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가 넘은 노 레지스탕스의 육성은 서늘하다. 그의 육성을 담고있는 지면은 불과 50페이지지만, 이야기하는 주제가 지닌 무게의 차이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상대에 대한 폭력과 증오의 고리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인류의 역사는 항상 ‘폭력과 죽음에 패배해온 과정’이었다. 저자가 투쟁하며 살아왔던 2차 대전은 폭력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다.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하고 상대를 주체적으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떠들어댔던 20세기를 지나며 우리가 마주쳤던 인간의 추악한 얼굴은 어떤 것이었는가?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벌였던 전쟁 뒤의 짧은 평화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했고 패전국들의 과도한 희생위에 이루어진 평화는 파시즘이라는, “이 모든것을 리셋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달콤한 유혹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기실, 파시즘이란 비유하자면 채무를 진자가 무력으로 과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채무를 모두 없던일로 하겠다는 강압적 폭력이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겠다는 이런 단순한 주장이 한나라를, 나아가 전 세계를 살육의 공간으로 전락시킬수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정의관이 생각보다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관이란 타인에게는 냉혹했지만 자신에게는 유약한,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얼굴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너무도 쉽게 하지만 고통받는 당사자가 되었을때의 부조리는 결코 버티지 못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였던 지도자들과 그들을 제압하고 ‘받은만큼, 아니 그이상을’ 돌려주려했던 전승국들,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고통의 대가’를 요구했던 숱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저자의 말처럼 이성과 박애를 외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그들의 권리를 양도하고 익명의 전범이 되었는지 똑똑히 목도했다.
에셀이 말하는 ‘분노’란 ‘인간이 마땅히 소유해야할 가치들-정치적, 경제적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위한 사회제도등-을 특정의 이익을 위해 훼손하려는 모든 종류의 시도’에 대한 저항이다. 형이상적으로 표현해서 ‘불의한 일을 보고 그것을 되돌리기 위한’ 행동이라고 정의할 이런 일련의 행동은 에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이자 책임이다.
때문에 2차대전의 그 비극적인 일들은 비단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추축국들에게만 있는것도, 히틀러와 무솔리니등 전범들에게만 있는것도 아니다. 이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죄의 낙인이 박힌 자들은 바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때로는 전쟁의 피해자라 평가되어온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이다. 그들은 ‘분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데 급급했던 그들은 제아무리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말들로 자신을 포장한다 한들, 살육과 죽음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분노하지 않았던 그들은 결국 스스로의 이마에 그들이 그토록 비난해온 ‘고통의 원흉’이라는 낙인을 깊게 새겨넣은것이다.
분노하지 않았던 그들의 행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포함된 사회가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결말을 향해 치달릴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동의함으로서 이 모든 범죄행위에 동참한’것이라 할수 있다. 에셀이 말하는 ‘분노할 책임’은 개인적인 ‘양심’의 범주를 뛰어넘은 개념이다. 우리는 사회 부조리를 목도하고 분노함으로서 ‘개인적인 순결성’을 얻으려 할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사회의 방향 전체를 ‘정의로운’ 방향으로, 역사의 흐름을 평화의 골짜기로 인도해야 한다. 분노의 계기가 되는 ‘인간다움의 상실’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듯, 분노하는 행위와 그 결과 또한 개인적인 순결과 양심이 아닌, 적게는 국가, 나아가 전 세계인류 공통의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에설의 목소리는 단지 늙은이의 경험담이 아닌, 나를 포함한 독자 전체에게 던지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다.
“왜 분노하지 않고 스스로 죄의 낙인을 이마에 찍는 길을 택하는가?”
