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45년의 제1차 여당전쟁(麗唐戰爭)에서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요동 정벌을 분쇄하고 고구려의 승리를 이끌어낸 진정한 수훈갑은 최고 권력자로서 고구려의 모든 군대를 총지휘했던 연개소문(淵蓋蘇文)도,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에서 당나라 주력군의 발목을 붙잡은 양만춘(楊萬春)도, 제2차 주필산전투(駐弼山戰鬪)에서 승리를 거둔 고정의(高正義)도 아니었다.
바로 장산군도대첩(長山群島大捷)을 비롯한 많은 해상전투에서 고구려 수군의 위용을 떨쳤던,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자 지용(智勇)을 겸비한 여무장(女武將)인 연수영(淵秀英)이 진정으로 영웅다운 전공(戰功)을 세웠던 것이다.
발해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옛 석성(石城) 소장루(梳壯樓)의 현판(縣板)과 비사성(卑沙城)의 비편(碑片), 건안성(建安城) 청석관(靑石關)의 비문(碑文) 등 여러 금석문(金石文)에서 연수영의 흔적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정사(正史)에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수영을 단지 전설상의 인물로만 치부하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연수영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은 바다에서 당나라 수군을 맞아 싸워 16회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였다. 그러나 연수영이 살해된 이후 고구려는 제해권을 완전히 당나라에 빼앗겨 결국 패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만약 연개소문이 병사한 이후에도 그녀가 생존해 있었더라면 고구려의 수명은 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연수영은 자신에게 항상 엄중하였고 남자 장수들 못지않는 용맹과 과단성을 갖춘 일세의 여걸이었다.
연수영은 평소 “장수는 때와 장소를 명확하게 가릴 줄 아는 정확한 통찰력과 지혜를 갖추어야 하며, 또한 오심지의(五心之意)를 터득해야만 장수로서 큰 공을 세울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오심지의는 자심지의(自心之意), 군심지의(軍心之意), 민심지의(民心之意), 적심지의(敵心之意), 천명지의(天命之意) 다섯가지를 뜻한다.
첫번째 자심지의란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나 자신이란 뜻으로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은 마음, 책임을 남에게 미루거나 이익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 남을 헐뜯고 욕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정도를 넘어서는 과욕을 스스로 절제하면서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켜 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두번째 군심지의란 장수로서 부하들을 아끼고 군졸들을 내 자식처럼 사랑하라는 뜻으로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심신의 평안을 구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면 누구라도 목숨을 걸고 따른다는 가르침이다. 연수영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요동수군의 장수들과 병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과 존경을 받았던 것도 누구보다 이 군심지의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세번째 민심지의란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대의명분을 바로 세우고 적국의 백성이라도 함부로 살상하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네번째 적심지의란 적군의 마음까지 탄복시킬 수 있는 경지를 뜻한다. 연수영은 함대를 이끌고 당나라의 수군기지인 송주와 내주를 공략하면서 포로가 된 적군에게 잔혹하게 대하지 않고 인의(仁義)로 대우하였으며 노역에 시달리던 현지의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며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다섯째 천명지의란 자신의 소명과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이를 무리하게 거역하지 않으며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경지를 뜻한다. 그녀는 온후한 인격에 탁월한 지도력을 갖추어 고구려 수군을 당대 최고의 강군으로 육성하였다.
연수영은 적군의 어떠한 도발과 야유에도 꿋꿋이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지켜나갔으며 시기와 장소를 적절하게 골라 가장 합당한 전략으로 필승할 수 있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엄격한 군기를 세우고 철저한 군인정신에 입각한 원칙주의로 완벽한 질서의 수군을 만들었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전래되는 설화나 여러 사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연개소문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실제 일선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휘했던 당나라의 무장들은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인 연수영을 더 두려워하였다. 비사성을 중심으로 활동한 요동수군의 존재는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에 가장 큰 장애요소로 작용했다.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일어난 당나라 측의 인명피해가 육군보다 수군에서 더 많았다는 점도 연수영의 활약상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당나라의 수군이 여자가 총대장으로 있는 고구려 수군과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했다는 사실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면 후세에도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기에 중국의 사서들은 연수영의 이름을 빼고 대신 연개소문의 군사전략에 말려들어 패전했다고 기술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이제 융통성 없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사서에 안 나온다고 무조건 무시하고 깔아뭉개지 말고, 전설이나 구전설화에 불과하더라도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로 망각의 세월 깊이 파묻힌 역사의 진실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학문에는 국경이 없지만 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대한민국 해군의 세번째 이지스함은 왜국의 침략을 예견하고 권율과 이순신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천거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에는 군비 확충에 주력하고 훈련도감 설치를 주창했던 류성룡(柳成龍) 재상의 이름을 따서 ‘서애류성룡함’이라는 함명(艦名)이 붙여졌다. 그러나 비록 류성룡이 조선의 국방정책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하지만 그는 전장에서 외적과 싸운 군인이 아니라 행정·외교·학문에 종사했던 문관(文官)이었다. 해군 최강의 전함에 문관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대한민국 해군의 위용과 용맹성을 드러내기에 한참 부족해 보인다.
만약 대한민국 해군의 이지스함에 ‘연수영함’이라는 함명이 붙여졌더라면 진정으로 해군다운 해군, 가장 잘 어울리는 명칭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보여졌던 연수영의 출중한 리더십, 탁월했던 전략, 전무후무한 전공을 부각시켜 ‘연수영함’의 진수식이 벌어졌다면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의 여자 생도들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연수영은 오라버니인 연개소문 못지않게 중요한 군사적 업적을 남겼고 우리 민족의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인 충무공 이순신만큼 후대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 ‘바다의 여왕’ 연수영 」9제2차 여당전쟁과 연개소문의 사망 ⑸
● 고구려의 ‘여자 이순신’ 연수영은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서기 645년의 제1차 여당전쟁(麗唐戰爭)에서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요동 정벌을 분쇄하고 고구려의 승리를 이끌어낸 진정한 수훈갑은 최고 권력자로서 고구려의 모든 군대를 총지휘했던 연개소문(淵蓋蘇文)도,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에서 당나라 주력군의 발목을 붙잡은 양만춘(楊萬春)도, 제2차 주필산전투(駐弼山戰鬪)에서 승리를 거둔 고정의(高正義)도 아니었다.
