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5월 보름 정오. 국내성 궁궐 내전에 대례식장이 마련되었다. 고국양왕(故國壤王) 부처와 신부의 아버지인 동부여 국왕 해활과 만조백관이 시립한 가운데 담덕(談德) 태자와 약연 공주의 결혼식이 고구려 왕실의 예법에 따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태자는 국혼을 치르느라고 누적된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3일 동안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한 지 3일째 되는 날, 그는 평양성 동쪽 3십여리 밖에 자리잡고 있는 조의선인(早衣先人) 특수부대의 훈련장인 연무대를 불쑥 방문했다.
열심히 훈련에 전념하고 있던 병사들은 고구려의 태자이며 조의선인군의 총대장이기도 한 담덕이 모습을 나타내자 큰 소리로 환호했다.
“태자 전하 만세! 대고구려 만세!”
조의선인군의 수석 당주(黨主)인 연살타(淵薩陀)도 웃으면서 담덕을 맞았다.
“전하, 더 쉬시지 않고 벌써 나오셨나이까?”
“고구려의 간성들이 이렇게 땀을 흘리는데 총대장인 나만 한가히 쉴 수는 없지 않소? 수고들이 많구려.”
“전하의 고집을 누가 막을 수 있겠나이까?”
담덕은 웃는 얼굴로 연살타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내 병사들에게 할 말이 있으니 모두 연병장에 모이도록 하시오.”
“네, 전하!”
연살타의 명령에 의해 조의선인군의 당주와 병사들이 모두 연병장에 집합하자 담덕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제군들이 힘든 군사훈련을 열심히 받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그대들이 우리 고구려의 자랑스런 수호신이라는 것을 나는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제군들도 잘 알다시피 국가간에는 영원한 우방국도 적국도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며 냉혹한 국제 질서이기도 하다. 제군들과 이 나라 고구려는 하나다! 일심동체(一心同體)란 말이다. 이 점을 절대 잊지 말도록 하라! 우리 고구려는 지금 주변 나라들에 비해 국력도 약하고 병력도 부족한 상태다. 그러니 부국강병의 깃발 아래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제장과 병사들이 담덕 태자의 말에 호응하며 믿고 신뢰하는 뜻을 표했다.
“와아! 조의선인 만세! 태자 전하 만세!”
그 당시 후연(後燕)·북위(北魏)·동진(東晉)·후진(後秦)·숙신(肅愼)·거란(契丹)·말갈(靺鞨)·신라(新羅)·가야(伽倻) 등에 산동반도 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힌 백제(百濟)에다 바다 건너 왜국(倭國)까지 포함하여 고구려는 사방으로 경쟁국가들에게 포위된 형국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그들 속에서 자취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주 국방이란 자위력으로 나라를 지키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일당백의 용맹을 지닌 특수병들을 양성할 수밖에 없었다. 담덕 태자의 염원대로 천하 제일의 정예군이 있어야 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태자의 연설은 병정들의 가슴 싶숙이 파고들어 감동시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태자의 연설이 끝나자 연살타가 다가와서 말했다.
“태자 전하의 연설을 들으면 언제나 용기가 샘솟는 걸 느끼게 되옵니다.”
태자가 엄숙한 얼굴이 되면서 대꾸했다.
“연 당주! 말은 누구나 잘 할 수 있소. 그러나 말대로 실천하려는 책임감이 아울러 있어야 하오.”
“소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이다.”
“참으로 장하오. 그래서 난 언제나 연 당주를 믿고, 기대도 크게 하고 있소.”
“황공하옵니다. 전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나이다.”
태자가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만 골몰했기에 태자비는 청상과부(靑孀寡婦) 아닌 과부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태자비는 영민한 여인이었기에 낭군이 야망을 달성토록 돕고자 내색도 안 하며 소리 소문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태자는 저녁식사가 끝나면 새벽녘까지 서책을 읽고 병법을 연구하며 통치자로서의 수업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서기 386년 8월, 고국양왕은 마침내 태자와 신하들을 편전(便殿)으로 불러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짐(朕)은 평양성(平壤城)에서 백잔(百殘:고구려인들이 백제를 비하할 때 쓰던 단어)의 군주 부여구(扶餘句:近肖古王의 諱)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신 소열제(昭烈帝:故國原王) 폐하의 원한을 아직까지 갚아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한시도 통탄스런 마음을 잊은 적이 없소. 지금이라도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징벌하려고 하니 경들은 그리 알고 출병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시오.”
