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3.독립군에 입대하다 ⑸

대모달201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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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 반일지사 왕동헌

 

처음 양세봉이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 사는 교육자 왕동헌(王潼軒)과 관계를 맺은 후, 양세봉의 소개로 최지풍(崔志豊)·백시관(白時觀)·최석순(崔碩淳) 등도 모두 왕동헌과 친구가 되었다.

 

왕동헌의 본명은 자신(紫宸)이다. 청조(淸朝) 말기 봉천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일찍이 일본에도 건너가 동맹회(同盟會)에도 가입했으며, 손중산(孫中山)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해혁명(辛亥革命) 바로 전날 밤, 장용(蔣甬) 등과 함께 동북 지역으로 돌아왔다.

 

그는 중국의 낙후와 우매함을 목격하고 교육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 1915년 홍승(紅升)에 소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얼마 후 방해 세력 때문에 학교를 왕청문으로 옮겼다.

 

당시 동북 지역의 농촌에는 서당이 성행하였고 신식 학당은 초창기였으므로 일반 농촌에 초급 소학교를 세운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만일 초급 소학교에 다니자면 현(縣)이나 성(省)으로 가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왕동헌이 세운 학교는 대중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학생이 3백명으로 급증하여 교실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경비가 부족하여 새 교실을 지을 수도 없어 그는 학생들을 데리고 관제묘(關帝廟)를 뜯어 교실로 수리하였다.

 

이렇게 되자 요동 각 현에서 왕청문의 왕동헌이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어렸을 때 병을 앓고는 팔이 하나밖에 없어 별명이 ‘외팔이 왕씨’였지만, 항일투쟁(抗日鬪爭)에 참가한 후로는 “그 누가 동북에서 소란을 피워도 왕동헌이 있는 한 겁나지 않는다”는 말이 널리 전해졌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학교도 많이 생겨서 흥경현에도 교사가 많이 부족했다. 따라서 왕청문 학교를 졸업한 우등생이 교사가 되면 아주 환영을 받았다. 통화현·유하현·환인현 등 이웃 고을에서도 서로 다투어 초빙하려고 들었다. 교육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왕동헌은 체조, 유아교육, 음악교습 등 단기 학습반을 꾸렸다. 그 지역의 중국인이나 만주족 가정에는 2대에 걸쳐 그의 제자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양세봉과 왕동헌이 서로 사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어느 날 양세봉이 왕동헌의 학교를 지나가다가 중국인 학생들의 글 읽는 소리에 끌려 교실 창문에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교실 안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본성이 다 선량하나, 후에 가는 길이 달라서 나쁘게 변한다”라고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저도 모르게 “사람이 공부하지 않으면 그 본성은 나쁘게 변할 것이다”라고 받아 말했다. 이때 뒤에서 인기척이 있어 돌아보니 과피모(瓜皮帽)를 쓰고 긴 두루마기를 입은 학교 선생이 그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중국어를 아세요?”

 

학교 선생이 물으니 양세봉이 대답했다.

 

“조금 압니다.”

 

학교 선생은 기뻐하며 사무실에 가서 함께 이야기나 나누자고 양세봉에게 청했다.

 

양세봉이 학교 선생을 따라 사무실에 이르니 위에 ‘교장실’이라는 나무패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어려워했다. 학교 선생이 찬물을 부어 주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앵세봉의 마음이 편안하고 가벼워졌다. 서로 통성명을 통해 학교 선생이 교장인 왕동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왕동헌도 양세봉이 참의부(參議府)에 소속된 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동헌이 말했다.

 

“손중산 선생이 일본에 있을 때 이런 말을 했지요. 일본인은 아시아 사람이 아니다. 일본은 서양을 위해 다른 아시아 국가를 침략하고 있으니 어찌 아시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냐고 말입니다. 일본인들이 아시아 사람으로 행동하려면 조선이 독립하도록 허락하고 아울러 만주의 권리와 산동 문제를 빨리 중국으로 넘겨주어야 합니다.”

 

양세봉이 그의 말을 받았다.

