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강론」28.개국 초의 혼란과 왕조의 안정

개마기사단201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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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개창(開創) 후 정도전(鄭道傳) 중심의 공신들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했고, 태조(太祖)의 권한은 도평의사사의 결의를 재가하는 정도였다. 건국 초 조선 사회를 주도한 공신들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소생의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을 세자로 결정해 재상 중심 체제를 제도화하려 했다. 제1차 왕자의 정변은 이에 대한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소생 왕자들의 반발이었다. 제2차 왕자의 정변까지 승리해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李芳遠)은 즉위 후 강력한 공신 숙청정책(肅淸政策)을 실시한다. 이에 따라 수많은 공신들이 죽어갔지만, 그 결과 조선왕조는 안정된 기반을 이룰 수 있었다.

● 공신과 왕자들

송헌(松軒) 이성계(李成桂)는 오백년 왕업(王業)의 고려를 목적(牧笛)에 부치고 조선을 開創했다. 하지만 그의 증조부 때만 해도 그의 집안이 새 나라를 건국할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성계의 증조부 이안사(李安社)는 기생을 두고 벌어진 싸움 끝에 전주를 떠나 함경도 경흥 땅에 정착했다. 여기서 이미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원나라의 지방관이 되어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3장에 "우리 시조 경흥에 살으사 왕업을 여시니"라는 노래는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 후 이성계의 조부 이행리(李行里)도 원나라의 지방관을 역임했고, 부친 이자춘(李子椿) 역시 함경도 일대에서 원의 지방관이 되었다. 그러던 공민왕(恭愍王) 재위 5년(서기 1356년)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천호(千戶) 이자춘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려는 고려에 내응해 원 세력을 축출하는데 공을 세움으로써,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를 제수받는다. 이로써 함경도 일대의 대표적 친원파였던 이성계 집안은 고려 동북면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 후 이성계도 많은 전공(戰功)들을 세우는데,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의 군대가 침입하자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함흥 평야에서 승전(勝戰)을 기록했으며, 1364년에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하려고 원나라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평안도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최영(崔瑩)과 더불어 출전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우왕(禑王) 재위 6년(서기 1380년)에는 하삼도(下三道)에 침범한 왜구를 토벌해 전국적인 무명(武名)을 떨치기도 했다. 1383년 함경도 함주(咸州)까지 찾아온 정도전(鄭道傳)에게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권유받은 이성계는 그 5년 뒤(서기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을 축출, 정권을 장악하고 공양왕(恭讓王) 재위 3년(서기 1391년)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해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듬해에 드디어 조선을 開創했다.

그러나 새 왕조 開創에 대한 지배층의 반발은 적지 않았다. 태조(太祖)가 즉위교서에서 "나라 이름은 그 전대로 고려라 하며,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古事)를 따른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반발을 우려한 수사(修辭)였다. 즉위교서에는 조선 건국을 반대한 인물들의 실명이 명시되었다. "우현보(禹玄寶), 이색(李穡), 설장수(楔長壽) 등 56명은 당(黨)을 만들어 반란을 꾀했다."며 "맨 먼저 화의 근원을 만들었으니, 이들을 마땅히 법대로 처단하여 훗날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유사(有司)의 상언이 그것이다. 태조는 이때 감형을 실시해 인심을 얻고자 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 목숨을 살려두려 한다. 우현보(禹玄寶), 이색(李穡), 설장수(楔長壽)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바다로 귀양 보내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며, 우홍수(禹洪壽), 이숭인(李崇仁) 등 8명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 1백대를 때린 후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라. 최을의(崔乙義), 박흥택(朴興澤) 등 25명은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 70대를 때린 다음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며, 김남득(金南得), 이실(李室) 등은 직첩을 빼앗고 먼 지방으로 방치하도록 하고, 성석린(成石璘), 정희(鄭熙) 등은 각각 그 고향에 안치하게 하라.

태조실록(太祖實錄) 1년 7월조'

즉위교서의 처벌 대상자 56명 중 권문세족보다는 우현보, 이색, 이숭인 등 온건개혁파(穩健革命派)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출신이 더 많았던 것은 새 왕조 개국에 대한 신진사대부 내의 노선 갈등이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숫자로 따지면 온건개혁파가 훨씬 더 많은 상황이었다. 이미 사망한 정몽주(鄭夢周)와 이색(李穡), 길재(吉再) 등도 온건개혁파였다. 원천석(元天錫), 김진양(金震陽), 이숭인(李崇仁), 안원(安援) 등 사대부들도 모두 새 왕조 참여를 거부했다. 이들이 집단으로 모여 산 두문동(杜門洞)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유래할 정도로, 조선 개국에 온건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이는 지배층의 정서일 뿐, 농민들은 과전법으로 문란한 토지제도를 정리한 조선을 지지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개국의 기틀은 흔들리지 않았다.

