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백설공주에서 동화들이 갖고 있는 순수하고 예쁜 여성과 강인한 남성 그리고 언제나 해피엔딩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고자 했죠.
흑설공주책에는 백설공주 말고도 신데렐라, 인어공주 등의 유명한 동화들을 다루었는데, 이 글은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새롭게 바라본 내용이에요.
조금 길 수도 있지만 한 번 읽어봐주세요!!!!
너무 별로다 싶으면 악플 다셔도 되구요, 코멘트 부탁해요
건물 사이사이를 잇는 녹슨 철제 계단은 폭이 좁고 경사가 급했다. 녹슨 철제계단 위에는 그 계단과 어울리지 않는 방이 이어져 있다. 이어진 방 안은 망해가는 왕실의 모습을 나타내주듯 희끄무레한 빛이 가득 채우고 있다. 왕실의 위엄 따위는 없다. 제대로 된 가구도, 휘황찬란한 장식품도 없다. 오직 고요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아침 7시, 방 안에서 흘러나온 날카로운 목소리가 망해가는 왕실의 적막을 깬다.
“이 맛없는 음식을 나 먹으라고 만든 거야? 제정신이야? 내가 만들어도 이만큼은 만들 수 있어.”
적막을 깨는 왕비의 말에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왕비는 더 흥분하며 아침 식탁을 주먹으로 쾅쾅 친다.
“이 음식 만든 요리사 누구야? 누군데 감히 나한테 이런 음식을 들이밀어? 내 앞으로 당장 그 요리사 데리고 와. 누군지 얼굴이나 좀 봐야겠어.”
왕실 주방장은 옆에 서 있던 신하에게 조용히 말한다.
“당장 그 자식 끌고 와.”
주방장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주방장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번에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 주방장은 비스트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본다. 자신에게 앙심이 없다면 어떻게 아침마다 자신이 이런 모욕감을 느끼도록 한단 말인가. 비스트가 아침 식사를 준비한 날이면 항상 왕실은 아침부터 발칵 뒤집혔다.
이윽고 문이 삐걱 열리며 한 남자가 자신 없게 방 안으로 걸어들어 온다. 신하에게 이끌려온 비스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본인도 본인의 잘못을 아는 듯, 아무 말이 없다. 왕비 앞에서 어깨까지 축 쳐져 있는 비스트는 참 안쓰러워 보였다. 그가 앞에 도착하자 왕비는 더욱 소리 지르기 시작한다. 왕비는 누구길래 본인에게 이런 아침을 선사한 건지 괘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얼굴 들어봐. 난 네 얼굴을 좀 봐야겠어. 어떻게 생겼길래 이런 음식을 만드는 거야? 네가 만든 음식을 누가 먹는 건지 생각은 하면서 음식을 만들었어야 할 거 아니야!”
비스트가 얼굴을 빼꼼 들어 올리자 왕비는 더욱 분노했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았는데 속이 토할 정도까지 미슥거렸기 때문이다. 비스트의 얼굴은 여드름 투성이었다. 여드름이 나 있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것이 쉬울 정도로 여드름이 얼굴 전체를 점령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누가 잘못 때려서 모양이 일그러진 듯이 뭉뚝하게 생긴 코, 눈을 뜬 건지 안 뜬 건지 모르겠는 초점 흐린 눈빛, 한쪽이 교묘하게 밑으로 내려가 있는 듯한 입술. ‘신의 실패작’이 모두 모여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 “당장 나가! 여기서 당장 나가! 요리도 못하는데 생긴 것까지... 누가 저 사람을 왕실에 데리고 있는 거야? 저 사람 요리 다시 한 번 나한테 올리기만 해봐. 그 때는 음식 갖고 오는 사람까지 해고인 줄 알아!”
왕비는 그나마 잡고 있던 인내의 마지막 끈을 놓아버리며 호령했다. 비스트는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마냥 방을 급하게 빠져나왔다.
“대체 제가 뭐를 잘못한 거죠?”
비스트가 주방장에게 물었다. 비스트는 자신이 만든 음식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주방장이 가르쳐주길 원했다. 항상 비스트의 음식은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부분이 잘못됐다고 콕 집어 말해주는 사람은 그동안 아무도 없었다. 주방장은 비스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비스트, 왕실에서 네 존재 자체가 잘못이야.”
영국의 A대학교. 벨과 가스통이 대학 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벨의 앞에는 커다란 햄버거와 콜라가, 가스통 앞에는 닭 가슴살 도시락이 놓여 있다. 이들은 방금 여성학 수업이 끝난 뒤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벨은 A대학교 여성학과에 다니고 있는 대학원생이고, 가스통은 벨의 같은 대학 선배다. 벨은 항상 그렇듯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2016년, 영국 사회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성의 마른 몸이 아름다운 몸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거식증에 걸린 여성들이 늘어나며 사회에서는 ‘건강한 몸’이 아름다운 몸이라는 또 다른 사고방식이 피어났다. 사회적으로 구성됐던 여성의 몸에 대한 미의 기준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본인의 마음에 드는 몸이 아름다운 몸이라는 인식. 그러나 이런 인식의 변화는 벨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벨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먹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가스통은 물끄러미 맛있게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있는 벨을 바라봤다.
“형,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왜 그렇게 쳐다 봐.”
벨은 항상 가스통을 ‘형’이라고 부르곤 했다. 언제부터 가스통을 ‘형’이라고 불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건 가스통에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가스통은 벨이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참 좋았다. 벨과 말하다 보면 가스통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곤 했다. 벨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정신적인 성감대를 벨이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 들었다. 가스통은 늘 생각했다.
‘벨이 만약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가만히 앉아있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벨에게 매력이 있었을까.’
만약 벨이 그랬다면 가스통은 벨을 절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로 인해 가스통은 늘 본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새로운 모습에 가끔 놀라기도 했지만 가스통은 그렇게 발견해가는 새로운 모습들이 너무 좋았다.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내 모습이 하나하나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벨, 요즘도 아버지 그러시니?”
