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의 여왕’ 연수영 」8여자 영웅의 비극적인 죽음 ⑵

개마기사단201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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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주진공작전

 

그런데 수군 재건은 크나큰 문제가 가로막고 있었다. 새로운 군사를 모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군량이었다. 전쟁이 오래 계속되는 바람에 농사를 짓지 못해 모두가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4년이나 지속된 전쟁에서 고구려는 15만명의 군사를 포함하여 150만명에 이르는 인명피해를 보았다. 이는 전 인구의 5분의 1에 이르는 막대한 손실이었다.

 

반면 당나라는 고구려의 2배나 되는 3백만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그러나 당은 워낙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주전장이 중국 땅이 아닌 고구려 영토인 요동이었기에 고구려에 비하면 전체 농업 생산량이 크게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전쟁 피해 복구 속도는 고구려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처럼 당나라가 광대한 국토와 막대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끝까지 당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망한 것이었다. 고구려 망국의 원인은 오로지 내분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수군의 재건은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심지어는 군사도 없고, 배도 없고, 군량도 없는데 무슨 수군이냐, 아예 수군을 폐하고 육군과 합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조정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다고 했고, 연수영의 수하 중에서도 고성운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은 바다가 지겹지도 않습니까? 이기면 이길수록 적군은 기를 쓰고 덤벼들고, 심지어는 조정에서도 시기하고 헐뜯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소직은 장군께서 언제 또 무슨 일로 모함을 당할까 심히 걱정스럽소이다!”

 

하지만 연수영은 수군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지난 4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침략군과 맞서 싸우며 고구려의 영해를 지켜온 수군을 이대로 내버리고 처량하게 뭍으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 바다를 버릴 수 없다! 또 다시 그 따위 비겁한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면 내 몸소 목을 치리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당적은 또 다시 쳐들어올 것이다. 이번에는 육지보다 바다로 더 많이 쳐들어올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 오랑캐들을 막을 것인가? 바다로 쳐들어오는 적은 바다에서 막지 않으면 안 된다!”

 

연수영의 호통에 육군과 합치자는 소리는 쑥 들어가버렸다.

 

연수영은 급한 대로 건안성주 고원부, 박작성주 소부손, 국내성주 고문 등 친근한 성주들에게 군량을 빌리고, 요동성에 본영을 둔 병마대원수 고정의와 평양의 조정에 끈질기게 병력과 군량의 지원을 요청했다. 또한 부족한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군사들을 거느리고 어부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오기도 했다. 또 밭을 갈고 가축도 기르는 둔전(屯田)도 시작했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흩어졌던 군사들을 모으자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연수영은 쉴 틈이 없었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안고 연무장에 나가 군사들을 조련하고, 부두에 나가 낡은 군선을 수리하고, 새로운 군선을 건조했으며,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부장들과 낭자군들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전심전력한 결과 연말에 이르러서는 군사가 1만 6천명으로 늘어났고, 함대도 3백척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주력함인 대선은 1백척이나 되었다. 이와 같은 눈물겨운 노력 끝에 649년 새해가 되자 비사성 군영은 오랜만에 고구려 수군 본영으로서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정초 며칠을 군사들과 분주히 보낸 연수영은 장운형과 해란봉 두 장수만 거느리고 건안성을 경유하여 요동성으로 고정의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요청했다.

 

“대원수 어른! 그동안 도와주신 덕분에 저희 비사성 수군이 이제 병력 1만 6천에 군선 3백척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뭐, 내가 변변히 도와준 게 있소? 모두 연 원수와 수군 장수들의 공이지.”

 

“대원수 어른, 그래서 말씀이온데, 이제부터 다시 적을 치고자 합니다. 출전을 허락하여 주소서!”

 

“아니, 출전이라니! 어디를 치겠다는 거요?”

 

“당 수군의 본거지를 치고자 합니다!”

