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가 금(金)의 압력을 받고 있던 인종(仁宗) 때부터 고려 정치는 문치(文治)의 극성기를 거치면서 내부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부와 권력이 개경의 소수 문벌귀족에게 독점되면서 관료사회가 분열되고, 민심이 권력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50여년에 걸친 반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반란의 첫 봉화는 이자겸(李資謙)으로 대표되는 문벌귀족층에서 울리고, 다음에는 묘청(妙淸)으로 대표되는 평양 지방의 서경문신세력이 뒤를 이었으며, 그 다음 의종(毅宗) 때에는 무신들이 저항하여 드디어 무신정권(武臣政權)을 세우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인종(仁宗) 때에 개경 최고의 귀족은 인주(仁州) 이씨(李氏) 집안의 이자겸(李資謙)이었다. 인주 이씨는 이한(李翰), 이자연(李子淵) 부자가 연이어 고관에 이르고, 특히 이자연은 세 딸을 모두 문종(文宗)의 비(妃)로 들이면서 문하시중에 공신까지 겸하여 막강한 외척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자연의 손자 이자겸도 자신의 큰 딸을 예종(睿宗)의 비로 들이고 척신(戚臣)이 되었는데, 예종이 죽고 외손자인 인종이 즉위하자 셋째와 넷째 딸을 또 인종의 비로 바쳤다. 당시 인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므로 실제적 권력은 이자겸이 쥐게 되었다. 이자겸은 무장 척준경(拓俊京)을 부하로 거느리고 병권까지 장악하고 있으면서 황제보다 더 큰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이자겸전(李資謙傳)을 보면 그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고 뇌물로 받은 고기가 수만근이나 집에서 썩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귀족사회가 부패하면서 이에 실망한 민중사회에서는 왕씨(王氏)가 망하고 십팔자(十八子), 즉 이씨성(李氏姓)을 가진 사람이 새 임금이 되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 나라가 크게 부강한다는 참설(讖說)이 널리 유행했다. 이는 고려가 수덕(水德)을 가진 왕조인데, 이제 5행상생(行相生)의 순서에 따라 수덕의 시대가 끝나고, 다음에는 목덕(木德)의 시대가 오므로 '십팔자(十八子)=목자(木子)=이씨(李氏)'가 새로운 사회를 연다는 예언신앙이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성(姓)이 이씨요, 출신기반도 한양에 가까운 인천이므로 이러한 민중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왕권을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자겸의 야심을 알아차린 인종은 김찬(金粲), 안보린(安甫鱗) 등과 더불어 이자겸을 제거하려다가 척준경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이자겸의 집에 연금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이자겸은 1126년에 황제를 독살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척준경이 잘못을 뉘우치고 황제를 도와 김향(金珦), 이공수(李公壽), 정지상(鄭知常) 등과 더불어 이자겸 일파를 타도하고 그를 영광으로 귀양보냈다. 이때가 1127년으로 80여년에 걸친 인주 이씨의 권세가 무너진 것이다.
● 묘청(妙淸)의 반란
이자겸의 정변을 평정하도록 한 인종은 문벌귀족의 횡포를 막고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합리적 관료정치와 민생안정을 위해 127년에 15조의 유신령(維新令)을 내려 정치개혁에 착수했다. 인종의 개혁은 개경에 뿌리를 둔 문신관료(文臣官僚)들의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 서경파(西京派) 문신과 평양(平壤) 출신의 승려 묘청(妙淸) 등은 인종의 유신정책에 만족하지 않고 서경천도(西京遷都)와 정금북벌(征金北伐)을 주장하고 나섰다.
서경파의 주장은 고려 건국 이래 국시(國是)처럼 내려온 북진정책(北進政策)을 다시 강화하자는 것인데, 여기에 개경(開京)의 지덕(地德)이 쇠하고 서경(西京)의 지덕이 왕성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36개국이 조공을 바치게 된다는 풍수지리설을 이용했다. 인종은 그 주장에 한때 동조하여 서경에 대화궁(大花宮)이라는 궁궐과 팔성당(八聖堂)이라는 토착신을 숭배하는 신당(神堂)을 건설하기도 했다.
서경파의 주장은 금(金)에 칭신(稱臣)하여 사기가 떨어진 국민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으나, 실제로 고려가 금에 무력(武力)으로 도발할 만한 힘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서경파 문신(文臣)들이 권력을 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경파의 주장에 가장 불안을 느낀 것은 오래도록 개경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김부식(金富軾)을 대표로 하는 개경파(開京派) 유신(儒臣)들이었다. 이들은 서경파의 주장을 비현실적인 이상론으로 비판하고 나서 천도를 막았다.
이에 실망한 묘청 등은 무력(武力)으로 뜻을 관철하기 위해 35년에 서경에서 조광(趙匡) 등과 더불어 거병(擧兵)하여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자신의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명명했다. 묘청 일파의 반란은 서북지방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그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인종은 김부식으로 하여금 관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는데, 관군은 1년 동안의 공방전 끝에 서경을 함락시키고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인종이 1145년에 김부식 등에게 명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을 편찬하게 한 것은 바로 묘청 일파의 국수주의와 모함주의를 경계하고, 합리적인 관료정치를 안정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 역사상 1천년내 제1대 사건'이라는 표현으로 묘청의 반란이 실패한 것과 김부식 일파의 승리를 아주 못마땅하게 평가하고, 이는 우리 나라 1천년 내 사건 중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서 민족주의가 실패하고 사대주의가 승리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민족자주정신이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단재의 평가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으로 김부식 일파가 결코 사대주의 세력은 아니었다. 삼국사기는 국가의 자치자강(自治自强)을 토대로 이웃 나라와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고 안으로 유교적 도덕정치를 추구하려는 이념을 담은 것이었다.
● 경인무신정변(庚寅武臣政變)과 내부 혼란
묘청(妙淸)의 반란이 일어난 지 35년이 지난 70년에 고려 사회는 다시금 반란의 회오리에 빠져들었다. 무신(武臣)들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귀족세력의 반란에서 시작하여 지방세력의 반란을 거쳐 급기야 무신들의 반란까지 이어진 셈인데, 이 모든 반란은 고려 중기의 문신문벌사회(文臣門閥社會)가 가져온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려(高麗)는 무신(武臣)들이 주체가 되어 후삼국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무신 때문에 건국 초기의 왕권이 불안했던 것을 고려하여 광종(光宗) 이후로 문치(文治)로 나아가면서 최고의 군사지휘권도 문신(文臣)이 장악했다. 그리하여 요여전쟁(遼麗戰爭) 때에도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등 문신들이 고려의 군사력을 총지휘하여 요(遼)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던 윤관(尹瓘)이나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金富軾)도 모두가 문신(文臣)으로서 전공(戰功)을 세웠고, 이런 상황에서 무신(武臣)의 지위는 점차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무신을 등용하는 무과(武科)가 없었던 것도 무신의 질을 떨어뜨리는데 한 요인이 되었다. 무신들은 2품 이상은 승진이 불가능했고 전시과(田柴科)에 규정된 군인전(軍人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신의 위상을 더욱 낮게 만든 것은 고려 중기의 장기간의 평화였다. 1019년에 요여전쟁(遼麗戰爭)이 끝나고 나서 의종(毅宗)의 재위기에 이르기까지 10명의 제왕이 바뀌고 1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려는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대외긴장이 있었다면 1107년에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9성을 쌓은 것과 1126년에 금나라의 압력을 받고 군신관계를 맺은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무신의 지위가 가장 하락한 것은 태평호문(太平好文)의 군주 의종(毅宗)의 치세였다. 인종 다음의 의종은 개경과 그 인근에 많은 별궁과 누정, 사찰 등을 조성하고 거의 매일 신하들과 격구를 즐기고 문신들과 술놀이판을 벌이면서 국가재정을 낭비하고 있었는데, 무신들은 비록 상장군(上將軍)이나 대장군(大將軍) 같은 최고급 장수들도 황제와 문신들의 놀이판에 경비나 서는 호위병으로 전락했다.
무신의 불만이 갈수록 커가는 중에 무신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인종(仁宗) 때에 황제의 호위를 맡고 있던 견룡대정(牽龍隊正) 정중부(鄭仲夫)는 김부식의 아들로서 내시를 맡고 있던 김돈중(金敦中)으로부터 촛불로 수염을 불태우는 모욕을 당했다. 그 후 의종(毅宗) 재위 24년(서기 1170년)에 황제는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여 밤새도록 문신들과 시주(詩酒)를 즐기면서 호종한 무신들에게는 음식을 주지 않아 분노를 샀다. 이에 견룡행수(牽龍行首)를 맡고 있던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 등은 당시 상장군이던 정중부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거사(擧事)를 모의했다.
다음날 황제는 또 보현원(普賢院)이라는 절에 가서 술놀이를 벌이던 중, 흥을 돋우기 위해 무신들을 불러내어 수박희(手博戱)라는 경기를 벌이게 했는데, 수박희에서 진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문신 한뢰(韓賴)로부터 뺨을 얻어맞고 댓돌 밑에 떨어지는 모욕을 당했다. 이 사건을 목격한 무신들은 드디어 칼을 뽑아 "무릇 문관(文冠)을 쓴 자는 모조리 죽인다."고 선동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많은 문신을 학살하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보낸 다음 명종(明宗)을 옹립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무신정권은 원종(元宗) 재위 11년(서기 1270년)에 이르기까지 100년간 계속되었다.
