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기인 646년 2월에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직접 이끄는 고구려군이 철군함에 따라 산해관(山海關)에서 수도(首都) 장안성(長安城)으로 돌아갔다. 거의 1년만이었다. 자기 집인 장안성 황궁으로 돌아간 태종은 긴장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 누워버리고 말았다. 요동지방에서 얻은 두 가지 큰 병 때문이었다. 하나는 등창이었고, 또 하나는 한쪽 눈알을 잃은 후유증이었다. 양만춘이 쏜 화살이 불행 중 다행으로 두개골 깊이 박히지 않아서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등창은 문제가 달랐다.
태자(太子) 이치(李治)자 제딴에는 효도를 한다고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기도 했지만 별 차도가 없이 악화되기만 했다. 자리에 길게 누운 태종은 태자에게 웬만한 정무(政務)에 관해서는 전결권을 주었다.
병세가 다소 호전된 것은 그 해 11월에 가서였다. 그래도 제대로 정사(政事)를 보는 것은 사흘에 하루 꼴이었다. 연개소문에 대한 태종의 원한과 증오는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태종은 떨리는 가슴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나자 당나라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고 돌궐(突厥)과의 전쟁과 고창국(高昌國) 정벌 때에 전공(戰功)을 세운 바 있는 역전의 노장인 이정(李靖)을 황궁으로 불러 이렇게 물었다.
“짐이 천하의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도 소이(小夷)에게 낭패를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정은 방현령(房玄齡)과 더불어 고구려 정벌에 반대했던 사람으로 태종이 이번 전쟁에 종군시키지 않았었다. 이미 고구려와의 전쟁에 나섰던 여러 장수들로부터 대강의 일을 들어 알고 있던 이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병법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의 군사들은 예로부터 지형 지세를 잘 활용하고 용맹과 기량이 뛰어나 쉽게 상대할 무리가 아닙니다. 황상(皇上)께서는 이번에 기병술(奇兵術)을 구사하셨으나 이는 돌궐족을 정벌할 때나 유효했던 것이지 고구려와 같은 흉맹한 적을 상대할 때는 정병술(正兵術)을 쓰는 것이 유리합니다. 정병술은 정도이며 기병술은 편법입니다. 정병술은 인의(仁義)에 해당하지만 기병술은 속임수입니다. 그러므로 황제(黃帝) 이래로 병법은 정병술을 앞세우고 기병술은 뒤로 하였습니다. 옛날에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일곱 번씩이나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정병술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왕 기병술을 쓰셨다면 앞서 강하왕(江夏王)이 제안한 방법대로 하시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강하왕의 방법이라니?”
황제가 얼른 그 뜻을 알지 못해 반문하자 이정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강하왕이 주필산에 있을 때 고구려의 허술한 틈을 타서 평양성을 치자는 말씀을 자세히 아뢰었다고 들었나이다. 소신이 생각하기엔 그렇게 했다면 아마 승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태종이 그 말을 듣자 기억이 났지만 너무나 창피하게 생각되어 이렇게 어물어물 둘러댔다.
“어흠, 그랬던가?……그때의 일은 짐이 매우 바빳으므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구나.”
태종은 누우나 앉으나 어떻게 하면 이 원한을 풀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천하의 모든 나라, 모든 족속이 대당제국(大唐帝國)에게 무릎을 꿇고 신복(臣僕)하건만 오로지 고구려 하나만이 불복하고 있지 않은가? ‘연개소문, 네 이놈! 간을 꺼내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괘씸한 놈! 반드시 내 생전에 네놈을 잡아 두 눈알을 뽑고, 배를 갈라 간을 꺼내고 육젓을 담그고 말리라!’ 태종은 치를 떨며 어금니를 뿌드득 뿌드득 갈았다.
646년 4월 보장태왕(寶藏太王)은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불러 이렇게 물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전란으로 우리 국토와 민생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소이다! 전쟁은 분명히 우리가 이긴 셈이나 당적 오랑캐의 국토가 워낙 넓고 백성이 많은 까닭에 회복하는 데는 우리가 훨씬 더 오래 걸리리라고 보오. 그러니까 군사력을 정비하고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겠소?”
태왕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동안 전쟁으로 입지가 위축될 대로 위축된 온건파 귀족들의 사주에 따른 것이었다.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도성을 떠난 사이에 대대로(大對盧) 부기원(扶奇遠), 을상(乙相) 가득소(加得蘇), 상위사자(上位使者) 최헌(崔櫶), 중리대부(中裏大夫) 선도해(先道解), 위두대형(位頭大兄) 고문(高文) 등 온건파 귀족들이 기회만 있으면 태왕을 둘러싸고 전쟁을 그만두지 않으면 나라가 거덜난다고 충동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일단 이렇게 대답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경에게 혹시 무슨 좋은 방안이 있소?”
