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강론」23.고려의 종교와 문화

개마기사단201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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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도(神仙道)문화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민족 고유의 신선도(神仙道)와 치세적인 유교(儒敎)를 존중하면서 불교(佛敎)를 숭상하였다. 이로써 선(仙), 불(佛), 유(儒)의 융합이 잘 이뤄지게 되었다. 그래서 고려의 2대 종교행사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였다.

태조는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 "내 소원은 연등과 팔관에 있는데.....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니..... 후세 제신(祭神)과 의식의 가감을 건의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신선도는 왕검교(王儉敎)나 천신교(天神敎)라고도 했으며 팔관도(八關道)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려의 역대 제왕은 즉위하면 단군왕검(檀君王儉) 이래의 행사로서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 올라 천제(天祭)를 드렸다. 혜종(惠宗) 때에는 태조의 사당인 숭의전(崇義殿)을 짓고 대대로 철마다 시조사당에 제사를 드렸다.

고려의 팔관회는 신라의 풍류도의 팔관회와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라의 4선(仙)을 재현하며, 제천하는 국중대회였고 신교무사(神敎巫事)였다. 이 행사는 불교사찰에서 이뤄지기도 했으며, 살생을 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며 음란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며 술을 마시지 말고 높은 평상에 앉지 말며 향화(香華)를 하지 말고 함부로 듣고 봄을 즐기지 말 것 등 불교에서의 8계(戒)를 수행하는 팔관재(八關齋)와 함께 하기도 했다. 팔관회는 매년 11월 17일을 중심으로 3일간 국가공휴일로 성대히 행해져 국태민안(國泰民安), 추수감사(秋收感謝), 영령천도(英靈天道) 등을 위하여 천신(天神), 지신(地神), 산신(山神), 용신(龍神) 등 토속 제신에게 재배하고 백희가무(百戱歌舞)를 공연하며 기도드렸고 가정에서는 조상의 진영을 모신 진관(眞館)이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祠堂)에서 때맞추어 제사했다.

본래 팔관회는 신선도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신이 내린' 무격교(巫覡敎)적인 의식이었으나 점차 불교와의 습합(習合)으로 불교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팔관회 때는 황제가 법왕사(法王寺)에 가서 예불하는 것이 통례였고, 탐라(耽羅), 여진(女眞), 송(宋), 원(元), 일본, 대식국(大食國) 등 외방상인들은 물화를 싣고 와서 무역도 하고 축하도 했다.

고려 중엽 인종(仁宗) 때에는 정지상(鄭知常)의 주청에 따라 8선(仙)을 그린 8성당(聖堂)을 궁중에 지었으며 송악산에는 8선궁(仙宮)을 지어 8선을 봉인하였다. 그 8선은 호국백두악태백선인(護國白頭嶽太白仙人)을 비롯해 용위악지통존자(龍圍嶽之通尊者), 월성천선(月城天仙), 구려평양선인(駒麗平壤仙人), 구려목멱선인(駒麗木覓仙人), 송악진주거사(松嶽震主居士), 증성악신인(甑城岳神人), 두악천녀(頭嶽天女)의 8명이다. 본래 팔관(八關)은 '밝안'에서 온 것으로 천신, 신선, 태양, 광명 등 광명본원(光明本源)의 신선도에서 유래했다.

신선도를 수련하는 단학선도의 길로 신선이 되는 사람도 많았는데 불교와 함께 선도수련도 함께 하여 선도의 맥을 잇기도 하였는바, 백수한(白壽翰), 묘청(妙淸), 정지상(鄭知常), 곽여(郭輿), 최당(崔幢)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려시대에는 신선도가 중국화한 도교(道敎)가 수입되어 도교사원인 도관(道觀)이 많이 생겼으며 선도의 숭지사상에 터잡아 도선비기(道詵秘記) 등 양택, 음택에 관한 풍수지리설이 중시되기도 하였다. 고려에서는 팔관회, 연등회 외에도 원단, 삼짓날, 초파일, 단오, 칠석, 추석 등의 명절이 있었으며 단오 때에는 그네, 씨름, 격구 등을 즐겼다.

● 불교의 발전

불교계의 심각한 분열은 신라 하대 이후 고려 초기에도 계속되었다. 교종(敎宗)과 선종(禪宗)간의 분열은 곧 불교를 중심으로 한 전(全)사상계의 분열과 이에 따른 정치세력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이를 극복하는 사상계의 통일이 우선 과제였다. 이러한 노력은 광종(光宗)대에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서 교종은 화엄종(華嚴宗) 중심으로, 선종은 당시 중국의 새로운 경향의 불교인 법안종(法眼宗)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나아가 교종과 선종의 합작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삼국시대부터 전해온 것으로 교종과 선종의 종합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법화경(法華經)을 소외경전으로 하는 천태학(天台學)의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때에 중국에 건너간 제관(蹄官)은 천태종의 일심삼관(一心三觀),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요체로 하는 기본교리서인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하고 중국에 가서 천태종을 부흥시켰으며 의통(義通)은 중국 천태종의 13대 교조가 되어 오히려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켰다. 도한 법안종에 관심을 갖고 있던 지종(智宗) 등 36인은 중국의 영명연수(永明延壽)에 가서 수업하였다.

