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3.독립군에 입대하다 ⑶

대모달201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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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는 본래 1922년 2월에 보합단(普合團)·광한단(光韓團)·한족회(韓族會)·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7개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되어 편성된 조직이었으나 처음부터 영향력이 느슨해서 각 단체는 여전히 자신들의 기치 아래 활동했다. 이에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 등의 노력으로 같은 해 8월에 한민단(韓民團)·한교회(韓僑會)·의군부(義軍府)·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 등의 단체가 추가로 합류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구성되었다.

 

대한통의부는 처음에 광복군총영의 근거지였던 유하현 화사구에 있다가 후에 왕청문 이도구로 옮겼다. 이들은 환인현 마권자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71개 단체의 대표가 참가한 이 회의는 선거를 통해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조직했다. 김동삼이 총장, 채상덕(蔡相悳)이 부총장에 취임했고, 행정부장은 김동삼이 겸직했으며, 비서과장은 고할신(高轄信), 민사부장은 이웅해(李雄海), 교섭부장은 김승만(金承萬), 군사부장은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은 현정경(玄正卿), 재무부장은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은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은 변창근(邊昌根), 교통부장은 오동진, 참모부장은 이천민(李天民) 등이 각각 선출되었다.

 

대한통의부는 산하에 무장 조직을 두었는데, 의용군 사령관은 오동진, 참모장은 이천민이 각각 겸직하였다. 대한통의부의 의용군은 모두 9개 중대로 구성됐는데, 제1중대장은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은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은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은 홍기주(洪基周), 제5중대장은 김명봉(金鳴鳳)이 각각 맡았으나 나머지 중대의 지휘관은 자료의 소실로 알 수가 없다. 9개 중대 밑에는 40여개 소대를 두었고, 그 밖에 유격소대·헌병대가 있었으며 전투병력은 1천 2백여명이었다. 부속 기구와 의용군 수뇌부는 왕청문·평정산·임자두·영릉·홍묘자 등에 주둔하였고, 통화현과 유하현에도 부대 일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렇게 남만주 지역에 군정이 통일된 자치기관이 생겼는데, 흥경현 동부와 환인현이 이들이 활동하는 중심 무대였다. 이때 최지풍은 양세봉을 자신의 제3중대로 불러서 두령 방위를 맡겼다.

 

대한통의부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타격을 가하고 자신들의 역량을 확대하기 위하여 빈번히 의용군으로 하여금 조선 땅으로 침투하여 일본의 군사기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1923년 5월, 최지풍은 양세봉을 비롯한 대원들을 거느리고 평안북도 창성군을 습격하여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같은 달에 또 초산군 판면을 습격하여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6월에는 의주군 고녕면 영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적병 10여명을 사살했다.

 

임무를 완수한 최지풍은 대원들을 인솔하여 자신의 방어 담당 지역으로 돌아왔다. 그는 양세봉을 소대장으로 승진시켰다.

 

양세봉은 부대의 규율을 잘 지켰을뿐 아니라 대원들과 고락을 같이했으며 허락 없이 부대를 떠나 집을 찾는 일이 없었다.

 

대한통의부가 출범한 이후로 내부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다. 유림 출신인 전덕원(全德元)은 경무감에 임명되자 요직이 아니라고 불만을 가졌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김유성(金有聲)·박대호(朴大浩) 등 복벽주의(復壁主義) 계열은 박초(朴超)·박형일(朴炯逸) 등을 끌어들여 대한통의부를 탈퇴하였다. 그들은 환인현 대황구에서 회의를 열고 따로 의군부(義軍府)를 설립했다. 채상덕이 총장, 전덕원이 군무부장, 김유성이 정무부장을 각각 맡았다.

 

예전 한교회의 회원이었던 유응하(劉應夏)·여순근(呂淳根) 등 13명도 통의부를 떠나 군민부(軍民部)를 조직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회의를 소집하자 북경·상해·장사와 남만주·북만주에 있던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모두 대표를 파견했다. 당시 왕청문·환인현·유하현 일대의 조선인들도 각각 국민대표 추진회의를 열고 국민대표회의 상해 준비위원회 실시 여부와 방침 등 여러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고 건의문을 제출했다(상해판《독립신문》1922년 5월 27일자 기사).