가스통은 불현듯 벨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벨은 항상 아버지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벨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이곳저곳 혼자 돌아다니면서 탐구하는 것을 즐겼고 무언가 발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발명 때문에 집에 불이 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벨은 그때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할 일보다 아버지를 더 먼저 챙겨야 했다. 가스통은 벨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먼저 챙기는 것이 탐탁치는 않았다. 벨은 햄버거를 마저 베어 물며 가스통의 말에 대답했다.
“응. 아버지 요즘에는 예전보다 더 자주 혼자 돌아다니시네. 걱정돼. 요즘은 건강도 안 좋으신데 말이야.”
그날 밤, 가스통은 벨의 전화소리에 깨야 했다.
“형, 아버지가 사라지신 것 같아. 어떡하지.”
가스통은 드디어 터질 일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의 아버지가 요즘따라 더 심각해진 것 같다는 벨의 말이 생각났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시각 벨의 아버지는 왕실 근처에 있었다. 혼자 망상에 빠져 돌아다니다가 왕실 근처까지 오게 된 것이다. 왕실을 보게 된 벨의 아버지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왕실은 어떻게 생겼을까. 저 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벨의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왕실 안에 들어가게 됐다. 왕실 안에는 뭔가 새로운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일을 보고 나면 자신이 요즘 만들고 있는 발명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벨의 아버지는 실망하고 말았다. 새로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실 안에는 오로지 고요밖에 없었다. “삐용삐용” 순간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렸다. 경보음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불빛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왕실을 구경하고 있던 벨의 아버지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고요함 속에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멈춰선 벨의 아버지를 순식간에 병사들이 둘러쌌다. 병사들은 벨의 아버지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침입죄’라는 말을 하며 벨의 아버지를 감옥에 가뒀다.
벨의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비스트였다.
‘아, 이게 아니었는데. 어떡하지.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비스트는 쉴새없이 이 말을 반복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비스트는 벨의 아버지가 왕실 근처에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 비스트는 왕비에게 ‘다시 한 번 이런 음식을 만들기만 하면 왕실에서 쫓겨 날 줄 알라’는 경고를 받았다. 비스트는 그 경고를 받은 뒤 왕실 주방장이 자신에게 음식에 대한 조언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주방장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비스트는 자신에게는 전부인 요리를 더 이상 못하게 될 것이 두려워 큰 결심을 했다.
‘오늘 밤 주방장의 방에 몰래 침입하자. 주방장이 갖고 있는 레시피를 잠시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복사본만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결심으로 비스트는 오늘 주방장의 방에 침입했다. 주방장의 방에 경보등이 달려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벨의 아버지가 붙잡히기 바로 직전 울렸던 경보음은 바로 비스트가 주방장의 방에 침입해 울리게 했던 것이었다. 비스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왕실의 경비원에게 ‘저 사람이 왕실에 침입해 기밀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고 말해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벨의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ㄸ ㅏ ㄹ... 아빠 왕실에...”
가스통과 돌아다니던 벨의 핸드폰에 ‘띠링’하고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아버지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낸 문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가득했다. 무언가를 문자로 치려고 했지만 제대로 치지 못한 듯한 문자였다. ‘이게 무슨 말일까’ 벨은 한참이고 생각해야 했다.
‘왕실에 갇혔다는 말인가?’
벨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가스통과 함께 왕실로 향했다.
벨은 왕실에 도착하자마자 엄청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여기 계세요?”
이 소리에 왕실에 있던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를 찾으러 왔어요.”
병사들은 이 소리를 듣고 벨과 가스통을 감옥으로 안내했다. 아버지는 감옥에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벨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또 한번 병사들한테 쏘아붙였다.
“아버지를 왜 여기에 가둔 거죠? 이유가 뭔가요? 요즘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으신데 가둬놓은 이유가 뭔가요?”
병사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벨은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아버지가 특이하긴 하지만 그런 일을 하실 분은 아니라고 항의했다. 병사들은 그러면 아버지를 풀어줄테니 벨과 가스통이 일주일 동안 감옥에 대신 갇혀 있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벨과 가스통은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벨의 아버지가 건강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비스트는 또 다시 구석에 숨어 이런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나 때문이다. 한 명만 갇힐 수 있었던 게 나 때문에 두 명씩이나 갇히게 됐다. 내가 무슨 일을 한 걸까.”
그로부터 5일 정도 지난 밤, 벨은 자고 있는 가스통을 깨웠다.
“형, 일어나.”
“벨, 왜 그래?”
벨은 계속해서 가스통을 조용히 하지만 강하게 흔들었다.
“형, 일어나. 탈출하자. 우리 여기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어. 아버지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여기서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있어야해.”
가스통 역시 생각해보니 그랬다. 벨의 아버지가 왕실 기밀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 이틀 째 갇혀 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가스통은 도망쳐서 빠져나가자는 벨의 말에 동의했다. 이 둘은 그날 밤 몰래 왕실을 빠져나갔다.
왕실을 빠져나가는 과정까지는 순탄했다. 경보음이 왠일인지 울리지 않았다. 당연히 보조등도 켜지지 않았다. 둘은 신속하게 왕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순간 발생했다. 난데없이 산속에서 개떼가 나타난 것이다. 개떼들은 며칠은 굶은 것 같았다. 추운 겨울 산 속에서 먹을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개떼들은 맛있는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벨과 가스통에게 덤벼오려고 했다. 벨과 가스통은 개떼들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가스통은 벨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가스통이 벨을 지켜줄 필요는 없었다. 벨이 가스통보다 훨씬 민첩하고 빨랐기 때문이다. 가스통은 ‘남자라는 이유로’ 벨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개떼에게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벨에게 다가가는 순간 개떼들이 가스통의 무릎을 물어버린 것이다. 가스통이 개에게 무릎을 물린 순간 저 멀리서 갑자기 고기 덩어리가 날아왔다. 비스트가 던진 고기 덩어리였다. 사실 비스트는 가스통과 벨이 궁궐을 탈출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스트는 이들이 감옥에 갇힌 이후로 하루도 편안하게 잠을 자본적이 없었다. 마음이 답답해서였다. 분명 잘못은 본인이 했는데 아무 상관없는 저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비스트는 고기를 던져 가스통을 위기로부터 탈출하게 해 줬다. 위기는 벗어났으나 가스통의 상처가 너무 깊어 벨과 가스통은 마을로 도망가지 못하고 왕실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가스통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비스트는 이들을 감옥으로 다시 데려왔다. 벨과 가스통은 많이 지쳐보였다. 비스트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이들에게 대접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들은 제대로 된 밥 한 끼 못 먹었다. 비스트는 주방으로 가 서둘러 요리를 한 뒤 감옥으로 음식을 갖고 왔다.
