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정승화(鄭昇和) 육군 참모총장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항하였다. 최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보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혀 유신체제 유지 의사를 선언했다. 이에 반발하여 1979년 11월 24일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 세력은 'YMCA 위장 결혼식'을 통해 대통령 보궐 선거 반대 및 유신체제 종식을 위한 거국 내각 구성을 주장하였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시한 최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절대 권력자 박정희의 갑작스런 사망은 권력 공백 상태를 가져왔다. 12월 12일에 전두환(全斗煥)과 노태우(盧泰愚)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대통령과 군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박정희 암살 가담 혐의로 체포했기 때문이었다. 이틀 후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실권은 군사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차지했다.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1980년 4월 14일에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면서 권력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상시국에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한다는 것은 군권과 정권의 실세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정치 표면에 공식적으로 등장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구실이 있어야만 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너졌는데도 민주화를 위한 정치 일정이 밝혀지지 않은 채 안개 정국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두환이 권력의 실체로 떠오르자 국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5월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대대적인 집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니, 이른바 '1980년의 봄'이었다. '계엄 철폐', '유신 세력 척결'의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이 서울역에서 대규모 연합시위를 개최하였다. 연합시위에서는 사회 혼란을 빌미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신군부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시위를 자제할 것을 결의하고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기회를 노리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전국 대학총학생회 장단회의'에 참석한 55개 대학생 대표들을 연행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인사와 김종필 등 구공화당계 정치인을 체포하였다.
● 5·18광주시민항쟁(五一八光州市民抗爭)과 제5공화국의 탄생
신군부가 실세로 떠오르자, 국민들은 사회 안정을 빌미로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시위를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난처해진 신군부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확대하고 호남을 의도적으로 자극하였다. 호남 출신 김대중을 체포하고, 과잉진압으로 폭력 시위를 유발한 것이었다. 결국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광주의 반독재투쟁(反獨裁鬪爭)을 진압하면서 정치 표면에 나타났던 것이다.
계엄군이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하여 사상자가 늘어나자 흥분한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과 시가전(市街戰)을 벌였고, 이 사태가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5월 27일 광주는 평온을 되찾았으나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비극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5·18광주시민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켜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나고, 육군 대장(大將)으로 전역한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임기 7년의 대통령간선제 헌법을 만들고, 반공법 대신 국가보안법과 언론 통제를 위한 언론기본법도 만들었다. 그 와중에 5만 7백여명이 체포되어 3천여명이 구속되었고, 교사, 기자, 고등학생을 포함한 4만여명이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로 보내졌다. 방송사들은 KBS로 통합되고, 각 신문사에는 보안사령부 말단 군인들을 배치해 언론을 장악하였다.
또한, 811명을 정치 활동 규제로 묶어 놓고, 민주정의당을 창당하였다. 결국 선거인단 2525명 중 2524명의 표를 얻은 전두환이 7년 임기의 간선제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1981년 3월 3일에 이른바 제5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제5공화국을 부정하는 학생들은 미국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한국 군대의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12·12사변(十二十二事變)과 5·18광주시민항쟁(五一八光州市民抗爭) 유혈진압에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는 질문이었다. 1980년 10월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이은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1983년 9월 대구 미국문화원 폭탄 테러 사건, 1985년 5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사건은 이런 질문에서 비롯된 사건들이엇다.
살육과 강권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유화정책을 펼쳤다. 여의도에서 '국풍 81호'라는 대규모 국가 후원 예술제를 개최하고, 해방 이후 계속된 야간 통행금지를 해체시켰다. 중,고생의 교복과 두발을 자유화하고, 해외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으며, 프로 야구도 창설하였다. 1983년에는 KBS 방송에서 남한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 찾기가 생방송으로 진행되었고, 1985년에는 남북적십자사에 의해 각각 151명씩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가족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한편, 악화된 세계 경제의 여건에도 연평균 8.3%의 경제성장과 한자리수 물가상승률을 이룩하였고, 1987년에는 47억 달러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등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1985년 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를 계기로 정치 활동이 금지된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원 속에 대통령 직선제를 공약으로 내세운 신민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25일만에 신민당은 서울, 부산 등 주요 5개 도시에서 여당인 민정당과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을 누르고 전원 당선하는 이변을 보였다. 대통령직선제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까닭이다. 자신감을 얻은 야당과 학생들은 광주시민학살 진상규명과 직선제 개헌운동을 전개하였다.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1986년 10월 '금강산 댐 사건'을 조작하고, 건국대학에서 개최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 결성식을 무려 4일간에 걸쳐 폭력으로 진압하여 1288명을 구속하였다.