 

“중국과 한국, 두 나라 사람들은 대대로 친분을 맺고 형제의 정분을 이어오면서 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지난날 임진년(壬辰年)에 왜구의 두목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우리나라의 길을 빌려 귀국을 침략하려 했습니다. 우리 두 나라는 그들을 대대적으로 섬멸하고 위대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이순신과 명나라의 등자룡 장군은 모두 왜놈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그때 우리 두 나라의 위력으로 보아 직접 왜적들의 소굴을 들이쳐서 멸망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라는 점과 하늘은 덕을 중히 여긴다는 점을 고려하여 잠시 놓아 두었는데 3백년 후에는 갑오전란(甲午戰亂)을도발하고, 또 17년이 지나서는 경술지변(庚戌之變)을 일으켜서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한국을 침략한 것은 실제로 만주를 점령하기 위한 것입니다. 중국과 한국은 본시 형제간이고, 형제의 정분이 끊이지 않은 이상 상대방의 어려움을 도우려는 마음 또한 절절할 것입니다. 지금 왜놈들은 두 나라를 충동질하여 형제 같은 관계를 이간시키고 서로 원수되게 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하십니까?”

 

왕동헌이 대답했다.

 

“왜놈들이 한국을 점령하고 만주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은 식견이 있는 지사들은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방 군벌들은 무지몽매하고 식견이 좁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오랫동안 중국과 한국의 형제들을 이간시키고 있는데 응당 이를 폭로하여야 합니다. 중국과 한국은 한집 식구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입니다. 이는 두 나라가 동아시아 민족과 문화적으로 동일한 원류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 조건과 지리 조건에서도 서로 밀접한 자연의 지배를 받는 숙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4천여년간 두 나라는 손과 발처럼 갈라 놓을 수 없는 형제로 지내왔습니다. 동방,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중국은 조선에 대하여 당연히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손중산 선생은 우리에게 ‘세계의 약소한 민족들은 연합하여 싸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중국인 모두의 책임이요 의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 망설임 없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야 합니다. 중국에는 일부 손중산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하여 중국 사람들도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울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단군의 건국 정신을 다시 한 번 떠올려서 뜻을 이루기 바랍니다.”

 

왕동헌과 양세봉은 대화를 통해 의기투합하고 서로의 속내를 확인했다. 양세봉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의 유명인사와 사귀게 된 것인데, 왕동헌의 박식함과 강개함, 총명함, 친밀함, 활달하고 넓은 도량, 민족사상과 호걸다운 기개는 그가 존경하기에 충분했다. 이 날의 대화는 양세봉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왕동헌도 양세봉을 소박하고 진지하며 열정적이고 건강한 인물로 보았다. 또한 귀여운 애티가 있으나 경솔하지 않으니 이후 꼭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사이 왕동헌은 찻물을 세 번이나 따라주었다. 어느덧 두세 시간이 흘렀다. 양세봉이 일어나 인사를 건네자, 왕동헌은 “오늘 대화는 아주 유쾌했어요. 또 기회가 있으면 여기서 얘기를 나눕시다”라고 말했다. 양세봉도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조선인 무장독립군의 주요 활동지인 왕청문은 흥경현청 관할이었다. 중화민국이 이미 연호를 정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현아문(縣衙門)이라고 불렀다.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지 전까지 이 곳의 현장은 충방·대유침·추건붕·황거영·소선양·의문심 등이 맡았다. 현청에 1·2·3부서를 두고 그 아래에 공안국·교육국 등 부서를 배치했다. 최고 권력 기구는 현청 회의이며 현장을 비롯해 각 부서의 부장과 각국의 국장으로 구성되었다. 그 밖에 감독 참의 기구를 설치하여 현 참의회라 했는데, 현의 주민들이 선거를 통해 뽑은 의원들로 구성했다. 의원 임기는 3년이며, 매년 3분의 1을 바꾸었다. 왕동헌은 1926년 전후로 현 참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므로 직접 현장과 대면할 수 있어 현청의 행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흥경현은 8개 구, 113개 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청은 현청의 관할을 받았다. 구에는 구장(區長)을 두어 자치의 초보적 기반을 마련했다. 현에는 의사회(議事會)가 있고, 각 유권자들 가운데서 의장 2명과 의원 15~20명을 선출했다. 아울러 구의원 중에서 선거를 통해 이사회를 구성하였는데, 이사회는 이사와 명예이사, 그리고 총주임 4~6명으로 구성되었다. 보통 총주임은 구장이 겸임했다. 왕동헌은1926년을 전후해 왕청문 구장 겸 구의회 총주임으로 있으면서 구 전체의 사무를 관리했다.

 

구 아래에는 보(保)를 설치하고 보장(保長)을 두었으며, 보 아래에는 갑(甲)을 설치하고 갑장(甲長)을 두었다. 갑 아래에는 백장가(百長家)·십가장(什家長) 등을 두었다. 당시 봉천성은 법령이 자주 바뀌어서 어떤 때에는 구를 향(鄕)으로, 보를 촌(村)으로, 갑을 부촌(副村) 또는 둔(屯)으로 불렀다. 행정 구획의 변동으로 이 현은 어떤 때는 네 개 구로, 어떤 때는 아홉개 구로, 어떤 때는 열개 구로 나뉘었다.

