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남부의 이웃한 케랄라주와 타밀나두주의 보건소 풍경은 사뭇 다르다. 타밀나두주의 보건소에는 근무해야 할 두 명의 의사가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다. 반면 케랄라의 보건소에는 항상 두 명의 의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인류학자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케랄라의 보건소에서 의사가 며칠간 자리를 비운다면 대규모 군중 시위가 일어날 것이다.” 실제로 케랄라의 한 보건소에 급한 조치가 필요한 산모가 찾아왔는데 의사가 자리를 비운 때가 있었다. 분노한 주민들은 극장에서 놀고 있던 의사를 찾아내 병원으로 끌고 왔다.
케랄라주는 1인당 소득이 1000달러 정도에 불과하지만 ‘케랄라 모델’로 연구되는 특별한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100%에 가까운 문자해독률에다 보건·의료, 치안, 교육 등 사회기반이 인도의 최상위권 수준이다. 주민들은 소득수준이 훨씬 높은 미국의 흑인들보다 더 오래 살고 더 잘 산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케랄라주를 예로 들어 ‘자유로서의 발전’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경제성장만이 발전이 아니라 삶의 질과 정치적·사회적 자유까지 발전의 개념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부대 강현수 교수는 케랄라 지역의 힘이 대중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권리 주장에서 나왔다고 분석한다. 케랄라주는 1957년 세계 최초로 혁명이 아니라 민주적 선거에 의해 공산당이 집권했다. 공산당은 토지개혁, 공공교육·보건 확대, 문맹 퇴치 등 사회자본 확충에 힘썼다. 이는 단지 공산당 정권이 집권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카스트 차별 철폐운동 등 제3세계 국가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아래로부터의 운동 덕분이었다. 1997년에는 ‘인민 계획 캠페인’이라는 주민들의 직접 참여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한국 사회는 사회 참여의 비율이 세계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투표에서부터 시작해 사회 현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케랄라주는 사회를 바꾸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보여준다. 우리에게도 분산된 대중이 네트워크를 통해 결합해 사회참여 운동을 벌이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그랬고, 최근에는 희망버스가 그랬다. 공개토론방과 댓글 등 인터넷을 통해 드러나는 변화의 열망 또한 낮은 수준이 아니다. 2004년 국제사회조사프로그램(ISSP)의 조사 결과를 보면 여러 가지 사회 참여 방식 중 ‘인터넷 정치공개토론 및 토론모임 참석하기’를 택한 사람들의 비율이 6%로 조사 대상 34개국 중 가장 높다.
열망의 표출은 즉각적이고 폭발적이다. 인터넷을 통한 정치참여는 대의정치의 공백을 메우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다만 그 에너지는 불만 섞인 한숨으로 사그라지곤 했다. 파편화된 개인들의 참여라는 점에서 책임정치와 제도 변화를 불러오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정칟사회참여가 부재한 탓이다.
투표율만 봐도 한때 90%에 이르렀던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2007년 63%까지 하락했다. 2006년 총선 투표율은 역대 최저인 46.1%에 불과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54.5%로 다소 높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유권자 중 절반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셈이다. 미국의 투표율이 낮다고는 하지만 우리와는 달리 선거 전 미리 등록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2008년 대선 투표율 61.6%는 낮은 수치라고 보기 어렵다.
한국은 서명운동, 보이콧, 평화집회의 참여 경험이 전 세계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회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율도 미국에 비해 모든 부문이 낮고, 특히 정당·환경단체·인권단체 등의 참여율은 0%에 가까운 수준이다. ISSP의 정당 또는 정치단체 활동 참여율을 살펴보면 한국은 34개국 가운데 33위를 했다. 지난 1년 동안 정당 또는 정치 모임이나 단체 활동에 얼마나 자주 참여하였는가를 묻는 질문에서 96%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것이다.
