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의 여왕’ 연수영 」9제2차 여당전쟁과 연개소문의 사망 ⑷

개마기사단2011.10.17
조회142

● 사수전투(蛇水戰鬪)

 

소정방과 임아상의 군대가 별로 힘들이지 않고 패수구 하구로 접근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당나라의 대장군 이세적(李世勣)은 요동도행군총관 계필하력(契苾何力)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철륵이 요즘 조용한 것 같으니 장군은 지금 군사 6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진격하시오. 고구려군은 장군의 군대가 요하를 건너 요동 쪽으로 진격할 것으로 생각할 것이오. 지금 고문과 뇌음신이 거느린 고구려의 3만 군사가 장군의 군대를 막기 위해 요동성에 와 있다고 하오. 그들은 검산성과 욕이성, 그리고 박작성에서 차출된 병사들이라고 하니 압록수 하구 지역의 방비가 약화됐을 것이오. 이 틈을 노려 요동을 친다고 거짓 소문을 낸 후 압록수 하구로 쳐들어가 평양으로 곧장 내려가면 될 것이오. 이것이 바로 피실격허(避實擊虛)의 전술이오.”

 

계필하력은 이세적의 전략에 따라 군사 6만명을 군선 1천척에 분승시키고 천진항을 출발해 연안 항로를 따라 압록수 하구로 나아갔다. 그들을 저지하는 고구려 수군의 함대는 하나도 없었다. 연수영이 사라진 고구려의 영해는 당나라 군사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연개소문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장자인 남생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압록수에 파견했다. 그러나 남생은 아버지에 비해 군사적 능력이 연정토만큼 형편없었다.

 

압록수 북안에 도착한 계필하력의 당군은 상륙하자마자 남생의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남생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사들은 당군의 도하(渡河)를 저지하기 위해 장사진(長巳陳)을 치고 비오듯 맹렬히 화살을 퍼부었다. 그러나 병력이 고구려군보다 두 배가 많은 당군 병사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 돌격하면서 고구려군을 양 측면에서 협공해들어갔다. 고구려군은 당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채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압살(壓殺)당했다.

 

남생은 대형(大兄) 염유(染維)가 자신을 호위하며 분투(奮鬪)를 벌인 덕분에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나 검산성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군사 2만명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아하하! 연개소문의 큰아들이라더니 남생이 그 놈도 어쩔 수 없는 애송이로구나. 이대로 평양으로 남진해 고구려왕을 사로잡아야 한다. 소정방이나 방효태에게 전공을 빼앗겨서는 안될 것이다.”

 

서전에서 대승한 계필하력은 기고만장하여 부관들에게 쉬지 않고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계필하력은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지나친 자만심에 빠져 첨병대(尖兵隊)를 파견해 고구려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같은 실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궁모성(窮牟城)의 처려근지(處閭近支)인 검모잠(劍牟岑)이란 장수가 자기 휘하의 군사 5천과 귀홀성(龜忽城)의 군사 7천을 거느리고 당군의 진격로를 가로막아 결사항전을 벌였다. 또 박작성주(所夫孫主) 소부손(所夫孫)이 거느린 군사 5천과 추정국의 뒤를 이어 오골성주(烏骨城主)에 임명된 고돌발의 군사 8천이 연합작전을 벌여 압록수 하구에 정박하고 있는 1천여척의 군선을 화공(火攻)으로 불태우기 시작했다. 계필하력은 6만의 대군 가운데 고작 8천의 전투병력을 남겨 군선을 지키게 했기 때문에 박작성과 오골성의 고구려군이 당나라의 군선을 쉽게 사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필하력은 군선들이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급보를 접하자 급히 말머리를 돌려 압록수 하구 쪽으로 회군했다. 이때 검모잠이 거느린 1만 2천의 고구려군이 당군의 뒤를 쫓아갔고, 검산성에 들어가 있던 남생의 패잔병들도 성문을 열고 나와 협공에 가담하자 계필하력이 이끄는 당군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아무리 계필하력의 병력이 6만의 대군이라고 해도 삼면으로 유격전을 벌이는 고구려군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당군은 1만 3천의 병사가 전사하고 9천여명 정도가 부상을 입거나 고구려군의 포로가 되는 큰 피해를 입은 채 아직 불타지 않은 군선 5백여척을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라는 폐하의 당부와 기대를 이렇게 저버렸으니 무슨 낯으로 도성에 돌아가 폐하의 용안을 뵐 수 있겠는가?”