“폐하께서 하교하여 주소서!”
“짐의 생각으로는 당주(唐主) 이세민에게 사신을 보냈으면 좋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막리지! 우리가 말로야 무슨 이야기를 못 하겠소? 국서에는 이세민이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고……, 에 또, 이세민이 여색을 좋아한다고 하니 어여쁜 계집들을 몇 명 뽑아서 보냈으면 좋지 않겠소?”
“성지를 받들어 시행하겠습니다!”
태왕의 하명에 따라 연개소문은 이세민에게 사신을 보냈다. 물론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태왕이 말한 대로 두 명의 미녀를 뽑아서 사신 편에 보냈다. 그 미녀들은 왕족이나 대신들의 여식이 아니라 여종들 가운데서 미색이 빼어난 아이 두 명을 고른 것이었다. 그런데 태대사자(太大使者) 해철주(解鐵周)와 대형(大兄) 고죽리(高竹離)가 물어 온 정보에 의하면 이런 공녀(貢女) 소동의 배후에는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연정토(淵淨土)가 있었다. 비사성을 탈환하려는 작전에 실패하고 군문에서 쫓겨난 연정토는 평양성에 돌아오자 근신하기는커녕 줏대 약한 태왕을 등에 업고 온건파 귀족들을 모아 제 나름대로 하나의 당파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연정토는 그런 식으로 연개소문이 요동에서 요서로 태종을 추격하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후방에서 형의 등에 비수를 꽂았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연정토를 당장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고려하여 좀 더 참고 두고 보기로 했다.
주부상(主簿相) 하취문(河取文)과 발위사자(拔位使者) 능루(能婁)를 위시한 고구려의 사신단은 다음 달인 5월에 장안성(長安城)에 도착하여 태종에게 국서를 바쳤다. 태종이 고구려에서 보낸 미녀 두 명을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계집이 어여쁜 것은 자고로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이 좋아하는 바이지만 에헴! 짐이 생각해보건대 저 아이들도 가족과 친척을 떠나 이 머나먼 장안까지 끌려왔으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겠느냐? 어허허허……. 저 아이들 마음이 상할 것을 생각하니 짐은 너무나 딱하구나! 그러므로 짐은 저 아이들을 거둬들이지 않겠노라. 으흠, 그러니까 너희들은 저 아이들을 도로 데리고 가도록 하라! 어흠!”
태종이 헛기침과 헛웃음을 연발한 것은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후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혹시 적국인 고구려로부터 공녀를 받았다는 소문이 천하에 퍼지면 황제로서의 체면이 깎일까 두려웠다. 사실 그 전후에도 다른 나라로부터 공녀를 받아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공녀 두 명을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말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깝기는 했지만 결국은 돌려보내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여당전쟁(麗唐戰爭)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한쪽이 항복을 한 것도 아니고, 휴전에 합의한 것도 아니었다. 고구려는 당군이 달아났으니 자국의 승리라고 환호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당의 치략군을 섬멸하다시피 하여 제 나라로 쫓아 보냈지만 고구려의 피해도 컸다. 포로로 잡혀간 군사와 백성이 잡아온 것보다 훨씬 많았다. 전쟁 통에 한 해 내내 농사를 짓지 못해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굶주리다 못해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심지어는 국경을 넘어 백제나 신라로 달아나는 자들도 있었다.
제1차 여당전쟁 이후 국제정세도 당보다 고구려에게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 토번(吐蕃)·돌궐·설연타(薛延陀)·신라 등이 모두 당 제국의 질서 속에 편입되었고, 고구려의 편이라고는 오로지 백제 한 나라밖에 없었다. 전쟁이 고구려의 승리로 일단락되자 신라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생존을 위해 더욱 당나라에 밀착했고, 반면 백제는 양다리 외교를 중단하고 고구려의 동맹국으로 남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도 고구려는 일단 자신감을 회복했다. 어쨌든 수나라에 이어 또 다시 당나라의 대규모 침략을 물리치지 않았는가?
당에서 사신이 왔다. 명색은 답방사였지만 전후 고구려의 사정을 정탐해가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태종이 돌려보낸 미녀 두 사람도 물론 데리고 왔다. 그런데 당의 사신들은 고구려 황궁에서 망신을 당해야만 했다. 연개소문이 이렇게 호통 쳤던 것이다.