초기 무신정권의 실권은 이의방과 이고가 장악했으나 두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겨 이의방은 명종(明宗) 재위 원년(서기 1171년)에 장군 채원(蔡元)과 손잡고 이고를 제거했다. 이의방은 불과 3개월 후 채원마저 제거했는데 무장 내부의 분란에 정중부는 시종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중립을 지켰고, 결국 이의방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경인정변(庚寅政變) 당시만 해도 하급 무신에 지나지 않았던 이의방이 정권을 장악한 것을 엄격한 신분사회의 유풍에 젖어있던 문신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신들은 의종(毅宗)의 복위를 끌여들여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려고 시도했다. 동북면병마사였던 김보당(金甫當)이 한언국(韓彦國) 등과 공모해 의종의 복위와 이의방, 정중부 제거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나 3개월만에 진압되고 이들이 추대했던 의종마저 경주로 내려간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김보당의 반란이 진압된 것으로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와 이의방이 의종을 살해하고 장사 지내지 않은 것을 성토하면서 다시 봉기에 나섰다. 조위총이 "개경의 중방이 북계(北界)의 여러 성을 거칠고 강하다는 이유로 토멸하려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자 절령(浙嶺) 이북의 40여성이 삽시간에 호응해 고려군은 순식간에 개경군과 서경군으로 양분되고 말았다.
무신정권은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토벌군을 보냈으나 절령역에서 대패하고 개경까지 공격받는 상황이 되었다. 무신정권으로서 다행인 것은 서경군의 내부에도 갈등이 생겨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수세에 몰린 조위총은 절령 이북의 40여성을 금나라에 바치겠다며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1176년 6월 거병 약 20여개월만에 개경군에게 체포됭 사형당하고 말았다.
조위총의 반란은 무신정권의 지배구조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174년 12월 이의방이 전력을 정비해 조위총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鄭筠)이 종군승(從軍僧)들과 공모해 그를 살해한 것이다.
이의방이 제거됨으로써 정중부가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이는 무신정권의 온건파가 강경파를 제거하고 주도권을 장악했음을 뜻하기 때문에 하급 무장들과 일반 병사들이 정중부의 집권에 크게 반발한 것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다. 일반 군인들이 정중부 정권의 타도를 주장하는 익명의 방을 붙이거나 정중부 집권기간 내내 옥사가 연이었다는 사실은 무신들이 정중부의 집권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음을 말해준다.
이런 와중에 정중부는 당시 26세에 불과했던 청년 장군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제거되고 말았다. 경대승이 수십명의 견룡군(牽龍軍) 장교와 병사들, 그리고 30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정중부를 습격해 제거한 것이다. 이로써 경대승 정권이 성립되는데, 그는 무신 집권자 중 유일하게 고려사(高麗史) 반역열전(叛逆列傳)이 아닌 일반 열전에 실려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였다. 경대승 자신이 무신이면서도 무신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점이 그를 반역열전이 아닌 일반 열전에 실리게 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명종(明宗) 13년 7월조는 "경대승은 항상 무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에 분개하여 복고(復古)의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文官)들이 기대어 중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가 '복고', 즉 무신정권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정중부 등을 제거한 것을 조사(朝士)들이 하례하자 경대승은 "임금을 시해한 자가 살아있는데 어찌 하례하는가?"라고 대꾸했는데, 이는 김보당의 반란 때 경주로 내려가 의종을 살해한 이의민 제거를 표명한 것이었다. 이의민을 죽이겠다는 경대승의 공언은 경대승 정권의 모순된 성향을 잘 말해준다. 쿠데타로 의종을 폐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무신(武臣)들로서는 반대파들이 의종 복위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만약 이들의 봉기가 성공해 의종이 복위한다면 그를 폐출시켰던 무신들이 모두 도륙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무신들에게 의종은 이미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엣 경대승은 여러모로 무신정권의 집권자로서는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집권 내내 경대승이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였던 것은, 무신정권의 이런 성격과 다른 노선을 추구한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가 도방(都房)을 조직한 이유도 자신의 집권에 불만을 가진 무신들의 공격에 대처하려는 것이었다. 고려사(高麗史) 경대승전(慶大升傳)은 그가 도방 소속의 무사들에게 "긴 배게와 큰 이불을 만들어 날을 번갈아 숙직케 했는데, 혹은 (경대승도) 스스로 함께 이불을 덮음으로써 성의를 표시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정도로 그가 의지한 것은 무신정권이 아니라 사병집단은 도방의 무사들이었다. "심리적으로 불안해 항상 몇 사람씩 거리로 보내어 잠복시켰다가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들으면 즉시 잡아 가두어 국문했다."는 고려사의 또 다른 기록은 그 자신이 무신으로서 무신과 적대했던 경대승 정권의 모순에 찬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 이유가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꾸고 난 후라는 사실도 무신정권에 적대했던 그의 모순된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경대승(慶大升)의 뒤를 이은 인물은 의종(毅宗)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경대승이 제거를 공언한 이의민(李義旼)이었다. 경주 출신이었던 이의민의 아버지는 소금과 체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어머니는 옥령사(玉靈寺)의 노비였다. 천인(賤人)이었던 이의민이 최고 집권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무력(武力)이 전부라는 무신정권의 성격을 드러냄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무신 집권기가 얼마나 역동적인 시기였는지를 보여준다.
앞서 이의민은 경주에서 형들과 함께 무뢰배 생활을 했었다. 그러던 중 투옥되어 두 형은 고문 끝에 죽고 말았으나, 그는 끝내 살아남았다. 그의 신체가 이처럼 건장한 것을 높이 산 안찰사(按察使) 김자양(金子陽)이 그를 경군(京軍)에 선발함으로써 인생반전의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경군에 선발되어 서울에 온 첫날 밤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부터 궁궐까지 늘어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는 꿈을 꾼 이의민이 경군에서 출세길을 잡게 된 것은 뛰어난 수박(手搏)솜씨 때문이었다. 나중에 무신들이 의종에게 불만을 품게 되는 그 수박희(手博戱) 때문에 의종의 총애를 받아 대정을 거쳐 별장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경인정변(庚寅政變) 때 '죽인 자가 많아' 주목받고 승진했던 이의민이 내외에 두각을 나타낸 결정적 계기는 명종(明宗) 재위 3년에 발생한 김보당의 반란이었다. 김보당이 의종을 추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의민은 경주에 내려가 손가락으로 의종의 등뼈를 꺾어 죽이고 시체를 연못 속에 던져 버리는 과단성을 보였다. 의종의 죽음은 그의 복립을 내세운 김보당 세력의 기를 꺾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이의민은 이 공로로 대장군까지 올랐다. 이듬해에는 조위총의 반란군을 토벌한 공으로 최고직인 상장군까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정중부를 제거하고 집권한 경대승이 제거를 공언하자, 맞서 싸우는 대신 명종 재위 11년에 병을 칭탁(稱託)하고 고향 경주로 낙향해 시세를 관망했다.
경대승이 죽은 후 황도(皇都)로 올라와 집권에 성공한 그는 경인정변에 적극 참여한 무신들을 중심으로 정권을 개편했다. 무신정권의 집권자로서 무신들과 반대의 길을 걸었던 경대승과 달리, 이의민은 무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의민은 철저하게 무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의민 정권에서 문신 집권기에서라면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여러가지 일들이 발생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간 문신귀족(文臣貴族)의 자제나 유사(儒士)들만이 임명되던 내시원(內侍院)에 무신들을 임명한 것이나 '글을 알지 못했다.'는 최세보(崔世輔)를 학식이 뛰어난 문신들이나 보임되던 동수국사(同修國史)에 임명한 것 등이 이런 예다. 천민 출신 이의민이 천인들을 위한 정치를 펴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기존 관습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의 행보는 농민, 천민들의 각성에 큰 역할을 했다.
이의민 집권기에 운문의 김사미(金沙彌)가 봉기하고 초전의 효심(孝心)이 봉기하는 등 농민, 천민의 반란이 거듭된 것도, 천인 출신이 최고 집권자가 되고 문신(文臣) 우대라는 기존 관습을 무너뜨린데 영향받은 것이다. 과거 하늘이 정해준 법칙이라고 여겼던 신분제가 무력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본 농민, 천민들이 더 이상 차별을 운명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명종 재위 14년부터 26년까지 12년 동안 지속되던 이의민 정권이 무너진 계기는 의외로 사소했다. 바로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李至榮)과 최충헌(崔忠獻)의 동생 최충수(崔忠粹) 사이 집비둘기를 둘러싼 갈등 때문이었다. 이지영은 미녀를 보면 반드시 겁탈하는 등 횡포를 일삼아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렸는데, 그가 최충수의 집비둘기를 강탈한 것이 몰락의 계기였다.
신중한 성격의 최충헌은 이의민 제거에 소국적이었으나 동생 충수의 각오가 확고한 것을 보고 제거에 동의했다. 최충헌은 동생 최충수, 외조카 박진재(朴晋材)와 모의해 1196년 4월 이의민과 이지영을 기습, 제거한다. 최충헌은 직접 칼을 치켜들고 이의민의 목을 베어 저자에 효수(梟首)하는 것으로 새로운 집권자의 탄생을 알렸다. 향후 60여년간 계속될 최씨 무신정권은 이렇게 수립되었다.
● 최씨 무신정권의 지배구조
최충헌(崔忠獻)은 그 아버지가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였고, 외조부 유정선(柳挺先) 역시 상장군을 지낸 바 있는 전형적인 무반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최충헌이 음서(蔭敍)로 제수받은 벼슬은 무반직이 아니라 문반직은 '도필리(刀筆吏)'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경인정변(庚寅政變)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무반(武班)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조위총(趙位寵)의 반란 때에 부원수 기탁성(奇卓誠)에게 별장으로 발탁된 이후였다. 그러나 그는 1187년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 안찰사로 파견되었다가 권신의 뜻에 거슬려 파면되기도 하는 등 무신 집권기에도 순탄한 길을 걷지는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이의민 제거 직전 그의 벼슬은 무신 명문가 출신답지 않게 섭장군(攝將軍)이라는 한직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문, 무반을 두루 경험한 이력이나 파직의 경험 등은 그를 과거의 무신 집권자들과는 다르게 만들었다.
