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미성에 대한 총공격을 예정한 날짜를 하루 앞두고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고구려군의 어진(御陳) 지휘부에서 장수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일단 화공으로 관미성을 공략하자는 의견을 채택하기는 했으나 그런 단순한 방법만으로는 천혜의 요새인 관미성을 함락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렵소. 그래서 짐은 관미성의 서쪽 절벽을 공략하는 작전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하오.”
모두루(牟頭婁) 장군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말씀은 지당하십니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관미성의 서쪽 지역은 물살이 너무 거세어 배로 접근하다가는 난파될 위험성이 높고, 접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세찬 광풍이 몰아치는 깎아 지른 절벽을 올라간다는 것은 물새조차 힘겨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석개(呂夕介)는 자신감을 드러내며 호기를 부렸다.
“폐하! 우리 고구려에는 조의선인(皂衣先人) 특수병들이 있사옵니다. 그들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고구려 최고의 용사들입니다. 아무리 기암 위에 자리잡고 있는 높은 성벽이라고 해도 조의선인들은 야밤에 이 절벽을 오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사옵니다.”
“정말 그것이 가능하겠소?”
모두루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되묻자 여석개는 큰소리로 외쳤다.
“분명히 가능하외다! 이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밧줄을 타고 성벽을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탈 수 있는 용사를 길러낸 것은 물론이요, 다른 작전에서도 요긴하게 활용할 각 분야의 병력을 양성했다는 것이 우리 고구려의 자산입니다.”
태왕은 더없이 밝아진 표정으로 감격에 겨워 머리를 끄덕였다.
“오! 장하기 그지없구려. 짐의 명령으로 일찍부터 조의선인 용사들이 고된 훈련을 충실히 했으나 오늘같이 짐을 기쁘게 한 적은 일찍이 없소이다. 짐이 백번 아니 천번을 칭찬해도 모자랄 뿐이오.”
“이 모두가 영명하신 태왕 폐하의 지혜와 고구려의 흥복 덕분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나이다.”
“그럼 관미성의 험난한 서쪽 절벽을 올라갈 수 있는 병사들은 얼마나 되오?”
“성벽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 있는 용사만 3천은 족히 되나이다. 소장이 직접 이들을 인솔해서 공략할 것이옵니다.”
“참으로 대견하고 든든하오. 이번 작전이 성공한다면 내 조의선인 용사들에게 후한 상을 내릴 것이오!”
태왕은 기분 좋게 웃으며 어려운 임무를 자원한 여석개와 조의선인 용사들의 용기를 칭찬했다.
낙조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시간, 관미성을 에워싸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의 대열이 갈라지며 육중한 위용을 자랑하는 투석기(投石器)가 모습을 드러냈다. 흔히 보던 투석기의 두 배가 넘는 높이였다. 투석기의 크기로 보아 동구 앞 선돌 정도는 너끈히 날릴 수 있을 듯했다.
이 투석기는 장정 팔뚝 굵기의 동아줄을 매달아 20여명의 힘깨나 쓴다는 군사가 활처럼 휠 때까지 잡아당겨 쏘아야 했다. 위력은 성벽을 일거에 부술 수 있을 정도였다.
성 위에서 이를 바라보던 관미성의 백제 군사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성주인 묘멱(苗冪)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주는 마음을 다잡고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고구려군이 아무리 막강한 무기로 공격해 온다 할지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백제의 용사들이여! 지금 적군이 바로 앞에 당도했다. 선대왕 시절에 우리 선조는 평양성까지 진군하여 고구려왕을 죽이고 사방에 위세를 한껏 떨쳤다. 이제와서 조상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는 없다. 나는 이곳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겠다. 그대들이 진정 백제의 영광을 지키고자 한다면 나와 함께 목숨을 걸고 저들과 싸워 관미성을 사수하자!”
묘멱의 연설은 장병들의 두려움을 씻어 주었다. 여러 번적의 침입을 받았지만 결코 함락된 적이 없는 관미성이 아닌가? 고작 투석기 따위에 겁을 먹는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백제군으로서 위신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관미성 병사들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묘멱의 마음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봉화를 올린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도성에서는 지원군을 보낼 기미가 없었고, 금방이라도 달려올 줄 알았던 달을참의 수군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묘멱은 불길한 생각을 애써 털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갔다.
