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이 총지휘하는 12만의 고구려군은 어느새 태종이 피신해 있는 영주성 근처에 다다랐다. 장손무기와 이세적이 태종에게 빨리 태자가 기다리고 있는 임유관으로 이동하여 장안으로 돌아가라고 간언했지만 태종은 듣지 않았다. 이미 구겨질대로 구겨진 자존심. 피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처참하게 도망쳐왔는데 또 도망갈 수는 없었다. 영주성만큼은 자신이 직접 지키고 싶었다. 만약 여기서 또 연개소문의 칼날을 피해 도망간다면 군사들은 황제인 자신을 더욱 신뢰하지 않을 것이고 백성들도 등을 돌릴 것이다. 그는 화살에 맞아 눈알이 빠진 상처에 또 통증이 느껴졌는지 눈썹을 찌푸렸지만 절대적인 위기의식을 통감하며 어검(御劍)을 짚고 일어나 제장(諸將)에게 소리쳤다.
“영주성은 우리 당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에 있는 최전선의 기지다! 이곳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요서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이곳을 사수해야 한다. 당의 황제로써 짐이 직접 이 영주성을 지킬 것이다.”
태종은 이세적을 불렀다.
“대총관!”
“예, 폐하…!”
“지금 영주성을 지키는 군사는 현재 비전투원까지 합쳐도 9만 3천여명 정도뿐이다. 그러나 짐을 추격해 영주성까지 쫓아온 고구려군은 12만 대군이라고 한다. 우리는 진법으로 고구려군을 막을 수밖에 없다. 아군이 현재 상황에서 적군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진법이 무엇이겠는가?”
“폐하, 병법에 금자방진(金字防陳)이란게 있습니다. ‘쇠 금(金)’자 모양을 따서 주변에 황량대(黃糧臺)를 급히 설치하면 인사형진(人事形陳)이 형성되어 적군의 곤자진이나 장사진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임금 왕(王)’자 형상의 진형은 적이 인사형진을 부수고 들어온다고 해도 3겹의 방어선으로 튼실하게 막을 수 있는 진법입니다. 더불어 두 점자형이 양 측면에서 보좌를 하니 지금으로서는 이 금자방진이 우리가 칠 수 있는 유일한 진법이라고 사료되옵니다. 되도록 높은 고지인 황량대를 잇는 전선에 군진을 확보하고 금자방진을 펴면 연개소문의 대군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에 모든 것을 걸어야겠구나.”
태종은 장수들과 함께 군사들을 거느리고 조양성 밖으로 나가 금자방진을 펴고 연개소문의 고구려군과 대치하였다.
방진(防陳)은 고대 동양의 전쟁에서 적군의 돌격전으로부터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안된 전술로 행군이나 혹은 전선방어에서 효과를 많이 보았다. 방진의 종류는 아주 다양해서 협소한 지형에 적은 병력을 배치시키고 적의 대군을 맞아 싸워 집중방어를 할 수 있는 일자방진과 이자방진이 있었다. 연수영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도 요동반도 해안에서 장량이 총지휘하는 당 수군과 싸울 때 이 진형을 자주 구사하여 연전연승을 올렸다. 훗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벌어졌던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이 방진을 구사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은 아군 병력의 수가 적고 적군의 수효가 많다보니 상대적으로 방어하기 쉬운 협곡이나 협수로에서 그 험지에 가장 집중도가 높은 진법을 채택하여 아군의 전력을 밀집시켜 적군의 공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술이었다.
이어 삼자방진은 추행진(錐行陣)이라고도 부르며, 행군·사열·공성전에 자주 이용되는 진법이었다. 대군으로 사방을 완전하게 방어하기 위해서 사자방진을 구사하는데 전력이 네 등분으로 갈라져 효율이 극히 떨어지므로 병법에서는 배수진을 쳐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쓰지 말라고 권유한다. 오행자방진(五行字防陳)이란 것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수(水)’를 중심으로 하며 가운데와 양면이 안정돼 있어 공수전환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수자방진(水字防陳)은 병력이 많은 군대를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진법이지만 순식간에 이루기는 어렵고 중간장애물이 없이 군사들의 병장기와 단병접전 실력에 의해 의지해야 하므로 단점이 더 많다.
