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1905년 9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주선으로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했는데,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이 조약은 열강이 일본의 한국 침략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이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우월적 지위를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일본은, 1905년 11월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해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保護國)'화 하려는 계획을 노골화했다. 외교권 박탈을 주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은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 주재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한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치밀한 계획 속에서 추진되었다. 여기에 내각에 책임을 떠넘긴 고종의 우유부단함과 친일파 관료들의 동조가 가세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반대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책임을 황제 고종(高宗)에게 미루며 찬성했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고종이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자 일본 군인들은 외부대신 박제순의 직인을 확보하여 강제로 날인해 버렸다. 당시 대한제국은 황제가 외국과의 조약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재가(栽可)가 없는 이 조약은 당연히 무효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조약을 유효라고 우기고 나섰다. 이것을 을사조약(乙巳條約)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불법적인 '늑약(勒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을사조약 체결로 인하여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으며,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외교권을 대신 행사했다.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해 을사조약 체결 사실을 알렸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조약체결 거부운동(條約締結拒否運動)이 일어났다.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해 이유승(李裕承), 법부주사(法部主事) 안병찬(安秉瓚), 원임 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전 참찬(參贊) 최익현(崔益鉉) 등이 조약 거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김봉학(金奉學), 이한응(李漢應) 등은 자결로써 항거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해 조선의 전권을 장악했다. 먼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친서를 발표해 황제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음을 밝힌 고종이 1907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등 특사 3인을 파견해 회의 참석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純宗)을 즉위시켰다. 대한제국은 통감정치만으로도 일본의 속국과 마찬가지인 신세였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07년 7월에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요하여 국가의 법령 제정, 중요 행정처분, 고등관리의 임명에 대한 사전 승인을 통감부로부터 받도록 하였고, 조선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하도록 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간섭하는 권한을 얻었다. 게다가 그 해 8월에는 한국군을 해산하여 대한제국을 허수아비 국가로 만들었고, '보안법'과 '신문지법'을 만들어 항일노선의 언론 활동을 봉쇄해 버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은 대륙침략의 발판을 얻기 위해 1909년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撫順) 탄광 개발권을 얻는 대신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청나라의 법률 관할하에 두어 납세와 행정상의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하여 1712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세워진 이후로 청나라와 계속 국경분쟁을 일으켜 오다가 대한제국이 적극적으로 관리해 오던 만주의 간도 지방을 제멋대로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점차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적극적으로 진행되던 무렵에 애국지사들의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이 도처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던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D.W.Stevens)가 1908년 3월에 오클랜드역에서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에게 살해당한 사건과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9년 10월에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안중근(安重根)의 총격으로 피살된 사건,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 명동성당(明洞聖堂)에서 단검(短劍)으로 습격한 이재명(李在明)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사건이 대표적인 의거(義擧)였다.
1910년 5월 일본은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새 조선통감으로 임명하고, 2천여명의 헌병을 서울에 주둔시켜 경찰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 해 7월에 '병합 후의 대한(對韓) 통치방침'을 휴대하고 부임한 데라우치는 8월에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대신 조중응(趙重應)과 한국 병합에 관해 밀의(密議)하고 22일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마친 뒤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조인을 완료했다. 이 병합조약은 한국 민중의 반발을 우려하여 12주일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8월 29일 이완용이 윤덕영(尹德榮)에게 황제의 어새(御璽)를 날인하게 해 반포(頒布)했다. 이 국권강탈조약의 서문에는 '양국의 상호 행복을 증진하여 동양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일본은 타국의 국체(國體)를 강탈하는 것을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라고 파렴치(破廉恥)하게 위장한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조선의 멸망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부터 따지면 약 3백여년, 일당체제를 수립하는 1755년의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 때부터 따져도 국망(國亡) 때까지 150여년을 집권한 노론(老論)이 국망(國亡)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국망 때까지 집권당이었던 노론 주요 인사 중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가담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일제(日帝)에 협력해 지배층의 지위를 온존했다. 일제는 조선 강점 직후인 1910년 10월 76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에게 이른바 '병합공로작(倂合功勞爵)'을 수여했다. 대부분 이씨(李氏), 민씨(閔氏) 등 왕족들과 집권 노론이었다. 김석진(金奭鎭), 민영달(閔泳達), 윤용구(尹用求), 조경호(趙慶鎬), 한규설(韓圭卨) 등 일제가 자의적으로 수여한 남작(男爵) 작위를 거부한 8명 등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병합공로작으로 일제강점기에도 귀족의 지위를 누렸다. 또한 일제는 '병합공로작' 수여 다음 날 이들에게 각각 2만 5천원~50만 4천원에 이르는, 총 1천 7백여만원의 거금과 '은사공채(恩賜公債)'라는 막대한 경제적 혜택을 주었다. 일제는 또한 향촌을 장악하고 있는 양반 사대부들을 회유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주어 일본 여행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 때의 정황을 김창숙(金昌淑)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때에 왜정(倭政)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뜻이 좋아하며 따랐다. 나는 혹 이런 자들을 만나면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돈에 팔려서 적에게 아첨하는 자는 개 돼지다. 명색 양반이라면서 효자 열녀 표창에 끼어든단 말이냐?"
김창숙(金昌淑) 심산자서전(心山自敍傳)'
노론 계열의 지배층은 자신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병합이 황제의 의사라는 것으로 합리화시키려 했다. 비단 어느 황제도 병합문서에 조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더라도, 당론에 어긋나면 국왕까지도 선택했던 노론의 부일(附日) 논리로서는 궁색한 것이었다. 노론은 일제강점기에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기에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은 것뿐이다.
반면 양반 사대부들 중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들은 당시 야당이었던 소론(少論)과 재야 남인(南人)들이었다. 양반 출신으로 6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회영(李會榮) 집안과 이상룡(李相龍), 김대락(金大洛), 이상설(李相卨), 이동녕(李東寧), 김창숙(金昌淑) 등은 모두 소론이나 남인 계열이었다. 집권 노론(老論)은 일제에 빌붙어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야당인 소론과 재야 남인들 그리고 중인과 일반 민중들만에 독립운동에 나서는 가운데 일제(日帝)의 폭압정치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존재는 바로 민중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민중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열리고 있었다.
● 일제(日帝)의 경제적 침략
일본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경제구조를 식민지체제로 바꾸어갔다. 식민지적 경제구조는 일본의 자본주의 발달을 휘한 원료 및 식량공급지와 상품시장을 만들어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고 조선의 민족자본 성장과 농촌사회의 안정을 급속도로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먼저 농업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국유지와 민유지를 약탈하고, 농업이민정책을 병행하였다. 일본은 1904년에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국토의 1/3에 해당하는 진황지(陳荒地)를 약탈하려 하였으나 관민(官民)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통감부 설치 이후 내정에 깊숙이 간여하면서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土地家屋殿堂執行規則)', '국유미간지이용법(國有未墾地利用法)',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 등을 잇달아 제정하고, 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라는 국책회사를 설립하여 토지약탈을 본격화하였다. 이로써 1910년 현재,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지주는 2천 2백여명에 달했고, 그들이 소유한 토지는 7만여정보에 이르렀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별도로 3만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일본인들은 국유미간지뿐만 아니라 역둔토(驛屯土)까지도 침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밖에 철도부설과 군용지확보를 빙자한 토지침탈도 자행되었다.