바로 장산군도대첩(長山群島大捷)을 비롯한 많은 해상전투에서 고구려 수군의 위용을 떨쳤던,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자 지용(智勇)을 겸비한 여무장(女武將)인 연수영(淵秀英)이 진정으로 영웅다운 전공(戰功)을 세웠던 것이다.
발해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옛 석성(石城) 소장루(梳壯樓)의 현판(縣板)과 비사성(卑沙城)의 비편(碑片), 건안성(建安城) 청석관(靑石關)의 비문(碑文) 등 여러 금석문(金石文)에서 연수영의 흔적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정사(正史)에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수영을 단지 전설상의 인물로만 치부하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연수영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은 바다에서 당나라 수군을 맞아 싸워 16회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였다. 그러나 연수영이 살해된 이후 고구려는 제해권을 완전히 당나라에 빼앗겨 결국 패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만약 연개소문이 병사한 이후에도 그녀가 생존해 있었더라면 고구려의 수명은 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연수영은 자신에게 항상 엄중하였고 남자 장수들 못지않는 용맹과 과단성을 갖춘 일세의 여걸이었다.
연수영은 평소 “장수는 때와 장소를 명확하게 가릴 줄 아는 정확한 통찰력과 지혜를 갖추어야 하며, 또한 오심지의(五心之意)를 터득해야만 장수로서 큰 공을 세울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오심지의는 자심지의(自心之意), 군심지의(軍心之意), 민심지의(民心之意), 적심지의(敵心之意), 천명지의(天命之意) 다섯가지를 뜻한다.
첫번째 자심지의란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나 자신이란 뜻으로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은 마음, 책임을 남에게 미루거나 이익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 남을 헐뜯고 욕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정도를 넘어서는 과욕을 스스로 절제하면서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켜 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두번째 군심지의란 장수로서 부하들을 아끼고 군졸들을 내 자식처럼 사랑하라는 뜻으로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심신의 평안을 구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면 누구라도 목숨을 걸고 따른다는 가르침이다. 연수영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요동수군의 장수들과 병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과 존경을 받았던 것도 누구보다 이 군심지의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세번째 민심지의란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대의명분을 바로 세우고 적국의 백성이라도 함부로 살상하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네번째 적심지의란 적군의 마음까지 탄복시킬 수 있는 경지를 뜻한다. 연수영은 함대를 이끌고 당나라의 수군기지인 송주와 내주를 공략하면서 포로가 된 적군에게 잔혹하게 대하지 않고 인의(仁義)로 대우하였으며 노역에 시달리던 현지의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며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다섯째 천명지의란 자신의 소명과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이를 무리하게 거역하지 않으며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경지를 뜻한다. 그녀는 온후한 인격에 탁월한 지도력을 갖추어 고구려 수군을 당대 최고의 강군으로 육성하였다.
연수영은 적군의 어떠한 도발과 야유에도 꿋꿋이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지켜나갔으며 시기와 장소를 적절하게 골라 가장 합당한 전략으로 필승할 수 있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엄격한 군기를 세우고 철저한 군인정신에 입각한 원칙주의로 완벽한 질서의 수군을 만들었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전래되는 설화나 여러 사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연개소문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실제 일선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휘했던 당나라의 무장들은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인 연수영을 더 두려워하였다. 비사성을 중심으로 활동한 요동수군의 존재는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에 가장 큰 장애요소로 작용했다.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일어난 당나라 측의 인명피해가 육군보다 수군에서 더 많았다는 점도 연수영의 활약상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당나라의 수군이 여자가 총대장으로 있는 고구려 수군과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했다는 사실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면 후세에도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기에 중국의 사서들은 연수영의 이름을 빼고 대신 연개소문의 군사전략에 말려들어 패전했다고 기술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이제 융통성 없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사서에 안 나온다고 무조건 무시하고 깔아뭉개지 말고, 전설이나 구전설화에 불과하더라도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로 망각의 세월 깊이 파묻힌 역사의 진실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학문에는 국경이 없지만 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대한민국 해군의 세번째 이지스함은 왜국의 침략을 예견하고 권율과 이순신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천거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에는 군비 확충에 주력하고 훈련도감 설치를 주창했던 류성룡(柳成龍) 재상의 이름을 따서 ‘서애류성룡함’이라는 함명(艦名)이 붙여졌다. 그러나 비록 류성룡이 조선의 국방정책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하지만 그는 전장에서 외적과 싸운 군인이 아니라 행정·외교·학문에 종사했던 문관(文官)이었다. 해군 최강의 전함에 문관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대한민국 해군의 위용과 용맹성을 드러내기에 한참 부족해 보인다.
만약 대한민국 해군의 이지스함에 ‘연수영함’이라는 함명이 붙여졌더라면 진정으로 해군다운 해군, 가장 잘 어울리는 명칭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보여졌던 연수영의 출중한 리더십, 탁월했던 전략, 전무후무한 전공을 부각시켜 ‘연수영함’의 진수식이 벌어졌다면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의 여자 생도들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연수영은 오라버니인 연개소문 못지않게 중요한 군사적 업적을 남겼고 우리 민족의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인 충무공 이순신만큼 후대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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