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불평등, 위치제, 권력, 계급, 부의 세습이 존재함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그것은 사실이고, 현실이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불편하고 화가 났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애를쓰며 부질없이 한평생을 다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기껏해야 혼자서 분노를 삼키는 미약한 존재밖에 되지 않음을 인정해버린것 같다. 그 참혹한 현실이 사람이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라는 것의 본질이라는 논리가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한참을 고민하였다. 난 어떤 자세의 사회인으로 살 것인가. 고민의 답은 사회에 나를 어떻게 맞추어 사느냐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회에 무척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거나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 다행히 선택은 나에게 달려있음을 깨닳게 되었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낮은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허나 현실적으로 나라는 미약한 존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다. 그러나 꿈을 꾸다보면 점차 다가가기는 할 것이니, 지금도 단계적으로 실행해가고 있다. 높은 곳이라함은 결국 낮은 곳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한 힘이 돈과 권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 문명은 대중의 이름으로 행하는 권력만을 사회적으로 유일하게 실질적인 힘으로 만드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미약한 존재가 힘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음을 터득하게 되었다. 돈과 권력이 필요없는 행위로 위로 올라서는 것 말이다. 나에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 따위의 사회체제의 울타리 밖에 있는 것이었다. 긴장되게 하는 위치에서 파급력을 갖추지 못할거라면 권력 따위가 무용한 곳에 서있기. 중요한 것은 어떤 힘이 어떤 방식으로 지배력을 획득하느냐이다. 힘들의 배치가 바뀌면 자아도 달라진다. 사회체제는 기존의 기억, 습관의 동일한 배치가 반복되길 원한다. 이러한 힘들의 과소 상태를 이용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체제의 한가운데 있지 않고 주변에서 관망하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요근래 지켜보게 된 한가지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어졌다.
2040 진보세대의 시민정치가 이슈이다.
주변의 2040 세대들이 여느때와 다르게 정치에 관심이 많음을 느끼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말하는 정치가 정의와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난 어떤 정치적 견해나 비평이 아닌 그 점에 초점을 맞춰 이런 현상을 살펴봤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울분을 대변해줄 누군가를 찾는 통곡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정치는 무엇이며, 정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 실마리를 찾아가는 동안 정치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딱 맞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정의와 도덕이라는 것도 정치적 효용성을 위해 탄생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 2040 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성장보다 분배 중시하는 2040세대] 시사IN 216호
왜 세대일까. 세대는 계급이나 출신 지역보다는 훨씬 유동적인 개념이다. 한 게대 안에서도 소득.교육.출신지 따위 변수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갈등구조를 대표할 정도로 공고한 정치적 갈등구조를 대표할 정도로 공고한 정체성이 되기 힘들다. 더욱이 정초선거니 체제니 하는 개념은 한 번의 선거가 아니라 수십 년간 지속되는 정치의 기본 문법을 의미한다. 수십 년이면, 30대가 50대로 바뀌어 버린다. 그런 유동적인 기준으로 출신 지역과 같은 공고한 기준을 대체할 수 있을까. 최근 출간된 <진보 세대가 지배한다>를 보면 오늘날 한국 현실에서 세대란 정서적 동질 집단을 넘어 물적기반을 공유하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20대80사회로 빠르게 재편되면서 2030세대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없고 40대는 중간에 사다리가 사라진 세대가 되었다. 50대 이상이 누렸던 고도성장의 과실이 남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40대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아주 강렬한 집단적 체험을 공유하는 세대여서 보수화하는 속도도 느리다. 2040세대 동맹은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하고 지역주의를 벗어나려는 사실상의 계급 동맹이다. 2040세대를 묶어낼 정당만 있다면 진보가 다수파 동맹을 형성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며, 2012년 총선.대선을 세대구도 정초선거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대가 곧 계급이 될 수 있을까. 평소 세대론으로 정치를 해석하는 데 부정적인 정치학자들도 가능성만은 열어둔다. 정치학 박사 박상훈 대표는 보통 세대 정치는 정치가 나쁠 때 나타나는 병리현상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20세기 후반 이후 신자유주의의 묘한 특징은 노동시장 전체가 아니라 신규 진입자에게 희생을 전담시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대를 따라 일종의 계급 전선이 형성되는 상황이 세계적으로 일어났다. 이런 세대 정치는 정서적.문화적 세대 정치와는 결이 다른 변형된 계급 정치다. 금융권이 신입사원 연봉만 깎으며 고통 분담을 외쳤던 일이라던가, 기업이 신규 인력을 비정규직으로만 충당하는 일 등이 좋은 예다. 이런 식의 신규 진입자 타격이 누적되면, 특정 세대가 계급적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셈이다. 고용.주거.보육.교육에서 2040세대에 갈수록 쏟아지는 하중이, 이들을 사실상 하나의 계급으로 뭉치게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폭발적인 결집력은 그래서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젊은 층의 투표율이 높아진 이유로 언론이 주목하는 스마트폰이나 SNS와 같은 기술적인 혁신은 오히려 부차 요소에 가깝다. 2040세대는 이번 투표를 통해 말하고 있다. 성장을 통해 내가 잘 살게 되는 사회. 즉 민생을 외치고 있다.
* 참여사회와 투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기존의 억압적인 제도와 의식에 맞서 싸우고, 의식과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맞서 투쟁한다. 우리느 삶을 개선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발판을 확보하고, 헌신성이 강해지고, 조직이 권한을 부여받고, 투쟁 의지가 더 한층 고조된다. 우리는 새 사회에 이를 때까지 줄곧 그렇게 싸울 것이다. 추구하는 미래에 대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한편으로는 희망과 헌신성을 고무하는 모델을 얻기 위해, 또는 직접적 혜택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제도와 우리가 추구하는 새 사회의 구조도 만들어 낸다. 경제뿐 아니라 인종.문화.가족.성.정치구조도 사람들을 분열시켜, 변화를 지지하거나 반대해서 서로 싸우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인종.성.정치권력 문제로 싸우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려면 다양한 쟁점을 다루고 권한 부여를 더 확대하고 사람들을 더 고무해야 한다. 이 싸움의 대열에 2040의 젊은 세대가 가세한 것이다. 그들은 정의 구현을 목적으로 개입한다.
* 정치와 정의는 상관관계가 있을까?
[정치의 생각] 애덤 스위프트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정치철학자들이 사회협력의 혜택과 부담의 분배를 관할하는 주요한 사회.경제적 제도들을 도덕적.정치적 연구의 적합한 대상으로 보게 되면서부터이다. 사람들은 정의롭게 또는 정의롭지 않게 행위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가 정의롭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말은 무엇인가? 미국 철학자 존 롤스의[정의론]에 따르면 정의가 사회제도들의 가장 으뜸가는 덕목이다. 정의의 기본 개념은 사람들 각자에게 마땅한 몫을 주고, 마땅히 주지 말아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정의는 사람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몫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갖게 되면 좋을 것이라거나, 그들에게 주는 것이 예의에 맞을 것이라거나, 나아가 그들에게 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 것이라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정의는 우리가 정치적.사회적 제도들을 통해 집단적으로, 서로에게 그리고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요구되는가에 결부된다. 다시 말해 정의를 단지 도덕적으로 좋은 행위가 아닌 우리가 수행해야 할 의무와 행위에 연관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정의에 관한 세 가지 영향력 있는 발상들이 소개된다.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 로버트 노직의 권리로서의 정의, 그리고 응분의 몫으로서의 정의가 그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정의 개념에 대한 혼란으로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전체적인 신념체계가 과연 일관적인가를 걱정하며, 자기성찰을 하기도 한다. 면밀히 검토해보면 이 세 가지 정의관을 별 생각 없이 동시에 지지함으로써 상당히 혼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더 흔하다.
정의 개념을 되돌아가보자. 정의가 요구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좋은 행위가 있을 수 있다. 정의를 도덕의 한 가지 특수한 하위 세트라고 생각해보자. 정의는 사회제도들의 으뜸가는 덕목이라는 롤스의 말이 옳다면 이는 정치와 사회를 조직할 때 사람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몫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도덕적 고려사항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몫은 전부는 아니지만, 그들이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정의와 권리가 그렇게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이유다. 정의와 자선행위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정의의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누군가 자신이 자선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정의의 요구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애에서 시작된 행위라 볼 수 있다. 자선행위는 도덕적으로 좋은 일이긴 하지만 정의는 정당한 소유권을 보호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정의와 도덕적 요구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정당한 역할이다. 국가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는 이행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의무를 이행하도록 정당하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정치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국가는 국가의 법률에 따르는 사람들과 구분되면서 그들을 감독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법률의 내용을 결정하는 시민집단의 대리인이거나 대리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국가에는 사람들이 의무를 이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정당성이 있다는 주장은, 시민들이 국가의 강제기구를 사용함으로써 서로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도록 강제하는 게 정당하다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국가권위의 정당화 문제와 개인들이 과연 자신들이 반대하는 법률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지의 여부 및 어떤 상황에서 그런 복종의무를 지는지에 관한 중요하고 까다로운 이슈들을 제기한다. 국가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제할 수 있고 무엇을 강제할 수 없는가에 관하여 상식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견해에서 볼 때의 정의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이다.
정의가 정치도덕에서 핵심적인 이유는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가정 때문이다. 즉 일단 우리가 서로에 대한 의무를 잘 알고 있다면, 국가가 강제기구를 사용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이행하라고 정당하게 여겨지는 행위까지도 정당하게 강제할 수 있는 경우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정의란 무엇인가?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정의는 제도의 첫 번째 덕목이다. 정의는 잘 사는 데 필요한 수단을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려면 우선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가 서로 다르거나 분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보면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가치들을 근거로 신자유주의의 대안들을 평가할 수 있다.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운동이 저항하는 가치는 크게 네 가지다. 정의.효율성.민주주의.지속가능성.
정의 : 반자본주의 운동의 호칭 가운데 하나는 세계 정의 운동이다. 우리는 현재 세계의 불의와 엄청난 불평등을 끊임없이 그리고 올바르게도 비난한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 이것 자체가 방대한 주제이긴 하지만, 반자본주의 운동은 평등주의적 정의 개념에 헌신하는 듯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예컨대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자원을 평등하게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효율성 : 이것은 의외로 전문관료적 가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장비적 체제라고 비판하는 우리의 주장을 떠올려 보라. 포장.광고 따위에 자원이 낭비되고, 시장 가격이 경제 과정의 진정한 비용(예컨데, 환경 파괴)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 등을 말이다. 그 함의는 모름기지 대안 사회는 가용 자원을 가장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잘의 의미는 가장 수익성 있는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협력적 공생 필요성과 자연이 강요한 제약조건들 우리의 가치들을 모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없다고 비판한다. 또, 금융시장과 다국적기업들이 전 세계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며 횡포를 부린다고 비판한다. 더욱이, 우리의 조직 방식은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를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대의민주주의 대 직접민주주의, 합의제 원칙 대 다수결 원칙 등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의 범위와 내용을 급진적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지속가능성 : 반자본주의 운동을 촉발한 주요 동기 중 하나가 환경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다. 환경 재앙은 현재 경제 체제의 흐름일 뿐 아니라 이미 타나타고 있는 현상이다. 기후 변화 전문가들의 주장을 보면, 온실가스 방출에서 비롯된 지구의 기온 상승에 지금 당장 급진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이 추세가 그대로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의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 정의가 강조되는 이유
합의 또는 동의를 모든 중요한 의사결정과 정책입안의 토대로 삼고자 하는 현대 사회의 경향성은 공정함을 담보하지 않은 체제의 안정성이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역사적 경험과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정성에 대한 요구는 공정성 자체보다는 불공정함과 부정의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에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공정성 혹은 정의에 대한 요구는 사람들이 이러한 경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시키려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상호 견제의 필요성에서부터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공정한 절차나 분배방식의 필요성에 대한 공통된 의식만으로 충분한 사회적 안정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는 데 현대사회의 근본 문제가 있다. 무엇이 공정한 절차며 무엇이 공정한 분배의 방식인가? 다시 말해 공정성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적인 사회에서는 공정성의 실질적인 내용이 사람들 또는 집단들마다 크게 다를 수가 있다. 때문에 공정한 절차나 분배방식이 필요하다는 큰 원칙에는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일부 사람들은 기회평등의 상화 하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적인 분배방식을 공정하다고 간주하고 중립적인 게임의 규칙들을 제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이들은 실질적인 복지의 평등이나 자원의 평등을 공정한 분배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들이 이해하고 있는 공정성의 구체적인 내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비록 공정성이라는 동일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과연 같은 의미로 그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분배적 정의에 대한 오늘날의 연띤 논쟁은 상당 부분 이와 같은 개념적 이해의 차이를 반영한다. 다양한 입장들이 어느 정도의 분배적 정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동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너무나 달리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논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각자는 자신의 해석이 옳거나 보다 나은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해석이 참으로 옳거나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발견하기 어렵다. 때문에 그들 사이의 논쟁은 평행선을 그으며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객관적이라고 주장되는 그들의 해석에는 특수한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방의 해석을 편파적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근거가 없지는 않다.
다원사회의 속성을 두고 볼 때, 이와 같은 견해의 대립을 일시에 해소할 수 있는 최상의 합의된 해석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현실적인 정책집행을 위해서는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절충하며 타협하는 길 밖에는 없다.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믿는 각 당사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타협과 절충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당사자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용될 수밖에 없다. 평화적인 해결방법만이 모두의 불이익을 막을 수 있다는 최소한도의 공감만이 그들의 타협과정을 인도하는 공통의 토대로써 작용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입장의 불일치와 현실적 타협은 도덕적인 합의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근본적이고 따라서 일시적인 타협만이 가능하다면 그 사회는 지속적인 안정을 누리기 어렵다. 그와 같은 불안정한 균형은 일부 집단의 상황 변화에 의해서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구성원들 사이의 입장의 차이를 좁혀 가는 의사소통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과정은 대단히 계몽적일 수도 있다. 비판적인 대화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한계는 물론 자신의 한계까지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타인을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존엄한 존재로 존중하는 이상적 사회에서는 부당함에 대한 의식이 최소화될 가능성이 크며, 설령 그런 의식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대화와 타협에 의해 해결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 정의는 악과 함께할 때만 존재한다
악의 사회학
사회의 가치는 주로 선에 대한 관심, 이상형 구현의 노력으로 연구된다. 악, 불량함, 부정성이라는 사회적 개념은 규범에 의해 규제된 행위에서의 유형화된 일탈로만 여겨진다. 이러한 악의 추방은 경험적 현실주의보다 교화하고자 하는 소망의 실현을 의미한다. 이는 악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근대성과 악의 관련성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한다. 악을 잔류 범주로 간주하는 것은 선과 정의를 제도화하기 위한 계몽된 노력에 동반하는 파괴와 잔인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사회학에 대한 정의, 그리고 이에 대응하려는 제도적 노력은 어디에서든지 이성과 도덕적 겅의로의 근대적 추구와 함께해왔다. 그리스 시대부터 인류는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습관에 젖어있다. 자아:집단,이익:가치,악:선. 이것은 현대 공동체주의의 특징인데, 공화주의와 실용주의 사상 간의 결합이다. 이기주의와 가치 결핍을 현대사회 문제로 보는 공동체주의자들은 다른 가치, 다른 사람들의 가치, 그리고 사실상 타자의 가치와의 대비에 의해 공동체의 가치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한다. 논점은 가치 대 이익, 선한 가치와 악한 가치가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선한 가치는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불쾌하게 간주되는 가치와 대비되어야만 구체화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행위자, 제도, 사회는 악을 구체화하고 정밀하게 다듬는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은 역설적이고 심히 우울한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적절한 실례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타락을 어떻게 개념화했는지 살펴보자. 마르크스는 나쁜 가치의 사회적 효과를 지적하는 대신, 자본주의가 이러한 효과의 가능성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억압은 소외와 이기주의를 만연시킨다. 이 압박은 가치를 억압하고 이상형을 파괴하는 수단적.전략적 행위 지향을 수반한다. 물질주의가 규범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공유된 이해, 결속, 공동체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적 경쟁과 탐욕이라는 황폐한 세력을 제거한 후에야 가치 지향이 가능해지며, 결속이 강화된다.
악은 단순히 지배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긍정적 가치 판단의 가능성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사회는 지속적으로 악을 생산해낸다. 어떻게 선이 다시 한 번 악에 대해 승리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매우 정교화된 서사가 더해진다. 악을 공평하게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좀 더 객관적 판단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회의 문화적 측면이 선뿐만 아니라 악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민주주의는 정의를 실현하는가?