“너희는 상국이 아니라 패전국의 사신이다! 마땅히 우리 태왕 폐하께 엎드려 큰절을 올려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돌아가서 너희 임금 이세민에게 전하라. 당은 패전국으로서 우리 고구려에 당연히 전쟁배상금을 바쳐야 한다고. 너희가 무도하게 침략해온 탓에 우리 백성이 농사도 짓지 못하고 고기도 잡지 못해 굶주리고 있다. 그리고 사로잡아간 우리 군사와 백성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전하라!”
연개소문에게 호통을 듣고 쫓겨난 당나라의 사신들은 장안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태종은 노발대발했다.
“괘씸한지고! 앞으로는 저 고구려 오랑캐들로부터는 절대로 조공을 받지 말도록 하라!”
사실 더 할 말도 없었다. 고구려가 당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신하의 나라가 아닌데도 태종이 이런 소리를 한 것은 오로지 황제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허풍에 불과했다. 태종은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고구려 정벌의 야욕에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동안 백제에서도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변방 7성을 공격했다. 상좌평(上佐平) 성충(成忠)이 방군(方軍)의 장수인 달솔(達率) 계백(階伯)과 흑치사차(黑齒沙次)를 부관으로 삼아 보기(步騎) 3천을 거느리고 황등야산(黃等也山)을 넘어 우술군(雨述郡)의 7성을 함락시켰던 것이다.
백제에게 우술군을 빼앗긴 패배로 인해 신라는 충격을 받고 심각한 내분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정책 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상대등(上大等) 사진(思眞)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병부령(兵部令) 알천(閼川)에 대한 문책론에 이어 다시 선덕여왕(善德女王)에 대한 임금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국론을 주도하고 조정 전체를 어지럽혔다. 한때 여왕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승려 자장(慈藏)은 당나라 유학을 다 마치기 전에 돌아와 황룡사(皇龍寺)에 9층 목탑을 장대하게 세우며 여왕의 흔들리는 권위를 밖에서 도우려고 애를 썼으나 이미 그런 미봉책으로 가라앉을 여론이 아니었다.
선덕여왕이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나라가 곧 망할 거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진골(眞骨) 귀족 가운데 가장 명망이 높은 비담(毗曇)을 지지했다. 비담의 세력이 갑자기 커지자 선덕여왕도 하는 수 없이 그를 상대등으로 삼아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달래려 하였으나 비담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은밀히 뮤리를 규합해 세력을 키우다가 647년 1월에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비담의 추종자들은 이찬(伊飡) 염종(廉宗)과 병부대인 여운(如芸)을 비롯해 중신들만 30명이 넘었고, 이들이 부리는 관군과 사병(私兵)들까지 합하면 무릇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비담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대궐을 장악한 뒤 선덕여왕에게 독약을 먹고 자결하도록 강요해 그녀의 목숨을 빼앗았다. 비담을 따르는 여운은 천존(天存)에게 선덕여왕이 시해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함께 거사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천존은 일단 겉으로는 비담의 반란에 동조하는 척했으나 속으로는 비담을 제거할 속셈을 키우고 있었다. 천존은 몰래 알천에게 연통을 넣어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고 선덕여왕마저 시해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삼도대장(三徒隊長) 필탄(弼呑)은 비담의 반란을 전혀 모른 채 신년 정초 조상 제사를 지내려고 거칠산군 본향에 내려갔다가 열흘날부터 소임을 보려고 아흐레날 저녁에 금성에 돌아왔는데 뒤늦게 비담이 선덕여왕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충천(憤氣衝天)하여 단신으로 말을 몰아 대궐로 달려갔다. 비담과 염종을 죽이겠다며 궐문 앞에서 비담의 사병들과 대치한 그는 장검(長劍)을 빼어들고 홀로 맹렬하게 싸우다가 온 몸을 창에 찔리고 칼에 베이며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다.
알천은 몰래 압량주(押梁州)로 사람을 보내 김유신(金庾信)에게 선덕여왕이 비담에 의해 시해됐고 필탄마저 살해됐다는 사실을 전하며 즉시 거병하여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유신은 김춘추(金春秋)와 함께 압량주의 향군 1만을 거느리고 월성(月城)으로 진격하였다. 염종과 여운은 월성이 수비하기가 적합하지 않은 곳임을 유념하여 비담의 사저를 찾아가 의논한 뒤 함께 명활성(明活城)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군사 1만을 모아 진을 쳤다.