새 왕조 開創에 성공한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는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봉되어 조선 초기 정국을 주도했다. 이성계 즉위 다음 달인 1392년 8월 책봉된 개국공신은 1등 16명 등 43명이었으나, 이런저런 사유로 모두 55명으로 늘어났다. 개국 1등 공신에는 충선왕(忠宣王) 즉위교서에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이기도 했던 조준(趙浚), 조박(趙璞) 등 권문세족 출신도 있었으나, 형제였던 남재(南在)와 남은(南誾)처럼 "어린 시절 몹시 가난하여 노비나 말과 같았다."는 빈한한 가문 출신도 적지 않았다. 정도전(鄭道傳)의 아버지는 중앙 관료였지만 고조부는 향리 출신이었던 것처럼, 향리 출신으로 공신이 된 이들도 있었다. 3등 공신 이직(李稷)의 고조부와 안경공(安景恭)의 증조부도 모두 향리 출신이었고, 본명이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인 이지란(李之蘭)처럼 여진족 출신도 있었다.

조선 초기의 정국은 이들 공신들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했고, 태조(太祖)는 도평의사사의 결의를 재가하는 정도의 권한밖에 없었다. 건국 초의 조선은 이들 공신들이 주도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공신들은 과전법(科田法)에 의한 과전 외에도, 등급에 따라 수백결에 달하는 공신전(功臣田)과 수십, 수백명의 노비를 지급받았다. 1등 공신인 배극렴(裵克廉)과 조준은 사실상 개인 소유인 식읍(食邑) 1천호와 식실봉(食實封) 3백호, 토지 220결에다 노비 30구, 일종의 집사인 구사(丘史) 7인과 파령(把領) 10인을 지급받았다. 2등 공신은 100결의 토지와 10구의 노비를, 3등 공신은 70결의 토지와 7구의 노비를 지급받았다. 과전은 당사자가 죽으면 국가에 반납해야 했으나 공신전과 노비 등은 모두 세습이 가능했다. 과전은 수조권(收租權)만 있었지만, 공신전은 소유권이 인정되는 사유지였다.

왕세자(王世子) 책봉 문제는 조선 개국 초의 화약고였다. 이성계는 즉위 당시 이미 58세였으므로 빨리 후사를 결정해야 했는데, 공양왕 재위 3년(서기 1391년)에 사망한 이성계의 첫 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소생 네 아들과 생존한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소생의 두 아들을 합쳐 모두 6명의 왕자가 생존해 있었다. 태조가 즉위 다음 달 대신들과 세자건저(世子建儲) 문제를 논의하자, 배극렴은 "시국이 평안할 때는 적자(嫡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功)이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답했다. 적자는 생존자 중 장자인 방과(芳果)를 의미하고 공이 있는 사람은 방원(芳遠)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몰래 들은 신덕왕후 강씨가 통곡하는 바람에 세자는 결국 이들이 아닌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 방석(芳碩)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태조실록(太祖實錄)은 "임금이 강씨(康氏)를 존중하어 방번(芳蕃)에게 뜻이 있었다."라고 적고 있는데, 막상 방석으로 결정된 것은 공신들이 방번보다는 방석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국 초의 공신들은 국왕과 왕비의 의중에 있는 왕자를 제치고 그 동생을 세자로 책봉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방석이 왕세자로 결정된 며칠 후, 방석과 왕자들 그리고 공신들은 왕륜동(王輪洞)에 모여 '회맹문(會盟文)'을 작성했다.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은 감히 황천후토(皇天后土)와 송악(松嶽), 성황(城隍) 등 모든 신령에게 고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주상(主上)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대명(大命)을 받자왔으므로, 신 등이 힘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큰 왕업(王業)을 이루었습니다. 이미 일을 같이 했으므로 함께 한 몸이 되었으니,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처음은 함께 하지만 끝까지 함께 하기는 어렵다."고 하여 옛날 사람이 경계한 바 있습니다. 무릇 우리들 일을 같이한 사람들은 각기 마땅히 임금을 성심(聖心)으로 섬기고, 친구를 신의로 사귀고, 부귀를 다투어 서로 해치지 말며, 이익을 다투어 서로 꺼리지 말며 (중략) 우리 자손에게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킬 것이니, 혹시 변함이 있으면 신(神)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1년 9월 28일조'

그러나 이런 회맹문이 휴지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왕자와 공신들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초기 정국을 주도한 공신은 정도전과 조준이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조준은 하륜과 함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한 이론가이기도 했다. 이 중 세자 방석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정도전은 방석의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은 방원과 충돌하게 되었다.

