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4.항일무장투쟁의 선두에 서다 ⑴

대모달20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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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대를 이끌고 정의부에 가담하다.

 

1926년 이후 정의부(正義府)는 세력이 강화되고 통치 영역도 넓어져서 만주에 있는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지도권을 장악했다. 반면 참의부(參議府)는 점점 쇠퇴해져서 자연히 소멸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신민부(新民府)도 내부 갈등으로 세력이 떨어져서 북만주 철도 일대에서 활동하는 정도였다.

 

양세봉(梁世奉) 역시 참의부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을 때, 이규풍(李奎豊)·김명봉(金鳴鳳)·양기하(梁基瑕) 등 지도자들이 1926년 4월 5일 민족혁신운동(民族革新運動) 대표자회의를 열고 정의부의 군사적 활동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11월에 정의부는 민족혁신운동 대표자회의에서 나온 결론에 따라 헌장을 바꿨다.

 

양세봉은 휘하 중대를 이끌고 길림성 우마강 일대로 가서 정의부의 군사부위원장 오동진(吳東振)을 찾아가 정의부에 가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동진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해체된 이후 정의부 창설에 참가한 사람으로 양세봉을 잘 알고 있었다. 오동진은 양세봉을 기쁘게 환영하며 정의부 의용군의 제1중대장으로 임명했다.

 

양세봉은 누구보다 오동진의 신뢰를 받았다. 오동진은 늘 양세봉을 데리고 길림·장춘 일대에서 활동했는데 일본군 수비대 병영과 경찰서를 자주 습격했으며, 중국과 일본이 합작으로 건설한 철도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또 암살단을 보내 소좌(少佐)급 이상의 일본군 지휘관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겼으며, 국경을 넘어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7년에 양세봉이 흥륭산역 부근에서 활동하던 무렵에 불행히도 오동진이 일본군의 밀정인 김종원(金宗源)의 모략에 빠져 중국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곧 일본군에 넘겨졌다. 양세봉은 그를 구출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이청천(李靑天)·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은 동북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조직들이 하나의 기관으로 통합하는 것을 추진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촉진회(民族唯一黨促進會)를 구성했다. 양세봉은 삼부의 통합을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지지하면서 적극적으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을 홍보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이상룡(李相龍)·김동삼·양기탁(梁起鐸) 등은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설립하여 만주에 있는 조선인들이 스스로 새로운 농촌을 건설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양세봉도 이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자주 대원들을 거느리고 가서 조직을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농사일도 거들었다.

 

1928년 5월 12일에 양세봉은 정의부 대표의 일원으로 반석현에서 소집된 ‘제3차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의’에 참석했으며, 김동삼을 비롯한 21명을 민족유일당촉진회의 행정위원으로 선출했다. 그 해 4월에 양세봉은 또 길림 근처인 신안둔에서 소집된 삼부통합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쌓아 온 삼부 지도자들과의 친분을 활용해 서로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그 뜻을 이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