집권 직후 10조목에 달하는 폐정개혁안 '봉사(封事) 10조'를 황제에게 올려 이의민 정권의 실정을 지적하고 개혁을 역설한 것에 최충헌의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무신정권이 무력(武力)에 기반을 두어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과거 내부 파쟁을 일삼았던 이전의 무신 집권자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내외에 주지시키기 위해 명종(明宗)을 폐위시키고 그 동복동생 평량후(平凉侯) 민(旼)을 즉위시키기로 결심했다. 최충헌은 군사를 동원해 두경승(杜景升)을 비롯한 명종조의 대신 12명과 명종의 서자들을 모두 유배보내고, 대궐로 사람을 보내 명종에게 홀로 말을 타고 향성문을 나서라고 강요했다. 명종이 할 수 없이 향성문을 나서자 전격적으로 체포해 창락궁에 유폐시키고 태자와 태자비를 강화도로 압송한 후 명종의 동복동생 평량후를 추대했으니, 그가 고려 제20대 황제인 신종(神宗)이었다. 최충헌 집권 이듬해인 1197년 9월의 일이었는데, 무신정권이 이의방(李義方)-정중부(鄭仲夫)-경대승(慶大升)-이의민(李義旼)-최충헌(崔忠獻)으로 여러번 집권자가 바뀌는 동안 황제까지 갈아치운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로써 그는 명실상부하게 황제의 상위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스로 한계를 그어 자신의 가문이 비난의 표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 했다. 동생 최충수가 이미 결혼한 태자비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하자 "지금 우리 형제에게 일국의 세력이 집중되고 있으나 우리는 한미한 가문인데 만약 딸을 태자비로 세운다면 세상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부부 사이의 정은 뿌리 깊은 법인데, 결혼한 지 오래 되어 태자와 정이 깊은 태자비를 쫓아내는 일이 인정상 가능한 일이겠는가?"라고 반대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형의 반대에 직면해 태자비 입궁을 포기했던 최충수가 다시 마음을 바꾸어 입궁을 추진하자 최충헌은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하고 제거를 결정했다. 최충헌은 박진재(朴晋材)와 함께 동생 최충수를 제거했다.
그가 동생까지 제거한 것은 자신의 가문이 공적(公敵)이 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권력의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동생까지 제거하는 냉혹한 단면을 보여 자신에 대한 도전 의욕을 꺾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최충헌이 이전의 무신 집권자들과는 달리 최씨 정권을 세습 권력기구화할 수 있었던 것도 절대권력을 추구하되 사회 전체를 공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자기절제 때문이었다.
●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무인들은 과거의 문신들과는 다른 지배기구를 만들어야 했다. 과거의 지배기구들은 문신 집권을 위해서 만들어진 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집권한 정중부와 이의민 등은 새로운 통치기구를 만들지 않고 기존의 중방(重房)을 통치기구로 전환해 사용했다. 중방은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 '목종(穆宗) 5년(1002년)에 6위(衛)의 직원을 갖추었는데, 뒤에 응양군(應楊軍), 용호군(龍虎軍)의 2군을 두어 6위의 상위 기관으로 삼았으며, 뒤에 또 중방을 두어 2군 6위의 상, 대장군으로 하여금 모두 모이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2군 6위의 상장군, 대장군의 합좌기구였다. 같은 기록에 '의종(毅宗) 이후로 무신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자 중방의 권한이 더욱 커졌다."고 한 데서 알수 있는 것처럼, 경인정변(庚寅政變)으로 집권한 이의방, 정중부 등은 중방을 최고 권력기구화하여 통치했다.
고려사(高麗史) 정중부전(鄭仲夫傳)에 "의종 24년(1146년) 9월 여러 무신이 중방에 모여 남은 문신들을 모두 불러 이고(李高)가 죽이려는 것을 정중부가 중지시켰다."는 기록대로, 중방은 경인정변 이후 문신들에 대한 사형을 결정하거나 취소할 수도 있는 최고 권력기구였다. '명종(明宗) 3년 4월 이의방이 기녀를 데리고 중방에 들어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마음껏 마시고 떠들고 웃으며 북치는 소리가 대궐 안까지 들렸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중방이 왕권을 능가하는 초월적 지위헤 있었음을 보여준다. 경인정변 이전 군사 합좌기관이었던 중방은 경인정변 이후 고유의 군사적 기능은 물론 인사, 법률 제정, 경찰, 형옥, 탄핵 등 보든 부분을 관장하는 초법적 기관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경대승은 기존의 중방 외에 도방(都房)을 설치했다. 경대승이 도방을 따로 설치한 이유는 반무신적(反武臣的) 노선을 택해 무신들의 공적(公敵)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중요한 임무는 경대승의 신변 보호였다. 고려사(高麗史) 경대승전(慶大升傳)의 '이 때에 경성(京城)에서 도둑이 많이 일어났는데, 스스로 경대승의 도방이라 칭했다. 관리가 체포하여 가두면 경대승이 이를 즉시 석방했다.'라는 기록에는 도방에 대한 경대승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경대승이 설치한 도방은 명종 재위 13년 경대승이 죽은 후 폐지되었으나 최충헌이 신종 재위 3년(서기 1200년)에 이를 다시 부활시켰다. 최충헌이 도방을 부활시킨 이유도 경대승처럼 신변 보호를 위해서였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집권한 경대승이 무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한 것처럼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한 최충헌도 자신이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대소 문무관리, 한량, 군졸 가운데 강한 자를 모두 불러 6번(番)으로 나누어 날을 바꾸어 그 집(최충헌의 집)을 밤에 지키도록 하고 도방(都房)이라 불렀다.'는 고려사(高麗史) 신종(神宗) 3년 12월의 기록이 최충헌 역시 자신의 경호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말해준다. 최충헌의 도방도 경대승의 도방처럼 신변 보호를 위해 설치된 조직이었지만 이에 소속된 인물만은 경대승 때의 그것과 달랐다. 즉 최충헌 정권의 도방을 구성한 인물들은 경대승 정권 때처럼 무뢰배들이 아니라, 장군 또는 대장군의 직임까지 갖고 있는 공직자들이었다.
도방 외에도 최충헌은 무신정권의 최고 기관으로서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고 스스로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올랐다. 최충헌이 당초 교정도감을 설치한 이유는 정적 숙청을 위해서였다. 1198년에 만적(萬積)의 반란이 일어난 것을 비롯해 희종(熙宗) 즉위년인 1204년에는 장군 이광실(李光實) 등 30여명이 최충헌 제거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었으며, 희종 재위 5년에는 청교역리(靑郊驛吏) 3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려고 승도들을 규합하다가 발각되는 등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최충헌(崔忠獻)은 영은관(迎恩館)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고 이들의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을 진압한 후에도 폐지하지 않고 계속 존치시키면서 이 기구를 통해 군국의 서정을 실시했다. 이후 교정별감은 무신정권의 상징처럼 되어 최충헌 사후 최우(崔瑀), 최항(崔沆), 최이(崔怡)로 이어지다가, 최씨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김준(金俊),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가 지위를 계승해 권력을 행사했다. 교정별감의 지위에 오르는 인물이 무신정권의 집권자임을 내외가 인정한 것이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崔瑀)는 교정도감 외에 정방(政房)도 설치했다. 뒤에 이(怡)로 개명하는 최우가 자신의 사저에 설치한 정방은 인사행정기관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전(崔忠獻傳)에 부기된 최이전(崔怡傳)에는 고종(高宗) 재위 12년 백관이 최우의 사저에 가서 정안(政案)을 올리면 그는 마루에 앉아 이것을 받았는데, 이 때 6품 이하 관리들은 마루 아래에서 재배하고 땅에 엎드려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다고 적혀 있다. 정방 설치 이후 임금은 정방에서 올린 인사안에 사후 결재만 할 뿐 모든 인사권은 정방에 있었던 것이다. 정방은 비록 최우의 사저에 설치한 사적 기관이었으나 정색승선(政色承宣), 정색상서(政色尙書), 정색소경(政色少卿) 등 정식 관원에 준하는 인원이 있고, 직접 정안에 따라 전주(銓注)를 관장하고 국왕의 결재를 받는 사실상의 공적 기구였다.
최우가 설치한 또 하나의 권력기구는 서방(書房)이었다. 고종 재위 14년(서기 1227년)에 설치된 서방은 고려사(高麗史) 최이전(崔怡傳)의 '최우의 문객 가운데 당대의 명유(名儒)가 많아 이들을 3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서방에 숙위하게 했다.'는 기록처럼 문인 숙위기관이었다. 이는 최씨 정권이 안정되면서 문인들을 등용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서방을 통해 문인들을 등용해야 할 정도로 문인들의 반발을 무마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기도 하다.
● 최씨 무신정권의 붕괴
1196년 4월,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최충헌은 1219년에 사망할 때까지 23년간 집권했다. 그러나 최충헌 사후 그의 아들 최이가 뒤를 이어 집권함으로써 최씨 무신정권은 세습권력화했다. 1249년에 최이가 사망하자 그의 서자 최항(崔沆)이 뒤를 이었고 1257년 최항이 병사하자 그의 노비 소생의 서자 최의(崔誼)가 뒤를 이었다. 최씨 무신정권은 1258년 3월 최의가 유경(柳璥), 김준(金俊) 등에 의해 제거될 때까지 4대 60여년간 계속된다.