첫번째 충돌은 사병(私兵) 혁파작업 때문이었다. 태조는 정도전의 건의로 재위 2년 9월에 삼군총제부(三軍摠制府)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고치고 무신들의 권력기구이던 중방(重房)을 폐지했는데, 이는 왕자와 공신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사병들을 국가가 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도전과 조준이 의흥삼군부의 수장인 의흥삼군부사를 번갈아 맡아가며 사병 혁파작업을 수행했다. 두사람은 중앙군을 장악한 데 이어, 정도전은 판삼사사(判三司事)와 경상전라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를 겸하고 조준은 좌시중과 교주강릉서해경기좌우오도도총제사(交州江陵西海京畿左右五道都摠制使)를 겸해 지방군마저 장악했다. 이런 조치에 무신(武臣)들이 반발했지만 이들이 문신(文臣)이기 때문에 오히려 안심하고 군을 맡겼던 태조는 "그들은 나의 팔과 다리와 같은 신하들로서 뜻이 한결같은 사람들이다."라며 신임하고 보호했다.

이러한 와중에 태조(太祖) 재위 5년(서기 1396년), 명나라와 표전문제(表箋問題)가 발생해 명나라가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해 오자, 태조와 정도전은 내부 무신들의 불만을 밖으로 분출시키고 나아가 요동까지 장악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 정도전은 태조 재위 6년에 무과(武科)를 실시하고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파하는 대신 각 진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어 근교의 병마를 통솔케 하고 도관찰사(都觀察使)에게 이를 감독하게 하는 전시태세에 돌입했다. 같은 해 정도전은 대규모 병력의 작전 배치 훈련계획인 오진도(五陳圖)를 작성했고, 태조는 각 절제사(節制使)와 군관(軍官)들에게 지방에서도 이를 가르치라고 명했다.

정도전이 주도하는 요동 정벌계획에 남은(南誾), 심효생(沈孝生) 등은 지지했으나 조준이 반대하면서 신흥 사대부 내에 분열이 발생했다. 조준은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사대(事大)의 예를 지켜왔고 또 새로 개국한 나라로서 경솔하게 명분도 없이 군사를 일으키면 안된다."는 명분으로 반대했다.그러나 사실은 정도전이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주장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요동 정벌이라는 대의명분을 들어 각 왕자와 무장(武將)들이 갖고 있던 사병(私兵)을 국가의 공적 군사로 편제해 군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조준의 이런 시각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왕자와 공신들은 자기 예하 사병들의 진법 훈련을 반대하는 것으로 이에 맞섰다. 그러나 태조가 회안군(懷安君) 방간(芳幹), 익안군(益安君) 방의(芳毅), 정안군(定安君) 방원(芳遠), 흥안군(興安君) 제(濟) 등 왕실 종친과 유만수(柳蔓殊) 같은 원종공신의 대리인들에게 태 50대를 치는 것으로 강하게 대응하자, 사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제1, 2차 왕자의 정변

태조(太祖)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사병 혁파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태조가 병에 걸리면서 상황이 변화했다. 태조의 와병을 계기로 왕자들이 정도전 제거를 계획했던 것이다. 태조실록(太祖實錄)은 점쟁이 안식(安植)이 "세자의 이모형(異母兄) 중에서 천명(天命)을 받은 사람이 하나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제 1, 2차 왕자의 정변이 천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후대의 기술이기는 하나, 이 기록에는 방원의 왕위에 대한 집념이 담겨 있다. 정도전 제거에 앞장선 방원이 그 명분으로 삼은 것은 '음모설'이었다. 정도전과 남은, 그리고 방석의 장인 심효생이 태조의 와병을 핑계로 왕자들을 불러모아 죽이려 한다는 것이 이 '음모설'의 내용이었다. 이 음모설을 제기해 현실화시킨 인물은 방원의 부인 민씨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제1차 왕자의 정변'의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원경왕후(元敬王后)가 그 아우 민무질(閔無疾)과 모의해 김소근(金小斤)을 방원(芳遠)에게 보내서 후(后)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고했다. 태종(太宗)이 곧 집에 돌아와서 후, 민무질과 더불어 한참을 이야기하는 도중, 후가 울면서 태종의 옷깃을 잡고 궐 내에 가지 말라고 했다. (태종이 대궐로 가자) 후가 문밖까지 따라 나와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세요."라고 말하고, 곧 동생 대장군 민무구(閔無咎), 장군 민무질과 함께 모의해 병장기(兵仗器)와 말을 몰래 준비해 태종을 응원할 계책을 세워놓고 있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태조(太祖) 조 고사본말(古寫本末)'

이 날이 태조 재위 7년(서기 1398년) 8월 26일이다. 그런데 정도전 등은 방원의 이런 움직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사실상 방원이 움직일 수 있는 인원도 한정되어 있었다.

