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읽고 싶으시다면, 친구가 하는 지나가는 말 정도로 생각하고 편안하게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항에 관하여서는 ‘알고도 바르게 되지 않는 것’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옳은 말인줄 알면서도, 그것에 대한 말을 듣게 되면, 듣기가 싫고, 상당히 거북해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기도 합니다.
아주 가까운 예로는, ‘예수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예수 믿으세요” 하면, 진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상대를 향한 증오심이 일어나면서 그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이 있지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엔 자신이 알고도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서는, 그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는 식으로 그 잘못을 스스로 작게 여기고 합리화 시키기도 하지요.
약간 먼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굉장하게 선한 일을 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늘 선한 일을 했는데, 그 날 따라 속이 좋지 않았죠. 아뿔싸, 그 남자는 거리를 걷다가 아주 강한 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와 함께 좋은 일을 하러 가던 친구가 말하길, “오오, 이런! 대기오염에 일조하다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웃었죠.
그런데 그 옆에, 옆에, 있던 어떤 정신병자가 “이런! 대기오염에 일조한 자는 대기오염의 주범이다! 그러므로 죽어야햇!” 하면서 햇쌀을 한 움큼 삼키고, 재빨리 칼로 찔러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그 남자나, 그 친구나, 둘 다 행하고 있는 선한 일은 참 좋은 일이고, 칭찬 받을 만한 일이지요. 게다가, 방귀를 뀐 것이 그들이 행하고 있는 선한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이지만, 대기오염에 아주 전혀 일조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긴 하죠. 하지만, 역시나 그 방귀를 가리켜서 ‘대기오염에 일조하다니! 대기오염의 주범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분노에 관하여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는 아니지만, 야훼. 여호와.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던 그 신.
하나님을 통하여서는 굉장한 분노와 진노와 그 진노와 분노로 말미암은 형벌, 진멸함, 멸망시킴, 징계의 역사들을 관찰할 수가 있지요.
아주 먼 미래가 되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이 모여서 다시 만들게 된 국가라는 사실조차도 부인하고자 하는 자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구약성서는 엄밀히 말해서 사실 역사를 기초로 한 사실들이지요. 오히려, 역사 속에서 더 가까이 그 백성들과 소통하신 신의 말씀들을 관찰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문서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자손들이 오늘날까지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변하지 않죠. 아무리 어떤 사람이 백번 천번을 ‘이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외치거나, (가령 말의 힘을 이용한다고 하죠) ‘이건 반대로 되고 말거야! 바뀔거야!’ 라고 외친다고 할지라도, (가령 믿음의 힘을 사용한다거나) 그 사실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고, 번영할 것이라는 진실이지요.
성경을 보시면, ‘이삭’의 자손은 오늘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 신약성서에 의하여 보면 말입니다!
(- 이럴 수도 있겠죠. 신약성서가 구약성서과 관계없는 이단 사설이라고 가정할 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삭의 자손은 사실은 크리스챤은 아니라든가, 크리스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든가...그렇다면 누구들일까요?)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2-26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서 4:28-31
또, 그렇다면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누구들입니까?
메카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사람들이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인들 입니다. 무슬림이지요.
이 글을 기독교에 관하여서 아시는 사람이 읽는다면,
무슬림에 대하여서도 알도록 몇 가지 설명을 드리죠.
이슬람은,
1.구약성서와 코란을 믿습니다.
2.신약성서도 믿지만, 코란과 배치되는 부분은 인간의 변경한 기록이라고 믿습니다.
3.예수님의 성령으로 잉태됨을 믿습니다.
4.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날 거짓 그리스도를 죽이고 돼지들을 멸할 것을 믿습니다.
5.예수님을 포함하여서 여러 선지자들, 예언자들을 동등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 자들로서 믿습니다.
6.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졌고, 하나님께서는 실제론 예수를 끌어올려 그 고통가운데서 구원하셨다고 믿습니다.
7.삼위일체는 부인하며,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8.잘 아시겠지만, 하루에 다섯 번 예배하며, 라마단이라는 금식 기간을 갖고, 몇 가지 실제 삶 속에 제한을 두는 규칙들이 있습니다.
이슬람에 관한 얘길 잠깐 접어두고...
