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4.항일무장투쟁의 선두에 서다 ⑸

대모달201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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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으로 중국인과 조선 민족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다

 

1926년 흥경현(興京縣)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ML파·화요파·경성파·북풍파·상해파 등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화요파는 북만청년총동맹(北滿靑年總同盟)을, ML파는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을 각각 만들었다. 이들은 주로 왕청문(汪淸門) 근처의 향수하(響水河)와 동창구(東昌溝) 일대에서 활동했는데, 그 사상이 국민부(國民府)의 중앙지도부까지 침투했다.

 

남만청년총동맹과 국민부는 서로 대립했다. 그들은 교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두 번이나 화흥중학교에 가서 홍보 활동을 벌였고, 심지어 교사 한 명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화흥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양세봉의 동생 정봉도 남만청년총동맹에 가입했다.

 

1929년 7월에 국민부의 중앙지도부는 흥경현 서쪽 쌍묘자에 있는 박창환의 집에서 두 달에 걸쳐 회의를 열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이진탁(李辰卓)을 비롯한 일부 간부들은 국민부가 조선공산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앙집행위원 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 등은 민족주의 사상을 지켜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두 달간의 회의는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났다. 이 회의 후 이진탁·고원남·이웅·이성근·이동림 등은 무장대원 2백여명을 거느리고 국민부를 이탈하여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무장병력이 얼마 남지 않자 현익철은 자신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장학량(張學良)에게 조선공산당을 공격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국민부는 동북 군벌과 결착하여 조선공산당을 습격하는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이것이 1929년 9월 14일에 일어난 흥화참변(興和慘變)으로 1백여명의 조선공산당원이 희생되었다. 양세봉은 당시 제3중대장으로 동북 지역의 조선인 좌파세력과의 싸움에 참여했다. 이 싸움은 당시 조선인들의 항일투쟁(抗日鬪爭) 역량을 약화시켰을뿐 아니라 자신의 세력도 몰락하고 분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양세봉의 일생에서 가장 큰 착오였다.

 

현익철은 장학량과 본격적으로 회담을 갖기 위해 그를 만나려고 심양으로 갔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일본군 특무대원인 유덕정이 알아채고 밀고하는 바람에 고루(鼓樓) 근처에서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5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그는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가담했다.

 

국민부 산하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이진탁은 이듬해 7월에 부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신의주 부근에 있는 일본군 병참기지를 습격했다. 그런데 철수할 때 배가 보이지 않아 사흘을 기다리다가 뱃사공으로 변장한 조선인 특무대원에게 발견되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진탁과 그의 부하들은 배 창고에 갇혀 평양 형무소로 압송되었다가 잔혹한 고문 끝에 결국 숨지고 말았다.

 

이렇듯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은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선민부가 조선혁명군의 공격을 받아 해체되자 그를 대체한 보민회(保民會)라는 친일단체가 조선인들에 대한 통치권을 동변도(東邊道) 일대에서 거머쥐기 위해 난동을 부렸다.

 

그 해 6월에 일본군 특무대는 동창대 경찰관 20여명을 고용하여 왕청문 일대의 조선인 가옥을 샅샅이 수색했다. 조선혁명당원을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중국인들은 조선혁명당원과 그 가족을 숨겨 주었다. 현익철의 딸 현영숙은 유진동이라는 중국인의 집에서 중국 복식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소매가 짧은 예복에 긴 양말을 신은 현영숙을 본 동창대의 중국인 경찰관도 그녀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경찰관들은 국민부 사무소의 책걸상을 부수고 돌아갔다.

 

1931년 8월 어느 날에 밤 9시 무렵에 강흥동이라는 국민부 직원이 조선 청년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화흥학교는 낮에는 일반 중학교나 소학교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밤에는 현지 청년들을 가르쳤다. 주로 정치 교육을 시킴으로써 반일 정신과 민족의식을 길러 주었다. 이때 무장한 보민회원들이 학교를 습격해 불이 켜진 교실을 포위하고 교실에 매달아 놓은 석유등을 꺼버렸다. 캄캄해진 교실 안은 이내 아수라장이 되어 학생들은 일제히 교실 밖으로 달아났다. 국민부 직원이며 교사인 강흥동은 뒤쪽 창문을 뛰어넘어 서남쪽을 향해 달아나다가 그만 보민회원이 쏜 총탄에 맞아 큰 버드나무 아래에 쓰러졌다.