벨과 가스통은 맛있게 음식을 먹으려고 했으나, 그러기에 비스트의 요리는 너무 맛이 없었다.
“형, 이 음식 먹을 수 있겠어?”
벨은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나 워낙에 벨의 목소리가 큰 바람에 이 소리는 비스트의 귀까지 들어갔다. 비스트는 다시 한 번 절망했지만 이번에는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제 음식이 어떤 게 잘못된 거죠? 어떤 부분이 문제인가요?”
벨은 이것저것 음식의 문제를 짚어주기 시작했다.
“음식에 일단 간이 안 맞아요. 간이 맞아야 음식의 재료 맛도 살아나고 조화로워지는데, 소스부터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벨은 비스트에게 종이 한 장을 달라고 했다. 비스트는 벨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벨은 비스트가 준 종이에 이것저것 적기 시작했다.
“이대로 한 번 만들어 봐요. 지금 만들어진 음식보다는 훨씬 맛이 좋을테니.”
벨이 내민 종이에는 재료와 레시피, 음식을 만들 때 주의해야 하는 점 등이 적혀 있었다.
그 다음날 저녁에도 비스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벨을 찾아왔다. 벨이 가르쳐 준대로 요리를 한 뒤 어제보다 나아졌나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벨 잠시 시간돼요?”
비스트는 머쓱한 표정으로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벨은 비스트의 모습을 보고 비스트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구부정한 자세와 자신 없는 비스트의 표정이 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은 비스트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었다. 비스트가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슨 일이에요?”
별 관심없는 듯한 표정으로 벨은 비스트에게 물었다.
“어제 가르쳐준대로 음식을 다시 만들어봤어요. 어떤지 좀 시식해주시겠어요?”
벨은 비스트의 말에 음식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어제보다 맛은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뭔가 가공된 듯한 맛이 났다.
“음식 소스를 어떻게 만든 거죠?”
벨의 질문에 비스트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과정을 차례차례 말하기 시작했다. 음식에는 온갖 기름과 조미료가 다 들어가 있었다. 비스트의 말을 들으며 벨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음식에 안 좋은 재료란 재료는 다 집어 넣었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재료는 몸에 안 좋잖아요. 조미료 빼고 기름도 좀 빼요.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벨은 조미료 대신 넣으면 되는 재료들을 말해줬다. 비스트는 벨의 말을 메모지에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그 다음날도 비스트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들고 벨을 찾아왔다. 벨은 또 음식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내리고 조언을 해줬다. 비스트는 계속해서 만든 음식을 벨에게 맛보게 했고 벨은 꾸준히 조언을 해줬다. 이들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지는 만큼 이들은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서로 이야기를 하며 상대방이 본인과 비슷한 면이 은근히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은 비스트의 경제력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왕실의 일개 요리사여도 상관없었다. 비스트가 어떤 집에 살든, 그가 차가 있든 없든 그건 벨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벨은 비스트의 성격과 그의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지금에서야 내 앞에 나타난걸까. 남자 벨이잖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벨은 서서히 비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 다음날, 저녁 식사시간 즈음 비스트는 벨이 조언해준 대로 만든 음식을 선보이고 싶어 감옥으로 찾아 간다. 그런데 저번에 궁에서 도망가려다가 개떼에게 상처 입은 가스통이라는 남자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게 물렸는지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구급약통도 같이 들고 갔다.
벨이 비스트가 들고 온 연어구이를 맛보는 동안, 비스트는 가스통에게 다가간다.
“저기요 그 때 물린 상처가 낫질 않는 것 같은데, 제가 약통 들고 왔거든요. 좀 봐드릴까요?”
가스통은 의외의 친절에 당황했지만 여하튼 아픈 곳 치료해준다니 일단 깨진 무릎을 들이 밀었다.
“아앗 따가워!”
“빨간약이 원래 따갑죠. 엄살도 심하시네. 좀 참아봐요. 후-”
벨과 함께 감옥에 갇혀있는 가스통은 그 날 이후로 계속 혼란스럽다. 그 때 후- 하고 불어주던 그 입김이, 아니 그 친절이 자꾸 잠들기 전 밤이면 생각이 나는 것이다. 비스트는 그저 한 거짓말 때문에 두 사람이 일주일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 뭐라도 계속 해주고픈 마음뿐이었지만, 얼굴은 일그러지고 괴팍하게 생긴 사람이, 이게 바로 반전이라는 건가, 요리도 하고 자신의 아픈 곳 까지 신경써주는 비스트라는 남자가 의아하면서 어딘가 묘하게 끌렸나보다.
‘이상해. 원래 난 오직 벨만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었는데.’
가스통은 한 때 좋아했던 씩씩한 벨을 가만히 쳐다보며 생각에 빠져있다. 그랬다. 그는 벨의 적극적이고 자기주도적인 면을 좋아했었는데 지금 그 여자가 내 옆에서 발라당 엎어져 누워있어도 머릿속에 자꾸 맴도는 건 다른 남자였다.
“형 뭐해? 안 자? 걱정 말고 푹 자둬. 이제 이틀만 지나면 여기에 갇혀 있는 것도 일주일째니깐 나갈 수 있을거야.”
“아 그. 그래. 잘자.”
두 사람은 이틀 뒤에 이 침침하고 어두운 왕실의 감옥을 뛰쳐 나가는 꿈을 꾸었다.
