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安市城)에서 전개되는 치열한 공방전(攻防戰)은 쉬는 날이 없었다. 당군이 종일토록 일곱 차례나 성을 공격하는 날도 있었다. 포차(砲車)로 돌멩이를 날리고 충차(衝車)로 때려 일부 성벽과 문루가 부서지기도 했다. 그러면 성안에서는 재빨리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토산을 세우다가 조카인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이 발을 다치자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돌팔이 의원 노릇을 하여 침을 놓아주기도 했다. 당군은 쉴 새 없이 성벽을 공격하는 한편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토산을 쌓았다. 토산만 완공되면 안시성 함락은 틀림없다는 자신감으로 전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60일 동안 연인원 50만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마침내 토산을 완공했다. 토산은 안시성의 성벽보다도 3장, 거의 10미터가 더 높았다. 다섯 갈래로 오르막길을 만든 토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안시성이 내려다보였다. 안시성 점령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군사들이 토산 위에 올라가 활을 쏘고 화토병을 던지기만 하면, 고구려 군사와 백성들은 놀라 겁을 먹고 우왕좌왕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일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때 토산 위에서 성벽으로 사다리나 널판을 걸치고 타넘어 가면 양만춘이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만고의 명장이라 하더라도 성을 지킬 수는 없으리라. 성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태종을 비롯한 당군 수뇌부는 하나같이 회심의 미소 아닌 괴소를 흘렸다.
그런데 당군의 토산이 완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정의의 군대가 영채를 습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안시성의 상황을 멀리서 계속 지켜보고 있던 고정의는 안시성이 위급하다는 판단이 서자 5만의 정예군을 이끌고 당군의 영채를 공격해왔던 것이다. 태종은 깜짝 놀랐다. 쥐죽은 듯이 고요했던 고구려군이 하필 이때 영채를 치다니 괘씸했다. 그는 모든 장수들을 총출동시켜 고정의를 상대하도록 했다. 강하왕도 하는 수 없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에게 토산을 맡기고 황급히 태종에게 불려나갔다.
그러나 이 순간에 변수가 생겼다. 당군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토산이 안시성의 성벽 쪽으로 무너지면서 성벽 일부분이 파괴되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안시성주 양만춘이 아니었다. 그는 급히 2천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무너진 성벽을 통해 토산 위로 달려나갔다. 토산 위에 있던 수백명의 당나라 군사들이 가로막았으나 단병접전(短兵接戰)에 있어서는 고구려군의 기량이 한 수 위였다. 양만춘(楊萬春)은 기합과 더불어 몸을 솟구치며 현란하게 장검(長劍)을 휘둘렀다. 그의 주위에 있던 당병들이 모두 피주검으로 변해 널브러졌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토산 위에서 경비하고 있던 당군 병사들을 전부 처치하고 토산을 점령한 뒤 방책(防柵)을 세워 요새로 만들었다.
한편 태종은 여러 장수와 더불어 고정의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맞아 싸우려고 나가 보았는데, 고구려군은 북과 꽹과리만 요란하게 소리내면서 움직이지 않은 채 더 이상 진격해오지 않았다. 별 우스운 놈들도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안시성 토산 축조 책임자인 강하왕을 다시 현장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고구려군과 대치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영채로 돌아온 태종은 뜻밖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두 달 동안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쌓아올린 공든 탑 아닌 공든 토산을 하루아침에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대노하여 강하왕을 불러오라고 소리쳤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강하왕은 자신의 부하인 부복애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부복애는 토산이 성벽 쪽으로 무너져 성벽의 일부가 파괴되었을 때, 안시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두려워 군사를 모아 성으로 돌격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고구려군이 달려들어 토산을 점령하도록 하여 시간을 허비했으니 부복애의 죄가 더 큽니다.”
태종은 부복애를 묶어서 자기 앞으로 끌고 오게 했다. 부복애가 결박된 채 무릎을 꿇려 앉히자 태종은 직접 어검(御劍)을 뽑아 부복애의 목을 내리쳤다. 그 누구도 그때 태종을 말릴 수가 없었다. 태종은 죽은 부복애의 시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장수들에게 명령했다.