태대형(太大兄) 명림부윤(明臨夫允)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신(臣)이 생각하기에 지난번 현도성(玄菟城)과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던 일로 연국(燕國)이 우리 고구려에 원한을 품고 보복공격을 할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백제를 칠 군사를 지금 일으키는 것은 시기상조(時機尙早)라고 생각되옵니다.”
대대로(大對盧) 고문한(高文漢)도 명림부윤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선대(先代)의 일을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백제를 치는 일이 중요하겠으나 성상(聖上)께서 친정(親征)을 하시는 것은 다시 생각해보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러나 고국양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백잔은 언제든 우리 고구려의 남쪽 변경에서 소란을 일으킬 적국이니 지금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후일 연국이 준동을 할 때 백잔도 이에 호응할 것이 분명하지 않겠소? 경들은 아무 말 말고 짐의 뜻에 따라주기 바라오!”
고국양왕은 아들인 담덕 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짐이 전장(戰場)에 나가 있는 동안 태자는 대대로의 보필을 받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도록 하라!”
“소자가 조정에서 아바마마의 공백을 잘 메울 수 있을지 스스로 염려가 되지만 최선을 다해 나라 안의 일을 돌보겠습니다.”
“태자는 장차 짐의 뒤를 이어 보위(寶位)에 오를 몸이니 이번 기회에 미리 국정(國政)을 살펴서 왕업(王業)을 체득(體得)할 수 있도록 하라!”
“소자는 오로지 아바마마의 무운(武運)을 빌겠나이다.”
태자는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이번 정벌의 성공이나 실패 여부와 관계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랬다. 태자는 어릴 때부터 백부(伯父)인 소수림왕(小獸林王)으로부터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했을 때의 그 비통한 심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바 있었다. 소수림왕은 생전에 고국원왕을 위해 복수를 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었다. 만약 아버지마저 할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된다면 태자 자신의 충격은 물론이고 고구려 전체에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될 지도 몰랐다.
욕이성(辱理城)·영덕성(營悳城)·조타성(曺陀城)·실직성(悉直城) 등에서 4만의 군사를 차출한 고국양왕은 대사자(大使者) 아불파연(阿佛破然)과 남경군(南境軍) 대모달(大模達) 우나굴(于那屈),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조의두대형(早衣頭大兄) 고염(高炎) 등의 보좌를 받으며 국경을 넘어 백제 땅으로 갔다.
기병과 보병, 도수병과 궁수병으로 이루어진 4만의 고구려 정예군은 수곡성(水谷城)을 지나 굴어압을 단숨에 함락시킨 후 백제의 최전방 요새인 도압성(都押城)으로 향했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대둔산과 천마산을 등지고 있는 도압성을 중심으로 서남쪽으로는 치악성(雉岳城)과 서북쪽의 구두성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고구려의 고국양왕은 아불파연과 우나굴에게 각기 1만명의 군사를 주어 치악성과 구두성을 공격하도록 한 후 나머지 병력을 거느리고 도압성을 공격했다. 도압성에는 1만명의 백제군이 주둔해 있었고, 치악성과 구두성에는 각기 5천의 군사가 있었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뱀의 머리와 꼬리 같아서 한 성을 공격하면 다른 성들이 유기적으로 대응을 하게 되어 있었다. 성들을 각기 고립시켜야만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저항 의지를 꺾어 놓을 수 있었다.
고국양왕은 도압성을 단숨에 함락시키려 했다. 시간을 끌면 도압성에서 대비할 것이고 백제의 조정에서도 지원군을 파견해 올 터였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군은 적진에서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백제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속전속결(速戰速決)만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러나 고국양왕의 전략은 처음부터 들어맞지 않았다.
