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전쟁의 대지존 광개토호태왕』4.예맥의 맹주 대고구려 ⑶

개마기사단201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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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목숨을 건진 진원강은 청목령성(靑木嶺城)으로 달아났다. 백제 조정에서는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청목령성에 좌장(左將)을 파견하여 북방의 방어를 통괄하게 했는데, 좌장은 진원강의 사촌 형인 정병대장군 진가모였다.

 

진가모는 파수병으로부터 진원강이 성문 앞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의아했다. 지금쯤 고구려군에 맞서 치양성을 지키고 있어야 할 사촌 동생이 연락도 없이 청목령성에 나타났다는 것은 불길한 일이었다. 진가모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원강의 처참한 몰골을 보는 순간 진가모는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고구려 군사들이 국경을 넘은 지 사흘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진원강이 무능한 장수라 할지라도 치양성과 같이 여러번 격전을 치러낸 견고한 성을 사흘 만에 빼앗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찢기고 해진 갑옷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상처가 치양성의 참상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었다.

 

진원강은 산발한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였다.

 

“치양성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진원강은 형을 보자 안심이 되었는지 울음부터 터뜨렸다.

 

진가모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어찌 그리 쉽게 성을 빼앗겼단 말이냐?”

 

“적의 간계에 빠져 성문을 열고 나섰다가 어이없게 기습을 받았습니다.”

 

“내가 그럴까봐 누누이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어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 네가 그러고도 살기를 바란단 말이냐?”

 

진원강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사정했다.

 

“소장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혈육의 정을 생각해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진가모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진원강을 보며 자신의 실책을 새삼 깨달았다. 저렇게 변변치 못한 사촌 동생에게 북방의 요충지를 맡긴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치양성에서 백제군이 패배한 이유는 자신의 사람을 심어 권력을 공고히 하려던 진가모의 욕심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가모는 차마 그 자리에서 진원강의 목을 벨 수 없었다. 그것은 혈친의 정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진가모는 진원강을 도성으로 보내 국왕의 처분을 받도록 했다. 성을 빼앗기고 많은 군사를 잃은 죄인을 혈육이라고 해서 자신이 사면해준다면 뭇 사람으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럴 때에는 임금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진원강의 처분에 관한 문제를 일단락지은 진가모는 휘하 장수들을 소집했다. 진가모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속속 도착하는 첩보에 의하면 치양성은 물론 주변 십여개의 성이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하오. 이는 고구려의 군사들이 막강하다는 증거요. 기세가 오른 고구려군과 정면으로 맞붙어봤자 승산이 있을 리 없소. 일단 패하를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들의 움직임을 살피도록 합시다.”

 

청목령성주 사첨(沙尖)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니 그럼 패하 이서(以西)의 땅을 고스란히 고구려에게 넘겨주자는 말씀입니까? 패하 이서의 땅은 기름진 곡창지대로 우리의 오랜 숙원이었던 곳입니다. 이곳을 얻음으로 해서 우리 나라는 풍부한 곡식과 해산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숙원을 이룬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이처럼 쉽게 포기한단 말입니까?”

 

진가모는 자신에게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서는 사첨을 두고 보기 힘들었다. 가슴속에서 불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당장 사첨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눈에 든 가시 같은 존재이기는 했지만 고구려군이 코앞에 닥친 위기상황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장수였다. 사실 진가모가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사첨의 공로를 가로챈 덕분이었다.

 

진가모는 분을 삭이고 점잖게 타일렀다.

 

“지금 고구려군의 기세는 욱일승천(旭日昇天)이라 할 수 있다. 때로는 물러설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법이야.”

 

“지금은 나아갈 때이지 물러설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적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패배의 지름길입니다.”

 

사첨이 뜻을 굽히지 않자 진가모는 짜증 섞인 어조로 단단히 못을 박았다.

 

“이미 마음을 정했다. 자네는 내 결정에 대해 더 왈가왈부하지 말라.”

 

진가모는 이번 위기만 넘기면 사첨을 제거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사첨은 언제라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었다.

 

좌장 진가모의 명에 따라 패하 이서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던 백제 군사들은 모두 패하 이동(以東)으로 물러났다.

 

백제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소식을 전해들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장수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철기군주(鐵騎軍主) 모두루(牟頭婁)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저들은 겁을 집어먹고 달아난 것이옵니다. 지체할 것 없이 패하를 건너 단숨에 백제의 도성까지 쳐내려가야 하옵니다.”

 

“아직 저들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없으니 잠시 지켜보도록 합시다.”

 

태왕은 내심 백제의 청목령성주 사첨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첨은 지난날 광개토호태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직접 인솔하는 고구려군과 맞서 수성전(守城戰)을 벌여 승리한 후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태왕은 그가 지략이 뛰어난 장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패하 이서를 얻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사첨이 청목령성에 버티고 있는 한 백제군은 결코 만만하지 않은 상대였다.

 

태왕은 백제군이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패하 이서를 포기한 데 대해 의심을 품었다. 적군의 함정이 아니라면 천우신조(天佑神助) 둘 중에 하나였다. 태왕은 첩자들을 총동원하여 백제군의 의도를 알아내려 애썼다.

