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의 여파가 잠잠해진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서는 새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한 조선 노인의 폭탄 공격을 받은 사건이 벌어졌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운동 단체 노인단(老人團)의 길림성 지부장인 향년 65세의 강우규(姜宇奎)가 사이토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친일 경찰관 김태석(金泰錫)에게 피체된 이 의거(義擧)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침략 통치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준 하나의 경고였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두번째의 조선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는 이른바 '문화정책'이라는 유화책(宥和策)을 내세웠다. 3·1운동을 통해 폭압적인 무력(武力)만으로는 조선인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군인만 조선총독으로 임명하던 규정을 고쳐 일반 정치인도 임명이 가능하도록 하였고,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를 보통경찰제(普通警察制)로 전환하였다. 또 조선인에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권한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교육 기회도 확대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에는 조선일보(朝鮮日報)나 동아일보(東亞日報) 같은 한글 신문이 발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식민지 지배의 가혹함을 감추려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실제로 조선총독은 8·15광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반 정치인이 임명된 적이 단 한차례도 없었다. 헌병경찰제가 폐지된 대신 경찰관서와 경찰 인원 등은 3배 이상 증가하였고, 각 면마다 주재소를 설치하여 경찰 감시망을 확대하였으며, 사상 문제를 전담하는 특별수사대의 고등형사를 따로 배치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을 제정하여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언론에 대해서도 검열제도를 실시하여 삭제와 정간뿐만 아니라 폐간까지도 총독부에서 마음대로 명령할 수 있었고, 교육 기회의 확대를 표방하였지만 실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고등교육이나 전문교육은 극히 제한되었으며, 초등교육이나 실업기술교육에만 치중하였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저급한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노예적 인간을 육성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그나마 조선인들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비해 1.6%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일제(日帝)가 이러한 기만적인 정책을 실시한 것은 3·1운동으로 고조된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의 열기를 산업이나 교육 등 문화사업으로 전환시켜 조선 민족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친일파를 적극적으로 양성하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려는 것이었다. 3·1운동은 극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우리 민족 전 계층이 함께 참여한 거족적인 민족해방운동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문화정책은 지주나 자본가 등 부르주아 계층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식민지 지배에 협력하는 세력으로 적극 포섭하고, 이들을 민중과 이간질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더욱 효율적으로 전개하려는 고도의 술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인사 중에서도 이른바 자치운동(自治運動)을 내세워 일제와 타협하려는 세력이 나타나는데, 소설가 이광수(李光洙)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崔璘)이 그 대표적 경우였다. 민족을 이간질하려는 일제의 술책은 경제수탈정책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과 식민지 지주제의 강화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농민들이 도시에 몰려 식량조달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 세워졌다. 이 계획은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에 의해 식량생산을 대폭 늘림으로써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가져가고 조선 농민들의 생활도 안정시킨다는 명목하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산미증식계획이 1920년~1925년과 1926년~1934년, 두차례에 걸쳐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6년 현재 쌀 생산량은 1920년보다 약 30%가 증가한 데 불과하였으나, 일본으로의 수출량은 약 8배로 증가하였다. 1932년~1936년의 평균 쌀 생산량은 1700만석인데, 일본으로 운반된 것은 그 절반이 넘는 876만석이었다. 그 결과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20년의 약 7두에서 4두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은 1년에 1인당 1석 2두를 소비하였다. 한국인들은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으로 메꾸어 갔다.
조선 농민들은 식량사정만 나빠진 것이 아니라, 과도한 수리조합비로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사례가 많았고, 농업구조와 유통구조 까지 쌀 중심으로 개편되어 경제구조의 파행성이 심화되었다. 결국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은 1920년대 이후 소작쟁의가 격화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한편 일본은 본격적인 자본 투자를 통해 식민지 조선에 대한 경제수탈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가로막기 위해 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규정하였던 회사령(會社令)을 폐지하였다. 조선인에 의한 회사 설립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일본인 자본가의 투자가 크게 늘어났는데, 1930년 현재 회사자본의 62.4%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한일합자가 30.8%, 그리고 한국인은 6.4%에 불과하였다. 투자대상은 주로 상업, 공업, 운송업 등에 치중하였는데, 공업과 관련된 것으로는 조선수력전기회사(朝鮮水力電氣會社)에 의한 부전강수력개발(赴戰江水力開發)과 함경도 흥남(興南)에 건설된 질소비료회사가 규모가 큰 것이었다.
한국인이 건설한 회사로는 호남지주 출신의 김성수(金性洙)가 세운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의 규모가 큰 편이었고, 대구와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 부산의 고무신 공장 등이 민족기업으로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 회사들은 중개상업이나 고리대, 토지투기 등 비생산적인 부분에 투지하여 대자본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회사가 크게 늘어남으로써 노동자층이 확산되고, 농민과 노동자들의 쟁의(爭議)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밖에 일본은 목화재배를 장려하여 헐값으로 가져 가고 누에고치 생산을 강제하여 통제가격인 헐값으로 가져 갔으며, 광업생산의 80% 이상을 독점하였다. 그리고 연초전매제도와 교통, 체신의 관영사업을 통해 총독부수입을 늘리고, 총독부재정의 80%에 해당하는 액수를 각종 세금을 통해 충당하였다. 총독부는 크게 늘어난 수입을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를 지원하고 각종 통치기관을 운영하는 데에 지출하였다.
● 전시 수탈 경제체제와 대동아공영권건설(大東亞共榮圈建設)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사회를 파괴하고 유럽 사람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산업 기술상의 진보를 가져오게 되어 이를 바탕으로 종전 후에 유럽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공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그렇지만 대중의 구매력이 늘어난 생산력을 따라가지 못하여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났다. 제조된 물건이 팔리지 않자 기업은 문을 닫았고, 자금을 빌려준 은행은 도산하였으며, 실업자가 크게 늘어났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이른바 경제 대공황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일본은 본래 국내 시장이 협소하여 원료 수입과 상품 수출에 있어서 대외 의존도가 매우 높은 나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에 경기침체로 불황을 겪던 일본은 대공황을 맞아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블록 경제를 형성하고 보호무역정책을 강화하자 더욱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의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대량 해고가 이어졌으며, 노동자 임금이 삭감되었다. 조선과 대만에서 많은 쌀이 유입되면서 공급이 넘치자 쌀값이 폭등하였고 다른 농산물의 가격도 폭락하였다. 갱계가 더욱 어려워진 노동자와 농민의 노동쟁의와 소작쟁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민생을 안정시켜야 하는 정치인들은 각종 부패사건에 연루되어 국민의 믿음을 잃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사비가 크게 줄어든 데에 불만을 품은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1931년 9월 이른바 유조구참변(柳條溝慘變)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세계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전격적으로 상하이를 침략하여 점령하였다. 3월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執政)으로 삼아 만주국을 세우고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였다. 뒤이어 군부를 중심으로 한 파시즘 세력은 국가 개조를 주장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후 일본은 자국의 황제를 신격화하는 등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군국주의 파시즘 체제로 전환되었다.
일제는 만주를 점령하여 본토와 식민지 조선, 만주를 아우르는 블록 경제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경제 공황의 위기를 극복하고, 중국과 몽골까지도 자신들의 상품 판매와 자본 투자의 시장으로 삼으려 하였다. 또한, 당시의 일본 군부는 만주와 몽골을 장악하여 다가올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만주에서 소련의 세력이 확대되면 결국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도 위협을 받게 되고 일본의 안전도 위협받는다는 논리이다. 아무튼 일본의 만주 침략은 조선을 안정적인 식민지로 유지하면서 항구적으로 수탈을 계속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일제의 만주 침략은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는 고통의 시작이었지만 일본 경제의 회복에는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군수품의 수요가 크게 증가되고 상품 시장이 확대되면서 일본의 국내경기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1933년에는 세계 공황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였다. 서구 열강보다도 빠르게 공황에서 탈출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 세력의 야욕은 끝이 없었고, 군수산업에 의존한 독점 자본은 또 다른 침략 전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치열하게 전개된 만주 지역의 항일투쟁은 일제의 안정적인 만주 지배를 계속 위협하였다.
1933년 일제는 일본군의 만주 철수를 결의한 국제연맹(國際聯盟)을 탈퇴하고 1937년 7월 중국 화북 지방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일제는 그해 12월에 중국 국민당 정부의 근거지였던 난징을 점령하고 약 30만명의 인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란이 장기화되자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된 일제는 석유, 고무 등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린다. 때마침 유럽에서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이 승승장구하면서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점령하자, 더욱 기가 살아난 일제는 프랑스가 식민통치를 하던 동남아시아 일대를 침략하여 점령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하여 중국과 동남아 지역에서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는 경제 봉쇄 조치를 취하여 일본에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에 맞서 1941년 12월에 하와이의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1931년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일제의 대외침략(對外侵略)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건설(大東亞共榮圈建設)이라는 헛된 꿈을 안고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계속 확대되었다. 이러한 침략 전쟁의 확대는 선량한 일본 국민에게도 고통을 주었지만 식민지 주민인 조선인들에게는 더욱 큰 고통을 주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 전쟁의 수행을 지원할 후방 기지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대동아공영권건설은 서양 열강에 맞서 아시아에 공존공영의 새 질서를 세우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 중국, 태국, 베트남, 필리핀 등까지 포함하는 정치, 경제적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이론이었다. 1930년대 이후 전개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이며, 유럽 강국들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권을 구축하려는 의도였다. 소위 대동아공영권은 겉으로는 모든 아시아 국가의 공존을 외치고 있었지만 실상은 아시아에 유일한 국가로 오직 일본 하나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 숨겨져 있었으므로, 아시아 전지역을 일본의 세력권에 귀속시키려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형식적이나마 자유를 허용하던 기만적인 '문화정책'의 허울을 벗어 버리고 본격적으로 전시체제를 강요하였다.
● 세계 경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경제 공황에 대한 세계 열강의 대응은 어떠했을까? 미국은 이른바 '뉴딜정책'을 실시하여 연방 정부의 주도로 고용을 창출하고 생산을 조정하며, 구매력 증진에 노력함으로써 공황을 극복해 간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경제를 통제하는 수정자본주의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과 식민지를 묶는 블록 경제를 형성하여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함으로써 공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경제 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발전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국내 시장이 좁고 해외 식민지가 빈약한 후발적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경제적 혼란을 틈타 파시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다. 파시즘이란 개인보다는 국가, 민족을 우선시하는 극우적인 사상 체계로서, 집단 전체를 위해서 개인의 존엄성이 무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 특성을 지니며,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는 모순된다. 또한, 독일의 게르만족 우월주의나 일본의 천황 중심주의와 같은 극단적 민족주의를 내세운다.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는 모두 이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 세 나라의 파시즘 세력은 대외침략을 통해 세계 공황이라는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기존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군수물자의 생산을 통해 과잉 자본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침략을 강행하여 식민지체제를 재편성하려 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들 파시즘 국가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대외침략을 시도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블록 경제권에 대하여 후발적 자본주의 국가의 파시즘 세력이 일으킨 식민지 재편 전쟁이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성립과 초기 활동
국권 피탈을 전후하여 만주, 연해주 일대와 중국 관내, 미국 등 국외의 여러 지역에 많은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단체들이 조직된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일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점차 형성되어 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3·1운동을 계기로 급진전되어 국내외에 여러 군데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국내의 조선민국 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 등이었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여러 군데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단일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교섭이 시작되었다. 우선 국외의 세력 기반이 있는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서 교섭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상하이의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승만(李承萬)이 한성정부의 수립 소식을 듣고 이미 워싱턴에 집정관 총재 집무실을 차려놓고 대통령 행세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 완전한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의 존재도 고려해야만 했다.
통합 논의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위치를 상하이로 할 것인가, 간도나 연해주로 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양자간의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3·1운동 이후의 민족적 열망을 반영하여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의 법통을 계승하며, 정부의 위치는 당분간 상하이에 두고,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로 한다.'는 등의 단일 정부 수립 원칙에 동의한다.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한국민의회의 일부 세력이 합류하였고, 한성정부에서 제시한 각료 명단으로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등을 채택하여 출범하였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다양한 노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의 노선을 구분해 보면 이승만은 전형적인 외교론자이고, 국무총리 이동휘는 무력투쟁(武力鬪爭)을 통한 독립 쟁취를 부르짖는 사회주의자였으며,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는 실력양성론자였다. 임시정부에 이처럼 다양한 노선의 세력이 참여하여 일단 하나로 뭉쳤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더욱이 사회주의 계열의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이 임시정부의 야당으로 가담하였고, 만주 지역의 유력한 반일 무장 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도 일단 임시정부의 군무부 산하에 합류하게 되었다. 3·1운동으로 나타난 온 민족의 염원을 담은 결과였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위치한 것은 외교 활동에 역점을 두려는 의도였다. 또한 외교론자들은 어디까지나 무력투쟁은 최후의 수단이며, 준비가 되지 않은 무력투쟁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만주 지역에서 전개되는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은 주로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외교 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은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交通局)이 주로 담당하였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재정 조달을 맡아 서울에 총판을 두고, 도(道)에는 독판, 부(府)와 군(郡)에는 부장과 군감, 면(面)에는 면감을 두었다. 하지만 일제(日帝)가 철저히 감시하고 탄아바는 상황에서 전국적 조직을 제대로 갖추기는 쉽지 않았다. 주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지역에 설치된 연통제 조직은 1921년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와해되었다.