비담의 군대는 명활성에 주둔하고 김유신의 군대는 월성을 점거한 뒤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연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알천도 급히 병부의 군사를 동원해 월성에 합류했지만 명절을 쇠러 간 군사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데다 그나마 여운이 먼저 허전관령(虛傳官令)으로 태반의 군사들을 빼내간 터라 비담 측을 압도할 수 없었다. 양군은 호각지세를 이루며 서로 치고 막기를 며칠간 계속했다.
그런데 정월 보름날 밤에 갑자기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반짝이며 월성으로 떨어졌다. 이를 본 비담은 크게 기뻐하면서 “듣건대 별이 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김유신 일당이 패망할 징조다. 어찌 하늘이 정한 때를 놓치겠느냐?”고 외치며 휘하의 장수와 군사들에게 월성을 총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월성의 군사들은 자신들의 진중에 떨어진 유성을 두고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은 군주나 큰 장수가 해를 당할 조짐이다. 임금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김유신 장군이 위험할 것이다”고 크게 근심하면서 두려워하였다.
월성의 군사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맞서는 곳마다 크게 무너졌다. 염종과 여운이 기세를 올리며 밤새 두들긴 양군의 격전지에서 맥없이 죽어나간 월성의 군사는 무릇 수백 명에 이르렀다. 김유신은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명활성의 군사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이유에 대해 간밤 초저녁에 떨어진 유성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소천(蘇泉)에게 해가 지면 별이 떨어진 장소로 가서 허수아비로 연을 만들고 불을 붙여 하늘로 올리도록 지시했다. 월성의 군사들은 간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꼬리를 반짝이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착각하고 용기를 얻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명활성으로 몰려갔다. 이번에는 명활성의 군사들이 사기가 꺾여 맥없이 흩어졌다. 하루 만의 대역전극이 펼쳐져 격전지에서 밀린 비담의 군사들은 태반이 죽었고 나머지는 성 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시석(矢石)을 날려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알천은 꾀를 내어 비담의 진영에 잠복하고 있던 천존을 통해 비담을 유인할 계략을 세웠다. 알천은 혼자 명활성으로 가서 자신도 비담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김유신의 서슬에 눌려 월성에 나왔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귀족들의 총의(總意)를 모아 화백회의(和白會議)를 통해 비담을 신라의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겠다고 덧붙였다. 화백회의는 남산의 우지암에서 개최할 것이라면서 비담에게 다음날 아침 우지암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알천의 말에 속아넘어간 비담은 염종을 비롯한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우지암으로 이동했다. 알천의 계략은 성공하여 비담 일행은 남산 밑에 매복하고 있던 김유신의 군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반란이 평정되자 알천은 시급히 조정의 중신들을 소집해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고 비담과 그의 추종자들을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중신들은 모두 하나같이 알천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알천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국법에 보위는 엄연히 성골(聖骨)로서 잇게 마련이오. 적법한 절차와 엄정한 법강을 말하는 대신들이 진골(眞骨)인 나를 임금으로 추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외다. 그동안 여주(女主)를 비난했던 자들은 비담과 같은 불충한 무리이거나 나라 밖의 간적들입니다. 성조황고(聖祖皇姑)께서는 지난 15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정사를 살피고, 장병들을 키우며, 가야인과 신라인은 물론 부귀빈천의 간격을 좁히려 애쓰셨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려운 것은 나라 밖의 간적들이 그 어느 때보다 극렬히 날뚜기 때문이지 성조황고의 정사가 그릇된 바는 없었습니다. 당나라의 임금이 우리 여주를 빈정대고 적장들이 여주를 모욕할 수는 있으나 우리 스스로 여주를 업신여긴다면 이는 우리의 근본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간적들의 꾀임에 속아넘어가는 우를 범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현존하고 계시는 유일한 성골이신 승만(勝曼) 공주님을 새 임금으로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알천이 이렇게 승만 공주를 왕위에 옹립할 것을 추천하자 대신들은 모두 그의 뜻에 따랐다. 그리하여 진평왕(眞平王)의 아우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 승만이 진덕여왕(眞德女王)으로 즉위한 것이다. 진덕여왕은 즉위하자마자 사촌 언니인 선덕여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과 그의 추종자 30여명을 모두 사형에 처하고 알천을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반란이 진압된 뒤 압량주로 돌아간 김유신에게는 이찬 벼슬을 주었다. 또한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긴 고구려의 침략을 우려해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의 군주(軍主)로 임명해 북방을 정비했다.