 

계필하력은 탄식하며 칼을 뽑아 들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려고 했다. 그러자 부관 한 사람이 그의 팔을 잡으며 극구 말렸다.

 

“실수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법입니다. 아직 장군님께서 하실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계필하력은 마지못해 칼을 내던지고 한숨을 내쉬었다.

 

계필하력이 어이없는 패배로 군선 1천척의 절반을 잃고 산동반도의 내주(來州)로 도망쳐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은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계필하력이 돌아오면 잡아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이때 이세적이 계필하력을 적극 변호하고 나섰다.

 

“자고로 전쟁의 승패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계필하력은 양대(兩代)에 걸쳐 충성을 바친 신하이옵니다. 그러니 이번만은 폐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옵소서.”

 

고종은 쉽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압록수 근처에서 남생의 군사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 이후 첨병을 풀어 고구려군의 동향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평양으로 남진하다가 후방에서 기습을 받아 많은 군선이 불태워졌다는 것은 이 모두가 계필하력의 자만심과 나태함이 부른 참극이 아니겠소?”

 

두 사람이 계필하력의 처리 문제를 놓고 의논하고 있을 때, 영주에서 달려온 전령이 고하기를 북방에 있는 철륵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했다. 여당전쟁(麗唐戰爭)으로 인해 얻은 절호의 기회를 철륵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사신으로 간 고죽리의 설득에 넘어가 연개소문과 뜻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병력을 풀어 당의 변경을 침입했던 것이다.

 

고종은 주력군이 전부 평양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철륵 문제로 군사를 일으킬 여력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다. 황제의 불편한 심기를 헤아린 이세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계필하력을 살려서 철륵 토벌에 기용하십시오. 그는 철륵 출신이니 의외로 쉽게 평정할지도 모릅니다.”

 

고종은 이세적의 의견을 받아들여 내주에 머물고 있던 계필하력에게 철륵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계필하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남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철륵을 도모하러 떠났다.

 

한편, 요동성에 머물러 있던 고문·뇌음신·고연무 세 장수는 연개소문의 철군 명령을 받고 평양성으로 돌아왔다. 정명진의 루방도행군이 궤멸되고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마저 퇴각했으니, 이제 평양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만 몰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평양성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당군의 수뇌부는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첫 싸움에서 남생의 고구려군을 격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검모잠·소부손·고돌발 등이 이끄는 고구려 지방군대에게 패배하여 산동반도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당장 군량이 급했는데 계필하력이 퇴각한 이상 달리 방도가 없었다. 군량도 문제였지만 평양의 혹독한 추위도 걱정이었다. 당군은 여름에 출전했기에 변변한 겨울옷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반면에 평양성의 고구려군은 요동성과 국내성에서 달려온 응원군을 합쳐 총 10만의 전투병력이 건재했으며, 양곡은 5년 이상 먹을 양을 쌓아 놓고 있었다. 

 

초조해진 소정방은 신라의 문무대왕(文武大王)에게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군량 원조를 부탁했다. 하지만 신라 역시 때마침 국상(國喪)중이었던데다가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백제의 부흥군 때문에 운신(運身)의 폭이 넓지 못했다.

 

서기 662년 2월 초였다. 갑자기 한파가 밀어닥쳐 눈발이 날리고 날씨가 몹시 추웠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왕궁과 도성 방어의 책임자인 내사부 군주 술탈, 대모달 뇌음신과 대사자(大使者) 지명천(池明川) 등을 대동하고 기병 3만명과 보병 2만명을 지휘하여 성문을 열고 당군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연개소문이 몸소 인솔하는 5만의 고구려군은 천둥 같은 북소리와 함께 먼저 패강도행군의 영채를 급습했다.