군대와 관련된 한국인의 ‘품성’에 관하여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워낙 고생을 많이 하죠. 철저한 복종정신을 가르치고 배우지요.
그럼으로서, 그 안에서, “불종시 겪게 되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육체가 원치 않더라도, 위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행하는 것’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 복종”과 비슷한 부분의 ‘내면으로부터의 정신적 견고함’을 갖추는 면모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권위, 권세에 대한 복종의 정신은, 역시나, 칼빈주의를 포함한 성경이 말씀하는 옳은 정신과 일치하는 면이 많습니다.
반면, “군대”라는 요소를 인류 역사의 관점에서 봤을 땐, 하나님의 “진노”의 요소를 시행하는 단체로 볼 수가 있지요. 전쟁하고, 사람을 죽이고, 무력으로 질서를 지키는 일을 합니다.
이는, “분노”의 요소에만 집중된 부분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전체적인 어떤 성품이나 공의, 의에 대한 감각들과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인지들 범위 가운데서 말입니다...진노와 형벌, 합당한 보응, 진노함에 대한 것과만 관련이 깊은 것이 “군인”의 위치에서 겪을 수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호와 증인들은 집총거부 = 총을 들지 않습니다 합니다.
그들은 1년 6개월의 형집행을 받거나 2년의 형집행을 받음으로서 군대 생활을 대신 합니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군대에서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중대장님께 찾아가서, “제가 참으로 오래도록 많이 생각했습니다만, 이대로 있다가는 자살할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군대라는 곳의 2년 기간 때문에 자살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군대생활을 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를 구속시켜주시고 군사재판받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리면, ‘죽지 않고 군 복무 기간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1년에 500명 정도가 군대에서 자살한다고 하던데, 자살하느니, 군사재판 받고 사회로 나오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작용이 있긴 한데, 3,4년형, 2년 몇 개월 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1년 몇 개월 2년형 받을 수도 있답니다.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군대에서 자살하지 마세요.
아무튼, 여호와 증인들은 군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그룹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철저하게 배타적이며 오로지 계시된 성서와 교리와 여러 전통과 유전과 같은 기존의 철저한 교육된 이치들을 지키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을 이단으로 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군 생활을 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면,
그들의 그 신앙심과, 그 내면의 동기, 이유에 관하여서 집중하고 배울만한 가치가 분명히 존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굉장하게 염두에 두고서 생각해볼 만한 요소가 분명코 있을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군의 일방적인 대 북한에 대한 교육은 가려서 듣고 생각을 다시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의 부분과, “공의”의 부분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부분, 그리고 “사랑의 가치”에 ‘복종하는 일’의 고귀함에 관하여서 집중할만한 가치를 발견하려면 말입니다. 상당히 생각해볼만한 일이지 않습니까?
아무튼, 다시 아브라함의 이스마엘의 자손들,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들에 관하여서 생각해 봅시다.
원수 마귀 사단 깨뜨려. 주여, 어둠의 세력들을 분쇄하여 주옵소서.
잘 아시겠지만, 하나님을 믿고, 우상숭배를 대적하는 무슬림들 가운데서, “지하드”라고 불리우는 성스러운 전쟁은 기독교국가라고 지칭되는 미국을 향한 테러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인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
그 백성들이 갖고 있는 의지와 움직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분노”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관하여서,
‘어떻게 그렇게 진멸해 버릴 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잔혹하게 살해해버릴수가 있는가?’ 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문서들을 읽고서 현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의지들이 무엇입니까?
악과의 단절입니다!
즉, 구약성서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분노에 관하여서 의구심을 품는 자들의 대부분은 그 내면에 “악을 버리고자 하는 의지”나 “악과 완전 단절하는 양심을 소유하는 생활”에 관한 순종의 인격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자손,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사람들 무슬림들의 “지하드”활동들 속에서도 사실은 ‘하나님의 악을 향한 진노와 형벌’의 정신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잘못을 다룰 때,
첫 번째, 현대 사회 속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잘못하였고, 어떻게 벌을 받아야 하며, 그 잘못에 대한 벌을 감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고, 혹은 감할 길은 없으며 이러저러한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라고 가르쳐줍니다. 즉, 이성으로 합리적인 이유를 기초로 하여서 죄에 대한 보응을 하고 규칙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 어떤 경우엔, 그것에 관하여서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돌진하여 멸하여 버린다든가 아무런 경고 없이 괴롭게 하거나 고통이나 아픔을 주도록 하기도 하지요. 이런 경우, “말” 자체로서, ‘논리’ 자체로서 “효과”가 나지 않는 자들에게, “징벌”의 “효과=죄를 씻겨버림”를 확실하게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한편으론, ‘오해로 말미암은 애매한 박대’가 될 수도 있다는 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중요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멸하여 버리심”이 뜻하신 바라면, 그것들을 멸하심이 합당하지요.