 

며칠 뒤, 백제군 내부에 침투시켰던 첩자로부터 이번 백제군의 퇴각은 진가모의 독단에 의해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광개토호태왕은 크게 기뻐하며 군사를 보내 치악성과 구두성 등 패하 이서의 성들을 접수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패하 건너편의 도압성과 굴어압성을 비롯한 십여개의 성을 점령했다.

 

광개토호태왕은 고국원왕 재위 때에 백제에게 빼앗긴 땅들을 모두 수복하고 나자 남경군(南境軍) 대모달(大模達) 우나굴(于那屈)의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를 맡긴 후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넘실거리는 물결이 뱃전을 밀어내며 길을 열어주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굵은 동아줄에 묶인 배는 당장이라도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싶은 듯 뱃머리를 뒤척였다.

 

광개토호태왕은 뱃머리에 올라 수평선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떠오를 모양인지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붉은 기운이 뻗치고 있었다. 그때 수박씨만한 점들이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차츰 그 수가 늘어났다. 해가 산등성이 위로 완전히 떠오르자 수많은 점들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태왕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새어나왔다. 바다를 가득 메울 정도로 수많은 배가 질서정연하게 포구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병사 일백여명과 군마 일백필을 족히 실을 수 있는 규모의 배들이 2백척은 넘는 듯했다. 이처럼 대규모 선단이 율구(栗口)에 당도한 일은 역사상 없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광개토호태왕을 태운 거룻배가 선단의 모함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태왕의 모습이 나타나자 뱃전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거대한 산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듯한 함성이었다.

 

힘차게 모함 위로 뛰어오른 태왕을 맞이한 사람은 대사자(大使者) 아불파연(阿佛破然)이었다. 아불파연은 태왕을 보자마자 한 팔을 들고 허리를 숙여 군례를 올렸다.

 

“소신, 아불파연이 폐하를 뵙사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선박을 만들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아불파연의 지휘 아래 만들어진 배들은 특이한 형태로서 규모부터 이전의 고구려 선박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평저(平底)형 바닥으로 배의 균형감을 살리고, 갑판을 삼중으로 만들었는데, 맨 아래층은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돌을 깔았고, 그 위로 흙과 짚을 덮어 말을 실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기마전법을 중시하는 광개토호태왕의 생각으로 많은 말을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위로 사공들이 노를 젓는 격실과 선실, 창고 등이 자리를 잡았다. 갑판에는 집 모양의 높은 구조물을 쌓아 적군의 동태를 살피거나 높은 위치에서 적군에게 활을 쏠 수 있게 했다.

 

태왕의 칭찬에 아불파연은 기분이 좋아져 연신 너털웃음을 흘렸다.

 

“고생이라니 당치도 않사옵니다. 소신을 늙었다고 내치지 않고 써 주시니 그저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까?”

 

“동래(東萊)로 출진하는 일만 남았사옵니다.”

 

두 사람은 의미 있는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패수구(浿水口)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의 수군 선단이 율구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백제 조정에 전해졌다. 갑작스런 광개토호태왕의 철군과 고구려 수군의 움직임은 진사왕(辰斯王)을 혼란에 빠뜨렸다.

 

진사왕은 대신들을 불러 의논했다.

 

“고구려 군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구려. 어찌 판단해야 하겠소?”

 

내두좌평(內頭佐平) 찬여고(贊余考)가 나섰다.

 

“고구려 수군이 율구로 움직였다면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공표한 대로 산동반도의 동래를 공격하는 것인데,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연나라가 부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고구려왕으로서는 한 번쯤 취해 볼 만한 작전입니다. 그러나 단시간내에 동래를 함락시키지 못하면 오히려 역공을 받을 위험이 크므로 우리와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추진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하나는 동래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선수를 돌려 우리의 당성(當城)이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는 것인데, 그들이 기습을 감행한다 할지라도 해전에서만큼은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고구려왕 담덕도 이를 잘 알 테니 가볍게 쳐들어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략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찬여고조차도 광개토호태왕의 속셈이 무엇인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은 쪽이 있지 않겠소?”

 

진사왕은 답답한 마음에 찬여고를 다그쳤다. 그때 병관좌평(兵官佐平) 진무(眞武)가 계책을 내놓았다.

 

“이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군사를 어느 한쪽에 치중해서 배치할 수 없습니다. 일단 관미성과 당성을 비롯한 중요 포구의 방비를 강화하고 고구려왕 담덕의 움직임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정말 동래로 향하면 우리는 그 틈을 타서 패하 이서를 수복하면 됩니다.”

 

진사왕은 고심 끝에 진무의 의갼에 따르기로 했다. 내륙의 군사를 모아 해안에 배치하는 한편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광개토호태왕의 행적을 추적했다.

 

며칠 후 병관좌평 진무가 진사왕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고구려왕은 이미 율구에서 수군과 합류했다고 하옵니다. 조만간 율구를 떠나 동래로 나아갈 것으로 보입니다.”

 

진사왕은 코웃음을 쳤다.

 

“담덕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구나. 자신감이 과(過)하면 오히려 화(禍)가 되는 법이거늘…”

 

진무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구려가 패하 이서 지역을 공격한 것은 연나라를 치기 전에 우리의 기세를 꺾어 놓기 위함이었나 봅니다.”

 

“지금 즉시 달솔 진가모에게 명령을 내려 패하 이서에 주둔해 있는 고구려 군사들을 치게 하라. 짐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설 것이니 출전 준비를 하라. 이번에야말로 우리 백제의 무서움을 보여 주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