교통국은 국내와 만주 지역을 연결하는 통신조직으로서 아일랜드인 죠지 쇼(George L. Shaw)가 경영하는 만주 안동현의 이륭양행(怡隆洋行)에 거점을 두고 정보 수집, 통신, 독립운동 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내 조직도 서치하여 하였으나, 평안도와 함경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륭양행의 안동 교통국도 1920년 7월에 쇼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사실상 역할이 끝나게 되었다. 이밖에도 임시정부는 해외 동포에게 애국적 공채를 발행하거나 의연금을 모금하여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초기에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외교 활동이었다. 강대국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과 독립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해 파리 강화회의나 워싱턴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고 국제연맹(國際聯盟)에도 가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회의에서 조선 문제는 언급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의 외교적 전략은 미국, 영국, 중국 등 각국의 승인을 받는 쪽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구미 위원부와 파리 위원부, 런던 위원부 등을 설치하였으나 역시 별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구미 위원부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1925년 3월에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탄핵된 뒤로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반면, 중국과 소련에 대한 외교적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중국은 당시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쑨원[孫文]이 이쓰는 국민당의 광동 정부의 교섭하여 두 정부가 서로 상대를 승인하고, 중국 측은 조선인 학생을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교시킨다는 데에 합의하였다. 소련과의 교섭은 국무총리 이동휘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확대를 노리던 소련은 조선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면서 40만 루블의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 자금의 분배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소련과의 관계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에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은 위치상의 한계 때문에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였다. 기본적인 방향도 무력투쟁을 당장 전개하는 것보다는 독립 전쟁의 준비에 방향이 맞춰 있었다. 만주 지방의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 독립군 부대를 임시정부 산하로 흡수하였으나 명목상으로만 그리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임시정부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간행하여 국내외 동포들의 소식을 알렸으며, 사료 편찬소를 설치하고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 관련 역사서를 간행하여 일제의 침략이 정당하지 못한 것임을 강조하고 민족정신의 고취에 전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에 여러 지역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와 각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였고, 무력투쟁론, 외교론, 실력양성론 등 다양한 노선의 독립운동 세력을 일단 하나로 결집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위치나 향후 독립운동의 노선과 방략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더욱이 연통제, 교통국 등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한 조직들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제 기능을 못하게 되고, 기대를 걸었던 외교 활동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이 알려져 독립운동가들의 분노가 촉발되었다. 이동휘도 임시정부를 연해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승만과 안창호가 반대하자 국무총리의 직책을 사임하고 상하이를 떠났다. 이처럼 임시정부가 분열, 약화되어 독립운동의 지도적 역할이 힘들게 되자, 향후 진로를 다시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곳에서 제기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에 가서야 각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 60여명이 참가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향후 진로와 관련하여 갈등이 일어났다. 현 임시정부를 개선하여 존속시키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기관을 건설하자는 창조파가 팽팽하게 대립한 것이다.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양 세력의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6개월만에 결렬되었다.
민족운동전선의 광범위한 요구와 기대를 바탕으로 출발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본래 활동 기반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기관의 수립에 실패한 것이고, 독립운동의 노선과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을 의미했다. 임시정부는 큰 타격을 받아 침체되었고 국민대표회의에 불참한 김구(金九) 등 몇몇의 임시정부 옹호파 인사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다. 1920년대 중반, 세력이 크게 약해진 임시정부는 1925년에 이승만을 탄핵하고, 두차례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위원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했다. 그 후 임시정부는 김구를 중심으로 유지되면서 1930년대 초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을 통해 다시 그 존재를 뚜렷이 드러낸다.
● 1920년대 만주 독립군의 대일항전(對日抗戰)
1910년대에는 만주, 연해주 일대에 독립운동 근거지가 건설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군사단체가 양성되었다. 3·1운동 이후에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의 조직적 전개가 광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더욱 확산되어 많은 독립군들이 새로 조직되거나 전투력이 크게 증강되어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의 활성화가 이루어졌다. 북간도 지역에서는 대종교도들의 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이 모체가 되어 결성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기독교도들이 만든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산하의 민병대와 그 후원을 받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의 활약이 컸다. 남만주 지역에서는 삼원보의 한족회(韓族會)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인원을 중심으로 구성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구한말의 의병항쟁을 지휘하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임시정부의 직할 부대로 편성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들도 활동을 벌였고, 3·1운동 직후에는 천마산대(天摩山隊), 보합단(普合團) 등의 무장 단체가 국내에서 조직되어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하였다.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벌이는 독립군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총기(銃器) 및 탄약(彈藥)의 구입과 독립군 운영을 위한 군자금 확보였다. 군자금은 일차적으로 만주 지역의 한국 주민들에게서 징수하였다. 독립군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재산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징수하였는데, 부족한 자금은 국내에 비밀요원을 파견하여 의연금 형태로 모금하였다. 자발적인 협조를 구한 것이었다. 친일파나 비협조적인 부호들에게는 살해 위협을 통해 강제로 모금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간도 지방의 경우에는 많은 독립군들이 활동하다 보니 교민들에게는 이중 삼중의 부담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간혹 가짜 독립군 행세를 하면서 교민을 약탈하는 악랄한 무리도 있었다.
총기와 탄약은 주로 소련으로부터 구입하였다. 소비에트 군대인 적군(赤軍)과 제정 러시아 군대인 백군(白軍) 간의 내전 과정에서 많은 군수품이 유출되었기 때문에 군자금만 있으면 무기와 장비 구입은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또 제1차 세계대전 때 시베리아에 출병한 체코의 군대가 철수하면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에 무기를 값싸게 넘겨주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독립군 양성 기관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였다. 원래 이름이 신흥학교였던 이 교육기관은 처음에는 중학반의 군사반을 두었다가 나중에는 군사반만 두었고, 고등 군사반을 따라 설치하여 고급 장교를 양성하기도 했는데, 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고 나서, 지원자가 늘어나자 분교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북로군정서가 설립한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도 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는데, 대한제국 군대 장교 출신인 신팔균(申八均), 일본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를 졸업한 지청천(池靑天)과 김응천(金應天),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과정을 마친 이범석(李範奭) 등이 독립군에 합류하고 나서 사관 양성과 훈련은 점차 정규적인 형태로 발전되었다.
독립군은 일반적으로 자진 입대한 청년들을 병력으로 썼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관할 지역 주민들에 대해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물론 병사를 모집하거나 자진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3·1운동 이후에는 국내로부터 많은 애국 청년들이 망명하여 독립군에 지원(志願)하였고, 독립군 수뇌부에서 국내에 간부를 파견하여 모병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3·1운동 이후 무장전투력의 역량이 한층 강화된 독립군 각 부대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국내진입작전(國內進入作戰)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벌였다. 주조(駐朝) 일본 경찰의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1920년 한해 동안 독립군이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군 국경 수비대와 교전을 벌인 회수는 1천 6백여회나 될 정도였다. 이처럼 수많은 항일전(抗日戰) 중에 가장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 독립군은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었다. 1919년 여름에 혜산진(惠山鎭)을 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 큰 피해를 입히고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에 있는 금정(金井)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던 대한독립군은 평안북도 강계의 만포진(滿浦鎭)을 점령하고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사흘간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0년 6월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소속 독립군이 일본군 제19사단 예하 1개 중대 병력을 격퇴시키는 승리를 거두자, 19사단 사령부에서는 야스카와[安川二郎] 소좌(少佐)가 인솔하는 1개 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독립군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총사령관인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안무(安武)가 통솔하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부대와 병력을 합쳐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였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안산(安山)과 고려령(高麗嶺)에서 총격전(銃擊戰)을 펼쳐 일본군 120여명을 사살한 뒤, 적군의 본대를 봉오동(鳳梧洞)으로 유인하여 매복포위작전(埋伏包圍作戰)으로 치명타를 가하였다. 이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일본군은 150여명의 전사자와 2백여명의 부상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지만, 대한북로독군부의 손실은 전사자 4명에 불과했다.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와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일본군이 패배하자 일제(日帝)는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식민통치의 가장 큰 위협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에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間島)로 침투시켜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을 뿌리까지 잘라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일제는 먼저 훈춘사변(琿春事變)을 일으켜 만주 출병의 명분을 세우고, 제14사단과 제19사단 및 만철(滿鐵)수비대에서 차출한 일본군 병사 2만 5천여명을 동원하여 북간도 지방의 독립군 기지를 포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신민단(新民團), 의군부(義軍府) 등 여러 독립군들은 오지로 피신하라는 중국 당국의 권유를 받아들여 백두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질 경우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 민간인들의 희생이 클 것이라는 염려도 있었기에 피전책(避戰策)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좌진(金佐鎭)이 총사령관으로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가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로 진군하고 있을 때, 독립군의 위치를 파악한 일본군 제19사단 소속 1만여명의 대부대가 그 일대에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적군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행군을 멈춘 뒤, 10월 21일 백운평(白雲坪)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전위부대 2백여명을 기습공격, 전멸시켰다. 이어 홍범도가 통솔하는 독립군 연합부대(獨立軍聯合部隊)가 21일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어랑촌(漁郞村)으로 이동했으며, 시마다[島田] 중위(中尉)의 기병중대를 천수평(泉水坪)에서 격파하고 어랑촌의 고지를 선점한 북로군정서는 22일 일본군 19사단 주력부대를 맞아 치열한 결사항전(決死抗戰)을 펼쳤다. 이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북로군정서는 홍범도 부대의 지원엄호사격(支援掩護射擊)을 받아 적군의 돌격전(突擊戰)을 무력화시킨 뒤, 일본군의 포위망에서 물러나면서 24일 천보산교전(天寶山交戰), 26일 고동하전투(古洞河戰鬪)를 통해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쳤다.
이렇게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10여회에 걸쳐 전개된 전투에서 북로군정서를 포함한 여러 독립군들은 일본군 1천 2백여명 이상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이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사상 최고의 승전(勝戰)인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이었다.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에 출병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완전히 섬멸하겠다는 당초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만 발생하자 간도 지방의 한국인 마을을 급습하여 무고한 교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가옥과 교회 및 학교를 불태우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독립군과의 교전에서 계속 패배한 데 대한 보복으로 독립군에게 도움을 준 간도 거주 한국인들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를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하는데, 1920년 10월에 시작된 일본군의 만행은 해를 넘겨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친 여러 독립군은 1920년 말경에 소련과 만주의 국경 지대인 밀산부로 이동하여 병력을 재편성하였다. 이곳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주도 아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신민단(新民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의군부(義軍府), 혈성단(血誠團),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모든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총사령관에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에 이장녕(李章寧), 여단장에 지청천(池靑天), 중대장에 김창환(金昌煥)·조동식(趙東植)·윤경천(尹擎天)·오광선(吳光鮮) 등을 각각 선임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전 세계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소련 정부의 대외적 발표에 고무되어 소련 땅인 이만(iman)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당시 소련은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간의 내전이 한창이었고, 일본과 미국의 군대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의 병력 중에서 김좌진 등이 이끄는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돌아오지만, 일부 독립군은 적군을 돕기로 결정하고 지금의 스바보드니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자유시에는 만주 지역에서 이동한 독립군뿐만 아니라 연해주에서 결성된 여러 한국인 사회주의 무장 단체가 있었다. 이들 부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계열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세력 간에 부대의 편성과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이르쿠츠크파를 지원하던 소련 적군이 상해파인 사할린 의용군 등 독립군 부대를 무장 해체시키기 위한 공격을 감행하여 3백여명이 넘는 독립군을 살상하였는데, 이 비극적 사건이 바로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었다.
자유시참변 이후에도 적군에 편입되지 않은 채 적군을 도와서 백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일본군에 저항한 독립군들이 있었다. 백군을 물리친 이후 독립군을 지원해 주겠다는 적군 측의 약속을 믿은 것이었다. 그러나 1922년 10월 백군을 완전히 격파한 이후 소련은 약속을 저버리고 적군에 편입되지 않은 독립군을 강제로 무장 해제시켰다. 애초에 일본과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독립군들은 어쩔 수 없이 적군에 편입되거나 적군을 피해 만주로 이동해야 했다. 이로써 1923년 이후 연해주에서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 독립운동 삼부시대(三府時代)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승리와 경신참변(庚申慘變),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의 시련을 겪으면서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지도자들은 효율적인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독립군을 통합하여 단일적 대오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각 독립운동 군사단체들이 활발한 통합운동(統合運動)을 전개한 결과 남만주에서는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주장하는 세력이 이탈함으로써 분열되고, 다시 참의부(參議府),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등 삼부가 성립되었다.
1923년에 형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는 집안현(輯安縣)을 중심으로 무송, 안도, 장백 등 압록강 연안 지역의 동포 사회를 관할하였고, 국내진입작전(國內進入作戰)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길림(吉林)에서는 1924년 11월에 참의부에 가담하지 않은 통의부 세력을 중심으로 여러 단체가 통합되어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고 남만주 일대의 동포 사회를 관할하였다. 한편, 북만주의 영안현(永安縣)에서도 1925년 1월에 김좌진의 대한독립군단 등을 주축으로 한 신민부(新民府)가 형성되어 북만주 일대의 동포 사회를 관할하였다.
참의부(參議府),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등 삼부는 각기 관할 지역의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의용군 훈련 및 작전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민정 조직은 제한적이나마 동포 사회에서 선출하는 임원들로 구성되었고,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 분립 형태를 띠고 있었다. 삼부는 한마디로 만주 지역의 한국인 동포 사회를 셋으로 나눠 이끌어 간 공화주의 자치 정부라 할 수 있었다. 관할 동포 사회에서 세금을 징수하여 정부를 운영하였고, 각기 수백명의 독립군을 보유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한국인 동포들에게는 부담이 되어 만주 교민 사회에서 점차 민족주이 세력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만주에서도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
1920년대에는 만주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지식인, 학생, 청년들은 많은 수의 사회주의 단체들을 조직하여 '민족 해방을 위한 결사적 분투', '무산 계급의 해방' 등을 구호로 내세우며 동포 사회에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日帝)는 만주의 군벌 세력과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여 독립운동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삼시협정에는 '만주 군벌의 주도 아래 독립운동 단체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인도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이로 인해 만주 지역에서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은 더욱 힘들어졌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분열되어 있는 민족운동 전선을 하나로 통합하여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을 건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그 결과 정의부(正義府)의 주도 아래 참의부(參議府) 일부 세력과 신민부(新民府)의 민정파를 끌어들여 남만주 일대에 국민부(國民府)라는 새로운 군정부를 결성하고 삼부를 해체하였다. 그 후 국민부는 1929년 12월에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조직하고, 그 휘하에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편성하여 대일항전(對日抗戰)에 나서게 된다.
한편 정의부 중심의 삼부 통합에 반대하며 북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신민부의 군정파와 정의부 일부 세력은 1928년 12월에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결성하였다. 그 후 혁신의회는 1929년 9월에 김좌진(金佐鎭)을 중심으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였으나, 그가 암살된 후 지청천(池靑天), 신숙(申肅), 이장녕(李章寧) 등이 중심이 되어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북만주 지역을 관할하는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1931년 11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조직하여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을 전개하였다.