민주사회에서의 삶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에 관한 이견으로 가득하게 마련이다. 공적인 삶에서 도덕 문제를 놓고 열정적이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도덕적 신념이 이성과는 무관하게 가정교육이나 신앙으로 정해졌다는 느김을 받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도덕에 호소해 상대를 설득할 수 없으며, 공개토론에서 정의와 권리를 두고 자기 주장을 펼치는 행위는 독단의 남발이자 사상을 놓고 음식을 집어던지며 싸우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가 최악일 때는 그와 비슷한 형태가 나타난다. 하지만 꼭 그런 식으로 갈 필요는 없다. 때로는 어느 한 사람의 주장에 우리 마음이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도언에 관해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는 영역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도덕적 혼란의 힘과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으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긴장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옳은 행위에 관한 판단을 재검토하거나 애초에 옹호하던 원칙을 재고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면, 자신의 판단과 원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판단에 비추어 원칙을 재고하고 원칙에 비추어 판단을 재고한다. 이처럼 행동의 세계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또 그 반대로 마음을 도리는 것이 바로 도덕적 사고의 기본이다. 도덕적 사고를 정치에 적용할 때, 어떤 법으로 사회를 다스릴지 질문을 던질 때, 도시는 술렁이고 사람들은 여러 주장과 사건으로 들끓게 마련이다. 사실 더 까다로운 상대는 정치철하가들이다. 고대와 근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시민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정의와 권리, 의무와 합의, 영광과 미덕, 도덕과 법 같은 개념들을 더러는 급진적이고 놀라운 방식으로 고민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임마누엘 칸트,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 등의 철학가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의 개념을 살펴보겠다.
* 정의의 개념과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정의를 이해하는 세가지 방식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 이때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다 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우리는 이미 이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가격폭리의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구제금융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여러 주장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재화 분배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찾아냈다. 행복, 자유, 미덕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이상은 정의를 고민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암시한다. 행복을 극대화하고 자유를 존중하며 미덕을 기르는 행위의 의미, 그리고 그와 관련한 이상이 서로 충돌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정치철학이 이런 상황을 단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장을 다듬고, 민주 시민으로서 우리가 직면한 여러 대안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행복 극대화 시장 중심 사회에서는 행복 극대화가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다 오늘날의 정치 논쟁 또한 경제적 풍요를 장려하거나 생활수준을 높이거나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할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왜 이런 문제를 고민할까? 가장 분명한 답은 개인으로 보나 사회로 보나, 경제적 풍요로움은행복에 기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와 연결된다. -자유 개인의 권리 존중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치열한 정치 논쟁은 자유방임주의와 공평주의 진영 사이에서 일어난다. 자유방임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자들은 자유시장주의자들이다. 정의란 성인들의 합의에 따른 자발적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데 달렸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공평주의 진영에는 평등을 옹호하는 이론가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규제 얺는 시장은 공정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보기에, 정의를 구현하려면 사회적.경제적 불이익을 바로잡고 모든 이에게 성공할 기회를 공평하게 나눠 주는 정책을 펴야 한다. -미덕 정의가 미덕 그리고 좋은 삶과 밀접히 연관된다고 보는 이론이다. 오늘날의 정치에서 미덕은 흔히 문화적으로 보수주의, 종교적으로 우파와 동일시된다. 도덕을 법으로 규정한다는 발상은 자유주의 사회 시민들이 보기에 자칫 배타적이고 강압적인 상황을 불러올수 있는 경악할 만한 발상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라면 미덕과 좋은 삶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해햐 한다는 생각은 공히 모든 이념에 깃들어 있으며 다양한 정치 활동과 주장에 영감을 주었다.
칸트 [동기중심] 칸트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공리주의를 거부한다. 우연히 생기는 요구에서 도덕 원칙을 끌어내려 함으로써 도덕을 생각하는 방식부터 그친다. 많은 사람에게 쾌락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다수가 특정 법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법으 정당하다고 할 수도 없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순수 실천 이성을 연습하여 도덕의 최고 원칙에 도달할 수 있다.
제러미 벤담 [공리주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했다. 도덕의 최고 워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옳은 행위는 '공리(유용성)'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이다. 벤담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거쳐 자신이 주장하는 원칙에 도달한다. 우리는 모두 고통과 쾌락이라는 감정에 지배된다. 이는 모든 행위를 지배할뿐더러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한다. 우리는 모두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은 싫어한다. 공리주의 철학은 이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도덕적.정치적 삶의 기초로 삼는다. 공리를 극대화한다는 원칙은 개인만이 아니라 입법자에게도 해당한다. 정부는 법과 정책을 만들 때,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허구의 집단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시민과 입법자들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정책에서 얻는 이익을 모두 더한 뒤에 총비용을 빼면, 다른 정책을 펼 대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을까? 벤담의 공리주의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사적 판단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심판하지 않는다. 모든 취향은 동등하게 계산된다. 벤담은 이 쾌락이 저 쾌락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은 주제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모차르트를 조하하고, 어떤 이는 마돈나를 좋아한다. 어떤 이는 발레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볼링을 좋아한다. 어떤 이는 플라톤을 읽고, 어떤 이는 플레이보이지를 본다. 벤담은 물을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더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벤담은 사람들의 선호도를 가치를 따지지 않은 채 모두 더해서 어떤 법이 필요한가를 결정하려 했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주의]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되리라고 주장한다. 다수가 반대 의견을 막거나 자유사상가를 검열할 수 있다면 오늘 당장 공리가 극대화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불행이 늘고 행복은 줄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면 장기적으로 사회가 행복해진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밀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개인의 의견 전부 또는 일부가 사실로 판명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대다수 의견을 수정할 수 있다. 사실이 아니라도,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이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다수 의견이 독단이나 편견에 빠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관습과 관례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사회는 답답하고 순종적인 체제로 전락해, 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힘과 활기를 잃기 쉽다. 자유가 사회에 미치는 유익한 효과에 관한 밀의 생각은 대단히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개인의 권리에 설득력 있는 도덕적 근거를 제공하지 모한다. 첫째로, 사회 발전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존중한다면, 권리는 불확실한 상황에 볼모로 잡힌 꼴이다. 이를테면 전제적 수단을 동원해 장기적 행복을 얻으려는 사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공리주의자들은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사실상 꼭 필요치는 않다고 결론짓지 않겠는가? 둘째로, 권리를 공리주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했을 때, 그것이 사회 전체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든 당사자에게는 부당행위가 된다는 사시를 간과할수 있다.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수가 소수를 박해한다면, 그 믿음을 인정했을 때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해도, 박해받는 개인에게는 부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밀은 이 질문에도 대답한다. 그러나 이때는 공리주의적 도덕이라는 한계를 넘어선다. 밀은 관습이나 관례 또는 다수 의견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행위는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럴 경우, 사람드른 능력을 한껏 발휘해 삶의 최고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밀의 설명에 따르면, 순응은 삶의 적이다. 밀은 관습을 따르면 인생에 만족하면서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비교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무엇을 하느냐뿐만 아니라 어떤 태도로 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하다. 행동과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인격도 중요하다. 밀에게 개성이 중요한 이유는 쾌락을 주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공리를 넘어서는 도덕적 이상인 인격과 인간 번영이라는 이상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벤담의 원친에 반하는 주장이다.
고바야시 마사야 [정의사회의 조건]
3개의 정의관
행복의 극대화-결과주의:공리주의 자유의 존중-의무권리론: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 미덕의 추구-목적론:공동체주의
동양의 정의 롤스의 계약론적 논리는 정치규범적인 논의와 정치철학 자체를 부흥시키는 강력한 효과를 가져왔다. 이 정의라는 개념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권에서 정의라고 하면 보통 윤리적인 정의를 생각한다.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권에서 정의라고 하면 보통 윤리적인 정의를 생각한다. 유교적 관념에서 의가 인.의.예.지.신 오덕의 한 가지로 인식되듯 정의는 초월적.윤리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에서는 종교적.윤리적인 생각이 쇠퇴하고 또 다양해졌기 때문에 그런 근거로 정의를 주장하기는 힘들어졌다. 오늘날 필요한 정의는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을 만한 정의이자 의무론이라 불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자유지상주의의 자유형 정의론 정의에 대한 세 가지 생각 중 자유형 정의론은 의무론과 관계가 깊다. 비결과주의나 비공리주의의 윤리학을 포괄적으로 의무론이라 하는데, 행위는 초래되는 결과의 좋고 나쁨과는 관계없이 도덕적 원리 또는 규칙에 따라 의무로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리주의는 결과주의로, 결과가 더 좋게 되도록 한다는 생각이고 의무론은 결과와 상관없이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떄문에 한다는 생각이다. 의무론에는 권리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기반적 이론과 권리지향적 자유지상주의가 있다.
존 롤스의 정의론 제1원칙 : 각 개인은 기본적 자유에 대한 평등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 기본적 자유의 체계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자유의 체계에서 양립한다는 조건 아래, 최대한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자유의 체계여야 한다. 제2원칙 :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격차원리(차등원칙) : 그들의 불평등이 가장 불운한 입장에 있는 사람의 편익을 최대화하는 것 -공정한 기회균등의 규칙(평등주의) : 공정한 기회균등이라는 조건 하에서 불평등의 계기가 되는 직위와 직책이 모두에게 개방될 것 정치철학은 정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정치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같은 규범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학문이다. 이런 정치사상은 예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오늘날 학문 분야로서 정치철학이라고 말할 때에는 현대 정치에 대해 규범적인 논의를 하는 학문 영역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정치학사 같은 분야는 과거의 정치사상의 역사를 다루는 것으로 서양의 경우 근현대를 연구하거나 가르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정의는 목적론적이다.권리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목적,목표,본질)를 이해해야 한다. -정의는 명예와 관계한다.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논하는 것은 그 행위가 명예를 수여하고 보상하는 미덕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다. 목적 면에서 미덕을 갖는 것이 명예이자 정의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상으로 정치적 권력의 분배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목적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선한 인격의 형성, 시민들의 미덕을 높이는 것 그리고 좋은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는 지위나 명예에서도 분배적 정의를 생각해 페리클레스처럼 시민의 미덕을 갖고 선의 추구에 가장 공헌한 사람이야말로 정치적 통치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명예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정의란 적합성의 문제로 미덕이나 초월성을 갖춘 자가 그에 걸맞은 역할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적합성 정의론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폴리스(도시국가)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한다. 언어능력을 활용해 동맹시민들과 정치를 논의하고 그와 관련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행복이란 공리주의자가 말하듯 고통에 대한 쾌락의 크기를 최대한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덕에 기초한 영혼의 활동이다. 정치를 배우는 모든 사람은 영혼을 배울 필요가 있고, 영혼을 만들고 다듬는 것은 선한 도시의 법률의 목적 중 하나다. 미덕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규칙이나 방침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개별 상황의 특징을 간파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선의 정치 마이클 샌델은 어떤 정치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할까? 그는 정치적인 좌우를 초월한 논리를 제기한다. 공화당이나 민주당, 지금까지 미국의 정당은 어떤 형태로든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그가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을 찾을 수 없다.결여되어 있던 발상을 제기한다. 하나, 시민의식, 희망, 봉사, 둘, 시장의 도덕적 한계, 셋, 불평등, 연대, 시민적 미덕, 넷,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
* 정의와 그 밖의 가치들
사람에 따라 정의가 제각각일 수 있다는 말도 옳지만, 평등주의적 정의 개념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자원을 평등하게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세 가지 논점이 나온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거나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도 사회의 자원을 평등하게 이용했을 뿐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재산에 대한 보상이나 유전적 자질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다면 정말 명백한 합리화다. 기회 균등은 기회가 평등하다는 뜻이다. -내가 옹호하는 평등이 반드시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옹호하는 것은 급진적 형태의 기회 균등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평등하게 보장돼야 하지만, 그나 그녀가 이런 기회를 얼마나 많이 이용하는지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이런 저의 개념은, 노력에 따른 노동의 보상과 모순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똑같이 보장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철학자들이 완벽주의라고 부른 것이 나온다. 삶의 계획이라고 해서 모두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무기상이나 인종 차별주의자나 어린이 성범죄자가 자신들의 특별한 계획을 실현하고자 사회의 자원을 요구하는 것은 안 된다.
*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요즘에는 분배 정의를 토론할 때면 주로 소득, 부, 기회의 분배를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분배 정의는 대개 돈디 아닌 공직과 영광의 분배와 관련된 문제였다. 누가 통치권을 쥐어야 하는가? 정치권력은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배 정의 이론들이 하나같이 차별적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문제는 어떤 차별이 정당한가이다. 그 답은 목적에 달렸다.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치 연합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정치에 특별하고도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는 다만 시민이 지지하는 다양한 목적에 가능성을 열어둘 뿐이다. 그렇기에 선거라는 것이 있어, 특정 시기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어떤 목적과 목표를 추구할지 선택하지 않는가? 정치 공동체에 미리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부여한다면 시민이 직접 결정할 권리를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할 위험도 있다. 정치의 텔로스, 즉 목적을 단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마음을 반영한다. 우리는 정치를 사람들 스스로 목적을 선택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게 정치의 목적은 어느 목적에도 치우치지 않는 권리의 틀을 정하는게 아니라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
이름뿐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시민사회라면 선을 장려하는 목적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치 연합은 단지 동맹으로 전략한다. 법은 단지 계약에 머물고 만다. 그 계약은 시민사회 구성원들을 선하고 공정하게 만드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삶의 규칙이 아니라 서로에게 맞서는 권리를 보장하는 계약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권력을 요구하는 주요한 두 세력을 비난한다. 과두정치를 행하는 독재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이다. 그는 이들이 오로지 편파적 요구만 한다고 말한다. 과두정치가들은 부자인 자기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신분이 시민권과 정치권력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집단의 요구는 모두 과장되어 있다. 정치 공동체의 목적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정치 공동체는 재산을 보호하거나 경제적 풍요를 달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과두정치가들은 틀렸다. 정치 공동체가 오직 그런 것이라면 갑부가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정치 공동체는 다수에게 주도권을 맡기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자들도 틀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민주주의자란 우리가 다수결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는 정치의 목적이 다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게 만드는 것, 즉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며, 시민 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정치 공동체가 좋은 삶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거기에서 공직과 영광의 분배는 무엇을 암시할까? 이러한 성격의 연합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사람은 바로 시민의 미덕이 탁월한 사람, 공동선을 숙고하는 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최고의 부자도, 다수도, 가장 잘생긴 사람도 아닌, 시민의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정치적으로 인정받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정치의 목적은 좋은 삶의 구현이기 때문에, 최고 공직과 영광은 페리클레스처럼 시민의 미덕이 가장 뛰어나고 무엇이 공동선인지를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재산이 있는 사람들도 발언권이 있어야 한다. 다수결주의자의 생각도 어느 정도 중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고 권력은 뭐니뭐니 해도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를지, 치른다면 언제 어떻게 치를지를 결정할 자질과 판단력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최고 공직과 영광을 누려야 하는 이유는 그저 현명한 정책을 실행해 모든 사람을 잘살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란 어느 정도는 시민의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을 대중이 인정해준다면 좋은 도시의 본보기를 제시한다는 교육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정의에서 목적과 영광이 함께 나타다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정치의 목적은 좋은 삶의 구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다면, 가장 훌륭한 시민의 미덕을 발휘하는 사람이 가장 높은 공직과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치는 좋은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의 말은 과연 옳은가? 좋게 말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오늘날 우리는 대개 정치를 좋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아니라 필요악으로 여긴다. 정치라고 하면, 흔히 타협, 가식, 특별한 이해관계, 부패를 떠올린다. 정치를 사회 정의의 도구로, 즉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상적인 경우라도, 정치를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자 여러 소명 중 하나로 여기지, 선의 필수 요소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정치 참여를 좋은 삶의 필수 ㅇ소라고 생각할까? 왜 우리는 정치 없이는 더없이 훌륭하고 미덕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없을까? 그 답은 우리 본성에 이�. 우리는 시민사회에 살면서 정치에 참여할 때만이 인간의 본성을 아낌없이 실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를 꿀벌이나 기타 무리지어 사는 동물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존재로 본다. 그 이유는 이렇다. 자연은 어느 것 하나 헛되이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에겐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 고유의 특징인 언어는 무엇이 공정하고 무엇이 불공정한지 선언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소리 없이 파앗하지 않고, 말로 표현한다. 언어는 선을 식별하고 고민하는 매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직 정치 연합에서만 우리는 언어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발휘하는데. 그 까닭은 시민사회에 있을 때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부정을 고민하고 좋은 삶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시민사회가 애초부터 존재하고, 개인에 앞선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 민주주의의 결함
국민이 직접 통치자를 뽑는 민주국가에서는 자유의 억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통치자들은 민중을 대신하여 민중으로부터 권력을 위탁받고 민중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며,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민중들이 해임시켜버리면 되므로, 민주사회에서는 과거와 같은 지배자와 민중 간의 갈등은 없으며 민중들이 권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인간에게는 통치자의 지위에 있을 때나 같은 시민의 입장에 있을 때를 불문하고,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좋아하는 것을 행위의 준칙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무리하게 강제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러한 성향은 인간본성에 부수하는 어떤 종류의 최선의 감정과 최악의 감정에 의해 강력하게 지탱되고 있기 때문에, 아예 권력을 없애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수단으로도 거의 억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권력이라는 것은 쇠퇴되어가기는커녕 도리어 증대일로에 있는 형편이므로, 도덕적 확신이라는 공고한 장벽을 구축하여 그러한 해악을 방지할 수 없는 한, 우리들은 현재와 같은 세계의 상태하에서는 그 해악이 더욱 증대되어가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사실을 각오해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다수의 압제는 국가권력기관을 통해서 발생하고 동시에 다수의 여론과 국민정서라는 무형의 사회적 압제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세부까지 침투하여 인간의 영혼 그 자체도 노예화하고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기 때문에 정치적 압박보다도 더 무섭다고 밀은 보았다.