 

당군은 평양성에 있는 고구려군이 공세로 나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당군 병사들은 병장기(兵仗器)를 들고 싸우려 했지만 매서운 추위로 인해 손이 굳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고구려의 철기병들은 주저 없이 당병들을 향해 창과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당병들은 그 기세에 눌려 도무지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고구려군의 창검(槍劒)에 찔려 서뻘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당병들이 흘린 선홍색의 피가 하얀 눈을 붉게 물들였다. 뒤따라 도착한 고구려의 도부수들은 아직 명줄이 남아서 괴롭게 숨 쉬던 당병들을 깨끗이 저승으로 보내 주었다.

 

패강도행군의 사령관인 임아상은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허겁지겁 도주하려고 했으나 철기병들을 거느린 고구려군의 선봉장 뇌음신에게 뒤를 밟혔다. 뇌음신이 달리는 군마(軍馬) 위에서 맥궁(貊弓)으로 겨누어 시위를 당기자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함께 화살이 정확하게 임아상의 뒤통수에 박혔다. 임아상이 그대로 마하(馬下)에 떨어져 즉사하자 그의 부하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뇌음신은 임아상의 수급(首級)을 베어 자신의 말안장에 매달았다.

 

8만의 패강도행군이 삽시간에 전멸되자 옥저도행군의 사령관인 방효태는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험한 파도를 헤치고 고구려 땅까지 왔는데 모조리 죽어 나가니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영채에 돌아와 보니 당나라 군사들의 사기는 곤두박칠치고 있었다. 머나먼 이국 땅에 와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방효태는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했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식량이 부족해서 굶주리고 있는데다가 날씨는 너무 추웠다. 방효태는 당장이라도 회군하고 싶었지만 고구려군의 반격이 두려워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흘이 지난 후 연개소문의 군대는 패수의 지류인 사수 강가에 주둔하고 있는 옥저도행군을 공격했다. 연개소문은 먼저 술탈이 거느린 궁수부대로 하여금 방효태의 영채를 둥그렇게 에워싸도록 하고 자신이 직접 장창으로 무장한 철기병들을 인솔해 그 뒤에서 배치했다.

 

술탈이 장검을 뽑아 높이 쳐들며 사격 명령을 내리자 수많은 고구려군의 궁노수들이 쏘아대는 화살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당병들은 화살에 맞아 비틀거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상당수 군사들이 온몸에 수십 발의 화살을 맞아 고슴도치처럼 변하기도 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당병들은 대항할 엄두도 못 내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갔다. 뒤이어 연개소문과 뇌음신이 이끄는 철기병들이 거칠게 말을 몰아 당군의 영채를 짓밟기 시작했다.

 

방효태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부관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소정방의 진영으로 도망칠 것을 권하자 방효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면서 통곡했다.

 

“나는 고조와 태종 양대 황제를 섬기며 과분한 은총을 받았다. 그런데 폐하의 어명을 수행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기는커녕 나를 믿고 따라온 군사들마저 모두 잃었으니 구차하게 나 혼자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는 이번 전쟁에 자신의 아들 13형제를 모두 출전시켰다. 방효태가 칼을 들고 뛰어나가 고구려군의 철기병들을 향해 돌진하자 그의 아들 13명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고구려의 궁수들이 어지럽게 쏘아대는 화살에 방효태(龐孝泰)를 비롯하여 그의 첫째 아들 방태산(龐泰散), 둘째 아들 방만산(龐萬散), 다섯째 아들 방교산(龐敎散), 일곱째 아들 방세원(龐歲原), 여덟째 아들 방세유(龐歲由), 열둘째 아들 방세호(龐歲浩) 등은 전신이 관통당해 즉사했다. 

 

방효태의 셋째 아들인 방치산(龐致散), 열째 아들 방세기(龐歲驥), 열셋째 아들 방세주(龐歲周)는 연개소문에게 동시에 달려들었으나 그의 용맹을 대적할 수 없었다. 연개소문은 번개처럼 현월도(弦月刀)를 휘둘러 순식간에 세 적장의 목을 베어 거꾸러뜨렸다. 넷째 아들 방초산(龐礎散), 여섯째 아들 방정산(龐定散), 아홉째 아들 방세진(龐歲珍)도 뇌음신과 술탈의 칼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이렇게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이 모두 전사하고 7만명이 넘는 당나라의 옥저도행군이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몰살당했으니, 이것이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살수대첩(薩水大捷)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전쟁사(戰爭史)에 길이 빛날 사수전투(蛇水戰鬪)였다.