최씨 무신정권 기간 최씨 집권자들은 황제 폐출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사실상 황제 위에 군림했다. 최충헌에 의해 제위에 오른 신종(神宗)의 초명은 민(旼)이었는데 즉위 전날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름을 천탁으로 바꾸라는 말하는 꿈을 꾸었다는 일화가 있다. 즉위 후 이름이 금황(金皇)의 그것과 같다는 이유로 이를 기휘(忌諱)해 신하들에게 적당한 이름을 지어 올리게 했더니 '탁(晫)'자를 지어 올렸다 하여 이 꿈이 천명을 뜻한다고 말해지지만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사실상의 임금은 최충헌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신종(神宗) 세가(世家)의 사신(史臣)의 찬에 '신종은 최충헌이 세운 바로서 생살(生殺) 폐치(廢置)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군왕(君王)은 다만 허기(虛器)를 붙들고 신민(臣民)의 위에 서 있어 나무인형[木偶人]과 같았을 뿐이니 애석하다."라는 부기는 이런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재위 6년만에 병에 걸린 신종은 1204년 맏아들 희종(熙宗)에게 양위했다. 그런데 희종 때에는 최충헌을 암살하려는 기도가 끊이지 않았고 때로는 희종 자신도 여기에 가담했다. 장군 이광실 등 30여명이 최충헌 암살을 기도했던 때가 희종 즉위년이었고, 청교역리(靑郊驛吏) 3명이 최충헌 부자를 암살하려다 귀법사 승려의 고발로 실패한 때도 희종 재위 5년(서기 1209년)이었다.
희종은 재위 7년(1211년) 내시낭중 왕준명(王濬明) 등 측근 내관들, 참정 우승경(于承慶), 장군 왕익(王翼) 등과 함께 최충헌 제거를 모의했다. 희종의 부름을 받고 최충헌이 궁중에 들어오자 미리 잠복하고 있던 10여명의 승려와 무사들이 최충헌을 습격했다. 이 자리에서 최충헌의 수하 몇명이 칼날에 베여 쓰러졌는데, 희종은 살려 달라는 최충헌의 호소에 내실의 문을 닫는 것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승려와 무사들이 지주사 다락에 몸을 숨긴 최충헌을 발견하지 못함으로써 최충헌 제거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건 직후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맏아들 강종(康宗)을 즉위시켰다. 이때 강종의 나이 60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2년 남짓한 재위기간 끝에 맏아들 고종(高宗)에게 제위를 물려주는데, 고려사 강종(康宗) 세가(世家)에 사관이 '강종이 임금으로 있을 때 일체의 정사(政事)는 강신(强臣)들의 통제를 받았다.'라고 부기한 데서 알 수 있듯 강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최충헌의 권력 세습이 확실해지자 최충헌의 두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발생하기도 했다. 집권 23년째인 1219년 최충헌이 뭄져눕자 둘째 아들 최향이 맏아들 최우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최충헌의 측근이었던 최준문(崔俊文)과 상장군 지윤심(池允深), 장군 유송절(柳松節), 낭장 김덕명(金德明) 등은 최우에게 보복당할 것을 우려해 최우 대신 최향을 세우려고 했다. 이들은 최충헌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명분으로 최우를 유인했다. 그러나 이미 이런 기운을 감지한 최충헌이 최우에게 "병이 장차 낫지 않으면 내부에서 변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너는 다시 오지 말라."고 다짐한 터여서 최우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몇차례의 호명에도 최우가 오지 않자, 비밀이 탄로났다고 생각한 김덕명이 밀고했다. 최우는 최향과 최준문, 지윤심, 유송절 들을 모두 체포해 유배보내고 1219년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에 올라 권력을 이어받았다.
권좌에 오른 최우는 최충헌이 불법으로 빼앗은 전답과 노비들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최충헌이 갖고 있던 많은 금은 진완(珍玩)들을 황제에게 바쳤으며, 부패한 관리를 내쫓고 한사(寒士)를 많이 등용해 인심을 얻으려 애썼다. 그가 서방(書房)을 두어 명유(名儒)들을 숙위시킨 것은 인심 획득이 일환이기도 했다.
최우는 그러나 집권기에 몽고족(蒙古族)의 침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된다. 최우는 고종(高宗) 재위 19년(서기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는데 본토는 몽고군에 의해 여러차례 유린되지만 그는 1249년 사망할 때까지 강화도를 거점으로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최우에게는 적자가 없는 대신 천첩 소생의 서자 만전(萬全)과 만종(萬宗)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최우는 이들 서자 대신 사위 김약선(金若先)에게 정권을 승계하려 했다. 최우가 이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만전과 만종을 송광사(松廣寺)에 출가시키자 김약선의 권력승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고종 재위 22년 딸을 태자비로 들여 권력을 공고히 하려던 김약선의 조치가 오히려 최우로 하여금 그를 견제하도록 만들었다. 때마침 종과 사통한 김약선의 처가 이 사실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해 '다른 일'로 남편을 고하자 최우는 김약선을 제거한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다른 일'이란 아마도 '김약선이 모반하려 한다.'는 무고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약선에 제거된 후 후계자가 된 인물은 기왕에 출가한 만전 최항이었다. 최항의 권력 이양은 그러나 순탄하지 못했다. 상장군 주숙(周肅)이 야별초(夜別抄)와 내외 도방(都房)을 이끌고 고종의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씨(崔氏)가의 가노(家奴) 출신인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준(金俊) 등 70여명의 장수가 최항을 지지하는 바람에 주숙도 결국 최항의 권력 승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항도 최우처럼 적자가 없었다. 다만 승려 시절 장군 송서(宋壻)의 여종에게서 얻은 최의(崔誼)가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최의에게 권력을 승계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무신 집권기라지만 천계(賤系)에서 천계로 권력이 승계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최항은 최의에게 권력을 넘기기 위해 측근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전(崔忠獻傳)에 부기된 최의(崔誼) 조에서 관련 기술을 보자
'일찍이 최항은 최의를 선인열(宣仁烈)과 유능(柳能)에게 부탁해 "만약 최의를 도와서 그가 가업을 계승하게 되면, 이는 오직 너희들의 공로이다."라고 말했다. 최항은 병이 들자 선인열과 유능 등의 손을 잡고 "그대들이 이 자식을 보호해 주니, 나는 죽어도 한이 없다."고도 했다. 최항이 죽자 전전(殿前) 최양백(崔良伯)은 이를 숨겨 발상(發喪)하지 않고, 칼을 어루만지면서 사비(寺婢)를 꾸짖어 울지 못하게 하는 한편, 선인열과 함께 최항의 유언을 문객 대장군 최영(崔瑛)과 채정(蔡禎), 유능에게 전하게 했다. 이들은 야벌초(夜別抄), 신의군(神義軍), 서방(書房) 3번, 도방(都房) 36번을 모아 최의를 옹위하고 발상하니, 군왕이 최의에게 차장군(借將軍)을 제배하고 또 명하여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삼았다.'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전(崔忠獻傳) 부(附) 최의(崔誼) 조
집권 8년만인 1257년에 병사한 최항의 뒤를 최의가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무력시위 과정을 거쳐서였다. 그런데 문객 장군들이 삼별초를 동원한 무력시위 끝에 집권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최씨 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몽고의 침략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안주한 결과였다.
이를 의식한 최의는 집권 후 창고의 곡식을 풀어 기아에 빠진 백성들을 진휼하고 각 부와 영의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선정의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최씨 무신정권은 점점 약해져 갔다. 더구나 정치력이 부족한 최의가 자신의 집권을 도와준 문객들을 소외시킴으로써 스스로의 기반조차 약화시켰다. 최씨가의 가노였던 김준(金俊)이 최의에게 도전했다는 사실은 사병(私兵)을 중시했던 비정상적 인사운용의 폐단이 그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준은 최항의 장인이었던 추밀원사 최온(崔瑥)과 상장군 박성재(朴成梓)를 끌어들여 집권 11개월에 불과한 최의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이때가 고종 재위 45년(서기 1258년) 3월, 이로써 최씨 무신정권은 4대 60여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교정별감으로 권력을 장악한 김준은 10여년 후인 원종(元宗) 재위 9년(서기 1268년) 왕정복고를 노리는 원종과 결탁한 임연(林衍)에 의해 제거되었다. 임연은 평소 김준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따랐으나 군부(君父)까지 허수아비로 삼았던 무신정권에서 제일의 가치는 다름아닌 권력이었던 것이다. 원종은 이듬해 원종을 폐위시키고 왕제(王弟)인 안경공(安慶公)을 즉위시켰으나, 원종을 지지하는 원나라의 압력으로 그를 다시 복위시킬 수밖에 없었다.