[대의정부론] 존 스튜어트 밀
다수결의 횡포, 의회의 무능, 이익집단화 등은 민주주의 역사 속 최대의 결함이다. 이 문제들은 백 수십 년 전에 벌써 '대의정부론'에서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국민들이 선출한 사람이 국정을 담당하는 대의정부가 최선의 정부형태이지만, 인간의 모든 제도와 같이 민주주의 역시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의회의 지적 능력 부족 과거 왕정이나 귀족정치 시대의 관료들은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고 평생을 공직자로 지내기 때문에 경험의 축적, 잘 숙고된 전통적인 업무요령, 실무적 지식의 전수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관료제는 타성과 집단이기주의라는 치명적 결함으로 생명력을 상실하며 수구세력화되어 변화를 기피한다. 반면에 대의정부의 중추인 의회는 관료제와 같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지만, 자유를 추구하고 새로운 이상을 가진 천재들을 항상 수혈할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상극인 의회와 관료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양자의 장점을 살리고 양자의 단점을 해소할 수 있다. 모든 인간사에서, 서로 생명력을 갖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고유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서로 갈등하는 영향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수반되어야 하는 다른 목적을 배제하고 좋은 목적 하나만 배타적으로 추구하면, 하나는 과다해지고 다른 것은 부족해질 뿐만 아니라 원래 배타적으로 추구하던 목적도 부패하거나 상실하게 된다. 의회와 행정부가 서로 갈등하는 영향력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한 원리를 적시하고 있다. 서로 갈등하고 견제하는 경쟁자가 있어야 타성에 젖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다는 말은 비단 의회와 행정부 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진보와 보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 실로 많은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지혜라고 할 것이다.
의회의 이익집단화 벤담이 사악한 이익추구라고 이름붙인 이익집단화는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다수 계층이 공동체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계급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인식과 도덕성의 불완점에서 오는 인간본성에 대한 관점이다. 사람은 이기적 관심과 탈이기적 관심, 그리고 눈앞의 이익과 먼 장래의 이익이라는 두 가지 관심 내지 이익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이어서 눈앞의 이익에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과 이익을 공유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적 이익만을, 그리고 당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 속성이며, 특히 권력자들의 특성이다. 그 결과로, 지배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을 핍박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대의정부의 지배층도 마찬가지이다.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민주정치에서, 지배층은 국민들의 다수를 구성하는 가난한 육체노동자계급이다. 이들도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진정한 이익을 저버리는 정책을 지지하기 쉽다. 사유재산권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 세금을 모두 부유층에게만 부담 지우려고 하는 것, 직종별 임금차별의 철폐와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의 제한이나 금지를 지지하는 것, 수입개방, 성과급, 기계의 도입을 반대하는 것 등은 모두 육체노동자들의 계급적 이익에 기초한 감정으로부터 발생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거짓의 민주주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을 똑같이 대표하는 모든 국민의 정부이다. 반면에 거짓의 민주주의는 다수만을 배타적으로 대표하는 정부이다. 전자는 모든 국민의 평등과 같은 의미이며, 후자는 국정을 장악한 다수에게만 혜택을 주는 특권의 정부이다. 현실의 민주주의는 후자인 거짓의 미주주의이다. 밀은 이러한 결과가 주로 잘못된 선거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비례대표제의 도입 결함을 갖고 있는 소선거구제의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비례대표제이다. 의회의 지적 자질 부족과 이익집단화라는 대의정부가 빠지기 쉬운 위험을 모두 치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비례대표제는 소수 계층의 지지를 받는 사람도 전국적으로 표를 모아 의회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각 계층이 모두 자신들의 인구구성비에 비례하여 대표를 의회로 진출시킬 수 있다. 다른 지역구의 후보를 찍을 수 있기 때문에 후보들의 일반적인 수준 또한 높아진다. 이러한 장점에 더하여 밀이 강조한 것은 분별 있는 소수, 혹은 교양 있는 계층의 선출 가능성이다. 그는 오직 분별있는 소수만이 이기심과 눈앞의 이익을 벗어나서 인류와 사회의 진정한 이익을 생각할 수 있으므로, 이들이 사회를 이끄는 것이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주장이다. 밀은 의회가 진리와 정의를 실현하는 토론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 자본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시민정치?
대학에 입학하던 날 나는 입학관리처에서 작은 책한권으 부여받았다. 표제는 마르크시즘. 운동권 학생이 유난히 많았던 학교의 전통 때문에 입문하게된 마크크스주의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현 체제는 그 어떤 사상가나 정치가가 만든 것을 거부하는 시민정치의 시대의 시작임을 말하고자 다양한 체제의 정의와 문제점을 들여다보았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유주의], [자본론]를 보면 20세기에도 문제는 지금과 유사한 형태로 비춰지고 평가된다. 자본주의 문제로 야기된 사회주의 가치 논쟁에 관한 그의 글을 살펴본다.
자본주의의 문제 저마다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요컨대, 이것들은 자율관리라는 진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술들이다. 우리는 그런 의결 방식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구체적 상황에 달려있다. 내가 신는 양말의 색깔을 스탈린식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 마찬가지로 내 사무실 벽에 거는 그림도 내 마음대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어떤 결정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광범할 때, 그런 결정권은 적절하게(말하자면 균형 있게) 배분돼야 한다. 내가 작업장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면, 그 음악을 들을 다른 사람들도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 내가 뭔가를 소비하거나 생산하고 싶다면, 그 영향을 받게 될 다른 사람들, 다른 생산자들과 소비자들, 그리고 그 부수적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도 모두 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그 결정권은 그들이 영향을 받는 정도에 비례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소유, 기업식 분업, 이윤 위주의 보상 체계, 그리고 시장 할당은 연대, 다양성, 평등, 자율관리를 말살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 가치들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경제적 혁명가들이다. 왜냐하면 이 가치들을 실현하려면 이 가치들을 보존하고 나아가 더 발전시키는 새로운 제도들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을 거부하는 이유는 시장이 반사회성을 부추기고,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권력이나 산출량에 따라 보상하고, 지배계급에 유리하게 권력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적 계획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권위주의적인 데다 역시 조정자 지배계급에 유리하게 권력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계급이 없는 사회를 원하지만 그런 기존의 할당 방식은 위계적 분업과 마찬가지로 계급 분리와 계급 지배를 초래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사회주의적 노동 방식인 참여 계획은 사회적 비용과 혜택의 비교 평가를 받게 되고, 그런 평가는 재화를 취급하는 시장의 능력을 뛰어넘어 판매자와 구매자 외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예산은 균형을 유지하고, 보상은 공평하며, 결과는 복지나 발전과 직결된다. 그러나 중심과 주변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부와 하부도 없다. 참여 계획의 놀라운 점은 자율관리가 경제 전체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경제적 선택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다못해, 내가 뭔가를 할 때 나는 더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은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나는 결정된 사항을 실행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하거나, 그냥 시간을 낭비하거나, 그 부수적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영향력을 적절하게 배분한다.
자본주의를 넘어서 자본주의를 규제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공공서비스가 공격받을 때는 방어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국가에 압력을 넣어 현재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확장.개선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부자에게서 빈민에게로 부와 소득을 재분배하는 제도를 확장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자본주의와 안전하게 공존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계획이 필요하다. 민주적 계획 경제의 모델은 다양하다. 그런 경제에서는 생산자.소비자 네트워크들 간의 수평적 관계를 포함하는 민주적 과정을 바탕으로 자원이 배분될 것이다. 이것은 경쟁의 결과로 자원이 배분되는 자본주의나 독재적으로 자원이 배분되는 스탈린주의 명령 경제 둘 다와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경제적 조정이다. 그런 모델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에 대한 진지하고 구체적인 탐구가 진행 중임을 보여 준다.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민주적 계획 경제야 말로 반자본주의 운동이 헌신하는 가치들을 실현할 최상의 방식일 것이다. 이런 대안을 일컫는 가장 적절한 말이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사회주의 사상의 주요 구성요소 하나는 물질적 생산 자원이 대체로 사회적 소유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 민주적 계획 경제를 성취하는 것이 혁명이라는 말은 단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에 맞는 경제 체제로 자본주의를 교체하려면 급진적 사회 변혁, 즉 혁명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는 다수의 사람들을 해방할 수 있는 세력은 그들 자신뿐이다. 상식적인 혁명 개념은 혁명을 폭력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반하는 혁명의 개념은 사뭇 다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해방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 과정에서 폭력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쉽게 말해서,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은 그들의 힘과 특권을 제거하려는 진지한 시도에 폭력적으로 저항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시민정치 레닌주의? 레닌주의의 기본 사상은 혁명적 사회주의 관점을 공유하는 좌파들이 자본주의 체제 전복이라는 사상으로 다수를 설득하려면 공동의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람들을 훨씬 더 광범하게 끌어들이려 하는 역동적인 동원 과정을 통해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다. 이러한 사상은 우파와 자칭 극좌파 둘 다의 강력한 도전을 받는다. 물론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굳이 레닌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최근의 레닌주의자들은 비교적 집중적으로, 그리고 전략적 방향에 따라 이런 태도를 추구한다. 이것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민주적 중앙집권주의 조직의 양상을 포함한다. 그러나 전통의 핵심 인물이라는 사람들의 끔찍한 말과 행동을 생각할 때 어떻게 레닌주의자를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당신은 항의한다.
* 시민사회의 정치는 무엇인가?
[사회적 가치분배의 철학] 김비환
시민사회 [ civil society ]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근대 시민혁명을 계기로 자각된,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격으로서의 시민이 소유물을 교환하거나 의사를 소통하거나 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같은 사회는 실제적으로 완전한 형태로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근대 사회 그 자체인 자본주의 사회를 의미하는 경우도 많다. 홉즈의 경우, 시민사회는 로마 교황 = 카톨릭 교회로부터 독립한 사회이며 이 사회의 존립의 필요에서 정치권력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그 후 로크, 루소, 퍼거슨(A. Ferguson), 스미드 등은, 분업과 소유를 기초로 하는 시민사회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경우, 시민사회는 동시에 정치사회이기도 했다. 몽테스큐의 <법의 정신>이 처음으로 명확하게 시민사회(l’etat civil)와 정치사회(l’etat politique)와를 구별했는데, 이 시민사회를 국가와의 구별과 연관 속에서 위치 부여한 것은 헤겔이다. 거기에서는 <욕구의 체계>로서의 시민사회는 인륜적 이념이 분열한 과적 단계이며, 국가에로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국가론의 관념성을 비판하고, 시민사회야말로 현실의 인간의 생활의 장소라고 했는데, 동시에 근대 시민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서 인간의 자기소외와 체제적 모순을 내포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이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 후, 시민사회 = 부르주아적 사회 = 자본주의 사회라는 인식이 보급되었는데, 시민사회의 본래의 의미를 재인식하고 마르크스가 목표로 한 것도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시민사회였다고 하는 견해도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시민사회의 개념규정의 문제로서 시장을 넣을 것인지, 배제할 것인지에 관하여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왈저(Michael Walzer)의 정의에 의하면 시민사회란 ‘비강제적인 인간의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공간의 명명으로 가족, 신앙, 이해, 이데올로기를 위해 형성되었으며 이 공간을 만족하는 관계적인 네트워크의 명명이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시장을 포함한 광범위한 ‘각종 틀로 이루어진 틀’로서 이해된다. 이 정의의 특징은 시민사회의 광범성과 복수성이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며, 이질적인 여러 집단이나 여러 가치의 공존을 위한 사회공간으로서 시민사회가 이해된다는 점이다. 왈저의 정의는 시장을 배제하지 않는 개념규정의 하나의 모범형이 되었다.
[사회적 삶의 의미] 제프리 C.알렉산더
시민사회는 자체의 제도를 통해 도덕적 규제가 실행된다. 이러한 제도들은 위기가 규정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공공의 장을 제공한다. 이들의 결정은 구속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보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의 제도와 그 제도에 의한 결정이 일련의 독특한 문화적 코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미국 시민사회 담론에 초점을 맞춰 일반적인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시민사회 민주적 코드와 반민주적 코드는 행위자와 동기에 관해 철저하게 상이한 모델을 제공한다. 민주 의식을 가진 사람은 의사 결정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침착하고 현실적인 사람으로 상징적으로 해석되고, 양심과 도의심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진다. 반대로 억압적인 코드는 반민주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 병적인 탐욕과 자기 이익의 동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상정한다. 이들은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없으며, 비현실적인 계획을 낳는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히스테리적인 행동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여겨진다. 민주적인 사람은 행동과 자율성을 가진 사람으로 특징지어지는 반면 반민주적인 사람은 자유 의지가 빈약하고, 지도자가 아닐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르는 수동적인 사람으로 인식된다. 이는 우리 정치의 보수와 진보 대결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행위자와 동기에 대한 담론에는 개인적 욕구에 따르는 것으로 가정되는 사회적 관계와 관련된 담론이 동반된다. 민주적인 성격의 특성은 개방적이고, 타인을 신뢰하며, 정직한 관계를 허용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사람들은 복종적인 관계보다는 비판적이고 성찰적 관계를 장려한다. 반대로 반민주적인 사람들은 기만과 마키아벨리적인 계산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비밀스럽고 음모적인 거래와 연관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의 비합리적이고 본질적으로 의존적인 특성은 그들이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기와 시민적 관계에 대한 담론 구조가 있다는 점에서, 함축된 상동성과 상반성이 사회.정치.경제 제도로까지 확장됨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기에 있어서 비합리적이고 사회적 관계에서 상호 신뢰가 결핍될 때, 이들은 규칙을 따르기보다는 임의적인 제도, 법보다는 난폭한 권력을 사용하는 제도, 평등보다는 위계를 행사하는 제도를 자연스레 창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제도는 포용적이기보다는 배타적일 것이고 비개인적이고 계약적인 의무보다는 개인의 충성심을 조장할 것이다. 또한 공동체 전체의 요구보다는 소규모 파벌의 이익에 호의적인 경향을 보일 것이다. 동기, 관계, 제도에 대한 시민 담론의 요소들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상식은 특정한 종류의 동기가 특정한 종류의 제도, 관계와 연관되도록 지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심복을 신뢰하고, 개방적이며 정직하고, 모든 부하에게 평등을 베풀기 위한 시도로서 엄격하게 법을 준수하는 독재자를 상상하기 어렵다.
