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랑채로 돌아오자마자, 제영은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일기장을 훑어볼 요량으로 자신의 허리춤에 넣어 둔
일기장을 꺼냈다.
"분명..분명 이사람도 뭔가 느꼈던 게 분명해..!"
그는 확신에 찬 상태로 자신이 전에 읽었던 부분의 다음 장을 펴보기 시작했다.
『3. 내가 그 구덩이를 다시 찾아갔을 때 느꼇던 것은 왠지모를 부자연스러움 속에 느껴지는 인위적인 조작감.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조작한 느낌이 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의 뼈가 그런 기하학적 무늬로 놓여져있을리도 없고 1미터 남짓 되는 뼈들만 모아놓았을 리가 없을테니까. 하지만 그 의도가 뭔지는 나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 떡을 주러 왔던 그 여자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여자...?"
제영은 책상에 놓여있는, 시간이 지나 다 굳어버린 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송..지현이라고 했던가..."
"어라? 저건 왠 떡이죠?"
제영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일기장을 책상 밑으로 급히 던져버리고는 뒤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인위적인 웃음에 지은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듯 했으나
제영은 그러한 지은의 모습을 무시한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아까 어떤 여자분이 오셔서 떡을 주고 가셨어요."
"여자..분..?"
"네. 송..지현이라고 하던데..어라..? 지은씨?"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가던 제영은 난데없이 풀썩 주저앉아버리는 지은을 보고는 놀란 듯이 그녀를 향해
뛰어나갔다.
"왜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송..지현이라고..했나요..?"
"네..송 지현이요. 아마 맞을거에요."
"흐흑...."
난데없는 지은의 울음. 난처해하는 제영.
당황스러운 상황에 제영은 지은을 달래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우는 건지..이유를 물어봐도 되나요..?"
말없이 흐느끼던 지은은 눈가가 촉촉히 젖은 채로 제영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보니 꽤 이쁘장한 얼굴이잖아..?'라고 생각한 제영.
이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는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더듬거리며 다시한번 물었다.
"저..저기..."
"제 동생이에요.."
"네..?"
그녀는 제영의 되물음에 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지은을 달래주는 제영의 마음 역시 편할리가
없었다. 그는 우는 지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가..살아 있는게 다행스러워서 우는건가요..?"
"흐흑..그래요..날짜 상으로는 살아있어야한다고 생각은 했지만...확인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녀와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건가요?"
"네..흐흑..만날 수가 없었어요.."
"...다행이에요..다행이야.."
우는 지은을 달래는 제영. 그러나 시선은 지현이 들어왔던 문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제영은 한 손으로는
울고있는 지은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은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녹음기를 매만지고 있었다.
"지은씨..만약 지현씨가 살아있다면 어디에 살고 있을지 혹시 알고 있나요?"
"네..?"
"만약 지현씨가 살아있다면..우리 쪽에 큰 도움이 될 가능성도 있고, 그녀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서 나가야할 사람이니까요."
제영은 그녀를 향해 밝게 웃어보였다. 마치 '나는 당신을 신뢰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러한 제영의 모습이
오히려 의심스러운 지은이었지만, 일단은 그와 함께 행동해야하기 때문에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을 안에 촌장의 아내들이 모여서 사는 큰 절이 있어요. 아마 그 곳에 있을 거에요.."
"큰 절이라...."
"어쩔 셈이죠..?"
지은은 자신의 눈물이 창피했는지 뒤돌아 눈물을 닦아내며 그에게 물었다. 제영은 밝은 어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찾아가야죠. 그녀도 우리와 한 편일테니까요."
지은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제영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어제 이상한 낌새를 봤거든요. 그걸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요. 섣부르게 돌아다니지 말아요.』
다음날 제영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지은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쪽지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제영은 행랑채를 쓰윽 훑어보더니 문을 살짝 열고는 밖을 두리번거렸다. 지은이 근처에 있는지 확인할 속셈인 듯 보였다.
지은이 없는 것을 확인한 제영은 부리나케 책상으로 달려가 밑에 던져놓았던 일기장을 펴보기 시작했다.
『4. 어제 찾아왔던 그녀가 찾아온 것은 내가 그 의심스러운 구덩이를 조사한 뒤였다. 그 구덩이에 대해 내가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분명 그녀라면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믿어야 할 사람은 촌장 뿐인가....』
"이 사람은...촌장을 믿었던 건가..."
제영은 일기장을 덮은 후 그것을 허리춤에 차고는 문을 나섰다. 행랑채 문 앞에서 마을을 바라보니
분명 마을 안에 큼지막한 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마을에서 등을 돌리고
어제 가보았던 구덩이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몇 분쯤 뛰었을까.
제영이 구덩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어제와는 다른 이상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1미터 남짓으로 파인 구덩이와 옆에 널부러져있는 커다란 돌. 그리고 돌 주위에 묻어있는 촉촉한 흙..
그러나 그 구덩이 속에 놓여져 있어야 할 뼈들이 보이지 않았다.