비스트는 그렇게 남은 이틀도 꾸준히 감옥을 드나들었고 세 사람은 어느 새 친한 친구사이가 된 것만 같았다. 벨의 조언 덕분에 비스트의 요리 실력은 많이 개선되어 자신감도 생기고 구부정했던 그의 어깨도 조금은 펴진 것 같았다.
“저 이제 주방에서 더 이상 설거지하는 일은 안 해요. 고마워요 벨.”
“별거는 아니었는데. 고마우면 보답하셔요. 하하.”
벨이 머쓱해 하며 대답했다. 벨도 가르친 것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인지 기분이 좋았다.
“혹시 시계 필요하신가요? 아까 저녁 해산물파스타가 마음에 드셨다고 왕비님께서 포상을 주셨거든요. 저는 이미 하나 있어서요.”
“전 괜찮아요. 나도 집에 가면 있는데 뭘. 형 혹시 필요해?”
문득 던진 벨의 질문에 가스통은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가스통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더듬는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비스트의 눈을 보고 단 둘이 이야기 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네? 아..저는 좋죠. 제, 제가 받을게요. 안 그래도 새 시계 사려고 했는데.”
비스트는 다음 날 아침에 들릴 때 가져오겠다고 하고 이만 감옥을 나갔다.
“내일 다시 올게요. 두 분, 안녕히 주무십시오.”
비스트는 이게 사적인 감정 때문인지, 정말로 보답하고픈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벨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록 벨에게는 아니지만 벨과 오랜 시간 친했던 가스통에게라도 호의적인 표현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비스트와 가스통은 우연히 화장실에서 만났다. 비스트는 마침 지금 시계 들고왔다며 가스통에게 건넸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마침 잘 만났습니다. 여기, 어제 드리기로 한 시계입니다. 벨에게도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벨은 일어났습니까?”
가스통은 비스트의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냥 이때다 싶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입을 뗐다. 어제 밤 한 숨도 못자고 끝내 내린 결론이었다.
“저, 아무래도 제가 비스트 당신을....”
“예? 잘 안들려서요.”
“언제부터인가 자꾸 당신 생각이 납니다. 자기 전에도 아른거리고, 다음 날 만나 같이 아침식사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떨려요. 저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고해졌습니다. 당신이 제 상처를 치유해 줄 때의 그 느낌도 잊을 수 없고, 함께 대화를 할 때도 처음 느껴보는 심장의 두근거림이었어요. 제 마음을 꼭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가스통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비스트는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침착하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정말 몰랐습니다. 저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끼신다니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다른 사람이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당신하고 아주 가까운 사람이지요. 그 마음이 너무 확실하고 가득해서 지금 제 마음에는 종이 한 장의 여백이 없네요.”
하고는 홀연히 가스통을 두고 화장실을 나왔다. 가스통은 한참을 동장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물이 날 뻔도 했지만 참을만했다. 그날 가스통은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음 날 벨은 무턱대고 새벽부터 일어나 감옥을 감시하는 경비에게 내보내 달라고 소리를 꽥꽥 지르더니 경비가 질색을 하며 꺼내주었다. 드디어 벨과 가스통이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 일주일 째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가장 신나 보이는 벨은 궁궐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다 녔다.
“와! 드디어 집에 간다. 아버지는 집에 잘 계시겠지?”
“응 얼른 돌아가자. 아, 근데 우리 콩밥 대신 매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 먹게 해준 그 비..스트라는 사람에게 인사나 하러 가지 않을래?”
가스통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그러자. 나도 그 사람한테 할 말 있어.”
벨과 가스통은 고마운 요리사를 찾아 밖에 나왔는데 이미 그는 궁전 정문 쪽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벨과 가스통이 감옥에서 풀리는 날이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던 그였다.
“또, 길 잘못 들어서 개한테 물리실까봐요.” 무뚝뚝한 말투지만 어딘가 따뜻하게 들린다.
“이제는 개떼들이 나타나 공격 해온다면, 그 땐 무조건 도망가진 않을거에요! 아참, 예전에 제가 요리비법 알려드렸던 거에 대해서 보답하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혹시 지금 제 부탁하나 들어주실래요? 시계도 나말고 가스통형 줬으니깐.”
벨이 마치 외운 대사 마냥, 속사포같이 뱉어낸다.
“네 들어드려야죠. 어떤 부탁인가요?”
“여기 어두침침한 왕실 말고 나랑 바깥에 나가서 레스토랑이나 차리고 지내요.”
벨의 당돌한 청혼에 깜짝 놀란 비스트의 옆으로 찢어진 눈이 동그래진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하려던 말을 상대에게서 들으니, 겉으로 티를 많이 내지는 않았지만 정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원래 눈이 그렇게 컸나..? 왜 그렇게 놀라요. 싫으신가? 벨이 아깝지만.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네. 얼른 대답하셔요”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는 듯이, 가스통이 옆에서 거든다.
“그 부탁 물론 들어드릴게요. 여기서 지금 나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쌩하고 달려가더니 비스트는 삼십분 만에 자신의 짐을 모두 챙겨 나왔고, 그들은 꾀죄죄한 차림이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궁전을 나갔다. 걷는 내내,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들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내 인생에 있어 역사적인 날인거라고.
10년이 지나고,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벨과 비스트는 소박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아이를 낳는 대신 이제 8살이 된 한 남자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벨은 그녀의 전공이었던 여성학과에서 교수가 되어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물론 둘이 약속했던 대로 작은 레스토랑도 마련했는데 그곳에는 비스트가 요리사 겸 사장으로 있다. 집 근처의 작은 식당이지만 그 음식 맛을 좋아하는 단골이 많아 동네에서는 꽤 인기이다. 게다가 이제는 비스트의 부단한 노력으로 벨의 요리 실력을 뛰어 넘어, 집에서 요리는 비스트가 거의 다 할 정도이다.
아, 이 둘과 함께 삼각관계를 이뤘던 가스통은? 그 역시 행복한 결혼 생활 중이다. 비스트보다 더 매력적이고 다정한 한 남자와 함께.
☆새로운 시각에서 본 미녀와 야수(x) -> 벨과 비스트
안녕하세요!
