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강론」34.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均役法)

개마기사단201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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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대부가 군역(軍役)의 의무를 지지 않은 것은 군역제도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는 결국 국방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양반도 새로이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으나 양반 사대부들은 이를 여전히 거부했다. 조선은 또한 부유한 양반 지주나 가난한 전호(佃戶)나 같은 액수의 공납의 의무를 졌는데, 이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커다란 고통이었다. 그래서 공납폐와 군역폐를 시정하려는 여러 시도가 국왕과 양심적인 관료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공납폐의 해결에는 대동법(大同法)이라는 근본적인 치유책이 시행되었으나, 군역폐는 균역법(均役法)이라는 지엽적인 해결책으로 귀착됨으로써 계속적으로 문제를 낳았다.

● 조선 관군이 무력화된 이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조선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녀졌던 이유는 군역제도의 붕괴 때문이었다. 이 군역제도의 붕괴에는 의무는 없고 특권만 있는 사대부들의 특권의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의 세법(稅法)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토지에 대한 조세(租稅), 개인에 대한 신역(身役), 가호(家戶)에 대한 공납(貢納)'이 그것이다. 일반 백성들은 조세와 신역과 공납의 의무를 모두 진 반면, 사대부는 신역의 의무에서 면제되었고 공납도 일반 백성들에 비해 아주 헐하게 부담했다. 이 중 신역이 군역(軍役)과 부역(賦役)을 뜻하는 것으로, 양인(良人)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정병(正兵)과 봉족(奉足)으로 구성되는 병역의 의무를 졌지만, 양반 사대부들은 그 대상에서 면제되었다. 즉 병역 의무에서 면제되었던 것이다.

조선 군사제도의 기본은 세조(世祖) 때 정착된 진관(鎭管)체제였다. 이는 중앙은 오위(五衛)가 방어하고 지방은 진관이 방어하는 체제였다. 진관체제는 각 도의 주요 지역을 거진(巨鎭)으로 삼고 주변의 여러 진을 거진에 소속시켜 유사시에 각 진관이 독자성을 살려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조선 초, 중기에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각 관아에서는 농민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대신에 포(布)를 받고 군역을 면제시켜 주는 편법이 횡행했다. 관아에서는 납부받은 포보다 낮은 가격에 다른 사람을 고용해 군역 의무를 지우면서, 거기서 나오는 중간 차액을 사용했다. 즉 포를 받고 대신 군역을 지는 대역자(代役者)에게 군역을 부담하면서 중간 과정에서 대립가(代立價)의 의 차액을 챙겨 관아 비용에 사용하거나 개인적으로 착복했던 것이다. 이를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라 하는데,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각 관아에서 공공연히 시행했으므로 피할 수 없는 추세가 되어 1541년에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로 명칭이 바뀌면서 합법화되었다. 군적수포제의 합법화는 재산이 있는 양인들은 합법적으로 군역 의무에서 면제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군적수포제는 지방 수령이 군역 의무자에게서 포를 징수해 올리면 병조(兵曺)에서 이를 다시 지방에 나누에 보내 군사를 고용하게 한 제도였다. 그 전 과정, 즉 지방 관청에서 포를 징수하는 과정, 중앙에 올리는 과정, 분배된 포로 군사를 모집하는 과정 하나 하나가 바로 부정의 온상이었다.

군적수포제의 더 큰 문제는 군포 징수에 성역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일반 양인(良人)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정병(正兵)과 봉족(奉足)으로 구성되는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지만, 양반 사대부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중인과 노비들은 따로 신역(身役)이 있었으므로 결국 일반 농민들만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던 것이다. 군역 의무에서 면제된 양반들은 자연히 군포 납부의 의무도 없었다. 더구나 군적수포제가 실시된 후에는 군포를 내느냐 내지 않느냐가 양반과 일반 양인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군역 의무에서 면제된 계층이 사회의 지배층이 되는, 가치관의 전도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양란(兩亂) 이후 양반의 수효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양반층의 군역 면제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양반의 수효가 증가한 직접적 원인은 납속책(納粟策)과 공명첩(空名帖)의 남발에 있었다. 납속책이나 공명첩은 국가에 쌀이나 포를 헌납하면 그에 상응하는 벼슬을 주는 것이었다. 일부 부유한 농민들은 군역의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납속책과 공명첩을 매입했다. 그런데 납속책이나 공명첩은 쉬쉬하며 발행한 것이 아니라, 조정에서 공개적으로 시행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다음 해인 1593년 호조(戶曹)가 비변사(備邊司)의 계사에 따라 '납속사목(納粟事目)'을 제정해 반포한 공개적인 것이었다.