* 시민사회와 정의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_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
행복과 사회정의
2011년10월28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중이 3분의 1 수준이고 5.60대를 중심으로 계속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56퍼센트 수준에 그친다고 하니 빈부의 격차가 심한 것이 현실이다. 사회적 지위 상위층 20%가 80%의 부를 차지한다는 '파레토의 법칙'에 부합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만약에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가 더욱 극심해져서 다수의 빈민과 소수의 부유층이 첨예하게 분리된다고 해보자. 이런 사회에서는 다수 빈민의 비참한 상황이 소수의 호화스런 생활과 극명히 대조된다. 그 때문에 다수 빈민의 소수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일반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범죄가 창궐하고 약탈행위가 빈번하게 자행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불안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그에 따라 국가는 사회안전을 위해 더 많은 경찰력을 충원해야 할 것이며 이는 결국 잘 사는 사람들의 지출을 늘리게 된다. 그러므로 빈부격차의 심화는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사회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해 더 많은 재정지출을 요구하게 되는 바, 이는 결코 소수의 부자들에게도 유리하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부유층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지출할 것은 다 지출하고도 다수 빈민들의 적대감과 질투를 결코 소멸시킬 수 없으니 단지 직접적인 위협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대체한 효과만 있을 것이다. 질투와 적대감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빈민들과 부유층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다. 만일 부자와 특권층들이 지불하는 안전비용이 경찰력을 증대하기 위해 쓰여지지 않고 빈민들의 생활고를 완화하기 위해 쓰여진다면 어떻게 될까? 빈민들이 부유층으로부터 거둬들인 재정으로 생활고를 이겨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적어도 계급적인 적대감과 위화감은 상당히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비록 부유층이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동기에서일지라도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고맙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시기에 찬 악의의 범죄는 줄어들게 될 것이고 사회는 그런 대로 안전하게 유지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사회의 안전이 유지되는 한 부유층은 계속해서 자기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행복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시민의 기본 속성을 알아야 한다.
[이기심과 이타성]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 목적에서만 행동하는가?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순수한 이타적 감정을 가지고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리고 각종 재해가 닥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성금을 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본다. 그렇다면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안전비용을 지불한다는 신중한 관점은 지나치게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견해에 입각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은 전적으로 타당한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선하고 포용력 있으며 이타적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빈부의 격차가 그렇게 심화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문과 각종 언론매체에서 우리가 접하는 소식들은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만으로는 사회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다수가 선하고 이타적이라고 해도 소수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다면 사회 전체는 소수 악인들의 횡포와 비행의 볼모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선하고 이타적이라고 한다면 애당초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국가가 반드시 발생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게 된다. 그러므로 신중한 태도는 사회를 예측할 수 없는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협력을 이기주의적 각도에서 이해하는 것은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 주로 불안과 공포의 정념으로부터 발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것이 주로 가진 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축소시켜주고 못 가진 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완화시켜준다는 소극적 측면에서 옹호되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부정적인 감정의 축소 자체가 행복한 삶의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협력을 오로지 이기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조화로운 인간관계의 창출과 유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 만인이 최소한도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최소조건으로서 사회정의의 실현이 필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자유와 평등] 많은 사람들에게 평등은 명목상으로 고귀한 가치 혹은 이상으로 숭앙되고 있다. 그들의 행동과 태도가 평등이란 가치를 명백하게 거부하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불평등을 선호하면서도 최소한 말에 있어서만은 평등을 지지한다고 한다. 그만큼 평등은 우리 현대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관념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국가의 역할에 대한 오늘날의 논의 역시 평등이란 가치를 진지하게 고려한다. 그러나 평등이란 가치가 우리들의 지지를 받으며 국가 정책의 주요한 한가지 기조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아주 최근의 일로서 이 가치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 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은 근대 중에서도 후기의 일에 속한다. 평등이란 가치는 17세기의 영국에 있어 이미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등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 열렬히 선전되고 적극적으로 추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 때는 자유자본주의가 소위 산업독점자본주의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던 때로서 빈부의 격차가 말할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의 착취가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들이 착취한 이들 중에는 15세 미만의 어린 소년 소녀들과 심지어 임산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하루에 15시간 이상의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겨우 하루 세끼 먹을 정도의 임금밖에는 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결코 인간다운 사회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19세기 초반 이와 같이 비인간적인 착취적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거나 완전히 혁신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로 알고 있는 이들이 그런 움직임을 주도했다. 그들은 특히 기독교적인 인도주의 정신에 고무되어 사재를 투자함으로써 노동의 착취가 일어나지 않는 공산주의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시도했다. 2차대전 이후 노동계급의 요구와 저항에 직면하여 자본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적 평등원리를 대폭 수용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는 광범위한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한동안 자유와 평등이란 가치가 조화를 이루며 정의로운 사회를 구가하고 있는것 같았다. 복지국가는 광범위한 복지정책을 뒷받침할 복지 재정을 충당하기 어렵게 되었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시샘과 평등]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소외되고 억압받는 계급에 소속된 것이 일반적이다. 만일 어떤 인간관계 혹은 사회관계에서 특권적인 위치에 있거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굳이 그 관계가 불공평하다거나 부정의하다고 주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특권층 혹은 기득권층이 그 관계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것을 향보하거나 내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모순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평등이란 대의는 상층계급 또는 기득권층에 대한 하층계급 혹은 소외계급의 시기의 표현이라 비난되기도 한다. 하층계급이 평등을 부르짖는 것은 인간의 평등이란 이상에 고취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잘 사는 사람,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을 시기한 결과라는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잘살고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의 초과분을 가지고 서로 똑같이 나눔으로써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하고 있으나 기실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질투가 평등이란 이상을 외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평등이란 못 가진 자들의 질투에 기반하고 있는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 아니다. 평등은 소유의 유무 혹은 권세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격체로서의 동등한 존엄성을 의미하는 한에서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지위의 고하, 물질의 유무를 막론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를 갖는 평등한 개체들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그런 도덕적 특징의 비슷함에 평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실제에 있어 이런 도덕적 인력의 평등이 온전히 실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들 중의 다수가 이런 견해에 공감할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는 평등이 못 가진 자들의 질투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평등은 지위의 고하와 물질의 유무를 떠나서 도덕성의 평등을 의미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자신의 지위가 높고 돈이 많다고 해서 남들 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주장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사실과 다르다. 모든 사람들은 부와 돈, 권세와 능력에 있어 천차만별이다. 지능이 뛰어난 자가 있는 반면 지능이 좋지 않은 자가 있다. 아름다운 자가 있는 반면 미운 자도 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가 있는 반면 어떤 분야에서도 재능이 거의 없는 자가 있다. 어떤 자는 초가삼간에 살거나 심지어 노숙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으리으리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수천평의 대저택에 산다. 우리는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히 불평등이 존재하며, 나아가서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현실의 불평등 중에는 인격적 도덕성의 평등과 달리 사회에서 정당한 것으로 용인되는 것도 많다. 예를 들어 빈부의 격차는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어떤 사람들은 잘 살고 어떤 사람들은 못 사는 것은 그 원인이 타당하다면 정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어떤 사람은 게으르다면 부지런한 사람이 잘살고 게으른 사람이 못사는 것은 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 타당한 이유가 있는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무조건 평등을 요구하는 경우 그것은 시기의 발로나 억지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 불만을 품고 시정을 요구하는 사람이 무위도식하며 노름만을 일삼는 그런 사람이었을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사람은 남이 열심히 일해 축적한 부를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것과 같다. 그는 부유한 자가 부를 축적한 힘든 과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성과물만을 탐내고 있다. 그것은 시기의 발로이거나 억지인 것이다. 시기란 긍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부러움과는 다르다. 부러움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이 가지고 있을 경우 그 정당성을 인정하되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은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시기란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탐욕으로 주로 부정적인 감정이다. 타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정당한 이유 없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탐내는 마음 상태이다. 그러기에 시기는 타인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이 되면서 자기 자신에게도 큰 고통과 해가 된다. 시기는 타인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공격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또 자신에 대한 가학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그렇게 볼 때, 평등에 대한 예찬을 시기의 표출로 보는 시각은 평등이란 이상에 대해 적대적이다. 물론 이 경우 도덕적 인격의 평등과 시민권의 형식적 평등이란 측면에서의 평등은 제외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평등을 가난하고 못사는 자들의 시샘을 은폐하는 그럴 듯한 가면으로 보는 이들은 흔히 평등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하는 방법으로 평등의 이상과 폭력혁명 혹은 테러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혁명은 못 가진 자들의 시샘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서 평등의 이름하에 강제적으로 가진 자들의 것을 탈취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평등은 그다지 아름다운 가치가 아니다.
[다원주의] 가치관과 선호를 고려한 분배 만일 한 사회에 규범이 있다면 그 규범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가치일 수는 없으며 문화적 편견이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사회는 어떤 고차적인 목적을 위해서든 단순한 선호 때문이든 가치를 차별화하지 않으면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모든 사회는 절대적이고 분명하지는 않지만 가치관과 선호를 평가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가치다원사회론에 입각하여 가치관이나 선호에 따라 동등하게 부를 분배해야 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이상주의적 진보주의] 조금 더 이상주의적인 관점에서 사회정의의 문제를 바라보면 자기의 안정과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남을 돕는다는 생각이 너무 소극적이며 자신의 행복에도 그렇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기왕에 타인들을 위해 세금을 내고 성금을 낼 경우 우리의 것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타인에 대한 연민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이기적인 동기에서나 이타적인 동기에서나 지불하는 비용은 동일하다고 할 때 어떤 것이 기부자의 행복에 더 기여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거지에게 약간의 돈을 준다고 했을 때 그 거지가 귀찮게 하기 때문에 돈을 주는 경우와 그 거지의 가엾은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돈을 주는 경우에 어떤 것이 더 좋을까? 당연히 동정심 때문에 기부하는 것이 훨씬 큰 행복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 행위에 수반된 동기와 의도의 차이는 행위자의 행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들은 보통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익을 얻기 위해 하는 행위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중요한 자각에 이를 수가 있다. 생각해 보라. 많은 직업들이 결국은 타인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직업들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해주는 대가로 이익을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직업적인 행위들이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생각을 바꾸게 되면 그 동안 우리의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많은 편견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바꿀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남을 유익하게 해줌으로서 우리의 생계를 꾸려가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이상주의적인 진보주의라고 한다. 이 입장은 보수주의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긍정적이고도 낙관적인 견해에 입각해 있다. 타인의 불행에 연민을 갖는 자연적인 이타주의와 남을 도우려는 선의지 등등 이런 것들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론을 갖고서 행복의 문제를 바라보면 행복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물질적인 소유와 소비로부터 오는 충족감이 아닌 타인과의 좋은 관계와 나눔으로부터 결과되는 즐거움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행복을 얼마든지 경험하고 목도한다. 가족, 친척, 친구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좋을 때 더 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와 같은 모든 개인적.사회적 관계들이 계속해서 원만하고 이상적으로 유지되기를 바란다. 이런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행복에도 곧바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지닌 이타적인 감정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보통 때에는 이타적인 마음을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면 쉽게 나눠주지 않으려 한다. 또한 우리는 같은 동포에 대한 애착을 보일 때가 있지만 이런 감정을 국경을 초월하여 확장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약하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넘어 사고하고 행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볼 때, 이타적인 감정이 매우 제한적으로만 표현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가족과 친구의 범위를 넘어 타인의 행복과 복지가 향상되기를 바라는 거룩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런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또 실제로 이타적인 일을 하는 가운데 우리의 이익과 행복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삶과 행복이 사회정의와 훨씬 더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공정성과 정의] 자본에 의한 지배논리인 맘몬의 지배구조에서 바라본 현시대의 공정성과 정의에 대해 알아보면 이러하다. 사람들은 사회의 안정과 개인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공정한 분배원리를 모색하는 것을 갈망한다. 불공정한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은 특정한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폐되거나 편파적인 권력의 비호 아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부당하거나 불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저항의 행위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억압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사태나 상황의 부당성에 대한 다수의 잠재된 불만은 적절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표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의 안정성에는 큰 위협이 된다. 그러므로 사회의 다양한 사태나 상황의 정당함 혹은 공정성을 도모하고 강화시키려는 작업은 안정된 사회질서를 희구하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현대사회의 공정성 혹은 정의의 미덕은 특별히 두가지 경우와 관련하여 강조되고 있다. 한가지는 공동의 문제를 처리할 때 밟게 되는 절차의 공정성과 관련해서이고, 다른 한가지는 부를 포함한 중요한 사회적 가치들-학벌.수입.권력.지위.기회.명예 등-이 분배되는 방식 및 그 결과와 관련해서이다. 두가지 공정성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한 사회에서 부를 포함한 사회적 가치들이 분배되는 원리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정하다고 인정한 절차에 따라 선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절차적 공정성과 일정한 연관성이 있다. 그렇지만 공정한 절차에 의해 선택된 분배의 원리가 언제나 공정한 분배를 산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두가지 공정성은 별개로 간주되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는 부를 비롯한 사회적 자원들이 공정하지 않게 분배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사회의 안정성이 크게 손상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행복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기 쉽다. 현대인들은 행복한 삶을 위해 부와 권력과 같은 사회적 가치들을 타인들보다 더 많이 획득하려는 경쟁심으로 충일해 있다. 때문에 공정성 원칙에 위배되는 절차나 결과에 대해 분개의 감정을 갖기 쉽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력보다는 공정하지 못한 경쟁과 분배의 결과로써 자신이 불행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면 사회에 대한 불만이 더욱 증폭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사회의 안정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와 같은 불만의 감정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자괴감과 결합하여 개인의 행복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시민은 자유의 정의를 원한다
자유주의 자유론에서 말하는 자유는 사회적 자유를 의미한다.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사회적 권력은 무엇인가? 힘이 약한 민중들이 왕의 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지배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제한을 가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자유의 본질이었다. 민중들은 지배자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하여 두 가지 방법을 채택했다. 하나는 면책조항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지배자에게 민중이 자신들의 일정한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는 면책조항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지배자에게 민중이 자신들의 일정한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는 면책조항을 요구하고 이를 지배자가 준수하지 않을 경우에는 반란도 정당시하는 방법이다. 둘째로 입헌적 제약을 확립하는 것이다. 사회의 동의 내지는 사회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어떤 단체의 동의가 지배권력의 행동을 위한 필요조건이 되었다.
자유주의의 원칙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유주의의 원칙이다. 모든 개인은 그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권자이다.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그 성원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에 간섭할 경우에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유일한 근거는 자기보호이다. 즉 문명사회의 일원에 대하여 그의 의사에 반해서 권력을 행사해도 정당시되는 유일한 목적은 다른 성원에게 미치는 피해를 방지하는 것에 있다. 밀은 자유의 영역을 사상, 행동, 단결의 셋으로 나누었다. 생각의 자유는 정신이라는 인간의 내면 영역의 자유이다. 이는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만이 아니라 출판과 언론의 자유도 포함하는 것에 주의하여야 한다. 이 자유는 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행동의 자유란 개인의 취향의 자유와 목적 추구의 자유로서, 각 개인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이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자유이다. 단결(집회)의 자유는 개인들이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단체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 즉 단체행동의 자유이다.
자유를 통한 정의 실현
자유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인생의 목표는 자아실현이며, 자아의 핵심은 개성에 있다. 각자는 자신의 개성에 입각하여 지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스스로 선택하여야 한다. 관찰력, 추리력, 판단력, 식별력, 의지와 자제심과 같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은 모방의 생활에서는 모두 무기력해지며, 개성에 따라서 스스로 선택하는 삶에서만 연마되고 발휘된다. 경제학원론에서 하이에크는 자유가 소중한 이유의 하나로 목표와 성격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인간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꼽았는데, 밀도 이를 지적하였다. 개성은 지적이며 도덕적인 진보의 원천이기도 하다. 현대의 대중사회에서는 이처럼 소중한 개성이 소멸되어 가고 있다. 개인이 군중 속에 매몰되어 있다. 밀에 의하면, 현대사회에서 개성을 소멸시켜 사람들 간의 동화를 촉진시키는 요인은 정치, 교육, 교통수단의 발달, 상공업의 발달, 습관 및 여론이다. 정치는 높은 것은 더욱 낮게, 낮은 것은 더욱 높게 만들고, 교육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영향을 준다. 교통수단의 발달은 사람 간 접촉을 용이하게 하며, 상공업의 발달은 안락한 생활의 편익을 확산시키고, 입신출세를 특수계급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의 야망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들 요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밀이 강조한 동화의 매체가 여론이다.
[46호] 시민정치? 정치와 정의의 상관관계
[시민정치에 관한 사회학적 담론]
몇 년 전부터 난 이런 고민에 빠져있다.