이러한 교선(敎禪)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최초의 본격적인 노력은 고려 불교의 수준을 한단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광종 사후 경종(景宗)의 반동정치로 광종 때의 정치적, 사상적 주체세력이 제거됨으로써 선교 합작의 새로운 사상체계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 천태종(天台宗)의 성립

요여전쟁(遼麗戰爭) 이후 현종(顯宗), 문종(文宗)대에 이르러 화엄종(華嚴宗)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때 같은 교종 계통의 법상종(法相宗)이 새로이 대두되어 선종 세력을 압도하면서 교종 계통의 화엄종과 법상종이 양립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두 종파는 각기 황실과 귀족에 연결되어 발전하면서 더욱 보수적인 경향을 나타냈다. 화엄종은 귀법사(歸法寺), 흥왕사(興王寺)를 중심으로 안산(安山) 김씨(金氏), 해주(海州) 최씨(崔氏), 파평(坡平) 윤씨(尹氏) 등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법상종은 인주(仁州) 이씨(李氏), 수주(水州) 윤씨(尹氏)와 연결되었다. 한편 선종은 교종 계통의 화엄종과 법상종이 지배적인 상황하에서 나름대로 화엄종과 법상종에 반발하면서 강인하게 존속하였다. 그러나 선종은 여전히 분파성이 강조되어 서로 대립하는 상태였다. 이때 의천(義天)이 나타나 교종과 선종은 각기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그럼에도 서로 첨예하게 분열 대립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고 지적하며 당시를 말법시대(末法時代)라 선언하고 교리면에서나 교단 양면에서 일대 개혁을 시도하였다.

의천은 문종의 아들로서 일찍이 출가하여 화엄종 계통의 영통사(靈通寺)에서 수업하였다. 그의 중심사상은 화엄종에 터잡은 학문과 실천 즉 교관겸수(敎觀兼修)였는데 이는 정혜쌍수(定慧雙修), 지관겸수(止觀兼修)라고도 하며 경(經)공부와 선(禪)공부를 함께하는 이론과 실천의 겸비였다. 의천은 교관겸수를 주장하기 위하여 신라 화엄종의 전통을 재인식하였고,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을 추모하였다. 또한 의천은 화엄종의 통일에 주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엄종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종파를 하나로 회통(會通)시키고자 하였으며 송나라의 화엄학 부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마침내 그는 새로운 종파로써 천태종(天台宗)을 開昌하게 되었다. 의천은 입송(入宋)하여 종간(從諫)으로부터 천태교리를 배운 뒤 지자대사(智者大師) 탑에 예배하고 법화경에 다한 천태흥교를 발원했다. 이러한 천태종의 탄생은 당시 고려 불교의 모순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과 원효 때의 불교 전통에 대한 재인식에서 이룩될 수 있었다. 숙종(肅宗) 재위 2년(서기 1097년)에 천태종의 근본도량(根本道糧)으로서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고, 의천이 주지가 되어 천태종을 강론함으로써 한국 천태종이 확립되었다. 이는 지의대사가 창종(創宗)한 중국 천태종의 국청사를 본뜬 것이었다.

한편 그는 널리 불서(佛書)를 송(宋), 요(遼), 일본 등으로부터 구입하였다. 4700여권을 수집하여 교장(敎藏)의 총목록을 작성한 것이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다. 이것은 문종(文宗) 재위 27년에서 선종(宣宗) 재위 7년에 이르기까지 25년간의 전적수집(典籍收集)의 결정이었으며, 그 속에 포함된 요의 도종(道宗), 학원(學寃), 지복(志福), 법오(法悟), 비탁(非鐸), 희린(希麟) 등 12학승의 도합 29부(部) 190권(券)의 저술이 학술면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다. 의천(義天)이 중흥시킨 고려 천태종은 그 뒤 맥이 이어지지 못하다가 8.15 해방 뒤 상월조사(上月祖師)가 단양에 천태종 구인사(救仁寺)를 설립하면서 발흥되어 현재 100만여명의 불자를 융섭하고 있다.

● 사찰의 발달

고려 불교는 철학적 사상체계의 발전도 보았지만 오히려 국가나 개인의 현세의 행복과 번영을 기원하는 현세이익적인 종교로서 중시되었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불교행사도 다양하게 거행되어서 신선도와 함께 여는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를 비롯하여 역대 황제가 매년 6월 1일에 보살계를 받는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 황제의 생일에 전국적으로 열리게 되는 휘진도량(諱辰道場), 돌아간 부모 명복을 비는 우란분도량(盂蘭盆道場), 경행(經行), 인왕반야도량(仁王般若道場), 반승(叛僧), 장경도량(藏經道場) 등의 불교행사가 성행하였다. 가장 큰 불교행사는 정월 보름에 하는 연등회였으며 신선도의 팔관회가 절에서 이뤄지기도 했고 별도로 절에서만 팔관계를 지내기도 하였다.