 

백전노장 고정의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지금 형편에 원정이라니, 당치도 않소! 겨우 2만도 안 되는 군사로 바다를 건너가겠다는 거요? 간단히 생각해보시오. 신성도·청구도·오호진·묘도·봉래포 등 다섯 개 기지에 주둔한 당 수군은 거의 10만명이나 될 거요. 그대도 잘 알다시피 병법에 이르기를 적보다 병력이 세 배나 많아야 공격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오히려 열 배가 넘는 적군이 지키고 있는 본거지를 공격한다니, 이건 자살행위요!”

 

고정의는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연 원수! 내 그대가 딸 같기에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만, 자중하는 게 좋겠소. 내가 보기에도 그렇고, 듣기에도 그렇고 지금 그대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구려. 혹시 무리하게 원정을 하다가 그대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대 혼자만의 잘못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 수군 전체가 잘못되는 거요!”

 

요동 방어를 총책임진 병마대원수가 이렇게 반대를 하니 연수영도 난감했다. 그러나 연수영은 지금 다시 당 수군의 본거지를 정벌하지 않는다면 적의 국지전(局地戰) 도발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끈질기게 고정의를 설득했다.

 

“대원수 어른, 당적을 그냥 내버려두면 분명히 다음에는 몇 배나 더 많은 군사를 동원해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지요? 그런 까닭에 소직은 이번에 적의 소굴을 쳐서 그 뿌리를 뽑고자 하는 것입니다.”

 

연수영의 고집스런 요청에 고정의는 할 수 없이 이렇게 물러섰다.

 

“참으로 나로서는 내키지 않지만……대막리지 합하가 승낙한다면 나도 허락하리다!”

 

“감사합니다! 대원수 어른.”

 

비사성으로 돌아온 연수영은 즉각 평양 대막리지부에 원정 승인 요청서를 보냈다. 당시의 공문서는 모두 죽간(竹簡)을 사용했다. 물론 이는 그 당시에 종이가 귀했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연수영의 죽간을 받아보고 두방루·술탈·고죽리·해철주 등 참모들과 검토한 끝에 이를 승인했다. 당과 일단 화친을 하고 전후 복구를 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일단 적군의 기세를 눌러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연수영은 당나라 본토를 향한 세번째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비사성에서 출전하여 묘도·대흑산도·소흑산도·대흠도·북황성도·남황성도·오호도·대사도·구음도·유도·청구도 등을 징검다리 삼아 산동반도 등주와 내주의 당군 수군기지를 기습 타격하는 것이었다.

 

연수영은 장수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당 수군의 병력은 10만명에 이르고 그들이 수비하는 입장에서 우리를 맞는다면 병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우리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절망하는 백성들의 신음과 울음소리를 많이 들었소. 이대로 계속 적의 침략욕을 허락한다면 나와 그대들 모두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오. 지난 9백년간 우리 고구려의 사직은 결코 나약하지 않았소. 하지만 끝없는 전쟁으로 시린 상처를 입고 심신이 황폐해진 지금 백성들도 군사들도 전쟁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매우 강할 것이오. 그러나 피하지 못하는 전쟁이라면 적에게 우리의 저력을 보여 다시는 이 바다,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해야 하오.”

 

연수영은 부장들에게 고기와 술을 대접하여 군사들을 잘 먹이라고 지시한 뒤 원정작전에 필요한 군량과 무기를 충분히 확보하고 점검하도록 했다.

 

연수영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이 출전한 것은 서기 649년 정월 20일이었다. 당나라의 수군 총사령관인 장량은 고구려 수군이 비사성에 집결할 때부터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지마다 한 군데로 몰려 있는 군선들을 분산 배치하고 첩보선을 띄워 고구려 수군의 동정을 살피는 정도였지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할 수가 없었다.

 

당 수군은 모두 합치면 10만 대군에 함대도 1천척이 넘지만 이제는 한 군데로 몰려 있다가 전처럼 한꺼번에 궤멸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고구려 수군의 움직임을 병석에 누워 보고받은 태종은 장량과 정명진에게 오호도와 신성도 등에 군량을 준비해두라 명하고, 또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는 내주 관내의 전 병력을 해안에 배치하여 머잖아 있을지 모를 고구려 수군의 상륙에 대비토록 명했다.