 

그 후 1923년 2월 2일부터 6월 2일까지 ‘임시정부 국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가 열렸다. 출석한 대표는 84명이고, 그 중 환인현·흥경현·유하현에서 각각 1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독립운동의 형세와 임무를 탐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성원들을 새롭게 뽑았다. 이승만이 계속 주석을 맡았지만 1925년에 탄핵되어 면직당했다. 이동녕이 국무총리에 취임했고, 이시영(李始榮)이 재무총장에 임명됐다. 이상룡(李相龍)도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로, 1925년에 국무령(國務領)에 선임되었다.

 

이동녕·이시영·이상룡은 남만주 조선인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도자로 1910년 겨울에 남만주로 이주하여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남만주 일대의 조선인들은 이동녕·이시영·이상룡을 잘 알았으며, 그들을 매우 존경하였다.

 

상해에 갔던 대표들이 남만주로 돌아온 후 통의부 측에 회의 결과를 보고했다. 통의부의 간부들 중에는 이번 회의에서 국무총리로 임명된 이동녕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이동녕을 둘러싸고 통의부 중앙조직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렸다.

 

그 해 9월 백시관(白時觀)·최석순(崔碩淳) 등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통의부를 나가 참의부(參議府)를 조직했다. 이때 원래 통의부 의용군이었던 제1·2·3·5중대가 이에 호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라는 명칭의 부대를 창설했다. 제1중대장인 여전히 백광운이었고, 제2중대장 역시 최석순이 계속 맡았으며, 제3중대장도 최지풍이 그대로 유임되었다. 제4중대장은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은 김창천(金蒼天), 훈련대장은 박응백(朴應伯)이었다. 중앙위원장은 백시관, 민사부장은 김소하(金篠厦), 교섭부장은 허운기(許雲起)였다. 1924년에 백광운이 통의부 의용군인 백세우(白世雨)·백병준(白炳俊)에 의해 피살되자 최석순이 참의장으로 취임하고 김선풍(金旋風)·김우근(金宇根) 등을 간부진에 참여시켰다. 참의부 본부는 처음에 환인현의 이붕전자(二棚甸子)에 있다가 후에 통화현으로 옮겼다.

 

양세봉은 여전히 제3중대에서 소대장으로 있었다. 양세봉은 중대장인 최지풍을 신뢰했고, 이동녕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이 있었으며,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대표적 기관이라고 여겼기에 통의부를 떠나 참의부에 가담했다.

 

당시 동북지방의 군벌들은 일본 영사관의 압력에 굴복하여 독립군에게 활동을 중단하고 주둔지를 떠나라는 권고를 했다. 그리하여 참의부 의용군은 여러 가지 번거로운 마찰을 피하기 위해 부대를 몇 개의 분대로 나누고 깊은 산속에 배치시켰다. 최지풍은 휘하 중대를 이끌고 통화현의 대천원(大泉源) 일대에 주둔했다. 그곳은 북쪽으로 유하현과 이웃해 있고, 서쪽으로는 흥경현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환인현과 잇닿아 있고, 조선의 만포와도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들은 산속에서 쉼 없이 군사훈련을 진행하여 전투력을 강화하는 한편 학습 조직도 만들어 애국에 관한 신념과 지식을 꾸준히 쌓아 갔다.

 

1924년 봄에 참의부는 영향력을 강화하가 위해 군사부서를 다시 정비했다. 최지풍은 또 다시 대원들을 거느리고 위원(渭原)을 떠나 평안북도에 들어가서 유격전을 펼쳤다.

 

5월 16일에 최지풍이 거느린 대원들은 평안북도 초산군 성남동에서 일본 경찰대와 총격전을 벌였는데, 양세봉도 이 전투에 참가하여 적병 네 명을 사살했다. 19일에 양세봉은 제2중대 1소대장인 한웅권과 합동작전을 벌여 강계군 고산 강변에서 사이토[齋藤實] 조선총독이 탑승한 순시선에 총격을 가했으나 총독을 살해하지는 못하였다. 6월 8일에 양세봉의 소대는 강계군 성간면 외중동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16일에는 위원군 서태면에서 다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1924년 여름에 최지풍은 대원들을 인솔하여 왕청문 지역으로 돌아온 후 휴식을 취하고 부대를 정비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