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하여서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그 마음을 율법의 행위로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성경의 이곳 저곳을 잘 살펴보면,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서 “예수”가 오셨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4,5
잘 읽어보십시오. 성령이 오신 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명하신 여러 규례들과 절기들과 율법들을 다 지켜 행하는 것이 가장 옳은 최종 선의 길이 아닐까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교리를 ‘육체의 기회’를 삼는데 사용함으로서 영원토록 받을 형벌을 쌓는 자들이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갈라디아서 5:13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9,10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율법’을 더 굳게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지요.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자기의 유익과 세속적 욕망의 추구를 목적으로 기독교라는 시스템을 이용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가 없는 자들임이 분명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기 때문이지요.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2:19
이슬람 교인들은 어려서부터 굉장한 교육을 받기 때문에 대부분 성장하여서도 그 믿음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결코 버리지 않지요.
그런데, 이슬람 가운데서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개종 사유를 물었더니 대답은 이러했답니다.
“기독교는 종교 같지 않아서...”
즉, 이슬람교 입장에서 보면,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종교의 틀’을 벗어나서 ‘인간적, 육체적, 향락적’ 목적을 따라 자유롭고자 한 사람들로서 보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이런 것이지요, 유대인과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행하려 한다면 이것은 너무나 지키기 어렵고 속박하는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자유하다’ 라는 교리 안에 거하면, 보이는 행위 영역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영역”으로부터 여호와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행위보다 중요하고 큰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는 척’만 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마음’갖고 살아간다면 이는 구원될 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또 교회와 교회 지도자와 기독교와 성경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믿지 않고, 불복종하며 불순종하는 자들의 특징은, 그들의 내면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한복음 3:19,20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브리서 3:12,13
단언컨대, 하나님을 ‘극도로 사랑’치 아니하는 이유는, 그가 행한 ‘죄’ 때문인 것입니다.
‘악’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서 선에 속하지 아니하는 사탄의 세력과 어둠의 나라에 마음을 두게 되고, 그쪽 편으로 끌려가거나 시각을 두는 것이지요.
그만큼, 자기 자신의 생각하는 바나, 행위나, 내면의 동기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구할 수가 있다고 했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를 위하여서는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요.
지옥 갈 죄악을 범하는 자를 위하여서는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 의지와 선택의 교리는 상반되는 의견이 아니라,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잘 되었다면 잘한 일에 대한 영광과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께 돌리고 감사하는 것이요,
잘못 되었다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댓가를 책임지고 잘못을 인정하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지요.
지옥에 갈 죄악을 범하는 일은 오늘 지금 자기 자신의 선택이 결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선택의 주관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과 목회자와 성도들의 교제에는 굴복하며 복종하는 체 하나, 오히려 그 공동체 안에서 순결한 자들을 넘어뜨리려 하고 온전한 자들을 미워하는 사탄의 종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관하여서 성경엔 "거짓 형제 중의 위험" 이라는 표현으로서 사도바울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믿지 않습니다. 지옥도 믿지 않아요.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을 향한 증오를 갖고 있어서 마치 마귀의 지배를 강력하게 받는 무당과도 같은 말과 행동을 구사합니다.
음란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음욕을 품도록 만들고 싶어하며 실제로 어떤 해결이나 음욕의 해소를 원하는 것도 아니라 말 그대로 될 수 있는 한 최대로 삶과 생각과 영혼이 망가지는 결과를 갖고 오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또 복음과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열린 심령과 헌신하는 마음엔 거절과 상처를 심어주기를 원하지요.
돈을 사랑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관하여서 집중하는 사람들에겐 외모를 보는 습관과 이 세대의 칭찬과 겉치레를 따르도록 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런 자들은 교회 밖에서 불복종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쁜사람들로서 그들이 받을 지옥 형벌도 한 차원 고통스러운 것일 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그러므로 어떤 종교, 어떤 교리, 어떤 내용들 안에도, 그것이 어느 정도의 진리인지, 어느 길로 나 있는지를 분명 힌트같은 것일지라도 남겨두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불교도들은 ‘어떻게 네가 지옥에 가는데 내가 극락 세계로 가겠느냐? 너를 돕고, 또 지옥에 간 자들을 제도하기 위해 내가 먼저 지옥에 간다!’ ‘우리 모두 지옥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자’ 라고 가르치기도 하지요.
