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강론」30.사화(士禍)의 시대

개마기사단201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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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首陽大君)의 집권을 계기로 형성된 훈구파(勳舊派)는 막대한 권력을 독차지하면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양민을 노비로 삼거나, 양민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만들었다. 이 와중에 과전법(科田法)은 실질적으로 붕괴했고 많은 수의 농민들이 전호(田戶)로 전락했다. 훈구파의 경제적 비리는 지방 사회에서 현직 지방관들을 매개로 자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들이 훈구파 소유의 대농장으로 투탁하는 현상이 늘어나 사림파(士林派)의 지방 기반을 크게 위협했다. 즉,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 토지를 둘러싼 투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4대 사화를 극복하고, 명종(明宗) 말엽에 이르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 훈구파의 시대

세조(世祖)는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즉위했으나 그의 의도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세조 재위 13년(서기 1467년)에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구치관(具致寬) 등 정승들이 세자와 함께 국정을 처리토록 하는 원상제(院相制)를 채택한 것은 왕권의 약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망하기 약 반년 전인 재위 14년(서기 1468년) 3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완화한 것 또한 대신들의 권력 강화를 뜻한다. 원상제 채택과 분경금지법 완화는 세조와 공신 사이 일종의 타협책이었다. 병약한 세자의 힘으로는 현상 유지조차 힘들 것이라 생각한 세조가 원상들과 세자의 연합정권을 수립해 놓은 셈이었다.

1468년 9월, 13년 3개월의 재위 끝에 세조(世祖)가 세상을 떠나고 열아홉살의 예종(睿宗)이 즉위했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분경금지법을 강화해 대신들의 권력을 억제하려 했다. 그러나 막상 신숙주, 김질(金瓆), 귀성군(貴成君) 준(浚) 등 분경을 받은 대신들을 처벌하지는 못했다. 계유정난 이후 중첩된 공신들의 권한은 이미 왕권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남이(南怡)의 옥사(獄死)는 예종(睿宗)대의 정치지형을 잘 설명해 준다.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 "남이가 분경금지를 기화로 김국광(金國光)과 노사신(盧思愼) 등 대신들을 처단하려고 했으며 나아가 한명회도 제거하려고 했다."고 고변하면서 시작된 남이의 옥사는 세조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구공신(舊功臣)과 집권 이후 새로이 형성된 신공신(新功臣) 사이의 권력 다툼이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으로 구성된 구공신의 핵심이었고, 남이는 이시애(李施愛)의 반란 진압으로 형성된 신공신의 핵심이었다.

장인 권남(權擥)이 사망해 보호막이 없어진 상황에서 남이의 혐의는 임금이 되려 했다는 것으로 부풀려졌고 심한 고문이 동반되었다. 그가 같은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인 강순(康純)을 연루자로 끌어들인 것은 구공신의 공세에 공동 대응하지 않은데 대한 섭섭함이었다.

남이의 옥사는 구공신들이 권력을 재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옥사 직후 책봉된 익대공신(翊戴功臣)은 계유정난 이후 네번째의 공신책봉이었고, 예종의 즉위에 대한 논공행상이자 남이의 옥사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1등 5명, 2등 10명, 3등 24명 등 도합 39명이었는데, 1등 공신은 유자광, 신숙주, 한명회, 한명회의 조카 한계순과 환관 신운이었다. 신공신을 몰락시킨 구공신의 대표 한명회의 권력은 사실상 병약한 임금 예종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남이의 옥사가 신공신과 구공신 사이 공신집단 내부의 권력 투쟁이었다는 사실은, 조선이 사실상 공신들의 나라, 즉 훈구파(勳舊派)의 나라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종이 1년 2개월의 짧은 재위 끝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후임 국왕을 선출하는 과정은 이들 훈구파의 대표 한명회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준다. 세조 재위 6년(서기 1460년), 한명회는 자신의 장녀를 세자였던 예종에게 출가시켰다. 그러나 이듬해 그녀가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다가 산후조리를 잘못해 16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고 설상가상으로 인성대군마저 세상을 뜨자, 한명회는 이미 사망한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慈乙山君)에게 자신의 또 다른 딸을 시집보냈다.

예종이 죽자, 한명회는 그 뒤를 자신의 사위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잇게 하려 했다. 그래서 당시 생존해 있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과 자을산군의 친형 월산군(越山君)을 제치고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를 끌어들여 세조의 유명을 빙자해 자을산군을 추대했다. 그가 성종(成宗)이다.

성종의 즉위가 무리라는 사실은 성종 즉위 직후도 아닌 재위 2년(서기 1471년) 1등 9명, 2등 12명, 3등 18명, 4등 36명 등 도합 75명의 좌리공신(佐理功臣)을 책봉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좌리(佐理)'란 군주를 도와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인데, 이는 성종 정권 유지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한명회 집안에서만 아들 한보와 사촌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과 한계미의 아들 한의 등 6명이 책봉되었고, 신숙주 집안도 아들 신정과 신준 등 3명이, 정인지 집안도 아들 정현조, 정승조 등이 함께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한명회는 정난, 좌익, 익대, 좌리공신의 4공신에 모두 1등으로 책봉되었고, 신숙주와 정인지도 4공신에 모두 책봉되어 온 나라의 권력이 이들의 수중에 있었다.