'향리는 3석(石)이면 3년간 역(役)을 면제하고 (중략) 30석이면 향리의 역을 면제하여 참하(參下)의 영직(影職)을 제수하고 (중략) 80석이면 동반의 실직(實職)을 제수한다. (중략) 서얼(庶孼)은 5석이면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 혹은 서반(西班) 군직(軍職)의 6품을 주고, 15석이면 허통(許通)하고 (중략) 90석이면 동반 7품, 1백석이면 동반 6품을 제수한다.

선조실록(宣祖實錄) 26년 2월 16일조'

이렇듯 납속책에 따라 서얼이나 향리는 돈만 있으면 벼슬을 받아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공명첩에 의한 벼슬은 실무(實務)는 보지 않고 명색만으로 행세하기 되지만 양반은 양반이므로 군역 의무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흉년이 들자 공명첩 2만장을 8도에 나누어 팔게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많을 경우 한번에 수만장의 공명첩이 발행되었다. 납속책과 공명첩의 남발은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양인이라면, 대부분 양반이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재력 있는 농민들은 박지원(朴趾源)이 양반전(兩班傳)에서 풍자했듯이, 가난한 양반으로부터 족보를 살 수도 있었다.

이런 경로를 거쳐 양반의 수효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대구 지역의 경우 숙종(肅宗) 때인 1690년대만 해도 양반의 비율은 9.2퍼센트였고 양민이 53.7퍼센트, 노비가 37.1퍼센트였는데, 약 1백년 뒤는 1783년에 이르면 양반은 37.5퍼센트로 급격히 늘어난 반면, 노비는 5.0퍼센트로 급감했다. 이는 노비들이 양인으로, 양인들이 양반으로 신분 상승한 결과였다. 그 후 약 70년 뒤 철종(哲宗) 때인1858년에는 양반의 비율은 70.3퍼센트로 수직 상승한 반면, 양민은 28.2퍼센트로 급감했고 노비는 1.5퍼센트로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한 비율로까지 줄어들었다. 즉 양반은 급격히 증가한 반면, 일반 양민과 노비는 급격히 감소한 것이다.

양반의 증가는 국민 다수의 신분 향상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나쁠 것이야 없겠지만, 문제는 이들에게 병역 의무의 면제라는 특권이 뒤따른다는 점이었다. 사실 양인들은 이 특권 때문에 기를 쓰고 양반이 되려고 했다.

부유한 양인들이 양반으로 신분 상승해 감에 따라, 가난한 양인들이 이들의 군포까지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야말로 부자는 군포를 안 내고, 가난한 양인들은 등골이 휘도록 일을 해서 이중, 삼중으로 내야했던 것이다.

여기에 양란 이후 군사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문제가 가중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진관체제의 불합리함을 깨달은 조정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했는데, 포수, 살수, 사수로 편재된 삼수병이 주요 구성원인 훈련도감은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직업 군인들이었다. 그 후 이괄(李适)의 반란을 계기로 어영청(御營廳)을 설치했고 경기 일대의 방위를 위해 총융청(摠戎廳)을 설치했으며, 정묘호란 뒤에는 남한산성에 수어청(守禦廳)을 설치했고, 17세기 말에는 수도 방위를 위해 금위영(禁衛營)을 설치함으로써 군영이 5개로 늘어나는 상황이 되었다.

군사는 늘어나는데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할 양인의 수는 줄어드는 모습은 당연히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 제기되었다.

●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과 그 반대들

영조(英祖) 재위 28년(서기 1752년) 병조판서 홍계희(洪啓禧)가 대리청정(代理聽政)하는 사도세자(思悼世子)에게 올린 균역(均役)에 대한 보고서에는 이런 문제점이 잘 드러나 있다.