 

이튿날 이 조선혁명당원은 죽은 채 발견되었다. 머리는 동북쪽을 향하고 발은 서남쪽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 있었는데, 탄환이 그의 심장을 궤뚫었다. 중국인 청년 유진동이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울었다. 자신을 가르친 선생이었던 것이다. 목수인 유진동의 부친 유영풍이 느릅나무로 관을 짜서 화흥중학교 교실 앞에 안치했다.

 

구장인 왕동헌(王潼軒)의 지시로 구청은 이 혁명당원을 위해 천막을 치고 만장(輓章)을 내걸었다. 지역의 문인 이능인이 만장 한쪽에는 “일편단심 혁명을 위하여”, 다른 한쪽에는 “달이 기울고 꽃이 지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라고 적었다. 왕청문의 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작은 흰 꽃을 달고 추모 행사에 참가했다. 구청, 촌, 학교, 공안대, 파출소 그리고 상점 등 중국인들의 기관과 기업에서도 모두 추모회에 참가했다. 왕동헌이 사회를 보고 고이허가 조문을 읽었다. 양세봉을 비롯한 동지들이 관을 메고 이도구에 가서 비밀리에 안장했다.

 

보민회의 기세를 꺾기 위해 양세봉은 1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관전현(寬甸縣) 하로하(下露河)에 있는 보민회의 지역 본부를 습격했다. 그 교전에서 보민회의 우두머리를 사살했지만 혁명군 병사 한 명도 희생되었다. 소대는 일본군 특무대원 세 명의 귀를 잘라 가지고 와서 죽은 혁명당원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

 

1931년 4월 16일 장춘 근처 만보산(萬寶山)의 도전공사(稻田公社) 사장 학영덕은 수로를 파는 문제로 현지 농민들과 분쟁이 생겼다. 일본의 장춘영사관은 이 사태를 확대시키기 위해 중국인 농민 한 명을 사살하고 열 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일본 경찰대를 동원해 농민들을 탄압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관동군(關東軍) 사령부는 조선일보(朝鮮日報)를 통해 거짓 보도를 하였고,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를 이간질했다. 이에 따라 조선 땅에서는 화교를 대량으로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식이 왕청문에 전해지자 국민부는 즉각 선언문을 발표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만보산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가 이 사건을 이용하여 만주를 침략하려는 야비한 수단으로, 그들은 중국인들이 일본을 배척하는 한편 조선인을 박해한다고 선전해 중국인과 조선인을 서로 이간시키려고 술책을 부리고 있다.

 

실제로 우리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들의 횡포를 못 이긴 조선의 농민들이 할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중국 동북 지역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들이다. 중국에 와서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여전히 조선인을 통제하려 했고, 심지어 조선인을 이용해 불행한 사건을 많이 저질렀다. 이번 사건 역시 장본인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시키려는 일본의 행위를 규탄하고, 중국 정부가 이런 조선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기 바라며, 조선과 중국 국민이 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를 희망한다.’

 

국민부는 주요 인사들을 중국의 각급 행정기관에 파견해 이 같은 정황을 설명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벽이 생기는 것을 막았다. 양세봉 역시 구장인 왕동헌을 찾아가 조선혁명군과 국민부의 활동을 설명하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했다.

 

왕동헌 또한 학교의 중국인 교사들과 더불어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조선혁명당 지도자 가족을 방문했다. 홍묘자 사금구에 있는 양세봉의 집에도 직접 찾아가 어머니에게 보조금 2백원을 내놓았다. 조선혁명군의 가족들은 이런 왕동헌의 배려에 감격했다.

 

일본 경찰대는 만주 군벌 세력과 결탁해 조선혁명군을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벌였다. 무모한 희생이 야기되는 충돌을 피하려고 조선혁명군은 몇 개 조로 나뉘어 산속으로 숨은 뒤 새로운 명령을 기다렸다. 양세봉의 부대는 통화현 합니하와 자고하 일대에서 활동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