신하들의 전횡을 명분으로 계유정난을 일으킨 결과,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들이 훈구파를 형성했다. 이들 정공신(正功臣) 외에 그 추종자들에게 준 원종공신(原從功臣)은 더욱 많았다. 태조(太祖)가 개국공신 외에 1천여명을 더 책봉한 것이 시초인 원종공신은 세조(世祖) 즉위에 따른 좌익공신 때는 2060명, 성종(成宗) 즉위에 따른 좌리공신 때는 1059명이나 되었다. 재위 2년째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좌리공신을 책봉한 데 대해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이전의 공신들은 공이 있었지만, 지금의 공신들은 무슨 공이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훈구파는 국왕도 통제하지 못하는 막강한 권력을 사적인 치부에 사용했다. 15세기 말 이후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해 경제력이 크게 향상되었으나, 그 수확은 훈구파가 대부분 가로챘다. 이들은 고리대(高利貸)를 이용해 양만을 노비로 삼고 자신의 수하인 구사(丘史) 반인(伴人)을 이용해 전국에 걸친 농장을 관리했다. 이 와중에 과전법(科田法)은 실질적으로 붕괴했고, 공신들은 대규모 토지를 차지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전호(佃戶)로 전락하고 말았다. 훈구파(勳舊派)는 심지어 재지사족(在地士族) 사림파(士林派)의 토지까지 장악하려 했고, 사림파는 이런 훈구파에 저항했다. 지방 사회에서 현직 지방관들을 매개로 자행되는 훈구파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훈구파 소유의 대농장으로 투탁하는 현상이 늘어났고, 이것이 결국 사림파의 지방 기반을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저항했던 것이다. 일부 양반 사대부들은 이 과정에서 몰락하여 토지 지배자의 신분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사유지를 갖지 못한 양반 사대부가 양반 신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관직을 획득하는 길뿐이었다. 사화는 이처럼 토지 지배자의 신분에서 탈락하지 않으려는 지배층 내부의 격렬한 투쟁이기도 했다. 양반들은 정치 이외의 생업에는 종사할 수 없다는 경직된 조선의 사회구조가 사화를 촉발시킨 원인이기도 했다.

사림파는 정치적으로는 세조의 즉위에 부정적 견해를 가진 사대부집단이다. 김종직(金宗直)을 그 종주로 보지만 학통은 고려 말기 온건개혁파(穩健革命派)로부터 시작되어 대략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 - 김숙자(金叔滋) - 김종직'의 구도로 이어졌다.

김숙자는 김종직의 부친으로서 고위 관직을 역임하지는 못했지만 아들 김종직을 비롯한 후학들을 길러내 사림파 형성에 밑거름이 되었다. 김종직은 세조 재위 5년 스물아홉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된 이래 홍문관 수찬(修瓚), 이조좌랑, 예문관 응교(應敎)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비록 대신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1492년 예순둘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수많은 문인을 길러내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사림파도 훈구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지배층이었다. 김숙자는 친가의 재산 외에 밀양의 사족 박홍신(朴弘信)의 무남독녀 사위로서 그의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김종직도 경상도 세읍에 농장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림파 정여창(鄭汝昌)도 악양 농장에 수백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김굉필도 여러 곳에 농장과 노비를 갖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농민들은 농업 생산력을 꾸준히 증가시켰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은 일부 농민들과 상인들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일부 농민들과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해가 정치에 반영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즉 일부 농민들과 상인들도 정치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피는 훈구파에 맞서 향촌사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농민들의 이런 성장을 배려했다. 사림파는 농촌 장악 수단으로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이용했는데, 이는 사림파가 이상으로 삼았던 중국 고대 주나라의 주례(周禮)에 나오는 것들이다. 향사례는 마을 사람들이 정월 중 좋은 날을 선택해 함께 활을 쏘는 행사였고, 향음주례는 매년 사계절의 첫 달인 맹월(孟月)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사였다.

향사례는 논어(論語)에 "군자는 남과 다투지 않지만 활 쏘는 것은 양보하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처럼 문무겸전의 사대부를 지향하는 행사였다. 향음주례는 사림파가 농민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사림파는 향음주례 때 사대부 아닌 일반 백성들도 참석시켰고 음주의 순서도 신분이 아니라 나이, 덕행, 도예(道藝)의 순서로 정했다. 신분제 계급 사회에서 이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는 훈구파와의 정쟁(政爭)에서 농민들의 지지가 필수적인 만큼, 농민층의 성장이 두드러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림파는 향사례, 향음주례, 향약(鄕藥) 등을 통해 마을 공동체의식을 고양하고 이 공동체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려고 했다. 즉 이런 행사들을 통해 향촌을 확실한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놓아두려 한 것이었다.

● 성종이 사림파를 등용한 이유

사림파(士林派)는 성종(成宗) 때부터 중앙 정계에 본격 진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사림파를 등용시켜 훈구파 견제의 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성종의 의도가 작용했다. 성종은 재위 7년까지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의 수렴청정을 받았는데, 이때 사실상 정국을 주도한 세력은 원상제(院相制)의 구성원들인 공신들이었다. 성종은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홍윤성(洪允成), 김국광(金國光), 조석문(曺錫文), 정창손(鄭昌孫), 윤자운(尹子雲) 등 원상들의 동의 아래 국사(國事)를 집행해야 했다. 성종 재위 6년 윤6월 대사헌 정괄(鄭括)이 이조와 병조의 모든 인사권이 한명회의 손아귀에 있다면서 전횡 방지를 주청한 것은, 성종 재위 초의 이런 국정 상황을 잘 보여준다.