● 의열단(義烈團)의 항일투쟁(抗日鬪爭)
테러를 통한 투쟁으로 일제(日帝)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胄) 등의 주도로 만주 길림(吉林)에서 창단되었으며, 이들은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나 친일파 거두 등을 처단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각 경찰서 등을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다. 1920년 박재혁(朴載赫)의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 암살 기도를 시작으로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투탄(投彈), 1921년 김익상(金益相)의 조선총독부 건물 폭탄 공격, 1923년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투탄(投彈)과 총격전(銃擊戰), 1924년 김지섭(金祉燮)의 일본 왕궁 투탄(投彈), 1926년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투탄(投彈)과 일본인 여러명 사살은 의열단이 배후에서 조종했던 유명한 반일의거(反日義擧)였다.
이러한 의열단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은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동포들의 민족 독립 의식을 일깨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1923년 신채호(申采浩)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에 의해 '민중을 중심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일본의 식민통치를 타도하고 제국주의를 몰아내자.'라는 내용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작성, 천명하였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외교론(外交論), 독립준비론(獨立準備論)과 더불어 국내에서 등장한 자치권운동(自治權運動), 참정권운동(參政權運動)을 맹렬히 비판하고 민중이 직접적으로 혁명을 일으켜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개인적 폭력 투쟁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민중의 혁명을 촉발시키는 데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의열단(義烈團)은 1920년대 후반부터 테러리즘에 의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의 한계를 느끼고 무력항쟁(武力抗爭)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김원봉을 비롯한 단원들은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입교하여 체계적인 군사 훈련과 간부 교육을 받았다. 단원의 상당수가 이때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 일어난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참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후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난징 교외에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幹部學校)를 세워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고, 중국 관내 정당, 단체의 통합 운동을 주도하여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창당에 중심 역할을 하였다.
● 경제 개발의 탈을 쓴 병참기지화 정책
전시체제 속에서 일제(日帝)는 조선인들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철저히 탄압하고 독립 의지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조선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크게 강화하고 조선 주둔 군사력을 늘리면서 경찰 기구를 계속 확대하였다. 또 더욱 치열해진 사회주의적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통제도 더욱 강화하였다. 1928년에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은 '기존 체제에 변혁을 도모하는 사람'을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더욱 잔혹하게 바뀌었다. 이른바 사상전향제도(思想轉向制度)를 만들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구속하였으며, 사상범예방구금령(思想犯豫防拘禁令)을 제정하여 항일투쟁에 참여했던 애국지사들을 미리 구금하였다.
또한,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 억지 주장을 내세우면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을 실시하였다. 황국신민화 정책이란 조선인을 '일본 황제의 충성스런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것으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소멸시켜 식민지 노예로 부려먹으려는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이었다. 일제는 농촌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 자력갱생운동(自力更生運動) 등을 추진하지만, 이것은 식민지 농민 경제를 회복시킬 실제적 방안은 뒷전으로 하면서 농민의 자각을 우선하는 정신적 운동으로 추진되었다. 즉 일제는 조선 농민들의 생활 수준이 어려운 이유가 게으르고 무지한 민족성에 있음을 강조하고 일본 정신과 일본 풍습을 배워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일제는 이런 운동들을 농촌에 대한 통제와 황국신민화를 위해 이용했을 뿐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오늘날 '국기에 대한 맹세문'의 원조격인 '황국신민의 서사'를 만들어 제창하도록 하였으며, 전국의 읍면(邑面)마다 일본 황족들의 영혼을 모시는 신사(神社)를 지어 놓고 억지로 참배하도록 강요하였고, 참배를 거부하는 학교는 폐교시켰다. 또한 학교나 관공서에서 조선 언어 사용을 완전히 금지시켰으며, 심지어 친일적 논조를 주저하지 않던 조선일보(朝鮮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 등도 단지 한글과 조선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완전히 폐간시켰다. 1939년부터는 민족 교유의 성명(姓名)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는 창씨개명제(創氏改名制)를 강요하였고,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자녀를 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하게 하였으며, 식량 배급과 우편 배달도 금지시켰다.
일제가 이와 같이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한 목적은 조선인의 민족성을 제거하고, 이른바 '2등 일본인'이라는 인식을 심어 줌으로써 일본의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한 침략 전쟁에 조선인들을 끌어들이려는 데에 있었다. 조선인들의 저항 의식을 완전히 잠재우지 않고는 침략 전쟁에 필요한 물자나 인력을 효율적으로 수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정책은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농업 부분의 수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회사령(會社令)의 철폐 이후 일본 자본의 진출이 이루어졌지만 주로 식료품, 소비재 등의 경공업 분야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 일제는 농업과 더불어 공업과 광업도 함께 발전시킨다는 이른바 농공병진(農工竝進) 정책을 표방하면서 식민지 공업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농촌에서도 산미증식계획을 중단하고, 공업 원료 증산을 위한 남면북양(南綿北羊) 정책을 실시하였다.
식민지 공업화는 경제 공황의 극복과 대륙 침략에 따른 군수물자를 원활히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한반도를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일본의 독점 자본이 대거 조선에 침투되었다. 미쓰이, 미쓰비시, 노구치 등은 이 시기 조선에 진출한 대표적 독점 자본들이었다. 이들의 투자는 전력, 화학, 기계, 금속 등 중화학 공업과 철, 석탄, 알류미늄, 마그네슘 등 광업 부분에 집중되었다. 대부분이 침략 전쟁의 수행을 위한 군수 산업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이후에는 경공업에 비하여 중화학 공업이 기형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두고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 타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 등 일본의 극우파 역사학자들과 안병직(安秉稷), 이영훈(李榮薰), 박효종(朴孝鍾) 등 한국의 일부 친일적 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수탈만 한 것이 아니고 개발도 하였으며,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1960년대~1970년대에 이룩한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도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통해 지도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첫째, 일제가 수탈을 위해 자본을 투자하고 공업 시설 등을 세운 것을 둑 경제 개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조선 경제는 철저히 일본 경제에 종속된 상태에서 운영되었다. 전체 일본 경제의 하청업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당시 대다수 조선인들의 생활은 기본적은 생존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둘째, 공업 생산의 대부분은 일본 독점 자본이 경영하는 몇개의 대규모 공장이 차지했을 뿐이다. 중소 공업도 대부분 군수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하였고, 그나마 대부분 일본 기업에 흡수되었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더욱 커져서 전체의 94%나 되었다.
셋째, 공업 시설의 대부분은 38도선 북쪽에 건설되었다. 더욱이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은 대부분의 산업 시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1960년대, 1970년대 한국의 빠른 경제 성장은 분단과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이룩된 것이지 일제강점기의 경제 개발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억지 논리이다.
마지막으로 인류 사회가 나가야 할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즉 어느 민족이 힘을 앞세워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인류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공존공영(共存共榮)을 해치는 것이다. 일제(日帝)는 우리 민족의 모든 권리를 억압하고, 생존권을 위협하면서 수탈을 일삼았다. 일제가 효율적인 수탈을 위해 경제 시설을 만들어 놓은 것을 두고 경제 발전이나 근대화를 운운하는 것은 침략주의(侵略主義)를 합리화하는 반평화(反平話), 반인륜(反人倫)적 역사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일제의 침략이라는 그릇된 역사에는 애써 무관심하면서 일부 성과만을 부각시켜 역사를 평가하는 태도는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역사 인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숟가락까지 빼앗아 가는 일제의 수탈 정책
중일전쟁(中日戰爭) 이후 일제의 인력과 물자 수탈은 더욱 직접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바뀌었다. 전쟁터가 계속 확장됨에 따라 일본 내의 인력과 자원만으로는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무기를 주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선 청년들을 군사력으로 직접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피폐해진 농촌에서 생활 형편이 너무 어려운 청년들이 조선총독부의 계략에 속아 일본 군대에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학도지원병 제도와 징병제도를 실시하였다. 학도지원병은 전문학교나 대학교의 학생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이때 끌려간 학병들 중에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하여 한국 광복군(韓國光復軍)이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징병제도는 1944년에 실시되었는데, 일제의 패망까지 불과 1년 남짓 동안 약 20만명의 조선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노동력의 강제 동원도 잔악하게 이루어졌다.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과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의 실시로 생활 기반을 잃고 농촌에서 쫓겨나 실업 상태에 있는 조선인들을 일제는 '모집(募集)'이라는 이름으로 광산이나 토목 공사장에 강제 동원하였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국민징용령을 내려 일제의 패망 때까지 100만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였다. 이들은 군대식 규율로 통제되는 수용소에서 최악의 생활 조건으로 살아가야 했고, 공사가 끝난 이후에는 기밀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 학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 러시아의 사할린에 사는 조선인들은 이때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과 그 후손이다.
일제는 학도보국대(學徒報國隊)를 조직하여 어린이들까지도 강제 노동에 동원하였다. 12세~40세까지의 여성들은 1944년 여자정신대근로령(女子挺身隊勤勞令)에 따라 강제 동원되었다. 이들은 군수공장에서 집단적으로 강제 노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상당수의 여성들은 전쟁터로 보내져 일본군의 성(性) 노예나 마찬가지인 군위안부(軍慰安婦)가 되어야 했다. 또한, 관리 및 교사 등의 협박과 꼬임에 빠지거나 약간의 돈에 팔려 가 군위안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전쟁 물자에 대한 직접적인 수탈도 이른바 공출(供出)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중일전쟁 직후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에 따라 미곡에 대한 강제 공출과 식량배급제가 실시되었다. 또한,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쇠붙이를 공출하였는데, 절이나 교회의 종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쓰는 놋그릇과 숟가락까지도 빼앗아 갔다. 또 대체연료를 만들기 위해 소나무의 뿌리를 캐도록 어린 학생들을 온종일 동원하기도 하였다.
● 일제(日帝)의 죄악이 만들어낸 군위안부(軍慰安婦)는 인류 사회의 정의와 관련된 문제
침략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수많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성(性) 노예나 다름없는 군위안부(軍慰安婦)로 삼는 반인륜(反人倫)적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성의 순결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그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1965년 한일협정(韓日協定)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야 한 여성운동가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에는 여성단체들이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 협의회'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었다.
군위안부 문제는 크게 일제강점기 민족 수난사라는 측면과 여성의 인권과 지위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민족 수난사의 측면에서 군위안부는 일제의 식민통치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 사실을 부인하고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한일협정의 체결로 모든 대일청구권(對日請求權)은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과거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반성과 사죄를 거부하는 일본 측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여성의 인권과 지위라는 측면에서 군위안부는 과거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폭력의 가장 잔혹한 유형을 보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을 확보하고 정의로운 인류 사회를 열어 가기 위해 명백히 밝히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결국 군위안부 문제는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불평등한 처지에 놓여 있는 전세계 여성의 문제이며, 인류 사회의 정의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1930년대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과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1931년 9월 일제(日帝)는 만주를 침략하고 이듬해 3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執政)으로 삼아 장춘(長春)에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30년대 만주 지역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이 중심이 되어 주로 1930년대 전반기에 항일전(抗日戰)을 펼쳤으며,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가 조직되어 1940년대까지도 치열한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전개하였다. 나중에는 이 두 세력 모두 중국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과 연대하여 일본 군국주의 세력에 대항하게 된다.
1929년에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당부에 의해 창설된 무장 단체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면서 편제와 지휘체계가 자주 바뀌었고, 제1중대장이었던 양세봉(梁世奉)이 총사령관으로 승진되고 김학규(金學奎)가 참모장에 임명된 이후부터는 새롭게 대오를 가다듬고 본격적인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였다. 조선혁명군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무장 단체인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爲軍)과 병력을 합쳐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수백회의 전투를 벌였다. 특히 1932년 3월 신빈현(新賓縣) 일대에서 벌어진 영릉가성전투(永陵街城戰鬪)에서 일본군 1개 여단 병력을 격퇴시키고 수많은 군마(軍馬)와 총기(銃器)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며 일제(日帝)의 대륙 침략 계획을 위협하였다.
1933년 5월부터 7월까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爲軍)은 흥경성(興京城) 일대에서 방어선을 치고 일본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물리치며 빼어난 전투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폭격기(爆擊機)까지 동원한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장청문(江淸門)으로 퇴각, 재기를 도모하던 중에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이 일본군의 밀정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박창해(朴昌海)의 계략에 빠져 소황구(小荒溝)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전사하였다. 그후에도 조선혁명군은 중국 공산당이 편성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에 포함되어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 홍진(洪震), 신숙(申肅) 등에 의해 북만주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결의하고 관할 지역의 청장년을 징집하여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결성하였다. 지청천(池靑天)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한국독립군은 중동철도호로군(中東鐵道護路軍),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등과 연합전선(聯合戰線)을 구축하고 1932년 9월과 11월 제1, 2차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933년 3월 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 4월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6월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를 통해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었다. 한국독립군의 가장 큰 승전(勝戰)은 1933년 7월 3일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로, 이케다 신이치[池田信吉] 대좌(大佐)가 총지휘하는 일본 관동군(關東軍) 간도파견대(間島派遣隊)를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 제14사단과 함께 전멸시킨 이 전투는 1920년대의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과 더불어 대일독립전쟁(對日獨立戰爭) 사상 가장 통쾌한 승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전리품 배분 등을 둘러싸고 중국 의용군 측과 갈등이 생겨 중국군에 의해 독립군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간부가 구금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은 내분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1933년 10월에는 한국독립군의 간부 상당수가 중국 관내로의 이동을 결정하지만 중국으로의 입국을 거부한 일부 지대는 밀산, 영안의 산림지대를 중심으로 항일유격전(抗日遊擊戰)을 계속하거나 공산주의 계열의 중국 무장 단체에 합류하였다. 한편 중국 관내로 이동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은 김구(金九)의 초빙으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설립된 한국인 청년 군사간부 특별훈련반의 교관 및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1940년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설에 참여하여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 동만주 지역의 항일유격전(抗日遊擊戰)
1920년대 말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생활해야 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소작농과 자소작농들은 고율 소작료, 고리대 등으로 지주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다. 정치적으로 일본의 만주 침략에 재만(在滿) 조선인들이 첨병 노릇을 한다고 여기는 중국 군벌 당국의 핍박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더군다나 일제는 재만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중국인들을 압박함으로써 중국 측의 반한(反韓) 감정을 부추기고 민족 이간질에 나섰다. 이러한 처지는 재만 조선인들의 민족적, 계급적 각성을 촉진하여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만주 지역 공산주의 세력은 만주사변(滿洲事變) 직후인 1931년 가을의 추수 투쟁과 이듬해 봄의 춘황 투쟁을 계기로 동만유격대(東滿遊擊隊)를 결성한다. 이 동만유격대 병력의 약 90% 이상이 재만 조선인 청년들로 대부분 만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으며, 지도자들도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동만유격대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반민생단투쟁(反民生團鬪爭) 등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동만주 일대에 유격전의 근거지가될 수 있는 유격구를 건설하고, 지주와 친일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유격대원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등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34년에만 약 9백여회의 전투를 치를 정도로 무장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동만주 지역에 비하여 조선인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남만주, 북만주 일대에서도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가 조직되자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으로 재편성하여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과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
일제의 만주 침략은 중국 침략의 발판을 만들고 조선을 안정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만주 침략을 저지하는 일은 조선인과 중국인, 두 민족의 공통적 과제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민족 간의 배타적 감정은 서로의 단결을 저해하였고, 결국은 민생단사건(民生團事件)과 같이 많은 조선인이 무고하게 희생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하지만 1935년경부터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반민생단투쟁(反民生團鬪爭)의 오류를 반성하고 무엇보다 두 민족이 연대하여 반일통일전선(反日統一戰線)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게 된다. 이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활약하는 반일 무장 세력을 통합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편성되었다.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대부대 중심의 전투를 고집하던 중국 국민당이나 만주 군벌 계열의 반일 군사단체들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공세 앞에 대부분 괴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유격전(遊擊戰)을 통해 일제에 타격을 주면서 지속적으로 만주 지역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이끌어 갔다.