'지금 백성들 가운데 양역(良役)에 응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내(畿內), 삼남(三南), 해서(海西), 관동(關東), 여섯 도(道)의 1백 34만 민호(民戶) 중 잔호(殘戶), 독호(獨戶) 72만을 제하고 나면, 실호(實戶)는 겨우 62만입니다. 그런데 사부(士夫), 향품(響品), 부사(府史), 서도(胥徒), 역자(驛子) 등 양역을 부과할 수 없는 자가 5분의 4나 되기 때문에, 양역에 응하는 사람은 단지 10여만뿐입니다. (중략) 이들은 세업(世業)도 없고 전토(田土)도 없어 모두 남의 전토를 경작하고 있기 때문에 1년에 수확하는 것이 대부분 10석을 넘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 반을 전토의 주인에게 주고나면 남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중략) 비록 날마다 매질을 가하더라도 바칠 수 없는 계책이 없어 결국에는 죽지 않으면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28년 1월 13일조'

홍계희는 군역의 폐단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5분의 4가 군역에서 면제되고, 남의 토지를 경작해 먹고 사는 전호(佃戶)들만 중복 부담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도망한 자와 죽은 자들은 또 그 대신으로 충당시킬 방법이 없어 이에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황구첨정(黃口簽丁)의 폐단이 있게 되었으며, 다라서 징족(徵族), 징린(徵隣)하게 되어 죄수들이 감옥에 가득하게 되고 원통하여 울부짖는 것이 갈수록 심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양역을 변통시키자는 의논이 있게 된 이유입니다. 변통시키자는 이야기로는 네 가지가 있는데, 호포(戶布), 결포(結布), 구전(口錢), 유포(游布)입니다. 하지만 각기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있어 귀일시킬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28년 1년 13일조'

이런 군역패를 해소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국민개병제(國民開兵制)를 실시하면 되는 것이다. 즉 양반도 군대를 가면 해결될 것이었다. 대신 가난한 백성은 군역을 면제시켜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홍계희의 말처럼 사실 가장 가난한 10만여호가 부유층이 포함된 134만호의 군역을 홀로 지게 되니, 이들의 고통도 눈물겨우려니와 국방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도망가거나 도적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조정은 숙종(肅宗) 재위 28년(서기 1702년) 양역이정청(良役履正廳)을 설치하고 양역폐 개선에 대해 논의했다. 논의 결과 군문(軍門)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 양역폐 발생의 근본 문제라고 여겨, 5군영 중 하나를 철폐하거나 각 군문의 군사 수를 축소하는 군제변통론(軍制變通論)을 제시했다. 국왕 숙종도 1개 군문 철폐에 동조했으나 나중에는 국왕 경호[侍衛]가 약화된다는 이유로 반대로 돌아섰다. 그래서 각 군문의 숫자를 약간씩 감축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5군영의 불요불급한 군사 3만 7천여명을 감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해서 양역폐 개선을 위한 논의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역대 국왕 중 군역폐 해소를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노력한 임금은 영조였다. 그는 재위 18년(서기 1742년)에 양역사정청(良役査正廳)을 다시 설치해 군역폐 시정에 나섰다. 숙종 때에 논의된 군제변통론이 양반의 특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군문의 수를 줄이거나 군사의 수를 줄여 양역폐를 부분적으로 개선하자는 소변통(小變通)이었다면, 영조 때에 제기된 양역개혁론은 양역폐의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대변통(大變通)이었다.

양역변통에 관한 방법으로는 홍계희가 지적한 대로 유포론(游布論), 호포론(戶布論), 구전론(口錢論), 결포론(結布論)의 네 가지가 있었다.

유포론은 군역 기피자를 색출해 군역의 의무를 지우자는 것이었고, 호포론은 호를 단위로 양반 사대부들에게서도 군포를 받자는 것이었다. 유포론은 직책이 없이 놀고 있는 양반들에게 군역을 부담시키자는 다소 타협적인 안으로서, 호를 단위로 양반들에게서 군포를 받자는 내용의 호포론보다는 약한 개혁론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양반 사대부들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 송나라의 왕구(王球)가 말한 "사대부와 서민의 구별은 국가의 헌법이다."라는 사대부 특권의식에서 나온 숭유양사론(崇儒養士論)을 들어 반대했다.