원종 재위 11년(서기 1270년) 3월, 임연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뒤를 이었다. 그는 원나라에 항복하고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주장하는 원종에 맞서 항몽투쟁(抗蒙鬪爭)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국왕이 보낸 어사중승 홍규(洪奎)와 직문하성(直門下省) 송송례(宋松禮) 등에 의해 집권 두달만에 제거되었다. 임유무 살해는 또 다른 무신 집권으로 이어지지 않고 왕정복고(王政復古)로 환원되어 무신정권은 집권 100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껏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무신정권의 군사조직이었던 삼별초(三別抄)의 항몽투쟁(抗蒙鬪爭)을 주체성의 견지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는 무신정권 수립에 의해 배제된 문신들의 시각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신정권 수립 후 급격히 확대된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무신정권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무신정권기 고려 사회의 역동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의민, 김준 등 천민 출신이 최고 집권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무신정권기 고려 사회의 역동적인 모습이었으며, 농민, 천민들의 반란 또한 피지배계급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신들이 도방, 서방 등 독자적인 권력기구를 창출해 통치한 것이나, 과거 황실, 문신귀족과 결탁했던 교종 계열 사원의 반란이 잇따르자 무신정권이 선종 계열 조계종(曹溪宗)을 확립시킨 것은 무신들이 사상적으로도 문신들 못지 않은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무신들이 문신들을 제거하고 장악한 권력을 고려 사회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만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는 과거 문신 집권기의 문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신 집권기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천민 출신이 최고 집권자가 되고, 농민과 천민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는 점에서 민중들을 자각시킨 그런 시기이기도 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한국사 강론」24.무신정변과 최씨독재정권의 등장
● 이자겸(李資謙)의 정변
고려(高麗)가 금(金)의 압력을 받고 있던 인종(仁宗) 때부터 고려 정치는 문치(文治)의 극성기를 거치면서 내부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부와 권력이 개경의 소수 문벌귀족에게 독점되면서 관료사회가 분열되고, 민심이 권력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50여년에 걸친 반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반란의 첫 봉화는 이자겸(李資謙)으로 대표되는 문벌귀족층에서 울리고, 다음에는 묘청(妙淸)으로 대표되는 평양 지방의 서경문신세력이 뒤를 이었으며, 그 다음 의종(毅宗) 때에는 무신들이 저항하여 드디어 무신정권(武臣政權)을 세우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인종(仁宗) 때에 개경 최고의 귀족은 인주(仁州) 이씨(李氏) 집안의 이자겸(李資謙)이었다. 인주 이씨는 이한(李翰), 이자연(李子淵) 부자가 연이어 고관에 이르고, 특히 이자연은 세 딸을 모두 문종(文宗)의 비(妃)로 들이면서 문하시중에 공신까지 겸하여 막강한 외척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자연의 손자 이자겸도 자신의 큰 딸을 예종(睿宗)의 비로 들이고 척신(戚臣)이 되었는데, 예종이 죽고 외손자인 인종이 즉위하자 셋째와 넷째 딸을 또 인종의 비로 바쳤다. 당시 인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므로 실제적 권력은 이자겸이 쥐게 되었다. 이자겸은 무장 척준경(拓俊京)을 부하로 거느리고 병권까지 장악하고 있으면서 황제보다 더 큰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이자겸전(李資謙傳)을 보면 그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고 뇌물로 받은 고기가 수만근이나 집에서 썩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귀족사회가 부패하면서 이에 실망한 민중사회에서는 왕씨(王氏)가 망하고 십팔자(十八子), 즉 이씨성(李氏姓)을 가진 사람이 새 임금이 되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 나라가 크게 부강한다는 참설(讖說)이 널리 유행했다. 이는 고려가 수덕(水德)을 가진 왕조인데, 이제 5행상생(行相生)의 순서에 따라 수덕의 시대가 끝나고, 다음에는 목덕(木德)의 시대가 오므로 '십팔자(十八子)=목자(木子)=이씨(李氏)'가 새로운 사회를 연다는 예언신앙이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성(姓)이 이씨요, 출신기반도 한양에 가까운 인천이므로 이러한 민중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왕권을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자겸의 야심을 알아차린 인종은 김찬(金粲), 안보린(安甫鱗) 등과 더불어 이자겸을 제거하려다가 척준경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이자겸의 집에 연금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이자겸은 1126년에 황제를 독살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척준경이 잘못을 뉘우치고 황제를 도와 김향(金珦), 이공수(李公壽), 정지상(鄭知常) 등과 더불어 이자겸 일파를 타도하고 그를 영광으로 귀양보냈다. 이때가 1127년으로 80여년에 걸친 인주 이씨의 권세가 무너진 것이다.
● 묘청(妙淸)의 반란
이자겸의 정변을 평정하도록 한 인종은 문벌귀족의 횡포를 막고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합리적 관료정치와 민생안정을 위해 127년에 15조의 유신령(維新令)을 내려 정치개혁에 착수했다. 인종의 개혁은 개경에 뿌리를 둔 문신관료(文臣官僚)들의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 서경파(西京派) 문신과 평양(平壤) 출신의 승려 묘청(妙淸) 등은 인종의 유신정책에 만족하지 않고 서경천도(西京遷都)와 정금북벌(征金北伐)을 주장하고 나섰다.
서경파의 주장은 고려 건국 이래 국시(國是)처럼 내려온 북진정책(北進政策)을 다시 강화하자는 것인데, 여기에 개경(開京)의 지덕(地德)이 쇠하고 서경(西京)의 지덕이 왕성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36개국이 조공을 바치게 된다는 풍수지리설을 이용했다. 인종은 그 주장에 한때 동조하여 서경에 대화궁(大花宮)이라는 궁궐과 팔성당(八聖堂)이라는 토착신을 숭배하는 신당(神堂)을 건설하기도 했다.
서경파의 주장은 금(金)에 칭신(稱臣)하여 사기가 떨어진 국민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으나, 실제로 고려가 금에 무력(武力)으로 도발할 만한 힘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서경파 문신(文臣)들이 권력을 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경파의 주장에 가장 불안을 느낀 것은 오래도록 개경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김부식(金富軾)을 대표로 하는 개경파(開京派) 유신(儒臣)들이었다. 이들은 서경파의 주장을 비현실적인 이상론으로 비판하고 나서 천도를 막았다.
이에 실망한 묘청 등은 무력(武力)으로 뜻을 관철하기 위해 35년에 서경에서 조광(趙匡) 등과 더불어 거병(擧兵)하여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자신의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명명했다. 묘청 일파의 반란은 서북지방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그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인종은 김부식으로 하여금 관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는데, 관군은 1년 동안의 공방전 끝에 서경을 함락시키고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인종이 1145년에 김부식 등에게 명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을 편찬하게 한 것은 바로 묘청 일파의 국수주의와 모함주의를 경계하고, 합리적인 관료정치를 안정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 역사상 1천년내 제1대 사건'이라는 표현으로 묘청의 반란이 실패한 것과 김부식 일파의 승리를 아주 못마땅하게 평가하고, 이는 우리 나라 1천년 내 사건 중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서 민족주의가 실패하고 사대주의가 승리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민족자주정신이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단재의 평가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으로 김부식 일파가 결코 사대주의 세력은 아니었다. 삼국사기는 국가의 자치자강(自治自强)을 토대로 이웃 나라와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고 안으로 유교적 도덕정치를 추구하려는 이념을 담은 것이었다.
● 경인무신정변(庚寅武臣政變)과 내부 혼란
묘청(妙淸)의 반란이 일어난 지 35년이 지난 70년에 고려 사회는 다시금 반란의 회오리에 빠져들었다. 무신(武臣)들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귀족세력의 반란에서 시작하여 지방세력의 반란을 거쳐 급기야 무신들의 반란까지 이어진 셈인데, 이 모든 반란은 고려 중기의 문신문벌사회(文臣門閥社會)가 가져온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려(高麗)는 무신(武臣)들이 주체가 되어 후삼국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무신 때문에 건국 초기의 왕권이 불안했던 것을 고려하여 광종(光宗) 이후로 문치(文治)로 나아가면서 최고의 군사지휘권도 문신(文臣)이 장악했다. 그리하여 요여전쟁(遼麗戰爭) 때에도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등 문신들이 고려의 군사력을 총지휘하여 요(遼)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던 윤관(尹瓘)이나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金富軾)도 모두가 문신(文臣)으로서 전공(戰功)을 세웠고, 이런 상황에서 무신(武臣)의 지위는 점차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무신을 등용하는 무과(武科)가 없었던 것도 무신의 질을 떨어뜨리는데 한 요인이 되었다. 무신들은 2품 이상은 승진이 불가능했고 전시과(田柴科)에 규정된 군인전(軍人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신의 위상을 더욱 낮게 만든 것은 고려 중기의 장기간의 평화였다. 1019년에 요여전쟁(遼麗戰爭)이 끝나고 나서 의종(毅宗)의 재위기에 이르기까지 10명의 제왕이 바뀌고 1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려는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대외긴장이 있었다면 1107년에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9성을 쌓은 것과 1126년에 금나라의 압력을 받고 군신관계를 맺은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무신의 지위가 가장 하락한 것은 태평호문(太平好文)의 군주 의종(毅宗)의 치세였다. 인종 다음의 의종은 개경과 그 인근에 많은 별궁과 누정, 사찰 등을 조성하고 거의 매일 신하들과 격구를 즐기고 문신들과 술놀이판을 벌이면서 국가재정을 낭비하고 있었는데, 무신들은 비록 상장군(上將軍)이나 대장군(大將軍) 같은 최고급 장수들도 황제와 문신들의 놀이판에 경비나 서는 호위병으로 전락했다.
무신의 불만이 갈수록 커가는 중에 무신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인종(仁宗) 때에 황제의 호위를 맡고 있던 견룡대정(牽龍隊正) 정중부(鄭仲夫)는 김부식의 아들로서 내시를 맡고 있던 김돈중(金敦中)으로부터 촛불로 수염을 불태우는 모욕을 당했다. 그 후 의종(毅宗) 재위 24년(서기 1170년)에 황제는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여 밤새도록 문신들과 시주(詩酒)를 즐기면서 호종한 무신들에게는 음식을 주지 않아 분노를 샀다. 이에 견룡행수(牽龍行首)를 맡고 있던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 등은 당시 상장군이던 정중부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거사(擧事)를 모의했다.
다음날 황제는 또 보현원(普賢院)이라는 절에 가서 술놀이를 벌이던 중, 흥을 돋우기 위해 무신들을 불러내어 수박희(手博戱)라는 경기를 벌이게 했는데, 수박희에서 진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문신 한뢰(韓賴)로부터 뺨을 얻어맞고 댓돌 밑에 떨어지는 모욕을 당했다. 이 사건을 목격한 무신들은 드디어 칼을 뽑아 "무릇 문관(文冠)을 쓴 자는 모조리 죽인다."고 선동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많은 문신을 학살하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보낸 다음 명종(明宗)을 옹립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무신정권은 원종(元宗) 재위 11년(서기 1270년)에 이르기까지 100년간 계속되었다.