그러는 중에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인 유격대원들을 중심으로 백두산 지역에 항일투쟁의 거점이 마련되고,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가 결성되었다. '전민족의 계급, 성별, 지위 당파, 연령, 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반드시 일치단결 궐기하여 원수인 왜적(倭敵)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키자!'라는 내용을 강령으로 내세운 조국광복회에는 조선인 유격부대가 중심이 되어 함경도 일대 공산주의 세력과 천도교도들이 참여하였고,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군도 가담하였다.
한편, 백두산 지구에 진출한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도 전개하여 일제(日帝)에 충격을 주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37년 6월 4일 김일성(金日成)이 인솔하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단의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였다. 이 전투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등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만주의 무장 독립군은 완전히 없어졌고, 내선일체(內鮮一體)가 확립되었다고 장담하던 일본 제국주의 당국자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만주 지역의 항일투쟁 세력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공세로 인하여 1938년경 3만명에 달하던 동북항일연군의 병력은 1940년에는 1400여명으로 급격히 줄었고, 많은 지도자들이 전사하거나 일본군에 투항하였다. 만주 지역에서 무장 투쟁의 역량을 보존하는 것조차 힘겹게 된 유격부대들은 소련 영내로 이동하여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東北抗日聯軍敎導旅)를 조직하였는데, 조선인 대원은 대략 290여명 정도였다. 교도려의 대원들은 정치 교육과 군사 훈련 등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일부는 소부대를 편성하여 만주 지역의 정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진 것을 느낀 교도려의 조선인들은 독립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체로 조선공작단위원회(朝鮮工作團委員會)를 결성하였다. 이 위원회의 서기는 최용건(崔庸健)이 선출되었고, 위원은 김일성, 김책(金冊) 등 6명이 선출되었다. 이때 김일성은 정치, 군사 책임자였다.
● 임시정부에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무장투쟁론자(武裝鬪爭論者)들이 빠져 나가면서 점차 침체되어 갔다. 세인들의 관심도 점점 멀어져 각처에서 전달되던 독립운동 자금도 끊어지고 임시정부 청사의 집세를 내지 못할 정도로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1931년에 일어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한국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金九)는 최소 인원, 최소 비용으로도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개인 폭력적인 항일투쟁(抗日鬪爭)을 결심하고 1931년 10월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였다.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義烈鬪爭)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이다. 일본에서 하층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30년 12월에 중국 상해로 건너간 이봉창은 김구의 눈에 띄어 1931년 12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 일본 황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를 암살하기 위해 도쿄에 잠입하였다. 그는 1932년 1월 8일 도쿄[東京]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와 함께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일본 황제 히로히토가 탄 마차를 향해 수류탄(手榴彈)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비록 일본 황제를 폭살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이 의거(義擧)는 대외적으로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조선의 평범한 청년이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중심이며 상징인 일본 황제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조선인들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진 일이고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를 크게 환영하고 있다며 해외에 왜곡된 홍보를 하던 일제(日帝) 당국자들을 크게 당황하게 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중국 신문들은 일본 황제가 암살 위기를 모면한 것에 대해 크게 애석해 하는 보도를 하여 일본 측을 크게 분노하게 했다. 일제는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세계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중국 언론의 이러한 반일적 논조를 문제 삼아 중국의 신문사들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상해(上海)를 침략하였다.
1932년 1월 29일에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켜 상해에 주둔한 일본군은 4월 29일 일본 황제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戰勝慶祝式)을 홍구공원(紅口公園)에서 개최하였다. 이때 4월 26일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윤봉길(尹奉吉)은 29일 김홍일(金弘壹)이 준비한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을 품고 홍구공원에 잠입하여 기념식장의 단상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 사건으로 상하이 파견대 사령관 시리카와[白川義則] 대장과 가와바타[河端貞次] 상해 일본인 거류민단 단장이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일본 해군 제3함대 제독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일본 육군 제9사단장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 시게마쓰[重光葵] 중국 주재 일본 공사, 무라이[村井] 상해 일본 총영사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이 유명한 반일의거(反日義擧)를 두고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개석(蔣介石)은 "중국의 수백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인 청년 한사람이 해냈다." 며 높이 평가하였다.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두차례에 걸친 반일의거(反日義擧)를 계기로 중국인들의 혐한(嫌韓) 감정은 사라지고 임시정부의 항일투쟁 노선도 새롭게 활력을 찾았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인들이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고, 중국의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 간부를 양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는 1940년 임시정부가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홍구공원의거(紅口公園義擧) 이후 약이 바짝 오른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 통일을 모색하는 항일독립운동 전선(抗日獨立運動戰線)
1920년대 후반 중국 관내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사이에 인식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민족주의 세력은 '이당치국(以黨治國)'이라는 공화주의적 원리를 바탕으로 임시정부를 강화하려는 데에 주된 목적이 있었던 반면, 사회주의 세력은 임시정부를 대신할 혁명 정당의 결서을 통해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초 중국 관내의 민족운동 단체 중 가장 유력한 세력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의열단(義烈團)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 등 다수의 민족주의계 인사들에 의해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정당으로 결성되었으며,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강령으로 내세웠다. 1932년 초에 일어난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거치면서 중국 관내의 항일투쟁이 활기를 띠게 되자 이 두 단체가 중심이 되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중국 관내의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정당과 단체가 대부분 참여하였고, 미주 지역의 한국인 단체도 가담하였다.
●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창당과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항일투쟁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은 각 정당과 단체의 연합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사실상 소속된 각 정당과 단체들은 서로 고립되어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정당과 단체를 해체하고 창설된 것이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었다.
비록 김구를 비롯하여 임시정부를 고수하려는 일부 세력이 불참하였으나 민족혁명당은 중국 관내에 있는 대부분의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아우른 최대 규모의 민족통일전선 정당이었다. 민족혁명당의 강령은 '민주 정권의 수립'을 비롯하여 '토지 국유화 및 농민 분배', '대규모 생산 기관의 국가 운영', '국민 경제 활동의 국가 통제', '친일 세력의 재산 몰수' 등 사회주의적 경제체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삼균주의에 기초를 둔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과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것은 당시 민족주의 세력도 광복 이후 민족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사회주의적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민족혁명당의 통일전선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의열단 계열의 독주에 불만을 느낀 일부 민족주의 계열이 이탈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조소앙이 탈당한 후 한국독립당을 다시 만들었고, 지청천(池靑天), 윤기섭(尹琦燮), 신익희(申翼熙) 등도 이탈하여 조선혁명당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민족혁명당은 통일전선적 성격이 약화되고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해졌다.
한편, 민족혁명당의 결성에 참가하지 않은 김구(金九), 조완구(趙琬九), 이시영(李始榮) 등 임시정부 고수 세력은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정당으로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한국국민당은 민족혁명당에 비하여 항일투쟁의 역량에서 열세에 있었다.
민족혁명당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중국 정부의 지원 아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무장 단체로 '대적 심리전', '적 후방 공작 활동'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좀 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이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화북 지방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하고, 1941년 4월에 최고 지도부를 포함한 일부 세력만 남겨둔 채 대부분의 세력이 황하를 건넜다.
● 좌우통합 임시정부의 성립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등 민족주의 계열의 3개 정당이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사회주의 계열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비롯한 4개 단체가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동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였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일단 광복연합과 민족전선의 두 그룹으로 크게 나뉘게 된 것이다.
그 후 이를 하나로 묶으려는 통합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임시정부의 존속 여부, 조선의용대의 지휘권 문제 들을 놓고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실패하였다. 그러자 광복연합의 우파 3개 정당이 합당하여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임시정부를 이끌어 갔다. 이때는 임시정부가 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상해를 떠나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중경(中京)에 정착했을 때인 1940년 4월이었다.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군사적 원조 아래 9월에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였다.
한편,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의용대의 약 80%가 화북 지방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참여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조선의용대의 잔여 병력이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군사력의 통일에 이어서 김원봉을 비롯한 민족전선의 좌파 인사들이 1942년 10월에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金奎植)이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장건상(張建相) 등의 인사들이 국무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1944년 4월에 통일전선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마지막으로 임시정부는 장건상을 파견하여 화북 지역의 조선독립동맹과도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제가 패망하여 교섭이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조선독립동맹의 한 분맹의 창립대회에서는 손문(孫文), 모택동(毛澤東)과 함께 김구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조선독립동맹도 임시정부의 권위와 대표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 사이의 통일전선 형성의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통일전선이 형성되지 못함으로써 임시정부는 연합국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하였고, 이것은 광복 이후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서 일본군이 중국 대륙까지 침략해 호자, 일단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항전할 수 있는 정규군의 창설을 적극 시도하였다. 연합국의 지원을 얻어 조국 광복을 이루려면 우선 우리 민족이 일제(日帝)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참전했다는 모습을 세계에 보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만주,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간부들과 중국 각지의 애국 청년들을 모아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였다.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한국, 중국 및 서태평양으로부터 왜구(倭寇)를 완전히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항전한다.'는 내용의 대일선전포고문(對日宣戰布告文)을 발표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1942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흡수하여 전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당시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에 속한 애국 청년들은 고학력자들이 많았고 조국 광복에 대한 의지로 똘똘 뭉쳐 있어서 병력은 많지 않아도 전투력은 매우 높고 활용가치가 많았다. 특히 일본어에 능숙한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연합군 측에서는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선전 전단 작성', '정보 수집과 교란 활동', '암호 번역', '대적 회유 방송', '일본군에 소속된 한국인 병사의 탈출 유도', '적군에 대한 기습 공격' 등 다양한 군사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점을 안 영국군은 1943년에 임시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고 광복군 공작대를 미얀마, 인도 전선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창설 당시 중국 정부와 맺은 협정에 따라 중국군의 군복을 입고 중국군의 작전 지휘를 받아 항일전(抗日戰)에 참여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끈질긴 협상을 벌여 1945년 4월에는 독자적인 작전권을 완전히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광복군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조국 광복을 직접 쟁취하기 위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이었다. 그리하여 미국 OSS와 협약을 맺어 국내 정진군을 조직하였다. 8월 초까지 유격전에 필요한 특수 훈련을 끝낸 국내 정진군은 국내로 침투하여 무장투쟁의 거점을 마련하고,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마친 국내 정진군이 국내에 투입되기 직전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 계획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 아쉬움을 김구(金九)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왜적(倭敵)이 항복한다 하였다. 아!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
서안과 북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비밀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 국내의 중요한 일본 군사기지를 파괴하거나 점령한 뒤에 미국 항공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김구(金九) 백범일지(白凡逸志)'
●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과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의 항일투쟁(抗日鬪爭)
화북 지역에는 김무정(金武亭), 최창익(崔昌益) 등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조선인들도 있었다. 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북상해온 조선의용대원들과 결합하여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1년 12월 호가장전투(胡家莊戰鬪), 1942년 5월 태행산전투(太行山戰鬪) 등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데, 그 과정에서 불행히도 의열단 시절부터 김원봉(金元鳳)과 생가고락을 함께한 윤세주(尹世胄)가 사망하는 등 많은 희생을 치르었다.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김두봉(金枓奉)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게 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도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조선독립동맹은 화북 지방의 각 지역에 분맹을 설치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조선의용군도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과 더불어 활동하면서 요문구 전투, 백초평 전투, 화순 전투 등 수많은 격전을 치렀다. 광복 당시 조선의용군의 병력은 한국광복군보다 훨씬 많은 약 2천여명 정도였다.