"나의 에너지를 위를 향하여 쓸것인가, 아래를 향하여 쓸것인가"
그 고민을 시작하니 내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가 중요하게 다가왔다.
너무 낮은 위치에 있으면, 위에 영향을 미치기 힘들고
너무 높은 위치에 있으면, 아래를 짓밟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불평등, 위치제, 권력, 계급, 부의 세습이 존재함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그것은 사실이고, 현실이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불편하고 화가 났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애를쓰며 부질없이 한평생을 다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기껏해야 혼자서 분노를 삼키는 미약한 존재밖에 되지 않음을 인정해버린것 같다. 그 참혹한 현실이 사람이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라는 것의 본질이라는 논리가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한참을 고민하였다. 난 어떤 자세의 사회인으로 살 것인가. 고민의 답은 사회에 나를 어떻게 맞추어 사느냐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회에 무척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거나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 다행히 선택은 나에게 달려있음을 깨닳게 되었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낮은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허나 현실적으로 나라는 미약한 존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다. 그러나 꿈을 꾸다보면 점차 다가가기는 할 것이니, 지금도 단계적으로 실행해가고 있다. 높은 곳이라함은 결국 낮은 곳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한 힘이 돈과 권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 문명은 대중의 이름으로 행하는 권력만을 사회적으로 유일하게 실질적인 힘으로 만드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미약한 존재가 힘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음을 터득하게 되었다. 돈과 권력이 필요없는 행위로 위로 올라서는 것 말이다. 나에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 따위의 사회체제의 울타리 밖에 있는 것이었다. 긴장되게 하는 위치에서 파급력을 갖추지 못할거라면 권력 따위가 무용한 곳에 서있기. 중요한 것은 어떤 힘이 어떤 방식으로 지배력을 획득하느냐이다. 힘들의 배치가 바뀌면 자아도 달라진다. 사회체제는 기존의 기억, 습관의 동일한 배치가 반복되길 원한다. 이러한 힘들의 과소 상태를 이용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체제의 한가운데 있지 않고 주변에서 관망하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요근래 지켜보게 된 한가지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어졌다.
2040 진보세대의 시민정치가 이슈이다.
주변의 2040 세대들이 여느때와 다르게 정치에 관심이 많음을 느끼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말하는 정치가 정의와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난 어떤 정치적 견해나 비평이 아닌 그 점에 초점을 맞춰 이런 현상을 살펴봤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울분을 대변해줄 누군가를 찾는 통곡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정치는 무엇이며, 정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 실마리를 찾아가는 동안 정치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딱 맞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정의와 도덕이라는 것도 정치적 효용성을 위해 탄생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 2040 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성장보다 분배 중시하는 2040세대] 시사IN 216호
왜 세대일까. 세대는 계급이나 출신 지역보다는 훨씬 유동적인 개념이다. 한 게대 안에서도 소득.교육.출신지 따위 변수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갈등구조를 대표할 정도로 공고한 정치적 갈등구조를 대표할 정도로 공고한 정체성이 되기 힘들다. 더욱이 정초선거니 체제니 하는 개념은 한 번의 선거가 아니라 수십 년간 지속되는 정치의 기본 문법을 의미한다. 수십 년이면, 30대가 50대로 바뀌어 버린다. 그런 유동적인 기준으로 출신 지역과 같은 공고한 기준을 대체할 수 있을까. 최근 출간된 <진보 세대가 지배한다>를 보면 오늘날 한국 현실에서 세대란 정서적 동질 집단을 넘어 물적기반을 공유하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20대80사회로 빠르게 재편되면서 2030세대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없고 40대는 중간에 사다리가 사라진 세대가 되었다. 50대 이상이 누렸던 고도성장의 과실이 남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40대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아주 강렬한 집단적 체험을 공유하는 세대여서 보수화하는 속도도 느리다. 2040세대 동맹은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하고 지역주의를 벗어나려는 사실상의 계급 동맹이다. 2040세대를 묶어낼 정당만 있다면 진보가 다수파 동맹을 형성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며, 2012년 총선.대선을 세대구도 정초선거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대가 곧 계급이 될 수 있을까. 평소 세대론으로 정치를 해석하는 데 부정적인 정치학자들도 가능성만은 열어둔다. 정치학 박사 박상훈 대표는 보통 세대 정치는 정치가 나쁠 때 나타나는 병리현상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20세기 후반 이후 신자유주의의 묘한 특징은 노동시장 전체가 아니라 신규 진입자에게 희생을 전담시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대를 따라 일종의 계급 전선이 형성되는 상황이 세계적으로 일어났다. 이런 세대 정치는 정서적.문화적 세대 정치와는 결이 다른 변형된 계급 정치다. 금융권이 신입사원 연봉만 깎으며 고통 분담을 외쳤던 일이라던가, 기업이 신규 인력을 비정규직으로만 충당하는 일 등이 좋은 예다. 이런 식의 신규 진입자 타격이 누적되면, 특정 세대가 계급적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셈이다. 고용.주거.보육.교육에서 2040세대에 갈수록 쏟아지는 하중이, 이들을 사실상 하나의 계급으로 뭉치게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폭발적인 결집력은 그래서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젊은 층의 투표율이 높아진 이유로 언론이 주목하는 스마트폰이나 SNS와 같은 기술적인 혁신은 오히려 부차 요소에 가깝다. 2040세대는 이번 투표를 통해 말하고 있다. 성장을 통해 내가 잘 살게 되는 사회. 즉 민생을 외치고 있다.
* 참여사회와 투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기존의 억압적인 제도와 의식에 맞서 싸우고, 의식과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맞서 투쟁한다. 우리느 삶을 개선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발판을 확보하고, 헌신성이 강해지고, 조직이 권한을 부여받고, 투쟁 의지가 더 한층 고조된다. 우리는 새 사회에 이를 때까지 줄곧 그렇게 싸울 것이다. 추구하는 미래에 대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한편으로는 희망과 헌신성을 고무하는 모델을 얻기 위해, 또는 직접적 혜택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제도와 우리가 추구하는 새 사회의 구조도 만들어 낸다. 경제뿐 아니라 인종.문화.가족.성.정치구조도 사람들을 분열시켜, 변화를 지지하거나 반대해서 서로 싸우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인종.성.정치권력 문제로 싸우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려면 다양한 쟁점을 다루고 권한 부여를 더 확대하고 사람들을 더 고무해야 한다. 이 싸움의 대열에 2040의 젊은 세대가 가세한 것이다. 그들은 정의 구현을 목적으로 개입한다.
* 정치와 정의는 상관관계가 있을까?
[정치의 생각] 애덤 스위프트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정치철학자들이 사회협력의 혜택과 부담의 분배를 관할하는 주요한 사회.경제적 제도들을 도덕적.정치적 연구의 적합한 대상으로 보게 되면서부터이다. 사람들은 정의롭게 또는 정의롭지 않게 행위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가 정의롭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말은 무엇인가? 미국 철학자 존 롤스의[정의론]에 따르면 정의가 사회제도들의 가장 으뜸가는 덕목이다. 정의의 기본 개념은 사람들 각자에게 마땅한 몫을 주고, 마땅히 주지 말아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정의는 사람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몫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갖게 되면 좋을 것이라거나, 그들에게 주는 것이 예의에 맞을 것이라거나, 나아가 그들에게 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 것이라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정의는 우리가 정치적.사회적 제도들을 통해 집단적으로, 서로에게 그리고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요구되는가에 결부된다. 다시 말해 정의를 단지 도덕적으로 좋은 행위가 아닌 우리가 수행해야 할 의무와 행위에 연관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정의에 관한 세 가지 영향력 있는 발상들이 소개된다.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 로버트 노직의 권리로서의 정의, 그리고 응분의 몫으로서의 정의가 그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정의 개념에 대한 혼란으로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전체적인 신념체계가 과연 일관적인가를 걱정하며, 자기성찰을 하기도 한다. 면밀히 검토해보면 이 세 가지 정의관을 별 생각 없이 동시에 지지함으로써 상당히 혼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더 흔하다.
정의 개념을 되돌아가보자. 정의가 요구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좋은 행위가 있을 수 있다. 정의를 도덕의 한 가지 특수한 하위 세트라고 생각해보자. 정의는 사회제도들의 으뜸가는 덕목이라는 롤스의 말이 옳다면 이는 정치와 사회를 조직할 때 사람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몫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도덕적 고려사항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몫은 전부는 아니지만, 그들이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정의와 권리가 그렇게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이유다. 정의와 자선행위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정의의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누군가 자신이 자선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정의의 요구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애에서 시작된 행위라 볼 수 있다. 자선행위는 도덕적으로 좋은 일이긴 하지만 정의는 정당한 소유권을 보호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정의와 도덕적 요구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정당한 역할이다. 국가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는 이행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의무를 이행하도록 정당하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정치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국가는 국가의 법률에 따르는 사람들과 구분되면서 그들을 감독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법률의 내용을 결정하는 시민집단의 대리인이거나 대리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국가에는 사람들이 의무를 이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정당성이 있다는 주장은, 시민들이 국가의 강제기구를 사용함으로써 서로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도록 강제하는 게 정당하다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국가권위의 정당화 문제와 개인들이 과연 자신들이 반대하는 법률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지의 여부 및 어떤 상황에서 그런 복종의무를 지는지에 관한 중요하고 까다로운 이슈들을 제기한다. 국가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제할 수 있고 무엇을 강제할 수 없는가에 관하여 상식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견해에서 볼 때의 정의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이다.
정의가 정치도덕에서 핵심적인 이유는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가정 때문이다. 즉 일단 우리가 서로에 대한 의무를 잘 알고 있다면, 국가가 강제기구를 사용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이행하라고 정당하게 여겨지는 행위까지도 정당하게 강제할 수 있는 경우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정의란 무엇인가?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정의는 제도의 첫 번째 덕목이다. 정의는 잘 사는 데 필요한 수단을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려면 우선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가 서로 다르거나 분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보면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가치들을 근거로 신자유주의의 대안들을 평가할 수 있다.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운동이 저항하는 가치는 크게 네 가지다. 정의.효율성.민주주의.지속가능성.
정의 : 반자본주의 운동의 호칭 가운데 하나는 세계 정의 운동이다. 우리는 현재 세계의 불의와 엄청난 불평등을 끊임없이 그리고 올바르게도 비난한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 이것 자체가 방대한 주제이긴 하지만, 반자본주의 운동은 평등주의적 정의 개념에 헌신하는 듯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예컨대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자원을 평등하게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효율성 : 이것은 의외로 전문관료적 가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장비적 체제라고 비판하는 우리의 주장을 떠올려 보라. 포장.광고 따위에 자원이 낭비되고, 시장 가격이 경제 과정의 진정한 비용(예컨데, 환경 파괴)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 등을 말이다. 그 함의는 모름기지 대안 사회는 가용 자원을 가장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잘의 의미는 가장 수익성 있는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협력적 공생 필요성과 자연이 강요한 제약조건들 우리의 가치들을 모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없다고 비판한다. 또, 금융시장과 다국적기업들이 전 세계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며 횡포를 부린다고 비판한다. 더욱이, 우리의 조직 방식은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를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대의민주주의 대 직접민주주의, 합의제 원칙 대 다수결 원칙 등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의 범위와 내용을 급진적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지속가능성 : 반자본주의 운동을 촉발한 주요 동기 중 하나가 환경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다. 환경 재앙은 현재 경제 체제의 흐름일 뿐 아니라 이미 타나타고 있는 현상이다. 기후 변화 전문가들의 주장을 보면, 온실가스 방출에서 비롯된 지구의 기온 상승에 지금 당장 급진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이 추세가 그대로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의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 정의가 강조되는 이유
합의 또는 동의를 모든 중요한 의사결정과 정책입안의 토대로 삼고자 하는 현대 사회의 경향성은 공정함을 담보하지 않은 체제의 안정성이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역사적 경험과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정성에 대한 요구는 공정성 자체보다는 불공정함과 부정의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에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공정성 혹은 정의에 대한 요구는 사람들이 이러한 경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시키려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상호 견제의 필요성에서부터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공정한 절차나 분배방식의 필요성에 대한 공통된 의식만으로 충분한 사회적 안정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는 데 현대사회의 근본 문제가 있다. 무엇이 공정한 절차며 무엇이 공정한 분배의 방식인가? 다시 말해 공정성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적인 사회에서는 공정성의 실질적인 내용이 사람들 또는 집단들마다 크게 다를 수가 있다. 때문에 공정한 절차나 분배방식이 필요하다는 큰 원칙에는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일부 사람들은 기회평등의 상화 하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적인 분배방식을 공정하다고 간주하고 중립적인 게임의 규칙들을 제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이들은 실질적인 복지의 평등이나 자원의 평등을 공정한 분배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들이 이해하고 있는 공정성의 구체적인 내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비록 공정성이라는 동일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과연 같은 의미로 그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분배적 정의에 대한 오늘날의 연띤 논쟁은 상당 부분 이와 같은 개념적 이해의 차이를 반영한다. 다양한 입장들이 어느 정도의 분배적 정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동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너무나 달리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논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각자는 자신의 해석이 옳거나 보다 나은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해석이 참으로 옳거나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발견하기 어렵다. 때문에 그들 사이의 논쟁은 평행선을 그으며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객관적이라고 주장되는 그들의 해석에는 특수한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방의 해석을 편파적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근거가 없지는 않다.
다원사회의 속성을 두고 볼 때, 이와 같은 견해의 대립을 일시에 해소할 수 있는 최상의 합의된 해석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현실적인 정책집행을 위해서는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절충하며 타협하는 길 밖에는 없다.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믿는 각 당사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타협과 절충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당사자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용될 수밖에 없다. 평화적인 해결방법만이 모두의 불이익을 막을 수 있다는 최소한도의 공감만이 그들의 타협과정을 인도하는 공통의 토대로써 작용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입장의 불일치와 현실적 타협은 도덕적인 합의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근본적이고 따라서 일시적인 타협만이 가능하다면 그 사회는 지속적인 안정을 누리기 어렵다. 그와 같은 불안정한 균형은 일부 집단의 상황 변화에 의해서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구성원들 사이의 입장의 차이를 좁혀 가는 의사소통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과정은 대단히 계몽적일 수도 있다. 비판적인 대화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한계는 물론 자신의 한계까지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타인을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존엄한 존재로 존중하는 이상적 사회에서는 부당함에 대한 의식이 최소화될 가능성이 크며, 설령 그런 의식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대화와 타협에 의해 해결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 정의는 악과 함께할 때만 존재한다
악의 사회학
사회의 가치는 주로 선에 대한 관심, 이상형 구현의 노력으로 연구된다. 악, 불량함, 부정성이라는 사회적 개념은 규범에 의해 규제된 행위에서의 유형화된 일탈로만 여겨진다. 이러한 악의 추방은 경험적 현실주의보다 교화하고자 하는 소망의 실현을 의미한다. 이는 악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근대성과 악의 관련성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한다. 악을 잔류 범주로 간주하는 것은 선과 정의를 제도화하기 위한 계몽된 노력에 동반하는 파괴와 잔인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사회학에 대한 정의, 그리고 이에 대응하려는 제도적 노력은 어디에서든지 이성과 도덕적 겅의로의 근대적 추구와 함께해왔다. 그리스 시대부터 인류는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습관에 젖어있다. 자아:집단,이익:가치,악:선. 이것은 현대 공동체주의의 특징인데, 공화주의와 실용주의 사상 간의 결합이다. 이기주의와 가치 결핍을 현대사회 문제로 보는 공동체주의자들은 다른 가치, 다른 사람들의 가치, 그리고 사실상 타자의 가치와의 대비에 의해 공동체의 가치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한다. 논점은 가치 대 이익, 선한 가치와 악한 가치가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선한 가치는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불쾌하게 간주되는 가치와 대비되어야만 구체화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행위자, 제도, 사회는 악을 구체화하고 정밀하게 다듬는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은 역설적이고 심히 우울한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적절한 실례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타락을 어떻게 개념화했는지 살펴보자. 마르크스는 나쁜 가치의 사회적 효과를 지적하는 대신, 자본주의가 이러한 효과의 가능성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억압은 소외와 이기주의를 만연시킨다. 이 압박은 가치를 억압하고 이상형을 파괴하는 수단적.전략적 행위 지향을 수반한다. 물질주의가 규범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공유된 이해, 결속, 공동체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적 경쟁과 탐욕이라는 황폐한 세력을 제거한 후에야 가치 지향이 가능해지며, 결속이 강화된다.