“경비 책임을 소흘히 한 죄인의 수급(首級)을 군문에 높이 효수(梟首)하라!”
사실을 엄밀히 따지자면 토산을 잃은 것은 불과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린 말단 지휘관인 부복애나 숱한 총관 중 한 명에 불과한 강하왕 이도종 두 사람만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더 엄밀히 따지자면 토산을 빼앗긴 책임보다도 토산 자체를 세우라고 명령한 태종 자신에게 더 큰 책임이 있었다. 결국 부복애를 죽인 것은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태종은 이튿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전군을 몰고 토산을 다시 점령하려고 했다. 그러나 양만춘이 점령한 토산은 만만치가 않았다. 가파른 층계를 타고 올라가야 하니 그 험한 정도는 안시성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가 않았다. 당군이 팔을 뻗어 목조 뼈대에 걸려있는 통나무를 잡고 오르려 하면 이내 토산 위에서 고구려군이 바위를 굴려댔다. 토산 위에 있는 점장대에서 쏘는 쇠뇌도 만만치가 않았다. 수천의 당군이 한 시간도 안 되어 쇠뇌에 맞아 죽어나갔다. 당군 병사들은 더 이상 죽기가 싫었다. 그러나 악마와 같은 저승사자로 변한 태종과 그의 장수들은 이성을 잃고 뒤에서 칼을 비껴들고 고함만 질러 댔다. 당군 병사들도 하는 수 없이 토산 아래로 떠밀려 들어갔지만 토산 위로 올라갈 생각은 엄두도 안 났다. 뒤에서 떠밀려오는 군사들 때문에 선두에 있던 당병들은 하는 수 없이 토산 밑에 넘어져 깔려 죽어버리기 시작했다. 이렇듯 아무 성과도 없이 군사들을 수없이 죽게 하고 날이 저물기 시작해서야 비로소 태종은 군사를 물렸다. 그래도 태종은 분이 풀리지 않아 다음날에도 같은 식으로 당병들을 사지(死地)로 내몰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달 동안이나 연 50만 명을 동원해서 모진 고생 끝에 완공된 토산이 안시성의 고구려 군사들에게 뺏겼다는 것은 성인군자도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토산은 태종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토산 공격 3일째 되는 날이었다. 태종은 선두에 서서 군사들을 독려했다.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이세적(徐世勣)이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태종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안시성주 양만춘이 토산에 올라 태종을 내려다보니 충분히 화살이 미칠 수 있는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태종이 이성을 잃고 너무 앞장섰던 것이 불운이었다. 양만춘은 각궁(角弓)을 꺼내들고 태종의 얼굴을 겨냥했다. 군사들에게 고함을 지르던 태종이 얼굴을 약간 돌린 순간, 양만춘이 힘껏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마자 유엽전(柳葉箭)이 부르르 떨며 태종에게 날아가서 그의 왼쪽 눈에 정통으로 박혔다. 태종은 비명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주위에 있던 장수들이 달려와 방패로 쓰러진 태종을 가렸다. 양만춘은 군사들에게 외쳤다.
“당괴(唐傀) 이세민(李世民)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무조건 내달아 화살을 날려라.”
이에 성안에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모두 토산에 올라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댔다. 양만춘은 계속 북을 올리게 시켰다. 저 멀리 주둔하고 있던 고정의도 안시성의 전황에 변화가 있음을 감지하고 휘하 장수들을 보내 당군의 영채를 급습하도록 했다.
태종의 얼굴에 피가 범벅된 것을 본 당군 병사들은 황제인 태종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전의를 상실하고 요하로 방향을 잡아 도망칠 준비만 했다. 장손무기와 이세적 등 모든 당장(唐將)들이 나서서 당군을 제지했기에 그나마 대오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고정의의 고구려군은 당군을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었다. 그러나 이세적과 설인귀 등이 다시 사생결단을 하자고 나오는 바람에 고정의의 군사들은 주춤했다. 태종은 들것에 실려 가면서 정신을 다시 차렸다. 눈에는 아직 양만춘의 화살이 박혀있었다. 힘을 주어 화살을 빼니 눈알도 함께 빠져나왔다. 통증이 매우 심했다. 태종은 잠시 후에 장손무기를 불렀다. 장손무기가 태종이 누워있는 들것 옆으로 다가왔다. 태종이 탄식하며 말했다.