역사와 인류 앞에 죄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에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이미 지나버린 2차대전에 한정된,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분노’의 담론은 시대와 역사를 거슬러 ‘폭력과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인간에게 그 구체적인 원동력이 되고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갈등은 얼마나 많은가? 특정 정당과 재벌에게 장악된 언론사의 편향적 태도, 날로 늘어나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혹한 시선,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의 감정적이고 치졸한 비난일색까지, 2차대전에 비해 우리가 살아가는 2011년의 대한민국은 결코 분노할 대상이 적지않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2차대전의 레지스탕스와 같이 ‘분노하는’ 개인이 보이지 않는가? 어째서 우리 젊은이들의 의식에는 ‘분노’가 아닌 ‘굴종’을 통해 부당한 열매부스러기를 주워 먹고자 하는 패배의식과 알량한 도덕적 우위를 자랑하며 ‘해봤자 소용없다는’ 냉소적인 시선만이 가득차 있는가? 역사는 국가들의 행동에 의해 이루어지고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행동에 의해 방향을 잡는다. 구성원들의 행동의 원천은 바로 나 자신의 직접적인 행동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다만, 에셀은 우리에게 ‘분노’하되 ‘올바른 분노’를 요구한다. 잘못된 분노는 분노가 아닌 또다른 죄악의 시작이다. 2차대전은 ‘인간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분노한’ 행위의 결과이다. 다만 그 ‘분노’는 고통에는 고통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라는 함무라비식 ‘정의’관에 입각한 ‘그릇된 분노’였다. 20세기 최악의 비극이 이런 잘못된 분노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무관심만큼이나 끔찍한 태도는 ‘분노’의 대상을 오도하는 자들에게서 찾아볼수 있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그들이야말로 씨가 꽉찬 해바라기처럼 혐오와 죄악으로 가득찬 오물덩이 같은 존재일 것이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그들은 올바른 분노를 위한 기준을 멋대로 재단하고 방식을 자기 입맛에 맞게 감정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분노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것은 분노할 대상을 가려내는 ‘기준’과 분노하는 ‘방식’이다. 에셀은 ‘인권-자유, 평등, 박애’과 ‘비폭력’이라는 말로 표현한 이 두가지 요소가 어떻게 자리잡는냐에 따라 우리의 분노는 ‘세상을 바꾸는 빛’이 될수도, ‘또다른 불의와 죄악’이 될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과 방식이 우리의 분노가 유아적 발광으로 전락하는것을 막을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나와 남에게 차별없이 적용’되는 정의관과 ‘폭력과 감정만으로 이루어진 방식을 배제하는’ 행동관이라 생각한다.
이번 전북의 지진축하 현수막 사건을 보면서 나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전북 서포터즈의 행위를 일본의 잘못과 1:1로 대칭시키면서 ‘애국적인’ 행동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에 분노를 넘어서 암담해지기 까지 했다. 우리의 분노를 기준하는 우리의 정의란 어떤 존재인가? 타인의 권리를 빼앗고 타인을 능멸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저항이 그것이 아니던가? 때문에 우리는 위안부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을 규탄했고 일제의 잔재인 욱일승천기를 휘두르는 일본 스포츠팬들을 비난했으며, ‘천안함처럼 격침시켜라’라는 대만의 현수막에 분노하지 않았었던가? 전북의 현수막은 그 행위 대상이 타집단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우리의 집단으로 변화했을뿐 우리가 비난해온 그 숱한 ‘불의’와 다를바 없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행위이다. 그런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잘못된 결과를 바꾸려는 이들보다 이성을 배재한 애국심에 호소하는 무리와 일본의 잘못과 우리의 잘못을 1:1로 배치시키며 도덕적 자위에 한창인 이들, 그리고 이들의 잘못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암묵적인 공범자가 이리 많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책임질수 없는 분노는 분노가 아닌 배설에 불과하다. 논리와 이성을 배제하고 감정적이고 지역적인 쓰레기 같은 댓글이 넘쳐나는 신문 댓글란을 보면서 나는 질문했다. 과연 우리는 불의에 ‘분노하고’있는가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고’있는가?