『정복전쟁의 대지존 광개토호태왕』3.왕재의 웅지 ⑴
싱그러운 5월 보름 정오. 국내성 궁궐 내전에 대례식장이 마련되었다. 고국양왕(故國壤王) 부처와 신부의 아버지인 동부여 국왕 해활과 만조백관이 시립한 가운데 담덕(談德) 태자와 약연 공주의 결혼식이 고구려 왕실의 예법에 따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태자는 국혼을 치르느라고 누적된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3일 동안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한 지 3일째 되는 날, 그는 평양성 동쪽 3십여리 밖에 자리잡고 있는 조의선인(早衣先人) 특수부대의 훈련장인 연무대를 불쑥 방문했다.
열심히 훈련에 전념하고 있던 병사들은 고구려의 태자이며 조의선인군의 총대장이기도 한 담덕이 모습을 나타내자 큰 소리로 환호했다.
“태자 전하 만세! 대고구려 만세!”
조의선인군의 수석 당주(黨主)인 연살타(淵薩陀)도 웃으면서 담덕을 맞았다.
“전하, 더 쉬시지 않고 벌써 나오셨나이까?”
“고구려의 간성들이 이렇게 땀을 흘리는데 총대장인 나만 한가히 쉴 수는 없지 않소? 수고들이 많구려.”
“전하의 고집을 누가 막을 수 있겠나이까?”
담덕은 웃는 얼굴로 연살타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내 병사들에게 할 말이 있으니 모두 연병장에 모이도록 하시오.”
“네, 전하!”
연살타의 명령에 의해 조의선인군의 당주와 병사들이 모두 연병장에 집합하자 담덕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제군들이 힘든 군사훈련을 열심히 받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그대들이 우리 고구려의 자랑스런 수호신이라는 것을 나는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제군들도 잘 알다시피 국가간에는 영원한 우방국도 적국도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며 냉혹한 국제 질서이기도 하다. 제군들과 이 나라 고구려는 하나다! 일심동체(一心同體)란 말이다. 이 점을 절대 잊지 말도록 하라! 우리 고구려는 지금 주변 나라들에 비해 국력도 약하고 병력도 부족한 상태다. 그러니 부국강병의 깃발 아래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제장과 병사들이 담덕 태자의 말에 호응하며 믿고 신뢰하는 뜻을 표했다.
“와아! 조의선인 만세! 태자 전하 만세!”
그 당시 후연(後燕)·북위(北魏)·동진(東晉)·후진(後秦)·숙신(肅愼)·거란(契丹)·말갈(靺鞨)·신라(新羅)·가야(伽倻) 등에 산동반도 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힌 백제(百濟)에다 바다 건너 왜국(倭國)까지 포함하여 고구려는 사방으로 경쟁국가들에게 포위된 형국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그들 속에서 자취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주 국방이란 자위력으로 나라를 지키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일당백의 용맹을 지닌 특수병들을 양성할 수밖에 없었다. 담덕 태자의 염원대로 천하 제일의 정예군이 있어야 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태자의 연설은 병정들의 가슴 싶숙이 파고들어 감동시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태자의 연설이 끝나자 연살타가 다가와서 말했다.
“태자 전하의 연설을 들으면 언제나 용기가 샘솟는 걸 느끼게 되옵니다.”
태자가 엄숙한 얼굴이 되면서 대꾸했다.
“연 당주! 말은 누구나 잘 할 수 있소. 그러나 말대로 실천하려는 책임감이 아울러 있어야 하오.”
“소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이다.”
“참으로 장하오. 그래서 난 언제나 연 당주를 믿고, 기대도 크게 하고 있소.”
“황공하옵니다. 전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나이다.”
태자가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만 골몰했기에 태자비는 청상과부(靑孀寡婦) 아닌 과부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태자비는 영민한 여인이었기에 낭군이 야망을 달성토록 돕고자 내색도 안 하며 소리 소문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태자는 저녁식사가 끝나면 새벽녘까지 서책을 읽고 병법을 연구하며 통치자로서의 수업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서기 386년 8월, 고국양왕은 마침내 태자와 신하들을 편전(便殿)으로 불러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짐(朕)은 평양성(平壤城)에서 백잔(百殘:고구려인들이 백제를 비하할 때 쓰던 단어)의 군주 부여구(扶餘句:近肖古王의 諱)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신 소열제(昭烈帝:故國原王) 폐하의 원한을 아직까지 갚아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한시도 통탄스런 마음을 잊은 적이 없소. 지금이라도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징벌하려고 하니 경들은 그리 알고 출병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시오.”