일본인의 토지약탈은 1910년 경술병합(庚戌倂合) 이후 더욱 본격화되었다. 1910년의 토지조사국 설치와 1912년에 반포된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을 계기로 많은 일반 민유지가 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이른바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으로 불린 이 조치는 모든 토지소유자로 하여금 토지조사국에 소유지를 신고하게 함으로써 그 사유권을 인정받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 농민들은 그 사업을 잘 알지도 못하였고, 또 마을이나 문중의 공유지(共有地)는 개인 땅이 아니어서 신고가 소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고되지 않은 땅은 총독부가 빼앗아갔다. 토지뿐만 아니라 산림도 비슷한 방법으로 총독부소유로 넘어간 것이 적지 않았다. 그 결과 1930년의 통계에 의하면, 총독부가 소유한 전답과 임야는 전국토의 40%(888만정보)에 이르렀다. 그리고 총독부는 그 땅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기업에 불하하였다.
한편 일본은 한국의 금융을 지배하기 위해 1904년에 재정고문으로 온 메가타 다네타로[目駕田種太郞]의 지휘하에 이른바 '구화폐 정기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1905년 7월부터 실시하였다. 이로써 한국 돈[常平通寶]를 금하고 일본 화폐로 교환, 통용하게 하였는데, 질이 낮은 한국 화폐는 교환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더욱이 한국인들은 일본 화폐를 사용하지 않아 교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한국 상인들은 화폐가 고갈되고, 한성은행(漢城銀行),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등 민족금융기관이 급속히 몰락하였으며, 제일은행을 비롯한 일본 은행들이 금융업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일본은 또한 주요 지역에 지방금융조합을 설치하여 고리대에 의한 수탈을 강화하고,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일본인을 위한 여러 사업에 투자할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빌어 쓰도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에 3백만엔의 차관을 들여온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10년에는 그 액수가 4천 5백만원을 넘어서게 되었다. 정부마저 빚더미 위에 올라서고, 나라가 파산상태에 이른 것이다.
교통과 통신도 일본에 의해 장악되었다. 러일전쟁 중에 부설된 경부, 경의, 마산철도는 통감부 설치 이후 통감부 철도관리국에 의해 관장되었고, 각 철도역과 연계하여 약 3천 킬로미터의 도로가 개수되었다. 이러한 철도, 도로망은 일본과 한국을 하나의 교통체계로 묶어 대륙침략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실제로 러일전쟁 수행과 의병항쟁 진압, 그리고 경제수탈을 강화하는 데 크게 이용되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상행선으로 부른 것에서도 교통체계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르 알 수 있다.
당시에 민족기업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방직업이었다. 안경수(安駉壽)가 주동이 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大朝鮮苧麻製絲會社), 종로의 백목전(白木廛) 상인이 중심이 된 종로직조사(鍾路織造社), 그리고 김덕창(金德昌)이 구식공장을 근대식으로 개조한 김덕창 직조공장 등이 유명하였다. 이 밖에 놋그릇, 질그릇, 요업, 정미업, 담배제조업, 제분업분야에서는 근대적 경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자본의 성장은 1911년 현재 일본인 자본금의 약 1/15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영세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일본은 광업, 어업 등에서도 조선 민족의 자원을 침탈하였다. 특히 광업에서는 일본의 금본위제 화폐제도의 전환을 위한 금광과, 공업원료를 위한 철광에 눈독을 들여 은율, 제령, 철원, 창원, 안변, 장연 등지의 광산이 침탈당하였다.
● 일제(日帝)의 무단통치(武斷統治)와 민족자본 억압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자 통감부(統監府) 대신 총독부(總督府)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수탈의 대상이자, 일본의 영토 확장과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조선총독은 육군, 해군 대장(大將) 출신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내각의 총리대신과 동격으로 식민지 조선의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및 군사 통수권까지 부여받았다. 총독부는 총무(總務), 내무(內務), 탁지(度支), 농상공(農商工)의 행정부처와 사법기구로서 재판소, 치안기구로서 경무총감부(警務總監府), 자문기구로서 중추원(中樞院)과 취조국(取調局)을 두고, 지방은 도(道). 부(府), 군(郡), 면(沔)의 행정체계를 갖추어 일본 내각의 관할에서 독립된 지배권으로 조선을 통치하였다. 그리고 경제적 침탈기구로서 철도국(鐵道局), 통신원(通信院), 세관(稅館),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등의 기관을 설치하였다.
1910년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반발하는 조선 민중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를 실시하여 헌병대가 경찰 임무까지 맡아 한국인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행사하도록 했다. 일본 헌병대와 경찰은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에 따라 조선인들에 대하여 재판 없이 형벌을 가할 수 있는 즉결처분권을 갖고 조선 사회를 억압적인 분위기로 몰고 갔다. 이 밖에 일본은 2개 사단 병력을 서울의 용산, 나남 등지와 지방에 배치하여 무력(武力) 통치조직을 구축하였다. 총독부의 고위급 관리나 지방의 주요 직책도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하였으며, 조선인은 고작해야 지방행정기구의 하위 직급에 제한적으로 배치되었다. 일제(日帝)는 이들을 식민지 지배에 협력할 부일(附日)세력으로 끌어들여 식민지의 대민(對民)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英親王)을 강제로 일본 본토로 이주시키고, 이완용(李完用) 송병준(宋秉畯) 등 친일역신(親日逆臣)들에게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주고, 중추원(中樞院)이라는 형식적인 자문기관에서 의관(議官)으로 활동하도록 배려하였다. 물론 중추원의 의장은 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이 맡았고, 자문사항은 조선인들의 민생(民生)과 크게 관계가 없는 관습 조사와 같은 하찮은 일들 뿐이었다.
총독부는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의 뿌리를 뽑겠다는 생각으로 애국지사들을 대량으로 체포, 구금하는 일에 나섰다. 먼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있던 안명근(安明根)을 체포한 것을 기화로 황해도 지방의 반일인사(反日人士) 160여명을 잡아들이는 안악사변(安岳事變)을 일으켰다. 그리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가장 활발한 민족운동을 펼친 단체였던 신민회(新民會) 회원 6백여명을 검거하여 악독한 방법으로 고문을 자행하고, 그 중에서 105명을 기소하였다. 이것이 1911년의 105인 사건(百五人事件)이다.
경술병합(庚戌倂合) 이후 조선총독부는 모든 정치결사운동을 해체시키고 민족언론지들을 폐간시켰으며, 경성일보(京城日報), 매일신보(每日申報), 조선공론(朝鮮公論) 등 어용신문과 잡지만을 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민족교육을 금지시키기 위해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사립학교규칙(私立學校規則), 서당규칙(書堂規則) 등을 제정하여 학교 설립과 교육내용은 총독부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08년에 3천여곳에 달하던 사립학교가 1919년에는 690여곳으로 줄었다.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가장 컸던 유생들을 회유하기 위해 지방의 노유(老儒)들에게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지급하고, 유생들의 세력기반인 향교(鄕校)의 재산을 몰수하여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의 유지비로 충당하였다. 조선시대의 향촌 초등교육기관인 서당(書堂)도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그 대신 대학이나 전문학교 같은 고급교육기관을 두지 않았고, 지방에는 보통학교,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극소수의 고등보통학교와 사범학교를 설치하여 식민지 하수인으로서 필요한 교육만을 받도록 하였으며, 그것도 일부 극소수 한국인에게만 입학을 허용하였다.
또한 한국인들을 위압하기 위해 일반 관리나 교원에게도 제복(制服)을 입히고 군도(軍刀)를 차고 다니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족교육이 급속히 약화되고, 식민지 노예교육이 강화되었다.
일제치하 식민지 경제체제는 항구적이고 안정적으로 식량, 원료, 노동력을 싼값에 공급받고 공업 생산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이중적 수탈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자신들의 자본주의 경제발달을 이룩하고 나아가서는 대륙 침략을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려 하였다.