동화 백설공주가 흑설공주로 새롭게 쓴 이야기 혹시 아시나요?
기존 백설공주에서 동화들이 갖고 있는 순수하고 예쁜 여성과 강인한 남성 그리고 언제나 해피엔딩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고자 했죠.
흑설공주책에는 백설공주 말고도 신데렐라, 인어공주 등의 유명한 동화들을 다루었는데, 이 글은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새롭게 바라본 내용이에요.
조금 길 수도 있지만 한 번 읽어봐주세요!!!!
너무 별로다 싶으면 악플 다셔도 되구요, 코멘트 부탁해요
건물 사이사이를 잇는 녹슨 철제 계단은 폭이 좁고 경사가 급했다. 녹슨 철제계단 위에는 그 계단과 어울리지 않는 방이 이어져 있다. 이어진 방 안은 망해가는 왕실의 모습을 나타내주듯 희끄무레한 빛이 가득 채우고 있다. 왕실의 위엄 따위는 없다. 제대로 된 가구도, 휘황찬란한 장식품도 없다. 오직 고요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아침 7시, 방 안에서 흘러나온 날카로운 목소리가 망해가는 왕실의 적막을 깬다.
“이 맛없는 음식을 나 먹으라고 만든 거야? 제정신이야? 내가 만들어도 이만큼은 만들 수 있어.”
적막을 깨는 왕비의 말에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왕비는 더 흥분하며 아침 식탁을 주먹으로 쾅쾅 친다.
“이 음식 만든 요리사 누구야? 누군데 감히 나한테 이런 음식을 들이밀어? 내 앞으로 당장 그 요리사 데리고 와. 누군지 얼굴이나 좀 봐야겠어.”
왕실 주방장은 옆에 서 있던 신하에게 조용히 말한다.
“당장 그 자식 끌고 와.”
주방장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주방장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번에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 주방장은 비스트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본다. 자신에게 앙심이 없다면 어떻게 아침마다 자신이 이런 모욕감을 느끼도록 한단 말인가. 비스트가 아침 식사를 준비한 날이면 항상 왕실은 아침부터 발칵 뒤집혔다.
이윽고 문이 삐걱 열리며 한 남자가 자신 없게 방 안으로 걸어들어 온다. 신하에게 이끌려온 비스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본인도 본인의 잘못을 아는 듯, 아무 말이 없다. 왕비 앞에서 어깨까지 축 쳐져 있는 비스트는 참 안쓰러워 보였다. 그가 앞에 도착하자 왕비는 더욱 소리 지르기 시작한다. 왕비는 누구길래 본인에게 이런 아침을 선사한 건지 괘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얼굴 들어봐. 난 네 얼굴을 좀 봐야겠어. 어떻게 생겼길래 이런 음식을 만드는 거야? 네가 만든 음식을 누가 먹는 건지 생각은 하면서 음식을 만들었어야 할 거 아니야!”
비스트가 얼굴을 빼꼼 들어 올리자 왕비는 더욱 분노했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았는데 속이 토할 정도까지 미슥거렸기 때문이다. 비스트의 얼굴은 여드름 투성이었다. 여드름이 나 있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것이 쉬울 정도로 여드름이 얼굴 전체를 점령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누가 잘못 때려서 모양이 일그러진 듯이 뭉뚝하게 생긴 코, 눈을 뜬 건지 안 뜬 건지 모르겠는 초점 흐린 눈빛, 한쪽이 교묘하게 밑으로 내려가 있는 듯한 입술. ‘신의 실패작’이 모두 모여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 “당장 나가! 여기서 당장 나가! 요리도 못하는데 생긴 것까지... 누가 저 사람을 왕실에 데리고 있는 거야? 저 사람 요리 다시 한 번 나한테 올리기만 해봐. 그 때는 음식 갖고 오는 사람까지 해고인 줄 알아!”
왕비는 그나마 잡고 있던 인내의 마지막 끈을 놓아버리며 호령했다. 비스트는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마냥 방을 급하게 빠져나왔다.
“대체 제가 뭐를 잘못한 거죠?”
비스트가 주방장에게 물었다. 비스트는 자신이 만든 음식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주방장이 가르쳐주길 원했다. 항상 비스트의 음식은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부분이 잘못됐다고 콕 집어 말해주는 사람은 그동안 아무도 없었다. 주방장은 비스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비스트, 왕실에서 네 존재 자체가 잘못이야.”
영국의 A대학교. 벨과 가스통이 대학 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벨의 앞에는 커다란 햄버거와 콜라가, 가스통 앞에는 닭 가슴살 도시락이 놓여 있다. 이들은 방금 여성학 수업이 끝난 뒤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벨은 A대학교 여성학과에 다니고 있는 대학원생이고, 가스통은 벨의 같은 대학 선배다. 벨은 항상 그렇듯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2016년, 영국 사회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성의 마른 몸이 아름다운 몸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거식증에 걸린 여성들이 늘어나며 사회에서는 ‘건강한 몸’이 아름다운 몸이라는 또 다른 사고방식이 피어났다. 사회적으로 구성됐던 여성의 몸에 대한 미의 기준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본인의 마음에 드는 몸이 아름다운 몸이라는 인식. 그러나 이런 인식의 변화는 벨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벨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먹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가스통은 물끄러미 맛있게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있는 벨을 바라봤다.
“형,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왜 그렇게 쳐다 봐.”
벨은 항상 가스통을 ‘형’이라고 부르곤 했다. 언제부터 가스통을 ‘형’이라고 불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건 가스통에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가스통은 벨이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참 좋았다. 벨과 말하다 보면 가스통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곤 했다. 벨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정신적인 성감대를 벨이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 들었다. 가스통은 늘 생각했다.
‘벨이 만약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가만히 앉아있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벨에게 매력이 있었을까.’
만약 벨이 그랬다면 가스통은 벨을 절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로 인해 가스통은 늘 본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새로운 모습에 가끔 놀라기도 했지만 가스통은 그렇게 발견해가는 새로운 모습들이 너무 좋았다.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내 모습이 하나하나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벨, 요즘도 아버지 그러시니?”
