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1월 25일, 남만주의 8개 독립운동 단체가 회의를 열고 모든 단체를 하나로 합쳐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1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필두로 남만주의 모든 단체가 해산을 선언하고 정의부에 흡수되었다. 정의부의 간부진은 중앙집행위원장에 이탁(李鐸), 군사위원장에 이청천(李靑天), 외교위원장에 김동삼(金東三), 생계위원장에 오동진(吳東振), 재정위원장에 김이대(金履大) 등으로 구성되었다.
1925년 3월, 북만주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비롯한 10개 단체도 합병하여 신민부(新民府)가 출범하였다.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金赫)이 선출되었고, 군사위원장에 김좌진(金佐鎭), 외교위원장에 조성환(曺成煥), 보안대장에 박두희(朴斗熙) 등이 각각 선임되는 등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에 참전했던 인물들이 주로 가담하였다.
이로써 동북 지역의 조선인 반일 단체는 합병을 거쳐 크게 3개 부, 즉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로 재편되었고, 이는 세 세력의 대립을 가져왔다. 그들은 모두 일본 제국주의 구축(驅逐)을 목표로 했지만 복벽주의(復辟主義)·공화주의(共和主義)·공산주의(共産主義)·진보주의(進步主義) 계열 등 여러 정파로 나뉘어져 서로 다투는 상황으로까지 번졌다. 참의부의 초대 참의장인 백광운(白狂雲)은 이들 파벌간에 벌어진 맹렬한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환인현 이구(里溝)에 있던 두 정파는 아예 길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참혹한 살육극을 벌였다. 신숙(申肅)·배천택(裵天澤) 같은 독립운동을 우선시하는 애국지사들은 이런 비참한 현실에 아픔을 느껴 파벌 싸움을 중지하라고 호소했다.
이때 양세봉(梁世奉)은 참의부 소속 의용군의 제3중대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그의 중대 병력은 화전현(樺甸縣)에 주둔하고 있었다.
화전현에는 참의부가 설립한 화전의숙(樺甸義塾)이 있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조선인 학교로, 청년들에게 중국어와 조선사를 가르쳤고,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고 배출했다. 당시 70여명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 양세봉과 그의 중대가 맡은 주요 임무는 이 학교를 보호하고 동시에 친일 단체나 비적들과 싸우는 것이었다.
1925년 3월 16일 참의부의 간부들은 참의장 최석순(崔碩淳)의 주재로 집안현(輯安縣) 고마령(古馬嶺)에서 군사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이 정보가 새어 나가는 바람에 연담주재소장(蓮潭駐在所長) 미즈노[水野寶三郎]가 65명의 경찰대와 120명의 초산 수비대를 인솔하여 만포에서 출동, 신속하게 강을 건너 참의부의 간부들을 포위했다.
일본 군경은 보초병들을 죽이고 독립군 지휘관들을 습격했다. 최석순은 김창빈(金昌彬)과 양세봉에게 각자 부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박응백(朴應伯)·채상덕(蔡相悳)·최항신(崔恒信) 등과 함께 권총(拳銃)으로 사격하면서 대항하였다. 전투는 네 시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됐는데, 일본 군경이 박격포(迫擊砲)로 독립군 진영을 공격하자 회의장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최석순은 부하들과 함께 완강히 저항하며 다른 대원들의 퇴각을 엄호했지만, 끝내 탄약이 떨어져 40여명의 장병과 더불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양세봉의 중대는 일단 숲속으로 몸을 피했다가 최석순을 구하려 했으나, 다른 쪽 언덕에서 또 적군이 돌격해 오는 것을 발견하고 산봉우리를 먼저 점령하기로 하였다. 양세봉은 대원들을 거느리고 필사적인 총격전(銃擊戰)을 펼치며 진격한 끝에 마침내 고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적군이 양쪽에서 산을 향해 공격해 오는데, 포탄 연기가 자욱하고 공격하는 총성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듣고는, 이미 적군이 독립군 진영 가까이 이른 것으로 생각하고 최석순을 비롯한 전우들을 구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대원들을 거느리고 적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밤새 길을 열어 날이 밝을 즈음에서야 어딘지도 모를 숲 속에서 쉴 수 있었다.