한편, 조선독립동맹은 건국 강령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서의 지배를 전복하여 독립 자유의 조선 민주 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전국 국민의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의 건립',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서의 일체의 재산 및 토지 몰수와 일본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기업의 국영화 및 토지 분배의 실행'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강령 내용은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과도 기본 방향이 일치한다. 임시정부 쪽에서 장건상을 파견하여 통일전선의 결성을 협의해 왔을 때, 조선독립동맹에서도 김두봉이 충칭의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의논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중단되었다. 국내의 건국동맹에서도 연락원이 와서 조선의용군과 협동 작전을 계획하였고, 1945년 8월 29일에 중국 연안에서 '전조선 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이 역시 일제의 항복과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1945년 12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핵심 인물인 김두봉, 김무정, 최창익 등 이른바 연안파들이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중국의 국공내전(國共內戰) 와중에서 조선의용군 병력은 함께 들어오지 못하였다. 북한 정권의 수립이 참여한 연안파들은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 이후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숙청되었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일성 독재 체제의 강화를 위해서 오랫동안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한국사 강론」40.재만(在滿)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과 일제(日帝)의 파시즘 정책
● 일제(日帝)의 기만적 문화통치와 민족 분열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의 여파가 잠잠해진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서는 새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한 조선 노인의 폭탄 공격을 받은 사건이 벌어졌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운동 단체 노인단(老人團)의 길림성 지부장인 향년 65세의 강우규(姜宇奎)가 사이토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친일 경찰관 김태석(金泰錫)에게 피체된 이 의거(義擧)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침략 통치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준 하나의 경고였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두번째의 조선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는 이른바 '문화정책'이라는 유화책(宥和策)을 내세웠다. 3·1운동을 통해 폭압적인 무력(武力)만으로는 조선인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군인만 조선총독으로 임명하던 규정을 고쳐 일반 정치인도 임명이 가능하도록 하였고,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를 보통경찰제(普通警察制)로 전환하였다. 또 조선인에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권한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교육 기회도 확대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에는 조선일보(朝鮮日報)나 동아일보(東亞日報) 같은 한글 신문이 발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식민지 지배의 가혹함을 감추려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실제로 조선총독은 8·15광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반 정치인이 임명된 적이 단 한차례도 없었다. 헌병경찰제가 폐지된 대신 경찰관서와 경찰 인원 등은 3배 이상 증가하였고, 각 면마다 주재소를 설치하여 경찰 감시망을 확대하였으며, 사상 문제를 전담하는 특별수사대의 고등형사를 따로 배치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을 제정하여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언론에 대해서도 검열제도를 실시하여 삭제와 정간뿐만 아니라 폐간까지도 총독부에서 마음대로 명령할 수 있었고, 교육 기회의 확대를 표방하였지만 실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고등교육이나 전문교육은 극히 제한되었으며, 초등교육이나 실업기술교육에만 치중하였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저급한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노예적 인간을 육성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그나마 조선인들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비해 1.6%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일제(日帝)가 이러한 기만적인 정책을 실시한 것은 3·1운동으로 고조된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의 열기를 산업이나 교육 등 문화사업으로 전환시켜 조선 민족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친일파를 적극적으로 양성하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려는 것이었다. 3·1운동은 극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우리 민족 전 계층이 함께 참여한 거족적인 민족해방운동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문화정책은 지주나 자본가 등 부르주아 계층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식민지 지배에 협력하는 세력으로 적극 포섭하고, 이들을 민중과 이간질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더욱 효율적으로 전개하려는 고도의 술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인사 중에서도 이른바 자치운동(自治運動)을 내세워 일제와 타협하려는 세력이 나타나는데, 소설가 이광수(李光洙)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崔璘)이 그 대표적 경우였다. 민족을 이간질하려는 일제의 술책은 경제수탈정책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과 식민지 지주제의 강화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농민들이 도시에 몰려 식량조달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 세워졌다. 이 계획은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에 의해 식량생산을 대폭 늘림으로써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가져가고 조선 농민들의 생활도 안정시킨다는 명목하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산미증식계획이 1920년~1925년과 1926년~1934년, 두차례에 걸쳐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6년 현재 쌀 생산량은 1920년보다 약 30%가 증가한 데 불과하였으나, 일본으로의 수출량은 약 8배로 증가하였다. 1932년~1936년의 평균 쌀 생산량은 1700만석인데, 일본으로 운반된 것은 그 절반이 넘는 876만석이었다. 그 결과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20년의 약 7두에서 4두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은 1년에 1인당 1석 2두를 소비하였다. 한국인들은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으로 메꾸어 갔다.
조선 농민들은 식량사정만 나빠진 것이 아니라, 과도한 수리조합비로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사례가 많았고, 농업구조와 유통구조 까지 쌀 중심으로 개편되어 경제구조의 파행성이 심화되었다. 결국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은 1920년대 이후 소작쟁의가 격화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한편 일본은 본격적인 자본 투자를 통해 식민지 조선에 대한 경제수탈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가로막기 위해 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규정하였던 회사령(會社令)을 폐지하였다. 조선인에 의한 회사 설립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일본인 자본가의 투자가 크게 늘어났는데, 1930년 현재 회사자본의 62.4%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한일합자가 30.8%, 그리고 한국인은 6.4%에 불과하였다. 투자대상은 주로 상업, 공업, 운송업 등에 치중하였는데, 공업과 관련된 것으로는 조선수력전기회사(朝鮮水力電氣會社)에 의한 부전강수력개발(赴戰江水力開發)과 함경도 흥남(興南)에 건설된 질소비료회사가 규모가 큰 것이었다.
한국인이 건설한 회사로는 호남지주 출신의 김성수(金性洙)가 세운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의 규모가 큰 편이었고, 대구와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 부산의 고무신 공장 등이 민족기업으로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 회사들은 중개상업이나 고리대, 토지투기 등 비생산적인 부분에 투지하여 대자본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회사가 크게 늘어남으로써 노동자층이 확산되고, 농민과 노동자들의 쟁의(爭議)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밖에 일본은 목화재배를 장려하여 헐값으로 가져 가고 누에고치 생산을 강제하여 통제가격인 헐값으로 가져 갔으며, 광업생산의 80% 이상을 독점하였다. 그리고 연초전매제도와 교통, 체신의 관영사업을 통해 총독부수입을 늘리고, 총독부재정의 80%에 해당하는 액수를 각종 세금을 통해 충당하였다. 총독부는 크게 늘어난 수입을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를 지원하고 각종 통치기관을 운영하는 데에 지출하였다.
● 전시 수탈 경제체제와 대동아공영권건설(大東亞共榮圈建設)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사회를 파괴하고 유럽 사람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산업 기술상의 진보를 가져오게 되어 이를 바탕으로 종전 후에 유럽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공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그렇지만 대중의 구매력이 늘어난 생산력을 따라가지 못하여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났다. 제조된 물건이 팔리지 않자 기업은 문을 닫았고, 자금을 빌려준 은행은 도산하였으며, 실업자가 크게 늘어났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이른바 경제 대공황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일본은 본래 국내 시장이 협소하여 원료 수입과 상품 수출에 있어서 대외 의존도가 매우 높은 나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에 경기침체로 불황을 겪던 일본은 대공황을 맞아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블록 경제를 형성하고 보호무역정책을 강화하자 더욱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의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대량 해고가 이어졌으며, 노동자 임금이 삭감되었다. 조선과 대만에서 많은 쌀이 유입되면서 공급이 넘치자 쌀값이 폭등하였고 다른 농산물의 가격도 폭락하였다. 갱계가 더욱 어려워진 노동자와 농민의 노동쟁의와 소작쟁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민생을 안정시켜야 하는 정치인들은 각종 부패사건에 연루되어 국민의 믿음을 잃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사비가 크게 줄어든 데에 불만을 품은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1931년 9월 이른바 유조구참변(柳條溝慘變)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세계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전격적으로 상하이를 침략하여 점령하였다. 3월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執政)으로 삼아 만주국을 세우고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였다. 뒤이어 군부를 중심으로 한 파시즘 세력은 국가 개조를 주장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후 일본은 자국의 황제를 신격화하는 등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군국주의 파시즘 체제로 전환되었다.
일제는 만주를 점령하여 본토와 식민지 조선, 만주를 아우르는 블록 경제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경제 공황의 위기를 극복하고, 중국과 몽골까지도 자신들의 상품 판매와 자본 투자의 시장으로 삼으려 하였다. 또한, 당시의 일본 군부는 만주와 몽골을 장악하여 다가올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만주에서 소련의 세력이 확대되면 결국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도 위협을 받게 되고 일본의 안전도 위협받는다는 논리이다. 아무튼 일본의 만주 침략은 조선을 안정적인 식민지로 유지하면서 항구적으로 수탈을 계속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일제의 만주 침략은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는 고통의 시작이었지만 일본 경제의 회복에는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군수품의 수요가 크게 증가되고 상품 시장이 확대되면서 일본의 국내경기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1933년에는 세계 공황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였다. 서구 열강보다도 빠르게 공황에서 탈출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 세력의 야욕은 끝이 없었고, 군수산업에 의존한 독점 자본은 또 다른 침략 전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치열하게 전개된 만주 지역의 항일투쟁은 일제의 안정적인 만주 지배를 계속 위협하였다.
1933년 일제는 일본군의 만주 철수를 결의한 국제연맹(國際聯盟)을 탈퇴하고 1937년 7월 중국 화북 지방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일제는 그해 12월에 중국 국민당 정부의 근거지였던 난징을 점령하고 약 30만명의 인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란이 장기화되자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된 일제는 석유, 고무 등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린다. 때마침 유럽에서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이 승승장구하면서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점령하자, 더욱 기가 살아난 일제는 프랑스가 식민통치를 하던 동남아시아 일대를 침략하여 점령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하여 중국과 동남아 지역에서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는 경제 봉쇄 조치를 취하여 일본에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에 맞서 1941년 12월에 하와이의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1931년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일제의 대외침략(對外侵略)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건설(大東亞共榮圈建設)이라는 헛된 꿈을 안고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계속 확대되었다. 이러한 침략 전쟁의 확대는 선량한 일본 국민에게도 고통을 주었지만 식민지 주민인 조선인들에게는 더욱 큰 고통을 주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 전쟁의 수행을 지원할 후방 기지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대동아공영권건설은 서양 열강에 맞서 아시아에 공존공영의 새 질서를 세우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 중국, 태국, 베트남, 필리핀 등까지 포함하는 정치, 경제적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이론이었다. 1930년대 이후 전개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이며, 유럽 강국들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권을 구축하려는 의도였다. 소위 대동아공영권은 겉으로는 모든 아시아 국가의 공존을 외치고 있었지만 실상은 아시아에 유일한 국가로 오직 일본 하나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 숨겨져 있었으므로, 아시아 전지역을 일본의 세력권에 귀속시키려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형식적이나마 자유를 허용하던 기만적인 '문화정책'의 허울을 벗어 버리고 본격적으로 전시체제를 강요하였다.
● 세계 경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경제 공황에 대한 세계 열강의 대응은 어떠했을까? 미국은 이른바 '뉴딜정책'을 실시하여 연방 정부의 주도로 고용을 창출하고 생산을 조정하며, 구매력 증진에 노력함으로써 공황을 극복해 간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경제를 통제하는 수정자본주의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과 식민지를 묶는 블록 경제를 형성하여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함으로써 공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경제 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발전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국내 시장이 좁고 해외 식민지가 빈약한 후발적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경제적 혼란을 틈타 파시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다. 파시즘이란 개인보다는 국가, 민족을 우선시하는 극우적인 사상 체계로서, 집단 전체를 위해서 개인의 존엄성이 무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 특성을 지니며,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는 모순된다. 또한, 독일의 게르만족 우월주의나 일본의 천황 중심주의와 같은 극단적 민족주의를 내세운다.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는 모두 이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 세 나라의 파시즘 세력은 대외침략을 통해 세계 공황이라는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기존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군수물자의 생산을 통해 과잉 자본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침략을 강행하여 식민지체제를 재편성하려 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들 파시즘 국가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대외침략을 시도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블록 경제권에 대하여 후발적 자본주의 국가의 파시즘 세력이 일으킨 식민지 재편 전쟁이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성립과 초기 활동
국권 피탈을 전후하여 만주, 연해주 일대와 중국 관내, 미국 등 국외의 여러 지역에 많은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단체들이 조직된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일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점차 형성되어 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3·1운동을 계기로 급진전되어 국내외에 여러 군데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국내의 조선민국 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 등이었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여러 군데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단일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교섭이 시작되었다. 우선 국외의 세력 기반이 있는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서 교섭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상하이의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승만(李承萬)이 한성정부의 수립 소식을 듣고 이미 워싱턴에 집정관 총재 집무실을 차려놓고 대통령 행세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 완전한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의 존재도 고려해야만 했다.
통합 논의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위치를 상하이로 할 것인가, 간도나 연해주로 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양자간의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3·1운동 이후의 민족적 열망을 반영하여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의 법통을 계승하며, 정부의 위치는 당분간 상하이에 두고,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로 한다.'는 등의 단일 정부 수립 원칙에 동의한다.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한국민의회의 일부 세력이 합류하였고, 한성정부에서 제시한 각료 명단으로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등을 채택하여 출범하였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다양한 노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의 노선을 구분해 보면 이승만은 전형적인 외교론자이고, 국무총리 이동휘는 무력투쟁(武力鬪爭)을 통한 독립 쟁취를 부르짖는 사회주의자였으며,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는 실력양성론자였다. 임시정부에 이처럼 다양한 노선의 세력이 참여하여 일단 하나로 뭉쳤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더욱이 사회주의 계열의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이 임시정부의 야당으로 가담하였고, 만주 지역의 유력한 반일 무장 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도 일단 임시정부의 군무부 산하에 합류하게 되었다. 3·1운동으로 나타난 온 민족의 염원을 담은 결과였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위치한 것은 외교 활동에 역점을 두려는 의도였다. 또한 외교론자들은 어디까지나 무력투쟁은 최후의 수단이며, 준비가 되지 않은 무력투쟁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만주 지역에서 전개되는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은 주로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외교 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은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交通局)이 주로 담당하였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재정 조달을 맡아 서울에 총판을 두고, 도(道)에는 독판, 부(府)와 군(郡)에는 부장과 군감, 면(面)에는 면감을 두었다. 하지만 일제(日帝)가 철저히 감시하고 탄아바는 상황에서 전국적 조직을 제대로 갖추기는 쉽지 않았다. 주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지역에 설치된 연통제 조직은 1921년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와해되었다.