어둠이 내리자 광개토호태왕은 말똥과 유황을 섞어 바싹 말린 커다란 덩어리들을 관솔기름에 흠뻑 적셔 투석기 위에 올리라고 명령했다. 기름에 적셔진 덩어리들은 재앙을 예고하듯 무섭게 번들거렸다.
“덩어리에 불을 붙이고 성벽으로 쏘아 날려라!”
태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투석기 밧줄이 일제히 풀리며 불붙은 덩어리들이 마치 유성(游星)처럼 성안으로 쏟아져내렸다. 곳곳에서 창고와 가옥이 불타고 성민(城民)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화염에 휩싸인 병사가 바닥을 구르며 살려달라 비명을 질렀다. 화마(火魔)가 성 전체를 휩쓸며 닥치는 대로 굶주린 배를 채웠다. 묘멱은 성벽을 지키던 군사 가운데 일부를 차출하여 진화에 나섰지만 때마침 불어온 강풍으로 인해 성 곳곳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묘멱은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도 고구려군에 대한 경계심은 잃지 않았다. 고구려군 병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성벽의 수비태세를 유지했다. 그런데 고구려군 병사들은 불덩어리만 날릴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구려군의 화공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동안 관미성의 반대쪽에서는 새까만 옷을 입은 군사들이 민첩한 동작으로 바다와 면한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강한 바닷바람 속에서 절벽을 오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절벽에 부딪친 파도가 흰 포말을 뿜어내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검은 경장의 군사들이 아슬아슬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고서 간신히 서쪽 성벽 위로 올라섰을 때에 그곳을 지키던 파수병들의 시선은 온통 성안의 불길로 쏠려 있었다. 여석개가 인솔하는 조의선인 특수병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파수병들을 처치한 후 성벽 위에 고구려군의 깃발을 꽂았다. 여석개는 하늘을 향해 일정한 간격으로 세발의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태왕과 모두루가 지휘하는 고구려군 본대에 신호를 보낸 후, 여석개는 성루를 가로질러 동쪽 성문으로 달렸다. 불타고 있는 집 주변에서 진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백제 군사와 백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포위당한 상태라 물을 구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사정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여석개는 불길을 뒤로하고 무거운 발길을 옮겨 동쪽 성문으로 향했다.
누구도 미처 적군이 성안으로 들어왔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없었다. 여석개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더 이상 무고한 백성의 희생을 줄이려면 한시라도 빨리 성문을 열어 고구려 군사들을 맞아들여야 했다.
서쪽 성벽 위에서 불화살이 나는 것을 본 광개토호태왕은 투석기 공격을 멈추고 군사들을 다섯 대로 나누어 성으로 쳐들어가게 했다.
고구려군이 총공세에 나서자 성벽을 지키던 백제 군사들은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한참동안 성벽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는데 백제군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성문 안쪽에서 함성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성문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묘멱이 놀라서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이미 성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성안에 잠입한 여석개 휘하의 조의선인군이었다. 관미성은 순식간에 성안에 잠입한 고구려군 병사들로 가득 찼다.
선봉대를 이끌고 성으로 진입한 모두루는 관미성주를 사로잡기 위해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거기서는 양군의 접전이 한창이었다.
적장인 묘멱의 붉은빛 투구가 보이고 그 앞에 대치하고 선 여석개의 검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여석개는 칼을 내린 채 묘멱을 향해서 외쳤다.
“더 이상 군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마시오! 이미 전세는 기울었소! 장수라면 먼저 자기가 거느린 군사들의 목숨을 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소!”
묘멱이 처연한 목소리로 받았다.
“네놈이 비록 적장이지만 그 말이 틀리지는 않구나. 승부가 판가름이 났으니 더 이상 나의 병사들을 해치지 마라. 패배의 치욕은 혼자 걸머지고 가겠다.”
말을 마치자 묘멱은 성벽 밖으로 몸을 날렸다. 여석개가 이를 보고 황급히 달려가 손을 뻗었으나 묘멱은 이미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바위에 떨어졌는지 둔탁한 소리가 성벽 아래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성주 묘멱이 죽자 백제 군사들은 창과 칼을 버리고 항복했다. 구심점을 잃었으니 더 이상 싸워봤자 승산이 없었다. 이리하여 불패의 철옹성도 고구려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처럼 고구려군이 난공불락이었던 관미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비결은 광개토호태왕과 모두루 장군의 신묘한 계책,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의선인들의 용맹이었다.