악은 단순히 지배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긍정적 가치 판단의 가능성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사회는 지속적으로 악을 생산해낸다. 어떻게 선이 다시 한 번 악에 대해 승리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매우 정교화된 서사가 더해진다. 악을 공평하게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좀 더 객관적 판단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회의 문화적 측면이 선뿐만 아니라 악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민주주의는 정의를 실현하는가?
민주사회에서의 삶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에 관한 이견으로 가득하게 마련이다. 공적인 삶에서 도덕 문제를 놓고 열정적이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도덕적 신념이 이성과는 무관하게 가정교육이나 신앙으로 정해졌다는 느김을 받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도덕에 호소해 상대를 설득할 수 없으며, 공개토론에서 정의와 권리를 두고 자기 주장을 펼치는 행위는 독단의 남발이자 사상을 놓고 음식을 집어던지며 싸우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가 최악일 때는 그와 비슷한 형태가 나타난다. 하지만 꼭 그런 식으로 갈 필요는 없다. 때로는 어느 한 사람의 주장에 우리 마음이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도언에 관해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는 영역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도덕적 혼란의 힘과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으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긴장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옳은 행위에 관한 판단을 재검토하거나 애초에 옹호하던 원칙을 재고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면, 자신의 판단과 원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판단에 비추어 원칙을 재고하고 원칙에 비추어 판단을 재고한다. 이처럼 행동의 세계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또 그 반대로 마음을 도리는 것이 바로 도덕적 사고의 기본이다. 도덕적 사고를 정치에 적용할 때, 어떤 법으로 사회를 다스릴지 질문을 던질 때, 도시는 술렁이고 사람들은 여러 주장과 사건으로 들끓게 마련이다. 사실 더 까다로운 상대는 정치철하가들이다. 고대와 근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시민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정의와 권리, 의무와 합의, 영광과 미덕, 도덕과 법 같은 개념들을 더러는 급진적이고 놀라운 방식으로 고민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임마누엘 칸트,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 등의 철학가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의 개념을 살펴보겠다.
* 정의의 개념과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정의를 이해하는 세가지 방식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 이때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다 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우리는 이미 이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가격폭리의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구제금융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여러 주장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재화 분배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찾아냈다. 행복, 자유, 미덕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이상은 정의를 고민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암시한다. 행복을 극대화하고 자유를 존중하며 미덕을 기르는 행위의 의미, 그리고 그와 관련한 이상이 서로 충돌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정치철학이 이런 상황을 단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장을 다듬고, 민주 시민으로서 우리가 직면한 여러 대안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행복 극대화
시장 중심 사회에서는 행복 극대화가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다 오늘날의 정치 논쟁 또한 경제적 풍요를 장려하거나 생활수준을 높이거나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할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왜 이런 문제를 고민할까? 가장 분명한 답은 개인으로 보나 사회로 보나, 경제적 풍요로움은행복에 기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와 연결된다.
-자유
개인의 권리 존중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치열한 정치 논쟁은 자유방임주의와 공평주의 진영 사이에서 일어난다. 자유방임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자들은 자유시장주의자들이다. 정의란 성인들의 합의에 따른 자발적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데 달렸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공평주의 진영에는 평등을 옹호하는 이론가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규제 얺는 시장은 공정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보기에, 정의를 구현하려면 사회적.경제적 불이익을 바로잡고 모든 이에게 성공할 기회를 공평하게 나눠 주는 정책을 펴야 한다.
-미덕
정의가 미덕 그리고 좋은 삶과 밀접히 연관된다고 보는 이론이다. 오늘날의 정치에서 미덕은 흔히 문화적으로 보수주의, 종교적으로 우파와 동일시된다. 도덕을 법으로 규정한다는 발상은 자유주의 사회 시민들이 보기에 자칫 배타적이고 강압적인 상황을 불러올수 있는 경악할 만한 발상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라면 미덕과 좋은 삶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해햐 한다는 생각은 공히 모든 이념에 깃들어 있으며 다양한 정치 활동과 주장에 영감을 주었다.
칸트 [동기중심]
칸트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공리주의를 거부한다. 우연히 생기는 요구에서 도덕 원칙을 끌어내려 함으로써 도덕을 생각하는 방식부터 그친다. 많은 사람에게 쾌락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다수가 특정 법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법으 정당하다고 할 수도 없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순수 실천 이성을 연습하여 도덕의 최고 원칙에 도달할 수 있다.
제러미 벤담 [공리주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했다. 도덕의 최고 워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옳은 행위는 '공리(유용성)'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이다. 벤담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거쳐 자신이 주장하는 원칙에 도달한다. 우리는 모두 고통과 쾌락이라는 감정에 지배된다. 이는 모든 행위를 지배할뿐더러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한다. 우리는 모두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은 싫어한다. 공리주의 철학은 이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도덕적.정치적 삶의 기초로 삼는다. 공리를 극대화한다는 원칙은 개인만이 아니라 입법자에게도 해당한다. 정부는 법과 정책을 만들 때,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허구의 집단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시민과 입법자들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정책에서 얻는 이익을 모두 더한 뒤에 총비용을 빼면, 다른 정책을 펼 대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을까? 벤담의 공리주의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사적 판단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심판하지 않는다. 모든 취향은 동등하게 계산된다. 벤담은 이 쾌락이 저 쾌락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은 주제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모차르트를 조하하고, 어떤 이는 마돈나를 좋아한다. 어떤 이는 발레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볼링을 좋아한다. 어떤 이는 플라톤을 읽고, 어떤 이는 플레이보이지를 본다. 벤담은 물을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더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벤담은 사람들의 선호도를 가치를 따지지 않은 채 모두 더해서 어떤 법이 필요한가를 결정하려 했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주의]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되리라고 주장한다. 다수가 반대 의견을 막거나 자유사상가를 검열할 수 있다면 오늘 당장 공리가 극대화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불행이 늘고 행복은 줄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면 장기적으로 사회가 행복해진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밀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개인의 의견 전부 또는 일부가 사실로 판명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대다수 의견을 수정할 수 있다. 사실이 아니라도,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이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다수 의견이 독단이나 편견에 빠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관습과 관례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사회는 답답하고 순종적인 체제로 전락해, 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힘과 활기를 잃기 쉽다. 자유가 사회에 미치는 유익한 효과에 관한 밀의 생각은 대단히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개인의 권리에 설득력 있는 도덕적 근거를 제공하지 모한다. 첫째로, 사회 발전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존중한다면, 권리는 불확실한 상황에 볼모로 잡힌 꼴이다. 이를테면 전제적 수단을 동원해 장기적 행복을 얻으려는 사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공리주의자들은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사실상 꼭 필요치는 않다고 결론짓지 않겠는가? 둘째로, 권리를 공리주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했을 때, 그것이 사회 전체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든 당사자에게는 부당행위가 된다는 사시를 간과할수 있다.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수가 소수를 박해한다면, 그 믿음을 인정했을 때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해도, 박해받는 개인에게는 부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밀은 이 질문에도 대답한다. 그러나 이때는 공리주의적 도덕이라는 한계를 넘어선다. 밀은 관습이나 관례 또는 다수 의견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행위는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럴 경우, 사람드른 능력을 한껏 발휘해 삶의 최고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밀의 설명에 따르면, 순응은 삶의 적이다. 밀은 관습을 따르면 인생에 만족하면서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비교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무엇을 하느냐뿐만 아니라 어떤 태도로 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하다. 행동과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인격도 중요하다. 밀에게 개성이 중요한 이유는 쾌락을 주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공리를 넘어서는 도덕적 이상인 인격과 인간 번영이라는 이상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벤담의 원친에 반하는 주장이다.
고바야시 마사야 [정의사회의 조건]
3개의 정의관
행복의 극대화-결과주의:공리주의
자유의 존중-의무권리론: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
미덕의 추구-목적론:공동체주의
동양의 정의
롤스의 계약론적 논리는 정치규범적인 논의와 정치철학 자체를 부흥시키는 강력한 효과를 가져왔다. 이 정의라는 개념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권에서 정의라고 하면 보통 윤리적인 정의를 생각한다.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권에서 정의라고 하면 보통 윤리적인 정의를 생각한다. 유교적 관념에서 의가 인.의.예.지.신 오덕의 한 가지로 인식되듯 정의는 초월적.윤리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에서는 종교적.윤리적인 생각이 쇠퇴하고 또 다양해졌기 때문에 그런 근거로 정의를 주장하기는 힘들어졌다. 오늘날 필요한 정의는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을 만한 정의이자 의무론이라 불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자유지상주의의 자유형 정의론
정의에 대한 세 가지 생각 중 자유형 정의론은 의무론과 관계가 깊다. 비결과주의나 비공리주의의 윤리학을 포괄적으로 의무론이라 하는데, 행위는 초래되는 결과의 좋고 나쁨과는 관계없이 도덕적 원리 또는 규칙에 따라 의무로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리주의는 결과주의로, 결과가 더 좋게 되도록 한다는 생각이고 의무론은 결과와 상관없이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떄문에 한다는 생각이다. 의무론에는 권리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기반적 이론과 권리지향적 자유지상주의가 있다.
존 롤스의 정의론
제1원칙 : 각 개인은 기본적 자유에 대한 평등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 기본적 자유의 체계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자유의 체계에서 양립한다는 조건 아래, 최대한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자유의 체계여야 한다.
제2원칙 :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격차원리(차등원칙) : 그들의 불평등이 가장 불운한 입장에 있는 사람의 편익을 최대화하는 것
-공정한 기회균등의 규칙(평등주의) : 공정한 기회균등이라는 조건 하에서 불평등의 계기가 되는 직위와 직책이 모두에게 개방될 것
정치철학은 정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정치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같은 규범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학문이다. 이런 정치사상은 예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오늘날 학문 분야로서 정치철학이라고 말할 때에는 현대 정치에 대해 규범적인 논의를 하는 학문 영역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정치학사 같은 분야는 과거의 정치사상의 역사를 다루는 것으로 서양의 경우 근현대를 연구하거나 가르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정의는 목적론적이다.권리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목적,목표,본질)를 이해해야 한다.
-정의는 명예와 관계한다.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논하는 것은 그 행위가 명예를 수여하고 보상하는 미덕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다. 목적 면에서 미덕을 갖는 것이 명예이자 정의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상으로 정치적 권력의 분배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목적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선한 인격의 형성, 시민들의 미덕을 높이는 것 그리고 좋은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는 지위나 명예에서도 분배적 정의를 생각해 페리클레스처럼 시민의 미덕을 갖고 선의 추구에 가장 공헌한 사람이야말로 정치적 통치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명예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정의란 적합성의 문제로 미덕이나 초월성을 갖춘 자가 그에 걸맞은 역할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적합성 정의론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폴리스(도시국가)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한다. 언어능력을 활용해 동맹시민들과 정치를 논의하고 그와 관련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행복이란 공리주의자가 말하듯 고통에 대한 쾌락의 크기를 최대한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덕에 기초한 영혼의 활동이다. 정치를 배우는 모든 사람은 영혼을 배울 필요가 있고, 영혼을 만들고 다듬는 것은 선한 도시의 법률의 목적 중 하나다. 미덕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규칙이나 방침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개별 상황의 특징을 간파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선의 정치
마이클 샌델은 어떤 정치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할까? 그는 정치적인 좌우를 초월한 논리를 제기한다. 공화당이나 민주당, 지금까지 미국의 정당은 어떤 형태로든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그가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을 찾을 수 없다.결여되어 있던 발상을 제기한다.
하나, 시민의식, 희망, 봉사, 둘, 시장의 도덕적 한계, 셋, 불평등, 연대, 시민적 미덕, 넷,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
* 정의와 그 밖의 가치들
사람에 따라 정의가 제각각일 수 있다는 말도 옳지만, 평등주의적 정의 개념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자원을 평등하게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세 가지 논점이 나온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거나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도 사회의 자원을 평등하게 이용했을 뿐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재산에 대한 보상이나 유전적 자질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다면 정말 명백한 합리화다. 기회 균등은 기회가 평등하다는 뜻이다.
-내가 옹호하는 평등이 반드시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옹호하는 것은 급진적 형태의 기회 균등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평등하게 보장돼야 하지만, 그나 그녀가 이런 기회를 얼마나 많이 이용하는지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이런 저의 개념은, 노력에 따른 노동의 보상과 모순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똑같이 보장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철학자들이 완벽주의라고 부른 것이 나온다. 삶의 계획이라고 해서 모두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무기상이나 인종 차별주의자나 어린이 성범죄자가 자신들의 특별한 계획을 실현하고자 사회의 자원을 요구하는 것은 안 된다.
*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요즘에는 분배 정의를 토론할 때면 주로 소득, 부, 기회의 분배를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분배 정의는 대개 돈디 아닌 공직과 영광의 분배와 관련된 문제였다. 누가 통치권을 쥐어야 하는가? 정치권력은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배 정의 이론들이 하나같이 차별적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문제는 어떤 차별이 정당한가이다. 그 답은 목적에 달렸다.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치 연합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정치에 특별하고도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는 다만 시민이 지지하는 다양한 목적에 가능성을 열어둘 뿐이다. 그렇기에 선거라는 것이 있어, 특정 시기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어떤 목적과 목표를 추구할지 선택하지 않는가? 정치 공동체에 미리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부여한다면 시민이 직접 결정할 권리를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할 위험도 있다. 정치의 텔로스, 즉 목적을 단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마음을 반영한다. 우리는 정치를 사람들 스스로 목적을 선택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게 정치의 목적은 어느 목적에도 치우치지 않는 권리의 틀을 정하는게 아니라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
이름뿐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시민사회라면 선을 장려하는 목적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치 연합은 단지 동맹으로 전략한다. 법은 단지 계약에 머물고 만다. 그 계약은 시민사회 구성원들을 선하고 공정하게 만드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삶의 규칙이 아니라 서로에게 맞서는 권리를 보장하는 계약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권력을 요구하는 주요한 두 세력을 비난한다. 과두정치를 행하는 독재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이다. 그는 이들이 오로지 편파적 요구만 한다고 말한다. 과두정치가들은 부자인 자기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신분이 시민권과 정치권력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집단의 요구는 모두 과장되어 있다. 정치 공동체의 목적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정치 공동체는 재산을 보호하거나 경제적 풍요를 달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과두정치가들은 틀렸다. 정치 공동체가 오직 그런 것이라면 갑부가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정치 공동체는 다수에게 주도권을 맡기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자들도 틀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민주주의자란 우리가 다수결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는 정치의 목적이 다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게 만드는 것, 즉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며, 시민 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정치 공동체가 좋은 삶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거기에서 공직과 영광의 분배는 무엇을 암시할까? 이러한 성격의 연합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사람은 바로 시민의 미덕이 탁월한 사람, 공동선을 숙고하는 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최고의 부자도, 다수도, 가장 잘생긴 사람도 아닌, 시민의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정치적으로 인정받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정치의 목적은 좋은 삶의 구현이기 때문에, 최고 공직과 영광은 페리클레스처럼 시민의 미덕이 가장 뛰어나고 무엇이 공동선인지를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재산이 있는 사람들도 발언권이 있어야 한다. 다수결주의자의 생각도 어느 정도 중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고 권력은 뭐니뭐니 해도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를지, 치른다면 언제 어떻게 치를지를 결정할 자질과 판단력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최고 공직과 영광을 누려야 하는 이유는 그저 현명한 정책을 실행해 모든 사람을 잘살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란 어느 정도는 시민의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을 대중이 인정해준다면 좋은 도시의 본보기를 제시한다는 교육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정의에서 목적과 영광이 함께 나타다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정치의 목적은 좋은 삶의 구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다면, 가장 훌륭한 시민의 미덕을 발휘하는 사람이 가장 높은 공직과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치는 좋은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의 말은 과연 옳은가? 좋게 말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오늘날 우리는 대개 정치를 좋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아니라 필요악으로 여긴다. 정치라고 하면, 흔히 타협, 가식, 특별한 이해관계, 부패를 떠올린다. 정치를 사회 정의의 도구로, 즉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상적인 경우라도, 정치를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자 여러 소명 중 하나로 여기지, 선의 필수 요소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정치 참여를 좋은 삶의 필수 ㅇ소라고 생각할까? 왜 우리는 정치 없이는 더없이 훌륭하고 미덕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없을까?