“안시성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더는 공략하기가 어렵겠소. 그대는 안시성을 우회해 평양성으로 진공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하시오.”
장손무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중상을 입으셨는데 더 이상 원정을 감행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제 그만 회군하시는 것이…”
“비록 많은 군사가 죽었지만 아직도 25만명의 병력이 남아 있소. 여기서 포기한다면 앞으로 고구려를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이튿날 아침 외눈박이가 된 태종이 수하 장군들을 불러 모았다. 한쪽만 남은 눈을 씰룩이며 당 태종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토산마저 양만춘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우리의 뒤편에서는 고정의가 치고 빠지는 전술로 아군을 위협하고 있으니 안시성에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그러니 요동의 성들을 내버려 두고 부여벌을 지나 바로 평양성으로 직공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시오.”
양홍례가 걱정스러운 듯이 간언했다.
“폐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전략입니다. 안시성이나 신성의 군사들이 성 밖으로 나와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이고 게다가 우리에게는 군량도 매우 부족합니다. 보급로도 끊어진 상태에서 날씨가 더욱 추워진다면 군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많이 죽어나갈 것입니다.”
“수군총관 장량이 1천여척의 전함과 10만여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요동 해안에서 고구려 수군과 싸우고 있으니 그가 제해권만 확보한다면 군량 수송도 그리 어려운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한가닥 희망을 잡고 있던 태종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기가 막힌 패보(敗報)가 들이닥쳤다.
“폐하! 장량의 수군이 비사성 남동쪽 장산군도에서 대패하여 군사 5만여명과 군선 5백여척을 잃었고, 상하·좌난당·유영행 등 3명의 장수도 그 싸움에서 실종됐다고 하옵니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하늘이 노래졌다.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한탄했다.
“아, 내가 연개소문에게 졌구나!”
그리고 힘없이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는 정말 장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구나.”
더 버티고 싶어도 군량의 부족이 목을 조르기 시작하니 별 수가 없었다. 이제 육로와 수로 군량을 보급하는 두 길 가운데 수로는 완전히 끊겨버렸다. 영주 - 통정진 - 요하 - 안시성으로 이어진 육로도 고구려군의 유격전에 수시로 위협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칭 전략의 귀재 이세민은 외로운 성 안시성 하나에 매달려 석 달 동안이나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60일 동안 토산 하나를 쌓아올린 것은 분명히 미친 짓이었다. 전략의 천재든 귀재든 절대로 할 짓이 아니라 얼건멍청이나 할 짓이었다.
겨우 3만~4만명이 지키는 안시성에 발목이 잡혀 석 달이나 되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아니, 지난 4월에 요하를 건너왔으니 벌써 반년 동안이나 천산산맥을 넘지 못한 채 건안성이나 안시성 언저리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개모성·백암성·요동성 등에서 노획했던 60만석의 군량만 바닥내지 않았던가? 당군에게 남은 군량은 이제 겨우 열흘치밖에 없었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가 많고 적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보급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양도(糧道)가 막히면 무엇으로 이 수십만 대군을 먹인단 말인가? 게다가 벌써 9월. 요동에는 겨울이 일찍 온다. 이제 한 달만 더 있으면 찬바람이 몰려올 것이다. 눈이 내려 쌓이고 얼음이 얼면 당의 수십만 대군은 연개소문과 고구려군보다도 굶주림과 추위에 못 이겨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태자(太子) 이치(李治)로부터 급보가 왔다. 철륵(鐵勒)의 설연타(薛延陀)가 만리장성을 넘어 침공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동서 양면에서 협공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수도 장안성이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안시성 외곽에서 고구려군은 쉴 새 없이 유격전을 펼쳐 육로로 퇴각하기도 어렵게 됐다.