「 ‘바다의 여왕’ 연수영 」7국지전(局地戰) ⑴
● 끝없는 야욕
같은 시기인 646년 2월에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직접 이끄는 고구려군이 철군함에 따라 산해관(山海關)에서 수도(首都) 장안성(長安城)으로 돌아갔다. 거의 1년만이었다. 자기 집인 장안성 황궁으로 돌아간 태종은 긴장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 누워버리고 말았다. 요동지방에서 얻은 두 가지 큰 병 때문이었다. 하나는 등창이었고, 또 하나는 한쪽 눈알을 잃은 후유증이었다. 양만춘이 쏜 화살이 불행 중 다행으로 두개골 깊이 박히지 않아서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등창은 문제가 달랐다.
태자(太子) 이치(李治)자 제딴에는 효도를 한다고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기도 했지만 별 차도가 없이 악화되기만 했다. 자리에 길게 누운 태종은 태자에게 웬만한 정무(政務)에 관해서는 전결권을 주었다.
병세가 다소 호전된 것은 그 해 11월에 가서였다. 그래도 제대로 정사(政事)를 보는 것은 사흘에 하루 꼴이었다. 연개소문에 대한 태종의 원한과 증오는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태종은 떨리는 가슴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나자 당나라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고 돌궐(突厥)과의 전쟁과 고창국(高昌國) 정벌 때에 전공(戰功)을 세운 바 있는 역전의 노장인 이정(李靖)을 황궁으로 불러 이렇게 물었다.
“짐이 천하의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도 소이(小夷)에게 낭패를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정은 방현령(房玄齡)과 더불어 고구려 정벌에 반대했던 사람으로 태종이 이번 전쟁에 종군시키지 않았었다. 이미 고구려와의 전쟁에 나섰던 여러 장수들로부터 대강의 일을 들어 알고 있던 이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병법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의 군사들은 예로부터 지형 지세를 잘 활용하고 용맹과 기량이 뛰어나 쉽게 상대할 무리가 아닙니다. 황상(皇上)께서는 이번에 기병술(奇兵術)을 구사하셨으나 이는 돌궐족을 정벌할 때나 유효했던 것이지 고구려와 같은 흉맹한 적을 상대할 때는 정병술(正兵術)을 쓰는 것이 유리합니다. 정병술은 정도이며 기병술은 편법입니다. 정병술은 인의(仁義)에 해당하지만 기병술은 속임수입니다. 그러므로 황제(黃帝) 이래로 병법은 정병술을 앞세우고 기병술은 뒤로 하였습니다. 옛날에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일곱 번씩이나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정병술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왕 기병술을 쓰셨다면 앞서 강하왕(江夏王)이 제안한 방법대로 하시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강하왕의 방법이라니?”
황제가 얼른 그 뜻을 알지 못해 반문하자 이정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강하왕이 주필산에 있을 때 고구려의 허술한 틈을 타서 평양성을 치자는 말씀을 자세히 아뢰었다고 들었나이다. 소신이 생각하기엔 그렇게 했다면 아마 승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태종이 그 말을 듣자 기억이 났지만 너무나 창피하게 생각되어 이렇게 어물어물 둘러댔다.
“어흠, 그랬던가?……그때의 일은 짐이 매우 바빳으므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구나.”
태종은 누우나 앉으나 어떻게 하면 이 원한을 풀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천하의 모든 나라, 모든 족속이 대당제국(大唐帝國)에게 무릎을 꿇고 신복(臣僕)하건만 오로지 고구려 하나만이 불복하고 있지 않은가? ‘연개소문, 네 이놈! 간을 꺼내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괘씸한 놈! 반드시 내 생전에 네놈을 잡아 두 눈알을 뽑고, 배를 갈라 간을 꺼내고 육젓을 담그고 말리라!’ 태종은 치를 떨며 어금니를 뿌드득 뿌드득 갈았다.
646년 4월 보장태왕(寶藏太王)은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불러 이렇게 물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전란으로 우리 국토와 민생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소이다! 전쟁은 분명히 우리가 이긴 셈이나 당적 오랑캐의 국토가 워낙 넓고 백성이 많은 까닭에 회복하는 데는 우리가 훨씬 더 오래 걸리리라고 보오. 그러니까 군사력을 정비하고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겠소?”