● '턱 치니 억 하고' 무너진 제5공화국
1987년은 정초부터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국민과 야당은 정부의 도덕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개헌 요구를 하고 나섰다.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국가의 대사인 1998년 서울 올림픽 개최와 평화적 정권 이양을 위해 더 이상의 직선제 개헌 논의를 금한다는 4·13호헌조치(四一三護憲措置)를 발표했다. 4·13호헌조치는 오히려 야당 정치인을 비롯해 학원, 종교, 언론 등 각계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및 축소 조작 사건'의 전모를 밝혔고 학생과 야당 정치인은 힘을 합쳐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다. 거리에서는 연일 "직선제 개헌 쟁취하자!", "고문 살인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에 빠졌다. 다음날, 민주정의당은 인기 가수와 치어리더까지 동원한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날 국민운동본부는 전국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하였다.
오후 6시를 기해서 전국에 애국가가 불려지고, 전국의 교회와 사찰이 타종하였으며, 자동차 경적이 울려 퍼졌다.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퇴근길 직장인들도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로써 우리 역사상 최대의 평화적 반독재투쟁인 6월 민주주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운동이 시작된 지 18일만에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이름으로 신군부는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여 이른바 6·29선언(六二九宣言)을 하기에 이르렀다.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고, 양심수와 시국사범에 대한 사면과 복권을 약속했으며, 언론 자유를 보장한 것이었다. 이어 정치사범 177명이 석방되고 김대중 등 2335명의 정치 활동 규제가 풀렸으며,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치열한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6월 항쟁 결과, 1971년 유신 이후 16년만에 국민들은 직접선거를 하게 되었고, 노태우 후보가 1987년 12월 16일에 36%의 저조한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동안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 오던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지도자가 힘을 합치지 못한 상황에서 조장된 지역감정에 의해 국민의 표가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현희의 KAL기 폭파 사건으로 국민들의 반공 위기의식이 조장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은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함으로써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가 등장하였다. 그러자 야당은 서로 결속하여 야당의 독단적 국정 운영을 견제하였다.
'보통 사람'을 표방한 노태우 행정부는 더 이상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여소야대 국회의 요구로 제5공화국의 비리와 5·18광주시민항쟁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국회 청문회가 열렸고 5·16군사정변으로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가 제한적으로 실시되었다.
6월 항쟁에 참가했던 민중은 그동안 억눌려 왔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활성화시켰으며, 농민들은 전국적 농민 단체를 정비하였다. 교사들도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을 조직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탈퇴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교사 1465명으 대량 해직시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연일 청문회 생중계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행정부는 5·18광주시민항쟁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내지는 못했다.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百潭寺)로 자진 운둔하는 형식으로 청문회는 사법처리 없이 막을 내렸다.
● 노태우 행정부의 득과 실
노태우 행정부의 최대 성과는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비록 신군부 동료끼리의 정권 계승이지만, 전직 대통령이 임기를 마친 가운데 혁명이나 군사정변을 거치지 않고 정권 이양이 최초로 이루어졌다. 남,북 및 북방 외교 성과도 높이 평가된다. 1988년 남북교류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와도 교류를 추진하겠다는 7월 7일 선언을 시작으로 공산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수교하였고, 소련에 이어 중국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북한과도 관계 개선이 진행되어 서울에서 남북총리회담이 개최되고, 1991년에는 남한과 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과 함께 냉전체제가 무너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세계에 서울을 알리는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한 적극적 외교의 결과였다.
그러나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는 철저히 통제되었다. 1988년 서경원 의원의 개인적 북한 방문과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상임고문인 문익환 목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방북 대표인 임수경,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문규현 신부가 줄줄이 방북하였으나, 모두 구속되어 무거운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1986년부터 저유가, 저금리, 달러 약세라는 '삼저현상'의 좋은 조건 속에 10%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삼저효과'의 소멸과 시장개방 압력에 시달렸다. 물가는 폭등했고, 활황을 이루던 증시도 폭락했다. 농민들은 미국 수입 농수산물 때문에 파산할 위기에 놓였다.
만간 차원의 통일운동과 경제 난국으로 난처해진 노태우 행정부는 1990년 2월 9일 '3당 통합'으로 탈출의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에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통합되어 거대 야당인 민주자유당이 출범하면서 여소야대 구도를 역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1991년 4월 경찰관에게 구타당하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민주자유당 해체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었다. 그런 가운데 치러진 1992년 3월 25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획기적인 용단을 내리지 않고는 연말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야당에게 내어 줄 상황이었다.
타개책으로 민주자유당은 김영삼에게 당 대표직을 맡기고 그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이승만의 자유당 공천에 의해 여당 의원으로 국회에 첫발을 내딛었지만, 오랜 야당 지도자로 독재정권에 항거해 온 김영삼이 이번에 다시 여당으로 돌아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다. 위기에 몰린 신군부의 노태우와 대통령 자리를 놓고 정치적 흥정을 한 결과였다.
● 김영삼의 '문민정부'와 IMF 외환 위기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이듬해 2월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영삼은 1960년 5·16정변 이후 처음으로 정통성을 지닌 민간정부를 53년만에 출범시켰다. 새 정부는 도덕성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정(司正) 활동을 통해 제5공화국, 제6공화국 정부의 비리와 부정을 시정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첫번째 조치로서 1993년 3월 정부 차관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이 조치는 국회의원과 4급 이상 공무원에게까지 확대되어 재산등록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 부정축재 혹은 비리와 관련된 5,6공 인사들이 공직을 떠나거나 구속되었다.