성종은 이런 정치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 사림파를 주목했다. 성종은 훈구파(勳舊派)가 주도하는 정국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성종이 친정(親政) 2년째인 재위 9년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된 홍문관의 표면적 기능은 궁중의 경적(經籍)을 관리하는 왕실 도서관, 문한(文翰) 처리, 고문 기능 등 크게 세 가지지만, 실제로는 개혁 추진기관이었다. 성종은 홍문관에 사림파들을 포진시켜 훈구파와 대립시킴으로써 훈구파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재위 9년에 성종이 사림파 윤효손(尹孝孫)을 일약 대사헌에 임명하고, 김흔(金昕)을 홍문관 부교리, 김맹성(金孟性)과 양희지(梁熙池)를 각각 홍문관 수찬과 부수찬에 임명한 것은, 이들 사림파를 주축으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종은 재위 16년 4품 이상의 홍문관원에게 은대(銀帶)를 하사하고 홍문관에 채전(菜田)을 지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한 데 이어, 홍문록(弘文錄) 작성 권한도 주었다. 홍문록이란 문과 급제자 중에서 홍문관원이 될 후보자를 미리 기록하게 한 것으로, 홍문관원에 대한 선발권을 홍문관 자체에 줌으로써 의정부나 이조의 인사권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재위 9년에 양관(兩館)이라 불렸던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원들이 훈구파 유자광(柳子光)과 임원준(任元濬), 임사홍(任士洪) 부자를 탄핵한 것처럼, 사림파는 훈구파의 전횡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성종 재위 23년에는 김종직의 제자인 성균관 유생 이목(李穆)이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을 '간귀(奸鬼)'라고 공격했다. 윤필상은 성종의 세번째 부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인척으로서 척리(戚里)가문이었다.

사림파의 공격을 받던 훈구파는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金宗直)을 겨냥해 그에게 내린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과분한 것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림파를 통해 훈구파를 공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던 성종은, 이미 정해진 시호를 바꿀 수 없다며 사림파를 보호했다.

사림파는 국왕의 면전인 경연(經筵)에서 훈구파가 장악하고 있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서 돈을 받고 군역을 면제시켜 주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훈구파는 사림파의 이런 조직적 공세에 분개했으나 성종이 의도적으로 사림파를 보호하는 한, 보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종이 재위 25년(서기 1494년)만에 사망함으로써 사림파는 보호막을 잃게 되었다. 이는 사림파의 수난시대, 즉 사화(士禍)의 시작이었다.

● 무오사화(戊午士禍)

사화란 사림파가 훈구파로부터 받은 정치적 탄압을 뜻하는 것으로, '사림(士林)의 화'의 준말이다. 첫번째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대한 사림파의 역사인식을 문제삼아 발생했다.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사초가 단종(端宗) 사후 41년, 계유정난 45년 후인 연산군(燕山君) 재위 4년(서기 1498년)에 문제가 되어 발생한 것이었다. 김종직은 성종(成宗) 재위 23년(서기 1492년) 이미 사망한 뒤였다. '의제(義帝)를 애도하는 글'이란 뜻의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생전에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쓴 글이었다.

정축년(丁丑年) 10월, 나는 밀양(密陽)에서 경산(京山)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잤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회왕(楚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에게 살해당해 빈강(彬江)에 잠겼다."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이렇게 생각했다. '회왕(懷王)은 중국 남방 초나라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리가 만여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시대도 천여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내 꿈에 나타난 것은 무슨 징조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시신을 강에 던졌다는 말은 없으니, 아마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드디어 글을 지어 의제(義帝)를 조문한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4년 7월 17일조

조의제문은 전문이 다양한 은유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김종직이 꿈을 꾸었다는 정축년 10월은 단종이 세조에게 죽은 세조(世祖) 재위 3년 10월이었다. 그러므로 의제는 단종을, 항우는 수양대군을 상징하고 있고, 단종을 죽인 인물이 수양임을 알리기 위해 의제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의제의 시신이 '빈강에 잠겼다.'라는 문장도 '노산이 해를 당한 후 그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다.'는 아성잡설(鵝城雜說) 등의 내용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의제문은 '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르려니 생각이 불안하고 조심스럽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니, 바라건대 영령이여 와서 흠향하소서'라고 끝을 맺는데, 여기서 '주자의 필법을 다른다.'는 것은 김종직 자신이 주자가 강목(綱目)을 쓰던 춘추필법으로 이를 썼다는 뜻이다. 김종직이 실제로 꿈을 꾸었는지 아니면 꿈을 빙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진실로 애도하는 인물은 의제가 아니라 단종이라는 점에서 그의 꿈에 정말 신인이 나타났다면 그는 의제가 아닌 단종이었을 것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사관 김일손(金馹孫)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 역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였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었고, 그래서 김일손은 조의제문을 '충분(忠憤)이 깃들여 있었다.'라고 논평한 것이다. 조의제문을 계기로 윤필상(尹弼商),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은 사림파 공략에 나섰다.

훈구파는 사림파를 세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불온한 정치세력이라고 주장했고, 이미 죽은 김종직에 대한 공세가 잇달았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중략) 그 심리를 미루어 보면 병자년에 난역(亂逆)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 대역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해서 그 죄를 명정(明正)해 신민의 분을 씻는 것이 실로 사체(事體)에 합당합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4년 7월 17일조'

훈구파들이 이를 대역으로 몰아가자 사림파에 속했던 사헌부 집의 이유청(李惟淸)과 사간 민수복(閔壽福), 사헌부 장령 유정수 등은 김종직의 작호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자는 온건한 의견을 냈다가 끌려 나가 형장을 맞기도 했다.