태왕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동안 전쟁으로 입지가 위축될 대로 위축된 온건파 귀족들의 사주에 따른 것이었다.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도성을 떠난 사이에 대대로(大對盧) 부기원(扶奇遠), 을상(乙相) 가득소(加得蘇), 상위사자(上位使者) 최헌(崔櫶), 중리대부(中裏大夫) 선도해(先道解), 위두대형(位頭大兄) 고문(高文) 등 온건파 귀족들이 기회만 있으면 태왕을 둘러싸고 전쟁을 그만두지 않으면 나라가 거덜난다고 충동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일단 이렇게 대답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경에게 혹시 무슨 좋은 방안이 있소?”
“폐하께서 하교하여 주소서!”
“짐의 생각으로는 당주(唐主) 이세민에게 사신을 보냈으면 좋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막리지! 우리가 말로야 무슨 이야기를 못 하겠소? 국서에는 이세민이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고……, 에 또, 이세민이 여색을 좋아한다고 하니 어여쁜 계집들을 몇 명 뽑아서 보냈으면 좋지 않겠소?”
“성지를 받들어 시행하겠습니다!”
태왕의 하명에 따라 연개소문은 이세민에게 사신을 보냈다. 물론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태왕이 말한 대로 두 명의 미녀를 뽑아서 사신 편에 보냈다. 그 미녀들은 왕족이나 대신들의 여식이 아니라 여종들 가운데서 미색이 빼어난 아이 두 명을 고른 것이었다. 그런데 태대사자(太大使者) 해철주(解鐵周)와 대형(大兄) 고죽리(高竹離)가 물어 온 정보에 의하면 이런 공녀(貢女) 소동의 배후에는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연정토(淵淨土)가 있었다. 비사성을 탈환하려는 작전에 실패하고 군문에서 쫓겨난 연정토는 평양성에 돌아오자 근신하기는커녕 줏대 약한 태왕을 등에 업고 온건파 귀족들을 모아 제 나름대로 하나의 당파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연정토는 그런 식으로 연개소문이 요동에서 요서로 태종을 추격하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후방에서 형의 등에 비수를 꽂았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연정토를 당장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고려하여 좀 더 참고 두고 보기로 했다.
주부상(主簿相) 하취문(河取文)과 발위사자(拔位使者) 능루(能婁)를 위시한 고구려의 사신단은 다음 달인 5월에 장안성(長安城)에 도착하여 태종에게 국서를 바쳤다. 태종이 고구려에서 보낸 미녀 두 명을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계집이 어여쁜 것은 자고로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이 좋아하는 바이지만 에헴! 짐이 생각해보건대 저 아이들도 가족과 친척을 떠나 이 머나먼 장안까지 끌려왔으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겠느냐? 어허허허……. 저 아이들 마음이 상할 것을 생각하니 짐은 너무나 딱하구나! 그러므로 짐은 저 아이들을 거둬들이지 않겠노라. 으흠, 그러니까 너희들은 저 아이들을 도로 데리고 가도록 하라! 어흠!”
태종이 헛기침과 헛웃음을 연발한 것은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후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혹시 적국인 고구려로부터 공녀를 받았다는 소문이 천하에 퍼지면 황제로서의 체면이 깎일까 두려웠다. 사실 그 전후에도 다른 나라로부터 공녀를 받아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공녀 두 명을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말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깝기는 했지만 결국은 돌려보내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여당전쟁(麗唐戰爭)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한쪽이 항복을 한 것도 아니고, 휴전에 합의한 것도 아니었다. 고구려는 당군이 달아났으니 자국의 승리라고 환호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당의 치략군을 섬멸하다시피 하여 제 나라로 쫓아 보냈지만 고구려의 피해도 컸다. 포로로 잡혀간 군사와 백성이 잡아온 것보다 훨씬 많았다. 전쟁 통에 한 해 내내 농사를 짓지 못해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굶주리다 못해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심지어는 국경을 넘어 백제나 신라로 달아나는 자들도 있었다.
제1차 여당전쟁 이후 국제정세도 당보다 고구려에게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 토번(吐蕃)·돌궐·설연타(薛延陀)·신라 등이 모두 당 제국의 질서 속에 편입되었고, 고구려의 편이라고는 오로지 백제 한 나라밖에 없었다. 전쟁이 고구려의 승리로 일단락되자 신라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생존을 위해 더욱 당나라에 밀착했고, 반면 백제는 양다리 외교를 중단하고 고구려의 동맹국으로 남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도 고구려는 일단 자신감을 회복했다. 어쨌든 수나라에 이어 또 다시 당나라의 대규모 침략을 물리치지 않았는가?
당에서 사신이 왔다. 명색은 답방사였지만 전후 고구려의 사정을 정탐해가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태종이 돌려보낸 미녀 두 사람도 물론 데리고 왔다. 그런데 당의 사신들은 고구려 황궁에서 망신을 당해야만 했다. 연개소문이 이렇게 호통 쳤던 것이다.