"뭐..뭐야..나말고 이 곳에 온 사람이 또 있다는 거야...?"
그는 조심스럽게 구덩이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뼈들이 사라졌다는 것 이외에는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는 듯 보였다. 제영은 쭈그리고 앉아
구덩이 안 쪽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음...일부러 1미터 정도 되는 사람의 뼈를 모아다가 이 구덩이에 그런 모양으로 쌓아놓을 이유가 뭘까..
분명 부자연스러워..그 책에서 나온 것 처럼 인위적인 냄새가 나는 것도 사실이야..."
제영은 구덩이 안을 조금 자세히 바라볼 요량으로 몸을 더욱 숙였다.
"중요한 것은 왜 그랬냐는 것인데..."
그는 뭄을 엎드린 자세로 누운 채로 구덩이 안 쪽에 손을 넣어보았다. 구덩이 안 쪽의 흙을 만져보던 제영이
별안간 흠칫하더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구덩이 바닥을 보고 있는 이유가 뭐지...?"
그는 멍하니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뼈가 없었으니까..?"
그는 무릎을 굽힌 채 구덩이 안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뼈가 있었을 때는...왜 구덩이 속을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
별안간 제영이 구덩이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완결성이 있었으니까. 뼈가 그런 식으로 뉘여져 있다면..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거야."
제영은 구덩이 안쪽을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그 곳이 구덩이의 맨 아래쪽 바닥일 거라고! 바로 그거야..그래서 인위적이었던 거지..!"
그는 미친듯이 구덩이를 파고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구덩이 안쪽의 땅은 한번의
굴착이 된 것처럼 쉽게 파여나가고 있었다.
한참동안을 정신없이 구덩이를 파고들어가던 제영의 손이 별안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영은 자신이 파고 들어간 구덩이의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누가 뼈를 치운거지..?"
구덩이 안 쪽에서는 바깥쪽을 바라볼 수 없다.
그렇기에 제영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알아챌 수 없었다.
소설가 -完- 베스트 셀러
한참동안을 정신없이 구덩이를 파고들어가던 제영의 손이 별안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영은 자신이 파고 들어간 구덩이의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누가 뼈를 치운거지..?"
구덩이 안 쪽에서는 바깥쪽을 바라볼 수 없다.
그렇기에 제영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알아챌 수 없었다.
제영을 향해 다가오던 그림자가 별안간 제영을 불렀다.
"거기서..뭐하세요?"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던 제영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면서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지은이 서 있었다.
"아..그..그러니까 이게..."
"맘대로 돌아다니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그..그게.."
"뭐..이번 만큼은 멋대로 나온게 우리 목숨을 살렸네요."
"네...?"
"촌장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무,무슨.."
"제영씨가 언제 나갔고 촌장이 언제 들어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행랑채가 온통 난장판이 되어있는걸 보면
촌장이 이제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작정을 한듯 보여요."
"아.."
"다행히도 나는 잠깐 마을에 다녀온 참이었고, 제영씨는 제 말을 듣지 않고 이 곳에 와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구요."
"다..다행이네요.."
"하지만 우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그 쪽이 눈치 챘을테니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하죠..?"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네?"
"그 쪽이 오기 전에 우리가 가면 되죠."
말을 마친 지은은 뒤로 돌아 마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영은
자신의 발 밑에 있는 종이 쪽지를 주머니에 쑤셔넣은 뒤에 지은을 따라서 마을쪽으로 몸을 돌렸다.
#
지은은 제영이 자신을 따라오리라고 확신한 듯 보였다. 마을을 지나서 지은의 동생, 지현의 집으로 향하는 내내
지은은 제영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이 제영에게는 이점으로 작용한 듯 보였다.
제영은 지은의 눈치를 살피며 방금 전에 땅을 파서 얻게 된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것은 당신 역시 그 구덩이의 비밀을 알아냈다는 뜻이겠지. 또한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즈음이면 난 이미 그들의 뱃 속으로 들어간 후일테고.. 난 당신이 얼마만큼의 증거와 믿음을 가지고 당신이 믿고있는 누군가를 따르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무엇을 얼마만큼 알고있던 이 한마디만큼은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절대 그녀를 믿지마.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다. 그리고 내가 쓴 일기장은 더이상 믿지않는 게 좋아. 내가 이편지를 남긴 시점 이후부터는 그녀를 속이기 위해 아무말이나 지껄여놓은 낙서장에 불과하니까.』
"이 남자..촌장을 믿었던 게 아니었어..?"
제영은 자신이 읽은 편지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뒷춤에 넣어두었던 일기장을 펴 보았다.
확실히 편지의 내용은 사실인 듯 보였다. 그 전까지와는 다르게 일기장에는 온통 촌장을 의심하는 내용과 그녀에 대한
신뢰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영은 고개를 가로저은 뒤에 일기장을 조용히 길가에 던져버렸다.
"다왔어요."