김종직의 사초를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도연명(陶淵明)의 술주시(述酒詩)에 화답한 내용의 서문도 문제가 되었다. 유유(劉裕)에게 선위한 진(晉) 공제(恭帝)에 대한 이 글에서 김종직은 '유유가 찬시(纂弑)한 죄'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세조가 유유처럼 선위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실제는 왕위를 빼앗고, 임금을 죽인 '찬시'라는 비난이었다. 훈구파 윤필상 등이 이에 대해 "이 서문은 조의제문보다도 심해서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 즉 사림파들은 엄혹한 탄압을 받았다. 고향인 경상도 함양에서 지병인 풍을 치료하고 있던 김일손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혐의로 이틀거리를 하루에 끌려와 국문 끝에 대역(大逆)으로 논죄되어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사를 당했고, 권오복(權五福)과 권경유(權景裕)도 같은 형을 받았다.

이목(李穆), 허반(許磐), 강겸(姜謙)은 난언(亂言)했다는 명목으로 목이 잘리는 참형(斬刑)을 당했으며, 정여창(鄭汝昌), 홍한(洪漢), 이수공(李守恭) 등은 난언을 했거나 난언을 고발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곤장 1백대에 3천리 밖 변경의 봉수군(逢遂軍)으로 떨어졌다. 그 외에도 이종준, 최보, 이원, 강백진 등은 붕당(朋黨)을 지었다는 명목으로 곤장 80대에 먼 지방으로 부처(付處)되는 등 사림파는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죽은 김종직의 시신은 관에서 꺼내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이로써 성종 때에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는 조정에서 모두 축출되고 말았다. 결국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40여년 후에까지 조정에 피바람을 몰고 왔던 것이다.

● 갑자사화(甲子士禍)

성종(成宗)은 호문(好文)의 군주로서 유교정치의 틀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1479년에는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 너머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을 토벌하도록 했고, 1491년에는 허종(許琮)으로 하여금 국경을 침범한 두만강 건너편의 여진족을 소탕하게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강력한 군사력의 바탕 위에서 문화의 꽃을 피우려 한 현군(賢君)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호문만큼 호색(好色)의 임금이어서 4명의 왕후와 8명의 후궁을 두었고, 이들에게서 16명의 왕자와 12명의 공주 및 옹주를 낳았다.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가 1474년에 16세의 어린 나이로 죽자, 성종은 1476년 연산군(燕山君)을 낳은 후궁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런데 그녀는 성종의 여탐(女貪)을 참지 못하고 여러차례 다투다가 1479년 시어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성종의 합의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그 뒤를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가 이었지만 원자의 생모를 여염에 둘 수 없다는 문제가 계속 제기되어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인수대비와 성종은 1482년 8월 훗날의 화를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윤씨를 사사(賜死)시키고, 이듬해 2월 원자 연산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성종은 사후 100년동안 폐비 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말하는 유명(遺命)을 내리는 것으로 훗날의 비극을 막으려 했지만, 현실은 죽은 성종의 것이 아니라 산 연산군의 것이었다. 성종은 원자를 정현왕후에게 입적시켰으나 성종 재위 19년(서기 1488년) 정현왕후 윤씨가 진성대군(晋城大君)을 낳음으로써 사태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1504년에 발생한 갑자사화(甲子士禍)는 무오사화(戊午士禍)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오사화는 사림파만이 화를 당한 사화(士禍)이자 사화(史禍)였던 데 비해 갑자사화는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도 상당한 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로 이미 사림파 대부분을 제거한 훈구파 내부의 권력 다툼이었다. 훈구파는 왕실의 인척인 궁중파(宮中派)와 의정부, 육조 등에 포진한 부중파(府中派)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임사홍(任士洪)과 연산군의 비 신씨(愼氏)의 오빠 신수근(愼守勤) 등이 궁중파의 핵심이었다. 여기서 궁중파는 부중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독점하려 했고, 그 계기로 이용한 것이 바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문제였다. 임사홍이 부중파를 타도하기 위해 폐비 윤씨사건을 이용하자, 연산군은 한때 어머니의 연적(戀敵)이었던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를 철퇴로 머리를 박살내 죽였으며, 그 두 아들인 왕자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도 죽여 버렸다.

윤씨를 폐위시키고 사약을 내리는 데 주도했던 인수대비는 연산군 재위 10년 4월에 사망하는데, 야사(野史)에는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 그런 것이라고 전한다. 그도 그럴것이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국장(國葬)을 한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지제(易月之制)로 일찍 끝내 버렸던 것이다.

연산군은 재위 10년 3월에 사망한 지 이미 22년이 지난 생모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승하고 그 묘를 희릉(憘陵)이라 높였다. 나아가 성종의 능에 배사(配祀)하는 것을 홍문관 응교 권달수(權達手)와 이행(李荇)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사형에 처하고 이행은 유배를 보냈다.

연산군이 모후를 추승하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짓지 않고 과거사 치죄에 나서면서 사태는 확대되었다. 그는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한 윤필상, 이극균, 성준(成俊), 이세좌(李世佐) 등을 사형시키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한치형(韓致亨), 어세겸(魚世謙)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

여기에서 끝났어도 갑자사화는 '사화(士禍)'라기보다 훈구파가 화를 입었다는 뜻의 '훈화(勳禍)' 또는 공신이 화를 입었다는 뜻의 '공화(功禍)'라고 불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임사홍 등 궁중파는 폐비 윤씨의 일에 잔존한 사림파까지 연루시킴으로써, 또 다시 사림파가 화를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김굉필(金宏弼), 이주(李胄) 등이 사형당했고, 이미 죽은 정여창(鄭汝昌), 남효온(南孝溫)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이밖에도 강겸(姜謙), 김천령(金千齡), 이유녕(李幼寧), 박한주(朴漢柱), 홍식(洪湜) 등 사림파와 훈구파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었으며, 그 가족들까지 연좌되었다.