'정안군(定安君)이 자신의 집 앞 어귀의 군영(軍營) 앞길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이숙번(李叔蕃)을 부르니, 이숙번이 장사(壯士) 두사람을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왔으며, 익안군(益安君) 상당군(上黨君) 회안군(懷安君) 부자도 또한 말을 타고 있었다. 또 이거이(李居易), 조영무(趙英茂), 신극례(辛克禮) (중략) 등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정안군에게 진심으로 붙쫓는 사람들이다. 이때에 이르러 민무구, 민무질과 더불어 모두 모였으나, 기병(騎兵)은 겨우 10명뿐이고 보졸(步卒)은 겨우 9명뿐이었다. 이에 부인이 준비해 둔 철창(鐵槍)을 내어 그 절반을 군사에게 나누어주었다. 여러 왕자의 종자(從者)들과 각 사람의 노복(奴僕)이 10여명인데, 모두 막대기를 쥐었으나 김소근만은 칼을 쥐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7년 8월 26일 조'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이때의 전격적인 왕자의 정변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방원의 거사를 예상하지 못했던 정도전은 남은의 첩 소동(小洞)의 집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포위한 방원의 군사들에 의해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세자 방석과 방번, 신덕왕후 강씨의 딸 경순공주와 남편 이제(李濟)도 죽임을 당했다. 그 직후 '사직(社稷)을 바로 세웠다.'는 뜻의 '정사공신(定社功臣)'이 책봉되었다. 29명의 공신 중 13명이 개국공신이었는데, 조준, 이화, 김사형, 조박 등은 개국 1등 공신으로서 정사 1등 공신에도 책봉되었다. 반면 같은 개국 1등 공신 중에 정도전, 남은, 이제 등은 목숨으 잃었다.

왕륜동에 모여 작성한 지 불과 7냔만에 회맹문은 무효가 되어 한쪽은 중첩된 공신, 다른 한쪽은 역적이 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방원은 일단 생존한 형들 중 가장 위인 방과(芳果)를 세자로 추대했고, 실권을 잃은 태조는 두달 후인 그해 9월 방과에게 전위(傳位)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명목상의 임금은 정종(定宗)이었지만 실권은 왕자의 정변을 주도한 방원에게 있는 체제가 제2대 정종 체제였다. 이런 정종 체제에 태조의 네번째 아들 방간이 불만을 품으면서 동복왕자들 사이에 긴장이 흘렀다. 정종은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金氏)와 7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후궁에게서는 15명의 아들을 얻었으나 정작 정안왕후 소생의 적자(嫡子)가 없었다. 방간은 바로 이를 노리고 후사를 자신이 차지하려 했다. 그런데 방원이 정종에게 양보한 이유 또한 같은 것이었다. 제2차 왕자의 정변은 실상 이런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충돌이었다.

앞서 일어난 왕자의 정변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재상 중심의 신권주의(臣權主義)와 방원으로 대표되는 국왕 중심 왕권주의(王權主義)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제2차 왕자의 정변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골육상쟁(骨肉相爭)에 지나지 않았다.

1400년 정월, 개성 한복판에서 벌어진 제2차 왕자의 정변 때 29명의 정사공신 중 방간을 따른 인물은 박포와 장사길뿐이었다. 절대 다수 공신들이 지지한 방원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방원은 다음 달 세제(世弟)로 책봉된 데 이어 같은 해 11월 정종이 양위하면서 즉위했으니, 그가 태종(太宗)이다. 1401년 정월에 "천자(天子) 또는 천자가 될 사람을 도왔다.'는 뜻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 책봉되었는데, 일등 9명 모두 46명이었다. 정사공신이 책봉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 건국 11년만에 세번째의 공신책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태종은 왕권주의를 내세우며 정변을 일으켰지만, 그 결과 탄생한 공신은 왕권을 제약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 태종(太宗)의 왕권 강화책

제1차 왕자의 정변으로 실권을 잡은 방원(芳遠)은 과거 정도전(鄭道傳)이 그랬던 것처럼 사병을 혁파했다. 세제가 사병 혁파를 단행하자 과거 방원이 그랬던 것처럼 공신들은 반발했다. 그러자 방원은 조영무(趙英茂), 이천우(李天祐), 조온(趙溫) 등의 공신들을 전격적으로 파직하고, 사돈지간인 이거이(李居易) 부자까지 쫓아냈다. 세제 방원은 공신들의 반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唐) 숙종(肅宗)이 이보국(李輔國)을 두려워한 것은, 다만 이보국이 병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권이 흩어져 있게 할 수 없다는 교훈이 이와 같다. 또 우리 집 일로 말하더라도 태상왕(太上王)께서 병권을 잡았기 때문에 고려 말년에 능히 화가위국(化家爲國)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인년(茂寅年)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의 난(亂) 때 우리 형제가 만일 군사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당해 변(變)을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박포가 회안군(懷安君)을 꾄 것도 또한 병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일에 공신 3, 4인이 병권을 내놓게 된 것을 불평 불만하므로 대간(臺諫)이 죄주기를 청해 외방에 귀양 보냈다. 지난날 내가 이들을 면대해 병권은 흩어져 있을 수 없다고 간절하게 일렀건만, 모두 능히 깨닫는 이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오직 조영무가 평양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세자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것이 한(恨)이다."고 한다."