나는 이런 생각이 들지요. “미친거 아냐?”
‘지옥’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거나, ‘지옥’이 사실은 없는데, 있다고 가정하고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실제로,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하나의 철학 정도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진리”입니까? “거짓”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거짓’과 ‘진실’의 또렷한 개념조차 미비한 짐승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완전 선’ ‘절대 선’ ‘사랑’ ‘참 빛’을 이해할 능력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보기엔 “불교”엔 아무래도 구원의 길을 발견할만한 근거도, 당위성도, 집중할만한 가치도 없다는 사실이 확실합니다.
기독교는 “지옥”은 분명 실재하는 세계라고 믿고 가르치며, “천국”도 당연히 있는 곳으로 보기 때문에 “사실”을 “믿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알고, 실제로 가르치고 배우지요.
그렇다면 이제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요.
‘기독교’ -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길로 믿는 것’이 사실은 “사탄의 종교 - 이단” 이라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단”이란 “절대 선”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잘못되어 옆으로 비껴간 자들과 그 가르침들을 가리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당시에 참 많은 옥고를 치른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시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편 107편 11절 말씀
기본적 인륜 앞에 ‘범죄자’들이, 기본적 인륜 ‘정상인’들보다 사탄에게 가까운 자들 아니겠습니까? 전능자의 뜻을 멸시한 것이지요.
외적으로 보이는 뜻을 멸시한 예도 있지만, 내적으로 보이지 않는 뜻을 멸시한 예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이 쓴 기록들이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는 오늘날 기독교회의 경전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 중 상당수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전파하던 사람들 상당수가 처형당하거나 잔혹하게 고문당하고 죽어갔습니다.
구약성서를 살펴보시면, 하나님의 징벌로서 긍휼히 여김을 입지 못하고 살육당하고 진멸당한 자들은 우상숭배자들이나 율법을 버린 자들로서 범죄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을 핍박하고 고문한 사람들이야, 대부분이 어차피 지옥에 갈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크리스챤들의 그 인생 여정들과 결말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초기 크리스트교인들을 가리켜서 어떤 이들은 ‘나사렛 이단’ 이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스챤들의 당한 역사 속 형벌들과 희생들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교리가 진실로 사실이고,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사실이 진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으며 오히려 천국에 들어간 과정 안에서 좋은 씨앗이 되고 밑거름이 되는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크리스챤을 고문하다가도, 오히려 고문하는 자들을 위하여서까지 기도하는 것을 보며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들도 있지요.
유대인들은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성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조차 다 이해하기 어려운 깊은 온전함이 유대인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외쳐봅니다!
유대인의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신명기 13:1-3
여호와를 섬기는 일은 곧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지요. 율법 말입니다.
구약성서를 통하여서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들과 율법들, 여호와의 절대 위치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 본다면, 신약 성서가 계시하는 예수그리스도가 ‘여호와 신앙’을 변질시키는 ‘이단’의 미혹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후서 전체를 설명하는 기독교 소속 목회자의 주석을 보면, “초기 배도의 형태는 율법주의로 나타났다” 라고 설명합니다. 은혜의 교리를 저버리고, 율법주의에 편승함으로서 배도하였다라고 설명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구약시대에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기독교가 추구하는 교리가 ‘율법을 배반’하는 행위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호와는 변치 않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시지요.
절대 가치이며, 절대 선입니다. 변하지 않으시지요.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옳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계시된 ‘율법’에 대한 명령과, 오늘날 ‘신약성서’를 믿는 크리스챤들의 믿음 사이에 있는 “괴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요?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하나님이며, 한 여호와이시라면, ‘변치 않아야 할 사항’이 지금 ‘변한 것’처럼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이와 같은 나의 시각이 “구약,신약” 전체의 계획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의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크리스트교’의 교리와, ‘예수그리스도’를 참 구주로 알고 섬기며 그 ‘의지가 순결한 믿음’으로서 선을 행한다고 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냐? 구원은 어디 있는 것이냐? 라는 질문이 대두될 수가 있겠습니다.