김영삼 행정부는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는 5,6공 청산이 주요과제라고 믿고, 신군부를 움직여온 군대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뿌리뽑기 위해 1994년 4월 '하나회' 소속 장성(將星)들의 보직을 해임하였다. 이 조치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세력기반을 무력화시키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군부개혁에 이어 여당인 민자당을 정리하는 작업이 따랐다. 신군부계와 김종필계, 그리고 김영삼계가 연합된 민자당이 김영삼계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이에 불만을 품은 김종필계가 이탈하여 1995년 3월에 자유민주연합을 따로 조직하였다. 민자당내의 신군부 세력은 내란 및 반란죄로 기소되면서 자연히 민자당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민자당은 재야 민주인사들과 직능인을 새로 영입하고 이름을 신한국당(新韓國黨)으로 바꾸어 면모를 일신하였다. 한편 1992년 대선에 낙선한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이 다시 1995년 9월에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총재에 취임하여 다시금 삼김시대(三金時代)가 도래하였다.
신군부에 의한 12·12사변과 5·18광주시민항쟁에 대한 평가도 새 정부가 해결해야 될 과제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영삼 행정부는 초기에 12·12사변을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나 이를 사법처리하지 않고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고 선언하였다. 5·18광주시민항쟁은 처음으로 관민(官民)이 합동으로 추모식을 거행하여 명예를 회복시켰다.
신군부에 대한 사법처리를 유보해오던 김영삼 행정부는 사회적 여론에 따라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자금조성 혐의로 구속한데 이어 12월 3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12·12사변 및 5·18광주시민항쟁과 관련하여 반란수괴 등 혐의로 구속하였으며, 그밖의 신군부 요인들을 무더기로 구속 기소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12·12사변의 피해자인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이미 1993년 7월에 반란 및 내란죄로 대검에 고소한 바 있었다. 그런데 정부는 두 전직 대통령의 반란 및 내란죄 이외에도 수천억원대의 뇌물수뢰를 추가 기소하였다. 그리고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대기업 총수들이 또한 함께 기소되었다. 특히 뇌물수수혐의는 야당 국회의원의 폭로가 계기가 되어 수사가 진행되었다.
우리 나라 헌정사상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서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 속에 1996년 3월 11일부터 공판이 진행되어 이 해 8월 26일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6월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 해 12월에 진행된 2심공판에서는 전두환 피고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노태우 피고의 형량도 17년으로 줄이는 판결을 내렸다.
한편 1995년 6월 27일에는 그동안 유보되어 왔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도지사, 시장, 구청장, 군수 등 245명이 주민의 투표로 직선되어 민선자치시대가 다시금 출범하게 된 것이다. 이어 1996년 4월 11일에는 제15대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여당인 신한국당이 과반수에 미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경제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1993년 8월 12일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이다. 은행의 가명계좌를 실명계좌로 바꾸는 이 조치로 금융시장이 위축되고 소규모 사업자들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는 등 부작용이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경제개혁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1993년 12월에 정부는 수년간 끌어오던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을 타결지었다. 보호무역주의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이 협정은 국제경쟁력이 약한 개발도상국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피해를 주는 것으로서 한국은 이 협정으로 상품, 금융, 건설, 유통, 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외국에 문호를 열어 놓게 되었다.
정부는 시장개방정책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1996년 9월 12일 서방 선진국들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시장개방정책에 맞추어 낙후된 분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세계화'를 강조하고 1995년 1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한국 경제는 1995년 10월 현재 수출사상 처음으로 1천억 달러를 돌파하고 996년말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돌파하여 선진국을 바짝 뒤쫓는 수준에 올라섰으나. 무역역조가 갈수록 심화되고 경제성장이 둔화되어 1996년의 경제성장률은 7%를 밑돌게 되었다. 이러한 수치는 1990년의 9.6%, 1991년의 9.1%, 1992년의 5.0%, 1993년의 5.8%, 1994년의 8.4%, 1995년의 8.7%에 비하여 침체기에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남북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보였다. 정부는 1993년 3월 19일 공산주의자로서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이인모(李仁模)를 무조건 북한으로 보냈다. 이러한 인도주의적 태도로서 북한과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를 기대했다. 그 후 북한은 남한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받아들여 1994년 6월 28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7월 8일 갑자기 사망하여 회담이 무산되었다. 엄청난 충격 속에 일부 재야인사와 학생들이 조문을 표하자 정부는 이를 제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남한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남북관계는 다시금 냉각관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전부터 진행되던 남북경제교류는 계속되었으며, 특히 나진, 선봉 지구의 자유시 건설에 남한 기업이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북한 핵개발 문제도 1996년 여름에 타결되어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원자로 건설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특히 1995년에는 북한이 수재(水災)로 인하여 식량부족이 심각해지자 인도적 차원에서 쌀 수만톤을 무상 지원하였다.