아니면, “그 죄에 관하여서 개의치 않듯 놔두시되 그들의 뜻을 이루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결단코 어떤 죄를 제거하여 버리리라”라는 것을 뜻하신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뜻은 이루시겠지요.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서 옛 선지자들은 자주 그러한 말씀들을 선포하였습니다.
세 번째, 또 어떤 경우엔,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고, 당신도 용서 하신다”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도록 하라” 뿐만 아니라, “죄를 범치 않도록 돕는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자손들의 행동 방식의 대부분은 그 중심 내면으로부터 세 번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국내해외 선교로 유명한 대형교회 담임 목회자이며 수많은 흥행서적을 출간한 어느 목사님께서 K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었죠. “힘들수록 더 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향성”의 가치, 이 가치에 사람이 ‘복종케 되도록’ 상대를 ‘계속 밟는 것’이 옳다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가치” 아래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복종시키는 ‘계속 밟아’나아감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지요.
상대를 향하여서 어떤 '반응' '응답'을 내는 것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내면에 쌓은 것들을 전달하는 효과가 있지요. 그것이 사랑이든 분냄이든, 자신의 내면의 가치가 상대에게 전달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 가운데서, "밟을만한 수준이 되지 않는 상태"일때, 상대를 밟게 될 경우, 악행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일조도 내지 않고, 실제적인 봉사의 열매도 없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 자가,
어떤 이유로 인하여서 상대를 향하여서 분낼 경우, 그 상대가 분내는 자보다 더 깊고 온전한 가치를
추구하는 내면의 열매와 심령의 온전함이 있다면, 이를 찢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을 더 잘 알지 아니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잘 아는 사람 위에 굴복케 하려 올라서는 일은 아주 어리석은 사태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권위를 갖는 것이 모든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질서와 온전함에 가깝게 되는 선한 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볼 때,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을 포함한 이슬람 세력의 ‘지하드’는 두 번째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역시나, 보통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은 일이라고 여기는 기본은,
“내 자신이 테러로 희생당하는 사람의 위치라면?”
“내 자신이 죄인으로서 형벌 받아야 하는 위치라면?”
“내 자신이 죽을 죄에 걸려 버린 위치라면?” 이라고 한다면, 역시나
세 번째를 원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비난’하는 것은 상당히 다시 생각해봐야하는 일입니다.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맺으려 합니다.
잡념의 결론이지요.
다들 용서받아야 하고, 다들 똑같은 인간이며, 다 같은 죄인이고, 예수님의 은혜로서, 신의 은총으로서 용서되어야 하고, 감사해야하고 감싸줘야 한다고 말하며 그렇게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도 나도 그들도 누구들도 다 감싸주고 허물을 덮어주죠.
그 누구라도 말입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리건데, 그 누구라도 이러한 사람들 곁에 있다면 굉장하게 HAPPY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사랑의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똑바른 기준”을 갖고서 그 잣대에 합당하게 행동해야만 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합당한 형벌을, 그것을 잘 지키는 자들에게 그만한 보상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어느 정도의 적당한 선을 두고서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합당한 형벌을, 어느 정도 용서받을만하면 감싸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아마도 이 사람들 곁에서는 한시라도 긴장을 늦추기 어려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라면 지적받고 정죄당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을 “율법주의자”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겐 “사랑의 사람들”로서 대하고, 남에겐 “율법주의자”로서 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이들은 ‘어떤 부류’에겐 “사랑의 사람들”이 되고, ‘어떤 부류’에겐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또 때로 이들은 ‘어떤 땐’ ‘율법주의자’가 되고 ‘어떤 땐’ ‘사랑의 사람들’이 됩니다.