교통국은 국내와 만주 지역을 연결하는 통신조직으로서 아일랜드인 죠지 쇼(George L. Shaw)가 경영하는 만주 안동현의 이륭양행(怡隆洋行)에 거점을 두고 정보 수집, 통신, 독립운동 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내 조직도 서치하여 하였으나, 평안도와 함경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륭양행의 안동 교통국도 1920년 7월에 쇼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사실상 역할이 끝나게 되었다. 이밖에도 임시정부는 해외 동포에게 애국적 공채를 발행하거나 의연금을 모금하여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초기에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외교 활동이었다. 강대국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과 독립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해 파리 강화회의나 워싱턴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고 국제연맹(國際聯盟)에도 가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회의에서 조선 문제는 언급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의 외교적 전략은 미국, 영국, 중국 등 각국의 승인을 받는 쪽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구미 위원부와 파리 위원부, 런던 위원부 등을 설치하였으나 역시 별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구미 위원부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1925년 3월에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탄핵된 뒤로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반면, 중국과 소련에 대한 외교적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중국은 당시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쑨원[孫文]이 이쓰는 국민당의 광동 정부의 교섭하여 두 정부가 서로 상대를 승인하고, 중국 측은 조선인 학생을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교시킨다는 데에 합의하였다. 소련과의 교섭은 국무총리 이동휘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확대를 노리던 소련은 조선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면서 40만 루블의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 자금의 분배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소련과의 관계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에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은 위치상의 한계 때문에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였다. 기본적인 방향도 무력투쟁을 당장 전개하는 것보다는 독립 전쟁의 준비에 방향이 맞춰 있었다. 만주 지방의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 독립군 부대를 임시정부 산하로 흡수하였으나 명목상으로만 그리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임시정부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간행하여 국내외 동포들의 소식을 알렸으며, 사료 편찬소를 설치하고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 관련 역사서를 간행하여 일제의 침략이 정당하지 못한 것임을 강조하고 민족정신의 고취에 전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에 여러 지역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와 각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였고, 무력투쟁론, 외교론, 실력양성론 등 다양한 노선의 독립운동 세력을 일단 하나로 결집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위치나 향후 독립운동의 노선과 방략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더욱이 연통제, 교통국 등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한 조직들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제 기능을 못하게 되고, 기대를 걸었던 외교 활동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이 알려져 독립운동가들의 분노가 촉발되었다. 이동휘도 임시정부를 연해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승만과 안창호가 반대하자 국무총리의 직책을 사임하고 상하이를 떠났다. 이처럼 임시정부가 분열, 약화되어 독립운동의 지도적 역할이 힘들게 되자, 향후 진로를 다시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곳에서 제기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에 가서야 각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 60여명이 참가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향후 진로와 관련하여 갈등이 일어났다. 현 임시정부를 개선하여 존속시키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기관을 건설하자는 창조파가 팽팽하게 대립한 것이다.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양 세력의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6개월만에 결렬되었다.
민족운동전선의 광범위한 요구와 기대를 바탕으로 출발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본래 활동 기반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기관의 수립에 실패한 것이고, 독립운동의 노선과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을 의미했다. 임시정부는 큰 타격을 받아 침체되었고 국민대표회의에 불참한 김구(金九) 등 몇몇의 임시정부 옹호파 인사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다. 1920년대 중반, 세력이 크게 약해진 임시정부는 1925년에 이승만을 탄핵하고, 두차례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위원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했다. 그 후 임시정부는 김구를 중심으로 유지되면서 1930년대 초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을 통해 다시 그 존재를 뚜렷이 드러낸다.
● 1920년대 만주 독립군의 대일항전(對日抗戰)
1910년대에는 만주, 연해주 일대에 독립운동 근거지가 건설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군사단체가 양성되었다. 3·1운동 이후에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의 조직적 전개가 광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더욱 확산되어 많은 독립군들이 새로 조직되거나 전투력이 크게 증강되어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의 활성화가 이루어졌다. 북간도 지역에서는 대종교도들의 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이 모체가 되어 결성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기독교도들이 만든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산하의 민병대와 그 후원을 받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의 활약이 컸다. 남만주 지역에서는 삼원보의 한족회(韓族會)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인원을 중심으로 구성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구한말의 의병항쟁을 지휘하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임시정부의 직할 부대로 편성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들도 활동을 벌였고, 3·1운동 직후에는 천마산대(天摩山隊), 보합단(普合團) 등의 무장 단체가 국내에서 조직되어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하였다.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벌이는 독립군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총기(銃器) 및 탄약(彈藥)의 구입과 독립군 운영을 위한 군자금 확보였다. 군자금은 일차적으로 만주 지역의 한국 주민들에게서 징수하였다. 독립군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재산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징수하였는데, 부족한 자금은 국내에 비밀요원을 파견하여 의연금 형태로 모금하였다. 자발적인 협조를 구한 것이었다. 친일파나 비협조적인 부호들에게는 살해 위협을 통해 강제로 모금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간도 지방의 경우에는 많은 독립군들이 활동하다 보니 교민들에게는 이중 삼중의 부담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간혹 가짜 독립군 행세를 하면서 교민을 약탈하는 악랄한 무리도 있었다.
총기와 탄약은 주로 소련으로부터 구입하였다. 소비에트 군대인 적군(赤軍)과 제정 러시아 군대인 백군(白軍) 간의 내전 과정에서 많은 군수품이 유출되었기 때문에 군자금만 있으면 무기와 장비 구입은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또 제1차 세계대전 때 시베리아에 출병한 체코의 군대가 철수하면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에 무기를 값싸게 넘겨주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독립군 양성 기관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였다. 원래 이름이 신흥학교였던 이 교육기관은 처음에는 중학반의 군사반을 두었다가 나중에는 군사반만 두었고, 고등 군사반을 따라 설치하여 고급 장교를 양성하기도 했는데, 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고 나서, 지원자가 늘어나자 분교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북로군정서가 설립한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도 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는데, 대한제국 군대 장교 출신인 신팔균(申八均), 일본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를 졸업한 지청천(池靑天)과 김응천(金應天),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과정을 마친 이범석(李範奭) 등이 독립군에 합류하고 나서 사관 양성과 훈련은 점차 정규적인 형태로 발전되었다.
독립군은 일반적으로 자진 입대한 청년들을 병력으로 썼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관할 지역 주민들에 대해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물론 병사를 모집하거나 자진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3·1운동 이후에는 국내로부터 많은 애국 청년들이 망명하여 독립군에 지원(志願)하였고, 독립군 수뇌부에서 국내에 간부를 파견하여 모병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3·1운동 이후 무장전투력의 역량이 한층 강화된 독립군 각 부대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국내진입작전(國內進入作戰)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벌였다. 주조(駐朝) 일본 경찰의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1920년 한해 동안 독립군이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군 국경 수비대와 교전을 벌인 회수는 1천 6백여회나 될 정도였다. 이처럼 수많은 항일전(抗日戰) 중에 가장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 독립군은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었다. 1919년 여름에 혜산진(惠山鎭)을 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 큰 피해를 입히고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에 있는 금정(金井)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던 대한독립군은 평안북도 강계의 만포진(滿浦鎭)을 점령하고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사흘간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0년 6월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소속 독립군이 일본군 제19사단 예하 1개 중대 병력을 격퇴시키는 승리를 거두자, 19사단 사령부에서는 야스카와[安川二郎] 소좌(少佐)가 인솔하는 1개 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독립군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총사령관인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안무(安武)가 통솔하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부대와 병력을 합쳐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였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안산(安山)과 고려령(高麗嶺)에서 총격전(銃擊戰)을 펼쳐 일본군 120여명을 사살한 뒤, 적군의 본대를 봉오동(鳳梧洞)으로 유인하여 매복포위작전(埋伏包圍作戰)으로 치명타를 가하였다. 이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일본군은 150여명의 전사자와 2백여명의 부상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지만, 대한북로독군부의 손실은 전사자 4명에 불과했다.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와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일본군이 패배하자 일제(日帝)는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식민통치의 가장 큰 위협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에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間島)로 침투시켜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을 뿌리까지 잘라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일제는 먼저 훈춘사변(琿春事變)을 일으켜 만주 출병의 명분을 세우고, 제14사단과 제19사단 및 만철(滿鐵)수비대에서 차출한 일본군 병사 2만 5천여명을 동원하여 북간도 지방의 독립군 기지를 포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신민단(新民團), 의군부(義軍府) 등 여러 독립군들은 오지로 피신하라는 중국 당국의 권유를 받아들여 백두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질 경우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 민간인들의 희생이 클 것이라는 염려도 있었기에 피전책(避戰策)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좌진(金佐鎭)이 총사령관으로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가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로 진군하고 있을 때, 독립군의 위치를 파악한 일본군 제19사단 소속 1만여명의 대부대가 그 일대에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적군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행군을 멈춘 뒤, 10월 21일 백운평(白雲坪)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전위부대 2백여명을 기습공격, 전멸시켰다. 이어 홍범도가 통솔하는 독립군 연합부대(獨立軍聯合部隊)가 21일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어랑촌(漁郞村)으로 이동했으며, 시마다[島田] 중위(中尉)의 기병중대를 천수평(泉水坪)에서 격파하고 어랑촌의 고지를 선점한 북로군정서는 22일 일본군 19사단 주력부대를 맞아 치열한 결사항전(決死抗戰)을 펼쳤다. 이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북로군정서는 홍범도 부대의 지원엄호사격(支援掩護射擊)을 받아 적군의 돌격전(突擊戰)을 무력화시킨 뒤, 일본군의 포위망에서 물러나면서 24일 천보산교전(天寶山交戰), 26일 고동하전투(古洞河戰鬪)를 통해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쳤다.
이렇게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10여회에 걸쳐 전개된 전투에서 북로군정서를 포함한 여러 독립군들은 일본군 1천 2백여명 이상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이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사상 최고의 승전(勝戰)인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이었다.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에 출병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완전히 섬멸하겠다는 당초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만 발생하자 간도 지방의 한국인 마을을 급습하여 무고한 교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가옥과 교회 및 학교를 불태우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독립군과의 교전에서 계속 패배한 데 대한 보복으로 독립군에게 도움을 준 간도 거주 한국인들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를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하는데, 1920년 10월에 시작된 일본군의 만행은 해를 넘겨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친 여러 독립군은 1920년 말경에 소련과 만주의 국경 지대인 밀산부로 이동하여 병력을 재편성하였다. 이곳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주도 아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신민단(新民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의군부(義軍府), 혈성단(血誠團),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모든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총사령관에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에 이장녕(李章寧), 여단장에 지청천(池靑天), 중대장에 김창환(金昌煥)·조동식(趙東植)·윤경천(尹擎天)·오광선(吳光鮮) 등을 각각 선임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전 세계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소련 정부의 대외적 발표에 고무되어 소련 땅인 이만(iman)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당시 소련은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간의 내전이 한창이었고, 일본과 미국의 군대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의 병력 중에서 김좌진 등이 이끄는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돌아오지만, 일부 독립군은 적군을 돕기로 결정하고 지금의 스바보드니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자유시에는 만주 지역에서 이동한 독립군뿐만 아니라 연해주에서 결성된 여러 한국인 사회주의 무장 단체가 있었다. 이들 부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계열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세력 간에 부대의 편성과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이르쿠츠크파를 지원하던 소련 적군이 상해파인 사할린 의용군 등 독립군 부대를 무장 해체시키기 위한 공격을 감행하여 3백여명이 넘는 독립군을 살상하였는데, 이 비극적 사건이 바로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었다.
자유시참변 이후에도 적군에 편입되지 않은 채 적군을 도와서 백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일본군에 저항한 독립군들이 있었다. 백군을 물리친 이후 독립군을 지원해 주겠다는 적군 측의 약속을 믿은 것이었다. 그러나 1922년 10월 백군을 완전히 격파한 이후 소련은 약속을 저버리고 적군에 편입되지 않은 독립군을 강제로 무장 해제시켰다. 애초에 일본과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독립군들은 어쩔 수 없이 적군에 편입되거나 적군을 피해 만주로 이동해야 했다. 이로써 1923년 이후 연해주에서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 독립운동 삼부시대(三府時代)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승리와 경신참변(庚申慘變),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의 시련을 겪으면서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지도자들은 효율적인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독립군을 통합하여 단일적 대오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각 독립운동 군사단체들이 활발한 통합운동(統合運動)을 전개한 결과 남만주에서는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주장하는 세력이 이탈함으로써 분열되고, 다시 참의부(參議府),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등 삼부가 성립되었다.
1923년에 형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는 집안현(輯安縣)을 중심으로 무송, 안도, 장백 등 압록강 연안 지역의 동포 사회를 관할하였고, 국내진입작전(國內進入作戰)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길림(吉林)에서는 1924년 11월에 참의부에 가담하지 않은 통의부 세력을 중심으로 여러 단체가 통합되어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고 남만주 일대의 동포 사회를 관할하였다. 한편, 북만주의 영안현(永安縣)에서도 1925년 1월에 김좌진의 대한독립군단 등을 주축으로 한 신민부(新民府)가 형성되어 북만주 일대의 동포 사회를 관할하였다.
참의부(參議府),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등 삼부는 각기 관할 지역의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의용군 훈련 및 작전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민정 조직은 제한적이나마 동포 사회에서 선출하는 임원들로 구성되었고,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 분립 형태를 띠고 있었다. 삼부는 한마디로 만주 지역의 한국인 동포 사회를 셋으로 나눠 이끌어 간 공화주의 자치 정부라 할 수 있었다. 관할 동포 사회에서 세금을 징수하여 정부를 운영하였고, 각기 수백명의 독립군을 보유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한국인 동포들에게는 부담이 되어 만주 교민 사회에서 점차 민족주이 세력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만주에서도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
1920년대에는 만주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지식인, 학생, 청년들은 많은 수의 사회주의 단체들을 조직하여 '민족 해방을 위한 결사적 분투', '무산 계급의 해방' 등을 구호로 내세우며 동포 사회에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日帝)는 만주의 군벌 세력과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여 독립운동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삼시협정에는 '만주 군벌의 주도 아래 독립운동 단체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인도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이로 인해 만주 지역에서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은 더욱 힘들어졌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분열되어 있는 민족운동 전선을 하나로 통합하여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을 건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그 결과 정의부(正義府)의 주도 아래 참의부(參議府) 일부 세력과 신민부(新民府)의 민정파를 끌어들여 남만주 일대에 국민부(國民府)라는 새로운 군정부를 결성하고 삼부를 해체하였다. 그 후 국민부는 1929년 12월에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조직하고, 그 휘하에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편성하여 대일항전(對日抗戰)에 나서게 된다.
한편 정의부 중심의 삼부 통합에 반대하며 북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신민부의 군정파와 정의부 일부 세력은 1928년 12월에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결성하였다. 그 후 혁신의회는 1929년 9월에 김좌진(金佐鎭)을 중심으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였으나, 그가 암살된 후 지청천(池靑天), 신숙(申肅), 이장녕(李章寧) 등이 중심이 되어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북만주 지역을 관할하는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1931년 11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조직하여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을 전개하였다.