자,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자기 양심에 걸리는 일을 하면, 그만큼 구원에서 멀어지고,
자기 양심에 좋은 일을 하면, 그만큼 구원에 가깝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살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즉, ‘이것이 선한 일이라’라고 믿는 일을 행하다보면, 그 선한 길 다음 단계에, 그 다음의 선한 길로 연결된 ‘믿음의 의’가 존재하고, 또 그 ‘믿음의 의’를 좇아 나아가다보면 또 그 다음의 ‘믿음’이 있고, 그 끝에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트교’에 귀의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받아들여서 섬기다가 보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구약성서를 통하여서 접하게 되고, 성경 전체의 방향과 가르침들을 잘 살펴 상고하여 보면, ‘세상, 세속, 세속적 교회, 세속적 관습, 사람의 유전’에 대한 분별이나 방향도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며, 결론적으로, “여호와 신앙”을 소유하는 ‘참 믿음’의 자손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방대하고, 출판된 각 서의 내용도 많고 많지만, 어느 랍비는 “유대인의 교육을 받으면 누구나 유대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였지요.
유대인이 섬기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며, 그들은 구약성서를 끊임없이 연구하며 읽고 믿고 살아갑니다.
코란도 읽어보았습니다.
코란의 내용은 대부분 ‘당신을 향한 직접적 하나님의 말씀’의 형태로 선포되기 보다는, ‘인간들, 사람들 사이에 책망과 비판, 정죄와 변론’들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성경이 그래도 가장 “진리”에 가깝게 계시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의견은 ‘교만’이며, “성경은 곧 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합당한 것일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지요.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잠언 19:27
또한 이렇게 가르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6:25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8-12
즉, 행위가 악하면, 거짓 진리를 사실로 믿게 되고, 결국 멸망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행위가 악하더라도, ‘진리, 사는길’을 정확하게 안다면, 그 길로 가서 구원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악을 행하면, 스스로 ‘거짓’을 ‘진리’인줄로 믿게 되고, 그 안에 갇혀서 영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물며, ‘거짓’인줄 알고도 악을 따라가는 자들의 결말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의를 굳게 붙드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참 사랑, 진실로 사랑하는 것, 참되게 깊이 사랑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어떤 종교 안에서도 발견하기 어렵지만, “크리스트교” 안에서는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한1서 3:23
‘죽도록 사랑’ 이라는 말도 있지만, ‘죽도록’이라는 표현조차 사용하기 꺼릴 정도로, 표현과 모든 면모에 있어서 완전한 사랑, 끝없는 사랑, 중심으로부터의 충성되고 의리 있는 사랑, 겸손하고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 온유한 사랑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 안에서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원한 사랑’이라는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진실로 사랑하는 행위’일 수도 있고, 일부 부족한 인격의 사람들일 수도 있지요.
사도바울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지요.
이쯤 되면 굉장하게 혼란스럽게 여겨지기도 하게 마련이지요.
어느 랍비는 설명하기를, 오직 한분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기는 유대교인의 입장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성부, 성자, 성령 - 그리고 카톨릭의 마리아와 성인 숭배 행위 - 신을 인정하는 일은 ‘다신교’의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또, 중세 기독교인들은 ‘돈’을 좋지 못한 것으로 여겨서, ‘돈’을 도구로서 인정하고 가치중립적인 요소로 바라본 유대인들과는 차이가 있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융업에 종사한 사람들도 많았고, 현존하는 은행 제도도 유대인으로부터 나온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돈은 비전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돈은 건강을 줄 수도 있습니다. 돈은 명예를 줄 수도 있습니다. 돈은 값어치가 큰 진리에 도달하도록 도울 수도 있습니다. 돈은 진리를 아는데 필요한 모든 요소들에 접근성을 높여줄 수 있습니다. 돈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 효율성 있는 접근과 활용을 가능케 합니다.
다만 돈이 사람보다 위에 올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요.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10
어떻게 보면, 이는 확연하게 눈에 보이고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의견과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하고 생각할만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런 것들로 논리를 역설하고, 생각을 둘 정도로 ‘여유’있는 사람, ‘비교적으로 무가치한 요소’에 집중하는 사람은, “진실로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과는 수준 차이가 아주 크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이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만 영원한 형벌의 진노를 면할 수가 있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이렇게 대답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전혀 게으르지도 않고 도적질도 않고 남을 속이지도 않았으며 악독하게 굴지도 않았고 열심과 정열을 가지고 열심히 삶을 살아왔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라고 말입니다.
칼빈은 성실과 부요함은 구원받은 증거로서 볼 수도 있다고 하기도 했지요.