동북 지역의 3월 아침은 아직 추웠다. 찌푸린 하늘에서는 눈까지 내렸다. 허기와 피로에 지친 대원들이 나무 밑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대원들을 바라보는 양세봉은 마음이 아팠다. 그는 잠들지 않은 한 소대장과 함께 맨손으로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불을 지피고 낙엽을 대원들의 몸에 덮어 내리는 눈발을 막아 주었다.
날이 밝자 깨어난 대원들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몸을 녹였다. 배고픈 대원들은 나무껍질을 벗겨다 손잡이가 달린 도시락에 넣고 끓여 먹었다. 피곤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양세봉은 나이 어린 대원에게 노래를 시켰다.
그 대원은 낮은 목소리로〈그리운 고향〉이란 노래를 불렀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 있는내 마음 한없이 쓸쓸해 홀로 여기에 앉아 있어요. 과거를 회상하는 이 애달픈 마음 아, 그 누가 나를 위로해 주랴.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께서 눈물 흘리며 당부하셨거늘 잘 갔다 잘 돌아오라고. 어머니의 부탁 말씀 아, 언제나 귓가에 생생하구나."
이어 양세봉은 다 같이 씩씩한 행진가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백두산 산봉우리 붉은 기 휘날린다. 두만강 강변에 돌격 소리 하늘을 진동하네!
10년간 칼날이 번쩍이네. 자유의 종소리,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 그립구나.
잇닿은 바다 대지 초원이여, 우리 소리 높이 침략자를 타도하자 외치며 말 타고 번개같이 강을 넘어 앞으로 달리자!
조국 광복 만만세!"
노랫소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 노랫소리에 힘을 얻은 대원들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다시 행군하기 시작했다.
3일 후, 양세봉은 다시 중대를 이끌고 고마령으로 돌아와 희생당한 동지들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리고 모든 전사자들에게 일일이 절하며 애도를 표했다.
정의부·참의부·신민부가 대립하고 서로 다투는 틈을 타서 일본군은 무차별로 공격해왔고, 이 바람에 3부는 모두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3.독립군에 입대하다 ⑹
★ 고마령전투(古馬嶺戰鬪)에서의 안타까운 패배
1924년 11월 25일, 남만주의 8개 독립운동 단체가 회의를 열고 모든 단체를 하나로 합쳐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1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필두로 남만주의 모든 단체가 해산을 선언하고 정의부에 흡수되었다. 정의부의 간부진은 중앙집행위원장에 이탁(李鐸), 군사위원장에 이청천(李靑天), 외교위원장에 김동삼(金東三), 생계위원장에 오동진(吳東振), 재정위원장에 김이대(金履大) 등으로 구성되었다.
1925년 3월, 북만주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비롯한 10개 단체도 합병하여 신민부(新民府)가 출범하였다.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金赫)이 선출되었고, 군사위원장에 김좌진(金佐鎭), 외교위원장에 조성환(曺成煥), 보안대장에 박두희(朴斗熙) 등이 각각 선임되는 등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에 참전했던 인물들이 주로 가담하였다.
이로써 동북 지역의 조선인 반일 단체는 합병을 거쳐 크게 3개 부, 즉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로 재편되었고, 이는 세 세력의 대립을 가져왔다. 그들은 모두 일본 제국주의 구축(驅逐)을 목표로 했지만 복벽주의(復辟主義)·공화주의(共和主義)·공산주의(共産主義)·진보주의(進步主義) 계열 등 여러 정파로 나뉘어져 서로 다투는 상황으로까지 번졌다. 참의부의 초대 참의장인 백광운(白狂雲)은 이들 파벌간에 벌어진 맹렬한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환인현 이구(里溝)에 있던 두 정파는 아예 길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참혹한 살육극을 벌였다. 신숙(申肅)·배천택(裵天澤) 같은 독립운동을 우선시하는 애국지사들은 이런 비참한 현실에 아픔을 느껴 파벌 싸움을 중지하라고 호소했다.
이때 양세봉(梁世奉)은 참의부 소속 의용군의 제3중대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그의 중대 병력은 화전현(樺甸縣)에 주둔하고 있었다.