그 답은 우리 본성에 이�. 우리는 시민사회에 살면서 정치에 참여할 때만이 인간의 본성을 아낌없이 실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를 꿀벌이나 기타 무리지어 사는 동물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존재로 본다. 그 이유는 이렇다. 자연은 어느 것 하나 헛되이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에겐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 고유의 특징인 언어는 무엇이 공정하고 무엇이 불공정한지 선언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소리 없이 파앗하지 않고, 말로 표현한다. 언어는 선을 식별하고 고민하는 매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직 정치 연합에서만 우리는 언어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발휘하는데. 그 까닭은 시민사회에 있을 때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부정을 고민하고 좋은 삶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시민사회가 애초부터 존재하고, 개인에 앞선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 민주주의의 결함
국민이 직접 통치자를 뽑는 민주국가에서는 자유의 억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통치자들은 민중을 대신하여 민중으로부터 권력을 위탁받고 민중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며,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민중들이 해임시켜버리면 되므로, 민주사회에서는 과거와 같은 지배자와 민중 간의 갈등은 없으며 민중들이 권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인간에게는 통치자의 지위에 있을 때나 같은 시민의 입장에 있을 때를 불문하고,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좋아하는 것을 행위의 준칙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무리하게 강제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러한 성향은 인간본성에 부수하는 어떤 종류의 최선의 감정과 최악의 감정에 의해 강력하게 지탱되고 있기 때문에, 아예 권력을 없애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수단으로도 거의 억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권력이라는 것은 쇠퇴되어가기는커녕 도리어 증대일로에 있는 형편이므로, 도덕적 확신이라는 공고한 장벽을 구축하여 그러한 해악을 방지할 수 없는 한, 우리들은 현재와 같은 세계의 상태하에서는 그 해악이 더욱 증대되어가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사실을 각오해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다수의 압제는 국가권력기관을 통해서 발생하고 동시에 다수의 여론과 국민정서라는 무형의 사회적 압제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세부까지 침투하여 인간의 영혼 그 자체도 노예화하고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기 때문에 정치적 압박보다도 더 무섭다고 밀은 보았다.
[대의정부론] 존 스튜어트 밀
다수결의 횡포, 의회의 무능, 이익집단화 등은 민주주의 역사 속 최대의 결함이다. 이 문제들은 백 수십 년 전에 벌써 '대의정부론'에서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국민들이 선출한 사람이 국정을 담당하는 대의정부가 최선의 정부형태이지만, 인간의 모든 제도와 같이 민주주의 역시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의회의 지적 능력 부족
과거 왕정이나 귀족정치 시대의 관료들은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고 평생을 공직자로 지내기 때문에 경험의 축적, 잘 숙고된 전통적인 업무요령, 실무적 지식의 전수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관료제는 타성과 집단이기주의라는 치명적 결함으로 생명력을 상실하며 수구세력화되어 변화를 기피한다. 반면에 대의정부의 중추인 의회는 관료제와 같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지만, 자유를 추구하고 새로운 이상을 가진 천재들을 항상 수혈할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상극인 의회와 관료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양자의 장점을 살리고 양자의 단점을 해소할 수 있다. 모든 인간사에서, 서로 생명력을 갖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고유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서로 갈등하는 영향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수반되어야 하는 다른 목적을 배제하고 좋은 목적 하나만 배타적으로 추구하면, 하나는 과다해지고 다른 것은 부족해질 뿐만 아니라 원래 배타적으로 추구하던 목적도 부패하거나 상실하게 된다. 의회와 행정부가 서로 갈등하는 영향력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한 원리를 적시하고 있다. 서로 갈등하고 견제하는 경쟁자가 있어야 타성에 젖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다는 말은 비단 의회와 행정부 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진보와 보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 실로 많은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지혜라고 할 것이다.
의회의 이익집단화
벤담이 사악한 이익추구라고 이름붙인 이익집단화는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다수 계층이 공동체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계급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인식과 도덕성의 불완점에서 오는 인간본성에 대한 관점이다. 사람은 이기적 관심과 탈이기적 관심, 그리고 눈앞의 이익과 먼 장래의 이익이라는 두 가지 관심 내지 이익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이어서 눈앞의 이익에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과 이익을 공유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적 이익만을, 그리고 당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 속성이며, 특히 권력자들의 특성이다. 그 결과로, 지배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을 핍박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대의정부의 지배층도 마찬가지이다.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민주정치에서, 지배층은 국민들의 다수를 구성하는 가난한 육체노동자계급이다. 이들도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진정한 이익을 저버리는 정책을 지지하기 쉽다. 사유재산권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 세금을 모두 부유층에게만 부담 지우려고 하는 것, 직종별 임금차별의 철폐와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의 제한이나 금지를 지지하는 것, 수입개방, 성과급, 기계의 도입을 반대하는 것 등은 모두 육체노동자들의 계급적 이익에 기초한 감정으로부터 발생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거짓의 민주주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을 똑같이 대표하는 모든 국민의 정부이다. 반면에 거짓의 민주주의는 다수만을 배타적으로 대표하는 정부이다. 전자는 모든 국민의 평등과 같은 의미이며, 후자는 국정을 장악한 다수에게만 혜택을 주는 특권의 정부이다. 현실의 민주주의는 후자인 거짓의 미주주의이다. 밀은 이러한 결과가 주로 잘못된 선거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비례대표제의 도입
결함을 갖고 있는 소선거구제의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비례대표제이다. 의회의 지적 자질 부족과 이익집단화라는 대의정부가 빠지기 쉬운 위험을 모두 치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비례대표제는 소수 계층의 지지를 받는 사람도 전국적으로 표를 모아 의회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각 계층이 모두 자신들의 인구구성비에 비례하여 대표를 의회로 진출시킬 수 있다. 다른 지역구의 후보를 찍을 수 있기 때문에 후보들의 일반적인 수준 또한 높아진다. 이러한 장점에 더하여 밀이 강조한 것은 분별 있는 소수, 혹은 교양 있는 계층의 선출 가능성이다. 그는 오직 분별있는 소수만이 이기심과 눈앞의 이익을 벗어나서 인류와 사회의 진정한 이익을 생각할 수 있으므로, 이들이 사회를 이끄는 것이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주장이다. 밀은 의회가 진리와 정의를 실현하는 토론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 자본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시민정치?
대학에 입학하던 날 나는 입학관리처에서 작은 책한권으 부여받았다. 표제는 마르크시즘. 운동권 학생이 유난히 많았던 학교의 전통 때문에 입문하게된 마크크스주의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현 체제는 그 어떤 사상가나 정치가가 만든 것을 거부하는 시민정치의 시대의 시작임을 말하고자 다양한 체제의 정의와 문제점을 들여다보았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유주의], [자본론]를 보면 20세기에도 문제는 지금과 유사한 형태로 비춰지고 평가된다. 자본주의 문제로 야기된 사회주의 가치 논쟁에 관한 그의 글을 살펴본다.
자본주의의 문제
저마다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요컨대, 이것들은 자율관리라는 진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술들이다. 우리는 그런 의결 방식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구체적 상황에 달려있다. 내가 신는 양말의 색깔을 스탈린식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 마찬가지로 내 사무실 벽에 거는 그림도 내 마음대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어떤 결정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광범할 때, 그런 결정권은 적절하게(말하자면 균형 있게) 배분돼야 한다. 내가 작업장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면, 그 음악을 들을 다른 사람들도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 내가 뭔가를 소비하거나 생산하고 싶다면, 그 영향을 받게 될 다른 사람들, 다른 생산자들과 소비자들, 그리고 그 부수적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도 모두 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그 결정권은 그들이 영향을 받는 정도에 비례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소유, 기업식 분업, 이윤 위주의 보상 체계, 그리고 시장 할당은 연대, 다양성, 평등, 자율관리를 말살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 가치들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경제적 혁명가들이다. 왜냐하면 이 가치들을 실현하려면 이 가치들을 보존하고 나아가 더 발전시키는 새로운 제도들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을 거부하는 이유는 시장이 반사회성을 부추기고,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권력이나 산출량에 따라 보상하고, 지배계급에 유리하게 권력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적 계획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권위주의적인 데다 역시 조정자 지배계급에 유리하게 권력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계급이 없는 사회를 원하지만 그런 기존의 할당 방식은 위계적 분업과 마찬가지로 계급 분리와 계급 지배를 초래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사회주의적 노동 방식인 참여 계획은 사회적 비용과 혜택의 비교 평가를 받게 되고, 그런 평가는 재화를 취급하는 시장의 능력을 뛰어넘어 판매자와 구매자 외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예산은 균형을 유지하고, 보상은 공평하며, 결과는 복지나 발전과 직결된다. 그러나 중심과 주변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부와 하부도 없다. 참여 계획의 놀라운 점은 자율관리가 경제 전체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경제적 선택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다못해, 내가 뭔가를 할 때 나는 더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은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나는 결정된 사항을 실행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하거나, 그냥 시간을 낭비하거나, 그 부수적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영향력을 적절하게 배분한다.
자본주의를 넘어서
자본주의를 규제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공공서비스가 공격받을 때는 방어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국가에 압력을 넣어 현재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확장.개선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부자에게서 빈민에게로 부와 소득을 재분배하는 제도를 확장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자본주의와 안전하게 공존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계획이 필요하다.
민주적 계획 경제의 모델은 다양하다. 그런 경제에서는 생산자.소비자 네트워크들 간의 수평적 관계를 포함하는 민주적 과정을 바탕으로 자원이 배분될 것이다. 이것은 경쟁의 결과로 자원이 배분되는 자본주의나 독재적으로 자원이 배분되는 스탈린주의 명령 경제 둘 다와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경제적 조정이다. 그런 모델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에 대한 진지하고 구체적인 탐구가 진행 중임을 보여 준다.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민주적 계획 경제야 말로 반자본주의 운동이 헌신하는 가치들을 실현할 최상의 방식일 것이다. 이런 대안을 일컫는 가장 적절한 말이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사회주의 사상의 주요 구성요소 하나는 물질적 생산 자원이 대체로 사회적 소유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
민주적 계획 경제를 성취하는 것이 혁명이라는 말은 단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에 맞는 경제 체제로 자본주의를 교체하려면 급진적 사회 변혁, 즉 혁명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는 다수의 사람들을 해방할 수 있는 세력은 그들 자신뿐이다. 상식적인 혁명 개념은 혁명을 폭력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반하는 혁명의 개념은 사뭇 다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해방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 과정에서 폭력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쉽게 말해서,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은 그들의 힘과 특권을 제거하려는 진지한 시도에 폭력적으로 저항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시민정치 레닌주의?
레닌주의의 기본 사상은 혁명적 사회주의 관점을 공유하는 좌파들이 자본주의 체제 전복이라는 사상으로 다수를 설득하려면 공동의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람들을 훨씬 더 광범하게 끌어들이려 하는 역동적인 동원 과정을 통해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다. 이러한 사상은 우파와 자칭 극좌파 둘 다의 강력한 도전을 받는다. 물론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굳이 레닌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최근의 레닌주의자들은 비교적 집중적으로, 그리고 전략적 방향에 따라 이런 태도를 추구한다. 이것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민주적 중앙집권주의 조직의 양상을 포함한다. 그러나 전통의 핵심 인물이라는 사람들의 끔찍한 말과 행동을 생각할 때 어떻게 레닌주의자를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당신은 항의한다.
* 시민사회의 정치는 무엇인가?
[사회적 가치분배의 철학] 김비환
시민사회 [ civil society ]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근대 시민혁명을 계기로 자각된,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격으로서의 시민이 소유물을 교환하거나 의사를 소통하거나 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같은 사회는 실제적으로 완전한 형태로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근대 사회 그 자체인 자본주의 사회를 의미하는 경우도 많다. 홉즈의 경우, 시민사회는 로마 교황 = 카톨릭 교회로부터 독립한 사회이며 이 사회의 존립의 필요에서 정치권력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그 후 로크, 루소, 퍼거슨(A. Ferguson), 스미드 등은, 분업과 소유를 기초로 하는 시민사회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경우, 시민사회는 동시에 정치사회이기도 했다. 몽테스큐의 <법의 정신>이 처음으로 명확하게 시민사회(l’etat civil)와 정치사회(l’etat politique)와를 구별했는데, 이 시민사회를 국가와의 구별과 연관 속에서 위치 부여한 것은 헤겔이다. 거기에서는 <욕구의 체계>로서의 시민사회는 인륜적 이념이 분열한 과적 단계이며, 국가에로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국가론의 관념성을 비판하고, 시민사회야말로 현실의 인간의 생활의 장소라고 했는데, 동시에 근대 시민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서 인간의 자기소외와 체제적 모순을 내포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이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 후, 시민사회 = 부르주아적 사회 = 자본주의 사회라는 인식이 보급되었는데, 시민사회의 본래의 의미를 재인식하고 마르크스가 목표로 한 것도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시민사회였다고 하는 견해도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시민사회의 개념규정의 문제로서 시장을 넣을 것인지, 배제할 것인지에 관하여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왈저(Michael Walzer)의 정의에 의하면 시민사회란 ‘비강제적인 인간의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공간의 명명으로 가족, 신앙, 이해, 이데올로기를 위해 형성되었으며 이 공간을 만족하는 관계적인 네트워크의 명명이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시장을 포함한 광범위한 ‘각종 틀로 이루어진 틀’로서 이해된다. 이 정의의 특징은 시민사회의 광범성과 복수성이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며, 이질적인 여러 집단이나 여러 가치의 공존을 위한 사회공간으로서 시민사회가 이해된다는 점이다. 왈저의 정의는 시장을 배제하지 않는 개념규정의 하나의 모범형이 되었다.
[사회적 삶의 의미] 제프리 C.알렉산더
시민사회는 자체의 제도를 통해 도덕적 규제가 실행된다. 이러한 제도들은 위기가 규정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공공의 장을 제공한다. 이들의 결정은 구속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보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의 제도와 그 제도에 의한 결정이 일련의 독특한 문화적 코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미국 시민사회 담론에 초점을 맞춰 일반적인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시민사회 민주적 코드와 반민주적 코드는 행위자와 동기에 관해 철저하게 상이한 모델을 제공한다. 민주 의식을 가진 사람은 의사 결정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침착하고 현실적인 사람으로 상징적으로 해석되고, 양심과 도의심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진다. 반대로 억압적인 코드는 반민주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 병적인 탐욕과 자기 이익의 동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상정한다. 이들은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없으며, 비현실적인 계획을 낳는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히스테리적인 행동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여겨진다. 민주적인 사람은 행동과 자율성을 가진 사람으로 특징지어지는 반면 반민주적인 사람은 자유 의지가 빈약하고, 지도자가 아닐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르는 수동적인 사람으로 인식된다. 이는 우리 정치의 보수와 진보 대결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행위자와 동기에 대한 담론에는 개인적 욕구에 따르는 것으로 가정되는 사회적 관계와 관련된 담론이 동반된다. 민주적인 성격의 특성은 개방적이고, 타인을 신뢰하며, 정직한 관계를 허용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사람들은 복종적인 관계보다는 비판적이고 성찰적 관계를 장려한다. 반대로 반민주적인 사람들은 기만과 마키아벨리적인 계산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비밀스럽고 음모적인 거래와 연관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의 비합리적이고 본질적으로 의존적인 특성은 그들이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기와 시민적 관계에 대한 담론 구조가 있다는 점에서, 함축된 상동성과 상반성이 사회.정치.경제 제도로까지 확장됨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기에 있어서 비합리적이고 사회적 관계에서 상호 신뢰가 결핍될 때, 이들은 규칙을 따르기보다는 임의적인 제도, 법보다는 난폭한 권력을 사용하는 제도, 평등보다는 위계를 행사하는 제도를 자연스레 창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제도는 포용적이기보다는 배타적일 것이고 비개인적이고 계약적인 의무보다는 개인의 충성심을 조장할 것이다. 또한 공동체 전체의 요구보다는 소규모 파벌의 이익에 호의적인 경향을 보일 것이다. 동기, 관계, 제도에 대한 시민 담론의 요소들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상식은 특정한 종류의 동기가 특정한 종류의 제도, 관계와 연관되도록 지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심복을 신뢰하고, 개방적이며 정직하고, 모든 부하에게 평등을 베풀기 위한 시도로서 엄격하게 법을 준수하는 독재자를 상상하기 어렵다.