이 사실 앞에서 좀 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신 앞의 “태도”를 바꾸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신 앞에 특별한 사람 - 자녀, 백성, 천국 시민’ 이라는 정체성 안에 거하게 된다면, 좀 더 세밀한 부분들에 있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내면에서 정립되고, 말로도 바르게 주장될 수도 있겠지요.
내면의 동기와, 의지, 선택, 좀 더 고차원적이고 깊은 관심의 사랑에 관하여서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엔 “성령은 없는 자들”에 대하여서 기록하고 있기도 하고,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기록함으로서 성령이 소멸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다서 1:17-21
자본주의의 경제적 성공과, 대조적인 공산주의의 경제적 실패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바른 파악이 서로 상반되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자기 자신의 것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낸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이 분배한다면, 누구라도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쉬기를 바라겠지요.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하나님의 사랑,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행하는 복음 안의 삶에 관하여 이해 한다면, 이는 인간에게 참으로 가장 적합한 원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리와 원칙에 따라서, 심판과 상벌과 칭찬과 영광이 주어진다면 ‘받은 은혜, 받은 사랑’이 없이는 인간 입장에서 몹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겠지요.
성경은 이에 대하여서 이렇게 설명하지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로마서 8:15-17
크리스챤들이 비교적으로 착하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세계에서도 부모 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란 사람들이, 그렇지 않고 어디 몹쓸 곳에서 버려지듯 자란 사람들보다 착하고 온순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쁜 일입니까? 가장 풍족하고 좋은 것으로 가득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적이고 영적인 참 사랑 입은 자녀로서의 양육을 받는 입장이 되는 일인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입장도, 사실, “여호와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누굴 아버지로 섬기겠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이처럼 소속에 대하여서는 확고하면서도 결코 ‘행위’에 초점을 두고 ‘은혜’의 양을 조절(?)하는 관계가 아닌, “무조건적 사랑”에 의하여서 ‘은혜’를 베풀고 받는 관계인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하여서 사랑받는 자녀의 입장은 놀라운 신비인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옳게 살았고, 괜찮게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바로 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코 바른 가치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공의와 진리가 온전히 성취된다고 보기 어렵지요. 물론, 자손의 자손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축복과 저주의 예들을 보면서 합당한 보응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각 사람대로의 심판과 상벌에 대한 가장 옳은 보응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심판이 있고, 모든 것을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과 심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온전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인격,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흐리멍덩한 하나의 개념이나 추상적 태도로 바라보길 원하는 사람들, 혹은 그렇게 믿고자 하는 사람들의 내면과 심리에는, “진실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나는 과연 정죄 받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똑바로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실제로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각 사람의 내면의 생각과 동기까지 다 헤아리시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며, 그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진실로 옳고 합당한 행실과 바른 삶 안에 거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십니까?
성경이 진리임을 믿으십니까? 사실, 기록된 성경이 실제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중요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장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출애굽기 2:11-15 말씀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사도행전 7:28,29 말씀
위의 두 기록과, 아래의 기록의 차이를 살펴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11:24-26 말씀
분명히 바로의 죽이려는 것과 자기 죄의 탄로나는 일을 인하여서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 것이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의 고난 받기를 택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게다가 예수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던 시대의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크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오류입니까?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는 주장과 하나님의 뜻의 일치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방향, 자세, 성향 입니다!
순종의 길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나아가는 방향이 있고, 속도가 있고, 그 온전함에 정도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여러기능이 있지만, 그 기능을 사용하는 행동의 배후에 있는 성향이 그 행동을 결정합니다. 사람의 생각의 배후에 있는 성향이 생각을 결정합니다.
성경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성향을 위한 좋은 가르침과 말씀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진리’를 행하기 위한 성향이 가득한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봅니다.
바른 성향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곧 진리를 따르는 것이며, 진리를 따르는 결과를 내는 성경은 곧 ‘진리’인 것입니다.
이것 저것 여러 생각들을 정리했습니다만,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과,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견해들이나, 종교철학자들의 철학이나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나, 연구가 기도보다 중요치 않은 것은,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하여서 움직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서 4:12,13
아무리 연구를 하고 논리를 펴내고 생각을 한들, 그 생각들 자체도, 의지도, 결정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하여서 움직이며, 그 세계를 조종할 수 있는 힘이 기도에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 곧 기도를 찾아 열정 내는 길을 따라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율법과 유대인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율법을 지키는 일이지요.