가스통은 불현듯 벨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벨은 항상 아버지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벨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이곳저곳 혼자 돌아다니면서 탐구하는 것을 즐겼고 무언가 발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발명 때문에 집에 불이 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벨은 그때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할 일보다 아버지를 더 먼저 챙겨야 했다. 가스통은 벨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먼저 챙기는 것이 탐탁치는 않았다. 벨은 햄버거를 마저 베어 물며 가스통의 말에 대답했다.
“응. 아버지 요즘에는 예전보다 더 자주 혼자 돌아다니시네. 걱정돼. 요즘은 건강도 안 좋으신데 말이야.”
그날 밤, 가스통은 벨의 전화소리에 깨야 했다.
“형, 아버지가 사라지신 것 같아. 어떡하지.”
가스통은 드디어 터질 일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의 아버지가 요즘따라 더 심각해진 것 같다는 벨의 말이 생각났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시각 벨의 아버지는 왕실 근처에 있었다. 혼자 망상에 빠져 돌아다니다가 왕실 근처까지 오게 된 것이다. 왕실을 보게 된 벨의 아버지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왕실은 어떻게 생겼을까. 저 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벨의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왕실 안에 들어가게 됐다. 왕실 안에는 뭔가 새로운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일을 보고 나면 자신이 요즘 만들고 있는 발명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벨의 아버지는 실망하고 말았다. 새로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실 안에는 오로지 고요밖에 없었다. “삐용삐용” 순간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렸다. 경보음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불빛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왕실을 구경하고 있던 벨의 아버지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고요함 속에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멈춰선 벨의 아버지를 순식간에 병사들이 둘러쌌다. 병사들은 벨의 아버지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침입죄’라는 말을 하며 벨의 아버지를 감옥에 가뒀다.
벨의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비스트였다.
‘아, 이게 아니었는데. 어떡하지.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비스트는 쉴새없이 이 말을 반복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비스트는 벨의 아버지가 왕실 근처에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 비스트는 왕비에게 ‘다시 한 번 이런 음식을 만들기만 하면 왕실에서 쫓겨 날 줄 알라’는 경고를 받았다. 비스트는 그 경고를 받은 뒤 왕실 주방장이 자신에게 음식에 대한 조언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주방장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비스트는 자신에게는 전부인 요리를 더 이상 못하게 될 것이 두려워 큰 결심을 했다.
‘오늘 밤 주방장의 방에 몰래 침입하자. 주방장이 갖고 있는 레시피를 잠시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복사본만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결심으로 비스트는 오늘 주방장의 방에 침입했다. 주방장의 방에 경보등이 달려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벨의 아버지가 붙잡히기 바로 직전 울렸던 경보음은 바로 비스트가 주방장의 방에 침입해 울리게 했던 것이었다. 비스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왕실의 경비원에게 ‘저 사람이 왕실에 침입해 기밀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고 말해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벨의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ㄸ ㅏ ㄹ... 아빠 왕실에...”
가스통과 돌아다니던 벨의 핸드폰에 ‘띠링’하고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아버지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낸 문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가득했다. 무언가를 문자로 치려고 했지만 제대로 치지 못한 듯한 문자였다. ‘이게 무슨 말일까’ 벨은 한참이고 생각해야 했다.
‘왕실에 갇혔다는 말인가?’
벨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가스통과 함께 왕실로 향했다.
벨은 왕실에 도착하자마자 엄청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여기 계세요?”
이 소리에 왕실에 있던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를 찾으러 왔어요.”
병사들은 이 소리를 듣고 벨과 가스통을 감옥으로 안내했다. 아버지는 감옥에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벨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또 한번 병사들한테 쏘아붙였다.
“아버지를 왜 여기에 가둔 거죠? 이유가 뭔가요? 요즘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으신데 가둬놓은 이유가 뭔가요?”
병사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벨은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아버지가 특이하긴 하지만 그런 일을 하실 분은 아니라고 항의했다. 병사들은 그러면 아버지를 풀어줄테니 벨과 가스통이 일주일 동안 감옥에 대신 갇혀 있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벨과 가스통은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벨의 아버지가 건강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비스트는 또 다시 구석에 숨어 이런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나 때문이다. 한 명만 갇힐 수 있었던 게 나 때문에 두 명씩이나 갇히게 됐다. 내가 무슨 일을 한 걸까.”
그로부터 5일 정도 지난 밤, 벨은 자고 있는 가스통을 깨웠다.
“형, 일어나.”
“벨, 왜 그래?”
벨은 계속해서 가스통을 조용히 하지만 강하게 흔들었다.
“형, 일어나. 탈출하자. 우리 여기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어. 아버지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여기서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있어야해.”
가스통 역시 생각해보니 그랬다. 벨의 아버지가 왕실 기밀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 이틀 째 갇혀 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가스통은 도망쳐서 빠져나가자는 벨의 말에 동의했다. 이 둘은 그날 밤 몰래 왕실을 빠져나갔다.
왕실을 빠져나가는 과정까지는 순탄했다. 경보음이 왠일인지 울리지 않았다. 당연히 보조등도 켜지지 않았다. 둘은 신속하게 왕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순간 발생했다. 난데없이 산속에서 개떼가 나타난 것이다. 개떼들은 며칠은 굶은 것 같았다. 추운 겨울 산 속에서 먹을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개떼들은 맛있는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벨과 가스통에게 덤벼오려고 했다. 벨과 가스통은 개떼들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가스통은 벨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가스통이 벨을 지켜줄 필요는 없었다. 벨이 가스통보다 훨씬 민첩하고 빨랐기 때문이다. 가스통은 ‘남자라는 이유로’ 벨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개떼에게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벨에게 다가가는 순간 개떼들이 가스통의 무릎을 물어버린 것이다. 가스통이 개에게 무릎을 물린 순간 저 멀리서 갑자기 고기 덩어리가 날아왔다. 비스트가 던진 고기 덩어리였다. 사실 비스트는 가스통과 벨이 궁궐을 탈출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스트는 이들이 감옥에 갇힌 이후로 하루도 편안하게 잠을 자본적이 없었다. 마음이 답답해서였다. 분명 잘못은 본인이 했는데 아무 상관없는 저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비스트는 고기를 던져 가스통을 위기로부터 탈출하게 해 줬다. 위기는 벗어났으나 가스통의 상처가 너무 깊어 벨과 가스통은 마을로 도망가지 못하고 왕실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가스통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비스트는 이들을 감옥으로 다시 데려왔다. 벨과 가스통은 많이 지쳐보였다. 비스트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이들에게 대접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들은 제대로 된 밥 한 끼 못 먹었다. 비스트는 주방으로 가 서둘러 요리를 한 뒤 감옥으로 음식을 갖고 왔다.