「 ‘바다의 여왕’ 연수영 」5안시성, 그리고 장산군도 ⑸
● 토산을 빼앗기고 당군을 철수시키는 태종
안시성(安市城)에서 전개되는 치열한 공방전(攻防戰)은 쉬는 날이 없었다. 당군이 종일토록 일곱 차례나 성을 공격하는 날도 있었다. 포차(砲車)로 돌멩이를 날리고 충차(衝車)로 때려 일부 성벽과 문루가 부서지기도 했다. 그러면 성안에서는 재빨리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토산을 세우다가 조카인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이 발을 다치자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돌팔이 의원 노릇을 하여 침을 놓아주기도 했다. 당군은 쉴 새 없이 성벽을 공격하는 한편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토산을 쌓았다. 토산만 완공되면 안시성 함락은 틀림없다는 자신감으로 전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60일 동안 연인원 50만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마침내 토산을 완공했다. 토산은 안시성의 성벽보다도 3장, 거의 10미터가 더 높았다. 다섯 갈래로 오르막길을 만든 토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안시성이 내려다보였다. 안시성 점령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군사들이 토산 위에 올라가 활을 쏘고 화토병을 던지기만 하면, 고구려 군사와 백성들은 놀라 겁을 먹고 우왕좌왕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일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때 토산 위에서 성벽으로 사다리나 널판을 걸치고 타넘어 가면 양만춘이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만고의 명장이라 하더라도 성을 지킬 수는 없으리라. 성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태종을 비롯한 당군 수뇌부는 하나같이 회심의 미소 아닌 괴소를 흘렸다.
그런데 당군의 토산이 완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정의의 군대가 영채를 습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안시성의 상황을 멀리서 계속 지켜보고 있던 고정의는 안시성이 위급하다는 판단이 서자 5만의 정예군을 이끌고 당군의 영채를 공격해왔던 것이다. 태종은 깜짝 놀랐다. 쥐죽은 듯이 고요했던 고구려군이 하필 이때 영채를 치다니 괘씸했다. 그는 모든 장수들을 총출동시켜 고정의를 상대하도록 했다. 강하왕도 하는 수 없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에게 토산을 맡기고 황급히 태종에게 불려나갔다.
그러나 이 순간에 변수가 생겼다. 당군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토산이 안시성의 성벽 쪽으로 무너지면서 성벽 일부분이 파괴되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안시성주 양만춘이 아니었다. 그는 급히 2천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무너진 성벽을 통해 토산 위로 달려나갔다. 토산 위에 있던 수백명의 당나라 군사들이 가로막았으나 단병접전(短兵接戰)에 있어서는 고구려군의 기량이 한 수 위였다. 양만춘(楊萬春)은 기합과 더불어 몸을 솟구치며 현란하게 장검(長劍)을 휘둘렀다. 그의 주위에 있던 당병들이 모두 피주검으로 변해 널브러졌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토산 위에서 경비하고 있던 당군 병사들을 전부 처치하고 토산을 점령한 뒤 방책(防柵)을 세워 요새로 만들었다.
한편 태종은 여러 장수와 더불어 고정의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맞아 싸우려고 나가 보았는데, 고구려군은 북과 꽹과리만 요란하게 소리내면서 움직이지 않은 채 더 이상 진격해오지 않았다. 별 우스운 놈들도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안시성 토산 축조 책임자인 강하왕을 다시 현장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고구려군과 대치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영채로 돌아온 태종은 뜻밖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두 달 동안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쌓아올린 공든 탑 아닌 공든 토산을 하루아침에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대노하여 강하왕을 불러오라고 소리쳤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강하왕은 자신의 부하인 부복애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부복애는 토산이 성벽 쪽으로 무너져 성벽의 일부가 파괴되었을 때, 안시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두려워 군사를 모아 성으로 돌격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고구려군이 달려들어 토산을 점령하도록 하여 시간을 허비했으니 부복애의 죄가 더 큽니다.”
태종은 부복애를 묶어서 자기 앞으로 끌고 오게 했다. 부복애가 결박된 채 무릎을 꿇려 앉히자 태종은 직접 어검(御劍)을 뽑아 부복애의 목을 내리쳤다. 그 누구도 그때 태종을 말릴 수가 없었다. 태종은 죽은 부복애의 시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장수들에게 명령했다.