대표적인 시민단체를 살펴보면 참여연대의 회원 수가 1만2000여명,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2만3000여명이다. 반면 비슷한 성격인 미국의 퍼블릭시티즌은 8만여명, 커먼코즈는 40만여명이다. 인구 규모나 조직의 형태가 다른 점을 감안하더라도 공적 시민참여의 수준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대신 동창회·향우회 등의 사적 친목단체 참여율은 60%에 육박한다. 갈등이 공적인 조정이나 참여를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해결이나 물리적인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적 석학 데이비드 하비는 세계 인류가 60여년 전에 합의한 유엔인권선언만 엄격하게 적용했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위반하는 신자유주의를 버려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헌법에 명시된 기본적 권리만 제대로 보장돼도 한국사회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것을 지키기 위한 참여는 권리나 의무가 아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다.
일상생활 속의 지난한 문제들 속에서 민주주의가 사라진 영역을 시민참여로 메워가야 우리의 삶도 바뀐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집회에 참여했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은 용산참사 항의 투쟁, 쌍용자동차 사태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과 지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 문제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사회가 한 개인들의 삶을 일방적으로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오히려 날로 심화되는 신자유주의 체제와 사회적 양극화는 광장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시민들을 자기 안에 갇히게 만들었다. 세금, 주택, 교육 문제에서 시민들은 개인적 욕망에 충실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투표율이나 사회단체 참여율을 보면 하위 계층일수록 더 낮은 참여를 보여주고 있어 되레 우리 사회 기층 서민들의 정치적 요구가 반영될 가능성은 낮아지고 있다.
인터넷에 불만을 쏟아내는 것과는 달리 참여는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에 대한 기대도 한 사람의 인물이 중앙 정치에 들어가 모든 것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믿음에 일정 부분 기초하지만 역시 참여보다는 관전에 가깝다. 일상의 문제들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사회적인 것’의 확장이 필요하다. 참여의 활성화를 통해 함께 풀어가야 할 것, 즉 공공성 재구축이 필요하다. 개인적 불만이 일상적 실천으로, 이것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동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참여에 쓴 비용은 결국 사회보험과 같이 우리에게 돌아온다.
불만의 에너지를 참여로
[경향신문 2011-10-05]
인도 남부의 이웃한 케랄라주와 타밀나두주의 보건소 풍경은 사뭇 다르다. 타밀나두주의 보건소에는 근무해야 할 두 명의 의사가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다. 반면 케랄라의 보건소에는 항상 두 명의 의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인류학자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케랄라의 보건소에서 의사가 며칠간 자리를 비운다면 대규모 군중 시위가 일어날 것이다.” 실제로 케랄라의 한 보건소에 급한 조치가 필요한 산모가 찾아왔는데 의사가 자리를 비운 때가 있었다. 분노한 주민들은 극장에서 놀고 있던 의사를 찾아내 병원으로 끌고 왔다.
한국 사회는 사회 참여의 비율이 세계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투표에서부터 시작해 사회 현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케랄라주는 1인당 소득이 1000달러 정도에 불과하지만 ‘케랄라 모델’로 연구되는 특별한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100%에 가까운 문자해독률에다 보건·의료, 치안, 교육 등 사회기반이 인도의 최상위권 수준이다. 주민들은 소득수준이 훨씬 높은 미국의 흑인들보다 더 오래 살고 더 잘 산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케랄라주를 예로 들어 ‘자유로서의 발전’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경제성장만이 발전이 아니라 삶의 질과 정치적·사회적 자유까지 발전의 개념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부대 강현수 교수는 케랄라 지역의 힘이 대중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권리 주장에서 나왔다고 분석한다. 케랄라주는 1957년 세계 최초로 혁명이 아니라 민주적 선거에 의해 공산당이 집권했다. 공산당은 토지개혁, 공공교육·보건 확대, 문맹 퇴치 등 사회자본 확충에 힘썼다. 이는 단지 공산당 정권이 집권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카스트 차별 철폐운동 등 제3세계 국가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아래로부터의 운동 덕분이었다. 1997년에는 ‘인민 계획 캠페인’이라는 주민들의 직접 참여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케랄라주는 사회를 바꾸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보여준다. 우리에게도 분산된 대중이 네트워크를 통해 결합해 사회참여 운동을 벌이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그랬고, 최근에는 희망버스가 그랬다. 공개토론방과 댓글 등 인터넷을 통해 드러나는 변화의 열망 또한 낮은 수준이 아니다. 2004년 국제사회조사프로그램(ISSP)의 조사 결과를 보면 여러 가지 사회 참여 방식 중 ‘인터넷 정치공개토론 및 토론모임 참석하기’를 택한 사람들의 비율이 6%로 조사 대상 34개국 중 가장 높다.