정종실록(定宗實錄) 2년 6월 20일조

방원은 즉위 후 더욱 강하게 왕권 강화작업을 추진했다. 태종(太宗)은 왕권에 부담이 되는 공신들을 강하게 제어했고, 왕권에 도전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예외 없이 강하게 처리했다. 그 한 예가 태종의 처가쪽 사람들이다.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와 그 동생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은 태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훈(功勳)을 세운 인물들이다. 태종 자신도 이런 사실을 인정했었다.

'뒤에 태종이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왕건 부인 유씨(柳氏)의 일을 읽어보고 세종에게 "정사(定社)하는 날에 네 어머니의 도움이 심히 많았고, 또 그 동생들과 더불어 갑옷과 병장기를 정비하고 기다린 것은 유씨가 고려 태조에게 갑옷을 입힌 것보다 그 공이 더욱 중하다."고 말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태조(太祖) 조 고사본말(古寫本末)'

사실 고려의 국조(國祖)인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첫번째 부인 유씨와 방원(芳遠)의 부인 민씨의 공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유씨는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등에게서 궁예(弓裔) 축출 거사를 건의받고 망설이는 왕건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거사를 종용한 것이었다. 당초 홍유와 신숭겸 등은 "오이를 따다 달라."며 논의에서 배제하려 했으나, 유씨가 북쪽 창문으로 가만히 들어와 휘장에 숨었다가 나타나 거사를 종용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원경왕후 민씨는 사병 혁파 때 무기를 감추어 두었고 자신이 직접 거사일을 결정했으며, 그녀의 종용을 받은 동생들은 두차례 왕자의 정변에 모두 참여해 승리로 이끌었다. 더군다나 민씨는 자신이 천명까지 받았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새벽녘 꿈에 내가 신교(新敎)의 옛집에 있자니 태양(太陽)이 공중에 있었는데, 아기 막동(莫同)이 해 바퀴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정종실록(定宗實錄) 2년 1월 28일조

정사파(鄭絲把)라는 인물이 이에 대해 "공(公)이 마땅히 왕이 되어 항상 이 아기를 안아줄 징조입니다."라고 답변했다고 정종실록(定宗實錄)은 부기하고 있다. 이는 훗날 세종(世宗)의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기술이지만, 민씨는 자신의 꿈에 징조가 나타난 것을 자신의 정사(政事) 참여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태종이 1402년 성균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기 위해 가례색(嘉禮色)을 설치하자 민씨가 반발한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그 때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성균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을 별궁(別宮)으로 맞아들였다. 처음에 대부인(大夫人) 송씨(宋氏)가 왕비에게 "궁빈(宮嬪)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점점 두렵다."라고 말했는데 왕비의 투기는 더욱 더 심해만 갔다. 임금이 권씨(權氏)가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니 임금의 옷을 붙잡고,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했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라면서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않으므로, 임금이 가례색을 파하도록 명하고 환관과 시녀 몇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에 맞아들였다. 정비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했다.

태종실록(太宗實錄) 2년 3월 7일조'

이는 표면적으로 후궁을 둘러싼 갈등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왕권의 소재를 둘러싼 다툼이었다. 원경왕후의 질투에 직면한 태종은 그녀를 폐하기로 결심하고 가례색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사에 개입하는 일이 거의 없던 상왕(上王) 정종(定宗)까지 사람을 보내, "주상(主上)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어릴 때의 정 때문에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주상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라며 반대하고 나서자, 태종은 가례색을 파하는 대신 권씨의 후궁 입궁을 강행하고 후궁을 법제화시켰다.

태종은 나아가 두 처남 민무구, 무질 형제를 희생양으로 삼아 왕권에 대한 도전을 뿌리뽑기로 결심했다. 태종은 1406년 자신의 덕이 부족해 나라에 재변(災變)이 끊이지 않는다면서 양위(讓位)를 선언했는데, 이 때 모든 백관이 철야정청(徹夜政廳)을 열어 그 철회를 주청했고, 태종은 못 이기는 척 양위 선언을 거두어들였다.

그런데 이듬해 태조(太祖)의 이복동생인 영의정부사(領議政副事) 이화(李和)가 이 사건을 이용해 민무구 형제를 공격했다.