지은의 말에 앞을 바라본 제영의 눈에는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뭔가 음습한
기운이 넘쳐보였기에 제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마 저 안에 촌장이 있을거에요. 일단 들어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야해요. 우리가 갑자기 들이닥치면
촌장 쪽에서도 다짜고짜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진 않을테니."
"공격은..?"
"상대가 당황한 틈을 타서 재빠르게 촌장을 포박해야해요. 바로 이걸로."
지은이 불쑥 내민 손에는 이상한 모양의 매듭이 잔뜩 잡힌 새끼줄이 들려 있었다.
"이게..뭐죠?"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아까 마을을 수색하던 도중에 이 끈을 발견했어요. 뭔가 범상치 않아보이기에 가져왔더니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되는군요."
지은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앞으로 한걸음을 내딛었다.
"자, 시작해볼까요."
"그래요."
새끼줄을 받아 쥔 제영의 눈이 지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
지은과 제영이 음습한 집으로 뛰어들어간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촌장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흐음...이 곳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온화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촌장은 무서우리만큼 매서운 눈초리로 지은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한 촌장의 모습에 지은이 적잖이 당황한 듯 제영에게 속삭였다.
"우..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이걸 어..."
순간이었다.
지은의 뒷 쪽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제영이 별안간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새끼줄로 지은을 감아버렸고,
무방비 상태로 포박당해버린 지은은 제영을 향해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안타깝게도...절 속이는 데 실패한 것 같아요. 지은씨."
"무..무슨?!"
제영은 아무말 없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들고는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어머..제영씨는 참 친절하시네요!! 이런 선물 처음받아봐요!! 호호. 고마워요 제영씨!
별말씀을. 저야말로 감사드려요.』
STOP.
"이게 누구의 목소리인지..알겠죠?"
"그..그건 분명 제 동생의..."
"그래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이건 당신의 동생 지현씨의 목소리겠죠."
"그..그게 어쨌다는 거에요! 죽고싶어요?! 우리의 적은 저 뒤에있는 촌장이라구요!"
"글쎄요..."
제영은 자신의 녹음기를 다시한번 재생시켰다.
어머..제영씨는 참 친...』
STOP.
PLAY.
『어머.. 제영씨는..』
STOP.
PLAY.
『어머.. 제영씨는..』
STOP.
별안간 지은의 눈썹이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을 눈치 챈 제영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죠...분명 이 목소리는 지은씨의 동생인데...제 이름을 처음부터 알고 있더라구요?"
"..."
"전 분명 알려준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참 이상하죠?"
"...그..그건 촌장이 알려줬을수도!"
"촌장에게도 전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요. 제 이름을 알고있는 유일한 사람은 지은씨 당신뿐이죠."
"...아...맞아요. 제가 동생과 만나서 이야기해줬던 것 같아요!"
"이런...당황하셨나봐요. 지은씨. 당신은 제 앞에서 여동생의 소식을 듣고 운 적이 있었죠?"
"..."
"그 때 뭐라고 말씀하셨었는지 기억이 나세요?"
"...."
"그때 분명 댱신은 이렇게 말했죠. '살아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라구요."
지은의 얼굴에서 한줄기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지은의 얼굴은 당황한 모습이라기 보다는
분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그..그건..."
"아, 그리고 이런 것도 발견했어요."
제영은 방금 전 구덩이에서 발견한 편지를 지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촌장의 얼굴이
즐거운 듯 보였지만 그 모습을 제영이 바라볼 수 있을리가 없었다.
"거기엔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고 써있더군요. 바로 당신 '송지은'말입니다."
"...제길...."
그녀는 분하다는 듯이 편지를 찢어서 자신의 앞으로 던져버렸다.
"확실히 저의 패배네요..."
제영은 그녀를 째려본 뒤에 촌장에게로 돌아섰다.
"자, 촌장님. 이제 저 여자를 어떻게..."
잠시였다.
아주 잠시동안 제영은 촌장이 웃고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촌장의 손에는 커다란 방망이가 들려있었고,
그 방망이는 이미 하늘 높이 올라가서 무언가를 향해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그 방망이의 사정거리로는 지은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
제영의 머릿 속에 방금전 그녀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확실히 저의 패배네요...』
'패배라니...도대체 무엇을? 그리고 누구에게..?'
제영의 의식이 흘러감과는 상관없이 촌장의 방망이는 그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
"으..으으...이게 뭐하는..짓입니까.."
제영이 정신을 차린 것은 날이 어둑어둑해질 저녁 무럽이었다. 쓰러져있는 제영의 앞에는 촌장과 지은이
서 있었다. 그들은 뭐가 즐거운지 싱긋싱긋 웃고 있었지만 촌장 쪽이 더욱 신나보였다.
"제영씨..라고 했던가? 확실히 당신은 똑똑한 인텔리젼트였던 것같구만 그래."
"생긴게 멍텅구리하게 보여서 방심했더니...쳇."
제영을 향해 환하게 웃는 촌장의 모습과는 달리 지은은 그를 향해 기분 나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게..어떻게 된거냐고..."