호포론이 양반 개인이 아닌 가호를 단위로 포를 받을 것을 주장했음에도 양반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발을 받았음을 생각해 보면, 양반 개인을 단위로 돈을 받자는 구전론이 더 큰 반발을 샀을 것임은 물론이다. 호포론과 구전론이 양반층의 반발로 무산되자 마지막으로 대두된 것이 결포론이었다. 결포론은 수포(收布) 대상을 인정(人丁) 단위에서 전결(田結) 단위, 즉 사람 단위에서 토지 면적 단위로 전환하자는 것이었다. 부과 단위를 토지 면적의 과다로 변경함으로써 토지가 많은 백성들은 많이 내고, 토지가 없는 백성들은 면제하자는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가 잇달았다. 영조는 재위 26년 5월,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직접 백성들과 유생들을 만나 호포론과 결포론 중에서 어느 것이 나은지를 묻고 이렇게 말했다.

"아! 오늘의 신민(臣民)은 열성조(列聖朝)께서 애휼(愛恤)하셨던 자들이다. 모든 부형(父兄)이 항상 아끼던 세간을 아들이나 아우에게 주면, 아들과 아우된 자는 아끼고 보호하여 혹시 상하기라도 할까 항상 걱정하는 법이다. 하물며 억조(億兆), 사서(士庶)를 어찌 아끼고 보호하는 세간에 비교하겠는가? 부르짖고 원망하여 바야흐로 도탄 속에 있어도 구해내지 못하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조(先祖)의 영령을 대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영조실록(英祖實錄) 26년 5월 19일조

영조는 이렇게 눈물을 보이면서까지 호포제나 결포제를 시행하려고 했지만 양반들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낙착된 것이 균역법(均役法)이었다. 균역법인 양인 농민의 군포 부담을 반으로 줄이자는 감필론(減疋論)을 기반으로 제정된 법이었다. 균역법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이익이 충돌했던 군포에 대해, 왕실과 양반 사대부 등 지도층이 약간의 양보를 하는 개량적 방안이었다.

농민들이 연간 2필씩 부담하던 군포는 1필로 줄어들었다. 반감된 군포 수입은 결작미(結作米)와 어염선세(漁鹽船稅), 은여결세(隱餘結稅),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등을 보충하게 되었다. 결작미는 양반들이 주로 부담하는 것으로서 평안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전국의 전결(田結)에 1결당 쌀 2두(혹은 돈 2전(錢))을 부과 징수하는 것이었고, 어염선세는 본디 왕실에 속해 있던 것을 조정의 재정으로 돌린 것으로 왕실이 양보한 것이었다. 은여결세는 전국의 탈세전을 적발해 부과한 것이었고, 선무군관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군포 부담에서 벗어난 양민들을 선무군관으로 편성한 것으로서 전국에서 2만 4천 5백여명이 새로이 편입되었다.

균역법은 정작 양역변통의 목적이었던 양반에 대한 과세는 관철시키지 못한 채, 양반들이 다수였던 토지 소유자에게서는 결작을 징수하고, 왕실로부터는 어염선세를 양보받음으로써 일반 농민의 군포 부담을 반감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개량적 방법의 균역법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토지에 부과되었던 결작미 부담이 전호에게로 떠넘겨지고, 조정의 군액 책정이 늘어남으로써 농민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신분제의 해체라는 시대정신과 역사 발전 방향을 무시한 미봉책이었던 균역법은 두고두고 가난한 농민들을 괴롭혔다. 이는 세도정치시대 농민들의 전면적인 저항, 곧 민란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9세기 중엽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뒤늦게 호포법을 실시해 양반들에게도 군포 의무를 지웠으나, 1백년 이상 역사 발전을 가로막았던 오류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공납의 폐단과 그 해소책

조선의 3대 세법 중 조세(租稅), 즉 전세(田稅)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치면서 1결당 최하 세율인 4두를 받는 것이 관례화되어 효종(孝宗) 때에 1결당 4두를 걷는 영정법(永定法)으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1결당 4두의 전세는 그리 무거운 부담이 아니었고, 사실상 공납이 가장 큰 부담이었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국가 수입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지닌 세원(稅源)이었다.

