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판에 글 쓰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조금 겁이 나기도 한데...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또 알고 계셨으면 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이 길더라도 부디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의 수양산 아래에 위치한 광석동에서 안태훈 진사와 백천 조씨 사이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출생 하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안인수 공께서는 안중근 의사가 태어날 때 부터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았다고 하여 아명을 응칠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하는 것보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무예를 익히고 사냥 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일찍이부터 말을 타는 것과 활을 쏘는 것에 능통하셨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안인수 공께서는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보시고는 안중근 의사께서 다섯살이 되던 해에 진중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이름을 안중근으로 바꾸셨습니다.
1894. 안중근 의사가 16세가 되던 그 해 봄, 김홍섭 어른의 여식 규수 김아려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그 해 동학 농민 전쟁의 발발로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인 안인수 공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신전 위려군을 모집 하셨고 안중근 의사 역시 이에 동참하여 선봉장으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1906. 4. 안중근 의사는 청계동에서 전남포로 이사하여 삼흥 학교를 설립 하시고 돈의 학교를 인수하여 인재를 양성 하는데 힘 쓰셨습니다. 도산 안창호와 이준 같은 애국 지사들을 초빙하여 강연회를 열고 민중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에 나셨습니다.
그 해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분사하고 그로 인해 고종황제께서 퇴위를 당하시고 이토 히로부미는 무력으로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해산시켰습니다. 이로써 안중근 의사는 항일 의병 투쟁을 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을 떠나 만주를 거쳐 연해주에 이르러 의병투쟁을 시작하셨습니다.
1908. 그는 연해주 한인촌을 돌며 동의회 회원을 모집하였습니다. 강원도 의병장 출신의 김두성, 총대장에 이범윤,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 대장에 안중근. 이 세사람이 대장이 되어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홍의동 협곡에서 일본군 병사들과 전투를 벌여 첫 승을 거두었습니다.
한달 반 동안의 많은 일본군 병사들과의 교전 끝에 일본의 압력에 의한 러시아의 지시로 의병을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실패한 무장 투쟁이라며 자신을 자책하고 크게 낙담하였습니다.
1909. 2. 7 안중근 의사는 얀치헤에서 동지 11명과 단지 동맹을 맺었습니다.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그치기 위해, 의병 활동을 하다 먼저 죽은 동지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위해서였습니다.
"동지들, 우리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의병투쟁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소.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으니 좀 더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오. 소수정예의 힘으로 손가락을 끊어 '대한독립' 네 글자를 혈서로 쓰고, 3년 안에 나라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죽이지 못하면 자결합시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자엔아 김기룡,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강창두 등 11명이 일제히 찬성을 하였습니다.
1909. 10. 26 안중근 의사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권총을 꺼내어 이토 히로부미를 겨냥한 뒤 그를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안중근 의사 머뭇거리는 사이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가 되고 혼란한 틈에서도 "우라 코레아"를 연속 헤번을 외쳤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총상을 입은 뒤 30분도 되지 않아 절명하였습니다. 우라 코레아는 대한제국 만세를 뜻합니다.)
그날 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헌병 사령부 하얼빈 분견소에서 예비 심문을 받은 뒤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계 되었고 후에 여순 감옥서로 이송 되었습니다.
* 세모 표시가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위치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한 위치는 네모로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1910. 2. 7 오전 7시 미나베 재판장의 사실심리로 공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미조부치 검찰관이 공소 이유서를 낭독 하였습니다. 허나 안중근 의사는 그것을 부종 하였고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의 죄악을 열거하였습니다. 미나베 재판장은 경우에 따라 재판 공개를 중단 하겠다고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는 최후 진술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행적을 낱낱이 고발하고 부당하게 진행되는 재판을 지적하였습니다.
(미조부치 검찰관의 공소 이유서에서 안중근 의사의 진술이 왜곡되어 낭독 되었고, 국내 또는 국외 변호사 선임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방청객들은 크게 동요하고 해외 곳곳에서 온 기자들이 이 사건을 신문에 실었습니다.