"아아. 궁금하겠지. 궁금할거야. 뭐 간단히 말하자면 '게임'이야."
"게임..?"
의아해하는 제영의 물음에 지은이 이어서 대답했다.
"그래 게임. 과연 처음보는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쪽은 누구인가 하는 게임."
지은은 제영에게로 뚜벅뚜벅걸어갔다. 그리고는 제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긴 사람은 먹을수 있는거지. 당.신.을."
싱긋 웃어보이는 지은.
'어쩐지 처음부터 웃는 모습이 소름끼치더라니. 제길.' 이라고 생각하는 제영이었다.
"확실히 처음엔 내가 불리했지. 남자라는 생물은 같은 남자보다는 여자쪽에 흥미가 생기고 믿음을 주기 쉽거든.
하지만 당신은 보기완 다르게 똑똑했고, 내가 설치해놓은 일기장과 편지를 정확하게 분석해내더군."
"쳇..트릭으로 따지면 내 눈물연기와 동생연기도 한몫 했다고! 조금 실수했을 뿐이지.."
지은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제영을 쏘아보고는 뭐라고 작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짜였나..?"
"모~~두가 가짜였지. 나의 이야기도, 저 불여우의 이야기도."
"제기랄..."
모든 것을 체념했다는 듯이 제영이 고개를 떨구었다.
"포기하는 건가?"
"이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는게 더 웃긴거 아닌가?"
"큭큭..마지막으로 질문 몇개는 받아주도록 하지. 그냥 잡아먹히는 건 억울하니까 말이야. 어떤가?"
촌장은 자애로운 듯한 포즈를 취하며 그를 바라보았고, 제영은 멀뚱히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매일 이런 식으로 식량을 구하는 건가 당신들은?"
"물론."
"너무 적어 보이는데? 기껏해야 한둘일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잡아오면 오히려 내가 잡혀서 죽을테고..안전 속의 빈곤 이랄까.."
"흐음...그렇군.."
"더이상 질문할 것은?"
"죽기 직전이라 그런지 머리가 하얘서 생각나는게 없는 것 같네."
"자, 질문이 끝났으면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구만 그래."
촌장이 옆에 놓여있는 피묻은 방망이를 들고 일어서자 지은은 제영을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짜증난다는 듯이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촌장이 제영에게로 다가오는 그 순간에도 제영은 촌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촌장의 방망이가 번쩍 올라왔다.
#
".....이건 대박이야...신발! 이건 대박이라고!! 크하하핫!!!"
무수히 많은 A4용지 다발을 책상에 던져놓듯이 내려놓은 사내가 제영을 향해 크게 웃어보이며 소리쳤다.
"이건 당장 출판해도 아깝지 않겠어!! 푸하핫! 거봐 임마! 내가 여행한번 다녀오면 좋~은 작품 나온다고 했지?!!!"
"아아..그렇군."
"새끼야 이건 대박이야 정말!! 식인 마을에 들어간 사나이~ 믿을거라곤 오로지 자신뿐!! 캬!!!"
"바로 출판 가능한거냐 창식아?"
"물론이지 임마! 이거 내가 장담하는데 베스트 셀러다!!"
호들갑을 떨고있는 창식과는 달리 제영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다. 그러한 제영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너구리가 퍼온이야기 [소설가 7~완결]
====================================================================================
소설가 -7- 구덩이
행랑채로 돌아오자마자, 제영은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일기장을 훑어볼 요량으로 자신의 허리춤에 넣어 둔
일기장을 꺼냈다.
"분명..분명 이사람도 뭔가 느꼈던 게 분명해..!"
그는 확신에 찬 상태로 자신이 전에 읽었던 부분의 다음 장을 펴보기 시작했다.
『3.
내가 그 구덩이를 다시 찾아갔을 때 느꼇던 것은
왠지모를 부자연스러움 속에 느껴지는 인위적인 조작감.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조작한 느낌이 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의 뼈가 그런 기하학적 무늬로 놓여져있을리도 없고
1미터 남짓 되는 뼈들만 모아놓았을 리가 없을테니까.
하지만 그 의도가 뭔지는 나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 떡을 주러 왔던 그 여자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여자...?"
제영은 책상에 놓여있는, 시간이 지나 다 굳어버린 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송..지현이라고 했던가..."
"어라? 저건 왠 떡이죠?"
제영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일기장을 책상 밑으로 급히 던져버리고는 뒤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인위적인 웃음에 지은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듯 했으나
제영은 그러한 지은의 모습을 무시한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아까 어떤 여자분이 오셔서 떡을 주고 가셨어요."
"여자..분..?"
"네. 송..지현이라고 하던데..어라..? 지은씨?"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가던 제영은 난데없이 풀썩 주저앉아버리는 지은을 보고는 놀란 듯이 그녀를 향해
뛰어나갔다.
"왜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송..지현이라고..했나요..?"
"네..송 지현이요. 아마 맞을거에요."