그러나 공납은 많은 폐단을 안고 있었다. 그 종류가 수천 가지에 달했으며, 어느 군현에는 그 곳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다. 이 경우 먼 지역가지 가서 그 산물을 사다가 납부해야 했다.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되는 시기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부과 단위가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공납은 군현, 마을 단위로 부과되어 가호(家戶) 단위로 분배되는데, 각 군현의 백성 수와 토지 면적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납부과대장인 '공안(貢案)'에 정해져 있는 액수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인구가 적은 소읍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컸다는 얘기다. 게다가 가호 단위로 부과함으로써 가난한 전호(佃戶) 집안이나 부유한 전주(田主) 집안이나 같은 액수를 부담했으니, 송곳 꽂을 땅 한평 없는 가난한 빈궁민들에게는 가혹한 세금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방납(防納)의 폐단이 더욱 농민들을 괴롭혔다. 방납업자는 공납 대리납부자를 뜻하는데, 이 경우 '놓일 방(放)'자가 아니라 '막을 방(防)'자를 쓰는 이유는 방납업자라는 직업이 농민들의 공납 납부를 막으며 사리를 취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방납업자들은 공납을 받아들이는 경아전의 관리들과 짜고서, 농민들이 직접 납부하는 공물을 퇴짜 놓고 자신들이 마련한 공물을 농민들에게 팔아먹었다. 문제는 이들이 농민들에게서 폭리를 취한다는 데 있었다. 방납업자들은 관료들과 결탁해 방납의 대가로 실제 공물가보다 훨씬 높은 값을 받는, 이른바 관상유착(官商癒着)을 행했다. 대동법(大同法)의 정치인 잠곡(潛谷) 김육(金堉)은 인조(仁祖) 재위 16년에 충청감사로 있을 때, "공납으로 바칠 꿀 한 말의 값은 목면(木綿) 3필(匹)인데 인정(人情)은 4필이며, 양 한 마리의 값은 목면 30필인데 인정은 34필이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인정이란 다름 아닌 방납업자들의 수수료로서, 방납업자와 관료가 짜고 나누어 먹는 농민들의 피땀이자 고혈이었다.

공납과 군역의 폐단 때문에 양인 농민들이 도망하자 관청은 족징(族徵), 인징(隣徵) 등을 실시했고, 이 때문에 한 가족, 한 마을이 모두 도망가 마을이 텅 비는 경우도 있었다.

공납이 이런 문제점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 폐해를 조정하려는 논의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어 왔다. 공납과 신역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유망으로 일부 군현들은 행정 단위로서 존속하기 곤란한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조선 중기 이후 '도망한 농민 중 강한 자는 도적이 되고 약한 자는 중이 된다.'는 말이 유행한 것은, 당시 농민의 유망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명종실록(明宗實錄) 15년 12월조에 대신들이 "서울 도성 안에서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 나누어 가지는 것만 이롭게 여겨 도적떼를 숨겨주는 자들이 빈번히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국가의 기본 체제가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을 말해준다. 농민들이 대거 유망해 도적떼가 되어 체제를 위협하는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집권층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대책이란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벼슬아치 중 공납 폐해 시정을 제일 먼저 주장했던 인물은 중종(中宗) 때의 개혁정치인 조광조(趙光祖)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그런 구상을 실천에 옮길 기회도 없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사되고 말았다. 이후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남인 재상 이원익(李元翼)이 공납 폐해 시정을 주장했다. 율곡이 주장한 것은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으로서, 수많은 공물 대신에 쌀로 통일해 받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너 공납폐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은 대공수미법은 당시 양반 사대부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부과 기준을 가호가 아닌 토지 결수로 삼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가호를 기준으로 할 경우 부유한 양반 전주나 가난한 전호나 다 같은 액수의 세금을 내야 하지만,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에는 토지가 많은 양반 전주일수록 많은 액수의 세금을 내야 했다. '소득 있는 곳에 과세 있다.'는 조세정의(組稅正義)에 가까운 이 법의 시행은 따라서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년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한 것은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선혜청을 설치했다. 처음에 영의정 이원익이 아뢰기를, "각 고을의 진상과 공물이 각 관청의 방납인에게 막혀, 한 물건의 값이 3~4배 또는 수십, 수백배까지 징수되어 그 폐해가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 특히 경기도가 심합니다. 지금 별도의 담당 관청을 설치하여 매년 봄, 가을에 백성들에게 쌀로 거두되, 토지 1결마다 두번에 걸쳐 각각 8두씩 거두어들이게 하고 담당 관청은 수시로 물가시세를 보아 쌀을 방납인에게 지급하여 물건을 조달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또한 때를 보아 전체 16두 가운데 2두를 지방에 내려주어 수령의 공, 사비용으로 쓰게 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중략)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왕의 교지 가운데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어 담당 관청의 이름으로 삼았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즉위년 5월조'