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하여서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그 마음을 율법의 행위로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성경의 이곳 저곳을 잘 살펴보면,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서 “예수”가 오셨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4,5
잘 읽어보십시오. 성령이 오신 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명하신 여러 규례들과 절기들과 율법들을 다 지켜 행하는 것이 가장 옳은 최종 선의 길이 아닐까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교리를 ‘육체의 기회’를 삼는데 사용함으로서 영원토록 받을 형벌을 쌓는 자들이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갈라디아서 5:13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9,10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율법’을 더 굳게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지요.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자기의 유익과 세속적 욕망의 추구를 목적으로 기독교라는 시스템을 이용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가 없는 자들임이 분명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기 때문이지요.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2:19
이슬람 교인들은 어려서부터 굉장한 교육을 받기 때문에 대부분 성장하여서도 그 믿음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결코 버리지 않지요.
그런데, 이슬람 가운데서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개종 사유를 물었더니 대답은 이러했답니다.
“기독교는 종교 같지 않아서...”
즉, 이슬람교 입장에서 보면,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종교의 틀’을 벗어나서 ‘인간적, 육체적, 향락적’ 목적을 따라 자유롭고자 한 사람들로서 보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이런 것이지요, 유대인과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행하려 한다면 이것은 너무나 지키기 어렵고 속박하는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자유하다’ 라는 교리 안에 거하면, 보이는 행위 영역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영역”으로부터 여호와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행위보다 중요하고 큰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는 척’만 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마음’갖고 살아간다면 이는 구원될 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또 교회와 교회 지도자와 기독교와 성경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믿지 않고, 불복종하며 불순종하는 자들의 특징은, 그들의 내면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한복음 3:19,20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브리서 3:12,13
단언컨대, 하나님을 ‘극도로 사랑’치 아니하는 이유는, 그가 행한 ‘죄’ 때문인 것입니다.
‘악’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서 선에 속하지 아니하는 사탄의 세력과 어둠의 나라에 마음을 두게 되고, 그쪽 편으로 끌려가거나 시각을 두는 것이지요.
그만큼, 자기 자신의 생각하는 바나, 행위나, 내면의 동기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구할 수가 있다고 했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를 위하여서는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요.
지옥 갈 죄악을 범하는 자를 위하여서는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 의지와 선택의 교리는 상반되는 의견이 아니라,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잘 되었다면 잘한 일에 대한 영광과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께 돌리고 감사하는 것이요,
잘못 되었다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댓가를 책임지고 잘못을 인정하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지요.
지옥에 갈 죄악을 범하는 일은 오늘 지금 자기 자신의 선택이 결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선택의 주관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과 목회자와 성도들의 교제에는 굴복하며 복종하는 체 하나, 오히려 그 공동체 안에서 순결한 자들을 넘어뜨리려 하고 온전한 자들을 미워하는 사탄의 종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관하여서 성경엔 "거짓 형제 중의 위험" 이라는 표현으로서 사도바울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믿지 않습니다. 지옥도 믿지 않아요.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을 향한 증오를 갖고 있어서 마치 마귀의 지배를 강력하게 받는 무당과도 같은 말과 행동을 구사합니다.
음란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음욕을 품도록 만들고 싶어하며 실제로 어떤 해결이나 음욕의 해소를 원하는 것도 아니라 말 그대로 될 수 있는 한 최대로 삶과 생각과 영혼이 망가지는 결과를 갖고 오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또 복음과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열린 심령과 헌신하는 마음엔 거절과 상처를 심어주기를 원하지요.
돈을 사랑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관하여서 집중하는 사람들에겐 외모를 보는 습관과 이 세대의 칭찬과 겉치레를 따르도록 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런 자들은 교회 밖에서 불복종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쁜사람들로서 그들이 받을 지옥 형벌도 한 차원 고통스러운 것일 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또한 이런 자들로부터는 성경은, ‘돌아서라’고 말씀했지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보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 어떤 교리, 어떤 내용들 안에도, 그것이 어느 정도의 진리인지, 어느 길로 나 있는지를 분명 힌트같은 것일지라도 남겨두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불교도들은 ‘어떻게 네가 지옥에 가는데 내가 극락 세계로 가겠느냐? 너를 돕고, 또 지옥에 간 자들을 제도하기 위해 내가 먼저 지옥에 간다!’ ‘우리 모두 지옥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자’ 라고 가르치기도 하지요.