 

비사성에서 출전한 연수영의 함대는 차가운 겨울 바다를 가르며 계속해서 남진했다.

 

서쪽 하늘가로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내렸다. 별들이 하나둘 어두운 하늘 여기저기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연수영은 대장선 장대에서 밤하늘을 쳐바도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간절히 빌었다.

 

“거룩하신 시조신이시여! 영검하신 부여신이시여! 우리 고구려를 지켜주시는 천지신명이시여! 다시 한 번 절절히 기원하옵니다. 소녀에게 오랑캐들을 무찌를 힘을 주소서! 소녀의 목숨과, 소녀의 뱃속에서 자라는 아이의 목숨을 모두 제물로 바치겠사옵니다. 부디 이번 싸움에서 이기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더 많은 피가 이 바다에 뿌려지지 않도록 해주소서!”

 

고구려 수군은 이튿날인 1월 21일 오시에 신성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고구려 수군이 진격해오자 당군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부산하게 응전태세를 갖추었다. 정명진은 급히 군선 2백여척에 2만여 군사를 나누어 태우고 포구를 빠져나갔다.

 

양측 함대가 약 5백보 거리로 근접했다. 적선 1백여척이 장사진을 치고 포구를 가로막자 연수영도 똑같이 함대를 좌우로 길게 벌여 세우고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포노를 쟁여라!”

 

대장선에서 공격 신호인 커다란 붉은 기가 올랐다. 둥, 둥, 둥! 전고(戰鼓) 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바다와 하늘로 울려 퍼졌다.

 

“전투속력!”

 

갑판 아래에선 격군장이 노수들에게 소리쳐 명령했다. 노수들이 팔다리에 더욱 힘을 주고 노질의 속도를 울렸다. 전함들은 뱃머리를 나란히 하여 돌진하다가 적선과 사정거리 이내로 접근하자 재빨리 뱃머리를 돌려 뱃전을 내세우고 공격 자세를 갖추었다.

 

“방포하라!”

 

대선의 지휘 장수들마다 거의 동시에 복창했다.

 

“노포 발사!”

 

“적선을 박살내어라!”

 

휭, 휭! 성인 남자의 머리통만한 돌덩이들과 3장, 4장이나 되는 창뢰들이 쓩, 쓩! 무서운 파공음(破空音)을 길게 끌며 적선을 향해 날아갔다. 돌덩이와 창뢰에 맞은 적선마다 와지끈, 뚝딱!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나갔다.

 

“궁수들은 일제히 수사(水射)하라!”

 

적선과 유효사거리인 2백보 이내로 접근하자 궁수들이 방패수의 보호를 받으며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수천 개의 화살이 일시에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갔다. 곧 비슷한 수의 화살이 적선들로부터 날아왔다.

 

“장운형 장군!”

 

연수영이 장운형을 불렀다.

 

“네, 원수님!”

 

“화공을 개시하시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명령에 따라 대선들 뒤에서 불붙인 화선(火船)들이 돌격대에 의해 앞으로 끌려나와 적선들을 향해 돌진했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져가는 바다는 이내 화광이 충천하는 가운데 군선마다 비명과 고함, 아우성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날 밤 늦도록 계속된 첫날 신성도해전에서 당 수군은 1백여척의 배가 가라앉았고, 1만여명의 군사가 수장되었다. 정명진은 전세가 기울기가 무섭게 남은 군선을 거느리고 청구도로 도주했다.

 

연수영은 함대를 정비하여 차근차근 진격을 계속하여 2월 19일에는 청구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미 서전에서 패배하고 전의를 상실한 당 수군은 저항다운 저항 한 번 못해보고 고구려 수군이 공격하면 하루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청구도해전도 고구려 수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고, 당 수군은 계속 발해만 서쪽으로 밀렸다.