"흐흑...."
난데없는 지은의 울음. 난처해하는 제영.
당황스러운 상황에 제영은 지은을 달래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우는 건지..이유를 물어봐도 되나요..?"
말없이 흐느끼던 지은은 눈가가 촉촉히 젖은 채로 제영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보니 꽤 이쁘장한 얼굴이잖아..?'라고 생각한 제영.
이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는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더듬거리며 다시한번 물었다.
"저..저기..."
"제 동생이에요.."
"네..?"
그녀는 제영의 되물음에 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지은을 달래주는 제영의 마음 역시 편할리가
없었다. 그는 우는 지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가..살아 있는게 다행스러워서 우는건가요..?"
"흐흑..그래요..날짜 상으로는 살아있어야한다고 생각은 했지만...확인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녀와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건가요?"
"네..흐흑..만날 수가 없었어요.."
"...다행이에요..다행이야.."
우는 지은을 달래는 제영. 그러나 시선은 지현이 들어왔던 문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제영은 한 손으로는
울고있는 지은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은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녹음기를 매만지고 있었다.
"지은씨..만약 지현씨가 살아있다면 어디에 살고 있을지 혹시 알고 있나요?"
"네..?"
"만약 지현씨가 살아있다면..우리 쪽에 큰 도움이 될 가능성도 있고, 그녀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서 나가야할 사람이니까요."
제영은 그녀를 향해 밝게 웃어보였다. 마치 '나는 당신을 신뢰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러한 제영의 모습이
오히려 의심스러운 지은이었지만, 일단은 그와 함께 행동해야하기 때문에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을 안에 촌장의 아내들이 모여서 사는 큰 절이 있어요. 아마 그 곳에 있을 거에요.."
"큰 절이라...."
"어쩔 셈이죠..?"
지은은 자신의 눈물이 창피했는지 뒤돌아 눈물을 닦아내며 그에게 물었다. 제영은 밝은 어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찾아가야죠. 그녀도 우리와 한 편일테니까요."
지은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제영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어제 이상한 낌새를 봤거든요. 그걸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요.
섣부르게 돌아다니지 말아요.』
다음날 제영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지은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쪽지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제영은 행랑채를 쓰윽 훑어보더니 문을 살짝 열고는 밖을 두리번거렸다. 지은이 근처에 있는지 확인할 속셈인 듯 보였다.
지은이 없는 것을 확인한 제영은 부리나케 책상으로 달려가 밑에 던져놓았던 일기장을 펴보기 시작했다.
『4.
어제 찾아왔던 그녀가 찾아온 것은 내가 그 의심스러운 구덩이를 조사한 뒤였다.
그 구덩이에 대해 내가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분명 그녀라면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믿어야 할 사람은 촌장 뿐인가....』
"이 사람은...촌장을 믿었던 건가..."
제영은 일기장을 덮은 후 그것을 허리춤에 차고는 문을 나섰다. 행랑채 문 앞에서 마을을 바라보니
분명 마을 안에 큼지막한 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마을에서 등을 돌리고
어제 가보았던 구덩이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몇 분쯤 뛰었을까.
제영이 구덩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어제와는 다른 이상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1미터 남짓으로 파인 구덩이와 옆에 널부러져있는 커다란 돌. 그리고 돌 주위에 묻어있는 촉촉한 흙..
그러나 그 구덩이 속에 놓여져 있어야 할 뼈들이 보이지 않았다.
"뭐..뭐야..나말고 이 곳에 온 사람이 또 있다는 거야...?"
그는 조심스럽게 구덩이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뼈들이 사라졌다는 것 이외에는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는 듯 보였다. 제영은 쭈그리고 앉아
구덩이 안 쪽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음...일부러 1미터 정도 되는 사람의 뼈를 모아다가 이 구덩이에 그런 모양으로 쌓아놓을 이유가 뭘까..
분명 부자연스러워..그 책에서 나온 것 처럼 인위적인 냄새가 나는 것도 사실이야..."
제영은 구덩이 안을 조금 자세히 바라볼 요량으로 몸을 더욱 숙였다.
"중요한 것은 왜 그랬냐는 것인데..."
그는 뭄을 엎드린 자세로 누운 채로 구덩이 안 쪽에 손을 넣어보았다. 구덩이 안 쪽의 흙을 만져보던 제영이
별안간 흠칫하더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구덩이 바닥을 보고 있는 이유가 뭐지...?"
그는 멍하니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뼈가 없었으니까..?"
그는 무릎을 굽힌 채 구덩이 안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뼈가 있었을 때는...왜 구덩이 속을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
별안간 제영이 구덩이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완결성이 있었으니까. 뼈가 그런 식으로 뉘여져 있다면..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거야."
제영은 구덩이 안쪽을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그 곳이 구덩이의 맨 아래쪽 바닥일 거라고! 바로 그거야..그래서 인위적이었던 거지..!"
그는 미친듯이 구덩이를 파고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구덩이 안쪽의 땅은 한번의
굴착이 된 것처럼 쉽게 파여나가고 있었다.