나는 이런 생각이 들지요. “미친거 아냐?”
‘지옥’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거나, ‘지옥’이 사실은 없는데, 있다고 가정하고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실제로,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하나의 철학 정도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진리”입니까? “거짓”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거짓’과 ‘진실’의 또렷한 개념조차 미비한 짐승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완전 선’ ‘절대 선’ ‘사랑’ ‘참 빛’을 이해할 능력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보기엔 “불교”엔 아무래도 구원의 길을 발견할만한 근거도, 당위성도, 집중할만한 가치도 없다는 사실이 확실합니다.
기독교는 “지옥”은 분명 실재하는 세계라고 믿고 가르치며, “천국”도 당연히 있는 곳으로 보기 때문에 “사실”을 “믿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알고, 실제로 가르치고 배우지요.
그렇다면 이제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요.
‘기독교’ -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길로 믿는 것’이 사실은 “사탄의 종교 - 이단” 이라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단”이란 “절대 선”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잘못되어 옆으로 비껴간 자들과 그 가르침들을 가리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당시에 참 많은 옥고를 치른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시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편 107편 11절 말씀
기본적 인륜 앞에 ‘범죄자’들이, 기본적 인륜 ‘정상인’들보다 사탄에게 가까운 자들 아니겠습니까? 전능자의 뜻을 멸시한 것이지요.
외적으로 보이는 뜻을 멸시한 예도 있지만, 내적으로 보이지 않는 뜻을 멸시한 예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이 쓴 기록들이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는 오늘날 기독교회의 경전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 중 상당수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전파하던 사람들 상당수가 처형당하거나 잔혹하게 고문당하고 죽어갔습니다.
구약성서를 살펴보시면, 하나님의 징벌로서 긍휼히 여김을 입지 못하고 살육당하고 진멸당한 자들은 우상숭배자들이나 율법을 버린 자들로서 범죄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을 핍박하고 고문한 사람들이야, 대부분이 어차피 지옥에 갈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크리스챤들의 그 인생 여정들과 결말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초기 크리스트교인들을 가리켜서 어떤 이들은 ‘나사렛 이단’ 이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스챤들의 당한 역사 속 형벌들과 희생들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교리가 진실로 사실이고,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사실이 진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으며 오히려 천국에 들어간 과정 안에서 좋은 씨앗이 되고 밑거름이 되는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크리스챤을 고문하다가도, 오히려 고문하는 자들을 위하여서까지 기도하는 것을 보며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들도 있지요.
유대인들은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성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조차 다 이해하기 어려운 깊은 온전함이 유대인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외쳐봅니다!
유대인의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신명기 13:1-3
여호와를 섬기는 일은 곧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지요. 율법 말입니다.
구약성서를 통하여서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들과 율법들, 여호와의 절대 위치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 본다면, 신약 성서가 계시하는 예수그리스도가 ‘여호와 신앙’을 변질시키는 ‘이단’의 미혹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후서 전체를 설명하는 기독교 소속 목회자의 주석을 보면, “초기 배도의 형태는 율법주의로 나타났다” 라고 설명합니다. 은혜의 교리를 저버리고, 율법주의에 편승함으로서 배도하였다라고 설명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구약시대에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기독교가 추구하는 교리가 ‘율법을 배반’하는 행위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호와는 변치 않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시지요.
절대 가치이며, 절대 선입니다. 변하지 않으시지요.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옳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계시된 ‘율법’에 대한 명령과, 오늘날 ‘신약성서’를 믿는 크리스챤들의 믿음 사이에 있는 “괴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요?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하나님이며, 한 여호와이시라면, ‘변치 않아야 할 사항’이 지금 ‘변한 것’처럼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이와 같은 나의 시각이 “구약,신약” 전체의 계획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의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크리스트교’의 교리와, ‘예수그리스도’를 참 구주로 알고 섬기며 그 ‘의지가 순결한 믿음’으로서 선을 행한다고 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냐? 구원은 어디 있는 것이냐? 라는 질문이 대두될 수가 있겠습니다.