“경비 책임을 소흘히 한 죄인의 수급(首級)을 군문에 높이 효수(梟首)하라!”
사실을 엄밀히 따지자면 토산을 잃은 것은 불과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린 말단 지휘관인 부복애나 숱한 총관 중 한 명에 불과한 강하왕 이도종 두 사람만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더 엄밀히 따지자면 토산을 빼앗긴 책임보다도 토산 자체를 세우라고 명령한 태종 자신에게 더 큰 책임이 있었다. 결국 부복애를 죽인 것은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태종은 이튿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전군을 몰고 토산을 다시 점령하려고 했다. 그러나 양만춘이 점령한 토산은 만만치가 않았다. 가파른 층계를 타고 올라가야 하니 그 험한 정도는 안시성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가 않았다. 당군이 팔을 뻗어 목조 뼈대에 걸려있는 통나무를 잡고 오르려 하면 이내 토산 위에서 고구려군이 바위를 굴려댔다. 토산 위에 있는 점장대에서 쏘는 쇠뇌도 만만치가 않았다. 수천의 당군이 한 시간도 안 되어 쇠뇌에 맞아 죽어나갔다. 당군 병사들은 더 이상 죽기가 싫었다. 그러나 악마와 같은 저승사자로 변한 태종과 그의 장수들은 이성을 잃고 뒤에서 칼을 비껴들고 고함만 질러 댔다. 당군 병사들도 하는 수 없이 토산 아래로 떠밀려 들어갔지만 토산 위로 올라갈 생각은 엄두도 안 났다. 뒤에서 떠밀려오는 군사들 때문에 선두에 있던 당병들은 하는 수 없이 토산 밑에 넘어져 깔려 죽어버리기 시작했다. 이렇듯 아무 성과도 없이 군사들을 수없이 죽게 하고 날이 저물기 시작해서야 비로소 태종은 군사를 물렸다. 그래도 태종은 분이 풀리지 않아 다음날에도 같은 식으로 당병들을 사지(死地)로 내몰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달 동안이나 연 50만 명을 동원해서 모진 고생 끝에 완공된 토산이 안시성의 고구려 군사들에게 뺏겼다는 것은 성인군자도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토산은 태종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토산 공격 3일째 되는 날이었다. 태종은 선두에 서서 군사들을 독려했다.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이세적(徐世勣)이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태종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안시성주 양만춘이 토산에 올라 태종을 내려다보니 충분히 화살이 미칠 수 있는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태종이 이성을 잃고 너무 앞장섰던 것이 불운이었다. 양만춘은 각궁(角弓)을 꺼내들고 태종의 얼굴을 겨냥했다. 군사들에게 고함을 지르던 태종이 얼굴을 약간 돌린 순간, 양만춘이 힘껏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마자 유엽전(柳葉箭)이 부르르 떨며 태종에게 날아가서 그의 왼쪽 눈에 정통으로 박혔다. 태종은 비명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주위에 있던 장수들이 달려와 방패로 쓰러진 태종을 가렸다. 양만춘은 군사들에게 외쳤다.
“당괴(唐傀) 이세민(李世民)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무조건 내달아 화살을 날려라.”
이에 성안에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모두 토산에 올라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댔다. 양만춘은 계속 북을 올리게 시켰다. 저 멀리 주둔하고 있던 고정의도 안시성의 전황에 변화가 있음을 감지하고 휘하 장수들을 보내 당군의 영채를 급습하도록 했다.
태종의 얼굴에 피가 범벅된 것을 본 당군 병사들은 황제인 태종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전의를 상실하고 요하로 방향을 잡아 도망칠 준비만 했다. 장손무기와 이세적 등 모든 당장(唐將)들이 나서서 당군을 제지했기에 그나마 대오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고정의의 고구려군은 당군을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었다. 그러나 이세적과 설인귀 등이 다시 사생결단을 하자고 나오는 바람에 고정의의 군사들은 주춤했다. 태종은 들것에 실려 가면서 정신을 다시 차렸다. 눈에는 아직 양만춘의 화살이 박혀있었다. 힘을 주어 화살을 빼니 눈알도 함께 빠져나왔다. 통증이 매우 심했다. 태종은 잠시 후에 장손무기를 불렀다. 장손무기가 태종이 누워있는 들것 옆으로 다가왔다. 태종이 탄식하며 말했다.