한편 사원은 역사적으로 물려받은 사유재산(寺有財産)과 황족, 귀족, 양민들의 토지기증 등으로 그 소유지를 확대하여 갔다. 이와 같이 확대된 사원전(寺院田)은 면세 특권이 주어져 있었으므로 그 확대는 국가 재정면에서 볼때 커다란 손실이 되었다. 또한 사원전의 경작을 위하여 많은 노비가 동원되고 있었다.

국가에서 주어진 특권을 최대 한도로 이용하여 광대한 사원전에서 얻어진 수확은 다시 장생고(長生庫) 불보(佛寶) 등의 고리대자본을 형성하여 방채취식(放債取息)을 하였으며 그에 따라 사원의 재산은 더욱 축적되었다. 사원은 고리대를 통해 취식행위를 하였을뿐 아니라 양조, 목축, 상업 등에도 투자하여 그 부(富)를 늘려갔다. 고려의 사원이 빈민의 구제, 서민층의 의료사업 등 여러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하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늘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사원의 경제력 덕분이었다. 사원은 그 경제력을 지키기 위해 승군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국가의 위난 때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토수호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편 승려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왕사(王師), 국사(國師)를 비롯하여 교종의 최고 법계인 승통(僧統)이나 선종의 대선사((大禪師)의 정치적 배경은 이러한 사원의 부와 국가의 승려 우대에 있었다.

●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고려 불교가 남긴 최고의 문화유산은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그 경판이 해인사(海印寺)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은 여몽전쟁(麗蒙戰爭) 때 만들어진 것으로 이보다 앞서 여러차례 대장경이 간행되었다. 요여전쟁(遼麗戰爭) 때에는 불력으로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초조장경(初雕藏經)을 간행하였다. 대장경 조조(雕造)는 1019년부터 시작되어 108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초조장경은 중국에서 전래된 개보판(開寶版)을 모체로 간행된 것이었다.

처음에 이 초조장경의 경관은 현화사(玄化寺)에 봉안되었다가 그 후 대구의 부인사(符仁寺)에 옮겨졌으며 마침내 1232년 몽고의 병화(兵譁)로 불타버렸다. 이후 의천(義天)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려속장경은 경(經), 율(律), 논(論)을 하나로 모아 간행한 것으로 의천이 흥왕사(興王寺)의 교장도감(敎藏都監)에서 자신이 수집한 4천여권의 3장(藏)을 모아 직접 감독하여 간행한 것이었다. 이 속장경은 초조장경과 함께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

1232년에 초조장경과 속장경의 판목이 몽고군의 두번째 침입으로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자 그 4년 후에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을 각각 강화와 진주에 두고서 대장경을 다시 조조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251년에 완성되었다.

이의 간행에는 수기(守基)의 노력이 컸다. 고려대장경이 현존하는 한역(漢譯)대장경 중에서도 학술상 가장 우수한 것으로 공인되고 있는 것은 그 내용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각판에 오자나 탈자가 없는 철저한 교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외적 격퇴를 염원하며 국민 대중들이 정성들여 새긴 이 고려대장경은 총 6529권으로 되어 있다.

● 유교문화

광종(光宗) 때 과거제도의 실시를 계기로 고려의 유학은 하나의 정치이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후 성종 때의 제도정비과정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치국(治國) 이념으로서 그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고려 귀족들의 정신세계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의 유학자들은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교와 불교는 각기 치국의 도와 수신의 도로 서로 부조하는 것으로 병존, 발전하였다.

성종(成宗)은 유교교육울 위하여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고, 예종(睿宗)은 유교보급과 인재양성에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귀족정치의 전성기인 문종 때에 들어와 고려의 유학은 크게 융성하였다.

특히 문종 때 정계의 원로이며 당시 유학계 최고의 권위자인 최충(崔沖)이 구재학당(九齎學堂)이란 사숙(私熟)을 열면서 사학(私學)이 발전하였다. 이후 사학은 계속 발전하여 12사학으로 확대되었고 앞다투어 입학한 귀족자제들은 과거시험을 위하여 경학(經學), 사학(史學), 문예(文藝) 등을 공부하였다. 이러한 사학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관학의 쇠퇴를 가져오자 숙종(肅宗), 예종, 인종(仁宗)은 관학의 진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숙종은 국자감에 서적포(書積鋪)를 두어 도서를 출판케 하였고, 예종은 일종의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관학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청연각(淸嚥閣)과 보문각(寶文閣) 등 학문연구기관도 설치하였다. 인종은 경사6학과 향학의 제도를 세워 유학의 융성을 꾀하였다.

고려 전기 유학은 귀족사회의 발달과 함께 귀족문화의 중심을 이루며 융성한 반면 유학자들은 과거준비에만 급급함으로써 유학의 이론이나 사상면에서의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고려 전기의 유학은 아직 철학적 깊이를 갖지 못한 채 과거를 통한 출세의 수단으로만 여겨져 제술(製術)과 사장(詞章)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중기 이후 유학은 귀족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시문(詩文)을 주로 하는 귀족 취향의 보수적인 경향으로 떨어지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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