그런데 1996년 9월 18일 남북관계를 다시 악화시키는 사건이 돌발했다. 무장 군인 수십명을 태운 북한 잠수함이 남한을 정찰하던 중 강릉 앞바다에 좌초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남한에 대한 군사적 도발로 간주한 한국 정부는 무장 군인들 가운데 1명을 체포, 나머지 군인들을 소탕하고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촉구하였다. 북한 외무성은 처음에 정상적인 훈련중 좌초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마침내 사과를 표하여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김영삼 행정부는 집권 초기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해외에서 숨진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전명운(田明雲) 등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해외에서 국내로 모셔와 국립묘지에 안장시켰고,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써오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기 시작하여 1996년 11월 철거를 완료하였다.
1997년은 김영삼 행정부의 마지막 해인 동시에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어 있는 해였다. 그러나 집권초기에 비교적 민심의 지지를 크게 얻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지고 지도력을 상실했다. 더욱이 경제적으로는 만성적인 외환 위기에 시달리던 정부가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2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지원을 공식 요청하면서 경제주권의 심각한 위축을 가져왔다.
1996년말 신한국당이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민심을 크게 잃더니, 1997년에 한보철강의 부도를 계기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구속되고, 한보그룹으로부터 돈을 받은 여야 정치인들이 무더기로 조사를 받았으며, 이어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金賢哲)이 한보 비리르 비롯한 여러 이권과 국정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아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보 사태로 어수선해진 정계를 더욱 혼란에 빠뜨린 것은 2월 12일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황장엽(黃長燁)이 망명하면서 가지고 왔다는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 사건이었다. 북한과 연계된 정관계 인사의 명단을 적었다는 이 리스트가 과연 있는지를 놓고 정계는 긴장감이 돌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수선해진 민심과 정치국면을 돌리고 12월의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해 고건(高建)을 국무총리로 세우고 신한국당의 대표에 대법관 출신으로 이회창(李會昌)을 임명했다.
여당의 대표가 새로 임명되면서 정치권은 선거에 대비하여 숨가쁘게 개편되었다. 우선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7월 21일 전당대회에서 자유경선을 통해 이회창 고문이 후보로 선출되었다. 여당 후보가 자유경선으로 선출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서 민주주의의 일보 진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경선에 출마하여 2위를 차지한 이인제(李仁濟) 경기도지사는 이회창 후보가 두 아들의 병역시비로 지지도가 떨어지자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독자적인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신당(國民新黨)을 창당했다. 그러나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 추종자가 적어 작은 정당으로 주저앉았다.
혼란에 빠진 여당과는 대조적으로 야당인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은 선거 후 연립정부 구성과 내각제 실시 등을 약속하고 김대중을 단일후보로 내세웠다. 그 후 대구와 경북지역에 기반을 둔 박태준(朴泰俊) 의원도 자민련의 총재가 되어 동참하면서 전라도,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 지역이 망라되는 대연합을 형성했다. 이를 세칭 'DIT연대'라 한다.
야당의 결속에 당황한 신한국당은 11월 21일 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으로 당명(黨名)을 바꾸고 선거전에 임하였으나, 이회창 후보는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면서 갈등을 빚어 여권의 단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를 한달 정도 앞두고 뜻밖의 IMF사태가 터졌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여당의 인기는 급락하고, 그 책임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옥외집회가 금지되고 TV합동토론회와 신문광고 등을 통해 선거운동이 전개된 점이 종전과 달랐다. 그런 점에서 매스미디어 선거라고도 불린다.
12월 18일 치러진 선거결과, 김대중 후보가 40.3%의 지지율을 얻어 39만표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김영삼 행정부는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했다는 평을 받았다. 김대중 당선자는 취임에 앞서 김영삼 대통령과 합의하에 국민화합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수감중인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특별사면하여 석방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기간에는 대형사고가 잇달아 일어나서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1993년 3월 부산 구포역에서 열차가 전복하여 68명이 사망하고, 10월에는 전북 부안 앞바다에서 서해 페리호가 침몰하여 승객 2백여명이 사망, 실종되었으며, 1994년 10월에는 서울의 성수대교가 붕괴하여 아침 출근길의 시민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1995년 4월에는 대구 지하철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하여 100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했으며, 이 해 7월에는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갑자기 붕괴하여 5백여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이러한 대형사고는 각종 토목공사의 부실시공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고, 민주화 과정에 긴장이 풀리면서 기초질서가 무너진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이른바 민주화세력이 반독재투쟁에는 공로가 있지만, 국가 경영능력은 떨어진다는 비판도 일어났다.