1910년대에 일제는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아울러 일본인 기업의 이익을 위협할 수 있는 민족자본의 성장은 철저히 억제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가 시행한 대표적인 정책이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과 회사령(會社令)이다.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은 토지의 근대적 소유권 제도를 확립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근대적 소유권 제도란 오늘날의 토지 등기 제도와 비슷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지세(地稅) 부과 대상을 철저히 파악하고, 방대한 토지를 약탈하여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다지려는 작업이었다.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면 이른바 '신고주의' 원칙에 따라 정해진 기한 내에 토지 소유자가 작성한 토지 신고서를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에 제출해야 했는데, 신고 기간은 짧고 구비 서류나 수속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에 무지한 농민들의 경우 기한 내에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미신고 토지나 국공유지 등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약탈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등 토지회사와 일본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조선 농민들은 매우 열악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땅의 주인이 바뀌는 경우라도 경작권은 보장받던 농민들은 기한을 정해 놓고 계약을 해야 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지주가 원하는 대로 소작농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경작권을 빼았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소작료 부담은 더욱 늘어나고, 살기 어려워진 농민 중에는 고향을 등지고 만주나 연해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농민들과는 달리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은 대부분 적극적인 신고를 통해 토지 소유권을 보장받았고, 그 권리도 강화되었다. 심지어 조선인 지주들이 부담하는 지세율은 일본인 지주들보다 낮았다. 일제는 지주 계급을 식민지 지배의 협력자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지주와 농민의 갈등은 매우 커졌고, 친일적 성향을 지니는 지주들이 많아졌다.
한편, 식민통치 초기 일제는 민족기업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정책을 전개하였다. 이미 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을 통해 조선의 중소 자영업자와 상인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준 일제는 1910년 12월의 회사령(會社令)을 통해 조선인들의 기업 활동을 원천적으로 제약하였다. 회사령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하고 허가 조건을 어기면 기업을 해체할 수 있도록 한 법령으로, 오직 조선 기업인(企業人)들에게만 해당되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일본인 자본의 이익을 위협할 염려가 없는 소규모의 제조업, 매매업 등만을 허가함으로써 개항 이후 성장해 오던 민족자본의 결집을 막고, 일본의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적인 산업구조를 형성하려 하였다. 결국 회사령 체제하에 조선인 자본가들은 총독부의 요구에 순응하는 기업을 설립하거나 일본인 회사에 참여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 밖에도 일제는 '광업령(鑛業令)'. '어업령(漁業令)', '은행령(銀行令)' 등의 법령을 제정하여 조선인들의 경제 활동을 허가제로 전환하였고, 인삼, 담배, 소금 등에 대한 전매제를 실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민족자본의 성장은 철저히 억압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의 각종 자원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다.
한편,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이후 좀더 효율적인 식민지 수탈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나섰다. 그리하여 많은 철도망과 도로, 항만이 새롭게 건설되고 정비되었다. 특히, 철도의 경우 한반도를 X자 모양으로 가로지르는 간선 철도망이 만들어지고 이러한 철도의 남쪽 끝인 부산, 목포는 항만으로서 일본과 연결되어 조선을 일본의 경제권에 편입시켰으며, 북쪽 끝인 신의주와 회령은 남만주 철도와 연결되어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발판의 역할을 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우리 민족에게 끼친 해독은 매우 컸다. 정치면에서 국민 주권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적 국가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크게 지연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에게는 어떠한 정치 활동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는 철저히 억압되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을 전혀 갖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그 후 40년 이상 독재정권이 득세한 것도 일제의 오랜 식민지 지배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막혀 있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경제면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압하고 민중경제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일제는 농민,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수탈의 대상으로만 여기면서 권리의 요구나 저항적 운동은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러나 지주, 자본가 등 유산계급(부르주아)에 대해서는 특권을 계속 보장해 줌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협력자로 적극 끌어들였다. 물론 유산계급이라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거나 독립운동에 참여하면 철저히 탄압하였고,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일본인 자본과 경쟁할 수 있는 민족자본의 성장은 사실상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면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전통문화의 단절을 가져왔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살아 숨쉬는 전통문화를 철저히 억압하고 파괴하려 하였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꺾고, 민족의식을 잠재우려 한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해 일제는 우리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우리 말 사용을 억압하였으며, 심지어 우리 민족의 성과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등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을 전개하였다. 조선인의 저항정신을 소멸시켜 조선을 항구적인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 1910년대 국내의 민족운동
국권피탈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로 인하여 직접적인 저항이나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애국지사들은 비밀결사조직(秘密結社組織)을 만들어 지하공작운동(地下工作運動)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은 대체로 무력항쟁을 기본으로 하여 독립군을 직접 양성하거나 지원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나 독립 후의 국가에 대해서는 대한제국의 회복을 주장하는 복벽주의(復辟主義)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계몽운동 계열의 노선차이가 있었다.
1912년에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는 구한 말에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을 주도했던 많은 유생들이 참여한 비밀결사조직으로 복벽주의 이념을 내세웠다. 임병찬(林炳瓚)이 고종(高宗)의 밀지(密旨)를 받아 조직하고 전국적인 의병항쟁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임병찬이 1914년 거문도에 유배되었다가 자결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이 밖에 채응언(蔡應彦)의 의병부대는 황해도,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유격전(遊擊戰)을 펼쳐 일제(日帝)에 항거하다가, 1915년 7월에 채응언이 피체됨으로써 해산되기도 하였다.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한 비밀단체로는 박상진(朴尙鎭), 채기중(蔡祺中), 김좌진(金佐鎭) 등이 1913년에 조직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대구에서 결성된 이 단체는 각도에 지부를 두고 해외의 항일투사들과 연계하여 군대 양성과 친일파 숙청을 도모하다가 1918년에 단장인 박상진을 비롯한 주요 단원 30여명이 체포되어 잠시 그 활동이 위축되었으나,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에 활발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경상도지방에서는 대종교에 귀의한 윤상태(尹相泰), 서상일(徐相日), 이시영(李始榮) 등 유생들이 1915년에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밖에도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선명단(鮮命團), 자립단(自立團)을 비롯하여 여성조직인 송죽회(松竹會) 등 수많은 비밀결사단체가 반일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비밀결사단체는 대부분 겉으로는 종교, 교육 활동 등을 표방하면서도 안으로는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하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개항 이후 외세, 특히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 가장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은 농민층이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나 을사조약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항쟁의 중심에는 농민들이 있었다. 외세의 침략과 경제적 수탈에 가장 큰 피해와 고통을 겪은 계층이 바로 농민들이기 때문이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의 최대 희생자는 농민들이었다. 1910년대 초부터 토지나 임야의 약탈, 각종 명목의 조세수탈에 맞서 생존권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저항은 폭력투쟁의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이 마무리되는 1918년에는 더욱 가열되어 면사무소, 경찰 주재소, 헌병 분견소 등 식민통치기관이 습격을 받는 일이 많았다.
1918년 3월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농민 5백여명이 면장의 부정을 징계하기 위해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며칠 뒤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농민 4백여명은 나무하던 주민 7명이 경찰에 연행되자 폭동을 일으켰다. 그 해 5월 말에는 강원도 춘천군 서하면 농민 350여명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6월 초에는 함경남도 문천군 소재의 헌병 분견소가 부근 농민 20여명의 습격을 받아 헌병들과 보조원들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시작되었다. 식민지 지배 초기 일제에 의해 사회 간접자본의 건설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짐에 따라 주로 토목, 건설, 부두, 교통 등의 부분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많이 늘어났다. 국권피탈 이전부터 조금씩 만들어지기 시작한 노동자 단체는 대개 상호부조나 경제생활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공제회나 계(契)의 성격을 띤 것이 많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1917년부터는 노동조합이 크게 늘어났고, 임금인상과 대우개선 등을 요구하는 노동쟁의도 늘어났다. 1918년의 경우 파업 투쟁이 50건에 참가 인원은 조선인만 약 4천여명이 넘었다.
