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딸’ 문제에 대해 반기문 UN 사무 총장이 입을 열었다. 정치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강제 억류되 있는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 규원을 송환해 오는 일에 UN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김일성 주체사상을 실질적으로 지탱해주는 정치범 수용소의 문이 전세계 앞에서 공식적으로 열리게 되는 일은 시간문제이다. 정치범 수용소의 문이 열린다는 것은 북한의 체제붕괴와 신에게 외면당한 어둠과 죄악의 일족 김일성, 김정일 일가의 포악하고 극악무도한 독재의 끝을 알리는 일이 된다.
인간의 영혼은 자발적으로 선을 갈구한다.
인간의 영혼은 자발적으로 선을 갈구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미약해서 스스로 확고한 의도나 의지에 도달하도록 견인하지 못하거나 지속적인 노력을 분발시키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래서 대다수 인간들은 선을 알되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일부는 선을 외면하고 도리어 악을 행하며 산다. 그래서 법이 필요하고 규칙과 규율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 지켜내야만 하는 이러한 조항들이 아닌, 우리 내면에는 ‘선한 양심’이라는 신의 선물이 있다. 누군가는 이를 활짝 펴서 타인을 품고 보듬으며 살고, 누군가는 이 선물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살고, 누군가는 겨우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데 사용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 ‘선한 양심’을 열어 나눠주기로 작정하는 ‘선한 의지’가 있는 누군가를 통해 세상은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선한 양심 외침, 선한 의지의 확산
UN이 이 일에 발벗고 나서기 전에 이미 선한 양심들의 선량한 외침들이 대한민국에서도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왔다. 대한민국 전역을 소리없는 외침으로 밟고 있는 ‘통영의 딸’ 국토대장정단은 선량한 양심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일에 통영을 출발하여 현재 1,700리를 걸어 김천을 지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자발적으로 선을 갈망하는 인간의 영혼들과 만나면 시너지를 발휘하며 선한 양심에 불을 붙이게 되는 것이다. 국회가 침묵하고 종북세력들이 은폐하고 김정일이 도발하려해도 선한 양심을 없앨 수는 없다. 인간의 겉껍데기를 흥분케 하고, 분노케 하고, 내 일, 내 문제에만 시선을 돌리도록 잠깐 동안 묶어둘 수는 있겠지만 인간은 물질 그 이상의 것, 현실 그 이상의 이상을 갈망하는 존재이다. 선한 양심의 아름다움이 대한민국을 물들일 것이다. 선한 의지의 숭고함이 전세계의 양심들을 깨울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고통에서 창조로 아름다운 트렌스포메이션
굶어 죽었고, 맞아 죽었고, 이제 추운겨울 더 많이 얼어 죽게 될 대한민국의 미수복지역 북한에 거주하는 주민들보다 더 고통가운데 있느냐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도 죽어 가는데 우리는 그래도 세 끼 잘 먹으며 따뜻하게 살지 않느냐고 호소하는 것도 지금 우리의 실정에 맞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틴루터 킹이 죽음을 무릅쓰고 선한 일에 앞장서다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고통이 점점 커져갔을 때 이 상황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고통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과 고통을 창조의 힘으로 변화시키는 것,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은 다 그 주인에게 버겁고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지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누가 더 힘들고 덜 힘들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문제, 생존의 문제는 조금 다르지 않겠는가?
내 삶의 고통을 끌어안기 보다는 그 고통을 창조의 힘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실업, 실직, 상대적 빈곤이라는 개인적 고통에 고통스러운 반응만을 보이며 살기보다는 이 고통을 생명을 구하는 창조적 힘으로 변화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선한 의지를 사용할 수 있다.
“나약한 마음을 가진 인간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국가나 문명은 그들 자신의 영혼의 죽음을 할부로 구입하는 것이다.”- 마틴루터 킹
청춘은 아픈거라며, “아프냐 아프냐, 힘드냐 힘드냐, 그래 그래” 받아주고 얼러주고, 공짜로 퍼주고 학비도 내주는 일이 지금 당장에는 고마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우리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의 영혼의 죽음을 할부로 구입하는 일이다.
신의 선물을 펼쳐라!
나도 있고 당신도 있고, 그대도 있고,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있다. 신이 공평하게 준 ‘선한 양심’이라는 선물을 펼쳐라. 헐벗고 굶주리고 의지할 곳 없이, 흘릴 눈물조차 말라버린 가녀린 영혼들을 향해 선한 양심의 따뜻한 품을 펼처라. 목소리를 내라. 글을 써라. 서명을 하라. 당신은 당신 영혼의 생명을 선한 의지로 연장할 수 있다!
숨쉬고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 웃고 울 수 있는 자유. 그러나 일상성 속에서 퇴색된 그 아름답고 숭고한 가치를 다시 인류 역사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 대한민국의 목전에 다가와 있다.