한편, 대중문화에서는 서태지(徐泰智)가 조직한 댄스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대중음악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화유형의 도래의 징후가 나타나 소위 '신세대 문화'가 형성되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한국사 강론」47.6·29선언(六二九宣言)과 민주주의의 발전
● 좌절된 1980년의 봄, 부활하는 군사독재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정승화(鄭昇和) 육군 참모총장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항하였다. 최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보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혀 유신체제 유지 의사를 선언했다. 이에 반발하여 1979년 11월 24일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 세력은 'YMCA 위장 결혼식'을 통해 대통령 보궐 선거 반대 및 유신체제 종식을 위한 거국 내각 구성을 주장하였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시한 최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절대 권력자 박정희의 갑작스런 사망은 권력 공백 상태를 가져왔다. 12월 12일에 전두환(全斗煥)과 노태우(盧泰愚)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대통령과 군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박정희 암살 가담 혐의로 체포했기 때문이었다. 이틀 후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실권은 군사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차지했다.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1980년 4월 14일에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면서 권력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상시국에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한다는 것은 군권과 정권의 실세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정치 표면에 공식적으로 등장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구실이 있어야만 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너졌는데도 민주화를 위한 정치 일정이 밝혀지지 않은 채 안개 정국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두환이 권력의 실체로 떠오르자 국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5월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대대적인 집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니, 이른바 '1980년의 봄'이었다. '계엄 철폐', '유신 세력 척결'의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이 서울역에서 대규모 연합시위를 개최하였다. 연합시위에서는 사회 혼란을 빌미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신군부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시위를 자제할 것을 결의하고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기회를 노리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전국 대학총학생회 장단회의'에 참석한 55개 대학생 대표들을 연행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인사와 김종필 등 구공화당계 정치인을 체포하였다.
● 5·18광주시민항쟁(五一八光州市民抗爭)과 제5공화국의 탄생
신군부가 실세로 떠오르자, 국민들은 사회 안정을 빌미로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시위를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난처해진 신군부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확대하고 호남을 의도적으로 자극하였다. 호남 출신 김대중을 체포하고, 과잉진압으로 폭력 시위를 유발한 것이었다. 결국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광주의 반독재투쟁(反獨裁鬪爭)을 진압하면서 정치 표면에 나타났던 것이다.
계엄군이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하여 사상자가 늘어나자 흥분한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과 시가전(市街戰)을 벌였고, 이 사태가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5월 27일 광주는 평온을 되찾았으나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비극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5·18광주시민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켜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나고, 육군 대장(大將)으로 전역한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임기 7년의 대통령간선제 헌법을 만들고, 반공법 대신 국가보안법과 언론 통제를 위한 언론기본법도 만들었다. 그 와중에 5만 7백여명이 체포되어 3천여명이 구속되었고, 교사, 기자, 고등학생을 포함한 4만여명이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로 보내졌다. 방송사들은 KBS로 통합되고, 각 신문사에는 보안사령부 말단 군인들을 배치해 언론을 장악하였다.
또한, 811명을 정치 활동 규제로 묶어 놓고, 민주정의당을 창당하였다. 결국 선거인단 2525명 중 2524명의 표를 얻은 전두환이 7년 임기의 간선제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1981년 3월 3일에 이른바 제5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제5공화국을 부정하는 학생들은 미국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한국 군대의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12·12사변(十二十二事變)과 5·18광주시민항쟁(五一八光州市民抗爭) 유혈진압에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는 질문이었다. 1980년 10월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이은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1983년 9월 대구 미국문화원 폭탄 테러 사건, 1985년 5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사건은 이런 질문에서 비롯된 사건들이엇다.
살육과 강권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유화정책을 펼쳤다. 여의도에서 '국풍 81호'라는 대규모 국가 후원 예술제를 개최하고, 해방 이후 계속된 야간 통행금지를 해체시켰다. 중,고생의 교복과 두발을 자유화하고, 해외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으며, 프로 야구도 창설하였다. 1983년에는 KBS 방송에서 남한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 찾기가 생방송으로 진행되었고, 1985년에는 남북적십자사에 의해 각각 151명씩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가족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한편, 악화된 세계 경제의 여건에도 연평균 8.3%의 경제성장과 한자리수 물가상승률을 이룩하였고, 1987년에는 47억 달러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등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1985년 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를 계기로 정치 활동이 금지된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원 속에 대통령 직선제를 공약으로 내세운 신민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25일만에 신민당은 서울, 부산 등 주요 5개 도시에서 여당인 민정당과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을 누르고 전원 당선하는 이변을 보였다. 대통령직선제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까닭이다. 자신감을 얻은 야당과 학생들은 광주시민학살 진상규명과 직선제 개헌운동을 전개하였다.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1986년 10월 '금강산 댐 사건'을 조작하고, 건국대학에서 개최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 결성식을 무려 4일간에 걸쳐 폭력으로 진압하여 1288명을 구속하였다.