병관좌평 진무의 사력을 다한 보필 덕분에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아단성에 당도한 진사왕은 어의(御醫)의 치료를 받으며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나 진사왕은 이곳에서 매우 불행한 소식을 들어야 했다. 바로 관미성을 고구려군에게 빼앗겼다는 급보였다. 병석에 누워 있는 진사왕에게 고구려에서 보낸 사신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진사왕은 화살에 맞은 상처의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고구려의 사신을 들어오게 하라고 일렀다.
진사왕을 만나러 아단성을 찾아온 고구려의 사신은 광개토호태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장수 모두루였다. 점령군의 선봉장인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진사왕 앞에 서서 말했다.
“우리 고구려 태왕 폐하의 뜻을 백제왕에게 전하겠소이다. 아국 고구려는 지난번 백제의 선대왕이었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자국의 강성함만 믿고 우리 땅으로 쳐들어와 현재 태왕의 조부 되시는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시해하는 악행을 저질렀던 과거의 일에 대해 천리(天理)를 거스른 일이라 보고 하늘의 뜻에 따라 군사를 움직여 응징한 것이오. 본디 고구려와 백제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나온 형제의 나라이거늘, 어찌하여 백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아국을 침범하여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는 것이오? 백제가 앞으로 나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싶다면 절대로 고구려를 침범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외다! 또 국경은 패하를 경계로 하되 관미성과 달을참, 석모도는 고구려에 귀속될 것이오. 그리고 백제왕은 아국의 태왕께 머리 숙여 죄를 청하고 고구려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고구려를 형의 나라로 섬기시오.”
진사왕은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고구려왕 담덕이 오만하기 그지없구나. 감히 나를 어찌 보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제안을 한단 말이냐? 네놈이 감히 나를 능멸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느냐?”
모두루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 없이 의연하게 말했다.
“아무리 적국이라 해도 사신의 목숨을 빼앗는 법은 없소이다. 만일 백제왕께서 한순간의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소장의 목을 벤다면 우리 고구려의 군사들은 백제를 완전히 병탄할 것이오! 어느 쪽이 백제를 위한 길인지 잘 생각하고 판단하시오.”
진무가 나서서 아뢰었다.
“어라하! 고구려의 사신을 죽여서는 아니 되옵니다.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고구려왕의 제안에 무리한 점이 있더라도 한번쯤 검토해 보심이 좋을 줄 아옵니다.”
다른 신하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진무의 의견에 동조하자 진사왕은 마지못해 모두루에게 말했다.
“내 일단 강화(講和)의 조건에 대해 의견을 수렴한 뒤 고구려왕에게 사신을 보내 답변을 전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너희 왕에게 돌아가거라.”
모두루가 아단성을 떠나 관미성의 고구려군 진영으로 돌아간 뒤 백제의 군신들은 강화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패하 이서와 혈구도를 비롯한 주변 섬들은 고구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사옵니다. 현재의 약화된 전력으로는 고구려 군사들을 몰아내고 실지(失地)를 회복하기 어렵사옵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고구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우리가 국력을 회복하면 고구려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야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것이고 관미성과 달을참, 석모도 역시 머지않아 되찾아올 수 있사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고구려왕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인데, 치욕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백제의 앞날을 위해서는 그리 하시는 것이 옳을 줄로 압니다. 형제지국의 형식적인 관계를 받아들이되 항복이 아닌 결의 선에서 절충을 본다면 그들은 명분을 얻고 우리는 실리를 챙길 수 있사옵니다.”
진무는 고구려와 강화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신하들은 진무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진사왕만은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아직 당성의 수군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합세한다면 고구려군과 일전을 벌일 수 있다.”
“당성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목힐강부(木詰綱扶)가 움직였다면 벌써 관미성에 도착했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꼼짝을 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그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당성의 수군은 머리에서 지우십시오.”
진사왕은 부상 부위가 다시 아파오는지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진사왕이었지만 더 이상 무모하게 전쟁을 끌고나갈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진사왕은 어쩔 수 없이 진무에게 강화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여 고구려군 진영으로 파견했다.