“안시성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더는 공략하기가 어렵겠소. 그대는 안시성을 우회해 평양성으로 진공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하시오.”
장손무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중상을 입으셨는데 더 이상 원정을 감행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제 그만 회군하시는 것이…”
“비록 많은 군사가 죽었지만 아직도 25만명의 병력이 남아 있소. 여기서 포기한다면 앞으로 고구려를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이튿날 아침 외눈박이가 된 태종이 수하 장군들을 불러 모았다. 한쪽만 남은 눈을 씰룩이며 당 태종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토산마저 양만춘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우리의 뒤편에서는 고정의가 치고 빠지는 전술로 아군을 위협하고 있으니 안시성에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그러니 요동의 성들을 내버려 두고 부여벌을 지나 바로 평양성으로 직공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시오.”
양홍례가 걱정스러운 듯이 간언했다.
“폐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전략입니다. 안시성이나 신성의 군사들이 성 밖으로 나와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이고 게다가 우리에게는 군량도 매우 부족합니다. 보급로도 끊어진 상태에서 날씨가 더욱 추워진다면 군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많이 죽어나갈 것입니다.”
“수군총관 장량이 1천여척의 전함과 10만여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요동 해안에서 고구려 수군과 싸우고 있으니 그가 제해권만 확보한다면 군량 수송도 그리 어려운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한가닥 희망을 잡고 있던 태종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기가 막힌 패보(敗報)가 들이닥쳤다.
“폐하! 장량의 수군이 비사성 남동쪽 장산군도에서 대패하여 군사 5만여명과 군선 5백여척을 잃었고, 상하·좌난당·유영행 등 3명의 장수도 그 싸움에서 실종됐다고 하옵니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하늘이 노래졌다.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한탄했다.
“아, 내가 연개소문에게 졌구나!”
그리고 힘없이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는 정말 장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구나.”
더 버티고 싶어도 군량의 부족이 목을 조르기 시작하니 별 수가 없었다. 이제 육로와 수로 군량을 보급하는 두 길 가운데 수로는 완전히 끊겨버렸다. 영주 - 통정진 - 요하 - 안시성으로 이어진 육로도 고구려군의 유격전에 수시로 위협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칭 전략의 귀재 이세민은 외로운 성 안시성 하나에 매달려 석 달 동안이나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60일 동안 토산 하나를 쌓아올린 것은 분명히 미친 짓이었다. 전략의 천재든 귀재든 절대로 할 짓이 아니라 얼건멍청이나 할 짓이었다.
겨우 3만~4만명이 지키는 안시성에 발목이 잡혀 석 달이나 되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아니, 지난 4월에 요하를 건너왔으니 벌써 반년 동안이나 천산산맥을 넘지 못한 채 건안성이나 안시성 언저리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개모성·백암성·요동성 등에서 노획했던 60만석의 군량만 바닥내지 않았던가? 당군에게 남은 군량은 이제 겨우 열흘치밖에 없었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가 많고 적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보급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양도(糧道)가 막히면 무엇으로 이 수십만 대군을 먹인단 말인가? 게다가 벌써 9월. 요동에는 겨울이 일찍 온다. 이제 한 달만 더 있으면 찬바람이 몰려올 것이다. 눈이 내려 쌓이고 얼음이 얼면 당의 수십만 대군은 연개소문과 고구려군보다도 굶주림과 추위에 못 이겨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태자(太子) 이치(李治)로부터 급보가 왔다. 철륵(鐵勒)의 설연타(薛延陀)가 만리장성을 넘어 침공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동서 양면에서 협공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수도 장안성이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안시성 외곽에서 고구려군은 쉴 새 없이 유격전을 펼쳐 육로로 퇴각하기도 어렵게 됐다.
태종은 철군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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