"작년에 전하께서 선위계획을 발표하셨을 때 모든 신민(臣民)들은 애통해 마지않았으나 민무구 형제는 얼굴에 화색을 띠었으며, 전하께서 복위하셨을 때 모든 신민들은 경하해 마지않았으나 무구 등은 도리어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어린 세자를 이용해 불충한 일을 꾸미려 했습니다."

태종실록(太宗實錄) 7년 7월 10일조

'화색을 띠었다.'거나 '불쾌하게 여겼다.'는 것 등은 보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 판단일 뿐이었고, 어린 세자를 끼고 정권을 잡으려 했다는 이른바 '협유집권(挾幼執權)'의 혐의도 아무런 물증은 없었다. 그러나 영의정부사 이화가 민씨 형제를 공격한 것 자체가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태종의 각본이었다. 태종의 마음이 처남들의 제거에 있음을 감지한 대간에서는 연일 탄핵에 나섰다. 결국 민씨 형제는 공신첩과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후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태종의 두 처남은 제거되었지만 물증 없는 유죄 확정은 이후 많은 물의를 낳았다. 명나라에 다녀오던 이무(李茂)가 조카뻘이었던 윤목과 이지성 등에게 "민씨 형제는 사실 아무 죄도 없는데 억울하게 유배된 것이다."라고 불만을 토로했고, 정사, 좌명 1등 공신인 그의 이런 불만은 공신들의 의사를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무는 태종의 처남들을 옹호한 이 한마디 때문에 창녕으로 유배되다가 중도에 청주에서 교살되었다.

사건의 여파는 급기야 귀양 가 있는 민무구 형제에까지 미쳤다. 성석린(成石璘) 등이 상소를 올려 "민무구, 무질 등의 죄는 천지간에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단 하루라도 세상에 살아있으면 안됩니다."라며 두 형제의 사형을 요구한 것이다. 태종은 이런 상소들을 명분삼아 재위 10년 3월에 제주로 귀양간 이들에게 자진(自盡)을 명했다. 이듬해 태종은 외척경계론을 담은 교지(敎旨)를 발표한다.

'대저 제가(齊家) 치국(治國)하는 일로 논하면, 외척으로 하여금 궁중에 가깝게 하는 것이 인군(人君)의 원대한 계책은 아니다. 방금 국가가 한가하고 안팎에 근심이 없으니 조금도 의삼하고 꺼릴 것은 없으나, 그 폐단이 후에 일어날지 어찌 알겠는가? 마땅히 싹이 트기 전에 제어하는 것이 가하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1년 윤12월 2일조

외척의 폐단을 '싹이 트기 전에 제어'하려는 태종의 의지는 민무구, 무질의 두 동생 민무휼(閔無恤), 무회(無悔)에게로 향했다. 전 황주목사 염치용(廉致庸)의 노비 소유권 분쟁과 관련해 청탁을 받은 무회가 태종 재위 15년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사건 처리를 부탁한 것이 계기였다. 충녕대군은 이를 태종에게 고했는데 노비 소유권 분쟁에서 시작한 이 사건은 민무회가 서인으로 강등되는 것으로 종결지어지려 했으나,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두 외삼촌의 과거사를 폭로하면서 오히려 확대된다.

"지난 계사년(癸巳年) 4월에 중궁(中宮)이 편찮아서 신과 효녕(孝寧), 충녕(忠寧)이 궐 내에 있었는데, 민무회와 민무휼도 문안을 왔었습니다. 두 아우가 약을 받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신솨 두 민씨만이 있게 되었습니다. 민무회의 말이 가문이 패망하고 두 형이 득죄한 연유에 미치기에, 신이 "민씨 가문은 교만 방자하여 불법함이 다른 성(姓)에 비할 바가 아니니 화(禍)를 입음이 마땅하다."라고 책망했습니다. 민무회가 신에게 "세자는 우리 가문에서 자라지 않으셨습니까?"고 말하기에, 신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는데 민무휼이 신을 따라오며 "민무회가 실언을 했으니 이 말을 드러내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기에, 신이 오래도록 여쭙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개전(改悛)할 마음이 없고, 또 원망하는 말이 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5년 6월 6일

두 형제인 세자인 조카의 폭로에 따라 직첩을 배앗기고 귀양 가는 것으로 죄가 더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왕자 비의 참고(慘苦)' 사건이 발생해 사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민씨 집안의 여종 소(素)가 잠시 입궐했을 때 태종이 임신시켰는데, 이 사실을 안 왕비 민씨가 여종과 아이를 죽이려다가 실패한 사건의 왕자 비의 참고 사건이다. 태종은 "핏덩어리가 기어 다니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불쌍히 여기는데, 여러 민가(閔家)가 음참(陰慘)하고 교활하여 여러 방법으로 꾀를 내어 반드시 사지(死地)에 두고자 했다."면서 귀양 간 민무회, 무휼을 다시 국문장으로 끌어냈다. 두 사람은 여기서 세자 양녕에게 했던 말에 대해 재조사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 심한 고문이 수반되었다.