● '턱 치니 억 하고' 무너진 제5공화국
1987년은 정초부터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국민과 야당은 정부의 도덕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개헌 요구를 하고 나섰다.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국가의 대사인 1998년 서울 올림픽 개최와 평화적 정권 이양을 위해 더 이상의 직선제 개헌 논의를 금한다는 4·13호헌조치(四一三護憲措置)를 발표했다. 4·13호헌조치는 오히려 야당 정치인을 비롯해 학원, 종교, 언론 등 각계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및 축소 조작 사건'의 전모를 밝혔고 학생과 야당 정치인은 힘을 합쳐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다. 거리에서는 연일 "직선제 개헌 쟁취하자!", "고문 살인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에 빠졌다. 다음날, 민주정의당은 인기 가수와 치어리더까지 동원한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날 국민운동본부는 전국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하였다.
오후 6시를 기해서 전국에 애국가가 불려지고, 전국의 교회와 사찰이 타종하였으며, 자동차 경적이 울려 퍼졌다.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퇴근길 직장인들도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로써 우리 역사상 최대의 평화적 반독재투쟁인 6월 민주주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운동이 시작된 지 18일만에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이름으로 신군부는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여 이른바 6·29선언(六二九宣言)을 하기에 이르렀다.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고, 양심수와 시국사범에 대한 사면과 복권을 약속했으며, 언론 자유를 보장한 것이었다. 이어 정치사범 177명이 석방되고 김대중 등 2335명의 정치 활동 규제가 풀렸으며,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치열한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6월 항쟁 결과, 1971년 유신 이후 16년만에 국민들은 직접선거를 하게 되었고, 노태우 후보가 1987년 12월 16일에 36%의 저조한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동안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 오던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지도자가 힘을 합치지 못한 상황에서 조장된 지역감정에 의해 국민의 표가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현희의 KAL기 폭파 사건으로 국민들의 반공 위기의식이 조장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은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함으로써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가 등장하였다. 그러자 야당은 서로 결속하여 야당의 독단적 국정 운영을 견제하였다.
'보통 사람'을 표방한 노태우 행정부는 더 이상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여소야대 국회의 요구로 제5공화국의 비리와 5·18광주시민항쟁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국회 청문회가 열렸고 5·16군사정변으로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가 제한적으로 실시되었다.
6월 항쟁에 참가했던 민중은 그동안 억눌려 왔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활성화시켰으며, 농민들은 전국적 농민 단체를 정비하였다. 교사들도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을 조직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탈퇴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교사 1465명으 대량 해직시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연일 청문회 생중계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행정부는 5·18광주시민항쟁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내지는 못했다.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百潭寺)로 자진 운둔하는 형식으로 청문회는 사법처리 없이 막을 내렸다.
● 노태우 행정부의 득과 실
노태우 행정부의 최대 성과는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비록 신군부 동료끼리의 정권 계승이지만, 전직 대통령이 임기를 마친 가운데 혁명이나 군사정변을 거치지 않고 정권 이양이 최초로 이루어졌다. 남,북 및 북방 외교 성과도 높이 평가된다. 1988년 남북교류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와도 교류를 추진하겠다는 7월 7일 선언을 시작으로 공산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수교하였고, 소련에 이어 중국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북한과도 관계 개선이 진행되어 서울에서 남북총리회담이 개최되고, 1991년에는 남한과 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과 함께 냉전체제가 무너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세계에 서울을 알리는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한 적극적 외교의 결과였다.
그러나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는 철저히 통제되었다. 1988년 서경원 의원의 개인적 북한 방문과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상임고문인 문익환 목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방북 대표인 임수경,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문규현 신부가 줄줄이 방북하였으나, 모두 구속되어 무거운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1986년부터 저유가, 저금리, 달러 약세라는 '삼저현상'의 좋은 조건 속에 10%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삼저효과'의 소멸과 시장개방 압력에 시달렸다. 물가는 폭등했고, 활황을 이루던 증시도 폭락했다. 농민들은 미국 수입 농수산물 때문에 파산할 위기에 놓였다.
만간 차원의 통일운동과 경제 난국으로 난처해진 노태우 행정부는 1990년 2월 9일 '3당 통합'으로 탈출의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에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통합되어 거대 야당인 민주자유당이 출범하면서 여소야대 구도를 역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1991년 4월 경찰관에게 구타당하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민주자유당 해체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었다. 그런 가운데 치러진 1992년 3월 25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획기적인 용단을 내리지 않고는 연말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야당에게 내어 줄 상황이었다.
타개책으로 민주자유당은 김영삼에게 당 대표직을 맡기고 그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이승만의 자유당 공천에 의해 여당 의원으로 국회에 첫발을 내딛었지만, 오랜 야당 지도자로 독재정권에 항거해 온 김영삼이 이번에 다시 여당으로 돌아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다. 위기에 몰린 신군부의 노태우와 대통령 자리를 놓고 정치적 흥정을 한 결과였다.