●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미 을사조약 이후로 일본의 강도적 침략 행위에 대한 각계각층의 분노와 대각성이 일기 시작했고, 1910년 이후의 야만적 탄압통치를 경험하면서 그 분노와 각성은 계층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한층 확장되면서 민족의 역량이 하나로 결집되어 갔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전세계를 감동시킨 비무력(非武力) 평화적(平和的) 시위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3·1운동은 개항 이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에서 시작하여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과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 구국계몽운동(救國啓蒙運動)으로 이어져 온 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그것이 1919년 3월 1일에 발생한 직접적인 원인은 국내, 국외의 특수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은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였다. 영국, 프랑스에 비하여 뒤늦게 산업화를 이룩한 독일은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게 된다. 이에 제국주의 강대국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결국 무력충돌(武力衝突)로 이어지게 되는데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그것이다.
4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자 30여개국의 전승국(戰勝國) 대표들이 모여 파리강화회의(講和會議)를 개최하고 전후(戰後)의 세계질서를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제창한 14개조 평화 원칙을 바탕으로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군비 축소, 국제연맹(國際聯盟) 창설,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등이었다.
민족자결주의는 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근대화를 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는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정책과는 다른 방향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독립시킬 생각이 없었다. 결국, 독일 등 패전국(敗戰國)과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에 속해 있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유럽의 일부 약소민족들만 독립을 승인받을 수 있었다.
한편 1917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차르(Czars)가 다스리는 제정이 무너지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정권이 성립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인 소련이 출현한 것이다. 레닌은 세계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조직은 코민테른(Comintern)을 결성하고 강대국에 압박받고 있는 전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과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노선 내세우는 공산국가 소련의 등장과 민족자결주의 제창은 국내외의 민족운동가들에게는 제국주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계사의 흐름이 변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이를 독립의 기회로 삼으려는 노력이 여러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1918년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했으며, 3·1운동 직후에는 국내의 유림세력이 공동으로 독립청원서를 프랑스 파리로 보내기도 하였다.
1918년 말에는 만주 길림성에서 조소앙(趙素昻)이 작성하여 김교헌(金敎獻), 김동삼(金東三), 박은식(朴殷植), 이동녕(李東寧), 이상룡(李相龍), 윤세복(尹世復), 김좌진(金佐鎭), 신채호(申采浩), 신규식(申圭植), 이범윤(李範允) 등이 민족대표 39인의 이름으로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가 발표되었으며, 1919년 2월 8일에는 최팔용(崔八鏞), 이종근(李琮根), 김도연(金度演) 등 일본 유학생 4백여명이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니 이것이 조선청년독립선언(朝鮮靑年獨立宣言)이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그 동안 온건한 교육진흥사업(敎育振興事業), 항일언론운동(抗日言論運動), 문화보호운동(文化保護運動)에 주력해 오던 종교단체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다. 그리하여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나인협(羅仁協), 오세창(吳世昌)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승훈(李昇薰), 이갑성(李甲成), 최성모(崔聖模), 신석구(申錫九) 등 기독교계 인사, 한용운(韓龍雲) 등 불교계 인사들이 손잡고 대외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 대내적으로는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원칙에 따라 운동을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거사시기는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의 이틀전인 3월 1일 정오로 정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명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도 이종일(李鐘一)에 의해 비밀리에 준비되어 전국에 미리 배포되었다.
서울의 민족대표들은 원래 군중이 많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예정이었으나,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음식점인 태화관(泰和館)으로 옮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총독부에 이 사실을 알려 자진 검거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은 3·1운동을 준비하고 불을 댕기는 역할은 하였지만 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어 갈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일제에 대한 적극적 저항보다는 타협적 자세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 후 민족대표 33인 중 일부가 친일파로 전향한 사실과 관련지어지기도 한다.
서울시위와 때를 같이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이북지역의 주요도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3월 10일을 전후하여서는 남한일대로 파급되어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5월말까지 이 지속된 이 운동에는 전국 218개군에서 2백여만명의 주민이 1500여회의 시위에 참가하여 그야말로 거족적인 독립의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 주도층은 지식인, 청년, 학생, 종교인 등이었지만, 중소상공인과 노동자, 농민 등 모든 계층이 망라되었다.
3·1운동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시위형태로 출발했지만 시위가 확산될수록 동맹파업과 예금인출, 그리고 전차 공격과 광구 파괴,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습격 등 점차 폭력적 형태로 발전해 갔다.
거족적인 3·1운동에 경악한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모두 풀어 시위운동 가담자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발포와 살육을 일삼았으며 고문과 방화 등 무자비한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특히 농촌에서의 탄압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컨대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에서는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 쳐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였으며,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전국적으로 7천 5백여명이 피살되고 4만 6천여명이 체포되었으며, 1만 6천여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리고 49개소의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타버렸다. 또한 천안의 아오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악랄한 고문끝에 옥사한 유관순(柳寬順) 학생의 경우처럼 체포된 인사들의 고통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3·1운동에서 조선 민중은 용감히 깃발을 들고 일어나 치열하게 투쟁하였고, 숭고하게 희생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과연 3·1운동은 성공한 혁명으로 봐야 하는가, 실패한 저항 운동으로 봐야 하는가?
당장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3·1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민족운동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가 무력(武力)을 총동원하여 조선인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자비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 학살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이 지닌 자체적 한계도 지적되고 있다. 3·1운동은 전 민족적인 에너지를 분출하였지만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항일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민족대표들은 평화적인 시위운동을 대규모로 전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의 여론은 한국인들을 동정하고 일제를 비난하였지만,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은 조성되지 않았다. 각종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거나 일본에 국권 반환을 요구하는 일은 헛수고였다.
어렵고 현학적 표현으로 쓰인 기미독립선언서에도 독립의 의지만을 천명하였을뿐, 일제의 수탈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내용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독립을 위해 민중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농민, 노동자 등 민중을 포함한 전 민족의 역량을 충분히 결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를 직접 타도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3·1운동을 비관적인 시각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강렬하게 천명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는 국권 강탈 과정에서 서구 열강에 대하여 조선인들은 자치 능력이 없으며, 일본인들의 지배를 달게 받아들였다고 선전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대외적인 거짓말이 3·1운동으로 만천하에 폭로된 것이다. 민족사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3·1운동이 성공했다고 보는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가 소멸하고 공화주의에 이념을 둔 독립운동만이 남게 되었으며 민주공화제를 기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3·1운동은 밖으로는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이었지만 안으로는 공화주의(共和主義) 운동이었다.