한참동안을 정신없이 구덩이를 파고들어가던 제영의 손이 별안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영은 자신이 파고 들어간 구덩이의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누가 뼈를 치운거지..?"
구덩이 안 쪽에서는 바깥쪽을 바라볼 수 없다.
그렇기에 제영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알아챌 수 없었다.
소설가 -完- 베스트 셀러한참동안을 정신없이 구덩이를 파고들어가던 제영의 손이 별안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영은 자신이 파고 들어간 구덩이의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누가 뼈를 치운거지..?"
구덩이 안 쪽에서는 바깥쪽을 바라볼 수 없다.
그렇기에 제영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알아챌 수 없었다.
제영을 향해 다가오던 그림자가 별안간 제영을 불렀다.
"거기서..뭐하세요?"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던 제영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면서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지은이 서 있었다.
"아..그..그러니까 이게..."
"맘대로 돌아다니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그..그게.."
"뭐..이번 만큼은 멋대로 나온게 우리 목숨을 살렸네요."
"네...?"
"촌장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무,무슨.."
"제영씨가 언제 나갔고 촌장이 언제 들어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행랑채가 온통 난장판이 되어있는걸 보면
촌장이 이제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작정을 한듯 보여요."
"아.."
"다행히도 나는 잠깐 마을에 다녀온 참이었고, 제영씨는 제 말을 듣지 않고 이 곳에 와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구요."
"다..다행이네요.."
"하지만 우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그 쪽이 눈치 챘을테니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하죠..?"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네?"
"그 쪽이 오기 전에 우리가 가면 되죠."
말을 마친 지은은 뒤로 돌아 마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영은
자신의 발 밑에 있는 종이 쪽지를 주머니에 쑤셔넣은 뒤에 지은을 따라서 마을쪽으로 몸을 돌렸다.
#
지은은 제영이 자신을 따라오리라고 확신한 듯 보였다. 마을을 지나서 지은의 동생, 지현의 집으로 향하는
내내
지은은 제영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이 제영에게는 이점으로 작용한 듯 보였다.
제영은 지은의 눈치를 살피며 방금 전에 땅을 파서 얻게 된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것은 당신 역시 그 구덩이의 비밀을 알아냈다는 뜻이겠지.
또한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즈음이면 난 이미 그들의 뱃 속으로 들어간 후일테고..
난 당신이 얼마만큼의 증거와 믿음을 가지고 당신이 믿고있는 누군가를 따르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무엇을 얼마만큼 알고있던 이 한마디만큼은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절대 그녀를 믿지마.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다. 그리고 내가 쓴 일기장은 더이상 믿지않는 게 좋아.
내가 이편지를 남긴 시점 이후부터는 그녀를 속이기 위해 아무말이나 지껄여놓은 낙서장에 불과하니까.』
"이 남자..촌장을 믿었던 게 아니었어..?"
제영은 자신이 읽은 편지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뒷춤에 넣어두었던 일기장을 펴 보았다.
확실히 편지의 내용은 사실인 듯 보였다. 그 전까지와는 다르게 일기장에는 온통 촌장을 의심하는 내용과 그녀에 대한
신뢰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영은 고개를 가로저은 뒤에 일기장을 조용히 길가에 던져버렸다.
"다왔어요."
지은의 말에 앞을 바라본 제영의 눈에는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뭔가 음습한
기운이 넘쳐보였기에 제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마 저 안에 촌장이 있을거에요. 일단 들어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야해요. 우리가 갑자기 들이닥치면
촌장 쪽에서도 다짜고짜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진 않을테니."
"공격은..?"
"상대가 당황한 틈을 타서 재빠르게 촌장을 포박해야해요. 바로 이걸로."
지은이 불쑥 내민 손에는 이상한 모양의 매듭이 잔뜩 잡힌 새끼줄이 들려 있었다.
"이게..뭐죠?"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아까 마을을 수색하던 도중에 이 끈을 발견했어요. 뭔가 범상치 않아보이기에 가져왔더니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되는군요."
지은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앞으로 한걸음을 내딛었다.
"자, 시작해볼까요."
"그래요."
새끼줄을 받아 쥔 제영의 눈이 지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
지은과 제영이 음습한 집으로 뛰어들어간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촌장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흐음...이 곳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온화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촌장은 무서우리만큼 매서운 눈초리로 지은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한 촌장의 모습에 지은이 적잖이 당황한 듯 제영에게 속삭였다.
"우..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이걸 어..."
순간이었다.
지은의 뒷 쪽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제영이 별안간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새끼줄로 지은을 감아버렸고,
무방비 상태로 포박당해버린 지은은 제영을 향해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안타깝게도...절 속이는 데 실패한 것 같아요. 지은씨."
"무..무슨?!"
제영은 아무말 없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들고는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어머..제영씨는 참 친절하시네요!! 이런 선물 처음받아봐요!! 호호. 고마워요 제영씨!