● 김영삼의 '문민정부'와 IMF 외환 위기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이듬해 2월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영삼은 1960년 5·16정변 이후 처음으로 정통성을 지닌 민간정부를 53년만에 출범시켰다. 새 정부는 도덕성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정(司正) 활동을 통해 제5공화국, 제6공화국 정부의 비리와 부정을 시정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첫번째 조치로서 1993년 3월 정부 차관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이 조치는 국회의원과 4급 이상 공무원에게까지 확대되어 재산등록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 부정축재 혹은 비리와 관련된 5,6공 인사들이 공직을 떠나거나 구속되었다.
김영삼 행정부는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는 5,6공 청산이 주요과제라고 믿고, 신군부를 움직여온 군대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뿌리뽑기 위해 1994년 4월 '하나회' 소속 장성(將星)들의 보직을 해임하였다. 이 조치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세력기반을 무력화시키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군부개혁에 이어 여당인 민자당을 정리하는 작업이 따랐다. 신군부계와 김종필계, 그리고 김영삼계가 연합된 민자당이 김영삼계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이에 불만을 품은 김종필계가 이탈하여 1995년 3월에 자유민주연합을 따로 조직하였다. 민자당내의 신군부 세력은 내란 및 반란죄로 기소되면서 자연히 민자당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민자당은 재야 민주인사들과 직능인을 새로 영입하고 이름을 신한국당(新韓國黨)으로 바꾸어 면모를 일신하였다. 한편 1992년 대선에 낙선한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이 다시 1995년 9월에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총재에 취임하여 다시금 삼김시대(三金時代)가 도래하였다.
신군부에 의한 12·12사변과 5·18광주시민항쟁에 대한 평가도 새 정부가 해결해야 될 과제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영삼 행정부는 초기에 12·12사변을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나 이를 사법처리하지 않고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고 선언하였다. 5·18광주시민항쟁은 처음으로 관민(官民)이 합동으로 추모식을 거행하여 명예를 회복시켰다.
신군부에 대한 사법처리를 유보해오던 김영삼 행정부는 사회적 여론에 따라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자금조성 혐의로 구속한데 이어 12월 3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12·12사변 및 5·18광주시민항쟁과 관련하여 반란수괴 등 혐의로 구속하였으며, 그밖의 신군부 요인들을 무더기로 구속 기소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12·12사변의 피해자인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이미 1993년 7월에 반란 및 내란죄로 대검에 고소한 바 있었다. 그런데 정부는 두 전직 대통령의 반란 및 내란죄 이외에도 수천억원대의 뇌물수뢰를 추가 기소하였다. 그리고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대기업 총수들이 또한 함께 기소되었다. 특히 뇌물수수혐의는 야당 국회의원의 폭로가 계기가 되어 수사가 진행되었다.
우리 나라 헌정사상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서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 속에 1996년 3월 11일부터 공판이 진행되어 이 해 8월 26일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6월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 해 12월에 진행된 2심공판에서는 전두환 피고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노태우 피고의 형량도 17년으로 줄이는 판결을 내렸다.
한편 1995년 6월 27일에는 그동안 유보되어 왔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도지사, 시장, 구청장, 군수 등 245명이 주민의 투표로 직선되어 민선자치시대가 다시금 출범하게 된 것이다. 이어 1996년 4월 11일에는 제15대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여당인 신한국당이 과반수에 미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경제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1993년 8월 12일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이다. 은행의 가명계좌를 실명계좌로 바꾸는 이 조치로 금융시장이 위축되고 소규모 사업자들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는 등 부작용이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경제개혁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1993년 12월에 정부는 수년간 끌어오던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을 타결지었다. 보호무역주의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이 협정은 국제경쟁력이 약한 개발도상국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피해를 주는 것으로서 한국은 이 협정으로 상품, 금융, 건설, 유통, 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외국에 문호를 열어 놓게 되었다.
정부는 시장개방정책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1996년 9월 12일 서방 선진국들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시장개방정책에 맞추어 낙후된 분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세계화'를 강조하고 1995년 1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한국 경제는 1995년 10월 현재 수출사상 처음으로 1천억 달러를 돌파하고 996년말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돌파하여 선진국을 바짝 뒤쫓는 수준에 올라섰으나. 무역역조가 갈수록 심화되고 경제성장이 둔화되어 1996년의 경제성장률은 7%를 밑돌게 되었다. 이러한 수치는 1990년의 9.6%, 1991년의 9.1%, 1992년의 5.0%, 1993년의 5.8%, 1994년의 8.4%, 1995년의 8.7%에 비하여 침체기에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남북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보였다. 정부는 1993년 3월 19일 공산주의자로서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이인모(李仁模)를 무조건 북한으로 보냈다. 이러한 인도주의적 태도로서 북한과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를 기대했다. 그 후 북한은 남한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받아들여 1994년 6월 28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7월 8일 갑자기 사망하여 회담이 무산되었다. 엄청난 충격 속에 일부 재야인사와 학생들이 조문을 표하자 정부는 이를 제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남한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남북관계는 다시금 냉각관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전부터 진행되던 남북경제교류는 계속되었으며, 특히 나진, 선봉 지구의 자유시 건설에 남한 기업이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북한 핵개발 문제도 1996년 여름에 타결되어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원자로 건설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특히 1995년에는 북한이 수재(水災)로 인하여 식량부족이 심각해지자 인도적 차원에서 쌀 수만톤을 무상 지원하였다.