또한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좀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측면이 있다. 우선 국외에서 무장항일투쟁(武將抗日鬪爭)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평화적 만세 시위나 산발적인 폭력 투쟁만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많은 청년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 입대하였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농민운동과 노동쟁의 등 대중 운동이 크게 활발해졌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의 가장 큰 피해자인 농민과 노동자들은 폭력 투쟁과 파업을 벌이는 등 가장 적극적인 저항의 자세를 보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중의 각성은 사회주의 노선에 바탕을 둔 민족운동이 확산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도 변화시켰다. 즉 일제는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초기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병대와 경찰의 무력만으로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겉으로나마 유화적인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문화정치의 본질은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그밖에도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을 비롯하여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5·4운동 때에 배포된 격문을 보면 "조선인들은 독립을 꾀하여 독립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고 하면서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한국사 강론」39.일본의 침략 통치와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
● 일제(日帝)의 국권 강탈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1905년 9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주선으로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했는데,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이 조약은 열강이 일본의 한국 침략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이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우월적 지위를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일본은, 1905년 11월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해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保護國)'화 하려는 계획을 노골화했다. 외교권 박탈을 주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은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 주재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한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치밀한 계획 속에서 추진되었다. 여기에 내각에 책임을 떠넘긴 고종의 우유부단함과 친일파 관료들의 동조가 가세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반대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책임을 황제 고종(高宗)에게 미루며 찬성했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고종이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자 일본 군인들은 외부대신 박제순의 직인을 확보하여 강제로 날인해 버렸다. 당시 대한제국은 황제가 외국과의 조약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재가(栽可)가 없는 이 조약은 당연히 무효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조약을 유효라고 우기고 나섰다. 이것을 을사조약(乙巳條約)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불법적인 '늑약(勒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을사조약 체결로 인하여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으며,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외교권을 대신 행사했다.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해 을사조약 체결 사실을 알렸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조약체결 거부운동(條約締結拒否運動)이 일어났다.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해 이유승(李裕承), 법부주사(法部主事) 안병찬(安秉瓚), 원임 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전 참찬(參贊) 최익현(崔益鉉) 등이 조약 거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김봉학(金奉學), 이한응(李漢應) 등은 자결로써 항거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해 조선의 전권을 장악했다. 먼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친서를 발표해 황제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음을 밝힌 고종이 1907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등 특사 3인을 파견해 회의 참석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純宗)을 즉위시켰다. 대한제국은 통감정치만으로도 일본의 속국과 마찬가지인 신세였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07년 7월에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요하여 국가의 법령 제정, 중요 행정처분, 고등관리의 임명에 대한 사전 승인을 통감부로부터 받도록 하였고, 조선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하도록 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간섭하는 권한을 얻었다. 게다가 그 해 8월에는 한국군을 해산하여 대한제국을 허수아비 국가로 만들었고, '보안법'과 '신문지법'을 만들어 항일노선의 언론 활동을 봉쇄해 버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은 대륙침략의 발판을 얻기 위해 1909년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撫順) 탄광 개발권을 얻는 대신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청나라의 법률 관할하에 두어 납세와 행정상의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하여 1712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세워진 이후로 청나라와 계속 국경분쟁을 일으켜 오다가 대한제국이 적극적으로 관리해 오던 만주의 간도 지방을 제멋대로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점차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적극적으로 진행되던 무렵에 애국지사들의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이 도처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던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D.W.Stevens)가 1908년 3월에 오클랜드역에서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에게 살해당한 사건과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9년 10월에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안중근(安重根)의 총격으로 피살된 사건,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 명동성당(明洞聖堂)에서 단검(短劍)으로 습격한 이재명(李在明)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사건이 대표적인 의거(義擧)였다.
1910년 5월 일본은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새 조선통감으로 임명하고, 2천여명의 헌병을 서울에 주둔시켜 경찰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 해 7월에 '병합 후의 대한(對韓) 통치방침'을 휴대하고 부임한 데라우치는 8월에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대신 조중응(趙重應)과 한국 병합에 관해 밀의(密議)하고 22일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마친 뒤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조인을 완료했다. 이 병합조약은 한국 민중의 반발을 우려하여 12주일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8월 29일 이완용이 윤덕영(尹德榮)에게 황제의 어새(御璽)를 날인하게 해 반포(頒布)했다. 이 국권강탈조약의 서문에는 '양국의 상호 행복을 증진하여 동양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일본은 타국의 국체(國體)를 강탈하는 것을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라고 파렴치(破廉恥)하게 위장한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조선의 멸망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부터 따지면 약 3백여년, 일당체제를 수립하는 1755년의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 때부터 따져도 국망(國亡) 때까지 150여년을 집권한 노론(老論)이 국망(國亡)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국망 때까지 집권당이었던 노론 주요 인사 중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가담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일제(日帝)에 협력해 지배층의 지위를 온존했다. 일제는 조선 강점 직후인 1910년 10월 76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에게 이른바 '병합공로작(倂合功勞爵)'을 수여했다. 대부분 이씨(李氏), 민씨(閔氏) 등 왕족들과 집권 노론이었다. 김석진(金奭鎭), 민영달(閔泳達), 윤용구(尹用求), 조경호(趙慶鎬), 한규설(韓圭卨) 등 일제가 자의적으로 수여한 남작(男爵) 작위를 거부한 8명 등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병합공로작으로 일제강점기에도 귀족의 지위를 누렸다. 또한 일제는 '병합공로작' 수여 다음 날 이들에게 각각 2만 5천원~50만 4천원에 이르는, 총 1천 7백여만원의 거금과 '은사공채(恩賜公債)'라는 막대한 경제적 혜택을 주었다. 일제는 또한 향촌을 장악하고 있는 양반 사대부들을 회유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주어 일본 여행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 때의 정황을 김창숙(金昌淑)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때에 왜정(倭政)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뜻이 좋아하며 따랐다. 나는 혹 이런 자들을 만나면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돈에 팔려서 적에게 아첨하는 자는 개 돼지다. 명색 양반이라면서 효자 열녀 표창에 끼어든단 말이냐?"
김창숙(金昌淑) 심산자서전(心山自敍傳)'
노론 계열의 지배층은 자신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병합이 황제의 의사라는 것으로 합리화시키려 했다. 비단 어느 황제도 병합문서에 조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더라도, 당론에 어긋나면 국왕까지도 선택했던 노론의 부일(附日) 논리로서는 궁색한 것이었다. 노론은 일제강점기에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기에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은 것뿐이다.
반면 양반 사대부들 중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들은 당시 야당이었던 소론(少論)과 재야 남인(南人)들이었다. 양반 출신으로 6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회영(李會榮) 집안과 이상룡(李相龍), 김대락(金大洛), 이상설(李相卨), 이동녕(李東寧), 김창숙(金昌淑) 등은 모두 소론이나 남인 계열이었다. 집권 노론(老論)은 일제에 빌붙어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야당인 소론과 재야 남인들 그리고 중인과 일반 민중들만에 독립운동에 나서는 가운데 일제(日帝)의 폭압정치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존재는 바로 민중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민중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열리고 있었다.
● 일제(日帝)의 경제적 침략
일본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경제구조를 식민지체제로 바꾸어갔다. 식민지적 경제구조는 일본의 자본주의 발달을 휘한 원료 및 식량공급지와 상품시장을 만들어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고 조선의 민족자본 성장과 농촌사회의 안정을 급속도로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먼저 농업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국유지와 민유지를 약탈하고, 농업이민정책을 병행하였다. 일본은 1904년에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국토의 1/3에 해당하는 진황지(陳荒地)를 약탈하려 하였으나 관민(官民)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통감부 설치 이후 내정에 깊숙이 간여하면서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土地家屋殿堂執行規則)', '국유미간지이용법(國有未墾地利用法)',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 등을 잇달아 제정하고, 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라는 국책회사를 설립하여 토지약탈을 본격화하였다. 이로써 1910년 현재,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지주는 2천 2백여명에 달했고, 그들이 소유한 토지는 7만여정보에 이르렀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별도로 3만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일본인들은 국유미간지뿐만 아니라 역둔토(驛屯土)까지도 침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밖에 철도부설과 군용지확보를 빙자한 토지침탈도 자행되었다.