“너희는 상국이 아니라 패전국의 사신이다! 마땅히 우리 태왕 폐하께 엎드려 큰절을 올려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돌아가서 너희 임금 이세민에게 전하라. 당은 패전국으로서 우리 고구려에 당연히 전쟁배상금을 바쳐야 한다고. 너희가 무도하게 침략해온 탓에 우리 백성이 농사도 짓지 못하고 고기도 잡지 못해 굶주리고 있다. 그리고 사로잡아간 우리 군사와 백성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전하라!”
연개소문에게 호통을 듣고 쫓겨난 당나라의 사신들은 장안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태종은 노발대발했다.
“괘씸한지고! 앞으로는 저 고구려 오랑캐들로부터는 절대로 조공을 받지 말도록 하라!”
사실 더 할 말도 없었다. 고구려가 당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신하의 나라가 아닌데도 태종이 이런 소리를 한 것은 오로지 황제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허풍에 불과했다. 태종은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고구려 정벌의 야욕에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동안 백제에서도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변방 7성을 공격했다. 상좌평(上佐平) 성충(成忠)이 방군(方軍)의 장수인 달솔(達率) 계백(階伯)과 흑치사차(黑齒沙次)를 부관으로 삼아 보기(步騎) 3천을 거느리고 황등야산(黃等也山)을 넘어 우술군(雨述郡)의 7성을 함락시켰던 것이다.
백제에게 우술군을 빼앗긴 패배로 인해 신라는 충격을 받고 심각한 내분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정책 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상대등(上大等) 사진(思眞)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병부령(兵部令) 알천(閼川)에 대한 문책론에 이어 다시 선덕여왕(善德女王)에 대한 임금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국론을 주도하고 조정 전체를 어지럽혔다. 한때 여왕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승려 자장(慈藏)은 당나라 유학을 다 마치기 전에 돌아와 황룡사(皇龍寺)에 9층 목탑을 장대하게 세우며 여왕의 흔들리는 권위를 밖에서 도우려고 애를 썼으나 이미 그런 미봉책으로 가라앉을 여론이 아니었다.
선덕여왕이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나라가 곧 망할 거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진골(眞骨) 귀족 가운데 가장 명망이 높은 비담(毗曇)을 지지했다. 비담의 세력이 갑자기 커지자 선덕여왕도 하는 수 없이 그를 상대등으로 삼아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달래려 하였으나 비담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은밀히 뮤리를 규합해 세력을 키우다가 647년 1월에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비담의 추종자들은 이찬(伊飡) 염종(廉宗)과 병부대인 여운(如芸)을 비롯해 중신들만 30명이 넘었고, 이들이 부리는 관군과 사병(私兵)들까지 합하면 무릇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비담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대궐을 장악한 뒤 선덕여왕에게 독약을 먹고 자결하도록 강요해 그녀의 목숨을 빼앗았다. 비담을 따르는 여운은 천존(天存)에게 선덕여왕이 시해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함께 거사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천존은 일단 겉으로는 비담의 반란에 동조하는 척했으나 속으로는 비담을 제거할 속셈을 키우고 있었다. 천존은 몰래 알천에게 연통을 넣어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고 선덕여왕마저 시해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삼도대장(三徒隊長) 필탄(弼呑)은 비담의 반란을 전혀 모른 채 신년 정초 조상 제사를 지내려고 거칠산군 본향에 내려갔다가 열흘날부터 소임을 보려고 아흐레날 저녁에 금성에 돌아왔는데 뒤늦게 비담이 선덕여왕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충천(憤氣衝天)하여 단신으로 말을 몰아 대궐로 달려갔다. 비담과 염종을 죽이겠다며 궐문 앞에서 비담의 사병들과 대치한 그는 장검(長劍)을 빼어들고 홀로 맹렬하게 싸우다가 온 몸을 창에 찔리고 칼에 베이며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다.
알천은 몰래 압량주(押梁州)로 사람을 보내 김유신(金庾信)에게 선덕여왕이 비담에 의해 시해됐고 필탄마저 살해됐다는 사실을 전하며 즉시 거병하여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유신은 김춘추(金春秋)와 함께 압량주의 향군 1만을 거느리고 월성(月城)으로 진격하였다. 염종과 여운은 월성이 수비하기가 적합하지 않은 곳임을 유념하여 비담의 사저를 찾아가 의논한 뒤 함께 명활성(明活城)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군사 1만을 모아 진을 쳤다.