그런데 1996년 9월 18일 남북관계를 다시 악화시키는 사건이 돌발했다. 무장 군인 수십명을 태운 북한 잠수함이 남한을 정찰하던 중 강릉 앞바다에 좌초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남한에 대한 군사적 도발로 간주한 한국 정부는 무장 군인들 가운데 1명을 체포, 나머지 군인들을 소탕하고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촉구하였다. 북한 외무성은 처음에 정상적인 훈련중 좌초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마침내 사과를 표하여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김영삼 행정부는 집권 초기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해외에서 숨진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전명운(田明雲) 등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해외에서 국내로 모셔와 국립묘지에 안장시켰고,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써오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기 시작하여 1996년 11월 철거를 완료하였다.
1997년은 김영삼 행정부의 마지막 해인 동시에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어 있는 해였다. 그러나 집권초기에 비교적 민심의 지지를 크게 얻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지고 지도력을 상실했다. 더욱이 경제적으로는 만성적인 외환 위기에 시달리던 정부가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2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지원을 공식 요청하면서 경제주권의 심각한 위축을 가져왔다.
1996년말 신한국당이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민심을 크게 잃더니, 1997년에 한보철강의 부도를 계기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구속되고, 한보그룹으로부터 돈을 받은 여야 정치인들이 무더기로 조사를 받았으며, 이어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金賢哲)이 한보 비리르 비롯한 여러 이권과 국정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아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보 사태로 어수선해진 정계를 더욱 혼란에 빠뜨린 것은 2월 12일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황장엽(黃長燁)이 망명하면서 가지고 왔다는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 사건이었다. 북한과 연계된 정관계 인사의 명단을 적었다는 이 리스트가 과연 있는지를 놓고 정계는 긴장감이 돌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수선해진 민심과 정치국면을 돌리고 12월의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해 고건(高建)을 국무총리로 세우고 신한국당의 대표에 대법관 출신으로 이회창(李會昌)을 임명했다.
여당의 대표가 새로 임명되면서 정치권은 선거에 대비하여 숨가쁘게 개편되었다. 우선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7월 21일 전당대회에서 자유경선을 통해 이회창 고문이 후보로 선출되었다. 여당 후보가 자유경선으로 선출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서 민주주의의 일보 진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경선에 출마하여 2위를 차지한 이인제(李仁濟) 경기도지사는 이회창 후보가 두 아들의 병역시비로 지지도가 떨어지자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독자적인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신당(國民新黨)을 창당했다. 그러나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 추종자가 적어 작은 정당으로 주저앉았다.
혼란에 빠진 여당과는 대조적으로 야당인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은 선거 후 연립정부 구성과 내각제 실시 등을 약속하고 김대중을 단일후보로 내세웠다. 그 후 대구와 경북지역에 기반을 둔 박태준(朴泰俊) 의원도 자민련의 총재가 되어 동참하면서 전라도,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 지역이 망라되는 대연합을 형성했다. 이를 세칭 'DIT연대'라 한다.
야당의 결속에 당황한 신한국당은 11월 21일 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으로 당명(黨名)을 바꾸고 선거전에 임하였으나, 이회창 후보는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면서 갈등을 빚어 여권의 단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를 한달 정도 앞두고 뜻밖의 IMF사태가 터졌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여당의 인기는 급락하고, 그 책임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옥외집회가 금지되고 TV합동토론회와 신문광고 등을 통해 선거운동이 전개된 점이 종전과 달랐다. 그런 점에서 매스미디어 선거라고도 불린다.
12월 18일 치러진 선거결과, 김대중 후보가 40.3%의 지지율을 얻어 39만표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김영삼 행정부는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했다는 평을 받았다. 김대중 당선자는 취임에 앞서 김영삼 대통령과 합의하에 국민화합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수감중인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특별사면하여 석방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기간에는 대형사고가 잇달아 일어나서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1993년 3월 부산 구포역에서 열차가 전복하여 68명이 사망하고, 10월에는 전북 부안 앞바다에서 서해 페리호가 침몰하여 승객 2백여명이 사망, 실종되었으며, 1994년 10월에는 서울의 성수대교가 붕괴하여 아침 출근길의 시민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1995년 4월에는 대구 지하철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하여 100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했으며, 이 해 7월에는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갑자기 붕괴하여 5백여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이러한 대형사고는 각종 토목공사의 부실시공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고, 민주화 과정에 긴장이 풀리면서 기초질서가 무너진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이른바 민주화세력이 반독재투쟁에는 공로가 있지만, 국가 경영능력은 떨어진다는 비판도 일어났다.
한편, 대중문화에서는 서태지(徐泰智)가 조직한 댄스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대중음악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화유형의 도래의 징후가 나타나 소위 '신세대 문화'가 형성되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