폭력과의 사투에서 인류가 번번이 패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폭력을 멈출수 있는 것은 폭력뿐이다’라는 명제에 있다. 불과 얼마전 세계 어디보다 똘레랑스의 나라라 평가되던 노르웨이에서 이슬람권에 대한 증오와 배척의 정신이 만들어낸 가공할 테러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폭력과 배척이라는 부조리는 정복될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하나의 상징이었다. 세계 모든 테러리스트, 무장투쟁조직이 주장하듯이 그들의 폭력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거대한 폭력에 대한 대항이었고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주장에 동조할수는 없더라도 그들의 상황을 이해할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그들 말처럼 상대의 강압적인 폭력을 중단할수 있는것은 지난 시간동안 폭력뿐이라는 결론이 수없이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말뿐인 정의는 주먹에 무력할 따름이다”
문제는 부당한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이 또다른 증오와 폭력으로 재상산 된다는 점이다. 일본의 망언과 부당한 대응에 대항하기 위한 우리의 저항이 일본의 지진축하 현수막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은 오만과 폭력은 증오와 보복이라는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우리사회의 반증이다. 주먹에는 주먹이라는 식의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대응은 우리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때문에 이런 행동방식은 너무도 위험하다. ‘가슴으로 분노하되 이성으로 행동하라’는 격언이 분노하지 않는, 분노의 방향을 잡지 못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올바로 분노 할수있는 방식의 가능성을 역설적이게도 브레이빅의 테러후 "우리는 그가 말했던 그 수많은 차별과 증오를 더큰 관용과 사랑으로 덮음으로서 그의 테러에 답하겠습니다"라고 발표한 노르웨이 수상의 말에서 찾을수 있었다. 폭력과 배척만큼이나 폭력을 향한 또다른 '좌절할수 없는 투쟁', 불의에 맞선 이 가능성이 바로 저자 스테판 에셀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던 ‘비폭력’의 개념이 아니었을까?
'분노하라'라는 짧은 책을 읽는동안 나는 끊임없이 100세를 바라보는 노 레지스탕스가 우리 2011년의 젊은 레지스탕스에게 호소하는 목소리에 가슴이 떨렸다.
불의에 찬동하거나 침묵함으로서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지 말라!
가슴으로 분노하되 이성으로 행동하라!
타협할수 없는 기준을 설정하고 남에게도, 나에게도 칼날처럼 적용하라!
진정 정의로운 사람은 남에게 서릿발 같던 이성의 날을 자신에게 결코 죽이지 않는다.
폭력과 증오에 분노하되 또다른 폭력과 증오를 불러오지 않는 가능성을 목도하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식 정의는 강자의 정의, 또다른 비극의 씨앗일 뿐이다.
부정이 아닌 분노해야 하는 오늘, 나는 그리고 이글을 읽는 독자여러분은 “분노하지 않는 자는 죄의 낙인을 찍힌자이다.”라는 저자의 목소리에 얼마나 당당할수 있는가?
당신은 진정 분노하고 있는가?(분노하라/스테판 에셀)
당신은 진정 분노하고 있는가?(분노하라/스테판 에셀)
“분노하지 않는 자는 죄의 낙인을 찍힌자이다.”
90세가 넘은 노 레지스탕스의 육성은 서늘하다. 그의 육성을 담고있는 지면은 불과 50페이지지만, 이야기하는 주제가 지닌 무게의 차이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상대에 대한 폭력과 증오의 고리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인류의 역사는 항상 ‘폭력과 죽음에 패배해온 과정’이었다. 저자가 투쟁하며 살아왔던 2차 대전은 폭력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다.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하고 상대를 주체적으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떠들어댔던 20세기를 지나며 우리가 마주쳤던 인간의 추악한 얼굴은 어떤 것이었는가?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벌였던 전쟁 뒤의 짧은 평화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했고 패전국들의 과도한 희생위에 이루어진 평화는 파시즘이라는, “이 모든것을 리셋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달콤한 유혹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기실, 파시즘이란 비유하자면 채무를 진자가 무력으로 과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채무를 모두 없던일로 하겠다는 강압적 폭력이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겠다는 이런 단순한 주장이 한나라를, 나아가 전 세계를 살육의 공간으로 전락시킬수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정의관이 생각보다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관이란 타인에게는 냉혹했지만 자신에게는 유약한,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얼굴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너무도 쉽게 하지만 고통받는 당사자가 되었을때의 부조리는 결코 버티지 못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였던 지도자들과 그들을 제압하고 ‘받은만큼, 아니 그이상을’ 돌려주려했던 전승국들,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고통의 대가’를 요구했던 숱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저자의 말처럼 이성과 박애를 외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그들의 권리를 양도하고 익명의 전범이 되었는지 똑똑히 목도했다.
에셀이 말하는 ‘분노’란 ‘인간이 마땅히 소유해야할 가치들-정치적, 경제적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위한 사회제도등-을 특정의 이익을 위해 훼손하려는 모든 종류의 시도’에 대한 저항이다. 형이상적으로 표현해서 ‘불의한 일을 보고 그것을 되돌리기 위한’ 행동이라고 정의할 이런 일련의 행동은 에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이자 책임이다.