일본인의 토지약탈은 1910년 경술병합(庚戌倂合) 이후 더욱 본격화되었다. 1910년의 토지조사국 설치와 1912년에 반포된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을 계기로 많은 일반 민유지가 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이른바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으로 불린 이 조치는 모든 토지소유자로 하여금 토지조사국에 소유지를 신고하게 함으로써 그 사유권을 인정받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 농민들은 그 사업을 잘 알지도 못하였고, 또 마을이나 문중의 공유지(共有地)는 개인 땅이 아니어서 신고가 소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고되지 않은 땅은 총독부가 빼앗아갔다. 토지뿐만 아니라 산림도 비슷한 방법으로 총독부소유로 넘어간 것이 적지 않았다. 그 결과 1930년의 통계에 의하면, 총독부가 소유한 전답과 임야는 전국토의 40%(888만정보)에 이르렀다. 그리고 총독부는 그 땅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기업에 불하하였다.
한편 일본은 한국의 금융을 지배하기 위해 1904년에 재정고문으로 온 메가타 다네타로[目駕田種太郞]의 지휘하에 이른바 '구화폐 정기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1905년 7월부터 실시하였다. 이로써 한국 돈[常平通寶]를 금하고 일본 화폐로 교환, 통용하게 하였는데, 질이 낮은 한국 화폐는 교환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더욱이 한국인들은 일본 화폐를 사용하지 않아 교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한국 상인들은 화폐가 고갈되고, 한성은행(漢城銀行),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등 민족금융기관이 급속히 몰락하였으며, 제일은행을 비롯한 일본 은행들이 금융업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일본은 또한 주요 지역에 지방금융조합을 설치하여 고리대에 의한 수탈을 강화하고,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일본인을 위한 여러 사업에 투자할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빌어 쓰도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에 3백만엔의 차관을 들여온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10년에는 그 액수가 4천 5백만원을 넘어서게 되었다. 정부마저 빚더미 위에 올라서고, 나라가 파산상태에 이른 것이다.
교통과 통신도 일본에 의해 장악되었다. 러일전쟁 중에 부설된 경부, 경의, 마산철도는 통감부 설치 이후 통감부 철도관리국에 의해 관장되었고, 각 철도역과 연계하여 약 3천 킬로미터의 도로가 개수되었다. 이러한 철도, 도로망은 일본과 한국을 하나의 교통체계로 묶어 대륙침략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실제로 러일전쟁 수행과 의병항쟁 진압, 그리고 경제수탈을 강화하는 데 크게 이용되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상행선으로 부른 것에서도 교통체계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르 알 수 있다.
당시에 민족기업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방직업이었다. 안경수(安駉壽)가 주동이 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大朝鮮苧麻製絲會社), 종로의 백목전(白木廛) 상인이 중심이 된 종로직조사(鍾路織造社), 그리고 김덕창(金德昌)이 구식공장을 근대식으로 개조한 김덕창 직조공장 등이 유명하였다. 이 밖에 놋그릇, 질그릇, 요업, 정미업, 담배제조업, 제분업분야에서는 근대적 경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자본의 성장은 1911년 현재 일본인 자본금의 약 1/15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영세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일본은 광업, 어업 등에서도 조선 민족의 자원을 침탈하였다. 특히 광업에서는 일본의 금본위제 화폐제도의 전환을 위한 금광과, 공업원료를 위한 철광에 눈독을 들여 은율, 제령, 철원, 창원, 안변, 장연 등지의 광산이 침탈당하였다.
● 일제(日帝)의 무단통치(武斷統治)와 민족자본 억압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자 통감부(統監府) 대신 총독부(總督府)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수탈의 대상이자, 일본의 영토 확장과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조선총독은 육군, 해군 대장(大將) 출신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내각의 총리대신과 동격으로 식민지 조선의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및 군사 통수권까지 부여받았다. 총독부는 총무(總務), 내무(內務), 탁지(度支), 농상공(農商工)의 행정부처와 사법기구로서 재판소, 치안기구로서 경무총감부(警務總監府), 자문기구로서 중추원(中樞院)과 취조국(取調局)을 두고, 지방은 도(道). 부(府), 군(郡), 면(沔)의 행정체계를 갖추어 일본 내각의 관할에서 독립된 지배권으로 조선을 통치하였다. 그리고 경제적 침탈기구로서 철도국(鐵道局), 통신원(通信院), 세관(稅館),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등의 기관을 설치하였다.
1910년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반발하는 조선 민중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를 실시하여 헌병대가 경찰 임무까지 맡아 한국인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행사하도록 했다. 일본 헌병대와 경찰은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에 따라 조선인들에 대하여 재판 없이 형벌을 가할 수 있는 즉결처분권을 갖고 조선 사회를 억압적인 분위기로 몰고 갔다. 이 밖에 일본은 2개 사단 병력을 서울의 용산, 나남 등지와 지방에 배치하여 무력(武力) 통치조직을 구축하였다. 총독부의 고위급 관리나 지방의 주요 직책도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하였으며, 조선인은 고작해야 지방행정기구의 하위 직급에 제한적으로 배치되었다. 일제(日帝)는 이들을 식민지 지배에 협력할 부일(附日)세력으로 끌어들여 식민지의 대민(對民)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英親王)을 강제로 일본 본토로 이주시키고, 이완용(李完用) 송병준(宋秉畯) 등 친일역신(親日逆臣)들에게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주고, 중추원(中樞院)이라는 형식적인 자문기관에서 의관(議官)으로 활동하도록 배려하였다. 물론 중추원의 의장은 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이 맡았고, 자문사항은 조선인들의 민생(民生)과 크게 관계가 없는 관습 조사와 같은 하찮은 일들 뿐이었다.
총독부는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의 뿌리를 뽑겠다는 생각으로 애국지사들을 대량으로 체포, 구금하는 일에 나섰다. 먼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있던 안명근(安明根)을 체포한 것을 기화로 황해도 지방의 반일인사(反日人士) 160여명을 잡아들이는 안악사변(安岳事變)을 일으켰다. 그리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가장 활발한 민족운동을 펼친 단체였던 신민회(新民會) 회원 6백여명을 검거하여 악독한 방법으로 고문을 자행하고, 그 중에서 105명을 기소하였다. 이것이 1911년의 105인 사건(百五人事件)이다.
경술병합(庚戌倂合) 이후 조선총독부는 모든 정치결사운동을 해체시키고 민족언론지들을 폐간시켰으며, 경성일보(京城日報), 매일신보(每日申報), 조선공론(朝鮮公論) 등 어용신문과 잡지만을 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민족교육을 금지시키기 위해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사립학교규칙(私立學校規則), 서당규칙(書堂規則) 등을 제정하여 학교 설립과 교육내용은 총독부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08년에 3천여곳에 달하던 사립학교가 1919년에는 690여곳으로 줄었다.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가장 컸던 유생들을 회유하기 위해 지방의 노유(老儒)들에게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지급하고, 유생들의 세력기반인 향교(鄕校)의 재산을 몰수하여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의 유지비로 충당하였다. 조선시대의 향촌 초등교육기관인 서당(書堂)도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그 대신 대학이나 전문학교 같은 고급교육기관을 두지 않았고, 지방에는 보통학교,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극소수의 고등보통학교와 사범학교를 설치하여 식민지 하수인으로서 필요한 교육만을 받도록 하였으며, 그것도 일부 극소수 한국인에게만 입학을 허용하였다.
또한 한국인들을 위압하기 위해 일반 관리나 교원에게도 제복(制服)을 입히고 군도(軍刀)를 차고 다니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족교육이 급속히 약화되고, 식민지 노예교육이 강화되었다.
일제치하 식민지 경제체제는 항구적이고 안정적으로 식량, 원료, 노동력을 싼값에 공급받고 공업 생산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이중적 수탈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자신들의 자본주의 경제발달을 이룩하고 나아가서는 대륙 침략을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려 하였다.