갑자사화는 궁중파의 승리와 부중파와 사림파의 몰락으로 귀결지어졌다. 갑자사화는 훈구파는 물론 수많은 사림파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그러나 사림파의 세력은 그 후 오히려 확산되었다. 갑자사화로 화를 입은 훈구파 중 사림파로 전향한 인사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정광필(鄭光弼), 이장곤(李長坤), 이사균(李思鈞), 홍언필(洪彦弼), 조원기(趙元紀) 등이 그들로서,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유배되거나 피신을 하는 등 수난을 겪으면서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파의 처지를 동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사림파가 주장하는 도학정치(道學政治)는 더욱 많은 사대부들의 지지를 획득하게 되었다.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다시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갑자사화가 뿌린 이런 씨앗들이 있었다.

● 중종반정(中宗反正)과 기묘사화(己卯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이후 연산군(燕山君)은 향락으로 일관했다. 연산군은 전국 각지에 채홍사(採紅使)를 보내 운평(運平)을 뽑아 올려 흥청(興淸)이라고 이름짓고, 뒤이어 들어온 운평은 계평(繼平), 속홍(續紅)이라 했으며, 채청사(採靑使)를 두어 나이 어린 여자들을 선발했다. 운평은 처음에는 300명이었다가 나중에는 13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을 숙식시킬 거처가 마땅치 않자 성종(成宗)의 부마(駙馬)인 의성위(宜城慰) 남치원(南致元)의 집을 함방원(含芳院)이라 부르고 흥청들의 거주지로 삼았으며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을 뇌양원(雷陽院), 이복형제인 견성군(甄城君)의 집을 진향원(進香院)이라 이름지어 흥청과 광대들을 나누어 살게 했다.

연산군은 사냥도 즐겨서 이를 위해 봉순사(奉順司)라는 관청을 따로이 설치하고, 말을 기르는 곳을 운구(雲廐), 기구(麒廐), 인구(隣廐) 또는 용구(龍廐)라 하여 각지에 두었다. 그런데 "용구, 인구, 봉순사에서는 항상 수천필의 말을 길렀다."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런 기구들을 유지하는 데에는 수많은 비용이 들었다. 연산군은 양주(楊州), 파주(坡州), 고양(高陽) 등 도성에서 가까운 고을의 인가를 허물어 사냥터를 만드는 등 백성들의 희생으로 그 비용을 조달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자 공신들에게 주었던 공신전(功臣田)과 노비까지 몰수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신권(臣權)이 강한 나라, 조선의 틀을 깨는 일이었다.

훈구파들은 더 이상 연산군을 용납할 수 없었다. 연산군이 갑자사화 이후 2년여만에 힘없이 무너진 것은, 비단 그의 무절제한 환락생활로 불거진 백성들의 반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훈구파들은 백성들보다 더 큰 위기의식과 반감을 가졌다. 이에 훈구파들은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임금을 갈아 치우기로 결심한다. 임사홍(任士洪)과 신수근(愼守勤) 등 소수의 궁중파에 둘러싸인 연산군에게 훈구파의 공격을 막을 힘은 없었다.

연산군 재위 12년(서기 1506년) 9월, 중추부지사 박원종(朴元宗), 전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顔),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등 반정 삼대장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 연산군을 축출했다. 이것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이들은 권신(權臣) 임사홍, 신수근 및 그 아우 임사영(任士英)과 신수영(愼守英) 등 연산군의 측근들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했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이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대비(大妃)의 윤허를 얻어 연산군을 폐하고 대비의 아들 진성대군(晋城大君)을 맞아 국왕으로 옹립했다. 사림파는 물론 훈구파와 일반 백성들의 마음까지 잃은 연산군으로서는 이를 막을 대책이 없었다.

이로써 중종반정은 성공했다. 그러나 중종(中宗)은 반정 당일 자신의 사저를 둘러싼 반정군을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보낸 군사로 알고 자결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아무런 공로도 실권도 없었다. 또한 부인 신씨가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왕비로 추대되지 못하고 폐출되는 것도 막지 못했다.

따라서 중종 즉위 초는 중종반정의 논공행상인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이 주도했다. 그런데 정국공신은 그 숫자가 당초 101명에서 104명으로, 다시 117명으로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정확한 논공행상이 아니라 이런 저런 인연이 가미된 것이었다. 중종반정과는 무관한 유자광도 1등 공신에 책봉되었는데, 이는 훈구파의 지지 확대를 위해서였다. 이 밖에도 정국공신 중에는 실제 반정에 아무런 공이 없는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유례 없이 4등 공신을 신설한 이유는 이런 사적 인연으로 책봉된 인물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신들에게는 또 다시 막대한 부상이 수여되었다.

중종 재위 초반 사실상의 임금은 반정 삼대장이었다. 그러나 박원종은 1510년 4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2년 후에는 54세의 유순정이, 그 다음 해에는 53세의 성희안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중종은 이를 공신 중심의 정치지형을 바꾸는 계기로 활용했다. 성희안이 세상을 떠난 석달 후인 재위 8년 10월에 중종은 의정부 관노 정막개(鄭莫介)의 고변을 빌미로 정국공신 1등이었던 박영문(朴永文)과 신윤무를 참형에 처했다. 고변 외에 아무런 물증도 없이 두 1등 공신을 사형시킨 이 사건은 정국공신들의 심한 불만을 샀다. 그러나 중종은 공신들을 달래기 위해 상호군(上護軍)으로 봉했던 정막개의 벼슬을 빼앗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박영문, 신윤무를 제거한 중종은 훈구파 견제를 위해 사림파를 의도적으로 끌어들였다. 조광조(趙光祖)를 필두로 하는 사림파는 중종의 이런 구상에 의해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이 원하는 것인 강력한 왕권이었는데 비해, 조광조가 원하는 것은 강력한 왕권 그 자체가 아니라 지치정치(至治政治), 즉 도학정치(道學政治)였다. 훈구파 제거에는 뜻을 같이 했지만 중종과 조광조는 서로 종착점을 달리했던 것이다.


