력이 요구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경종은 그렇지 못했다. 경종 재위 말년의 "정사(政事)를 게을리하여 날마다 오락을 일삼고, 주색(酒色)에 바지고 바둑을 즐기고 소인을 가까이하여 군자를 멀리하면서 정치와 교화가 쇠퇴했다."는 기록은 두가지 상반된 정책 목표를 이루려다 모두 실패한 듯한 모습을 봉보여주고 있다.
경종(景宗)은 만 26세 때인 재위 6년(서기 981년) 6월에 병들어 누웠고, 다음 달에 위독해지자 이복동생 개령군(開寧君)을 불러 제위를 물려준 뒤 사망했다. 제위를 이은 개령군이 바로 고려 제6대 황제인 성종(成宗)이다. 왜 그가 선택되었는지에 대해 고려사(高麗史)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그의 혈통에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성종의 아버지는 태조(太祖)와 신정황태후(神靜皇太后) 황보씨(皇甫氏) 사이에서 태어난 대종(戴宗) 욱(旭)이다. 왕욱은 황제가 되지 못했으므로 묘호가 없었는데, 그 아들 성종이 제위에 오르면서 대종이라는 묘호가 추존되었다. 성종의 어머니는 태조의 딸인 선의황후(宣義皇后) 유씨(柳氏)로서 아버지 대종(戴宗)과는 이복남매 사이였다.
성종은 어머니 선의황후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할머니인 신정황태후의 품에서 자랐고, 광종의 딸 문덕황후(文德皇后) 유씨(劉氏)와 결혼했다. 문덕황후 유씨는 초혼이 아니라 태조와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 사이에서 난 홍덕원군(弘德院君) 규(圭)에게 시잡갔다가 성종과 재혼한 경우였다. 광종의 딸이라지만 광종에게 유씨 성을 가진 후비가 없었으므로 그녀의 성씨가 유씨인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이런 혈통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성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태조와 황주의 유력 호족인 황보씨의 손자에다 광종의 딸이 부인인 혈통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성종의 치세는 한마디로 고려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를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로 바꾸는데 있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태조가 사왕(嗣王)들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팔관회(八關會)는 천령(天靈)과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며, 이를 잘 지키라고 당부했었다. 그러나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팔관회의 잡기들이 떳떳하지 못하고 번잡스럽다는 이유로 폐지한다.
성종은 또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삼성육부제(三省六部制)를 실시했다. 982년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 및 어사 6관을 설치했다가 995년에는 관제를 개편해 내사문하성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어사도성을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개 창하면서 3성(省)6부(部)체제를 본격화했다.
983년에는 지방에 12목(牧)을 설치해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써 기존에 호족이 지배하던 지방을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지배하는 형식으로 진일보시켰다. 성종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식 유교정치체제의 틀 속에서 이를 달성하려 한 점이 달랐다. 성종은 역대 황제들의 신주를 모시는 중국식 태묘(太廟),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社稷), 공자(孔子)를 제사하는 문묘(文廟) 등을 설치하는 등 유교에 바탕을 둔 중국식 유교정치체제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고려는 제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성종은 개국 이래 사용해 오던 조서(詔書)라는 용어를 제후의 용어인 교서(敎書)라고 개칭해, 스스로 제후국으로 격하시켰다. 이는 송나라와의 관계가 불편해질 것을 우려해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에 편입됨으로써 고려의 안정을 꾀하려는 현실적인 정책이기는 했지만 태조가 지향했던 황제국 체제의 공식적인 폐기라는 문제점이 있었다.
고려의 전통적 체제를 중국식으로 바꾸는데 대한 반발도 물론 있었다. 중국식 정치체제가 숭무정신(崇武精神)을 약화시켜 국력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반발이었다. 993년에 요(遼)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할지론(割地論)에 맞서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던 이지백(李知白)은 "경솔히 국토를 떼어주기보다는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타국의 색다른 풍습을 본받지 말아 국가를 보전하자."고 주장했는데, 여기에서 타국은 물론 중국을 말하는 것이었다.