1910년대에 일제는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아울러 일본인 기업의 이익을 위협할 수 있는 민족자본의 성장은 철저히 억제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가 시행한 대표적인 정책이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과 회사령(會社令)이다.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은 토지의 근대적 소유권 제도를 확립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근대적 소유권 제도란 오늘날의 토지 등기 제도와 비슷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지세(地稅) 부과 대상을 철저히 파악하고, 방대한 토지를 약탈하여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다지려는 작업이었다.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면 이른바 '신고주의' 원칙에 따라 정해진 기한 내에 토지 소유자가 작성한 토지 신고서를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에 제출해야 했는데, 신고 기간은 짧고 구비 서류나 수속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에 무지한 농민들의 경우 기한 내에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미신고 토지나 국공유지 등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약탈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등 토지회사와 일본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조선 농민들은 매우 열악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땅의 주인이 바뀌는 경우라도 경작권은 보장받던 농민들은 기한을 정해 놓고 계약을 해야 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지주가 원하는 대로 소작농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경작권을 빼았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소작료 부담은 더욱 늘어나고, 살기 어려워진 농민 중에는 고향을 등지고 만주나 연해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농민들과는 달리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은 대부분 적극적인 신고를 통해 토지 소유권을 보장받았고, 그 권리도 강화되었다. 심지어 조선인 지주들이 부담하는 지세율은 일본인 지주들보다 낮았다. 일제는 지주 계급을 식민지 지배의 협력자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지주와 농민의 갈등은 매우 커졌고, 친일적 성향을 지니는 지주들이 많아졌다.
한편, 식민통치 초기 일제는 민족기업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정책을 전개하였다. 이미 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을 통해 조선의 중소 자영업자와 상인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준 일제는 1910년 12월의 회사령(會社令)을 통해 조선인들의 기업 활동을 원천적으로 제약하였다. 회사령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하고 허가 조건을 어기면 기업을 해체할 수 있도록 한 법령으로, 오직 조선 기업인(企業人)들에게만 해당되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일본인 자본의 이익을 위협할 염려가 없는 소규모의 제조업, 매매업 등만을 허가함으로써 개항 이후 성장해 오던 민족자본의 결집을 막고, 일본의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적인 산업구조를 형성하려 하였다. 결국 회사령 체제하에 조선인 자본가들은 총독부의 요구에 순응하는 기업을 설립하거나 일본인 회사에 참여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 밖에도 일제는 '광업령(鑛業令)'. '어업령(漁業令)', '은행령(銀行令)' 등의 법령을 제정하여 조선인들의 경제 활동을 허가제로 전환하였고, 인삼, 담배, 소금 등에 대한 전매제를 실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민족자본의 성장은 철저히 억압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의 각종 자원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다.
한편,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이후 좀더 효율적인 식민지 수탈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나섰다. 그리하여 많은 철도망과 도로, 항만이 새롭게 건설되고 정비되었다. 특히, 철도의 경우 한반도를 X자 모양으로 가로지르는 간선 철도망이 만들어지고 이러한 철도의 남쪽 끝인 부산, 목포는 항만으로서 일본과 연결되어 조선을 일본의 경제권에 편입시켰으며, 북쪽 끝인 신의주와 회령은 남만주 철도와 연결되어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발판의 역할을 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우리 민족에게 끼친 해독은 매우 컸다. 정치면에서 국민 주권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적 국가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크게 지연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에게는 어떠한 정치 활동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는 철저히 억압되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을 전혀 갖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그 후 40년 이상 독재정권이 득세한 것도 일제의 오랜 식민지 지배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막혀 있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경제면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압하고 민중경제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일제는 농민,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수탈의 대상으로만 여기면서 권리의 요구나 저항적 운동은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러나 지주, 자본가 등 유산계급(부르주아)에 대해서는 특권을 계속 보장해 줌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협력자로 적극 끌어들였다. 물론 유산계급이라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거나 독립운동에 참여하면 철저히 탄압하였고,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일본인 자본과 경쟁할 수 있는 민족자본의 성장은 사실상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면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전통문화의 단절을 가져왔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살아 숨쉬는 전통문화를 철저히 억압하고 파괴하려 하였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꺾고, 민족의식을 잠재우려 한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해 일제는 우리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우리 말 사용을 억압하였으며, 심지어 우리 민족의 성과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등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을 전개하였다. 조선인의 저항정신을 소멸시켜 조선을 항구적인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 1910년대 국내의 민족운동
국권피탈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로 인하여 직접적인 저항이나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애국지사들은 비밀결사조직(秘密結社組織)을 만들어 지하공작운동(地下工作運動)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은 대체로 무력항쟁을 기본으로 하여 독립군을 직접 양성하거나 지원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나 독립 후의 국가에 대해서는 대한제국의 회복을 주장하는 복벽주의(復辟主義)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계몽운동 계열의 노선차이가 있었다.
1912년에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는 구한 말에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을 주도했던 많은 유생들이 참여한 비밀결사조직으로 복벽주의 이념을 내세웠다. 임병찬(林炳瓚)이 고종(高宗)의 밀지(密旨)를 받아 조직하고 전국적인 의병항쟁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임병찬이 1914년 거문도에 유배되었다가 자결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이 밖에 채응언(蔡應彦)의 의병부대는 황해도,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유격전(遊擊戰)을 펼쳐 일제(日帝)에 항거하다가, 1915년 7월에 채응언이 피체됨으로써 해산되기도 하였다.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한 비밀단체로는 박상진(朴尙鎭), 채기중(蔡祺中), 김좌진(金佐鎭) 등이 1913년에 조직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대구에서 결성된 이 단체는 각도에 지부를 두고 해외의 항일투사들과 연계하여 군대 양성과 친일파 숙청을 도모하다가 1918년에 단장인 박상진을 비롯한 주요 단원 30여명이 체포되어 잠시 그 활동이 위축되었으나,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에 활발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경상도지방에서는 대종교에 귀의한 윤상태(尹相泰), 서상일(徐相日), 이시영(李始榮) 등 유생들이 1915년에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밖에도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선명단(鮮命團), 자립단(自立團)을 비롯하여 여성조직인 송죽회(松竹會) 등 수많은 비밀결사단체가 반일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비밀결사단체는 대부분 겉으로는 종교, 교육 활동 등을 표방하면서도 안으로는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하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개항 이후 외세, 특히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 가장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은 농민층이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나 을사조약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항쟁의 중심에는 농민들이 있었다. 외세의 침략과 경제적 수탈에 가장 큰 피해와 고통을 겪은 계층이 바로 농민들이기 때문이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의 최대 희생자는 농민들이었다. 1910년대 초부터 토지나 임야의 약탈, 각종 명목의 조세수탈에 맞서 생존권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저항은 폭력투쟁의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이 마무리되는 1918년에는 더욱 가열되어 면사무소, 경찰 주재소, 헌병 분견소 등 식민통치기관이 습격을 받는 일이 많았다.
1918년 3월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농민 5백여명이 면장의 부정을 징계하기 위해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며칠 뒤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농민 4백여명은 나무하던 주민 7명이 경찰에 연행되자 폭동을 일으켰다. 그 해 5월 말에는 강원도 춘천군 서하면 농민 350여명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6월 초에는 함경남도 문천군 소재의 헌병 분견소가 부근 농민 20여명의 습격을 받아 헌병들과 보조원들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시작되었다. 식민지 지배 초기 일제에 의해 사회 간접자본의 건설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짐에 따라 주로 토목, 건설, 부두, 교통 등의 부분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많이 늘어났다. 국권피탈 이전부터 조금씩 만들어지기 시작한 노동자 단체는 대개 상호부조나 경제생활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공제회나 계(契)의 성격을 띤 것이 많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1917년부터는 노동조합이 크게 늘어났고, 임금인상과 대우개선 등을 요구하는 노동쟁의도 늘어났다. 1918년의 경우 파업 투쟁이 50건에 참가 인원은 조선인만 약 4천여명이 넘었다.