조광조는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갔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근처 회천으로 유배된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사화의 영향으로 성리학에 몰두해 있는 조광조를 보고 사람들은 화를 안고 있는 존재라는 뜻의 '화태(禍胎)'라 부르며 멀리했으나, 그는 성리학이 옳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 중종 재위 5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해 성균관에 들어간 그는, 중종 재위 10년(서기 1515년) 이조판서 안당(安唐)의 추천으로 조지서(造祗署) 사지(司紙)가 되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 해 가을의 중광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11월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이직되었다. 정언은 정6품직이었지만 임금에 대한 간쟁과 관료들에 대한 탄핵을 할 수 있는 대간의 중추적 자리였다.

사림파는 중종 재위 8년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 복위를 주장해 성사시켰는데 그 여세를 몰아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했다. 조광조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던 중종 10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가 세자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자 이를 폐비 신씨 복위의 계기로 삼은 것이다. 중종의 구언(求言)에 응하는 형식으로 사림파인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담양부사 박상(朴祥)이 의리를 내세우며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이는 훈구파의 신씨 폐위가 그릇되었다고 비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정과 박상은 신씨 복위에 실패하고 귀양에 처해졌으나, 이는 사림파의 선명성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림파는 조선 사회를 성리학적 질서로 개편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대궐부터 먼저 성리학적 생활방식으로 바뀌여야 한다고 여겨 아악(雅樂) 연주자를 여악(女樂)에서 남악(男樂)으로 대치하자고 주장했으며, 불교적 성격의 기신재(忌晨齋)와 됴교적 성격의 소격서(昭格署) 혁파 또한 주장했다. 사림파들이 기신재의 혁파를 주장한 것은 궁중의 비빈들이 기신재를 매개로 훈구파들과 결탁하고 있었고, 동시에 기신재의 재정이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와 관련되어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광조가 정권의 핵심으로 등장한 중종 재위 11년에 기신재 혁파와 거의 동시에 내수사의 이자놀이가 혁파된 것은, 이 두 문제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림파는 또 소격서가 하늘의 별이나 노자(老子)에게 제사 지내는 기구에 불과하다며, 중종 13년에 이를 혁파시켰다. 그런데 이 소격서 혁파는 중종을 강박해 이룩한 것으로서 중종과 사림파가 멀어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소격서 폐지 주청을 사림파는 이렇게 관철시켰다.

'이 때 부제학 조광조(趙光祖)가 면대하기를 청하여 몹시 주장했고, 그 이튿날 동료들을 거느리고 합문 밖에 엎드려 네번이나 장계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조광조는 승지를 보고 "이 일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오늘은 물러가지 않겠다." (중략) 닭이 울 때까지 아뢰기를 그치지 않으니 (중략) 이 때 승지 등이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으매, 모두 괴로워하고 싫증을 내었다. 임금이 자는 엄밀(嚴密)한 곳에 중사(中使)가 밤새도록 출입하여 번거롭게 아뢰기를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어찌 듣기 싫은 마음이 없으리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중종(中宗) 조 고사본말(古寫本末)'

사림파는 이념적 우위의 확보를 위해 문묘종사(文廟從祀)운동을 이용했다. 성균관의 공자(孔子)를 받드는 묘우(廟宇)의 종사 대상에 정몽주(鄭夢周)와 김굉필(金宏弼)도 포함시키자는 것인데, 여기에 둘이 종사된다는 것은 사림파의 이념이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종 재위 12년 8월 성균관 유생 권전(權傳)이 상소를 올려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여 선비들의 풍습을 개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관(史官)이 "그 뜻은 김굉필을 종사하게 하고 그것을 빙자해 당(黨)을 세우자는 데 있었다. 처음부터 정몽주를 위해 세운 계책은 아니다."라고 평가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훈구파는 문묘종사를 사림파의 정치적 공세로 파악했다. 훈구파는 정몽주와 김굉필을 따로 처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정몽주는 문묘종사의 대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어 가능하나, 김굉필은 자신의 학문 이론이나 저술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분리정책을 취한 것이다. 결국 중종 12년 9월, 정몽주만 문묘에 종사하는 것으로 정리되어 사림파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사림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조정에 자파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 실시를 주장했다. 현량과란 추천제에 의한 관료 선발 제도로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상당수 동료를 잃은 사림파가 과거를 통한 세력 확장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현량과라는 제한적 시험을 통해 자파를 대거 등용하려 한 것이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승진한 조광조는 중종 13년 2월 '초야에 묻힌 유일지사(遺逸之士)를 발굴하자며 현량과 실시를 주장했고, 중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에 따라 현량과 실시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가 의정부와 예조에서 논의되었다. 서울에서는 홍문관과 대간과 판서들이, 지방에서는 감사(監司)가 '학식과 덕행을 겸비한 자'를 천거하면, 그들을 전정(殿庭)에 모아 시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들은 성품, 그릇, 재능, 학식, 행실, 지조, 현실 대응의식 등 7개 항목으로 나누어 추천하게 했다.