이들을 쉬운 말로 “미친 새끼”, 유식한 언어로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잠깐 스친 생각인데,
여자를 하나 잡습니다. 그리고 밀실&방음 지하실에 가둡니다.
아침을 한 그릇 주고, 십 분간 쉬게 한 다음, 바지를 벗고, 츄리닝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밟고 할퀴고 내동댕이 칩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때리고, 저녁 때 한 그릇을 주고, 다시 밤까지 때립니다.
죽으면 절대 안 됩니다. 죽지는 않게 하되, 가차 없이 때립니다.
오물과 구토물은 그대로 그 자리에 배설 구토하도록 둡니다. 그곳서 맞으며 구르게 합니다.
그렇게 때리되 때리는 이유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침까지 그대로 둡니다.
또 아침에 한그릇 주고 때리고, 저녁까지, 밤까지 합니다. 그렇게 일년을 지속하고,
이년을 더 합니다. 그리고 전혀 어떤 가해자와 가해 위치에 대한 기억도 모르도록 한적한 어느 곳에 버려서 놓아줍니다.
아아, 폭력적인 부분들을 버릴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언어의 두 사람 사이의 소통성을 넘어선, 여러 사람들 안의 ‘알림기능’에 대하여서 생각해 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미친 새끼’라고 하면 “못된 남자”로 보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미친 새끼’라고 하면 열의 아홉은 “남자가 변태?”로 생각하죠.
맘에 둔 여자가 있는데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감히 내가 접근을 못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이가 비교적 많은 사람들”은
‘센스’가 없습니다... 아무리 편안하게 느껴진다거나 괜찮다고 생각되더라도, 실제로,
어느 정도 거리가 느껴지고, 멀리하게 됩니다. 가까이 너무 오래 있으면 좀 불편하죠.
하물며, ‘나이’가 좀 있는 측이, ‘나이 어린 측’을 향해서 “억압”에 대한 ‘믿음’을 갖고 대하면 상당히 싫습니다. 내가 알게 모르게 그랬던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 미안합니다...
잠시, ‘정신’을 두는 것에 관한 나름의 생각인데요.
우리 옛 세대들은 보통 ‘윗사람’ ‘부모’ ‘윗대 분들’에게 “예속” “예의를 지킴”을 통하여서
‘정신’을 ‘올곧게 유지하고 양심을 지키는 편’에 익숙한 것 같습니다.
이는 성경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존재 아래 ‘예속’하는 정신은,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가치’에 관한 것에도 그렇고, 여러 사회 속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에겐 -이만큼의 깊이의 관계를 두고 간섭해야 하지만, 어떤 이에겐 ---------------------------이만큼의 깊이의 관계를 두고 간섭해야 하기도 하죠.
또 여러 상황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의도나 생각’들이 여러 가지로 ‘사람’의 한계 아래 ‘예속’된 정신으로서는 부족한 면이 많지요.
제가 아는 것이 맞다면, 서양의 사고방식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우정’과 비슷한 감성으로 하나되는 것이지요. “친구”와도 같은 관계 안에서 어느 정도의 ‘자유’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 물론 느끼기에도 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사람’을 섬기는 것과 관련하여서 생각해 볼 때도,
‘사람’도 같은 한 “하나님”을 섬기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서 생각해 볼때,
우리의 동양식 개념들은 “진정으로 옳은, 좋은, 더 나은” 정신을 위한 ‘자유’에 속박의 부분이 없지 않나 합니다.
아, 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아주 호되게 맞곤 했습니다.
고교땐 골프채와 야구방망이로 수차례 맞았는데, 내가 생각할 땐 그건 풀스윙이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나는 나의 아버지를 가장 사랑합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굉장하게 사랑합니다. 지금도 너무나 사랑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존경합니다.
이 존경의 크기는 아주, 아주 굉장하게 큰 존경입니다.
지금 나의 아버지는 흰머리도 꽤나 있으시고, 난 결혼할 나이입니다.
이 “분노” “진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을 안 느껴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만은,
이런 “분노, 진노안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데도 어느 정도 에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노에 대한 잡념들
이 글은 서툴, 서툴, 콩닥, 콩닥 한 것입니다.