『정복전쟁의 대지존 광개토호태왕』5.혈구도해전 ⑸
관미성에 대한 총공격을 예정한 날짜를 하루 앞두고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고구려군의 어진(御陳) 지휘부에서 장수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일단 화공으로 관미성을 공략하자는 의견을 채택하기는 했으나 그런 단순한 방법만으로는 천혜의 요새인 관미성을 함락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렵소. 그래서 짐은 관미성의 서쪽 절벽을 공략하는 작전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하오.”
모두루(牟頭婁) 장군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말씀은 지당하십니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관미성의 서쪽 지역은 물살이 너무 거세어 배로 접근하다가는 난파될 위험성이 높고, 접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세찬 광풍이 몰아치는 깎아 지른 절벽을 올라간다는 것은 물새조차 힘겨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석개(呂夕介)는 자신감을 드러내며 호기를 부렸다.
“폐하! 우리 고구려에는 조의선인(皂衣先人) 특수병들이 있사옵니다. 그들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고구려 최고의 용사들입니다. 아무리 기암 위에 자리잡고 있는 높은 성벽이라고 해도 조의선인들은 야밤에 이 절벽을 오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사옵니다.”
“정말 그것이 가능하겠소?”
모두루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되묻자 여석개는 큰소리로 외쳤다.
“분명히 가능하외다! 이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밧줄을 타고 성벽을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탈 수 있는 용사를 길러낸 것은 물론이요, 다른 작전에서도 요긴하게 활용할 각 분야의 병력을 양성했다는 것이 우리 고구려의 자산입니다.”
태왕은 더없이 밝아진 표정으로 감격에 겨워 머리를 끄덕였다.
“오! 장하기 그지없구려. 짐의 명령으로 일찍부터 조의선인 용사들이 고된 훈련을 충실히 했으나 오늘같이 짐을 기쁘게 한 적은 일찍이 없소이다. 짐이 백번 아니 천번을 칭찬해도 모자랄 뿐이오.”
“이 모두가 영명하신 태왕 폐하의 지혜와 고구려의 흥복 덕분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나이다.”
“그럼 관미성의 험난한 서쪽 절벽을 올라갈 수 있는 병사들은 얼마나 되오?”
“성벽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 있는 용사만 3천은 족히 되나이다. 소장이 직접 이들을 인솔해서 공략할 것이옵니다.”
“참으로 대견하고 든든하오. 이번 작전이 성공한다면 내 조의선인 용사들에게 후한 상을 내릴 것이오!”
태왕은 기분 좋게 웃으며 어려운 임무를 자원한 여석개와 조의선인 용사들의 용기를 칭찬했다.
낙조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시간, 관미성을 에워싸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의 대열이 갈라지며 육중한 위용을 자랑하는 투석기(投石器)가 모습을 드러냈다. 흔히 보던 투석기의 두 배가 넘는 높이였다. 투석기의 크기로 보아 동구 앞 선돌 정도는 너끈히 날릴 수 있을 듯했다.
이 투석기는 장정 팔뚝 굵기의 동아줄을 매달아 20여명의 힘깨나 쓴다는 군사가 활처럼 휠 때까지 잡아당겨 쏘아야 했다. 위력은 성벽을 일거에 부술 수 있을 정도였다.
성 위에서 이를 바라보던 관미성의 백제 군사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성주인 묘멱(苗冪)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주는 마음을 다잡고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고구려군이 아무리 막강한 무기로 공격해 온다 할지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백제의 용사들이여! 지금 적군이 바로 앞에 당도했다. 선대왕 시절에 우리 선조는 평양성까지 진군하여 고구려왕을 죽이고 사방에 위세를 한껏 떨쳤다. 이제와서 조상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는 없다. 나는 이곳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겠다. 그대들이 진정 백제의 영광을 지키고자 한다면 나와 함께 목숨을 걸고 저들과 싸워 관미성을 사수하자!”
묘멱의 연설은 장병들의 두려움을 씻어 주었다. 여러 번적의 침입을 받았지만 결코 함락된 적이 없는 관미성이 아닌가? 고작 투석기 따위에 겁을 먹는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백제군으로서 위신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관미성 병사들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묘멱의 마음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봉화를 올린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도성에서는 지원군을 보낼 기미가 없었고, 금방이라도 달려올 줄 알았던 달을참의 수군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묘멱은 불길한 생각을 애써 털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갔다.