선이 악을 이기다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고통에서 창조로 아름다운 트렌스포메이션
신에게 외면당한 일족의 최후
‘통영의 딸’ 문제에 대해 반기문 UN 사무 총장이 입을 열었다. 정치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강제 억류되 있는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 규원을 송환해 오는 일에 UN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김일성 주체사상을 실질적으로 지탱해주는 정치범 수용소의 문이 전세계 앞에서 공식적으로 열리게 되는 일은 시간문제이다. 정치범 수용소의 문이 열린다는 것은 북한의 체제붕괴와 신에게 외면당한 어둠과 죄악의 일족 김일성, 김정일 일가의 포악하고 극악무도한 독재의 끝을 알리는 일이 된다.
인간의 영혼은 자발적으로 선을 갈구한다.
인간의 영혼은 자발적으로 선을 갈구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미약해서 스스로 확고한 의도나 의지에 도달하도록 견인하지 못하거나 지속적인 노력을 분발시키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래서 대다수 인간들은 선을 알되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일부는 선을 외면하고 도리어 악을 행하며 산다. 그래서 법이 필요하고 규칙과 규율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 지켜내야만 하는 이러한 조항들이 아닌, 우리 내면에는 ‘선한 양심’이라는 신의 선물이 있다. 누군가는 이를 활짝 펴서 타인을 품고 보듬으며 살고, 누군가는 이 선물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살고, 누군가는 겨우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데 사용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 ‘선한 양심’을 열어 나눠주기로 작정하는 ‘선한 의지’가 있는 누군가를 통해 세상은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선한 양심 외침, 선한 의지의 확산
UN이 이 일에 발벗고 나서기 전에 이미 선한 양심들의 선량한 외침들이 대한민국에서도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왔다. 대한민국 전역을 소리없는 외침으로 밟고 있는 ‘통영의 딸’ 국토대장정단은 선량한 양심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일에 통영을 출발하여 현재 1,700리를 걸어 김천을 지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자발적으로 선을 갈망하는 인간의 영혼들과 만나면 시너지를 발휘하며 선한 양심에 불을 붙이게 되는 것이다. 국회가 침묵하고 종북세력들이 은폐하고 김정일이 도발하려해도 선한 양심을 없앨 수는 없다. 인간의 겉껍데기를 흥분케 하고, 분노케 하고, 내 일, 내 문제에만 시선을 돌리도록 잠깐 동안 묶어둘 수는 있겠지만 인간은 물질 그 이상의 것, 현실 그 이상의 이상을 갈망하는 존재이다. 선한 양심의 아름다움이 대한민국을 물들일 것이다. 선한 의지의 숭고함이 전세계의 양심들을 깨울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고통에서 창조로 아름다운 트렌스포메이션
굶어 죽었고, 맞아 죽었고, 이제 추운겨울 더 많이 얼어 죽게 될 대한민국의 미수복지역 북한에 거주하는 주민들보다 더 고통가운데 있느냐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도 죽어 가는데 우리는 그래도 세 끼 잘 먹으며 따뜻하게 살지 않느냐고 호소하는 것도 지금 우리의 실정에 맞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틴루터 킹이 죽음을 무릅쓰고 선한 일에 앞장서다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고통이 점점 커져갔을 때 이 상황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고통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과 고통을 창조의 힘으로 변화시키는 것,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은 다 그 주인에게 버겁고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지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누가 더 힘들고 덜 힘들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문제, 생존의 문제는 조금 다르지 않겠는가?
내 삶의 고통을 끌어안기 보다는 그 고통을 창조의 힘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실업, 실직, 상대적 빈곤이라는 개인적 고통에 고통스러운 반응만을 보이며 살기보다는 이 고통을 생명을 구하는 창조적 힘으로 변화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선한 의지를 사용할 수 있다.
“나약한 마음을 가진 인간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국가나 문명은 그들 자신의 영혼의 죽음을 할부로 구입하는 것이다.”- 마틴루터 킹
청춘은 아픈거라며, “아프냐 아프냐, 힘드냐 힘드냐, 그래 그래” 받아주고 얼러주고, 공짜로 퍼주고 학비도 내주는 일이 지금 당장에는 고마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우리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의 영혼의 죽음을 할부로 구입하는 일이다.
신의 선물을 펼쳐라!
나도 있고 당신도 있고, 그대도 있고,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있다. 신이 공평하게 준 ‘선한 양심’이라는 선물을 펼쳐라. 헐벗고 굶주리고 의지할 곳 없이, 흘릴 눈물조차 말라버린 가녀린 영혼들을 향해 선한 양심의 따뜻한 품을 펼처라. 목소리를 내라. 글을 써라. 서명을 하라. 당신은 당신 영혼의 생명을 선한 의지로 연장할 수 있다!
숨쉬고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 웃고 울 수 있는 자유. 그러나 일상성 속에서 퇴색된 그 아름답고 숭고한 가치를 다시 인류 역사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 대한민국의 목전에 다가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