● 의열단(義烈團)의 항일투쟁(抗日鬪爭)
테러를 통한 투쟁으로 일제(日帝)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胄) 등의 주도로 만주 길림(吉林)에서 창단되었으며, 이들은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나 친일파 거두 등을 처단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각 경찰서 등을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다. 1920년 박재혁(朴載赫)의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 암살 기도를 시작으로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투탄(投彈), 1921년 김익상(金益相)의 조선총독부 건물 폭탄 공격, 1923년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투탄(投彈)과 총격전(銃擊戰), 1924년 김지섭(金祉燮)의 일본 왕궁 투탄(投彈), 1926년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투탄(投彈)과 일본인 여러명 사살은 의열단이 배후에서 조종했던 유명한 반일의거(反日義擧)였다.
이러한 의열단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은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동포들의 민족 독립 의식을 일깨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1923년 신채호(申采浩)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에 의해 '민중을 중심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일본의 식민통치를 타도하고 제국주의를 몰아내자.'라는 내용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작성, 천명하였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외교론(外交論), 독립준비론(獨立準備論)과 더불어 국내에서 등장한 자치권운동(自治權運動), 참정권운동(參政權運動)을 맹렬히 비판하고 민중이 직접적으로 혁명을 일으켜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개인적 폭력 투쟁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민중의 혁명을 촉발시키는 데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의열단(義烈團)은 1920년대 후반부터 테러리즘에 의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의 한계를 느끼고 무력항쟁(武力抗爭)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김원봉을 비롯한 단원들은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입교하여 체계적인 군사 훈련과 간부 교육을 받았다. 단원의 상당수가 이때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 일어난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참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후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난징 교외에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幹部學校)를 세워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고, 중국 관내 정당, 단체의 통합 운동을 주도하여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창당에 중심 역할을 하였다.
● 경제 개발의 탈을 쓴 병참기지화 정책
전시체제 속에서 일제(日帝)는 조선인들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철저히 탄압하고 독립 의지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조선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크게 강화하고 조선 주둔 군사력을 늘리면서 경찰 기구를 계속 확대하였다. 또 더욱 치열해진 사회주의적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통제도 더욱 강화하였다. 1928년에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은 '기존 체제에 변혁을 도모하는 사람'을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더욱 잔혹하게 바뀌었다. 이른바 사상전향제도(思想轉向制度)를 만들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구속하였으며, 사상범예방구금령(思想犯豫防拘禁令)을 제정하여 항일투쟁에 참여했던 애국지사들을 미리 구금하였다.
또한,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 억지 주장을 내세우면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을 실시하였다. 황국신민화 정책이란 조선인을 '일본 황제의 충성스런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것으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소멸시켜 식민지 노예로 부려먹으려는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이었다. 일제는 농촌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 자력갱생운동(自力更生運動) 등을 추진하지만, 이것은 식민지 농민 경제를 회복시킬 실제적 방안은 뒷전으로 하면서 농민의 자각을 우선하는 정신적 운동으로 추진되었다. 즉 일제는 조선 농민들의 생활 수준이 어려운 이유가 게으르고 무지한 민족성에 있음을 강조하고 일본 정신과 일본 풍습을 배워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일제는 이런 운동들을 농촌에 대한 통제와 황국신민화를 위해 이용했을 뿐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오늘날 '국기에 대한 맹세문'의 원조격인 '황국신민의 서사'를 만들어 제창하도록 하였으며, 전국의 읍면(邑面)마다 일본 황족들의 영혼을 모시는 신사(神社)를 지어 놓고 억지로 참배하도록 강요하였고, 참배를 거부하는 학교는 폐교시켰다. 또한 학교나 관공서에서 조선 언어 사용을 완전히 금지시켰으며, 심지어 친일적 논조를 주저하지 않던 조선일보(朝鮮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 등도 단지 한글과 조선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완전히 폐간시켰다. 1939년부터는 민족 교유의 성명(姓名)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는 창씨개명제(創氏改名制)를 강요하였고,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자녀를 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하게 하였으며, 식량 배급과 우편 배달도 금지시켰다.
일제가 이와 같이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한 목적은 조선인의 민족성을 제거하고, 이른바 '2등 일본인'이라는 인식을 심어 줌으로써 일본의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한 침략 전쟁에 조선인들을 끌어들이려는 데에 있었다. 조선인들의 저항 의식을 완전히 잠재우지 않고는 침략 전쟁에 필요한 물자나 인력을 효율적으로 수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정책은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농업 부분의 수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회사령(會社令)의 철폐 이후 일본 자본의 진출이 이루어졌지만 주로 식료품, 소비재 등의 경공업 분야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 일제는 농업과 더불어 공업과 광업도 함께 발전시킨다는 이른바 농공병진(農工竝進) 정책을 표방하면서 식민지 공업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농촌에서도 산미증식계획을 중단하고, 공업 원료 증산을 위한 남면북양(南綿北羊) 정책을 실시하였다.
식민지 공업화는 경제 공황의 극복과 대륙 침략에 따른 군수물자를 원활히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한반도를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일본의 독점 자본이 대거 조선에 침투되었다. 미쓰이, 미쓰비시, 노구치 등은 이 시기 조선에 진출한 대표적 독점 자본들이었다. 이들의 투자는 전력, 화학, 기계, 금속 등 중화학 공업과 철, 석탄, 알류미늄, 마그네슘 등 광업 부분에 집중되었다. 대부분이 침략 전쟁의 수행을 위한 군수 산업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이후에는 경공업에 비하여 중화학 공업이 기형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두고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 타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 등 일본의 극우파 역사학자들과 안병직(安秉稷), 이영훈(李榮薰), 박효종(朴孝鍾) 등 한국의 일부 친일적 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수탈만 한 것이 아니고 개발도 하였으며,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1960년대~1970년대에 이룩한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도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통해 지도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첫째, 일제가 수탈을 위해 자본을 투자하고 공업 시설 등을 세운 것을 둑 경제 개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조선 경제는 철저히 일본 경제에 종속된 상태에서 운영되었다. 전체 일본 경제의 하청업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당시 대다수 조선인들의 생활은 기본적은 생존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둘째, 공업 생산의 대부분은 일본 독점 자본이 경영하는 몇개의 대규모 공장이 차지했을 뿐이다. 중소 공업도 대부분 군수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하였고, 그나마 대부분 일본 기업에 흡수되었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더욱 커져서 전체의 94%나 되었다.
셋째, 공업 시설의 대부분은 38도선 북쪽에 건설되었다. 더욱이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은 대부분의 산업 시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1960년대, 1970년대 한국의 빠른 경제 성장은 분단과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이룩된 것이지 일제강점기의 경제 개발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억지 논리이다.
마지막으로 인류 사회가 나가야 할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즉 어느 민족이 힘을 앞세워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인류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공존공영(共存共榮)을 해치는 것이다. 일제(日帝)는 우리 민족의 모든 권리를 억압하고, 생존권을 위협하면서 수탈을 일삼았다. 일제가 효율적인 수탈을 위해 경제 시설을 만들어 놓은 것을 두고 경제 발전이나 근대화를 운운하는 것은 침략주의(侵略主義)를 합리화하는 반평화(反平話), 반인륜(反人倫)적 역사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일제의 침략이라는 그릇된 역사에는 애써 무관심하면서 일부 성과만을 부각시켜 역사를 평가하는 태도는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역사 인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숟가락까지 빼앗아 가는 일제의 수탈 정책
중일전쟁(中日戰爭) 이후 일제의 인력과 물자 수탈은 더욱 직접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바뀌었다. 전쟁터가 계속 확장됨에 따라 일본 내의 인력과 자원만으로는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무기를 주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선 청년들을 군사력으로 직접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피폐해진 농촌에서 생활 형편이 너무 어려운 청년들이 조선총독부의 계략에 속아 일본 군대에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학도지원병 제도와 징병제도를 실시하였다. 학도지원병은 전문학교나 대학교의 학생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이때 끌려간 학병들 중에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하여 한국 광복군(韓國光復軍)이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징병제도는 1944년에 실시되었는데, 일제의 패망까지 불과 1년 남짓 동안 약 20만명의 조선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노동력의 강제 동원도 잔악하게 이루어졌다.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과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의 실시로 생활 기반을 잃고 농촌에서 쫓겨나 실업 상태에 있는 조선인들을 일제는 '모집(募集)'이라는 이름으로 광산이나 토목 공사장에 강제 동원하였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국민징용령을 내려 일제의 패망 때까지 100만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였다. 이들은 군대식 규율로 통제되는 수용소에서 최악의 생활 조건으로 살아가야 했고, 공사가 끝난 이후에는 기밀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 학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 러시아의 사할린에 사는 조선인들은 이때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과 그 후손이다.
일제는 학도보국대(學徒報國隊)를 조직하여 어린이들까지도 강제 노동에 동원하였다. 12세~40세까지의 여성들은 1944년 여자정신대근로령(女子挺身隊勤勞令)에 따라 강제 동원되었다. 이들은 군수공장에서 집단적으로 강제 노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상당수의 여성들은 전쟁터로 보내져 일본군의 성(性) 노예나 마찬가지인 군위안부(軍慰安婦)가 되어야 했다. 또한, 관리 및 교사 등의 협박과 꼬임에 빠지거나 약간의 돈에 팔려 가 군위안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전쟁 물자에 대한 직접적인 수탈도 이른바 공출(供出)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중일전쟁 직후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에 따라 미곡에 대한 강제 공출과 식량배급제가 실시되었다. 또한,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쇠붙이를 공출하였는데, 절이나 교회의 종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쓰는 놋그릇과 숟가락까지도 빼앗아 갔다. 또 대체연료를 만들기 위해 소나무의 뿌리를 캐도록 어린 학생들을 온종일 동원하기도 하였다.
● 일제(日帝)의 죄악이 만들어낸 군위안부(軍慰安婦)는 인류 사회의 정의와 관련된 문제
침략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수많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성(性) 노예나 다름없는 군위안부(軍慰安婦)로 삼는 반인륜(反人倫)적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성의 순결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그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1965년 한일협정(韓日協定)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야 한 여성운동가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에는 여성단체들이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 협의회'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었다.
군위안부 문제는 크게 일제강점기 민족 수난사라는 측면과 여성의 인권과 지위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민족 수난사의 측면에서 군위안부는 일제의 식민통치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 사실을 부인하고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한일협정의 체결로 모든 대일청구권(對日請求權)은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과거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반성과 사죄를 거부하는 일본 측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여성의 인권과 지위라는 측면에서 군위안부는 과거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폭력의 가장 잔혹한 유형을 보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을 확보하고 정의로운 인류 사회를 열어 가기 위해 명백히 밝히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결국 군위안부 문제는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불평등한 처지에 놓여 있는 전세계 여성의 문제이며, 인류 사회의 정의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1930년대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과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1931년 9월 일제(日帝)는 만주를 침략하고 이듬해 3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執政)으로 삼아 장춘(長春)에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30년대 만주 지역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이 중심이 되어 주로 1930년대 전반기에 항일전(抗日戰)을 펼쳤으며,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가 조직되어 1940년대까지도 치열한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전개하였다. 나중에는 이 두 세력 모두 중국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과 연대하여 일본 군국주의 세력에 대항하게 된다.
1929년에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당부에 의해 창설된 무장 단체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면서 편제와 지휘체계가 자주 바뀌었고, 제1중대장이었던 양세봉(梁世奉)이 총사령관으로 승진되고 김학규(金學奎)가 참모장에 임명된 이후부터는 새롭게 대오를 가다듬고 본격적인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였다. 조선혁명군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무장 단체인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爲軍)과 병력을 합쳐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수백회의 전투를 벌였다. 특히 1932년 3월 신빈현(新賓縣) 일대에서 벌어진 영릉가성전투(永陵街城戰鬪)에서 일본군 1개 여단 병력을 격퇴시키고 수많은 군마(軍馬)와 총기(銃器)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며 일제(日帝)의 대륙 침략 계획을 위협하였다.
1933년 5월부터 7월까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爲軍)은 흥경성(興京城) 일대에서 방어선을 치고 일본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물리치며 빼어난 전투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폭격기(爆擊機)까지 동원한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장청문(江淸門)으로 퇴각, 재기를 도모하던 중에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이 일본군의 밀정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박창해(朴昌海)의 계략에 빠져 소황구(小荒溝)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전사하였다. 그후에도 조선혁명군은 중국 공산당이 편성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에 포함되어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 홍진(洪震), 신숙(申肅) 등에 의해 북만주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결의하고 관할 지역의 청장년을 징집하여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결성하였다. 지청천(池靑天)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한국독립군은 중동철도호로군(中東鐵道護路軍),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등과 연합전선(聯合戰線)을 구축하고 1932년 9월과 11월 제1, 2차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933년 3월 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 4월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6월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를 통해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었다. 한국독립군의 가장 큰 승전(勝戰)은 1933년 7월 3일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로, 이케다 신이치[池田信吉] 대좌(大佐)가 총지휘하는 일본 관동군(關東軍) 간도파견대(間島派遣隊)를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 제14사단과 함께 전멸시킨 이 전투는 1920년대의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과 더불어 대일독립전쟁(對日獨立戰爭) 사상 가장 통쾌한 승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전리품 배분 등을 둘러싸고 중국 의용군 측과 갈등이 생겨 중국군에 의해 독립군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간부가 구금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은 내분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1933년 10월에는 한국독립군의 간부 상당수가 중국 관내로의 이동을 결정하지만 중국으로의 입국을 거부한 일부 지대는 밀산, 영안의 산림지대를 중심으로 항일유격전(抗日遊擊戰)을 계속하거나 공산주의 계열의 중국 무장 단체에 합류하였다. 한편 중국 관내로 이동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은 김구(金九)의 초빙으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설립된 한국인 청년 군사간부 특별훈련반의 교관 및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1940년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설에 참여하여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 동만주 지역의 항일유격전(抗日遊擊戰)
1920년대 말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생활해야 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소작농과 자소작농들은 고율 소작료, 고리대 등으로 지주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다. 정치적으로 일본의 만주 침략에 재만(在滿) 조선인들이 첨병 노릇을 한다고 여기는 중국 군벌 당국의 핍박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더군다나 일제는 재만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중국인들을 압박함으로써 중국 측의 반한(反韓) 감정을 부추기고 민족 이간질에 나섰다. 이러한 처지는 재만 조선인들의 민족적, 계급적 각성을 촉진하여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만주 지역 공산주의 세력은 만주사변(滿洲事變) 직후인 1931년 가을의 추수 투쟁과 이듬해 봄의 춘황 투쟁을 계기로 동만유격대(東滿遊擊隊)를 결성한다. 이 동만유격대 병력의 약 90% 이상이 재만 조선인 청년들로 대부분 만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으며, 지도자들도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동만유격대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반민생단투쟁(反民生團鬪爭) 등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동만주 일대에 유격전의 근거지가될 수 있는 유격구를 건설하고, 지주와 친일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유격대원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등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34년에만 약 9백여회의 전투를 치를 정도로 무장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동만주 지역에 비하여 조선인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남만주, 북만주 일대에서도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가 조직되자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으로 재편성하여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과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
일제의 만주 침략은 중국 침략의 발판을 만들고 조선을 안정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만주 침략을 저지하는 일은 조선인과 중국인, 두 민족의 공통적 과제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민족 간의 배타적 감정은 서로의 단결을 저해하였고, 결국은 민생단사건(民生團事件)과 같이 많은 조선인이 무고하게 희생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하지만 1935년경부터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반민생단투쟁(反民生團鬪爭)의 오류를 반성하고 무엇보다 두 민족이 연대하여 반일통일전선(反日統一戰線)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게 된다. 이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활약하는 반일 무장 세력을 통합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편성되었다.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대부대 중심의 전투를 고집하던 중국 국민당이나 만주 군벌 계열의 반일 군사단체들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공세 앞에 대부분 괴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유격전(遊擊戰)을 통해 일제에 타격을 주면서 지속적으로 만주 지역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이끌어 갔다.