* 영국의 신문 <더 그래픽>의 찰스 모리머 기자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라고 평했습니다.
1909. 2. 14 오전 10시 30분 미나베 재판장은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께선 "옳은 일을 하고 형을 받으면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마라. 대희를 위해 죽는 것이 나에 대한 효도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1910. 3. 26 안중근 의사 어머니께서 직접 명주로 지으신 검은색 바지와 흰 저고리, 두루마기를 입고 일체 저항 하지도 불안해 하지도 않고 형의 집행을 받아들이셨습니다.
* 여순 감옥서의 참관입니다. 사형수나 고문으로 죽은 죄수, 병사한 죄수를 묻을때 이 참관을 사용하였습니다. 길이가 1m밖에 되지 않아 시신이 구겨져서 들어가야 합니다.
- 일본 총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을때 한 진술
"범행의 동기는 무엇인가?"
"첫 번째 대한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대한제국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죄, 세 번째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네 번째 무고한 조선인을 학살한 죄, 다섯 번째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여섯 번째 철도와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탈취한 죄, 일곱 번째 제일은행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여덟 번째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한 죄, 아홉 번째 대한제국의 교육을 방해한 죄, 열 번째 조선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한 번째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열두 번째 조선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 싶어한다고 전세계에 거짓 선언한 죄, 열세 번째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조선이 태평무사하다고 천황에게 거짓말을 한 죄, 열네 번째 동양 평화를 깨트린 죄, 열다섯 번째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시해한 죄다."
- 동포에게 고하는 글
내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000만 동포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에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을 다할 것이다. 너희는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출처 - 이웃사이트, 안중근 불멸의 기억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재주가 그리 좋지 못하여 부족한 점도 많고 잘못된 점도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행여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편하게 숨을 쉬며 두다리 뻗고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바로 안중근 의사와 같은 우리 땅을 지키려 힘 써주시고 국권을 뺏기지 않으려 목숨까지 걸어가며 노력해주신 우리 선조들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포들에게 고하노라
안녕하세요. 저는 그저 어느 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여고생입니다.
수능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판에 글 쓰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조금 겁이 나기도 한데...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또 알고 계셨으면 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이 길더라도 부디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의 수양산 아래에 위치한 광석동에서 안태훈 진사와 백천 조씨 사이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출생 하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안인수 공께서는 안중근 의사가 태어날 때 부터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았다고 하여 아명을 응칠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하는 것보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무예를 익히고 사냥 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일찍이부터 말을 타는 것과 활을 쏘는 것에 능통하셨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안인수 공께서는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보시고는 안중근 의사께서 다섯살이 되던 해에 진중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이름을 안중근으로 바꾸셨습니다.
1894. 안중근 의사가 16세가 되던 그 해 봄, 김홍섭 어른의 여식 규수 김아려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그 해 동학 농민 전쟁의 발발로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인 안인수 공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신전 위려군을 모집 하셨고 안중근 의사 역시 이에 동참하여 선봉장으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1906. 4. 안중근 의사는 청계동에서 전남포로 이사하여 삼흥 학교를 설립 하시고 돈의 학교를 인수하여 인재를 양성 하는데 힘 쓰셨습니다. 도산 안창호와 이준 같은 애국 지사들을 초빙하여 강연회를 열고 민중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에 나셨습니다.
그 해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분사하고 그로 인해 고종황제께서 퇴위를 당하시고 이토 히로부미는 무력으로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해산시켰습니다. 이로써 안중근 의사는 항일 의병 투쟁을 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을 떠나 만주를 거쳐 연해주에 이르러 의병투쟁을 시작하셨습니다.
1908. 그는 연해주 한인촌을 돌며 동의회 회원을 모집하였습니다. 강원도 의병장 출신의 김두성, 총대장에 이범윤,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 대장에 안중근. 이 세사람이 대장이 되어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홍의동 협곡에서 일본군 병사들과 전투를 벌여 첫 승을 거두었습니다.
한달 반 동안의 많은 일본군 병사들과의 교전 끝에 일본의 압력에 의한 러시아의 지시로 의병을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실패한 무장 투쟁이라며 자신을 자책하고 크게 낙담하였습니다.