때문에 2차대전의 그 비극적인 일들은 비단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추축국들에게만 있는것도, 히틀러와 무솔리니등 전범들에게만 있는것도 아니다. 이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죄의 낙인이 박힌 자들은 바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때로는 전쟁의 피해자라 평가되어온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이다. 그들은 ‘분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데 급급했던 그들은 제아무리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말들로 자신을 포장한다 한들, 살육과 죽음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분노하지 않았던 그들은 결국 스스로의 이마에 그들이 그토록 비난해온 ‘고통의 원흉’이라는 낙인을 깊게 새겨넣은것이다.
분노하지 않았던 그들의 행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포함된 사회가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결말을 향해 치달릴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동의함으로서 이 모든 범죄행위에 동참한’것이라 할수 있다. 에셀이 말하는 ‘분노할 책임’은 개인적인 ‘양심’의 범주를 뛰어넘은 개념이다. 우리는 사회 부조리를 목도하고 분노함으로서 ‘개인적인 순결성’을 얻으려 할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사회의 방향 전체를 ‘정의로운’ 방향으로, 역사의 흐름을 평화의 골짜기로 인도해야 한다. 분노의 계기가 되는 ‘인간다움의 상실’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듯, 분노하는 행위와 그 결과 또한 개인적인 순결과 양심이 아닌, 적게는 국가, 나아가 전 세계인류 공통의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에설의 목소리는 단지 늙은이의 경험담이 아닌, 나를 포함한 독자 전체에게 던지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다.
“왜 분노하지 않고 스스로 죄의 낙인을 이마에 찍는 길을 택하는가?”
역사와 인류 앞에 죄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에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이미 지나버린 2차대전에 한정된,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분노’의 담론은 시대와 역사를 거슬러 ‘폭력과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인간에게 그 구체적인 원동력이 되고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갈등은 얼마나 많은가? 특정 정당과 재벌에게 장악된 언론사의 편향적 태도, 날로 늘어나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혹한 시선,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의 감정적이고 치졸한 비난일색까지, 2차대전에 비해 우리가 살아가는 2011년의 대한민국은 결코 분노할 대상이 적지않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2차대전의 레지스탕스와 같이 ‘분노하는’ 개인이 보이지 않는가? 어째서 우리 젊은이들의 의식에는 ‘분노’가 아닌 ‘굴종’을 통해 부당한 열매부스러기를 주워 먹고자 하는 패배의식과 알량한 도덕적 우위를 자랑하며 ‘해봤자 소용없다는’ 냉소적인 시선만이 가득차 있는가? 역사는 국가들의 행동에 의해 이루어지고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행동에 의해 방향을 잡는다. 구성원들의 행동의 원천은 바로 나 자신의 직접적인 행동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다만, 에셀은 우리에게 ‘분노’하되 ‘올바른 분노’를 요구한다. 잘못된 분노는 분노가 아닌 또다른 죄악의 시작이다. 2차대전은 ‘인간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분노한’ 행위의 결과이다. 다만 그 ‘분노’는 고통에는 고통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라는 함무라비식 ‘정의’관에 입각한 ‘그릇된 분노’였다. 20세기 최악의 비극이 이런 잘못된 분노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무관심만큼이나 끔찍한 태도는 ‘분노’의 대상을 오도하는 자들에게서 찾아볼수 있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그들이야말로 씨가 꽉찬 해바라기처럼 혐오와 죄악으로 가득찬 오물덩이 같은 존재일 것이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그들은 올바른 분노를 위한 기준을 멋대로 재단하고 방식을 자기 입맛에 맞게 감정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분노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것은 분노할 대상을 가려내는 ‘기준’과 분노하는 ‘방식’이다. 에셀은 ‘인권-자유, 평등, 박애’과 ‘비폭력’이라는 말로 표현한 이 두가지 요소가 어떻게 자리잡는냐에 따라 우리의 분노는 ‘세상을 바꾸는 빛’이 될수도, ‘또다른 불의와 죄악’이 될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과 방식이 우리의 분노가 유아적 발광으로 전락하는것을 막을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나와 남에게 차별없이 적용’되는 정의관과 ‘폭력과 감정만으로 이루어진 방식을 배제하는’ 행동관이라 생각한다.