초기 무신정권의 실권은 이의방과 이고가 장악했으나 두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겨 이의방은 명종(明宗) 재위 원년(서기 1171년)에 장군 채원(蔡元)과 손잡고 이고를 제거했다. 이의방은 불과 3개월 후 채원마저 제거했는데 무장 내부의 분란에 정중부는 시종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중립을 지켰고, 결국 이의방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경인정변(庚寅政變) 당시만 해도 하급 무신에 지나지 않았던 이의방이 정권을 장악한 것을 엄격한 신분사회의 유풍에 젖어있던 문신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신들은 의종(毅宗)의 복위를 끌여들여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려고 시도했다. 동북면병마사였던 김보당(金甫當)이 한언국(韓彦國) 등과 공모해 의종의 복위와 이의방, 정중부 제거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나 3개월만에 진압되고 이들이 추대했던 의종마저 경주로 내려간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김보당의 반란이 진압된 것으로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와 이의방이 의종을 살해하고 장사 지내지 않은 것을 성토하면서 다시 봉기에 나섰다. 조위총이 "개경의 중방이 북계(北界)의 여러 성을 거칠고 강하다는 이유로 토멸하려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자 절령(浙嶺) 이북의 40여성이 삽시간에 호응해 고려군은 순식간에 개경군과 서경군으로 양분되고 말았다.
무신정권은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토벌군을 보냈으나 절령역에서 대패하고 개경까지 공격받는 상황이 되었다. 무신정권으로서 다행인 것은 서경군의 내부에도 갈등이 생겨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수세에 몰린 조위총은 절령 이북의 40여성을 금나라에 바치겠다며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1176년 6월 거병 약 20여개월만에 개경군에게 체포됭 사형당하고 말았다.
조위총의 반란은 무신정권의 지배구조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174년 12월 이의방이 전력을 정비해 조위총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鄭筠)이 종군승(從軍僧)들과 공모해 그를 살해한 것이다.
이의방이 제거됨으로써 정중부가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이는 무신정권의 온건파가 강경파를 제거하고 주도권을 장악했음을 뜻하기 때문에 하급 무장들과 일반 병사들이 정중부의 집권에 크게 반발한 것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다. 일반 군인들이 정중부 정권의 타도를 주장하는 익명의 방을 붙이거나 정중부 집권기간 내내 옥사가 연이었다는 사실은 무신들이 정중부의 집권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음을 말해준다.
이런 와중에 정중부는 당시 26세에 불과했던 청년 장군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제거되고 말았다. 경대승이 수십명의 견룡군(牽龍軍) 장교와 병사들, 그리고 30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정중부를 습격해 제거한 것이다. 이로써 경대승 정권이 성립되는데, 그는 무신 집권자 중 유일하게 고려사(高麗史) 반역열전(叛逆列傳)이 아닌 일반 열전에 실려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였다. 경대승 자신이 무신이면서도 무신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점이 그를 반역열전이 아닌 일반 열전에 실리게 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명종(明宗) 13년 7월조는 "경대승은 항상 무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에 분개하여 복고(復古)의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文官)들이 기대어 중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가 '복고', 즉 무신정권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정중부 등을 제거한 것을 조사(朝士)들이 하례하자 경대승은 "임금을 시해한 자가 살아있는데 어찌 하례하는가?"라고 대꾸했는데, 이는 김보당의 반란 때 경주로 내려가 의종을 살해한 이의민 제거를 표명한 것이었다. 이의민을 죽이겠다는 경대승의 공언은 경대승 정권의 모순된 성향을 잘 말해준다. 쿠데타로 의종을 폐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무신(武臣)들로서는 반대파들이 의종 복위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만약 이들의 봉기가 성공해 의종이 복위한다면 그를 폐출시켰던 무신들이 모두 도륙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무신들에게 의종은 이미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엣 경대승은 여러모로 무신정권의 집권자로서는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집권 내내 경대승이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였던 것은, 무신정권의 이런 성격과 다른 노선을 추구한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가 도방(都房)을 조직한 이유도 자신의 집권에 불만을 가진 무신들의 공격에 대처하려는 것이었다. 고려사(高麗史) 경대승전(慶大升傳)은 그가 도방 소속의 무사들에게 "긴 배게와 큰 이불을 만들어 날을 번갈아 숙직케 했는데, 혹은 (경대승도) 스스로 함께 이불을 덮음으로써 성의를 표시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정도로 그가 의지한 것은 무신정권이 아니라 사병집단은 도방의 무사들이었다. "심리적으로 불안해 항상 몇 사람씩 거리로 보내어 잠복시켰다가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들으면 즉시 잡아 가두어 국문했다."는 고려사의 또 다른 기록은 그 자신이 무신으로서 무신과 적대했던 경대승 정권의 모순에 찬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 이유가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꾸고 난 후라는 사실도 무신정권에 적대했던 그의 모순된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경대승(慶大升)의 뒤를 이은 인물은 의종(毅宗)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경대승이 제거를 공언한 이의민(李義旼)이었다. 경주 출신이었던 이의민의 아버지는 소금과 체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어머니는 옥령사(玉靈寺)의 노비였다. 천인(賤人)이었던 이의민이 최고 집권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무력(武力)이 전부라는 무신정권의 성격을 드러냄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무신 집권기가 얼마나 역동적인 시기였는지를 보여준다.
앞서 이의민은 경주에서 형들과 함께 무뢰배 생활을 했었다. 그러던 중 투옥되어 두 형은 고문 끝에 죽고 말았으나, 그는 끝내 살아남았다. 그의 신체가 이처럼 건장한 것을 높이 산 안찰사(按察使) 김자양(金子陽)이 그를 경군(京軍)에 선발함으로써 인생반전의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경군에 선발되어 서울에 온 첫날 밤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부터 궁궐까지 늘어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는 꿈을 꾼 이의민이 경군에서 출세길을 잡게 된 것은 뛰어난 수박(手搏)솜씨 때문이었다. 나중에 무신들이 의종에게 불만을 품게 되는 그 수박희(手博戱) 때문에 의종의 총애를 받아 대정을 거쳐 별장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경인정변(庚寅政變) 때 '죽인 자가 많아' 주목받고 승진했던 이의민이 내외에 두각을 나타낸 결정적 계기는 명종(明宗) 재위 3년에 발생한 김보당의 반란이었다. 김보당이 의종을 추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의민은 경주에 내려가 손가락으로 의종의 등뼈를 꺾어 죽이고 시체를 연못 속에 던져 버리는 과단성을 보였다. 의종의 죽음은 그의 복립을 내세운 김보당 세력의 기를 꺾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이의민은 이 공로로 대장군까지 올랐다. 이듬해에는 조위총의 반란군을 토벌한 공으로 최고직인 상장군까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정중부를 제거하고 집권한 경대승이 제거를 공언하자, 맞서 싸우는 대신 명종 재위 11년에 병을 칭탁(稱託)하고 고향 경주로 낙향해 시세를 관망했다.
경대승이 죽은 후 황도(皇都)로 올라와 집권에 성공한 그는 경인정변에 적극 참여한 무신들을 중심으로 정권을 개편했다. 무신정권의 집권자로서 무신들과 반대의 길을 걸었던 경대승과 달리, 이의민은 무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의민은 철저하게 무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의민 정권에서 문신 집권기에서라면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여러가지 일들이 발생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간 문신귀족(文臣貴族)의 자제나 유사(儒士)들만이 임명되던 내시원(內侍院)에 무신들을 임명한 것이나 '글을 알지 못했다.'는 최세보(崔世輔)를 학식이 뛰어난 문신들이나 보임되던 동수국사(同修國史)에 임명한 것 등이 이런 예다. 천민 출신 이의민이 천인들을 위한 정치를 펴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기존 관습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의 행보는 농민, 천민들의 각성에 큰 역할을 했다.
이의민 집권기에 운문의 김사미(金沙彌)가 봉기하고 초전의 효심(孝心)이 봉기하는 등 농민, 천민의 반란이 거듭된 것도, 천인 출신이 최고 집권자가 되고 문신(文臣) 우대라는 기존 관습을 무너뜨린데 영향받은 것이다. 과거 하늘이 정해준 법칙이라고 여겼던 신분제가 무력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본 농민, 천민들이 더 이상 차별을 운명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명종 재위 14년부터 26년까지 12년 동안 지속되던 이의민 정권이 무너진 계기는 의외로 사소했다. 바로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李至榮)과 최충헌(崔忠獻)의 동생 최충수(崔忠粹) 사이 집비둘기를 둘러싼 갈등 때문이었다. 이지영은 미녀를 보면 반드시 겁탈하는 등 횡포를 일삼아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렸는데, 그가 최충수의 집비둘기를 강탈한 것이 몰락의 계기였다.
신중한 성격의 최충헌은 이의민 제거에 소국적이었으나 동생 충수의 각오가 확고한 것을 보고 제거에 동의했다. 최충헌은 동생 최충수, 외조카 박진재(朴晋材)와 모의해 1196년 4월 이의민과 이지영을 기습, 제거한다. 최충헌은 직접 칼을 치켜들고 이의민의 목을 베어 저자에 효수(梟首)하는 것으로 새로운 집권자의 탄생을 알렸다. 향후 60여년간 계속될 최씨 무신정권은 이렇게 수립되었다.
● 최씨 무신정권의 지배구조
최충헌(崔忠獻)은 그 아버지가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였고, 외조부 유정선(柳挺先) 역시 상장군을 지낸 바 있는 전형적인 무반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최충헌이 음서(蔭敍)로 제수받은 벼슬은 무반직이 아니라 문반직은 '도필리(刀筆吏)'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경인정변(庚寅政變)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무반(武班)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조위총(趙位寵)의 반란 때에 부원수 기탁성(奇卓誠)에게 별장으로 발탁된 이후였다. 그러나 그는 1187년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 안찰사로 파견되었다가 권신의 뜻에 거슬려 파면되기도 하는 등 무신 집권기에도 순탄한 길을 걷지는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이의민 제거 직전 그의 벼슬은 무신 명문가 출신답지 않게 섭장군(攝將軍)이라는 한직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문, 무반을 두루 경험한 이력이나 파직의 경험 등은 그를 과거의 무신 집권자들과는 다르게 만들었다.