어둠이 내리자 광개토호태왕은 말똥과 유황을 섞어 바싹 말린 커다란 덩어리들을 관솔기름에 흠뻑 적셔 투석기 위에 올리라고 명령했다. 기름에 적셔진 덩어리들은 재앙을 예고하듯 무섭게 번들거렸다.
“덩어리에 불을 붙이고 성벽으로 쏘아 날려라!”
태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투석기 밧줄이 일제히 풀리며 불붙은 덩어리들이 마치 유성(游星)처럼 성안으로 쏟아져내렸다. 곳곳에서 창고와 가옥이 불타고 성민(城民)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화염에 휩싸인 병사가 바닥을 구르며 살려달라 비명을 질렀다. 화마(火魔)가 성 전체를 휩쓸며 닥치는 대로 굶주린 배를 채웠다. 묘멱은 성벽을 지키던 군사 가운데 일부를 차출하여 진화에 나섰지만 때마침 불어온 강풍으로 인해 성 곳곳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묘멱은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도 고구려군에 대한 경계심은 잃지 않았다. 고구려군 병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성벽의 수비태세를 유지했다. 그런데 고구려군 병사들은 불덩어리만 날릴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구려군의 화공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동안 관미성의 반대쪽에서는 새까만 옷을 입은 군사들이 민첩한 동작으로 바다와 면한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강한 바닷바람 속에서 절벽을 오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절벽에 부딪친 파도가 흰 포말을 뿜어내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검은 경장의 군사들이 아슬아슬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고서 간신히 서쪽 성벽 위로 올라섰을 때에 그곳을 지키던 파수병들의 시선은 온통 성안의 불길로 쏠려 있었다. 여석개가 인솔하는 조의선인 특수병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파수병들을 처치한 후 성벽 위에 고구려군의 깃발을 꽂았다. 여석개는 하늘을 향해 일정한 간격으로 세발의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태왕과 모두루가 지휘하는 고구려군 본대에 신호를 보낸 후, 여석개는 성루를 가로질러 동쪽 성문으로 달렸다. 불타고 있는 집 주변에서 진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백제 군사와 백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포위당한 상태라 물을 구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사정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여석개는 불길을 뒤로하고 무거운 발길을 옮겨 동쪽 성문으로 향했다.
누구도 미처 적군이 성안으로 들어왔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없었다. 여석개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더 이상 무고한 백성의 희생을 줄이려면 한시라도 빨리 성문을 열어 고구려 군사들을 맞아들여야 했다.
서쪽 성벽 위에서 불화살이 나는 것을 본 광개토호태왕은 투석기 공격을 멈추고 군사들을 다섯 대로 나누어 성으로 쳐들어가게 했다.
고구려군이 총공세에 나서자 성벽을 지키던 백제 군사들은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한참동안 성벽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는데 백제군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성문 안쪽에서 함성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성문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묘멱이 놀라서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이미 성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성안에 잠입한 여석개 휘하의 조의선인군이었다. 관미성은 순식간에 성안에 잠입한 고구려군 병사들로 가득 찼다.
선봉대를 이끌고 성으로 진입한 모두루는 관미성주를 사로잡기 위해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거기서는 양군의 접전이 한창이었다.
적장인 묘멱의 붉은빛 투구가 보이고 그 앞에 대치하고 선 여석개의 검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여석개는 칼을 내린 채 묘멱을 향해서 외쳤다.
“더 이상 군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마시오! 이미 전세는 기울었소! 장수라면 먼저 자기가 거느린 군사들의 목숨을 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소!”
묘멱이 처연한 목소리로 받았다.
“네놈이 비록 적장이지만 그 말이 틀리지는 않구나. 승부가 판가름이 났으니 더 이상 나의 병사들을 해치지 마라. 패배의 치욕은 혼자 걸머지고 가겠다.”
말을 마치자 묘멱은 성벽 밖으로 몸을 날렸다. 여석개가 이를 보고 황급히 달려가 손을 뻗었으나 묘멱은 이미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바위에 떨어졌는지 둔탁한 소리가 성벽 아래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성주 묘멱이 죽자 백제 군사들은 창과 칼을 버리고 항복했다. 구심점을 잃었으니 더 이상 싸워봤자 승산이 없었다. 이리하여 불패의 철옹성도 고구려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처럼 고구려군이 난공불락이었던 관미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비결은 광개토호태왕과 모두루 장군의 신묘한 계책,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의선인들의 용맹이었다.