 

이제 남은 것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뿐이었다. 소정방은 평양성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영채를 세웠기에 그나마 무사할 수 있었다. 연달아 당군 부대가 섬멸되자 소정방은 덜컥 겁이 났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후퇴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영채 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추웠기에 무거운 공성장비까지 끌고 삭풍(朔風)을 맞으며 눈길을 헤쳐 나갈 생각을 하니 끔직했다. 더구나 후퇴한다고 그냥 곱게 보내줄 연개소문이 아니었다. 소정방은 엄동설한에 식량이 없어 굶고 있는 병사들을 보고 있노라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진작부터 신라에 사람을 보내 식량을 보내 달라 요청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평양도행군은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 있었다.

 

소정방이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 다행히 신라군이 보급한 군량이 도착했다. 허기가 져서 움직일 힘조차 없던 당병들은 이 군량으로 밥을 해 먹고 기운을 차렸다. 소정방은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자 마침내 퇴각을 결심했다.

 

당군은 고구려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신속히 퇴각했다. 이를 위해 각종 치중과 병장기를 과감히 버렸다.

 

소정방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연개소문은 너무도 분했다. 그는 당장 뇌음신과 지명천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을 추격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폭설이 쏟아져 순식간에 장정의 허리 높이까지 쌓였다. 고구려군은 갑자기 내린 눈 때문에 당군을 쫓아갈 수 없었다.

 

연개소문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어찌 폭설을 내려 저 승냥이 떼 같은 도적놈들은 살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이 한 목숨 거두어 가신다 하더라도 우리 땅을 침략한 서토의 오랑캐 놈들을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연개소문이 눈길 위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을 하니 주위에 있던 장수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제2차 여당전쟁이 끝난 이후 662년과 663년 2년 동안 고구려와 당 양국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느라 큰 총돌 없이 비교적 조용하게 보냈다. 연개소문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왜국에 사신을 보내 군사적 유대 강화를 모색하는 한편, 백제부흥운동 지원을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했으나 663년 8월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강전투(白江戰鬪)에서 승리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게다가 이복동생 연정토 때문에 무던히도 속을 썩이던 판에 이번에는 세 아들 남생(男生)·남건(男建)·남산(男産)이 아버지의 신임을 독차지하려고 살벌한 경쟁을 벌였다.

 

해가 바뀌어 664년,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642년 임인반정(壬寅反正) 이후 23년 동안 국정을 거의 독단하던 최고 권력자 연개소문이 예전부터 앓았던 풍질(風疾)로 건강이 악화되어 격무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던 것이다. 당년 58세. 연개소문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자 세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유언했다.

 

“너희 형제는 절대로 관직을 탐내어 서로 다투어서는 안 된다! 아비는 이제 죽지만 너희는 서로 반목하여 결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는 세 아들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연개소문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한 말이었다. 연개소문 남매와 마찬가지로 이들 3형제도 이복형제였다. 맏아들 남생은 연개소문의 첫째 부인 고말리화(高茉利花) 소생이고, 둘째 남건과 막내 남산은 둘째 부인 여희(麗姬) 소생이었다.

 

연개소문이 죽던 그 해에 남생은 30세로서 제2품관인 태대형(太大兄)으로 재상급인 막리지 벼슬에 있었다. 남건은 27세로서 제3품관인 울절(鬱折)로 장관급인 주부 벼슬을 하고 있었다. 남산은 24세로서 제5품관인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에 있었다. 이것이 연개소문의 한계였고, 고구려의 비극이었다. 연정토를 동생이란 이유로 감싸고돌아 국정을 어지럽히고 군사적 실패를 자초했으면서도, 오로지 자식들이란 이유로 이들의 자질을 확인하지도 않고 모두 높은 벼슬을 주어 국정에 참여시켰던 것이다.

 

아무리 믿을 만한 심복들이 주위에 없었다고는 하나 이것이야말로 연개소문의 인간적인 약점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망국이 앞당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장례식에 울려퍼진 취타대의 진혼곡은 곧 고구려 멸망의 전주곡과 마찬가지였다.

 

연개소문이 죽고 장례가 모두 끝나자 남생이 대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붕괴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