별말씀을. 저야말로 감사드려요.』
STOP.
"이게 누구의 목소리인지..알겠죠?"
"그..그건 분명 제 동생의..."
"그래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이건 당신의 동생 지현씨의 목소리겠죠."
"그..그게 어쨌다는 거에요! 죽고싶어요?! 우리의 적은 저 뒤에있는 촌장이라구요!"
"글쎄요..."
제영은 자신의 녹음기를 다시한번 재생시켰다.
어머..제영씨는 참 친...』
STOP.
PLAY.
『어머.. 제영씨는..』
STOP.
PLAY.
『어머.. 제영씨는..』
STOP.
별안간 지은의 눈썹이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을 눈치 챈 제영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죠...분명 이 목소리는 지은씨의 동생인데...제 이름을 처음부터 알고 있더라구요?"
"..."
"전 분명 알려준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참 이상하죠?"
"...그..그건 촌장이 알려줬을수도!"
"촌장에게도 전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요. 제 이름을 알고있는 유일한 사람은 지은씨 당신뿐이죠."
"...아...맞아요. 제가 동생과 만나서 이야기해줬던 것 같아요!"
"이런...당황하셨나봐요. 지은씨. 당신은 제 앞에서 여동생의 소식을 듣고 운 적이 있었죠?"
"..."
"그 때 뭐라고 말씀하셨었는지 기억이 나세요?"
"...."
"그때 분명 댱신은 이렇게 말했죠. '살아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라구요."
지은의 얼굴에서 한줄기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지은의 얼굴은 당황한 모습이라기 보다는
분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그..그건..."
"아, 그리고 이런 것도 발견했어요."
제영은 방금 전 구덩이에서 발견한 편지를 지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촌장의 얼굴이
즐거운 듯 보였지만 그 모습을 제영이 바라볼 수 있을리가 없었다.
"거기엔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고 써있더군요. 바로 당신 '송지은'말입니다."
"...제길...."
그녀는 분하다는 듯이 편지를 찢어서 자신의 앞으로 던져버렸다.
"확실히 저의 패배네요..."
제영은 그녀를 째려본 뒤에 촌장에게로 돌아섰다.
"자, 촌장님. 이제 저 여자를 어떻게..."
잠시였다.
아주 잠시동안 제영은 촌장이 웃고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촌장의 손에는 커다란 방망이가 들려있었고,
그 방망이는 이미 하늘 높이 올라가서 무언가를 향해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그 방망이의 사정거리로는 지은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
제영의 머릿 속에 방금전 그녀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확실히 저의 패배네요...』
'패배라니...도대체 무엇을? 그리고 누구에게..?'
제영의 의식이 흘러감과는 상관없이 촌장의 방망이는 그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
"으..으으...이게 뭐하는..짓입니까.."
제영이 정신을 차린 것은 날이 어둑어둑해질 저녁 무럽이었다. 쓰러져있는 제영의 앞에는 촌장과 지은이
서 있었다. 그들은 뭐가 즐거운지 싱긋싱긋 웃고 있었지만 촌장 쪽이 더욱 신나보였다.
"제영씨..라고 했던가? 확실히 당신은 똑똑한 인텔리젼트였던 것같구만 그래."
"생긴게 멍텅구리하게 보여서 방심했더니...쳇."
제영을 향해 환하게 웃는 촌장의 모습과는 달리 지은은 그를 향해 기분 나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게..어떻게 된거냐고..."
"아아. 궁금하겠지. 궁금할거야. 뭐 간단히 말하자면 '게임'이야."
"게임..?"
의아해하는 제영의 물음에 지은이 이어서 대답했다.
"그래 게임. 과연 처음보는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쪽은 누구인가 하는 게임."
지은은 제영에게로 뚜벅뚜벅걸어갔다. 그리고는 제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긴 사람은 먹을수 있는거지. 당.신.을."
싱긋 웃어보이는 지은.
'어쩐지 처음부터 웃는 모습이 소름끼치더라니. 제길.' 이라고 생각하는 제영이었다.
"확실히 처음엔 내가 불리했지. 남자라는 생물은 같은 남자보다는 여자쪽에 흥미가 생기고 믿음을 주기 쉽거든.
하지만 당신은 보기완 다르게 똑똑했고, 내가 설치해놓은 일기장과 편지를 정확하게 분석해내더군."
"쳇..트릭으로 따지면 내 눈물연기와 동생연기도 한몫 했다고! 조금 실수했을 뿐이지.."
지은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제영을 쏘아보고는 뭐라고 작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짜였나..?"
"모~~두가 가짜였지. 나의 이야기도, 저 불여우의 이야기도."
"제기랄..."
모든 것을 체념했다는 듯이 제영이 고개를 떨구었다.
"포기하는 건가?"
"이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는게 더 웃긴거 아닌가?"
"큭큭..마지막으로 질문 몇개는 받아주도록 하지. 그냥 잡아먹히는 건 억울하니까 말이야. 어떤가?"