그런데 전정에서 치르는 시험과목은 시국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책(對策) 한가지뿐이어서 사실상 면접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종 14년 4월, 드디어 조선왕조 사상 유일무이한 현량과가 실시되어, 천거된 120명 중에서 28명이 급제했다. 이 중 유일하게 7개 항목에 모두 추천되어 장원한 인물은 사림파인 전 장령 김식(金湜)이었다. 중종은 김식을 종3품인 성균관(成均館) 사성(司城)에 임명했다가 곧 한등급 높여 정3품 당하관인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전직인 성균관 장령(掌令)이 정4품이었으므로 보름 만에 2계급 승진한 것이다. 그러나 사림파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김식을 당상관인 성균관 대사성(大司城)에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림파는 김식을 성균관 대사성에 기용함으로써 미래의 관료들인 성균관 유생들을 자파로 포섭하려 했다. 중종이 김식을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했으나 사림파는 계속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할 것을 주장했고, 부제학의 적임자를 기다린 후에 대사성에 임명하자는 중종의 타협안을 거부하고 끝내 김식을 대사성으로 만들었다.

국왕을 압박해 성균관 대사성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사림파에 대한 중종의 호의가 흔들리는 시초가 되었다. 사림파는 이런 기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토지 문제에 손을 댐으로써 훈구파의 세력 기반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권세가의 토지침탈로 소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각지로 유망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에 대해, 사림파는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사림파는 중종 재위 10년 토지의 균등한 분배제도인 정전법(井田法)에 대해 논의했다. 중종 12년 7월 사림파가 우호적인 영사 신용개(申用慨)와 사림파 시독관 김구(金絿)가 "겸병(兼幷)을 막기 위해서는 한전법(限田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에 동조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된 토지 개혁안은 크게 둘로서, 하나는 50결로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한전제였고, 다른 하나는 미경작지에 대한 경작을 권유하는 권농책이었다. 그러나 50결 이상을 소유한 부호들에 대한 강제 규정이 없는 한, 한전법은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논의에서 중종이 시종 부정 내지는 방관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훈구파를 의식해서였다. 정전제든 한전제든 이는 모두 대토지 소유자인 훈구파의 기반에 손을 대는 것이었고, 연산군이 공신전에 손을 댔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음을 잊지 않고 있던 중종은 이를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림파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중종 13년 2월 사림파 장령 유옥(柳沃)이 "노비가 많은 자는 5~6천명까지 되는데, 이것은 마땅히 구수(口數)로 제한해 양민 수를 늘려야 한다."며 노비 숫자 제한을 주장했다.

그리고 드디어 사림파는 중종 정국에 남은 마지막 성역, 정국공신들에게 직접 칼을 들이댔으니, '위훈삭제(僞勳削除)'가 바로 그것이었다. 위훈삭제란 정국공신 중에서 아무런 공훈도 없이 공신에 책봉된 자를 가려내 공신의 작위를 삭탈하자는 주장이었다.

정국공신은 117명으로 늘어난 책봉 과정에서 뇌물이 오갔다는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책봉 자체에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반정 삼공신의 경우에 박원종가(朴元宗家)는 사촌인 박이검(朴而儉)과 박이온(朴而溫), 생질인 한세창(韓世昌), 한숙창(韓淑昌), 이맹우(李孟友)를 포함해 처남인 윤여필까지 여섯명, 유순정가(柳順汀家)는 아들 유홍(柳泓)을 필두로 조카인 유영(柳濚)과 생질, 이종사촌, 외숙과 사돈 등 7명, 성희안가(成希顔家)도 6명이 공신에 책봉되었었다.

중종 재위 14년 10월, 대사헌 조광조와 대사간(大司諫) 이성동(李成童) 등은 합사하여 정국공신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1등 공신 유자광을 비롯, 2, 3등 공신 중에도 공이 없이 책봉된 자가 많으며 '4등은 50여인인데, 다 공이 없이 함부로 기록된 자'라며 위훈삭제를 주장했다.

이는 사실상 훈구파의 세력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어서 중종도 이 상계를 듣고 크게 놀랐다. 자신을 임금으로 즉위시킨 세력은 공신들이었지,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아니었던 것이다.

중종이 허락하지 않자 조광조는 대간들을 거느리고 합문(閤文) 밖에 엎드려 청하며 물러나지 않았다. 중종은 계속 거부하다가 드디어 4등 공신 전원과 2, 3등 공신 일부를 포함해 총 76명에 이르는 공신들의 녹훈(錄勳)을 삭제했다. 전체 공신 117명 중 무려 65%에 달하는 숫자였다. 녹훈이 삭제되었으므로 공신책봉 대가로 받았던 전답과 노비 등도 모두 국가에 반납해야 했다.

이는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등장한 이후 거둔 가장 큰 정치적 승리였다. 하지만 불과 나흘간의 승리에 지나지 않았다. 승리의 들뜬 감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기묘사화라는 거대한 반작용이 밀려왔던 것이다.

● 을사사화(乙巳士禍)

중종(中宗)이 재위 39년만인 1544년에 사망하고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아들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조정은 둘로 갈라졌다. 제1계비 장경왕후의 친정 대윤(大尹)과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친정 소윤(小尹)으로 나뉜 것이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통으로 일주일만에 사망했지만 인종이 즉위하자 그 오빠 윤임(尹任)이 실권을 장악했다. 윤임은 무과로 관직에 진출했으나 평소 사림파를 동정해 인종 때에 사림파를 많이 등용했다. 유관(柳灌),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파가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도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은퇴한 사람들을 정권에 참여시킴으로써 사림파는 대윤의 지지로 재기의 길에 들어섰다.