열망의 표출은 즉각적이고 폭발적이다. 인터넷을 통한 정치참여는 대의정치의 공백을 메우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다만 그 에너지는 불만 섞인 한숨으로 사그라지곤 했다. 파편화된 개인들의 참여라는 점에서 책임정치와 제도 변화를 불러오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정칟사회참여가 부재한 탓이다.
투표율만 봐도 한때 90%에 이르렀던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2007년 63%까지 하락했다. 2006년 총선 투표율은 역대 최저인 46.1%에 불과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54.5%로 다소 높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유권자 중 절반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셈이다. 미국의 투표율이 낮다고는 하지만 우리와는 달리 선거 전 미리 등록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2008년 대선 투표율 61.6%는 낮은 수치라고 보기 어렵다.
한국은 서명운동, 보이콧, 평화집회의 참여 경험이 전 세계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회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율도 미국에 비해 모든 부문이 낮고, 특히 정당·환경단체·인권단체 등의 참여율은 0%에 가까운 수준이다. ISSP의 정당 또는 정치단체 활동 참여율을 살펴보면 한국은 34개국 가운데 33위를 했다. 지난 1년 동안 정당 또는 정치 모임이나 단체 활동에 얼마나 자주 참여하였는가를 묻는 질문에서 96%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것이다.
대표적인 시민단체를 살펴보면 참여연대의 회원 수가 1만2000여명,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2만3000여명이다. 반면 비슷한 성격인 미국의 퍼블릭시티즌은 8만여명, 커먼코즈는 40만여명이다. 인구 규모나 조직의 형태가 다른 점을 감안하더라도 공적 시민참여의 수준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대신 동창회·향우회 등의 사적 친목단체 참여율은 60%에 육박한다. 갈등이 공적인 조정이나 참여를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해결이나 물리적인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적 석학 데이비드 하비는 세계 인류가 60여년 전에 합의한 유엔인권선언만 엄격하게 적용했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위반하는 신자유주의를 버려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헌법에 명시된 기본적 권리만 제대로 보장돼도 한국사회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것을 지키기 위한 참여는 권리나 의무가 아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다.
일상생활 속의 지난한 문제들 속에서 민주주의가 사라진 영역을 시민참여로 메워가야 우리의 삶도 바뀐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집회에 참여했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은 용산참사 항의 투쟁, 쌍용자동차 사태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과 지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 문제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사회가 한 개인들의 삶을 일방적으로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오히려 날로 심화되는 신자유주의 체제와 사회적 양극화는 광장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시민들을 자기 안에 갇히게 만들었다. 세금, 주택, 교육 문제에서 시민들은 개인적 욕망에 충실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투표율이나 사회단체 참여율을 보면 하위 계층일수록 더 낮은 참여를 보여주고 있어 되레 우리 사회 기층 서민들의 정치적 요구가 반영될 가능성은 낮아지고 있다.
인터넷에 불만을 쏟아내는 것과는 달리 참여는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에 대한 기대도 한 사람의 인물이 중앙 정치에 들어가 모든 것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믿음에 일정 부분 기초하지만 역시 참여보다는 관전에 가깝다. 일상의 문제들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사회적인 것’의 확장이 필요하다. 참여의 활성화를 통해 함께 풀어가야 할 것, 즉 공공성 재구축이 필요하다. 개인적 불만이 일상적 실천으로, 이것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동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참여에 쓴 비용은 결국 사회보험과 같이 우리에게 돌아온다.
<경향신문 황경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