화전현에는 참의부가 설립한 화전의숙(樺甸義塾)이 있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조선인 학교로, 청년들에게 중국어와 조선사를 가르쳤고,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고 배출했다. 당시 70여명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 양세봉과 그의 중대가 맡은 주요 임무는 이 학교를 보호하고 동시에 친일 단체나 비적들과 싸우는 것이었다.
1925년 3월 16일 참의부의 간부들은 참의장 최석순(崔碩淳)의 주재로 집안현(輯安縣) 고마령(古馬嶺)에서 군사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이 정보가 새어 나가는 바람에 연담주재소장(蓮潭駐在所長) 미즈노[水野寶三郎]가 65명의 경찰대와 120명의 초산 수비대를 인솔하여 만포에서 출동, 신속하게 강을 건너 참의부의 간부들을 포위했다.
일본 군경은 보초병들을 죽이고 독립군 지휘관들을 습격했다. 최석순은 김창빈(金昌彬)과 양세봉에게 각자 부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박응백(朴應伯)·채상덕(蔡相悳)·최항신(崔恒信) 등과 함께 권총(拳銃)으로 사격하면서 대항하였다. 전투는 네 시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됐는데, 일본 군경이 박격포(迫擊砲)로 독립군 진영을 공격하자 회의장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최석순은 부하들과 함께 완강히 저항하며 다른 대원들의 퇴각을 엄호했지만, 끝내 탄약이 떨어져 40여명의 장병과 더불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양세봉의 중대는 일단 숲속으로 몸을 피했다가 최석순을 구하려 했으나, 다른 쪽 언덕에서 또 적군이 돌격해 오는 것을 발견하고 산봉우리를 먼저 점령하기로 하였다. 양세봉은 대원들을 거느리고 필사적인 총격전(銃擊戰)을 펼치며 진격한 끝에 마침내 고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적군이 양쪽에서 산을 향해 공격해 오는데, 포탄 연기가 자욱하고 공격하는 총성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듣고는, 이미 적군이 독립군 진영 가까이 이른 것으로 생각하고 최석순을 비롯한 전우들을 구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대원들을 거느리고 적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밤새 길을 열어 날이 밝을 즈음에서야 어딘지도 모를 숲 속에서 쉴 수 있었다.
동북 지역의 3월 아침은 아직 추웠다. 찌푸린 하늘에서는 눈까지 내렸다. 허기와 피로에 지친 대원들이 나무 밑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대원들을 바라보는 양세봉은 마음이 아팠다. 그는 잠들지 않은 한 소대장과 함께 맨손으로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불을 지피고 낙엽을 대원들의 몸에 덮어 내리는 눈발을 막아 주었다.
날이 밝자 깨어난 대원들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몸을 녹였다. 배고픈 대원들은 나무껍질을 벗겨다 손잡이가 달린 도시락에 넣고 끓여 먹었다. 피곤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양세봉은 나이 어린 대원에게 노래를 시켰다.
그 대원은 낮은 목소리로〈그리운 고향〉이란 노래를 불렀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 있는내 마음 한없이 쓸쓸해 홀로 여기에 앉아 있어요. 과거를 회상하는 이 애달픈 마음 아, 그 누가 나를 위로해 주랴.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께서 눈물 흘리며 당부하셨거늘 잘 갔다 잘 돌아오라고. 어머니의 부탁 말씀 아, 언제나 귓가에 생생하구나."
이어 양세봉은 다 같이 씩씩한 행진가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백두산 산봉우리 붉은 기 휘날린다. 두만강 강변에 돌격 소리 하늘을 진동하네!
10년간 칼날이 번쩍이네. 자유의 종소리,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 그립구나.
잇닿은 바다 대지 초원이여, 우리 소리 높이 침략자를 타도하자 외치며 말 타고 번개같이 강을 넘어 앞으로 달리자!
조국 광복 만만세!"
노랫소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 노랫소리에 힘을 얻은 대원들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다시 행군하기 시작했다.
3일 후, 양세봉은 다시 중대를 이끌고 고마령으로 돌아와 희생당한 동지들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리고 모든 전사자들에게 일일이 절하며 애도를 표했다.
정의부·참의부·신민부가 대립하고 서로 다투는 틈을 타서 일본군은 무차별로 공격해왔고, 이 바람에 3부는 모두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