 

현청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경찰서·경찰훈련소·보위대·자위대·유격대·순찰대 등을 조직했으며, 구마다 경찰이 있었고 곳곳에 보호소가 있었다.

 

왕청문은 본래 1구에 속하는 동창대(東昌台)의 관할을 받는 큰 도시였다. 1913년 동창대는 경찰서를 설치하고 19개 촌을관할했다. 구 소재지에는 구관(區官)·순관(巡官)·순기장(巡紀長)을 각각 1명 두었고 보순장(步巡長) 6명, 보호경(保號警) 2명, 보순경(步巡警) 52명, 마순경(馬巡警) 4명과 장총(長銃) 42정이 있었다.

 

1923년 구청을 왕청문으로 옮겼으나 경찰서는 옮기지 않았다. 구청을 보호하기 위해 왕청문에 보갑분소를 설치하고 구보장 1명, 보장 3명, 서기 1명, 갑장 9명, 갑정(甲丁) 95명, 부역(夫役) 1명을 두었으며, 연간 지출은 7천 187원이었다. 1926년 2구를 1구로 개편하고 동창대 경찰서를 왕청문으로 옮겼다. 구보장을 구장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보갑분소와 경찰을 합병하여 경갑(警甲) 임시 유격대로 하였으며, 유격대장은 경찰서 소장이 겸임하였다.

 

당시 왕청구의 관할 구역은 20개 촌이었는데, 전체 인구는 약 2만명이고 그 중 절반이 조선인이었다. 1925년에 동북삼성의 순열사(巡閱使)인 장작림과 봉천성청, 동변(東邊)의 도 장관은 지방 각 현에 조선인들을 엄하게 단속하라고 재삼 훈령을 내렸으며 아울러 ‘조선족 단속법 요강’을 발표했다. 중국 땅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중국 정부의 규정에 따라 각 가정의 농지를 엄중히 조사하고 문패를 달아 관리하며 연좌제를 실시한다는 규정이었다. 또 조선인이 무기를 들고 조선 땅에 침입하거나 조선인이 중국 땅에 침입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경술병탄 이후 현청의 어리석은 관리들은 일본인을 한국인이라 하고,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규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20년 11월에 일본 육군은 독립군과의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패배한 것을 보복하려고 한국인 교회와 학교를 불태웠다. 일본 상인 치노 마사는 산 주인을 사칭해 산림세를 거두었으며, 구치 사부로는 나무 1만 그루를 도벌하여 갱목회사에 팔아넘겼고, 우쓰이 사쿠로는 소금을 밀매하였다.

 

1918년 6월 유후루촌의 이복영은 일본인으로부터 능욕을 당하자 참지 못해 반항하다 살해되었다. 1920년 2월 갑정 조성상은 일본 상인들과 충돌하여 그들에게 구타를 당해 부상당했다. 1926년 6월 일본인 야나기가 사이키라는 위조 지폐를 만들다 붙잡혔다. 많은 일본인들은 중국 땅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거짓말하여 책임을 모두 한국인들에게 돌렸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오해로 인해 한국인들에게 몹시 분노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고려인이 중국 사람들의 밭을 빼앗으려 한다”는 따위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한국과 중국 사람들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졌다.

 

현의 경찰훈련소에서는 경찰관들을 훈련시킬 때 ‘중일규약 개요’·‘국제법 대강’·‘현행 법령 대의’·‘조선인 단속법’·‘호적조사법’ 등을 학습시킴으로써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죽이는 살인마로 키웠다.

 

일본 영사관과 보민회와 결탁한 현청은 경찰관 순기(巡記) 24명, 장경(長警) 402명을 공동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총기(銃器) 459자루를 가지고 있었으며, 매달 3천 642원을 급료로 받았다. 거기에 보갑 몇 명을 더 보충하여 연합경갑 마을 수비대를 구성하고 마을 곳곳을 수색하고 다녔다. 그들은 왕청문을 주요 조사지로 정하고,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기 위해 아예 그곳에 주둔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애국 청년들이 많이 체포되었고 몇십 명이 살해되었다. 어떤 사람은 현장에서 생매장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마을 수비대가 20여명의 조선인을 포박하여 왕청문 거리 한가운데에 꿇어 앉혔다. 보민회원 몇 사람이 그 위를 짓밟고 걸어가면서 “이것이 바로 일본에 복종하지 않는 너희들의 말로다”라고 미친 듯이 떠들어대고는 권총으로 한명씩 죽였다. 선혈이 길가의 도랑을 붉게 물들었다.

