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

오늘은20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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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1970) 전태일(1948~1970) 1970년 11월 13일은 어느 청년노동자가 스스로 삶을 끝내 우리나라 노동인권의 새 장을 연 날이다. 어느 청년노동자는 바로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6세 때 재봉사인 부친이 하던 사업이 잘못되어 온 가족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한동안 서울역 앞 다리 밑에서 노숙으로 연명하다 아버지가 2년간 모은 돈으로 재봉틀 한 대를 마련하여 다시 사업을 시작하면서 8세 때에는 남대문 초등공민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여 학교를 다니는 등 생활이 나아졌다.   그러나 주문을 받아온 브로커가 중간에서 대금을 가지고 사라져 아버지 사업이 다시 빚더미에 안게 되면서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 삼발이 장사, 구두닦이 등에 나서게 된다. 이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2살이었다. 그러다 삼발이 장사를 위해 받아온 물건의 원금도 갚지 못할 만큼 생활이 어려워지자 가출을 하게 되는데, 우연히 대구 외갓집에 들렀다가 다시 대구로 내려온 가족과 재회하면서 대구에서 생활하게 된다.
대구에서는 아버지가 다시 재봉일을 시작하면서 낮에는 아버지를 도와 재봉틀을 돌리고 오후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며 지냈는데, 이것이 그가 학교를 다닌 마지막 기록이다. 이때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다시 아버지의 폭음과 폭행이 심해지면서 이런 행복도 오래 가지 못했다. 1964년 어머니가 식모살이를 위해 서울로 떠나면서 전태일도 막내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가출한다. 그는 동생을 보육원에 맡기고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스케이크 장수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1965년 다시 온 가족이 서울에서 함께 살게 되면서 17세의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견습공(시다)로 취직을 하게 된다. 미싱일에 경험이 있었던 전태일은 빨리 기술을 익혀 미싱보조, 미싱사가 되는데, 이즈음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 여공들이 시간수당도 없이 일당 70원에 하루 14시간 이상 노동하는 것을 보고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눈뜨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버스비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집까지 걸어다니다 통금시간에 걸려 파출소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고, 재단사가 되면 시다들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미싱사 월급을 포기하고 그보다 낮은 재단보조로 취직하기도 한다. 그러나 1967년 19세에 드디어 재단사가 되지만 가혹한 노동환경으로 직업병인 폐렴에 걸려 강제해고당한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만다.   시다 시절 동료와 함께. 가운데 서있는 사람이 전태일   직장을 옮긴 전태일은 1968년 우연히 아버지를 통해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독학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자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여 평화시장 일대의 근로조건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문이 퍼지면서 다시 해고당하고 바보회도 사실상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후 전태일은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는데, 이 시기에 이미 죽음을 결심한 것으로 보이는 일기가 사후에 발견되었다.   1970년 9월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틈나는 대로 청와대, 서울시청, 노동청, 신문사, 방송국 등을 찾아다니며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실태를 진정했다. 그리하여 10월 7일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에 대한 기사가 실리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당시 전태일이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에 실린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밑줄 포함 원문을 그대로 옮김)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이어 삼동친목회는 10월 20일 노동청 정문 앞에서 시위를 계획했으나 근로감독관과 업주들의 회유로 중단되고 다시 시도한 10월 24일 시위도 역시 미리 정보를 입수한 업주측과 경찰의 경비로 실패했다. 이때 업주들로부터 11월 7일까지 요구를 해결해준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이 또한 지켜지지 않자,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업주와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또다시 무산되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대신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겼다. 그가 불길에 휩싸여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외친 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였다고 한다.   1970년 93인의 서명을 받아 신문사 등에 제출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와 당시 실태조사를 위해 돌린 설문지   병원에서도 회생할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한 전태일은 결국 어머니에게 그가 못다 이룬 일을 이루어줄 것을 부탁하고 "배가 고프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이 요구했던 내용이 해결되기 전에는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며 근로조건 개선, 노동조합 결성 등 8개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버텼다. 결국 정부로부터 노조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11월 18일 장례를 치른 후 11월 27일 전태일의 친구들과 함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이후 이소선 여사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40여년을 함께 하다가 2011년 9월 3일 아들 곁으로 떠나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아들과 함께 묻혔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1929~2011)   전태일의 죽음이 사회에 불러일으킨 반향은 거대했다. 먼저 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환경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알려졌고 이로 인해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진 계기가 되었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 그가 한문투성이인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읽느라 대학생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소식이 알려져 대학생과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영래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이후 전태일 평전을 쓰게 되는데, 1983년 발간된 이 책은 전태일과 조영래라는 이름을 밝히지 못한 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83년 출간된 전태일 평전(좌) 1990년 원래 제목과 저자를 밝히고 개정된 전태일 평전(우)와 7554명의 모금으로 제작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전태일의 일기-1970년 8월 9일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