이번 전북의 지진축하 현수막 사건을 보면서 나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전북 서포터즈의 행위를 일본의 잘못과 1:1로 대칭시키면서 ‘애국적인’ 행동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에 분노를 넘어서 암담해지기 까지 했다. 우리의 분노를 기준하는 우리의 정의란 어떤 존재인가? 타인의 권리를 빼앗고 타인을 능멸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저항이 그것이 아니던가? 때문에 우리는 위안부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을 규탄했고 일제의 잔재인 욱일승천기를 휘두르는 일본 스포츠팬들을 비난했으며, ‘천안함처럼 격침시켜라’라는 대만의 현수막에 분노하지 않았었던가? 전북의 현수막은 그 행위 대상이 타집단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우리의 집단으로 변화했을뿐 우리가 비난해온 그 숱한 ‘불의’와 다를바 없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행위이다. 그런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잘못된 결과를 바꾸려는 이들보다 이성을 배재한 애국심에 호소하는 무리와 일본의 잘못과 우리의 잘못을 1:1로 배치시키며 도덕적 자위에 한창인 이들, 그리고 이들의 잘못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암묵적인 공범자가 이리 많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책임질수 없는 분노는 분노가 아닌 배설에 불과하다. 논리와 이성을 배제하고 감정적이고 지역적인 쓰레기 같은 댓글이 넘쳐나는 신문 댓글란을 보면서 나는 질문했다. 과연 우리는 불의에 ‘분노하고’있는가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고’있는가?
폭력과의 사투에서 인류가 번번이 패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폭력을 멈출수 있는 것은 폭력뿐이다’라는 명제에 있다. 불과 얼마전 세계 어디보다 똘레랑스의 나라라 평가되던 노르웨이에서 이슬람권에 대한 증오와 배척의 정신이 만들어낸 가공할 테러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폭력과 배척이라는 부조리는 정복될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하나의 상징이었다. 세계 모든 테러리스트, 무장투쟁조직이 주장하듯이 그들의 폭력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거대한 폭력에 대한 대항이었고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주장에 동조할수는 없더라도 그들의 상황을 이해할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그들 말처럼 상대의 강압적인 폭력을 중단할수 있는것은 지난 시간동안 폭력뿐이라는 결론이 수없이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말뿐인 정의는 주먹에 무력할 따름이다”
문제는 부당한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이 또다른 증오와 폭력으로 재상산 된다는 점이다. 일본의 망언과 부당한 대응에 대항하기 위한 우리의 저항이 일본의 지진축하 현수막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은 오만과 폭력은 증오와 보복이라는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우리사회의 반증이다. 주먹에는 주먹이라는 식의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대응은 우리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때문에 이런 행동방식은 너무도 위험하다. ‘가슴으로 분노하되 이성으로 행동하라’는 격언이 분노하지 않는, 분노의 방향을 잡지 못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올바로 분노 할수있는 방식의 가능성을 역설적이게도 브레이빅의 테러후 "우리는 그가 말했던 그 수많은 차별과 증오를 더큰 관용과 사랑으로 덮음으로서 그의 테러에 답하겠습니다"라고 발표한 노르웨이 수상의 말에서 찾을수 있었다. 폭력과 배척만큼이나 폭력을 향한 또다른 '좌절할수 없는 투쟁', 불의에 맞선 이 가능성이 바로 저자 스테판 에셀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던 ‘비폭력’의 개념이 아니었을까?
'분노하라'라는 짧은 책을 읽는동안 나는 끊임없이 100세를 바라보는 노 레지스탕스가 우리 2011년의 젊은 레지스탕스에게 호소하는 목소리에 가슴이 떨렸다.
불의에 찬동하거나 침묵함으로서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지 말라!
가슴으로 분노하되 이성으로 행동하라!
타협할수 없는 기준을 설정하고 남에게도, 나에게도 칼날처럼 적용하라!
진정 정의로운 사람은 남에게 서릿발 같던 이성의 날을 자신에게 결코 죽이지 않는다.
폭력과 증오에 분노하되 또다른 폭력과 증오를 불러오지 않는 가능성을 목도하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식 정의는 강자의 정의, 또다른 비극의 씨앗일 뿐이다.
부정이 아닌 분노해야 하는 오늘, 나는 그리고 이글을 읽는 독자여러분은 “분노하지 않는 자는 죄의 낙인을 찍힌자이다.”라는 저자의 목소리에 얼마나 당당할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