‘불화(火)’자 모양으로 진을 치는 화자방진은 수자방진과 같은 맥락에서 구사하는 진법이다. 고대 군사전술과 진법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 사람이 본다면 화자방진을 형성한 군대와 수자방진을 형성한 군대가 교전하게 되면 수자방진이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진법은 역설적으로는 서로 비슷한 유형이다. 어차피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막을 때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진법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목자·금자·토자방진이 있다. 목자(木字)는 행군방어와 적의 매복에 대비하기 딱 좋은 진법으로 각 예하부대와의 연계가 매우 매끄럽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방진은 약 10여가지가 있다고 병법서에 설명돼 있는데,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전략적으로 잘 운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645년 10월 24일 정오에 태종과 이세적·장손무기·위지경덕·계필하력·설인귀·집실사력 등 당군 수뇌부가 통솔하는 당나라의 군사 9만 3천여명은 연개소문과 고정의·온사문·두방루·술탈·뇌음신 등이 이끄는 12만의 고구려군을 맞아 금자방진을 형성하여 4중의 방어선을 치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연개소문은 고정의와 함께 높은 봉우리에 올라 당군의 진형을 세밀하게 살폈다.
“당군이 친 진형을 보니 금자방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각 방어선마다 포노(砲弩)와 삼단노(三段弩)를 설치하고 우리의 돌격전을 저지할 셈이지요.”
“적군이 진법으로 싸우겠다고 하니, 우리도 진법으로 상대해야 하지 않겠소?”
개인적으로는 연개소문의 장인이지만 관직상으로는 그의 참모 역할을 하고 있는 고정의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장인 어른께서는 어떤 진법이 가장 유용하리라 보십니까?”
“저들이 금자방진을 폈으니 우리는 첨자찰진(尖字札陳)을 펼치는 것이 좋겠소. 앞의 소자 대형이 공격과 수비를 함께 할 수 있고 그 뒤의 대자 대형에서는 번갈아 지원을 할 수 있고 군사장비를 번갈아 적절히 배합하여 쓸 수 있으니 어떤 방진도 파괴할 수 있는 최적의 진법인 셈이지요.”
연개소문은 장인인 고정의의 군략을 따르기로 하고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모든 군사는 성진(成陳)하라! 진형은 첨자진이다.”
마침내 군령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며 좌우로 흔들리자 고구려군은 마침내 조양의 황량대 언덕으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하늘을 훤히 밝히며 적진으로 쏟아지는 불화살과 돌덩이들은 허공을 가파르게 가로질렀다. 3천여대가 넘는 쇠뇌에서 커다란 화살이 장대비처럼 쇳소리와 더불어 무수하게 발사되고 무려 1천여대가 넘는 포행거에서 무겁고 큰 돌덩이들이 날아가 우직한 소리를 내며 지면에 쳐박혔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무수히 쏟아지는 돌과 화살에도 기세가 죽지 않았고, 방패수와 검차수들이 기마병들을 보호하며 매섭게 밀어닥치고 있었다.
두 시진이 넘게 공방전을 벌였지만 당군의 저항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 매우 끈질기게 전개되었고, 고구려군은 수십 개의 장방패(長防牌)를 동원해 당군의 포화와 화살을 막아내며 적진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연개소문은 아군의 출혈이 심해지자 삼현상노(三弦箱弩)와 연사수노(連射手弩) 1천여대를 동원하여 적진을 향해 발사하도록 했다. 긴 철전(鐵箭)과 무수한 쇠뭉치들이 당군의 진영을 향해 우박줄기처럼 퍼부어졌다. 당군이 세워놓은 목책은 이내 균열이 생겨 불타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어 무서운 속도로 전진한 고구려의 철기병들이 무너진 목책을 넘어 당군의 진영을 마음껏 짓밟고 있었다. 당군은 이미 요택에서 고구려군의 요격을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쫓겨오느라 치밀한 계획으로 조양 일대를 사수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온사문과 뇌음신이 각각 2~3만 정도의 기병대를 이끌고 좌우측면에서 당군을 심하게 괴롭혔고, 결국 당군은 버틸 수 있는 힘이 다하여 첫번째 방어선이 붕괴되고 말았다.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장손무기가 다급하게 태종에게 퇴각을 종용했다.