여기서 대동법 담당 관청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란 뜻의 선혜청(宣惠廳)인 것은 조세정의에 가까운 이 법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어쨌든 이런 경로를 거쳐 대동법(大同法)은 경기도에 실시될 수 있었다. 대동법은 잡다한 공납을 전세화(田稅化)해서, 전지 1결당 백미(白米) 12말[斗]을 징수하는 것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이었다. 조정이 이를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배분해 연간 소요 물품과 노동력[役力]을 민간으로부터 구매한다는 것이 대략의 골자였다. 대동법은 인조 재위 원년 강원도로 확대 실시되었지만 다른 지역까지 확산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대동법에 찬서아는 관료들과 반대하는 관료들 사이에 논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대동법이 가장 필요한 전라도, 총청도, 경상도 등 하삼도(下三道)는 양반 전주들의 큰 반발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대동법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건 정치인이 있었으니, 바로 김육(金堉)이었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인조 재위 16년(서기 1638년) 9월,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했으니 본도(本道)에 시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라며 충청도에 확대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인조도 찬성했으나 이 법의 시행에 반대하는 관료들이 많아 이런 저런 명목으로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자 김육은 효종 즉위년 11월, 다시 대동법 확대 실시를 주장하는 상차를 올렸다.

'왕자(王者)의 정사(政事)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한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중략) 대동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비록 여러 도(道)에 두루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전(畿甸)과 관동(關東)에 이미 시행하여 힘을 얻었으니, 만약 또 양호(兩湖)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효종실록(孝宗實錄) 즉위년 11월 5일조'


'양호 지방의 전결이 모두 27만결로 목면이 5천 4백동(同)이고 쌀이 8만 5천석이니, 수단이 좋은 사람에게 부쳐 규획하여 조치하게 하면 미포(米布)의 수가 남아 반드시 공적인 저장과 사사로운 저축이 많아져 상하가 모두 충족하여 뜻밖의 역(役) 역시 응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탐욕스럽고 교활한 아전이 그 색목(色目)이 간단함을 혐의하고 모리배(牟利輩)들이 방납(防納)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교란시킬 것이니, 신은 이 점이 염려됩니다.'

김육은 이 별폭에서 대동법 시행이 농민 생활의 안정은 물론 국가 재정의 확충에도 도움이 됨을 역설했다. 농민 생활의 안정을 기하면서 국가 재정도 튼튼히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세법이었던 대동법은 그러나 대토지 소유자들인 양반 지주들의 반발로 쉽게 시행할 수 없었다. 이들은 '벼를 찧어 쌀을 만드는 작미(作米)에 어렵기 때문'에 대동법에 반대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등의 갖가지 명분을 들어 대동법을 반대했다. 이는 김육이 '서울과 지방 사람들 중에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기는 자는 다만 방납모리배(防納牟利輩)뿐'이라고 반박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동법 실시를 꺼려하는 기득권층의 방해일 뿐이었다.