만일 읽고 싶으시다면, 친구가 하는 지나가는 말 정도로 생각하고 편안하게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항에 관하여서는 ‘알고도 바르게 되지 않는 것’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옳은 말인줄 알면서도, 그것에 대한 말을 듣게 되면, 듣기가 싫고, 상당히 거북해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기도 합니다.
아주 가까운 예로는, ‘예수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예수 믿으세요” 하면, 진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상대를 향한 증오심이 일어나면서 그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이 있지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엔 자신이 알고도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서는, 그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는 식으로 그 잘못을 스스로 작게 여기고 합리화 시키기도 하지요.
약간 먼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굉장하게 선한 일을 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늘 선한 일을 했는데, 그 날 따라 속이 좋지 않았죠. 아뿔싸, 그 남자는 거리를 걷다가 아주 강한 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와 함께 좋은 일을 하러 가던 친구가 말하길, “오오, 이런! 대기오염에 일조하다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웃었죠.
그런데 그 옆에, 옆에, 있던 어떤 정신병자가 “이런! 대기오염에 일조한 자는 대기오염의 주범이다! 그러므로 죽어야햇!” 하면서 햇쌀을 한 움큼 삼키고, 재빨리 칼로 찔러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그 남자나, 그 친구나, 둘 다 행하고 있는 선한 일은 참 좋은 일이고, 칭찬 받을 만한 일이지요. 게다가, 방귀를 뀐 것이 그들이 행하고 있는 선한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이지만, 대기오염에 아주 전혀 일조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긴 하죠. 하지만, 역시나 그 방귀를 가리켜서 ‘대기오염에 일조하다니! 대기오염의 주범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분노에 관하여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는 아니지만, 야훼. 여호와.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던 그 신.
하나님을 통하여서는 굉장한 분노와 진노와 그 진노와 분노로 말미암은 형벌, 진멸함, 멸망시킴, 징계의 역사들을 관찰할 수가 있지요.
아주 먼 미래가 되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이 모여서 다시 만들게 된 국가라는 사실조차도 부인하고자 하는 자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구약성서는 엄밀히 말해서 사실 역사를 기초로 한 사실들이지요. 오히려, 역사 속에서 더 가까이 그 백성들과 소통하신 신의 말씀들을 관찰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문서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자손들이 오늘날까지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변하지 않죠. 아무리 어떤 사람이 백번 천번을 ‘이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외치거나, (가령 말의 힘을 이용한다고 하죠) ‘이건 반대로 되고 말거야! 바뀔거야!’ 라고 외친다고 할지라도, (가령 믿음의 힘을 사용한다거나) 그 사실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고, 번영할 것이라는 진실이지요.
성경을 보시면, ‘이삭’의 자손은 오늘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 신약성서에 의하여 보면 말입니다!
(- 이럴 수도 있겠죠. 신약성서가 구약성서과 관계없는 이단 사설이라고 가정할 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삭의 자손은 사실은 크리스챤은 아니라든가, 크리스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든가...그렇다면 누구들일까요?)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2-26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서 4:28-31
또, 그렇다면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누구들입니까?
메카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사람들이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인들 입니다. 무슬림이지요.
이 글을 기독교에 관하여서 아시는 사람이 읽는다면,
무슬림에 대하여서도 알도록 몇 가지 설명을 드리죠.
이슬람은,
1.구약성서와 코란을 믿습니다.
2.신약성서도 믿지만, 코란과 배치되는 부분은 인간의 변경한 기록이라고 믿습니다.
3.예수님의 성령으로 잉태됨을 믿습니다.
4.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날 거짓 그리스도를 죽이고 돼지들을 멸할 것을 믿습니다.
5.예수님을 포함하여서 여러 선지자들, 예언자들을 동등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 자들로서 믿습니다.
6.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졌고, 하나님께서는 실제론 예수를 끌어올려 그 고통가운데서 구원하셨다고 믿습니다.
7.삼위일체는 부인하며,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8.잘 아시겠지만, 하루에 다섯 번 예배하며, 라마단이라는 금식 기간을 갖고, 몇 가지 실제 삶 속에 제한을 두는 규칙들이 있습니다.
이슬람에 관한 얘길 잠깐 접어두고...