비담의 군대는 명활성에 주둔하고 김유신의 군대는 월성을 점거한 뒤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연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알천도 급히 병부의 군사를 동원해 월성에 합류했지만 명절을 쇠러 간 군사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데다 그나마 여운이 먼저 허전관령(虛傳官令)으로 태반의 군사들을 빼내간 터라 비담 측을 압도할 수 없었다. 양군은 호각지세를 이루며 서로 치고 막기를 며칠간 계속했다.
그런데 정월 보름날 밤에 갑자기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반짝이며 월성으로 떨어졌다. 이를 본 비담은 크게 기뻐하면서 “듣건대 별이 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김유신 일당이 패망할 징조다. 어찌 하늘이 정한 때를 놓치겠느냐?”고 외치며 휘하의 장수와 군사들에게 월성을 총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월성의 군사들은 자신들의 진중에 떨어진 유성을 두고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은 군주나 큰 장수가 해를 당할 조짐이다. 임금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김유신 장군이 위험할 것이다”고 크게 근심하면서 두려워하였다.
월성의 군사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맞서는 곳마다 크게 무너졌다. 염종과 여운이 기세를 올리며 밤새 두들긴 양군의 격전지에서 맥없이 죽어나간 월성의 군사는 무릇 수백 명에 이르렀다. 김유신은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명활성의 군사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이유에 대해 간밤 초저녁에 떨어진 유성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소천(蘇泉)에게 해가 지면 별이 떨어진 장소로 가서 허수아비로 연을 만들고 불을 붙여 하늘로 올리도록 지시했다. 월성의 군사들은 간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꼬리를 반짝이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착각하고 용기를 얻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명활성으로 몰려갔다. 이번에는 명활성의 군사들이 사기가 꺾여 맥없이 흩어졌다. 하루 만의 대역전극이 펼쳐져 격전지에서 밀린 비담의 군사들은 태반이 죽었고 나머지는 성 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시석(矢石)을 날려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알천은 꾀를 내어 비담의 진영에 잠복하고 있던 천존을 통해 비담을 유인할 계략을 세웠다. 알천은 혼자 명활성으로 가서 자신도 비담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김유신의 서슬에 눌려 월성에 나왔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귀족들의 총의(總意)를 모아 화백회의(和白會議)를 통해 비담을 신라의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겠다고 덧붙였다. 화백회의는 남산의 우지암에서 개최할 것이라면서 비담에게 다음날 아침 우지암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알천의 말에 속아넘어간 비담은 염종을 비롯한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우지암으로 이동했다. 알천의 계략은 성공하여 비담 일행은 남산 밑에 매복하고 있던 김유신의 군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반란이 평정되자 알천은 시급히 조정의 중신들을 소집해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고 비담과 그의 추종자들을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중신들은 모두 하나같이 알천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알천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국법에 보위는 엄연히 성골(聖骨)로서 잇게 마련이오. 적법한 절차와 엄정한 법강을 말하는 대신들이 진골(眞骨)인 나를 임금으로 추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외다. 그동안 여주(女主)를 비난했던 자들은 비담과 같은 불충한 무리이거나 나라 밖의 간적들입니다. 성조황고(聖祖皇姑)께서는 지난 15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정사를 살피고, 장병들을 키우며, 가야인과 신라인은 물론 부귀빈천의 간격을 좁히려 애쓰셨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려운 것은 나라 밖의 간적들이 그 어느 때보다 극렬히 날뚜기 때문이지 성조황고의 정사가 그릇된 바는 없었습니다. 당나라의 임금이 우리 여주를 빈정대고 적장들이 여주를 모욕할 수는 있으나 우리 스스로 여주를 업신여긴다면 이는 우리의 근본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간적들의 꾀임에 속아넘어가는 우를 범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현존하고 계시는 유일한 성골이신 승만(勝曼) 공주님을 새 임금으로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알천이 이렇게 승만 공주를 왕위에 옹립할 것을 추천하자 대신들은 모두 그의 뜻에 따랐다. 그리하여 진평왕(眞平王)의 아우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 승만이 진덕여왕(眞德女王)으로 즉위한 것이다. 진덕여왕은 즉위하자마자 사촌 언니인 선덕여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과 그의 추종자 30여명을 모두 사형에 처하고 알천을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반란이 진압된 뒤 압량주로 돌아간 김유신에게는 이찬 벼슬을 주었다. 또한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긴 고구려의 침략을 우려해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의 군주(軍主)로 임명해 북방을 정비했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