김육은 효종에게 "삼남(三南)에는 부호가 많습니다.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드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영(命0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마당히 소민(小民)들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부호들이 꺼려서 백성들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라며 확대 실시를 주장했으나, 양반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친 효종은 확대 실시를 주저했다. 김육은 또,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早隷)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며 배수진을 쳤다.

그러자 대동법 반대 세력들은 김육이 방자하다며 공격했고, 효종 재위기 초의 조정은 이 문제 때문에 둘로 갈렸다. 조정 내에서 김육의 주장에 동조하난 사람은 소수였다. 좌의정 조익(趙翼)과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 형제 정도가 찬성했고, 이조판서 김집(金集),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 호군(護軍) 정세규(鄭世規), 집의(執義) 송시열(宋時烈) 등 대부분의 관료들은 반대했다.

대동법 반대론자들도 농민의 유망이 심각한 현상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대동법 시행론자들과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농민의 유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호패법(號牌法)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호패법을 철저히 시행해 농민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유망을 방지하자는 주장이었다. 대동법과 호패법이 동시에 주장되었다는 사실은, 양반 관료들의 자리에서는 대동법을 시행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든지, 호패법을 강화해 농민들의 도망을 막든지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김육의 강력한 실시 주장에 효종은 대신들에게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이 원망하니, 그 원망의 대소(大小)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소민의 원망이 더 큽니다."라고 대답했고, 효종은 " 그 대소를 참작해서 시행하라."고 결정했다.

대동법 시행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었던 김육은 이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김육을 공격하는데 선두에 선 인물은 이조판서 김집이었다. 김집은 그의 아버지 김장생(金長生)의 학통을 이어받은 율곡 이이의 직계 학맥으로서, 송시열, 송준길 등 많은 문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김집은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송시열, 송준길 등 자신의 제자들을 출사시켰는데, 이들이 김육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이 때문에 집권 서인들이 둘로 갈리기도 했다.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당이 갈린 사실은 조선시대의 당쟁이 사대부들 내부의 관념적 논쟁만이 아니라, 때로는 국가의 정책 방향을 둘러싼 대립의 산물이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대동법 시행에 반대한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이 모두 연산(連山), 회덕(懷德) 등 산림 사람들이란 이유로 산당(山黨)이 되었고, 대동법 시행에 찬성한 김육, 신면(申冕) 등이 한강 이북에 산다는 이유로 한당(漢黨)이 되었다.

김집, 송시열 등이 율곡의 학통을 이었다고 하면서도 실제 내용에서는 율곡이 주장한 대공수미법에 반대하고, 경장을 주장한 율곡의 역사인식을 무시했으며,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 갖는 현실 개혁적 성격을 멸시하고 기득권 유지책만을 고집했음을 살펴볼 때,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학통이나 혈연이 아니라 그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동법 논쟁은 양반 지주들의 대폭적 양보를 통해 농민 생활의 안정과 국가 재정의 확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려는 정치세력과, 양반 지주의 입장과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세력의 대결이었다. 비록 시행 반대론자들이 더 많았지만 대동법 시행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었다.

대동법은 1651년에 충청도에 확대 실시된 데 이어 1658년에는 전라도 해읍(海邑), 1662년에는 전라도 산군(山郡), 1666년에는 함경도, 1677년에는 경상도에 확대 실시되었으며, 1708년에는 드디어 황해도에까지 확대 실시됨으로써 전국적인 법이 되었다. 광해군 즉위년(서기 1608년)부터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되기까지 무려 1백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대동법의 흐름은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대동법을 시행해 본 결과 과거의 공납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산당 영수 송시열도 효종(孝宗)이 "호서(湖西)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니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한가?"라고 묻자, "편리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니 좋은 법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 이를 말해준다.

1백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걸렸지만 대동법의 전국적 확대 실시는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보이는 진보주의의 승리라 할 것이다.

● 대동법이 가져온 변화들

대동법이 가져온 변화는 컸다. 대동법은 하나의 세법에 불과했지만 이 법은 세정 분야뿐만 아니라 조선의 경제 전반과 심지어 신분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우리 역사상 하나의 법이 이처럼 큰 영향을 미 친 예로는 이성계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한 뒤 실시한 과전법(科田法)을 제외하면 대동법(大同法)이 유일하다.