군대와 관련된 한국인의 ‘품성’에 관하여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워낙 고생을 많이 하죠. 철저한 복종정신을 가르치고 배우지요.
그럼으로서, 그 안에서, “불종시 겪게 되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육체가 원치 않더라도, 위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행하는 것’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 복종”과 비슷한 부분의 ‘내면으로부터의 정신적 견고함’을 갖추는 면모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권위, 권세에 대한 복종의 정신은, 역시나, 칼빈주의를 포함한 성경이 말씀하는 옳은 정신과 일치하는 면이 많습니다.
반면, “군대”라는 요소를 인류 역사의 관점에서 봤을 땐, 하나님의 “진노”의 요소를 시행하는 단체로 볼 수가 있지요. 전쟁하고, 사람을 죽이고, 무력으로 질서를 지키는 일을 합니다.
이는, “분노”의 요소에만 집중된 부분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전체적인 어떤 성품이나 공의, 의에 대한 감각들과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인지들 범위 가운데서 말입니다...진노와 형벌, 합당한 보응, 진노함에 대한 것과만 관련이 깊은 것이 “군인”의 위치에서 겪을 수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호와 증인들은 집총거부 = 총을 들지 않습니다 합니다.
그들은 1년 6개월의 형집행을 받거나 2년의 형집행을 받음으로서 군대 생활을 대신 합니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군대에서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중대장님께 찾아가서, “제가 참으로 오래도록 많이 생각했습니다만, 이대로 있다가는 자살할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군대라는 곳의 2년 기간 때문에 자살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군대생활을 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를 구속시켜주시고 군사재판받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리면, ‘죽지 않고 군 복무 기간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1년에 500명 정도가 군대에서 자살한다고 하던데, 자살하느니, 군사재판 받고 사회로 나오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작용이 있긴 한데, 3,4년형, 2년 몇 개월 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1년 몇 개월 2년형 받을 수도 있답니다.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군대에서 자살하지 마세요.
아무튼, 여호와 증인들은 군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그룹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철저하게 배타적이며 오로지 계시된 성서와 교리와 여러 전통과 유전과 같은 기존의 철저한 교육된 이치들을 지키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을 이단으로 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군 생활을 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면,
그들의 그 신앙심과, 그 내면의 동기, 이유에 관하여서 집중하고 배울만한 가치가 분명히 존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굉장하게 염두에 두고서 생각해볼 만한 요소가 분명코 있을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군의 일방적인 대 북한에 대한 교육은 가려서 듣고 생각을 다시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의 부분과, “공의”의 부분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부분, 그리고 “사랑의 가치”에 ‘복종하는 일’의 고귀함에 관하여서 집중할만한 가치를 발견하려면 말입니다. 상당히 생각해볼만한 일이지 않습니까?
아무튼, 다시 아브라함의 이스마엘의 자손들,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들에 관하여서 생각해 봅시다.
원수 마귀 사단 깨뜨려. 주여, 어둠의 세력들을 분쇄하여 주옵소서.
잘 아시겠지만, 하나님을 믿고, 우상숭배를 대적하는 무슬림들 가운데서, “지하드”라고 불리우는 성스러운 전쟁은 기독교국가라고 지칭되는 미국을 향한 테러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인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
그 백성들이 갖고 있는 의지와 움직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분노”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관하여서,
‘어떻게 그렇게 진멸해 버릴 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잔혹하게 살해해버릴수가 있는가?’ 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문서들을 읽고서 현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의지들이 무엇입니까?
악과의 단절입니다!
즉, 구약성서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분노에 관하여서 의구심을 품는 자들의 대부분은 그 내면에 “악을 버리고자 하는 의지”나 “악과 완전 단절하는 양심을 소유하는 생활”에 관한 순종의 인격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자손,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사람들 무슬림들의 “지하드”활동들 속에서도 사실은 ‘하나님의 악을 향한 진노와 형벌’의 정신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잘못을 다룰 때,
첫 번째, 현대 사회 속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잘못하였고, 어떻게 벌을 받아야 하며, 그 잘못에 대한 벌을 감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고, 혹은 감할 길은 없으며 이러저러한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라고 가르쳐줍니다. 즉, 이성으로 합리적인 이유를 기초로 하여서 죄에 대한 보응을 하고 규칙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 어떤 경우엔, 그것에 관하여서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돌진하여 멸하여 버린다든가 아무런 경고 없이 괴롭게 하거나 고통이나 아픔을 주도록 하기도 하지요. 이런 경우, “말” 자체로서, ‘논리’ 자체로서 “효과”가 나지 않는 자들에게, “징벌”의 “효과=죄를 씻겨버림”를 확실하게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한편으론, ‘오해로 말미암은 애매한 박대’가 될 수도 있다는 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중요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멸하여 버리심”이 뜻하신 바라면, 그것들을 멸하심이 합당하지요.