광종(光宗)의 개혁정치가 쌍기(雙冀)의 이념 제공으로 수행되었다면 성종(成宗)의 그것은 최승로(崔承老)를 비롯한 최지몽(崔知夢), 최양(崔亮), 이양(李陽), 김심언(金審言) 등 유학자들의 이념 제공으로 수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경주 출신의 6두품 계열이거나 후백제 지역 출신들인데, 그 중 최승로의 유명한 '시무28조'를 통해 그 이념적 성향을 분석해 볼 수 있다.
최승로는 경주 출신의 6두품 계열로서 아버지는 신라에서 원보(元甫)를 역임한 최은함(崔殷含)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소문나 12세 때 태조(太祖)가 불러 논어(論語)를 시험할 정도였다. 이 때 태조는 그에게 염분(鹽盆), 안마(鞍馬), 쌀 20석을 상으로 내리고 원봉성(元鳳省) 학생(學生)으로 재학하게 했다. 이렇듯 12세에 이미 논어에 막힘이 없을 정도였다는 점에서 유교에 대한 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종 때까지 문서 작성을 주로 하는 문한(文翰)을 맡아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그러던 성종 재위 원년 3월에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은 각각 글을 올려 현행 정치의 득실을 논하라."는 성종의 구언(求言)에 응해 장문의 상소를 올림으로써 두각을 나타낸다.
상소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앞부분의 오조정적평(五朝政積評)은 태조부터 경종까지 다섯 황제의 치적을 논한 글이다. 최승로는 태조에 대해서는 극도의 예찬으로 일관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군주임을 밝혔고, 나머지 네 임금에 대해서는 공과(功科)를 함께 지적하고 있다. 이 중 광종에 대해서는 '즉위 후 7년 동안은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삼대의 이상시대에 비길 만큼' 높이 평가했으나, 재위 7년(서기 956년)부터 "쌍기와 같이 쓸 데 없는 사람을 중용해 측근 세력을 제외하고는 군신 사이의 대화가 막히고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어 커다란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뒷부분의 '시무28조'는 성종이 새 황제로서 해야 하 당면 과제들에 대해 지적한 것으로서, 고려사(高麗史) 최승로전(崔承老傳)에는 22조만이 전한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견지에서 그는 불교의 폐단에 대해 여러차례 지적한다. 그런데 최승로의 불교 비판은 불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불교에서 파생된 폐단에 의한 비판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즉 '불교는 수신(修身)의 도(道)이고, 유교는 치국(治國)의 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유불(儒佛共存)의 철학이다. 따라서 그가 비판한 것은 불교 자체가 아니라 불보전곡(佛寶錢穀)의 폐단 및 승려의 궁중 출입과 역관(驛館) 유숙, 불상 조제 때 금은(金銀) 사용 문제 등의 표면적인 것이었다.
광종의 개혁정치에 커다란 반감을 갖고 있던 그는 광종 재혁 이전 상태로의 환원을 희구했다. 군주는 근면하되 교만하지 말고 신하를 대할 때 공손히 하며 죄는 경중에 따라 법에 의할 것을 청한 것은 광종의 호족 숙청을 비판한 것이었다. 또 광종 때 급속히 늘어난 시위군졸(侍衛軍卒)의 감원을 요청하고 황실 내속 노비의 감소를 요구한 것도 왕권의 제한적 사용을 요구한 것에 다름 아니며, 광종 때에 몰락한 삼한공신 자손의 복권과 양천(良賤)의 구분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한 것 역시 광종 개혁 이전 상태로의 환원을 주장한 것이었다. 팔관회와 연등회의 축소와 음사(淫祀)와 번잡스러운 제사의 중지를 요청한 것은 유교정치체제의 수립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의 이런 시무책(時務策)은 최승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를 바라는 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로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유학정치체제를 지향했던 성종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성종은 16년의 치세 동안 중앙에는 3성 6부제, 지방에는 12목을 설치해 내외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유교를 고려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시키려 노력했다. 이는 성종 혼자만의 의지라기보나는 최승로, 최지몽 등 유교정치체제를 운영해 갈 유학층의 성장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골 개국 초기의 비체계적인 정치제도의 개편을 요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는 긍정적인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종(成宗)은 그 시호처럼 고려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임금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제도가 중국식 유교정치체제 일색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만 평가될 수는 없다. 이후 고려의 문약(文弱) 현상의 시저에 성종(成宗)대에 완성된 중국식 유교정치체제가 있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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