벨과 가스통은 맛있게 음식을 먹으려고 했으나, 그러기에 비스트의 요리는 너무 맛이 없었다.
“형, 이 음식 먹을 수 있겠어?”
벨은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나 워낙에 벨의 목소리가 큰 바람에 이 소리는 비스트의 귀까지 들어갔다. 비스트는 다시 한 번 절망했지만 이번에는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제 음식이 어떤 게 잘못된 거죠? 어떤 부분이 문제인가요?”
벨은 이것저것 음식의 문제를 짚어주기 시작했다.
“음식에 일단 간이 안 맞아요. 간이 맞아야 음식의 재료 맛도 살아나고 조화로워지는데, 소스부터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벨은 비스트에게 종이 한 장을 달라고 했다. 비스트는 벨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벨은 비스트가 준 종이에 이것저것 적기 시작했다.
“이대로 한 번 만들어 봐요. 지금 만들어진 음식보다는 훨씬 맛이 좋을테니.”
벨이 내민 종이에는 재료와 레시피, 음식을 만들 때 주의해야 하는 점 등이 적혀 있었다.
그 다음날 저녁에도 비스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벨을 찾아왔다. 벨이 가르쳐 준대로 요리를 한 뒤 어제보다 나아졌나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벨 잠시 시간돼요?”
비스트는 머쓱한 표정으로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벨은 비스트의 모습을 보고 비스트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구부정한 자세와 자신 없는 비스트의 표정이 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은 비스트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었다. 비스트가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슨 일이에요?”
별 관심없는 듯한 표정으로 벨은 비스트에게 물었다.
“어제 가르쳐준대로 음식을 다시 만들어봤어요. 어떤지 좀 시식해주시겠어요?”
벨은 비스트의 말에 음식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어제보다 맛은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뭔가 가공된 듯한 맛이 났다.
“음식 소스를 어떻게 만든 거죠?”
벨의 질문에 비스트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과정을 차례차례 말하기 시작했다. 음식에는 온갖 기름과 조미료가 다 들어가 있었다. 비스트의 말을 들으며 벨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음식에 안 좋은 재료란 재료는 다 집어 넣었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재료는 몸에 안 좋잖아요. 조미료 빼고 기름도 좀 빼요.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벨은 조미료 대신 넣으면 되는 재료들을 말해줬다. 비스트는 벨의 말을 메모지에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그 다음날도 비스트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들고 벨을 찾아왔다. 벨은 또 음식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내리고 조언을 해줬다. 비스트는 계속해서 만든 음식을 벨에게 맛보게 했고 벨은 꾸준히 조언을 해줬다. 이들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지는 만큼 이들은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서로 이야기를 하며 상대방이 본인과 비슷한 면이 은근히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은 비스트의 경제력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왕실의 일개 요리사여도 상관없었다. 비스트가 어떤 집에 살든, 그가 차가 있든 없든 그건 벨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벨은 비스트의 성격과 그의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지금에서야 내 앞에 나타난걸까. 남자 벨이잖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벨은 서서히 비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 다음날, 저녁 식사시간 즈음 비스트는 벨이 조언해준 대로 만든 음식을 선보이고 싶어 감옥으로 찾아 간다. 그런데 저번에 궁에서 도망가려다가 개떼에게 상처 입은 가스통이라는 남자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게 물렸는지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구급약통도 같이 들고 갔다.
벨이 비스트가 들고 온 연어구이를 맛보는 동안, 비스트는 가스통에게 다가간다.
“저기요 그 때 물린 상처가 낫질 않는 것 같은데, 제가 약통 들고 왔거든요. 좀 봐드릴까요?”
가스통은 의외의 친절에 당황했지만 여하튼 아픈 곳 치료해준다니 일단 깨진 무릎을 들이 밀었다.
“아앗 따가워!”
“빨간약이 원래 따갑죠. 엄살도 심하시네. 좀 참아봐요. 후-”
벨과 함께 감옥에 갇혀있는 가스통은 그 날 이후로 계속 혼란스럽다. 그 때 후- 하고 불어주던 그 입김이, 아니 그 친절이 자꾸 잠들기 전 밤이면 생각이 나는 것이다. 비스트는 그저 한 거짓말 때문에 두 사람이 일주일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 뭐라도 계속 해주고픈 마음뿐이었지만, 얼굴은 일그러지고 괴팍하게 생긴 사람이, 이게 바로 반전이라는 건가, 요리도 하고 자신의 아픈 곳 까지 신경써주는 비스트라는 남자가 의아하면서 어딘가 묘하게 끌렸나보다.
‘이상해. 원래 난 오직 벨만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었는데.’
가스통은 한 때 좋아했던 씩씩한 벨을 가만히 쳐다보며 생각에 빠져있다. 그랬다. 그는 벨의 적극적이고 자기주도적인 면을 좋아했었는데 지금 그 여자가 내 옆에서 발라당 엎어져 누워있어도 머릿속에 자꾸 맴도는 건 다른 남자였다.
“형 뭐해? 안 자? 걱정 말고 푹 자둬. 이제 이틀만 지나면 여기에 갇혀 있는 것도 일주일째니깐 나갈 수 있을거야.”
“아 그. 그래. 잘자.”
두 사람은 이틀 뒤에 이 침침하고 어두운 왕실의 감옥을 뛰쳐 나가는 꿈을 꾸었다.