조선 후기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공납제 시절의 농민 부담에다 대동세를 더하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이는 세도정치 때의 일이고 시행 당시에는 많은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

대동법이 가장 큰 영향을 미 친 분야는 경제 분야였다.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조정은 과거 공납으로 충당하던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를 수립해야 했는데, 이런 필요에 따라 공인(貢人)이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공납 물품 납품업자인 공인들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세력이었다. 공인들은 공물주인(貢物主人), 시전상인(市癲商人), 기인(基人), 경주인(京主人) 등 이전에도 공납과 직, 간접으로 관계가 있던 사람들이 주로 지정되었는데, 이 외에도 각 관사에 소속되어 있는 원역(員役), 차인(差人), 감고(監考)와 각 관사의 하인들도 일부 지정되었다.

공인들은 납품할 물건값을 선불로 받는 특혜를 누리기도 했기 때문에 상당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자본을 축적한 일부 공인들은 선대제(先貸制)로 수공업자를 지배하기도 했다. 선대제란 수공업자에게 자재값을 대주어 물품을 제작케 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상인자본의 수공업지배의 한 형태로서 주목된다. 경우에 따라 선대제는 서양의 자본주의 발달사 초기에 나타나는 상인자본가의 원초적 형태와 같은 성격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대동법이 촉진시킨 경제 발전이 조선 사회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근대화를 지향하는 씨앗이 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대동법은 한국 사회가 고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정체되어 있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조선 사회 내부에 근대화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문제는 경제면에서 촉발된 이러한 근대 지향적인 움직임이 정치체제의 왜곡된 구조로 인해 그 발전이 억압된 점이다. 농업 생산력과 상업의 발달은 사회 하부에서부터 신분제의 해체를 요구했다. 실제로 조선 후기 양민들은 스스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분 상승에 나서 양반층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다. 이제 조선은 사회 발전을 가로 막는 신분제를 해체하고, 보다 개방된 사회, 보다 다양화된 사회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양반 사대부들은 신분상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신분제 해체에 반대했다.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변화의 기운을 조선의 폐쇄적인 정치체제가 억누름으로써 조선 사회의 발전은 심하게 왜곡되었다. 결국 이는 조선의 정치가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역할했음을 의미한다. 즉 조선의 정치체제가 나라를 퇴보로 이끈 주역이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상공업 발전

대체로 조선 봉건사회가 이 시기에 이르면 민족의 내재적 역량에 의해 해체 과정을 밟는 한편, 점차 자본주의에 다가간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런 경제변동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배층의 노력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자발적 움직임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조선 후기 농민들은 양란(兩亂)으로 황폐화된 농토를 복구하고 새로운 농지를 개간했으며 수리시설을 복구했다. 나아가 영농기술을 개선하고 새로운 작물을 재배했다. 이런 발전을 선도한 일부 농민들은 임노동자를 고용해 농사를 짓는 경영형 부농으로 성장, 보다 넓은 경지를 경작하는 광작(廣作)을 시행하기도 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은 지주(地主), 전호(佃戶)관계에서도 반영되어 도조제(賭租制)를 기반으로 전호권이 성장해 갔으며, 상공업의 발달도 촉진시켰다. 관영수공업이 쇠퇴한 반면, 민영수공업이 발전했고 사채(私採) 또는 잠채(潛採)의 형태로 은광이 개발되어 청나라에 수출되기도 했다. 특히 대동법 시행 이후 등장한 공인(貢人)들은 수공업자를 선대제(先貸制)로 지배하는 상업자본주의의 원초적 형태를 보이기도 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수공업의 발달은 상업의 발달을 불러왔다. 농업, 수공업, 광업 등에서 생산력이 크게 증대하면서 잉여 생산물의 유통이 크게 불가피해졌는데, 이를 위해 전국 각지에 장시(場市)와 포구(浦口)가 개설되고 그 결과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되었다. 민중이 주도한 이런 움직임들은 단지 경제적인 변화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경제체제, 즉 자본주의를 향한 내재적 움직임이라는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의 왜곡과 외세의 침략으로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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