태대형(太大兄) 명림부윤(明臨夫允)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신(臣)이 생각하기에 지난번 현도성(玄菟城)과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던 일로 연국(燕國)이 우리 고구려에 원한을 품고 보복공격을 할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백제를 칠 군사를 지금 일으키는 것은 시기상조(時機尙早)라고 생각되옵니다.”
대대로(大對盧) 고문한(高文漢)도 명림부윤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선대(先代)의 일을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백제를 치는 일이 중요하겠으나 성상(聖上)께서 친정(親征)을 하시는 것은 다시 생각해보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러나 고국양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백잔은 언제든 우리 고구려의 남쪽 변경에서 소란을 일으킬 적국이니 지금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후일 연국이 준동을 할 때 백잔도 이에 호응할 것이 분명하지 않겠소? 경들은 아무 말 말고 짐의 뜻에 따라주기 바라오!”
고국양왕은 아들인 담덕 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짐이 전장(戰場)에 나가 있는 동안 태자는 대대로의 보필을 받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도록 하라!”
“소자가 조정에서 아바마마의 공백을 잘 메울 수 있을지 스스로 염려가 되지만 최선을 다해 나라 안의 일을 돌보겠습니다.”
“태자는 장차 짐의 뒤를 이어 보위(寶位)에 오를 몸이니 이번 기회에 미리 국정(國政)을 살펴서 왕업(王業)을 체득(體得)할 수 있도록 하라!”
“소자는 오로지 아바마마의 무운(武運)을 빌겠나이다.”
태자는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이번 정벌의 성공이나 실패 여부와 관계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랬다. 태자는 어릴 때부터 백부(伯父)인 소수림왕(小獸林王)으로부터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했을 때의 그 비통한 심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바 있었다. 소수림왕은 생전에 고국원왕을 위해 복수를 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었다. 만약 아버지마저 할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된다면 태자 자신의 충격은 물론이고 고구려 전체에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될 지도 몰랐다.
욕이성(辱理城)·영덕성(營悳城)·조타성(曺陀城)·실직성(悉直城) 등에서 4만의 군사를 차출한 고국양왕은 대사자(大使者) 아불파연(阿佛破然)과 남경군(南境軍) 대모달(大模達) 우나굴(于那屈),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조의두대형(早衣頭大兄) 고염(高炎) 등의 보좌를 받으며 국경을 넘어 백제 땅으로 갔다.
기병과 보병, 도수병과 궁수병으로 이루어진 4만의 고구려 정예군은 수곡성(水谷城)을 지나 굴어압을 단숨에 함락시킨 후 백제의 최전방 요새인 도압성(都押城)으로 향했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대둔산과 천마산을 등지고 있는 도압성을 중심으로 서남쪽으로는 치악성(雉岳城)과 서북쪽의 구두성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고구려의 고국양왕은 아불파연과 우나굴에게 각기 1만명의 군사를 주어 치악성과 구두성을 공격하도록 한 후 나머지 병력을 거느리고 도압성을 공격했다. 도압성에는 1만명의 백제군이 주둔해 있었고, 치악성과 구두성에는 각기 5천의 군사가 있었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뱀의 머리와 꼬리 같아서 한 성을 공격하면 다른 성들이 유기적으로 대응을 하게 되어 있었다. 성들을 각기 고립시켜야만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저항 의지를 꺾어 놓을 수 있었다.
고국양왕은 도압성을 단숨에 함락시키려 했다. 시간을 끌면 도압성에서 대비할 것이고 백제의 조정에서도 지원군을 파견해 올 터였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군은 적진에서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백제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속전속결(速戰速決)만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러나 고국양왕의 전략은 처음부터 들어맞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