“폐하, 이제 더 이상 여기서 전투를 계속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어서 임유관으로 피하십시오!”
그러나 태종은 끝까지 싸우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이미 안시성과 요택에서 치욕을 당하고 적에게 등을 보여 대국의 황제로서 체면이 깎였는데, 여기서 또 도주한다면 세상의 비웃음거리로 남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싸우다 죽는 것만 못하다!”
“폐하,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닙니다. 이곳에서 폐하께 변고가 생긴다면 어렵게 기반(基盤)을 닦은 대당의 사직(社稷)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될 것이옵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훗날을 생각하십시오.”
장손무기가 다시 태종에게 퇴군하자고 설득하자 태종은 어검을 마하(馬下)에 떨어뜨리고 탄식했다.
“아! 연개소문 저 자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내가 연개소문이란 자를 너무 가볍게 보았구나!”
태종은 결국 철군을 명령하고 장손무기·이세적·설인귀·계필하력 등의 보좌를 받으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조양, 즉 영주성 부근에서 벌어진 이 접전을 통해 고구려군은 무려 2만명의 당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고구려군 역시 6천여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피해를 입었다. 이때 연개소문의 군대는 달아나는 태종 일행을 끝까지 추격하여 금주 방면에서 또 당군 1만여명을 참살하고 임유관 근처까지 진출하게 된다. 임유관에는 당나라의 태자 이치가 거느린 10만 대군이 지키고 있었다. 임유관에서 태자와 만난 태종은 전군에 또 다시 퇴각 명령을 내려 임유관을 거저 비워주고 등주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요서 일대 거의 대부분이 연개소문의 군대에 의해 장악되고 있을 무렵, 당군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되었던 요동의 모든 성들은 고구려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 ‘바다의 여왕’ 연수영 」6조양대전 ⑸
● 진법(陳法) 대결
연개소문이 총지휘하는 12만의 고구려군은 어느새 태종이 피신해 있는 영주성 근처에 다다랐다. 장손무기와 이세적이 태종에게 빨리 태자가 기다리고 있는 임유관으로 이동하여 장안으로 돌아가라고 간언했지만 태종은 듣지 않았다. 이미 구겨질대로 구겨진 자존심. 피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처참하게 도망쳐왔는데 또 도망갈 수는 없었다. 영주성만큼은 자신이 직접 지키고 싶었다. 만약 여기서 또 연개소문의 칼날을 피해 도망간다면 군사들은 황제인 자신을 더욱 신뢰하지 않을 것이고 백성들도 등을 돌릴 것이다. 그는 화살에 맞아 눈알이 빠진 상처에 또 통증이 느껴졌는지 눈썹을 찌푸렸지만 절대적인 위기의식을 통감하며 어검(御劍)을 짚고 일어나 제장(諸將)에게 소리쳤다.
“영주성은 우리 당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에 있는 최전선의 기지다! 이곳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요서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이곳을 사수해야 한다. 당의 황제로써 짐이 직접 이 영주성을 지킬 것이다.”
태종은 이세적을 불렀다.
“대총관!”
“예, 폐하…!”
“지금 영주성을 지키는 군사는 현재 비전투원까지 합쳐도 9만 3천여명 정도뿐이다. 그러나 짐을 추격해 영주성까지 쫓아온 고구려군은 12만 대군이라고 한다. 우리는 진법으로 고구려군을 막을 수밖에 없다. 아군이 현재 상황에서 적군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진법이 무엇이겠는가?”