즉위 직후 병에 걸린 인종은 와병 중에도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기준(奇準) 등을 복직시키고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했다. 그러나 재위 9개월만인 1545년 7월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남에 따라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인종이 아들 없이 죽자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 경원대군(慶元大君)이 즉위했다. 이때 그의 나이 12세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이때 문정왕후의 형제들인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이 권력 장악에 나섰다. 소윤은 중종 재위 34년에도 세자궁에 불을 질러 세자를 살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심지어 인종이 일찍 사망하자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기도 했다.

명종(明宗) 즉위 직후 윤원로는 윤임을 제거하기 위해 대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했다고 무고했다. 그런데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이 외척임을 빙자해 골육(骨肉)을 이간하는 망언이라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당해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대윤의 승리였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아들 명종을 대신해 섭정하는 상황에서 대윤의 승리는 오래갈 수 없었다.

윤원형은 이기(李起), 임백령(林百嶺), 정순붕(鄭順朋) 등을 끌어들여 윤임이 유인숙, 유관 등과 함께 중종의 여덟번째 아들 봉성군(鳳城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무고했다. 봉성군의 어머니 희빈 홍씨는 아버지 홍경주(洪景舟)와 함께 중종에게 참소하여 사림파를 몰아낼 기묘사화를 일으키는데 일조한 인물이란 점에서, 이는 소윤의 무고였다. 윤원형은 또 윤임이 성종과 숙의 하씨 사이에 난 계성군(桂城君)의 양자 계림군(桂林君)도 추대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계림군이 윤임의 삼촌 조카라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었다.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의 대윤은 이런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명종 즉위년인 1545년 8월 사사당하고 말았다. 사건은 확대되어 계림군과 김명윤(金明胤), 이덕응(李德應), 이휘(李輝), 나숙(羅淑), 나식(羅湜), 정희등(鄭希登), 박광우(朴光佑) 등이 처형되어 대윤과 일부 사림파가 다시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다. 그 직후 28인의 위사공신(衛社功臣)과 1400인의 원종공신이 녹훈되었다. 기묘사화의 여파를 극복하고 겨우 조정 한 귀퉁이에 둥지를 틀었던 사림파는 또 다시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을사사화 2년 후인 1547년에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남으로써 사림파는 또 다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것이 정미사화(丁未士禍)로, 보통 을사사화에 정미사화까지 포함해 설명된다. 양재역에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라는 내용의 벽서가 붙은 데서 비롯된 양재역 벽서사건은 을사사화에서 겨우 살아 남은 사림파들을 궁지로 몰았다.

을사사화 당시 어리다는 이유로 살아 귀양을 갔던 봉성군과 송인수(宋鱗壽), 이약빙(李若氷) 등 3명이 사형당하고 이언적 등 3명은 극변안치(極邊安置), 임형수(林亨秀), 노수신(盧守愼) 등 4명은 절도안치(絶島安置), 권응정, 권응창 등 8명은 먼 지방 부처(付處), 권벌, 송희규, 백인걸 등 14명은 중도부처(中途付處)의 형을 받았다.

1548년에는 전 사관(史官) 안명세(安名世)가 "중종의 소상(小詳)도 지나지 않았고 인종의 발인(發靷)도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빈전(殯殿) 옆에서 대신들을 죽였다."는 사초를 남겼다가 사형당했다. 이듬해에는 이홍윤(李洪胤)의 고변에 의한 옥사가 일어났다. 이홍윤은 윤임의 사위이자 홍남(洪南)의 동생이었는데, 이홍윤은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영월(寧月)에 귀양 가 있던 홍남이 "연산군이 사람을 많이 죽이더니 중종반정을 당했다. 지금 임금도 사람을 많이 죽이니 어찌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겠느냐?"라고 말했다며 고변해, 형 홍남과 그 문인들을 대거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명종의 즉위와 함께 잇따른 옥사로 사림파는 다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을사사화를 비롯한 명종(明宗)대의 옥사는 좁게는 외척 간의 대결이었지만, 넓게는 사림파라는 정치세력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이었다. 외척이라는 혈연관계를 매개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세력에게 공도(公道)와 공론(公論)에 입각한 도의정치의 실현을 주장하는 사림파는 자신들의 이해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제거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사림파의 집권

훈구파는 여러차례의 사화로 사림파를 축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소수 공신집단이 독점하는 정치체제는 역사 발전에 의해 그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1553년 명종이 20세의 성인이 되자 문정왕후는 그 해 7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국정에 관여하기는 했으나 수렴청정할 때에 비해서는 한계가 있었다. 문정왕후는 성리학국가 조선을 불교국가로 만들기 위해 보우(普雨)를 중용하는 등 불교 우대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수많은 사대부가 사화를 당함으로써 그녀의 불교 중시정책은 빛을 바랬다. 문정왕후는 156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후 소윤의 핵심 윤원형은 교하(交河)로 장음(江陰)으로 도망 다니다가 아내 난정과 함께 자결하고 말았다.

을사사화를 겪은 명종 재위기는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마지막 대결기간이었다. 이 대결에서도 사림파는 훈구파에게 패배했으나 문정왕후 사후 사림파의 집권은 역사적 대세가 되었다. 훈구파로서도 더 이상은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만한 수단을 갖지 못했다. 성종 때로부터 약 100여년만에 그리고 고려 말기 조선 초기의 온건개혁파 신진사대부로부터는 약 170여년만에, 사림파는 조선 정계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이는 선조 원년 조광조에게 영의정이 추증됨으로써 더욱 분명해졌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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