촌장은 자애로운 듯한 포즈를 취하며 그를 바라보았고, 제영은 멀뚱히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매일 이런 식으로 식량을 구하는 건가 당신들은?"
"물론."
"너무 적어 보이는데? 기껏해야 한둘일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잡아오면 오히려 내가 잡혀서 죽을테고..안전 속의 빈곤 이랄까.."
"흐음...그렇군.."
"더이상 질문할 것은?"
"죽기 직전이라 그런지 머리가 하얘서 생각나는게 없는 것 같네."
"자, 질문이 끝났으면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구만 그래."
촌장이 옆에 놓여있는 피묻은 방망이를 들고 일어서자 지은은 제영을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짜증난다는 듯이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촌장이 제영에게로 다가오는 그 순간에도 제영은 촌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촌장의 방망이가 번쩍 올라왔다.
#
".....이건 대박이야...신발! 이건 대박이라고!! 크하하핫!!!"
무수히 많은 A4용지 다발을 책상에 던져놓듯이 내려놓은 사내가 제영을 향해 크게 웃어보이며 소리쳤다.
"이건 당장 출판해도 아깝지 않겠어!! 푸하핫! 거봐 임마! 내가 여행한번 다녀오면 좋~은 작품 나온다고 했지?!!!"
"아아..그렇군."
"새끼야 이건 대박이야 정말!! 식인 마을에 들어간 사나이~ 믿을거라곤 오로지 자신뿐!! 캬!!!"
"바로 출판 가능한거냐 창식아?"
"물론이지 임마! 이거 내가 장담하는데 베스트 셀러다!!"
호들갑을 떨고있는 창식과는 달리 제영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다. 그러한 제영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식은 호들갑을 떨며 이리저리 전화를 걸기에 바빴다.
"네. 원고는 다 준비 되어있습니다. 암요~이번건 대박이라니까요?!"
수화기를 너댓개 잡고는 이리저리 통화하는 창식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있던 제영이 별안간 물었다.
"근데 이 소설 배경이 되는 마을, 소설에다가 써 넣을거냐?"
"흐음..글쎄다..뭐 관광지로도 개발되면 우리 쪽에선 이득도 볼 수 있으니 괜찮을 수도 있지."
"그래?"
"그래임마! 너 이번에 제대로 한건 했다, 진짜!!"
전화를 마친 창식이 제영의 소설더미를 가지고 사무실을 나서려던 찰나, 창식이 뒤돌아서며 제영에게 물었다.
"근데 거기 경치 좋더냐?"
"뭐..그냥 그저 그랬어. 소설쓰기 딱 좋을만큼 조용한?"
"캬~도대체 어떤 분위기길래 이런 대박소설이 나왔는지!! 나중에 나도 한번 가봐야겠다!"
"흐음..뭣하면 좀있다가 나랑 같이 한번 갈래? 어짜피 짐도 챙기고 노트북도 가져와야되니까."
"호오~ 그거 좋지!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임마! 내가 이거 원고! 인쇄소에 딱 가져다주고 바로 올테니까."
"그렇게 해. 아마 즐거울거야. 정말로."
말을 마친 창식이 콧노래를 부르며 사무실을 나섰다. 제영은 조용히 사무실을 훑어본 뒤에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뒤이어 사무실 바깥으로 향했다.
"재밌을거야.오싹할만큼."
닫혀진 사무실 내부에서는 제영이 나지막하게 읊조린 한마디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
"제안?"
"그래 제안. 내 부탁만 들어준다면 당신들이 매일매일 먹어도 부족하지않을 사람을 제공해줄 수 있다구."
"흐음..어떻게 말인가?"
"내 직업이 소설가야. 그것도 아주 유명한.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이 마을을 배경으로 소설하나
딱 써서 내면 그다음부터는 이 마을은 관광명소가 될거고 아마 질릴만큼 사람들이 모여들걸?"
"흐음...정말인가?"
"내가 댁들처럼 거짓말하는 취미가 있을까봐?"
"그래..부탁이란 건 뭔데?"
"나를 10일만 풀어줘. 다시 돌아올때는 먹이 한마리 더 데리고 올테니."
"널 어떻게 믿지?"
"손해볼 건 없을거다."
제영이 촌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촌장은 들고있던 방망이를 내려놓은 후에 제영을 묶고있던 새끼줄을 풀어주었다.
"좋아. 기한은 10일. 만약 돌아오지않는다면 내가 널 찾아내주지."
"돌아오지 않을 일은 없을거다."
제영은 뒤돌아서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자 서늘한 저녁 공기가 제영의 폐부를 찢어놓을 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영은 헛기침을 한두번 한뒤에 조용히 뇌까렸다.
"오창식 이 강아지. 널 제일 먼저 죽여주마."
-The End-
=======================================================
이런 결말 매우 좋아라합니다.
반전의 반전을 또한 예상외의 결말 ㅋ
이런 재미있는 글을 써주신 작가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그럼 즐거운 오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