“폐하, 병법에 금자방진(金字防陳)이란게 있습니다. ‘쇠 금(金)’자 모양을 따서 주변에 황량대(黃糧臺)를 급히 설치하면 인사형진(人事形陳)이 형성되어 적군의 곤자진이나 장사진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임금 왕(王)’자 형상의 진형은 적이 인사형진을 부수고 들어온다고 해도 3겹의 방어선으로 튼실하게 막을 수 있는 진법입니다. 더불어 두 점자형이 양 측면에서 보좌를 하니 지금으로서는 이 금자방진이 우리가 칠 수 있는 유일한 진법이라고 사료되옵니다. 되도록 높은 고지인 황량대를 잇는 전선에 군진을 확보하고 금자방진을 펴면 연개소문의 대군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에 모든 것을 걸어야겠구나.”
태종은 장수들과 함께 군사들을 거느리고 조양성 밖으로 나가 금자방진을 펴고 연개소문의 고구려군과 대치하였다.
방진(防陳)은 고대 동양의 전쟁에서 적군의 돌격전으로부터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안된 전술로 행군이나 혹은 전선방어에서 효과를 많이 보았다. 방진의 종류는 아주 다양해서 협소한 지형에 적은 병력을 배치시키고 적의 대군을 맞아 싸워 집중방어를 할 수 있는 일자방진과 이자방진이 있었다. 연수영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도 요동반도 해안에서 장량이 총지휘하는 당 수군과 싸울 때 이 진형을 자주 구사하여 연전연승을 올렸다. 훗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벌어졌던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이 방진을 구사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은 아군 병력의 수가 적고 적군의 수효가 많다보니 상대적으로 방어하기 쉬운 협곡이나 협수로에서 그 험지에 가장 집중도가 높은 진법을 채택하여 아군의 전력을 밀집시켜 적군의 공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술이었다.
이어 삼자방진은 추행진(錐行陣)이라고도 부르며, 행군·사열·공성전에 자주 이용되는 진법이었다. 대군으로 사방을 완전하게 방어하기 위해서 사자방진을 구사하는데 전력이 네 등분으로 갈라져 효율이 극히 떨어지므로 병법에서는 배수진을 쳐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쓰지 말라고 권유한다. 오행자방진(五行字防陳)이란 것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수(水)’를 중심으로 하며 가운데와 양면이 안정돼 있어 공수전환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수자방진(水字防陳)은 병력이 많은 군대를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진법이지만 순식간에 이루기는 어렵고 중간장애물이 없이 군사들의 병장기와 단병접전 실력에 의해 의지해야 하므로 단점이 더 많다.
‘불화(火)’자 모양으로 진을 치는 화자방진은 수자방진과 같은 맥락에서 구사하는 진법이다. 고대 군사전술과 진법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 사람이 본다면 화자방진을 형성한 군대와 수자방진을 형성한 군대가 교전하게 되면 수자방진이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진법은 역설적으로는 서로 비슷한 유형이다. 어차피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막을 때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진법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목자·금자·토자방진이 있다. 목자(木字)는 행군방어와 적의 매복에 대비하기 딱 좋은 진법으로 각 예하부대와의 연계가 매우 매끄럽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방진은 약 10여가지가 있다고 병법서에 설명돼 있는데,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전략적으로 잘 운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645년 10월 24일 정오에 태종과 이세적·장손무기·위지경덕·계필하력·설인귀·집실사력 등 당군 수뇌부가 통솔하는 당나라의 군사 9만 3천여명은 연개소문과 고정의·온사문·두방루·술탈·뇌음신 등이 이끄는 12만의 고구려군을 맞아 금자방진을 형성하여 4중의 방어선을 치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연개소문은 고정의와 함께 높은 봉우리에 올라 당군의 진형을 세밀하게 살폈다.
“당군이 친 진형을 보니 금자방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각 방어선마다 포노(砲弩)와 삼단노(三段弩)를 설치하고 우리의 돌격전을 저지할 셈이지요.”
“적군이 진법으로 싸우겠다고 하니, 우리도 진법으로 상대해야 하지 않겠소?”
개인적으로는 연개소문의 장인이지만 관직상으로는 그의 참모 역할을 하고 있는 고정의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장인 어른께서는 어떤 진법이 가장 유용하리라 보십니까?”