"조금 뒤에 의금부 도사 이문간(李文幹)이 나와 "민무회가 승복하지 않아 두사람을 써서 압슬(壓膝)했으나, 오히려 더 승복하지 않으므로 또 두사람을 더해 압슬하니 그제야, "내가 세자께 형들이 모반히지 않았는데 죄 없이 죽은 것이라면서 '세자께서 우리 가문에서 자랐으니 원컨대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자, 세자께서 우리 가문이 좋지 않다고 말하기에 내가 '세자께서는 어느 곳에서 자랐습니까?'라고 했다"고 자백했습니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5년 12월 21일조

네사람이 가하는 압슬형을 견디지 못한 민무회는 과거 세자와의 대화를 자백하고 말았고 이 자백은 둘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태종이 "지금 중궁(中宮)이 이 일을 듣고 울면서 먹지 않으니, 늙은 어머니 송씨 때문이다."라고 말한 대로, 왕비 민씨는 단식으로 저항했으나 두 동생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만 태종은 "장모 송씨가 사는 서울에서 형을 집행하지 않겠다."는 것과 "종묘 제사 후에야 집행하겠다."는 양보를 했을 분이다. 태종 재위 16년 1월 10일이 종묘 제사날이었다.

'이 날 예를 마치고 환궁해 광연루 아래에 나아가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잡히니, 세자와 여러 종친이 시연(侍宴)했다. 향관(享官)과 여러 집사(執事)에게 사연(賜宴)했다. 저물녘에 이르러 세자가 술에 취해 나타나서 "종사(宗社)는 오로지 전하의 종사만이 아니니, 죄인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무휼과 민무회를 법대로 처치함이 옳겠습니다."라고 아뢰니, 임금이 최한(崔閑)에게 "자세하게 이 말을 들어두라."고 말했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6년 1월 10일조'

양녕의 공격을 신호로 다음 날에는 형조와 대간에서 그리고 다시 다음 날에는 의정부, 공신, 육조, 대간에서 잇달아 두 형제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1월 13일 태종은 민무휼과 민무회에게 유배지에서 자진할 것을 명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다음 기술은 이 사건에 대한 조선인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무구 등은 원경왕후의 동기다. 방간의 변란에도 공이 많이 있었는데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한 것은 무슨 죄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만일 죄가 역적을 범했으면 이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만 방자하고 불법한 짓을 한 때문이라면 함께 연좌될 사람이 없을 듯한데, 그 아뢴 것이 자세하지 못하고 뒤에 내려오는 전설도 확실히 믿을 수 없다. 중국의 당(唐) 태종(太宗)이 장손(長孫)을 용서하지 않은 것은 밝게 결단한 데서 나왔지만, 세자가 외숙을 대접하는 도리는 박한 데 가깝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양녕은 잇단 여자 문제 등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두 외삼촌을 희생양으로 삼아 바져 나가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거듭 물의를 일으키다가 2년 후인 1418년 6월 폐출되고 말았다. 외삼촌 민무회의 청탁을 들어주었던 삼남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 것이 이채롭다.

태종은 나아가 충녕의 세자책봉 두 달 만인 재위 18년 8월 선위(禪位) 결심을 빍혔다. 이번에는 과거 세차례의 선위 소동과 달리 진심이었다. 태종은 물러나 상왕이 되었으나 군국(軍國)에 관한 일만은 자신이 직접 관할했다.

상왕 시절 태종이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친정아버지 심온(沈溫)을 제거한 것도 외척, 공신의 발호를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1418년 영의정 심온이 사위 세종(世宗)의 즉위를 알리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면서 그를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태종(太宗)은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과 총제 심정(沈炡)이 임금의 호위를 맡는 금위(禁衛) 소속 군사를 배치하면서, 이를 세종에게만 보고하고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일을 꼬투리잡아 옥사를 일으켰다. 총제 심정이 바로 세종의 장인, 심온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병조의 주도권을 다투던 병조좌랑 안헌오(安憲五)는 심정이 "지금 명령이 상왕과 주상 두 군데서 나오니, 이는 한 군데서 나오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말했다면서 심정을 태종에 대한 불충으로 몰아갔다. 결국 심정은 "세종에게 군무를 돌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 역모로 인정되어 사형당했고,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체포된 심온도 "군무는 당연히 한 곳에 돌려야 한다."는 심정의 말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고문에 못 이긴 심정의 자백 외에 아무런 물증이 없었으나 관련자 대질을 요구하는 심온에게 태종은 "이들은 이미 황천객이 되었으니 어찌 만나겠느냐?"면서 사형시켰던 것이다.