병관좌평 진무의 사력을 다한 보필 덕분에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아단성에 당도한 진사왕은 어의(御醫)의 치료를 받으며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나 진사왕은 이곳에서 매우 불행한 소식을 들어야 했다. 바로 관미성을 고구려군에게 빼앗겼다는 급보였다. 병석에 누워 있는 진사왕에게 고구려에서 보낸 사신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진사왕은 화살에 맞은 상처의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고구려의 사신을 들어오게 하라고 일렀다.
진사왕을 만나러 아단성을 찾아온 고구려의 사신은 광개토호태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장수 모두루였다. 점령군의 선봉장인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진사왕 앞에 서서 말했다.
“우리 고구려 태왕 폐하의 뜻을 백제왕에게 전하겠소이다. 아국 고구려는 지난번 백제의 선대왕이었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자국의 강성함만 믿고 우리 땅으로 쳐들어와 현재 태왕의 조부 되시는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시해하는 악행을 저질렀던 과거의 일에 대해 천리(天理)를 거스른 일이라 보고 하늘의 뜻에 따라 군사를 움직여 응징한 것이오. 본디 고구려와 백제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나온 형제의 나라이거늘, 어찌하여 백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아국을 침범하여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는 것이오? 백제가 앞으로 나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싶다면 절대로 고구려를 침범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외다! 또 국경은 패하를 경계로 하되 관미성과 달을참, 석모도는 고구려에 귀속될 것이오. 그리고 백제왕은 아국의 태왕께 머리 숙여 죄를 청하고 고구려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고구려를 형의 나라로 섬기시오.”
진사왕은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고구려왕 담덕이 오만하기 그지없구나. 감히 나를 어찌 보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제안을 한단 말이냐? 네놈이 감히 나를 능멸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느냐?”
모두루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 없이 의연하게 말했다.
“아무리 적국이라 해도 사신의 목숨을 빼앗는 법은 없소이다. 만일 백제왕께서 한순간의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소장의 목을 벤다면 우리 고구려의 군사들은 백제를 완전히 병탄할 것이오! 어느 쪽이 백제를 위한 길인지 잘 생각하고 판단하시오.”
진무가 나서서 아뢰었다.
“어라하! 고구려의 사신을 죽여서는 아니 되옵니다.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고구려왕의 제안에 무리한 점이 있더라도 한번쯤 검토해 보심이 좋을 줄 아옵니다.”
다른 신하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진무의 의견에 동조하자 진사왕은 마지못해 모두루에게 말했다.
“내 일단 강화(講和)의 조건에 대해 의견을 수렴한 뒤 고구려왕에게 사신을 보내 답변을 전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너희 왕에게 돌아가거라.”
모두루가 아단성을 떠나 관미성의 고구려군 진영으로 돌아간 뒤 백제의 군신들은 강화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패하 이서와 혈구도를 비롯한 주변 섬들은 고구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사옵니다. 현재의 약화된 전력으로는 고구려 군사들을 몰아내고 실지(失地)를 회복하기 어렵사옵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고구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우리가 국력을 회복하면 고구려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야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것이고 관미성과 달을참, 석모도 역시 머지않아 되찾아올 수 있사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고구려왕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인데, 치욕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백제의 앞날을 위해서는 그리 하시는 것이 옳을 줄로 압니다. 형제지국의 형식적인 관계를 받아들이되 항복이 아닌 결의 선에서 절충을 본다면 그들은 명분을 얻고 우리는 실리를 챙길 수 있사옵니다.”
진무는 고구려와 강화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신하들은 진무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진사왕만은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아직 당성의 수군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합세한다면 고구려군과 일전을 벌일 수 있다.”
“당성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목힐강부(木詰綱扶)가 움직였다면 벌써 관미성에 도착했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꼼짝을 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그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당성의 수군은 머리에서 지우십시오.”
진사왕은 부상 부위가 다시 아파오는지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진사왕이었지만 더 이상 무모하게 전쟁을 끌고나갈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진사왕은 어쩔 수 없이 진무에게 강화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여 고구려군 진영으로 파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