“저들이 금자방진을 폈으니 우리는 첨자찰진(尖字札陳)을 펼치는 것이 좋겠소. 앞의 소자 대형이 공격과 수비를 함께 할 수 있고 그 뒤의 대자 대형에서는 번갈아 지원을 할 수 있고 군사장비를 번갈아 적절히 배합하여 쓸 수 있으니 어떤 방진도 파괴할 수 있는 최적의 진법인 셈이지요.”
연개소문은 장인인 고정의의 군략을 따르기로 하고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모든 군사는 성진(成陳)하라! 진형은 첨자진이다.”
마침내 군령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며 좌우로 흔들리자 고구려군은 마침내 조양의 황량대 언덕으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하늘을 훤히 밝히며 적진으로 쏟아지는 불화살과 돌덩이들은 허공을 가파르게 가로질렀다. 3천여대가 넘는 쇠뇌에서 커다란 화살이 장대비처럼 쇳소리와 더불어 무수하게 발사되고 무려 1천여대가 넘는 포행거에서 무겁고 큰 돌덩이들이 날아가 우직한 소리를 내며 지면에 쳐박혔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무수히 쏟아지는 돌과 화살에도 기세가 죽지 않았고, 방패수와 검차수들이 기마병들을 보호하며 매섭게 밀어닥치고 있었다.
두 시진이 넘게 공방전을 벌였지만 당군의 저항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 매우 끈질기게 전개되었고, 고구려군은 수십 개의 장방패(長防牌)를 동원해 당군의 포화와 화살을 막아내며 적진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연개소문은 아군의 출혈이 심해지자 삼현상노(三弦箱弩)와 연사수노(連射手弩) 1천여대를 동원하여 적진을 향해 발사하도록 했다. 긴 철전(鐵箭)과 무수한 쇠뭉치들이 당군의 진영을 향해 우박줄기처럼 퍼부어졌다. 당군이 세워놓은 목책은 이내 균열이 생겨 불타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어 무서운 속도로 전진한 고구려의 철기병들이 무너진 목책을 넘어 당군의 진영을 마음껏 짓밟고 있었다. 당군은 이미 요택에서 고구려군의 요격을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쫓겨오느라 치밀한 계획으로 조양 일대를 사수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온사문과 뇌음신이 각각 2~3만 정도의 기병대를 이끌고 좌우측면에서 당군을 심하게 괴롭혔고, 결국 당군은 버틸 수 있는 힘이 다하여 첫번째 방어선이 붕괴되고 말았다.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장손무기가 다급하게 태종에게 퇴각을 종용했다.
“폐하, 이제 더 이상 여기서 전투를 계속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어서 임유관으로 피하십시오!”
그러나 태종은 끝까지 싸우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이미 안시성과 요택에서 치욕을 당하고 적에게 등을 보여 대국의 황제로서 체면이 깎였는데, 여기서 또 도주한다면 세상의 비웃음거리로 남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싸우다 죽는 것만 못하다!”
“폐하,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닙니다. 이곳에서 폐하께 변고가 생긴다면 어렵게 기반(基盤)을 닦은 대당의 사직(社稷)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될 것이옵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훗날을 생각하십시오.”
장손무기가 다시 태종에게 퇴군하자고 설득하자 태종은 어검을 마하(馬下)에 떨어뜨리고 탄식했다.
“아! 연개소문 저 자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내가 연개소문이란 자를 너무 가볍게 보았구나!”
태종은 결국 철군을 명령하고 장손무기·이세적·설인귀·계필하력 등의 보좌를 받으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조양, 즉 영주성 부근에서 벌어진 이 접전을 통해 고구려군은 무려 2만명의 당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고구려군 역시 6천여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피해를 입었다. 이때 연개소문의 군대는 달아나는 태종 일행을 끝까지 추격하여 금주 방면에서 또 당군 1만여명을 참살하고 임유관 근처까지 진출하게 된다. 임유관에는 당나라의 태자 이치가 거느린 10만 대군이 지키고 있었다. 임유관에서 태자와 만난 태종은 전군에 또 다시 퇴각 명령을 내려 임유관을 거저 비워주고 등주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요서 일대 거의 대부분이 연개소문의 군대에 의해 장악되고 있을 무렵, 당군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되었던 요동의 모든 성들은 고구려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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