집권 직후 10조목에 달하는 폐정개혁안 '봉사(封事) 10조'를 황제에게 올려 이의민 정권의 실정을 지적하고 개혁을 역설한 것에 최충헌의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무신정권이 무력(武力)에 기반을 두어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과거 내부 파쟁을 일삼았던 이전의 무신 집권자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내외에 주지시키기 위해 명종(明宗)을 폐위시키고 그 동복동생 평량후(平凉侯) 민(旼)을 즉위시키기로 결심했다. 최충헌은 군사를 동원해 두경승(杜景升)을 비롯한 명종조의 대신 12명과 명종의 서자들을 모두 유배보내고, 대궐로 사람을 보내 명종에게 홀로 말을 타고 향성문을 나서라고 강요했다. 명종이 할 수 없이 향성문을 나서자 전격적으로 체포해 창락궁에 유폐시키고 태자와 태자비를 강화도로 압송한 후 명종의 동복동생 평량후를 추대했으니, 그가 고려 제20대 황제인 신종(神宗)이었다. 최충헌 집권 이듬해인 1197년 9월의 일이었는데, 무신정권이 이의방(李義方)-정중부(鄭仲夫)-경대승(慶大升)-이의민(李義旼)-최충헌(崔忠獻)으로 여러번 집권자가 바뀌는 동안 황제까지 갈아치운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로써 그는 명실상부하게 황제의 상위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스로 한계를 그어 자신의 가문이 비난의 표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 했다. 동생 최충수가 이미 결혼한 태자비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하자 "지금 우리 형제에게 일국의 세력이 집중되고 있으나 우리는 한미한 가문인데 만약 딸을 태자비로 세운다면 세상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부부 사이의 정은 뿌리 깊은 법인데, 결혼한 지 오래 되어 태자와 정이 깊은 태자비를 쫓아내는 일이 인정상 가능한 일이겠는가?"라고 반대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형의 반대에 직면해 태자비 입궁을 포기했던 최충수가 다시 마음을 바꾸어 입궁을 추진하자 최충헌은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하고 제거를 결정했다. 최충헌은 박진재(朴晋材)와 함께 동생 최충수를 제거했다.
그가 동생까지 제거한 것은 자신의 가문이 공적(公敵)이 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권력의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동생까지 제거하는 냉혹한 단면을 보여 자신에 대한 도전 의욕을 꺾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최충헌이 이전의 무신 집권자들과는 달리 최씨 정권을 세습 권력기구화할 수 있었던 것도 절대권력을 추구하되 사회 전체를 공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자기절제 때문이었다.
●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무인들은 과거의 문신들과는 다른 지배기구를 만들어야 했다. 과거의 지배기구들은 문신 집권을 위해서 만들어진 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집권한 정중부와 이의민 등은 새로운 통치기구를 만들지 않고 기존의 중방(重房)을 통치기구로 전환해 사용했다. 중방은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 '목종(穆宗) 5년(1002년)에 6위(衛)의 직원을 갖추었는데, 뒤에 응양군(應楊軍), 용호군(龍虎軍)의 2군을 두어 6위의 상위 기관으로 삼았으며, 뒤에 또 중방을 두어 2군 6위의 상, 대장군으로 하여금 모두 모이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2군 6위의 상장군, 대장군의 합좌기구였다. 같은 기록에 '의종(毅宗) 이후로 무신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자 중방의 권한이 더욱 커졌다."고 한 데서 알수 있는 것처럼, 경인정변(庚寅政變)으로 집권한 이의방, 정중부 등은 중방을 최고 권력기구화하여 통치했다.
고려사(高麗史) 정중부전(鄭仲夫傳)에 "의종 24년(1146년) 9월 여러 무신이 중방에 모여 남은 문신들을 모두 불러 이고(李高)가 죽이려는 것을 정중부가 중지시켰다."는 기록대로, 중방은 경인정변 이후 문신들에 대한 사형을 결정하거나 취소할 수도 있는 최고 권력기구였다. '명종(明宗) 3년 4월 이의방이 기녀를 데리고 중방에 들어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마음껏 마시고 떠들고 웃으며 북치는 소리가 대궐 안까지 들렸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중방이 왕권을 능가하는 초월적 지위헤 있었음을 보여준다. 경인정변 이전 군사 합좌기관이었던 중방은 경인정변 이후 고유의 군사적 기능은 물론 인사, 법률 제정, 경찰, 형옥, 탄핵 등 보든 부분을 관장하는 초법적 기관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경대승은 기존의 중방 외에 도방(都房)을 설치했다. 경대승이 도방을 따로 설치한 이유는 반무신적(反武臣的) 노선을 택해 무신들의 공적(公敵)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중요한 임무는 경대승의 신변 보호였다. 고려사(高麗史) 경대승전(慶大升傳)의 '이 때에 경성(京城)에서 도둑이 많이 일어났는데, 스스로 경대승의 도방이라 칭했다. 관리가 체포하여 가두면 경대승이 이를 즉시 석방했다.'라는 기록에는 도방에 대한 경대승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경대승이 설치한 도방은 명종 재위 13년 경대승이 죽은 후 폐지되었으나 최충헌이 신종 재위 3년(서기 1200년)에 이를 다시 부활시켰다. 최충헌이 도방을 부활시킨 이유도 경대승처럼 신변 보호를 위해서였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집권한 경대승이 무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한 것처럼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한 최충헌도 자신이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대소 문무관리, 한량, 군졸 가운데 강한 자를 모두 불러 6번(番)으로 나누어 날을 바꾸어 그 집(최충헌의 집)을 밤에 지키도록 하고 도방(都房)이라 불렀다.'는 고려사(高麗史) 신종(神宗) 3년 12월의 기록이 최충헌 역시 자신의 경호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말해준다. 최충헌의 도방도 경대승의 도방처럼 신변 보호를 위해 설치된 조직이었지만 이에 소속된 인물만은 경대승 때의 그것과 달랐다. 즉 최충헌 정권의 도방을 구성한 인물들은 경대승 정권 때처럼 무뢰배들이 아니라, 장군 또는 대장군의 직임까지 갖고 있는 공직자들이었다.
도방 외에도 최충헌은 무신정권의 최고 기관으로서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고 스스로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올랐다. 최충헌이 당초 교정도감을 설치한 이유는 정적 숙청을 위해서였다. 1198년에 만적(萬積)의 반란이 일어난 것을 비롯해 희종(熙宗) 즉위년인 1204년에는 장군 이광실(李光實) 등 30여명이 최충헌 제거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었으며, 희종 재위 5년에는 청교역리(靑郊驛吏) 3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려고 승도들을 규합하다가 발각되는 등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최충헌(崔忠獻)은 영은관(迎恩館)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고 이들의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을 진압한 후에도 폐지하지 않고 계속 존치시키면서 이 기구를 통해 군국의 서정을 실시했다. 이후 교정별감은 무신정권의 상징처럼 되어 최충헌 사후 최우(崔瑀), 최항(崔沆), 최이(崔怡)로 이어지다가, 최씨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김준(金俊),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가 지위를 계승해 권력을 행사했다. 교정별감의 지위에 오르는 인물이 무신정권의 집권자임을 내외가 인정한 것이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崔瑀)는 교정도감 외에 정방(政房)도 설치했다. 뒤에 이(怡)로 개명하는 최우가 자신의 사저에 설치한 정방은 인사행정기관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전(崔忠獻傳)에 부기된 최이전(崔怡傳)에는 고종(高宗) 재위 12년 백관이 최우의 사저에 가서 정안(政案)을 올리면 그는 마루에 앉아 이것을 받았는데, 이 때 6품 이하 관리들은 마루 아래에서 재배하고 땅에 엎드려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다고 적혀 있다. 정방 설치 이후 임금은 정방에서 올린 인사안에 사후 결재만 할 뿐 모든 인사권은 정방에 있었던 것이다. 정방은 비록 최우의 사저에 설치한 사적 기관이었으나 정색승선(政色承宣), 정색상서(政色尙書), 정색소경(政色少卿) 등 정식 관원에 준하는 인원이 있고, 직접 정안에 따라 전주(銓注)를 관장하고 국왕의 결재를 받는 사실상의 공적 기구였다.
최우가 설치한 또 하나의 권력기구는 서방(書房)이었다. 고종 재위 14년(서기 1227년)에 설치된 서방은 고려사(高麗史) 최이전(崔怡傳)의 '최우의 문객 가운데 당대의 명유(名儒)가 많아 이들을 3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서방에 숙위하게 했다.'는 기록처럼 문인 숙위기관이었다. 이는 최씨 정권이 안정되면서 문인들을 등용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서방을 통해 문인들을 등용해야 할 정도로 문인들의 반발을 무마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기도 하다.
● 최씨 무신정권의 붕괴
1196년 4월,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최충헌은 1219년에 사망할 때까지 23년간 집권했다. 그러나 최충헌 사후 그의 아들 최이가 뒤를 이어 집권함으로써 최씨 무신정권은 세습권력화했다. 1249년에 최이가 사망하자 그의 서자 최항(崔沆)이 뒤를 이었고 1257년 최항이 병사하자 그의 노비 소생의 서자 최의(崔誼)가 뒤를 이었다. 최씨 무신정권은 1258년 3월 최의가 유경(柳璥), 김준(金俊) 등에 의해 제거될 때까지 4대 60여년간 계속된다.