1909. 2. 7 안중근 의사는 얀치헤에서 동지 11명과 단지 동맹을 맺었습니다.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그치기 위해, 의병 활동을 하다 먼저 죽은 동지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위해서였습니다.
"동지들, 우리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의병투쟁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소.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으니 좀 더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오. 소수정예의 힘으로 손가락을 끊어 '대한독립' 네 글자를 혈서로 쓰고, 3년 안에 나라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죽이지 못하면 자결합시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자엔아 김기룡,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강창두 등 11명이 일제히 찬성을 하였습니다.
1909. 10. 26 안중근 의사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권총을 꺼내어 이토 히로부미를 겨냥한 뒤 그를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안중근 의사 머뭇거리는 사이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가 되고 혼란한 틈에서도 "우라 코레아"를 연속 헤번을 외쳤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총상을 입은 뒤 30분도 되지 않아 절명하였습니다. 우라 코레아는 대한제국 만세를 뜻합니다.)
그날 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헌병 사령부 하얼빈 분견소에서 예비 심문을 받은 뒤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계 되었고 후에 여순 감옥서로 이송 되었습니다.
* 세모 표시가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위치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한 위치는 네모로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1910. 2. 7 오전 7시 미나베 재판장의 사실심리로 공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미조부치 검찰관이 공소 이유서를 낭독 하였습니다. 허나 안중근 의사는 그것을 부종 하였고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의 죄악을 열거하였습니다. 미나베 재판장은 경우에 따라 재판 공개를 중단 하겠다고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는 최후 진술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행적을 낱낱이 고발하고 부당하게 진행되는 재판을 지적하였습니다.
(미조부치 검찰관의 공소 이유서에서 안중근 의사의 진술이 왜곡되어 낭독 되었고, 국내 또는 국외 변호사 선임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방청객들은 크게 동요하고 해외 곳곳에서 온 기자들이 이 사건을 신문에 실었습니다.
* 영국의 신문 <더 그래픽>의 찰스 모리머 기자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라고 평했습니다.
1909. 2. 14 오전 10시 30분 미나베 재판장은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께선 "옳은 일을 하고 형을 받으면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마라. 대희를 위해 죽는 것이 나에 대한 효도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1910. 3. 26 안중근 의사 어머니께서 직접 명주로 지으신 검은색 바지와 흰 저고리, 두루마기를 입고 일체 저항 하지도 불안해 하지도 않고 형의 집행을 받아들이셨습니다.
* 여순 감옥서의 참관입니다. 사형수나 고문으로 죽은 죄수, 병사한 죄수를 묻을때 이 참관을 사용하였습니다. 길이가 1m밖에 되지 않아 시신이 구겨져서 들어가야 합니다.
- 일본 총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을때 한 진술
"범행의 동기는 무엇인가?"
"첫 번째 대한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대한제국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죄, 세 번째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네 번째 무고한 조선인을 학살한 죄, 다섯 번째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여섯 번째 철도와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탈취한 죄, 일곱 번째 제일은행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여덟 번째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한 죄, 아홉 번째 대한제국의 교육을 방해한 죄, 열 번째 조선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한 번째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열두 번째 조선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 싶어한다고 전세계에 거짓 선언한 죄, 열세 번째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조선이 태평무사하다고 천황에게 거짓말을 한 죄, 열네 번째 동양 평화를 깨트린 죄, 열다섯 번째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시해한 죄다."
- 동포에게 고하는 글
내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000만 동포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에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을 다할 것이다. 너희는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출처 - 이웃사이트, 안중근 불멸의 기억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재주가 그리 좋지 못하여 부족한 점도 많고 잘못된 점도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행여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편하게 숨을 쉬며 두다리 뻗고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바로 안중근 의사와 같은 우리 땅을 지키려 힘 써주시고 국권을 뺏기지 않으려 목숨까지 걸어가며 노력해주신 우리 선조들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선조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가 않습니다.
꼭 안중근 의사만이 아닌 다른 분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 나라를 많이 사랑해주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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