비스트는 그렇게 남은 이틀도 꾸준히 감옥을 드나들었고 세 사람은 어느 새 친한 친구사이가 된 것만 같았다. 벨의 조언 덕분에 비스트의 요리 실력은 많이 개선되어 자신감도 생기고 구부정했던 그의 어깨도 조금은 펴진 것 같았다.
“저 이제 주방에서 더 이상 설거지하는 일은 안 해요. 고마워요 벨.”
“별거는 아니었는데. 고마우면 보답하셔요. 하하.”
벨이 머쓱해 하며 대답했다. 벨도 가르친 것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인지 기분이 좋았다.
“혹시 시계 필요하신가요? 아까 저녁 해산물파스타가 마음에 드셨다고 왕비님께서 포상을 주셨거든요. 저는 이미 하나 있어서요.”
“전 괜찮아요. 나도 집에 가면 있는데 뭘. 형 혹시 필요해?”
문득 던진 벨의 질문에 가스통은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가스통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더듬는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비스트의 눈을 보고 단 둘이 이야기 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네? 아..저는 좋죠. 제, 제가 받을게요. 안 그래도 새 시계 사려고 했는데.”
비스트는 다음 날 아침에 들릴 때 가져오겠다고 하고 이만 감옥을 나갔다.
“내일 다시 올게요. 두 분, 안녕히 주무십시오.”
비스트는 이게 사적인 감정 때문인지, 정말로 보답하고픈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벨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록 벨에게는 아니지만 벨과 오랜 시간 친했던 가스통에게라도 호의적인 표현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비스트와 가스통은 우연히 화장실에서 만났다. 비스트는 마침 지금 시계 들고왔다며 가스통에게 건넸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마침 잘 만났습니다. 여기, 어제 드리기로 한 시계입니다. 벨에게도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벨은 일어났습니까?”
가스통은 비스트의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냥 이때다 싶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입을 뗐다. 어제 밤 한 숨도 못자고 끝내 내린 결론이었다.
“저, 아무래도 제가 비스트 당신을....”
“예? 잘 안들려서요.”
“언제부터인가 자꾸 당신 생각이 납니다. 자기 전에도 아른거리고, 다음 날 만나 같이 아침식사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떨려요. 저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고해졌습니다. 당신이 제 상처를 치유해 줄 때의 그 느낌도 잊을 수 없고, 함께 대화를 할 때도 처음 느껴보는 심장의 두근거림이었어요. 제 마음을 꼭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가스통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비스트는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침착하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정말 몰랐습니다. 저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끼신다니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다른 사람이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당신하고 아주 가까운 사람이지요. 그 마음이 너무 확실하고 가득해서 지금 제 마음에는 종이 한 장의 여백이 없네요.”
하고는 홀연히 가스통을 두고 화장실을 나왔다. 가스통은 한참을 동장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물이 날 뻔도 했지만 참을만했다. 그날 가스통은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음 날 벨은 무턱대고 새벽부터 일어나 감옥을 감시하는 경비에게 내보내 달라고 소리를 꽥꽥 지르더니 경비가 질색을 하며 꺼내주었다. 드디어 벨과 가스통이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 일주일 째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가장 신나 보이는 벨은 궁궐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다 녔다.
“와! 드디어 집에 간다. 아버지는 집에 잘 계시겠지?”
“응 얼른 돌아가자. 아, 근데 우리 콩밥 대신 매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 먹게 해준 그 비..스트라는 사람에게 인사나 하러 가지 않을래?”
가스통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그러자. 나도 그 사람한테 할 말 있어.”
벨과 가스통은 고마운 요리사를 찾아 밖에 나왔는데 이미 그는 궁전 정문 쪽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벨과 가스통이 감옥에서 풀리는 날이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던 그였다.
“또, 길 잘못 들어서 개한테 물리실까봐요.” 무뚝뚝한 말투지만 어딘가 따뜻하게 들린다.
“이제는 개떼들이 나타나 공격 해온다면, 그 땐 무조건 도망가진 않을거에요! 아참, 예전에 제가 요리비법 알려드렸던 거에 대해서 보답하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혹시 지금 제 부탁하나 들어주실래요? 시계도 나말고 가스통형 줬으니깐.”
벨이 마치 외운 대사 마냥, 속사포같이 뱉어낸다.
“네 들어드려야죠. 어떤 부탁인가요?”
“여기 어두침침한 왕실 말고 나랑 바깥에 나가서 레스토랑이나 차리고 지내요.”
벨의 당돌한 청혼에 깜짝 놀란 비스트의 옆으로 찢어진 눈이 동그래진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하려던 말을 상대에게서 들으니, 겉으로 티를 많이 내지는 않았지만 정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원래 눈이 그렇게 컸나..? 왜 그렇게 놀라요. 싫으신가? 벨이 아깝지만.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네. 얼른 대답하셔요”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는 듯이, 가스통이 옆에서 거든다.
“그 부탁 물론 들어드릴게요. 여기서 지금 나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쌩하고 달려가더니 비스트는 삼십분 만에 자신의 짐을 모두 챙겨 나왔고, 그들은 꾀죄죄한 차림이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궁전을 나갔다. 걷는 내내,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들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내 인생에 있어 역사적인 날인거라고.
10년이 지나고,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벨과 비스트는 소박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아이를 낳는 대신 이제 8살이 된 한 남자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벨은 그녀의 전공이었던 여성학과에서 교수가 되어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물론 둘이 약속했던 대로 작은 레스토랑도 마련했는데 그곳에는 비스트가 요리사 겸 사장으로 있다. 집 근처의 작은 식당이지만 그 음식 맛을 좋아하는 단골이 많아 동네에서는 꽤 인기이다. 게다가 이제는 비스트의 부단한 노력으로 벨의 요리 실력을 뛰어 넘어, 집에서 요리는 비스트가 거의 다 할 정도이다.
아, 이 둘과 함께 삼각관계를 이뤘던 가스통은? 그 역시 행복한 결혼 생활 중이다. 비스트보다 더 매력적이고 다정한 한 남자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