자,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자기 양심에 걸리는 일을 하면, 그만큼 구원에서 멀어지고,
자기 양심에 좋은 일을 하면, 그만큼 구원에 가깝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살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즉, ‘이것이 선한 일이라’라고 믿는 일을 행하다보면, 그 선한 길 다음 단계에, 그 다음의 선한 길로 연결된 ‘믿음의 의’가 존재하고, 또 그 ‘믿음의 의’를 좇아 나아가다보면 또 그 다음의 ‘믿음’이 있고, 그 끝에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트교’에 귀의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받아들여서 섬기다가 보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구약성서를 통하여서 접하게 되고, 성경 전체의 방향과 가르침들을 잘 살펴 상고하여 보면, ‘세상, 세속, 세속적 교회, 세속적 관습, 사람의 유전’에 대한 분별이나 방향도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며, 결론적으로, “여호와 신앙”을 소유하는 ‘참 믿음’의 자손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방대하고, 출판된 각 서의 내용도 많고 많지만, 어느 랍비는 “유대인의 교육을 받으면 누구나 유대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였지요.
유대인이 섬기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며, 그들은 구약성서를 끊임없이 연구하며 읽고 믿고 살아갑니다.
코란도 읽어보았습니다.
코란의 내용은 대부분 ‘당신을 향한 직접적 하나님의 말씀’의 형태로 선포되기 보다는, ‘인간들, 사람들 사이에 책망과 비판, 정죄와 변론’들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성경이 그래도 가장 “진리”에 가깝게 계시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의견은 ‘교만’이며, “성경은 곧 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합당한 것일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지요.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잠언 19:27
또한 이렇게 가르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6:25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8-12
즉, 행위가 악하면, 거짓 진리를 사실로 믿게 되고, 결국 멸망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행위가 악하더라도, ‘진리, 사는길’을 정확하게 안다면, 그 길로 가서 구원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악을 행하면, 스스로 ‘거짓’을 ‘진리’인줄로 믿게 되고, 그 안에 갇혀서 영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물며, ‘거짓’인줄 알고도 악을 따라가는 자들의 결말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의를 굳게 붙드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참 사랑, 진실로 사랑하는 것, 참되게 깊이 사랑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어떤 종교 안에서도 발견하기 어렵지만, “크리스트교” 안에서는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한1서 3:23
‘죽도록 사랑’ 이라는 말도 있지만, ‘죽도록’이라는 표현조차 사용하기 꺼릴 정도로, 표현과 모든 면모에 있어서 완전한 사랑, 끝없는 사랑, 중심으로부터의 충성되고 의리 있는 사랑, 겸손하고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 온유한 사랑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 안에서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원한 사랑’이라는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진실로 사랑하는 행위’일 수도 있고, 일부 부족한 인격의 사람들일 수도 있지요.
사도바울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지요.
이쯤 되면 굉장하게 혼란스럽게 여겨지기도 하게 마련이지요.
어느 랍비는 설명하기를, 오직 한분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기는 유대교인의 입장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성부, 성자, 성령 - 그리고 카톨릭의 마리아와 성인 숭배 행위 - 신을 인정하는 일은 ‘다신교’의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또, 중세 기독교인들은 ‘돈’을 좋지 못한 것으로 여겨서, ‘돈’을 도구로서 인정하고 가치중립적인 요소로 바라본 유대인들과는 차이가 있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융업에 종사한 사람들도 많았고, 현존하는 은행 제도도 유대인으로부터 나온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돈은 비전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돈은 건강을 줄 수도 있습니다. 돈은 명예를 줄 수도 있습니다. 돈은 값어치가 큰 진리에 도달하도록 도울 수도 있습니다. 돈은 진리를 아는데 필요한 모든 요소들에 접근성을 높여줄 수 있습니다. 돈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 효율성 있는 접근과 활용을 가능케 합니다.
다만 돈이 사람보다 위에 올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요.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10
어떻게 보면, 이는 확연하게 눈에 보이고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의견과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하고 생각할만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런 것들로 논리를 역설하고, 생각을 둘 정도로 ‘여유’있는 사람, ‘비교적으로 무가치한 요소’에 집중하는 사람은, “진실로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과는 수준 차이가 아주 크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이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만 영원한 형벌의 진노를 면할 수가 있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이렇게 대답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전혀 게으르지도 않고 도적질도 않고 남을 속이지도 않았으며 악독하게 굴지도 않았고 열심과 정열을 가지고 열심히 삶을 살아왔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라고 말입니다.
칼빈은 성실과 부요함은 구원받은 증거로서 볼 수도 있다고 하기도 했지요.