아니면, “그 죄에 관하여서 개의치 않듯 놔두시되 그들의 뜻을 이루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결단코 어떤 죄를 제거하여 버리리라”라는 것을 뜻하신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뜻은 이루시겠지요.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서 옛 선지자들은 자주 그러한 말씀들을 선포하였습니다.
세 번째, 또 어떤 경우엔,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고, 당신도 용서 하신다”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도록 하라” 뿐만 아니라, “죄를 범치 않도록 돕는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자손들의 행동 방식의 대부분은 그 중심 내면으로부터 세 번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국내해외 선교로 유명한 대형교회 담임 목회자이며 수많은 흥행서적을 출간한 어느 목사님께서 K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었죠. “힘들수록 더 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향성”의 가치, 이 가치에 사람이 ‘복종케 되도록’ 상대를 ‘계속 밟는 것’이 옳다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가치” 아래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복종시키는 ‘계속 밟아’나아감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지요.
상대를 향하여서 어떤 '반응' '응답'을 내는 것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내면에 쌓은 것들을 전달하는 효과가 있지요. 그것이 사랑이든 분냄이든, 자신의 내면의 가치가 상대에게 전달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 가운데서, "밟을만한 수준이 되지 않는 상태"일때, 상대를 밟게 될 경우, 악행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일조도 내지 않고, 실제적인 봉사의 열매도 없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 자가,
어떤 이유로 인하여서 상대를 향하여서 분낼 경우, 그 상대가 분내는 자보다 더 깊고 온전한 가치를
추구하는 내면의 열매와 심령의 온전함이 있다면, 이를 찢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을 더 잘 알지 아니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잘 아는 사람 위에 굴복케 하려 올라서는 일은 아주 어리석은 사태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권위를 갖는 것이 모든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질서와 온전함에 가깝게 되는 선한 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볼 때,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을 포함한 이슬람 세력의 ‘지하드’는 두 번째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역시나, 보통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은 일이라고 여기는 기본은,
“내 자신이 테러로 희생당하는 사람의 위치라면?”
“내 자신이 죄인으로서 형벌 받아야 하는 위치라면?”
“내 자신이 죽을 죄에 걸려 버린 위치라면?” 이라고 한다면, 역시나
세 번째를 원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비난’하는 것은 상당히 다시 생각해봐야하는 일입니다.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맺으려 합니다.
잡념의 결론이지요.
다들 용서받아야 하고, 다들 똑같은 인간이며, 다 같은 죄인이고, 예수님의 은혜로서, 신의 은총으로서 용서되어야 하고, 감사해야하고 감싸줘야 한다고 말하며 그렇게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도 나도 그들도 누구들도 다 감싸주고 허물을 덮어주죠.
그 누구라도 말입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리건데, 그 누구라도 이러한 사람들 곁에 있다면 굉장하게 HAPPY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사랑의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똑바른 기준”을 갖고서 그 잣대에 합당하게 행동해야만 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합당한 형벌을, 그것을 잘 지키는 자들에게 그만한 보상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렇게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어느 정도의 적당한 선을 두고서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합당한 형벌을, 어느 정도 용서받을만하면 감싸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아마도 이 사람들 곁에서는 한시라도 긴장을 늦추기 어려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라면 지적받고 정죄당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을 “율법주의자”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겐 “사랑의 사람들”로서 대하고, 남에겐 “율법주의자”로서 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이들은 ‘어떤 부류’에겐 “사랑의 사람들”이 되고, ‘어떤 부류’에겐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또 때로 이들은 ‘어떤 땐’ ‘율법주의자’가 되고 ‘어떤 땐’ ‘사랑의 사람들’이 됩니다.