 

그 학살 사건은 중국과 한국 두 나라 현지 주민들에게 참혹한인상을 남겼다. 왕동헌은 전교 학생 회의에서 “살해당하고 생매장당한 사람들 중 그 누가 나쁜 사람인가? 애국이 죄가 되고 나라를 되찾으려다 살해당하는 이것이 바로 망국의 비참함이다!”라고 외쳤다.

 

현청은 사사로이 조선인 한 사람을 숨겨주다 발각되면 100~200원씩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 하나로 현 전체에서 벌금으로 걷어들인 돈이 7만여원에 달했다.

 

그러나 왕동헌과 학교 교원 왕계헌·서함·유웅비,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의 애국지사들을 보호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비밀리에 알려 주는가 하면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으며, 어떤 때는 마을 수비대에 보석을 신청하기도 했다. 많은 독립군 병사들이 왕청문 소학교의 정보를 듣고 산속으로 들어가 숨었기에 그나마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조선 독립군과 비적을 진압하기 위해 각 향에서는 성인 남자를 뽑았으나 그들에게 봉급을 주거나 필수품을 제공할 능력은 없었다. 총기와 탄약은 스스로 구해야 했고 군복은 지방 농업회와 상업회에서 준 것이었다. 현장은 이들을 직접 관리하고 감독했다. 매년 수수나 옥수수가 무성할 즈음에 소집해서 늦가을 상황이 안정되면 해산했다.

 

왕청문 구청은 진(鎭)의 동남쪽 산 언덕에 동서로 넓은 장막 두 채를 세웠다. 한 채에 1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밤마다 순경과 예비 순경을 파견하여 돌아가며 순찰하게 했다. 동쪽에 주둔하는 순경은 서쪽으로 내려가고 서쪽에 주둔하는 순경은 동쪽으로 올라가며 순찰하였다. 그들의 순찰은 이렇게 한바퀴 돌고 또 다시 돌면서 밤새 멈추지 않았다. 아울러 북과 징을 갖추고 북소리가 멎으면 징을 치고 징소리가 멎으면 다시 북을 쳤다. 높이 매달린 깃발은 이들의 상징이었다. 대부분의 독립군은 지리에 익숙하지 못해 함부로 돌아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고, 특히 저녁에 북소리와 징소리를 들으면 더욱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해 여름 양세봉은 참의장 최석순의 부탁을 받고 독립군 장병들에게 연설해 줄 것을 요청하러 왕동헌을 찾았다. 참의부 의용군 대원들을 고무하고 격려하여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왕동헌은 흔쾌히 요청에 응했다. 또한 왕동헌은 독립군에게 선물하기 위해 여러 해 저축한 돈을 꺼내 딸에게 주며 중국인들이 입는 옷 1백벌을 사오라고 시켰다.

 

참의부 의용군은 수수가 무성히 자란 밭을 이용하여 이도구 숲 속에 숨어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다. 비적에게 공격받을 것을 염려한 왕청문의 청년 정연보가 자청해서 왕동헌을 수행했다. 왕동헌은 학생 10여명에게 각각 옷 10벌을 짊어지게 하고 함께 왔다. 일행이 이도구에 도착하자 마중 나온 최석순·최지풍·양세봉 등과 반갑게 포옹했다. 최석순은 왕동헌이 독립군의 안전을 고려하여 많은 옷을 사온 것을 보고 매우 감격했다.

 

주둔지에 도착하자 1천여명의 대원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뜨겁게 환영했다. 이 모습을 본 왕동헌도 따스한 인정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줄지어 늘어선 대오 앞에서 왕동헌은 큰 목소리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저는 중국인들을 대표하여 이번에 군벌이 조직한 마을 수비대에게 살해당한 조선의 지사들에게 침통한 애도를 표합니다!

 

한국은 우리와 서로 인접해 있는 이웃이요 형제 나라로서,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가깝게 지냈습니다. 폭군 일본의 마수가 조선에 뻗친 후로 또 다시 중국을 침범하려는 그들의 야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항일투쟁은 한국의 일일뿐 아니라 중국의 영욕에 관계되는 일이며, 나아가 아시아 각 민족의 운명과도 관계되는 일입니다.