그러는 중에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인 유격대원들을 중심으로 백두산 지역에 항일투쟁의 거점이 마련되고,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가 결성되었다. '전민족의 계급, 성별, 지위 당파, 연령, 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반드시 일치단결 궐기하여 원수인 왜적(倭敵)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키자!'라는 내용을 강령으로 내세운 조국광복회에는 조선인 유격부대가 중심이 되어 함경도 일대 공산주의 세력과 천도교도들이 참여하였고,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군도 가담하였다.
한편, 백두산 지구에 진출한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도 전개하여 일제(日帝)에 충격을 주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37년 6월 4일 김일성(金日成)이 인솔하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단의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였다. 이 전투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등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만주의 무장 독립군은 완전히 없어졌고, 내선일체(內鮮一體)가 확립되었다고 장담하던 일본 제국주의 당국자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만주 지역의 항일투쟁 세력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공세로 인하여 1938년경 3만명에 달하던 동북항일연군의 병력은 1940년에는 1400여명으로 급격히 줄었고, 많은 지도자들이 전사하거나 일본군에 투항하였다. 만주 지역에서 무장 투쟁의 역량을 보존하는 것조차 힘겹게 된 유격부대들은 소련 영내로 이동하여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東北抗日聯軍敎導旅)를 조직하였는데, 조선인 대원은 대략 290여명 정도였다. 교도려의 대원들은 정치 교육과 군사 훈련 등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일부는 소부대를 편성하여 만주 지역의 정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진 것을 느낀 교도려의 조선인들은 독립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체로 조선공작단위원회(朝鮮工作團委員會)를 결성하였다. 이 위원회의 서기는 최용건(崔庸健)이 선출되었고, 위원은 김일성, 김책(金冊) 등 6명이 선출되었다. 이때 김일성은 정치, 군사 책임자였다.
● 임시정부에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무장투쟁론자(武裝鬪爭論者)들이 빠져 나가면서 점차 침체되어 갔다. 세인들의 관심도 점점 멀어져 각처에서 전달되던 독립운동 자금도 끊어지고 임시정부 청사의 집세를 내지 못할 정도로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1931년에 일어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한국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金九)는 최소 인원, 최소 비용으로도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개인 폭력적인 항일투쟁(抗日鬪爭)을 결심하고 1931년 10월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였다.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義烈鬪爭)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이다. 일본에서 하층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30년 12월에 중국 상해로 건너간 이봉창은 김구의 눈에 띄어 1931년 12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 일본 황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를 암살하기 위해 도쿄에 잠입하였다. 그는 1932년 1월 8일 도쿄[東京]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와 함께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일본 황제 히로히토가 탄 마차를 향해 수류탄(手榴彈)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비록 일본 황제를 폭살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이 의거(義擧)는 대외적으로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조선의 평범한 청년이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중심이며 상징인 일본 황제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조선인들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진 일이고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를 크게 환영하고 있다며 해외에 왜곡된 홍보를 하던 일제(日帝) 당국자들을 크게 당황하게 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중국 신문들은 일본 황제가 암살 위기를 모면한 것에 대해 크게 애석해 하는 보도를 하여 일본 측을 크게 분노하게 했다. 일제는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세계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중국 언론의 이러한 반일적 논조를 문제 삼아 중국의 신문사들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상해(上海)를 침략하였다.
1932년 1월 29일에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켜 상해에 주둔한 일본군은 4월 29일 일본 황제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戰勝慶祝式)을 홍구공원(紅口公園)에서 개최하였다. 이때 4월 26일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윤봉길(尹奉吉)은 29일 김홍일(金弘壹)이 준비한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을 품고 홍구공원에 잠입하여 기념식장의 단상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 사건으로 상하이 파견대 사령관 시리카와[白川義則] 대장과 가와바타[河端貞次] 상해 일본인 거류민단 단장이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일본 해군 제3함대 제독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일본 육군 제9사단장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 시게마쓰[重光葵] 중국 주재 일본 공사, 무라이[村井] 상해 일본 총영사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이 유명한 반일의거(反日義擧)를 두고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개석(蔣介石)은 "중국의 수백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인 청년 한사람이 해냈다." 며 높이 평가하였다.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두차례에 걸친 반일의거(反日義擧)를 계기로 중국인들의 혐한(嫌韓) 감정은 사라지고 임시정부의 항일투쟁 노선도 새롭게 활력을 찾았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인들이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고, 중국의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 간부를 양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는 1940년 임시정부가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홍구공원의거(紅口公園義擧) 이후 약이 바짝 오른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 통일을 모색하는 항일독립운동 전선(抗日獨立運動戰線)
1920년대 후반 중국 관내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사이에 인식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민족주의 세력은 '이당치국(以黨治國)'이라는 공화주의적 원리를 바탕으로 임시정부를 강화하려는 데에 주된 목적이 있었던 반면, 사회주의 세력은 임시정부를 대신할 혁명 정당의 결서을 통해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초 중국 관내의 민족운동 단체 중 가장 유력한 세력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의열단(義烈團)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 등 다수의 민족주의계 인사들에 의해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정당으로 결성되었으며,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강령으로 내세웠다. 1932년 초에 일어난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거치면서 중국 관내의 항일투쟁이 활기를 띠게 되자 이 두 단체가 중심이 되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중국 관내의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정당과 단체가 대부분 참여하였고, 미주 지역의 한국인 단체도 가담하였다.
●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창당과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항일투쟁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은 각 정당과 단체의 연합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사실상 소속된 각 정당과 단체들은 서로 고립되어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정당과 단체를 해체하고 창설된 것이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었다.
비록 김구를 비롯하여 임시정부를 고수하려는 일부 세력이 불참하였으나 민족혁명당은 중국 관내에 있는 대부분의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아우른 최대 규모의 민족통일전선 정당이었다. 민족혁명당의 강령은 '민주 정권의 수립'을 비롯하여 '토지 국유화 및 농민 분배', '대규모 생산 기관의 국가 운영', '국민 경제 활동의 국가 통제', '친일 세력의 재산 몰수' 등 사회주의적 경제체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삼균주의에 기초를 둔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과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것은 당시 민족주의 세력도 광복 이후 민족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사회주의적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민족혁명당의 통일전선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의열단 계열의 독주에 불만을 느낀 일부 민족주의 계열이 이탈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조소앙이 탈당한 후 한국독립당을 다시 만들었고, 지청천(池靑天), 윤기섭(尹琦燮), 신익희(申翼熙) 등도 이탈하여 조선혁명당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민족혁명당은 통일전선적 성격이 약화되고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해졌다.
한편, 민족혁명당의 결성에 참가하지 않은 김구(金九), 조완구(趙琬九), 이시영(李始榮) 등 임시정부 고수 세력은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정당으로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한국국민당은 민족혁명당에 비하여 항일투쟁의 역량에서 열세에 있었다.
민족혁명당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중국 정부의 지원 아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무장 단체로 '대적 심리전', '적 후방 공작 활동'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좀 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이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화북 지방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하고, 1941년 4월에 최고 지도부를 포함한 일부 세력만 남겨둔 채 대부분의 세력이 황하를 건넜다.
● 좌우통합 임시정부의 성립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등 민족주의 계열의 3개 정당이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사회주의 계열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비롯한 4개 단체가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동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였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일단 광복연합과 민족전선의 두 그룹으로 크게 나뉘게 된 것이다.
그 후 이를 하나로 묶으려는 통합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임시정부의 존속 여부, 조선의용대의 지휘권 문제 들을 놓고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실패하였다. 그러자 광복연합의 우파 3개 정당이 합당하여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임시정부를 이끌어 갔다. 이때는 임시정부가 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상해를 떠나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중경(中京)에 정착했을 때인 1940년 4월이었다.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군사적 원조 아래 9월에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였다.
한편,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의용대의 약 80%가 화북 지방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참여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조선의용대의 잔여 병력이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군사력의 통일에 이어서 김원봉을 비롯한 민족전선의 좌파 인사들이 1942년 10월에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金奎植)이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장건상(張建相) 등의 인사들이 국무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1944년 4월에 통일전선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마지막으로 임시정부는 장건상을 파견하여 화북 지역의 조선독립동맹과도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제가 패망하여 교섭이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조선독립동맹의 한 분맹의 창립대회에서는 손문(孫文), 모택동(毛澤東)과 함께 김구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조선독립동맹도 임시정부의 권위와 대표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 사이의 통일전선 형성의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통일전선이 형성되지 못함으로써 임시정부는 연합국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하였고, 이것은 광복 이후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서 일본군이 중국 대륙까지 침략해 호자, 일단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항전할 수 있는 정규군의 창설을 적극 시도하였다. 연합국의 지원을 얻어 조국 광복을 이루려면 우선 우리 민족이 일제(日帝)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참전했다는 모습을 세계에 보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만주,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간부들과 중국 각지의 애국 청년들을 모아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였다.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한국, 중국 및 서태평양으로부터 왜구(倭寇)를 완전히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항전한다.'는 내용의 대일선전포고문(對日宣戰布告文)을 발표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1942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흡수하여 전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당시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에 속한 애국 청년들은 고학력자들이 많았고 조국 광복에 대한 의지로 똘똘 뭉쳐 있어서 병력은 많지 않아도 전투력은 매우 높고 활용가치가 많았다. 특히 일본어에 능숙한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연합군 측에서는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선전 전단 작성', '정보 수집과 교란 활동', '암호 번역', '대적 회유 방송', '일본군에 소속된 한국인 병사의 탈출 유도', '적군에 대한 기습 공격' 등 다양한 군사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점을 안 영국군은 1943년에 임시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고 광복군 공작대를 미얀마, 인도 전선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창설 당시 중국 정부와 맺은 협정에 따라 중국군의 군복을 입고 중국군의 작전 지휘를 받아 항일전(抗日戰)에 참여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끈질긴 협상을 벌여 1945년 4월에는 독자적인 작전권을 완전히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광복군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조국 광복을 직접 쟁취하기 위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이었다. 그리하여 미국 OSS와 협약을 맺어 국내 정진군을 조직하였다. 8월 초까지 유격전에 필요한 특수 훈련을 끝낸 국내 정진군은 국내로 침투하여 무장투쟁의 거점을 마련하고,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마친 국내 정진군이 국내에 투입되기 직전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 계획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 아쉬움을 김구(金九)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왜적(倭敵)이 항복한다 하였다. 아!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
서안과 북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비밀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 국내의 중요한 일본 군사기지를 파괴하거나 점령한 뒤에 미국 항공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김구(金九) 백범일지(白凡逸志)'
●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과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의 항일투쟁(抗日鬪爭)
화북 지역에는 김무정(金武亭), 최창익(崔昌益) 등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조선인들도 있었다. 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북상해온 조선의용대원들과 결합하여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1년 12월 호가장전투(胡家莊戰鬪), 1942년 5월 태행산전투(太行山戰鬪) 등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데, 그 과정에서 불행히도 의열단 시절부터 김원봉(金元鳳)과 생가고락을 함께한 윤세주(尹世胄)가 사망하는 등 많은 희생을 치르었다.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김두봉(金枓奉)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게 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도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조선독립동맹은 화북 지방의 각 지역에 분맹을 설치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조선의용군도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과 더불어 활동하면서 요문구 전투, 백초평 전투, 화순 전투 등 수많은 격전을 치렀다. 광복 당시 조선의용군의 병력은 한국광복군보다 훨씬 많은 약 2천여명 정도였다.
한편, 조선독립동맹은 건국 강령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서의 지배를 전복하여 독립 자유의 조선 민주 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전국 국민의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의 건립',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서의 일체의 재산 및 토지 몰수와 일본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기업의 국영화 및 토지 분배의 실행'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강령 내용은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과도 기본 방향이 일치한다. 임시정부 쪽에서 장건상을 파견하여 통일전선의 결성을 협의해 왔을 때, 조선독립동맹에서도 김두봉이 충칭의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의논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중단되었다. 국내의 건국동맹에서도 연락원이 와서 조선의용군과 협동 작전을 계획하였고, 1945년 8월 29일에 중국 연안에서 '전조선 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이 역시 일제의 항복과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1945년 12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핵심 인물인 김두봉, 김무정, 최창익 등 이른바 연안파들이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중국의 국공내전(國共內戰) 와중에서 조선의용군 병력은 함께 들어오지 못하였다. 북한 정권의 수립이 참여한 연안파들은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 이후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숙청되었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일성 독재 체제의 강화를 위해서 오랫동안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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