 

장량과 정명진은 더 이상 밀리면 황제를 볼 면목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당군의 군창이기도 한 오호도를 최후의 보루로 삼고 결전을 각오하고 나섰다. 연수영의 함대는 이 곳에서 3월 10일부터 14일까지 닷새동안 3회의 교전을 하여 당군 병사 5만명을 살상하고 적선 4백여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고구려 수군의 피해는 전사자 2천여명에 부상자 2천 3백여명 정도였고, 파손된 군선은 50여척에 불과했다. 더구나 대선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연수영은 이번 내주 원정에서 네 차례에 걸친 해전을 모두 승리로 기록하고, 포로로 잡혔던 고구려 백성 3만여명을 구출하여 3월 27일에 개선했다. 더 싸우고 싶어도 화살과 창뢰, 마름쇠와 화토병 등 군비와 군량이 부족했다. 그보다도 더 급한 것은 구출한 백성들을 먹일 식량이 없었다.

 

연수영이 내주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음으로 하여 당나라는 이후 연수영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653년 중엽까지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시도하지 않았다. 연수영은 그 해 5월 말에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양희(洋姬)라고 지었다. 인편에 기별을 받은 양희의 아버지 고원부는 건안성에서 밤을 새워 배를 타고 비사성으로 달려와 자신의 핏줄을 안아보았다. 그리고 병상에 누운 연수영을 정성껏 위로하고 돌아갔다. 군무에 바쁜 몸이라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태종 이세민이 사망한 것은 649년 4월의 일이었다. 그 해에 태종의 나이 49세였다.

 

644년에 여당전쟁을 일으켜 5년 동안 5백만명이 이르는 양국의 군사와 백성, 무고한 생명을 무참하게 짓밟은 전쟁범죄자 이세민이 요동에서 얻은 등창과 안질 때문에 마침내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아홉번째 아들인 진왕(晉王) 이치(李治)가 당나라의 세번째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고종(高宗)이다.

 

여당전쟁의 원흉 이세민이 죽었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세민이 죽기 전에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고 유언했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이런 소리는『삼국사기(三國史記)』에만 나오는데, 이는 김부식(金富軾)이 중국의 사서『자치통감(資治通鑑)』을 잘못 인용했기 때문이다.『자치통감』에는 이세민이 죽고 이치가 즉위한 뒤 국내 정치의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기하기 위해 고구려 원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토목공사를 일단 중지하라고 지시했는데, 김부식이 이 대목을 오해하여 줄여서 인용했기에 비롯된 것이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고구려 말기의 역사는 고구려 사람들의 손으로 쓰일 수 없었다. 고구려 망국사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와 신라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 따라서 김부식이『삼국사기』를 편찬할 때도 고구려 망국사는 중국과 신라의 사서를 보고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원정을 중지하라는 태종의 유언이『구당서(舊唐書)』와『신당서(新唐書)』혹은『책부원귀(冊府元龜)』처럼 고구려 망국의 기사가 실린 다른 사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직『자치통감』에만 나오는 기사를 김부식이 그렇게 간단히 줄였던 것이다.

 

사실 중국의 사서가 없었다면 김부식의『삼국사기』는 그냥『신라사기(新羅史記)』에 그쳤을 것이다. 이른바『구삼국사(舊三國史)』라는 삼국의 남은 기록만 참조하여『삼국사기』를 편찬했다 하더라도 김유신(金庾信)은 나오지만 강이식(姜以式)·을지문덕(乙支文德)·연개소문(淵蓋蘇文)·온사문(溫沙門) 등이나 장보고(張保皐) 같은 인물은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김부식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니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부식은『삼국사기』「김유신열전(金庾信列傳)」의 끝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지략이 특출한 을지문덕과 의협심을 가진 장보고 같은 사람이 있었지만 중국의 서적들이 없었다면 이 사적들이 없어져서 후세에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구당서』와『신당서』,『자치통감』과『책부원귀』같은 중국의 사서가 없었다면 고구려 망국사를 그나마 이 정도로도 알 길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태종의 죽음을 계기로 전쟁은 일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전협정도 휴전협정도 없는 일시적인, 불안한 평화였다.