 

손중산 내각총리께서 이미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중국의 자유·평등을 쟁취하려면 세계 피압박민족을 원조해야 하며,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분투해야 비로소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최근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의 대륙정책을 달성하기 위해 수도를 한국 땅으로 옮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해방은 희망이 없게 되며 우리 중국도 순망치한의 액운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주 군벌과 지방 관리들은 원수를 어버이로 섬기면서 왜놈들과 투쟁하는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도살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리석은 짓일뿐 아니라 치욕이며, 이웃 나라요 형제 나라인 우리 중국의 죄입니다. 그들은 중화민국의 대표가 아니며 이는 손중산 내각총리의 뜻에 반역하는 일입니다.

 

다수의 중국 인민은 절대로 자신의 안전만 돌보지 않을 것이고, 우리 정부도 반드시 손 총리의 뜻에 따라 민족 평등을 위하여 노력할 것이며,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지지할 것입니다. 저 역시 우리 국민들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호소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멸망시키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키며 대동세상으로 함께 나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마지막으로 왕동헌과 참의부 의용군 병사들은 함께 소리 높여 구호를 외쳤다.

 

“전세계 피악박민족들은 같이 힘을 합하자!”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독립운동 만세!”

 

감동적인 그의 연설은 독립군 장병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 후로 왕동헌과 참의부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고 최석순과 양세봉은 왕동헌과 막역한 관계로 발전했다.

 

특히 1926년에 왕동헌이 현의 참의원과 구장으로 선출된 후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각급 정부와 군경 관계자들에게 조선 독립군이 무장을 하고 중국 땅에 주둔하는 목적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이므로 그들을 믿어야 한다고 설복하였다.

 

왕동헌은 친히 현장 황거영과 경찰서장 곡전륜을 찾아가 이렇게 부탁했다.

 

“우리와 한국은 뗄 수 없는 이웃 나라이기에 우리는 일본을 도와 한국인들을 해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들의 반일운동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중국의 국익에도 유리합니다. 따라서 상급지시에 무조건 따르지 마세요. 그들은 절대로 우리 주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보증할 수 있습니다.”

 

황거영과 곡전륜은 왕동헌이 신해혁명의 원로이며 지방의 유지이므로 그의 말을 듣고 조선인에 대한 통제와 체포를 완화했다. 더욱이 조선 독립군은 수시로 드나드는 왕청문 일대에서 왕동헌 구장의 보호를 받았다. 덕망이 높은 구장의 지지 아래 지역 사람들과 조선인들의 관계는 더욱 좋아졌다.

 

1925년에 상해에서 5·30총격사건(五三十銃擊事件)이 일어났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방적공장에서 회사 측이 파업중인 노동자들과 중재단간에 합의된 사항을 거부하면서 노동자들과 경영자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져 8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외국인의 지배하에 있던 조계(租界)의 행정당국인 공부국(工部局)에서는 권총으로 노동자 한명을 사살한 일본인 경영자를 기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경찰업무를 방해했다는 명목으로 중국인 노동자 5명을 체포했다. 이에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됐는데, 영국 조계지에서 경찰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3명이 사살된 사건이 바로 5·30총격사건이었다. 각계각층의 중국인들이 이 사건으로 격분했으며, 전국 각지의 상인·노동자들은 각각 영국과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고, 영국인·일본인의 소유 공장에서 파업을 진행하였다.

 

이 사건의 소식을 전해들은 흥경현의 사범학교도 시위를 벌였다. 왕청문 초등 소학교 학생들도 왕동헌의 인솔 아래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에 앞서 왕동헌은 공개적으로 조선의 애국지사 안중근을 따라 배워 국치를 잊지 말고 조국을 사랑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연설했다.

 

그들은 각자 색칠한 삼각 깃발을 들고 걸으면서 “일본과 서양 상품을 사지 말자!”, “민족 상공업을 발전시키자!”, “일본을 타도하고 군벌을 규탄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천의풍·덕원동·항거창·복거상·신승동 등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문앞에 멈추어 서서 구호를 외치며, 가게 주인을 불러내어 5·30총격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동포를 위해 헌금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모금한 돈이 1천원 가량 되었다.

 

그날 저녁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과 참의부의 양세봉은 여러 조직의 부탁으로 받은 돈 수백원을 가지고 직접 왕동헌의 집으로 찾아가 작은 성의나마 상해에서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한 중국인 노동자 고정홍 등의 가족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왕동헌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받아들였다. 후에 왕동원은 교원 왕광록을 현청에 보내 우편으로 각지에서 보내온 헌납금을 상해의 후원단체에 전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