● 공신 숙청의 토대 위에 안정된 왕권

태종은 이처럼 자신의 재위 때는 물론 상왕으로 있을 때도 외척과 공신들을 가혹하게 숙청했다. 그러나 이 숙청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태종의 가혹한 공신, 외척 숙청은 왕권의 안정을 낳았다. 공신들은 감히 왕권에 도전할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상왕(上王) 태종(太宗)은 세종(世宗) 재위 4년(서기 1422년) 5월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대부분의 공신들을 정리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공신들은 세종의 왕권을 위협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종은 공신들과 다투느라 여일(餘日)이 없었을 것이다. 세종은 태동이 안정된 왕권을 물려줬기에 이런 토대 위에서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태종과는 달리 사대부들에게 너그러운 호문(好文)의 군주였다. 태종이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만들었던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바꾼 인물도 세종이다. 그가 이처럼 신하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줄 수 있었던 것도 태종 덕분이었다. 의정부 정승들을 우대하는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함으로써 세종은 원로대신들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고, 이는 사대부들의 지지로 연결되었다.

세종이 사대부들의 이익을 충실히 옹호한 것은 그러나 백성들에게 해가 되기도 했다. 세종이 만들려던 사대부 중심의 국가는 때로 일반 백성들의 이익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세종 재위 2년 예조판서 허조(許稠) 등의 주도와 상왕 태조의 지지로 만들어진 수령고소금지법(守令告訴禁止法)이었다. 수령고소금지법은 역모나 불법 살인이 아닌 이상, '일반 백성들은 지방관의 어떠한 불법한 일도 고소할 수 없다.'는 악법이었다. 세종의 친정(親政)이 실시되어 이 법의 폐기가 논의되었을 당시 세종은 어사나 내관을 파견해 수령의 불법을 견제할 수 있다며 존속을 지지했다. 이로써 세종이 일반 백성들 보다는 사대부들의 이해를 더 중시함을 보여준 것이었다.

악법이 계속 시행되자 지방민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스스로 구제에 나서 수령에데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 재위 10년 좌사간 김효정(金孝貞) 등이 "요사이 간혹 상민(常民)이 수령을 구타한 자가 있고 혹은 역리(驛吏)가 조신(朝臣)을 능욕한 자도 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이를 한심하게 여기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밖의 분수를 어기고 풍속을 어지럽게 하는 무리는 진실로 죄다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악법 하의 향촌 사정을 잘 설명한 것이었다.

이 법의 문제점이 계속되자 세종은 재위 13년 백성이 직접 당한 불법한 일에 대해서는 고소할 수 있게 조건을 완화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일 뿐 문제는 계속되었다. 모든 권한을 한손에 쥔 수령만을 옹호하는 조선 왕실에게서 민심이 떠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종이 1446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고 그 1년 전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반포한 것은, 새 글자를 시험해 보려는 목적 외에 이런 민심 이반에 대한 회유책이기도 했다. 용비어천가 125장 중 1장부터 109장까지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내용인 것은 조선 왕실의 자기방어 필요성이 그만큼 절실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수령고소금지법 같은 악법을 둔 채, 향촌이 제대로 움직여질 리 없었다. 세종 후기에는 더 이상 이 악법의 기조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훈민정음에서 세종은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자신의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으나, 정작 백성들의 입을 막은 것은 한자가 아니라 수령고소금지법이라는 악법이었다. 더 이상은 백성들의 반발을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1447년 드디어 수령의 부패는 물론 잘못된 정사에 대해서도 고소를 허용하게 된다.

그러나 세종이 안정된 왕권 아래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자신 뛰어난 학자였던 세종은 누구보다도 학자들을 우대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두어 조용한 산사에서 공부하게 했으며,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해 우수 인재들을 모아 각종 정책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게 했다.

이런 학문 우대 시스템이 있었기에 민족의 보고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농사직설(農事直說) 같은 실용서를 편찬하고 혼천의(渾天儀) 같은 천체 관측기구를 만들고 앙부일구(仰釜日咎) 같은 해시계, 자격루(自擊漏) 옥루(玉漏) 같은 물시계를 만들었으며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세종은 이종무(李從茂)를 파견해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고 최윤덕(崔潤德), 김종서(金宗瑞) 등으로 하여금 4군 6진을 개척하게 할 정도로 국방 분야에도 업적이 많았다.

세종 때에 비로소 조선은 왕조의 기틀을 잡았다. 그 이면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태종의 숙청이 있었다. 세종은 비록 사대부 중심의 정치를 펼쳐 일반 백성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사대부들의 지지는 왕권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이런 토대 위에서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世宗)대의 안정된 왕권은 조선왕조의 전통으로 계속되지 못하고 어린 손자 단종(端宗)이 즉위하면서 차자(次子)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된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