이들을 쉬운 말로 “미친 새끼”, 유식한 언어로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잠깐 스친 생각인데,
여자를 하나 잡습니다. 그리고 밀실&방음 지하실에 가둡니다.
아침을 한 그릇 주고, 십 분간 쉬게 한 다음, 바지를 벗고, 츄리닝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밟고 할퀴고 내동댕이 칩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때리고, 저녁 때 한 그릇을 주고, 다시 밤까지 때립니다.
죽으면 절대 안 됩니다. 죽지는 않게 하되, 가차 없이 때립니다.
오물과 구토물은 그대로 그 자리에 배설 구토하도록 둡니다. 그곳서 맞으며 구르게 합니다.
그렇게 때리되 때리는 이유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침까지 그대로 둡니다.
또 아침에 한그릇 주고 때리고, 저녁까지, 밤까지 합니다. 그렇게 일년을 지속하고,
이년을 더 합니다. 그리고 전혀 어떤 가해자와 가해 위치에 대한 기억도 모르도록 한적한 어느 곳에 버려서 놓아줍니다.
아아, 폭력적인 부분들을 버릴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언어의 두 사람 사이의 소통성을 넘어선, 여러 사람들 안의 ‘알림기능’에 대하여서 생각해 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미친 새끼’라고 하면 “못된 남자”로 보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미친 새끼’라고 하면 열의 아홉은 “남자가 변태?”로 생각하죠.
맘에 둔 여자가 있는데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감히 내가 접근을 못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이가 비교적 많은 사람들”은
‘센스’가 없습니다... 아무리 편안하게 느껴진다거나 괜찮다고 생각되더라도, 실제로,
어느 정도 거리가 느껴지고, 멀리하게 됩니다. 가까이 너무 오래 있으면 좀 불편하죠.
하물며, ‘나이’가 좀 있는 측이, ‘나이 어린 측’을 향해서 “억압”에 대한 ‘믿음’을 갖고 대하면 상당히 싫습니다. 내가 알게 모르게 그랬던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 미안합니다...
잠시, ‘정신’을 두는 것에 관한 나름의 생각인데요.
우리 옛 세대들은 보통 ‘윗사람’ ‘부모’ ‘윗대 분들’에게 “예속” “예의를 지킴”을 통하여서
‘정신’을 ‘올곧게 유지하고 양심을 지키는 편’에 익숙한 것 같습니다.
이는 성경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존재 아래 ‘예속’하는 정신은,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가치’에 관한 것에도 그렇고, 여러 사회 속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에겐 -이만큼의 깊이의 관계를 두고 간섭해야 하지만, 어떤 이에겐 ---------------------------이만큼의 깊이의 관계를 두고 간섭해야 하기도 하죠.
또 여러 상황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의도나 생각’들이 여러 가지로 ‘사람’의 한계 아래 ‘예속’된 정신으로서는 부족한 면이 많지요.
제가 아는 것이 맞다면, 서양의 사고방식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우정’과 비슷한 감성으로 하나되는 것이지요. “친구”와도 같은 관계 안에서 어느 정도의 ‘자유’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 물론 느끼기에도 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사람’을 섬기는 것과 관련하여서 생각해 볼 때도,
‘사람’도 같은 한 “하나님”을 섬기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서 생각해 볼때,
우리의 동양식 개념들은 “진정으로 옳은, 좋은, 더 나은” 정신을 위한 ‘자유’에 속박의 부분이 없지 않나 합니다.
아, 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아주 호되게 맞곤 했습니다.
고교땐 골프채와 야구방망이로 수차례 맞았는데, 내가 생각할 땐 그건 풀스윙이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나는 나의 아버지를 가장 사랑합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굉장하게 사랑합니다. 지금도 너무나 사랑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존경합니다.
이 존경의 크기는 아주, 아주 굉장하게 큰 존경입니다.
지금 나의 아버지는 흰머리도 꽤나 있으시고, 난 결혼할 나이입니다.
이 “분노” “진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을 안 느껴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만은,
이런 “분노, 진노안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데도 어느 정도 에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사랑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분명코 차이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잡념인데...
제 자신에겐 중요한 많은 것이 담긴 것 같습니다.
혹시 당신에게도 중요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담겼다면 영광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