●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미 을사조약 이후로 일본의 강도적 침략 행위에 대한 각계각층의 분노와 대각성이 일기 시작했고, 1910년 이후의 야만적 탄압통치를 경험하면서 그 분노와 각성은 계층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한층 확장되면서 민족의 역량이 하나로 결집되어 갔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전세계를 감동시킨 비무력(非武力) 평화적(平和的) 시위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3·1운동은 개항 이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에서 시작하여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과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 구국계몽운동(救國啓蒙運動)으로 이어져 온 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그것이 1919년 3월 1일에 발생한 직접적인 원인은 국내, 국외의 특수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은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였다. 영국, 프랑스에 비하여 뒤늦게 산업화를 이룩한 독일은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게 된다. 이에 제국주의 강대국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결국 무력충돌(武力衝突)로 이어지게 되는데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그것이다.
4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자 30여개국의 전승국(戰勝國) 대표들이 모여 파리강화회의(講和會議)를 개최하고 전후(戰後)의 세계질서를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제창한 14개조 평화 원칙을 바탕으로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군비 축소, 국제연맹(國際聯盟) 창설,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등이었다.
민족자결주의는 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근대화를 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는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정책과는 다른 방향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독립시킬 생각이 없었다. 결국, 독일 등 패전국(敗戰國)과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에 속해 있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유럽의 일부 약소민족들만 독립을 승인받을 수 있었다.
한편 1917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차르(Czars)가 다스리는 제정이 무너지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정권이 성립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인 소련이 출현한 것이다. 레닌은 세계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조직은 코민테른(Comintern)을 결성하고 강대국에 압박받고 있는 전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과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노선 내세우는 공산국가 소련의 등장과 민족자결주의 제창은 국내외의 민족운동가들에게는 제국주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계사의 흐름이 변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이를 독립의 기회로 삼으려는 노력이 여러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1918년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했으며, 3·1운동 직후에는 국내의 유림세력이 공동으로 독립청원서를 프랑스 파리로 보내기도 하였다.
1918년 말에는 만주 길림성에서 조소앙(趙素昻)이 작성하여 김교헌(金敎獻), 김동삼(金東三), 박은식(朴殷植), 이동녕(李東寧), 이상룡(李相龍), 윤세복(尹世復), 김좌진(金佐鎭), 신채호(申采浩), 신규식(申圭植), 이범윤(李範允) 등이 민족대표 39인의 이름으로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가 발표되었으며, 1919년 2월 8일에는 최팔용(崔八鏞), 이종근(李琮根), 김도연(金度演) 등 일본 유학생 4백여명이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니 이것이 조선청년독립선언(朝鮮靑年獨立宣言)이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그 동안 온건한 교육진흥사업(敎育振興事業), 항일언론운동(抗日言論運動), 문화보호운동(文化保護運動)에 주력해 오던 종교단체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다. 그리하여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나인협(羅仁協), 오세창(吳世昌)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승훈(李昇薰), 이갑성(李甲成), 최성모(崔聖模), 신석구(申錫九) 등 기독교계 인사, 한용운(韓龍雲) 등 불교계 인사들이 손잡고 대외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 대내적으로는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원칙에 따라 운동을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거사시기는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의 이틀전인 3월 1일 정오로 정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명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도 이종일(李鐘一)에 의해 비밀리에 준비되어 전국에 미리 배포되었다.
서울의 민족대표들은 원래 군중이 많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예정이었으나,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음식점인 태화관(泰和館)으로 옮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총독부에 이 사실을 알려 자진 검거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은 3·1운동을 준비하고 불을 댕기는 역할은 하였지만 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어 갈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일제에 대한 적극적 저항보다는 타협적 자세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 후 민족대표 33인 중 일부가 친일파로 전향한 사실과 관련지어지기도 한다.
서울시위와 때를 같이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이북지역의 주요도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3월 10일을 전후하여서는 남한일대로 파급되어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5월말까지 이 지속된 이 운동에는 전국 218개군에서 2백여만명의 주민이 1500여회의 시위에 참가하여 그야말로 거족적인 독립의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 주도층은 지식인, 청년, 학생, 종교인 등이었지만, 중소상공인과 노동자, 농민 등 모든 계층이 망라되었다.
3·1운동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시위형태로 출발했지만 시위가 확산될수록 동맹파업과 예금인출, 그리고 전차 공격과 광구 파괴,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습격 등 점차 폭력적 형태로 발전해 갔다.
거족적인 3·1운동에 경악한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모두 풀어 시위운동 가담자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발포와 살육을 일삼았으며 고문과 방화 등 무자비한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특히 농촌에서의 탄압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컨대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에서는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 쳐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였으며,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전국적으로 7천 5백여명이 피살되고 4만 6천여명이 체포되었으며, 1만 6천여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리고 49개소의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타버렸다. 또한 천안의 아오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악랄한 고문끝에 옥사한 유관순(柳寬順) 학생의 경우처럼 체포된 인사들의 고통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3·1운동에서 조선 민중은 용감히 깃발을 들고 일어나 치열하게 투쟁하였고, 숭고하게 희생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과연 3·1운동은 성공한 혁명으로 봐야 하는가, 실패한 저항 운동으로 봐야 하는가?
당장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3·1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민족운동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가 무력(武力)을 총동원하여 조선인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자비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 학살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이 지닌 자체적 한계도 지적되고 있다. 3·1운동은 전 민족적인 에너지를 분출하였지만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항일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민족대표들은 평화적인 시위운동을 대규모로 전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의 여론은 한국인들을 동정하고 일제를 비난하였지만,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은 조성되지 않았다. 각종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거나 일본에 국권 반환을 요구하는 일은 헛수고였다.
어렵고 현학적 표현으로 쓰인 기미독립선언서에도 독립의 의지만을 천명하였을뿐, 일제의 수탈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내용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독립을 위해 민중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농민, 노동자 등 민중을 포함한 전 민족의 역량을 충분히 결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를 직접 타도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3·1운동을 비관적인 시각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강렬하게 천명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는 국권 강탈 과정에서 서구 열강에 대하여 조선인들은 자치 능력이 없으며, 일본인들의 지배를 달게 받아들였다고 선전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대외적인 거짓말이 3·1운동으로 만천하에 폭로된 것이다. 민족사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3·1운동이 성공했다고 보는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가 소멸하고 공화주의에 이념을 둔 독립운동만이 남게 되었으며 민주공화제를 기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3·1운동은 밖으로는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이었지만 안으로는 공화주의(共和主義) 운동이었다.
또한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좀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측면이 있다. 우선 국외에서 무장항일투쟁(武將抗日鬪爭)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평화적 만세 시위나 산발적인 폭력 투쟁만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많은 청년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 입대하였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농민운동과 노동쟁의 등 대중 운동이 크게 활발해졌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의 가장 큰 피해자인 농민과 노동자들은 폭력 투쟁과 파업을 벌이는 등 가장 적극적인 저항의 자세를 보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중의 각성은 사회주의 노선에 바탕을 둔 민족운동이 확산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도 변화시켰다. 즉 일제는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초기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병대와 경찰의 무력만으로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겉으로나마 유화적인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문화정치의 본질은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그밖에도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을 비롯하여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5·4운동 때에 배포된 격문을 보면 "조선인들은 독립을 꾀하여 독립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고 하면서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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