최씨 무신정권 기간 최씨 집권자들은 황제 폐출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사실상 황제 위에 군림했다. 최충헌에 의해 제위에 오른 신종(神宗)의 초명은 민(旼)이었는데 즉위 전날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름을 천탁으로 바꾸라는 말하는 꿈을 꾸었다는 일화가 있다. 즉위 후 이름이 금황(金皇)의 그것과 같다는 이유로 이를 기휘(忌諱)해 신하들에게 적당한 이름을 지어 올리게 했더니 '탁(晫)'자를 지어 올렸다 하여 이 꿈이 천명을 뜻한다고 말해지지만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사실상의 임금은 최충헌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신종(神宗) 세가(世家)의 사신(史臣)의 찬에 '신종은 최충헌이 세운 바로서 생살(生殺) 폐치(廢置)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군왕(君王)은 다만 허기(虛器)를 붙들고 신민(臣民)의 위에 서 있어 나무인형[木偶人]과 같았을 뿐이니 애석하다."라는 부기는 이런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재위 6년만에 병에 걸린 신종은 1204년 맏아들 희종(熙宗)에게 양위했다. 그런데 희종 때에는 최충헌을 암살하려는 기도가 끊이지 않았고 때로는 희종 자신도 여기에 가담했다. 장군 이광실 등 30여명이 최충헌 암살을 기도했던 때가 희종 즉위년이었고, 청교역리(靑郊驛吏) 3명이 최충헌 부자를 암살하려다 귀법사 승려의 고발로 실패한 때도 희종 재위 5년(서기 1209년)이었다.
희종은 재위 7년(1211년) 내시낭중 왕준명(王濬明) 등 측근 내관들, 참정 우승경(于承慶), 장군 왕익(王翼) 등과 함께 최충헌 제거를 모의했다. 희종의 부름을 받고 최충헌이 궁중에 들어오자 미리 잠복하고 있던 10여명의 승려와 무사들이 최충헌을 습격했다. 이 자리에서 최충헌의 수하 몇명이 칼날에 베여 쓰러졌는데, 희종은 살려 달라는 최충헌의 호소에 내실의 문을 닫는 것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승려와 무사들이 지주사 다락에 몸을 숨긴 최충헌을 발견하지 못함으로써 최충헌 제거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건 직후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맏아들 강종(康宗)을 즉위시켰다. 이때 강종의 나이 60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2년 남짓한 재위기간 끝에 맏아들 고종(高宗)에게 제위를 물려주는데, 고려사 강종(康宗) 세가(世家)에 사관이 '강종이 임금으로 있을 때 일체의 정사(政事)는 강신(强臣)들의 통제를 받았다.'라고 부기한 데서 알 수 있듯 강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최충헌의 권력 세습이 확실해지자 최충헌의 두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발생하기도 했다. 집권 23년째인 1219년 최충헌이 뭄져눕자 둘째 아들 최향이 맏아들 최우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최충헌의 측근이었던 최준문(崔俊文)과 상장군 지윤심(池允深), 장군 유송절(柳松節), 낭장 김덕명(金德明) 등은 최우에게 보복당할 것을 우려해 최우 대신 최향을 세우려고 했다. 이들은 최충헌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명분으로 최우를 유인했다. 그러나 이미 이런 기운을 감지한 최충헌이 최우에게 "병이 장차 낫지 않으면 내부에서 변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너는 다시 오지 말라."고 다짐한 터여서 최우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몇차례의 호명에도 최우가 오지 않자, 비밀이 탄로났다고 생각한 김덕명이 밀고했다. 최우는 최향과 최준문, 지윤심, 유송절 들을 모두 체포해 유배보내고 1219년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에 올라 권력을 이어받았다.
권좌에 오른 최우는 최충헌이 불법으로 빼앗은 전답과 노비들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최충헌이 갖고 있던 많은 금은 진완(珍玩)들을 황제에게 바쳤으며, 부패한 관리를 내쫓고 한사(寒士)를 많이 등용해 인심을 얻으려 애썼다. 그가 서방(書房)을 두어 명유(名儒)들을 숙위시킨 것은 인심 획득이 일환이기도 했다.
최우는 그러나 집권기에 몽고족(蒙古族)의 침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된다. 최우는 고종(高宗) 재위 19년(서기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는데 본토는 몽고군에 의해 여러차례 유린되지만 그는 1249년 사망할 때까지 강화도를 거점으로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최우에게는 적자가 없는 대신 천첩 소생의 서자 만전(萬全)과 만종(萬宗)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최우는 이들 서자 대신 사위 김약선(金若先)에게 정권을 승계하려 했다. 최우가 이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만전과 만종을 송광사(松廣寺)에 출가시키자 김약선의 권력승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고종 재위 22년 딸을 태자비로 들여 권력을 공고히 하려던 김약선의 조치가 오히려 최우로 하여금 그를 견제하도록 만들었다. 때마침 종과 사통한 김약선의 처가 이 사실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해 '다른 일'로 남편을 고하자 최우는 김약선을 제거한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다른 일'이란 아마도 '김약선이 모반하려 한다.'는 무고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약선에 제거된 후 후계자가 된 인물은 기왕에 출가한 만전 최항이었다. 최항의 권력 이양은 그러나 순탄하지 못했다. 상장군 주숙(周肅)이 야별초(夜別抄)와 내외 도방(都房)을 이끌고 고종의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씨(崔氏)가의 가노(家奴) 출신인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준(金俊) 등 70여명의 장수가 최항을 지지하는 바람에 주숙도 결국 최항의 권력 승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항도 최우처럼 적자가 없었다. 다만 승려 시절 장군 송서(宋壻)의 여종에게서 얻은 최의(崔誼)가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최의에게 권력을 승계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무신 집권기라지만 천계(賤系)에서 천계로 권력이 승계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최항은 최의에게 권력을 넘기기 위해 측근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전(崔忠獻傳)에 부기된 최의(崔誼) 조에서 관련 기술을 보자
'일찍이 최항은 최의를 선인열(宣仁烈)과 유능(柳能)에게 부탁해 "만약 최의를 도와서 그가 가업을 계승하게 되면, 이는 오직 너희들의 공로이다."라고 말했다. 최항은 병이 들자 선인열과 유능 등의 손을 잡고 "그대들이 이 자식을 보호해 주니, 나는 죽어도 한이 없다."고도 했다. 최항이 죽자 전전(殿前) 최양백(崔良伯)은 이를 숨겨 발상(發喪)하지 않고, 칼을 어루만지면서 사비(寺婢)를 꾸짖어 울지 못하게 하는 한편, 선인열과 함께 최항의 유언을 문객 대장군 최영(崔瑛)과 채정(蔡禎), 유능에게 전하게 했다. 이들은 야벌초(夜別抄), 신의군(神義軍), 서방(書房) 3번, 도방(都房) 36번을 모아 최의를 옹위하고 발상하니, 군왕이 최의에게 차장군(借將軍)을 제배하고 또 명하여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삼았다.'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전(崔忠獻傳) 부(附) 최의(崔誼) 조
집권 8년만인 1257년에 병사한 최항의 뒤를 최의가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무력시위 과정을 거쳐서였다. 그런데 문객 장군들이 삼별초를 동원한 무력시위 끝에 집권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최씨 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몽고의 침략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안주한 결과였다.
이를 의식한 최의는 집권 후 창고의 곡식을 풀어 기아에 빠진 백성들을 진휼하고 각 부와 영의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선정의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최씨 무신정권은 점점 약해져 갔다. 더구나 정치력이 부족한 최의가 자신의 집권을 도와준 문객들을 소외시킴으로써 스스로의 기반조차 약화시켰다. 최씨가의 가노였던 김준(金俊)이 최의에게 도전했다는 사실은 사병(私兵)을 중시했던 비정상적 인사운용의 폐단이 그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준은 최항의 장인이었던 추밀원사 최온(崔瑥)과 상장군 박성재(朴成梓)를 끌어들여 집권 11개월에 불과한 최의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이때가 고종 재위 45년(서기 1258년) 3월, 이로써 최씨 무신정권은 4대 60여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교정별감으로 권력을 장악한 김준은 10여년 후인 원종(元宗) 재위 9년(서기 1268년) 왕정복고를 노리는 원종과 결탁한 임연(林衍)에 의해 제거되었다. 임연은 평소 김준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따랐으나 군부(君父)까지 허수아비로 삼았던 무신정권에서 제일의 가치는 다름아닌 권력이었던 것이다. 원종은 이듬해 원종을 폐위시키고 왕제(王弟)인 안경공(安慶公)을 즉위시켰으나, 원종을 지지하는 원나라의 압력으로 그를 다시 복위시킬 수밖에 없었다.
원종 재위 11년(서기 1270년) 3월, 임연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뒤를 이었다. 그는 원나라에 항복하고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주장하는 원종에 맞서 항몽투쟁(抗蒙鬪爭)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국왕이 보낸 어사중승 홍규(洪奎)와 직문하성(直門下省) 송송례(宋松禮) 등에 의해 집권 두달만에 제거되었다. 임유무 살해는 또 다른 무신 집권으로 이어지지 않고 왕정복고(王政復古)로 환원되어 무신정권은 집권 100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껏 무신정권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무신정권의 군사조직이었던 삼별초(三別抄)의 항몽투쟁(抗蒙鬪爭)을 주체성의 견지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는 무신정권 수립에 의해 배제된 문신들의 시각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신정권 수립 후 급격히 확대된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무신정권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무신정권기 고려 사회의 역동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의민, 김준 등 천민 출신이 최고 집권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무신정권기 고려 사회의 역동적인 모습이었으며, 농민, 천민들의 반란 또한 피지배계급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신들이 도방, 서방 등 독자적인 권력기구를 창출해 통치한 것이나, 과거 황실, 문신귀족과 결탁했던 교종 계열 사원의 반란이 잇따르자 무신정권이 선종 계열 조계종(曹溪宗)을 확립시킨 것은 무신들이 사상적으로도 문신들 못지 않은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무신들이 문신들을 제거하고 장악한 권력을 고려 사회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만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는 과거 문신 집권기의 문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신 집권기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천민 출신이 최고 집권자가 되고, 농민과 천민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는 점에서 민중들을 자각시킨 그런 시기이기도 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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