* 시민사회와 정의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_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
행복과 사회정의
2011년10월28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중이 3분의 1 수준이고 5.60대를 중심으로 계속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56퍼센트 수준에 그친다고 하니 빈부의 격차가 심한 것이 현실이다. 사회적 지위 상위층 20%가 80%의 부를 차지한다는 '파레토의 법칙'에 부합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만약에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가 더욱 극심해져서 다수의 빈민과 소수의 부유층이 첨예하게 분리된다고 해보자. 이런 사회에서는 다수 빈민의 비참한 상황이 소수의 호화스런 생활과 극명히 대조된다. 그 때문에 다수 빈민의 소수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일반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범죄가 창궐하고 약탈행위가 빈번하게 자행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불안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그에 따라 국가는 사회안전을 위해 더 많은 경찰력을 충원해야 할 것이며 이는 결국 잘 사는 사람들의 지출을 늘리게 된다. 그러므로 빈부격차의 심화는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사회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해 더 많은 재정지출을 요구하게 되는 바, 이는 결코 소수의 부자들에게도 유리하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부유층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지출할 것은 다 지출하고도 다수 빈민들의 적대감과 질투를 결코 소멸시킬 수 없으니 단지 직접적인 위협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대체한 효과만 있을 것이다.
질투와 적대감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빈민들과 부유층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다. 만일 부자와 특권층들이 지불하는 안전비용이 경찰력을 증대하기 위해 쓰여지지 않고 빈민들의 생활고를 완화하기 위해 쓰여진다면 어떻게 될까? 빈민들이 부유층으로부터 거둬들인 재정으로 생활고를 이겨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적어도 계급적인 적대감과 위화감은 상당히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비록 부유층이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동기에서일지라도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고맙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시기에 찬 악의의 범죄는 줄어들게 될 것이고 사회는 그런 대로 안전하게 유지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사회의 안전이 유지되는 한 부유층은 계속해서 자기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행복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시민의 기본 속성을 알아야 한다.
[이기심과 이타성]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 목적에서만 행동하는가?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순수한 이타적 감정을 가지고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리고 각종 재해가 닥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성금을 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본다. 그렇다면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안전비용을 지불한다는 신중한 관점은 지나치게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견해에 입각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은 전적으로 타당한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선하고 포용력 있으며 이타적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빈부의 격차가 그렇게 심화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문과 각종 언론매체에서 우리가 접하는 소식들은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만으로는 사회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다수가 선하고 이타적이라고 해도 소수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다면 사회 전체는 소수 악인들의 횡포와 비행의 볼모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선하고 이타적이라고 한다면 애당초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국가가 반드시 발생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게 된다. 그러므로 신중한 태도는 사회를 예측할 수 없는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협력을 이기주의적 각도에서 이해하는 것은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 주로 불안과 공포의 정념으로부터 발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것이 주로 가진 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축소시켜주고 못 가진 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완화시켜준다는 소극적 측면에서 옹호되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부정적인 감정의 축소 자체가 행복한 삶의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협력을 오로지 이기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조화로운 인간관계의 창출과 유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 만인이 최소한도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최소조건으로서 사회정의의 실현이 필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자유와 평등]
많은 사람들에게 평등은 명목상으로 고귀한 가치 혹은 이상으로 숭앙되고 있다. 그들의 행동과 태도가 평등이란 가치를 명백하게 거부하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불평등을 선호하면서도 최소한 말에 있어서만은 평등을 지지한다고 한다. 그만큼 평등은 우리 현대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관념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국가의 역할에 대한 오늘날의 논의 역시 평등이란 가치를 진지하게 고려한다. 그러나 평등이란 가치가 우리들의 지지를 받으며 국가 정책의 주요한 한가지 기조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아주 최근의 일로서 이 가치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 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은 근대 중에서도 후기의 일에 속한다.
평등이란 가치는 17세기의 영국에 있어 이미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등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 열렬히 선전되고 적극적으로 추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 때는 자유자본주의가 소위 산업독점자본주의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던 때로서 빈부의 격차가 말할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의 착취가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들이 착취한 이들 중에는 15세 미만의 어린 소년 소녀들과 심지어 임산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하루에 15시간 이상의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겨우 하루 세끼 먹을 정도의 임금밖에는 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결코 인간다운 사회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19세기 초반 이와 같이 비인간적인 착취적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거나 완전히 혁신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로 알고 있는 이들이 그런 움직임을 주도했다. 그들은 특히 기독교적인 인도주의 정신에 고무되어 사재를 투자함으로써 노동의 착취가 일어나지 않는 공산주의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시도했다. 2차대전 이후 노동계급의 요구와 저항에 직면하여 자본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적 평등원리를 대폭 수용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는 광범위한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한동안 자유와 평등이란 가치가 조화를 이루며 정의로운 사회를 구가하고 있는것 같았다. 복지국가는 광범위한 복지정책을 뒷받침할 복지 재정을 충당하기 어렵게 되었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시샘과 평등]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소외되고 억압받는 계급에 소속된 것이 일반적이다. 만일 어떤 인간관계 혹은 사회관계에서 특권적인 위치에 있거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굳이 그 관계가 불공평하다거나 부정의하다고 주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특권층 혹은 기득권층이 그 관계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것을 향보하거나 내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모순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평등이란 대의는 상층계급 또는 기득권층에 대한 하층계급 혹은 소외계급의 시기의 표현이라 비난되기도 한다. 하층계급이 평등을 부르짖는 것은 인간의 평등이란 이상에 고취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잘 사는 사람,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을 시기한 결과라는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잘살고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의 초과분을 가지고 서로 똑같이 나눔으로써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하고 있으나 기실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질투가 평등이란 이상을 외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평등이란 못 가진 자들의 질투에 기반하고 있는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 아니다. 평등은 소유의 유무 혹은 권세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격체로서의 동등한 존엄성을 의미하는 한에서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지위의 고하, 물질의 유무를 막론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를 갖는 평등한 개체들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그런 도덕적 특징의 비슷함에 평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실제에 있어 이런 도덕적 인력의 평등이 온전히 실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들 중의 다수가 이런 견해에 공감할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는 평등이 못 가진 자들의 질투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평등은 지위의 고하와 물질의 유무를 떠나서 도덕성의 평등을 의미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자신의 지위가 높고 돈이 많다고 해서 남들 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주장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사실과 다르다. 모든 사람들은 부와 돈, 권세와 능력에 있어 천차만별이다. 지능이 뛰어난 자가 있는 반면 지능이 좋지 않은 자가 있다. 아름다운 자가 있는 반면 미운 자도 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가 있는 반면 어떤 분야에서도 재능이 거의 없는 자가 있다. 어떤 자는 초가삼간에 살거나 심지어 노숙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으리으리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수천평의 대저택에 산다. 우리는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히 불평등이 존재하며, 나아가서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현실의 불평등 중에는 인격적 도덕성의 평등과 달리 사회에서 정당한 것으로 용인되는 것도 많다. 예를 들어 빈부의 격차는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어떤 사람들은 잘 살고 어떤 사람들은 못 사는 것은 그 원인이 타당하다면 정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어떤 사람은 게으르다면 부지런한 사람이 잘살고 게으른 사람이 못사는 것은 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 타당한 이유가 있는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무조건 평등을 요구하는 경우 그것은 시기의 발로나 억지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 불만을 품고 시정을 요구하는 사람이 무위도식하며 노름만을 일삼는 그런 사람이었을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사람은 남이 열심히 일해 축적한 부를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것과 같다. 그는 부유한 자가 부를 축적한 힘든 과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성과물만을 탐내고 있다. 그것은 시기의 발로이거나 억지인 것이다. 시기란 긍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부러움과는 다르다. 부러움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이 가지고 있을 경우 그 정당성을 인정하되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은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시기란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탐욕으로 주로 부정적인 감정이다. 타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정당한 이유 없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탐내는 마음 상태이다. 그러기에 시기는 타인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이 되면서 자기 자신에게도 큰 고통과 해가 된다. 시기는 타인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공격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또 자신에 대한 가학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그렇게 볼 때, 평등에 대한 예찬을 시기의 표출로 보는 시각은 평등이란 이상에 대해 적대적이다. 물론 이 경우 도덕적 인격의 평등과 시민권의 형식적 평등이란 측면에서의 평등은 제외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평등을 가난하고 못사는 자들의 시샘을 은폐하는 그럴 듯한 가면으로 보는 이들은 흔히 평등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하는 방법으로 평등의 이상과 폭력혁명 혹은 테러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혁명은 못 가진 자들의 시샘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서 평등의 이름하에 강제적으로 가진 자들의 것을 탈취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평등은 그다지 아름다운 가치가 아니다.
[다원주의]
가치관과 선호를 고려한 분배
만일 한 사회에 규범이 있다면 그 규범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가치일 수는 없으며 문화적 편견이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사회는 어떤 고차적인 목적을 위해서든 단순한 선호 때문이든 가치를 차별화하지 않으면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모든 사회는 절대적이고 분명하지는 않지만 가치관과 선호를 평가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가치다원사회론에 입각하여 가치관이나 선호에 따라 동등하게 부를 분배해야 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이상주의적 진보주의]
조금 더 이상주의적인 관점에서 사회정의의 문제를 바라보면 자기의 안정과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남을 돕는다는 생각이 너무 소극적이며 자신의 행복에도 그렇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기왕에 타인들을 위해 세금을 내고 성금을 낼 경우 우리의 것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타인에 대한 연민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이기적인 동기에서나 이타적인 동기에서나 지불하는 비용은 동일하다고 할 때 어떤 것이 기부자의 행복에 더 기여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거지에게 약간의 돈을 준다고 했을 때 그 거지가 귀찮게 하기 때문에 돈을 주는 경우와 그 거지의 가엾은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돈을 주는 경우에 어떤 것이 더 좋을까? 당연히 동정심 때문에 기부하는 것이 훨씬 큰 행복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 행위에 수반된 동기와 의도의 차이는 행위자의 행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들은 보통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익을 얻기 위해 하는 행위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중요한 자각에 이를 수가 있다. 생각해 보라. 많은 직업들이 결국은 타인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직업들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해주는 대가로 이익을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직업적인 행위들이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생각을 바꾸게 되면 그 동안 우리의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많은 편견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바꿀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남을 유익하게 해줌으로서 우리의 생계를 꾸려가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이상주의적인 진보주의라고 한다. 이 입장은 보수주의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긍정적이고도 낙관적인 견해에 입각해 있다. 타인의 불행에 연민을 갖는 자연적인 이타주의와 남을 도우려는 선의지 등등 이런 것들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론을 갖고서 행복의 문제를 바라보면 행복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물질적인 소유와 소비로부터 오는 충족감이 아닌 타인과의 좋은 관계와 나눔으로부터 결과되는 즐거움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행복을 얼마든지 경험하고 목도한다. 가족, 친척, 친구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좋을 때 더 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와 같은 모든 개인적.사회적 관계들이 계속해서 원만하고 이상적으로 유지되기를 바란다. 이런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행복에도 곧바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지닌 이타적인 감정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보통 때에는 이타적인 마음을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면 쉽게 나눠주지 않으려 한다. 또한 우리는 같은 동포에 대한 애착을 보일 때가 있지만 이런 감정을 국경을 초월하여 확장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약하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넘어 사고하고 행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볼 때, 이타적인 감정이 매우 제한적으로만 표현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가족과 친구의 범위를 넘어 타인의 행복과 복지가 향상되기를 바라는 거룩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런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또 실제로 이타적인 일을 하는 가운데 우리의 이익과 행복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삶과 행복이 사회정의와 훨씬 더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공정성과 정의]
자본에 의한 지배논리인 맘몬의 지배구조에서 바라본 현시대의 공정성과 정의에 대해 알아보면 이러하다. 사람들은 사회의 안정과 개인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공정한 분배원리를 모색하는 것을 갈망한다. 불공정한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은 특정한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폐되거나 편파적인 권력의 비호 아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부당하거나 불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저항의 행위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억압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사태나 상황의 부당성에 대한 다수의 잠재된 불만은 적절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표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의 안정성에는 큰 위협이 된다. 그러므로 사회의 다양한 사태나 상황의 정당함 혹은 공정성을 도모하고 강화시키려는 작업은 안정된 사회질서를 희구하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현대사회의 공정성 혹은 정의의 미덕은 특별히 두가지 경우와 관련하여 강조되고 있다. 한가지는 공동의 문제를 처리할 때 밟게 되는 절차의 공정성과 관련해서이고, 다른 한가지는 부를 포함한 중요한 사회적 가치들-학벌.수입.권력.지위.기회.명예 등-이 분배되는 방식 및 그 결과와 관련해서이다. 두가지 공정성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한 사회에서 부를 포함한 사회적 가치들이 분배되는 원리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정하다고 인정한 절차에 따라 선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절차적 공정성과 일정한 연관성이 있다. 그렇지만 공정한 절차에 의해 선택된 분배의 원리가 언제나 공정한 분배를 산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두가지 공정성은 별개로 간주되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는 부를 비롯한 사회적 자원들이 공정하지 않게 분배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사회의 안정성이 크게 손상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행복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기 쉽다. 현대인들은 행복한 삶을 위해 부와 권력과 같은 사회적 가치들을 타인들보다 더 많이 획득하려는 경쟁심으로 충일해 있다. 때문에 공정성 원칙에 위배되는 절차나 결과에 대해 분개의 감정을 갖기 쉽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력보다는 공정하지 못한 경쟁과 분배의 결과로써 자신이 불행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면 사회에 대한 불만이 더욱 증폭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사회의 안정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와 같은 불만의 감정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자괴감과 결합하여 개인의 행복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시민은 자유의 정의를 원한다
자유주의
자유론에서 말하는 자유는 사회적 자유를 의미한다.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사회적 권력은 무엇인가? 힘이 약한 민중들이 왕의 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지배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제한을 가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자유의 본질이었다. 민중들은 지배자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하여 두 가지 방법을 채택했다. 하나는 면책조항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지배자에게 민중이 자신들의 일정한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는 면책조항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지배자에게 민중이 자신들의 일정한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는 면책조항을 요구하고 이를 지배자가 준수하지 않을 경우에는 반란도 정당시하는 방법이다. 둘째로 입헌적 제약을 확립하는 것이다. 사회의 동의 내지는 사회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어떤 단체의 동의가 지배권력의 행동을 위한 필요조건이 되었다.
자유주의의 원칙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유주의의 원칙이다. 모든 개인은 그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권자이다.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그 성원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에 간섭할 경우에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유일한 근거는 자기보호이다. 즉 문명사회의 일원에 대하여 그의 의사에 반해서 권력을 행사해도 정당시되는 유일한 목적은 다른 성원에게 미치는 피해를 방지하는 것에 있다.
밀은 자유의 영역을 사상, 행동, 단결의 셋으로 나누었다. 생각의 자유는 정신이라는 인간의 내면 영역의 자유이다. 이는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만이 아니라 출판과 언론의 자유도 포함하는 것에 주의하여야 한다. 이 자유는 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행동의 자유란 개인의 취향의 자유와 목적 추구의 자유로서, 각 개인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이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자유이다. 단결(집회)의 자유는 개인들이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단체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 즉 단체행동의 자유이다.
자유를 통한 정의 실현
자유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인생의 목표는 자아실현이며, 자아의 핵심은 개성에 있다. 각자는 자신의 개성에 입각하여 지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스스로 선택하여야 한다. 관찰력, 추리력, 판단력, 식별력, 의지와 자제심과 같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은 모방의 생활에서는 모두 무기력해지며, 개성에 따라서 스스로 선택하는 삶에서만 연마되고 발휘된다. 경제학원론에서 하이에크는 자유가 소중한 이유의 하나로 목표와 성격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인간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꼽았는데, 밀도 이를 지적하였다. 개성은 지적이며 도덕적인 진보의 원천이기도 하다. 현대의 대중사회에서는 이처럼 소중한 개성이 소멸되어 가고 있다. 개인이 군중 속에 매몰되어 있다. 밀에 의하면, 현대사회에서 개성을 소멸시켜 사람들 간의 동화를 촉진시키는 요인은 정치, 교육, 교통수단의 발달, 상공업의 발달, 습관 및 여론이다. 정치는 높은 것은 더욱 낮게, 낮은 것은 더욱 높게 만들고, 교육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영향을 준다. 교통수단의 발달은 사람 간 접촉을 용이하게 하며, 상공업의 발달은 안락한 생활의 편익을 확산시키고, 입신출세를 특수계급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의 야망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들 요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밀이 강조한 동화의 매체가 여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