 

연개소문은 전쟁도 전쟁이지만 무엇보다도 국력 회복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지난 5년간 농업이건 어업이건 목축이건 생산 활동이 제대로 안 되는 바람에 민생의 궁핍이 말이 아니었다. 생산이 없으니 매매할 물건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래저래 죽어나는 것은 힘없고 불쌍한 백성뿐이었다. 숨을 돌리고 피폐해진 민생부터 돌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이런 국정 방침에 대해서는 보장태왕부터 연개소문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계진·부기원·하취문 등 주화파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태종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연개소문은 즉각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물론 조문사절을 명목으로 삼아 화친을 청하고, 시간을 끌고, 또한 당나라의 내부사정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당나라도 국상(國喪) 중이라 고구려와 전쟁을 지속할 명분과 여유가 없었기에 일단 화친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한동안 요동전선은 육지든 바다든 큰 충돌 없이 각자 전후 복구사업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토와 인구가 넓은 당과, 인구가 적고 물산이 부족한 고구려는 회복 속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태종 이세민이 죽은 지 며칠 후인 649년 8월에 고구려에서는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의 영웅 양만춘 장군이 병사(病死)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군무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져 한 달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지내던 양만춘 장군은 보장태왕이 어의(御醫)까지 파견해 치료와 병간호를 맡기는 정성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양만춘의 부음(訃音)을 전해들은 요동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평양성에서 보고를 전해들은 연개소문 역시 한동안 정무(政務)를 제대로 살피지 못할 정도로 큰 근심에 빠졌다.

 

고구려가 양만춘의 사망으로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겨들 때에 백제에서는 다시 신라를 침공할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교섭하는 길을 끊어놓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의자왕(義慈王)은 군사 3만명을 동원하여 좌장(左將) 은상(殷相)을 총지휘관으로 삼고, 의직(義直)·윤충(允忠)·자견(自堅)·정중(正仲)·부여나(扶餘奈)·무수(武守)·계백(階伯) 등 장수들로 하여금 은상을 보좌하게 하여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하는 요충지인 석토성(石吐城)을 치도록 했다. 백제군은 석토성과 그 주변의 자성 6개를 점령한 뒤 도살성(道薩城)으로 재차 쳐들어왔다.

 

김유신(金庾信)은 아우인 김흠순(金欽純)과 천존(天存)·진춘(陳春)·죽지(竹旨) 등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2만 3천여명의 군사들을 인솔해 도살성에서 방어전(防禦戰)을 펼쳤다. 7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다가 김유신이 도살성을 지원하러 군사 2만명이 당도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백제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자 전황은 걷잡을 수 없이 한쪽이 밀리는 형국으로 변했다. 백제군의 총대장 은상은 신라 장수 천존과 칼을 맞대고 싸우다가 30여합쯤 지나자 기력을 잃고 밀리면서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자견도 김유신의 아우 김흠순과 10합 정도 겨루다가 목숨을 잃었고, 윤충 역시 신라의 용장 죽지의 칼에 베여 마하(馬下)에 떨어져 죽었다. 도살성전투(道薩城戰鬪)는 그렇게 신라의 압승으로 끝났다.

 

백제 입장에서는 참담한 패배였다. 총대장인 은상을 비롯해 10여명의 장수와 1만여명의 군사가 전사했고, 군마 1만필과 숱한 병장기를 빼앗긴 것이다. 649년과 649년 연간에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백제군이 도합 7, 8만명에 포로로 붙잡혀간 군사까지 합치면 손상된 병력은 얼추 10만에 육박했다. 10만의 군대면 백제 군사력의 절반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의자왕은 이 치명적인 패배에 충격을 받고 연일 폭주(暴酒)를 일삼으며 괴로워했다. 선왕인 무왕(武王)이 남긴 유지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사직위허(社稷爲墟)를 걱정해야 할 딱한 신세로 전락하자 의자왕은 국정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점점 폭주와 황음(荒淫)의 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의자왕의 타락과 더불어 백제도 고구려처럼 멸망의 과정을 걷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