이 사실 앞에서 좀 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신 앞의 “태도”를 바꾸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신 앞에 특별한 사람 - 자녀, 백성, 천국 시민’ 이라는 정체성 안에 거하게 된다면, 좀 더 세밀한 부분들에 있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내면에서 정립되고, 말로도 바르게 주장될 수도 있겠지요.
내면의 동기와, 의지, 선택, 좀 더 고차원적이고 깊은 관심의 사랑에 관하여서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엔 “성령은 없는 자들”에 대하여서 기록하고 있기도 하고,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기록함으로서 성령이 소멸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다서 1:17-21
자본주의의 경제적 성공과, 대조적인 공산주의의 경제적 실패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바른 파악이 서로 상반되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자기 자신의 것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낸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이 분배한다면, 누구라도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쉬기를 바라겠지요.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하나님의 사랑,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행하는 복음 안의 삶에 관하여 이해 한다면, 이는 인간에게 참으로 가장 적합한 원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리와 원칙에 따라서, 심판과 상벌과 칭찬과 영광이 주어진다면 ‘받은 은혜, 받은 사랑’이 없이는 인간 입장에서 몹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겠지요.
성경은 이에 대하여서 이렇게 설명하지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로마서 8:15-17
크리스챤들이 비교적으로 착하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세계에서도 부모 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란 사람들이, 그렇지 않고 어디 몹쓸 곳에서 버려지듯 자란 사람들보다 착하고 온순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쁜 일입니까? 가장 풍족하고 좋은 것으로 가득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적이고 영적인 참 사랑 입은 자녀로서의 양육을 받는 입장이 되는 일인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입장도, 사실, “여호와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누굴 아버지로 섬기겠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이처럼 소속에 대하여서는 확고하면서도 결코 ‘행위’에 초점을 두고 ‘은혜’의 양을 조절(?)하는 관계가 아닌, “무조건적 사랑”에 의하여서 ‘은혜’를 베풀고 받는 관계인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하여서 사랑받는 자녀의 입장은 놀라운 신비인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옳게 살았고, 괜찮게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바로 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코 바른 가치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공의와 진리가 온전히 성취된다고 보기 어렵지요. 물론, 자손의 자손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축복과 저주의 예들을 보면서 합당한 보응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각 사람대로의 심판과 상벌에 대한 가장 옳은 보응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심판이 있고, 모든 것을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과 심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온전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인격,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흐리멍덩한 하나의 개념이나 추상적 태도로 바라보길 원하는 사람들, 혹은 그렇게 믿고자 하는 사람들의 내면과 심리에는, “진실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나는 과연 정죄 받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똑바로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실제로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각 사람의 내면의 생각과 동기까지 다 헤아리시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며, 그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진실로 옳고 합당한 행실과 바른 삶 안에 거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십니까?
성경이 진리임을 믿으십니까? 사실, 기록된 성경이 실제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중요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장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출애굽기 2:11-15 말씀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사도행전 7:28,29 말씀
위의 두 기록과, 아래의 기록의 차이를 살펴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11:24-26 말씀
분명히 바로의 죽이려는 것과 자기 죄의 탄로나는 일을 인하여서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 것이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의 고난 받기를 택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게다가 예수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던 시대의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크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오류입니까?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는 주장과 하나님의 뜻의 일치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방향, 자세, 성향 입니다!
순종의 길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나아가는 방향이 있고, 속도가 있고, 그 온전함에 정도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여러기능이 있지만, 그 기능을 사용하는 행동의 배후에 있는 성향이 그 행동을 결정합니다. 사람의 생각의 배후에 있는 성향이 생각을 결정합니다.
성경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성향을 위한 좋은 가르침과 말씀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진리’를 행하기 위한 성향이 가득한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봅니다.
바른 성향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곧 진리를 따르는 것이며, 진리를 따르는 결과를 내는 성경은 곧 ‘진리’인 것입니다.
이것 저것 여러 생각들을 정리했습니다만,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과,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견해들이나, 종교철학자들의 철학이나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나, 연구가 기도보다 중요치 않은 것은,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하여서 움직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서 4:12,13
아무리 연구를 하고 논리를 펴내고 생각을 한들, 그 생각들 자체도, 의지도, 결정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하여서 움직이며, 그 세계를 조종할 수 있는 힘이 기도에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 곧 기도를 찾아 열정 내는 길을 따라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정상적이고 건강한 크리스챤이라면 이 사실을 믿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