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배타고 간 제주> 4. "다시 제주의 참빛깔을 보다" 올레 3코스

박교빈201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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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시드 게스트하우스 2층 방에서 내다본   

 

 

6시에 눈을 떴다.

게스트하우스 2층의 베란다 문 옆 침대라 누워서도 밖이 보인다.

버스 한 대가 새벽 어스름 길을 뚫고 고즈넉하게 지나간다.

 

스쿠터 처자와 나는 스마트 폰을 연신 만져대며 오늘의 날씨를 궁금해 했다.

비가 올까? 강수 확률은 몇 %일까? 오늘은 맑아야 할 텐데... .

 

게스트 하우스에서 차려준 아침은 미역국에 각종 나물, 생두부, 잡곡밥이다. 나중에 이모님은 냉장고에서 방풍나물 장아찌를 꺼내 맛을 보여준다. 방풍은 풍을 막아준다는 뜻이란다. 약간의 한약재 향이 난 것 같다.

 

 

 

 시드 게스트하우스

 

 

게스트하우스 오른쪽 끝에 자리한 야외 테이블. 어제 저녁을 먹은 곳이다

 

 

 

 

 

 

게스트하우스 승합차는 9시가 약간 지나 나를 올레 3코스 시작점인 온평포구에 내려줬다.

 

 

 

 

 

날씨는 어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찬란히 빛나는 태양, 반가워. 그래 이게 제주의 참 빛깔이지.

 

 

 

도댓불. 제주의 전통 등대

 

곧 도댓불을 만난다. 첨성대 모양의 등대는 해질 무렵 어부가 불을 밝혀 놓고 바다로 나가 밤새 고기잡이를 하고 새벽에 들어와 불을 껐다고 한다.

 

 

 

 

 

 

 

 

 

 

서울에서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를 하다가 오른쪽으로 꺽어들어야 할 길을 놓쳤나 보다.

 

 

 

 

 

2차선 해안도로를 홀로 걷는다.

돌성을 보며 바다를 보며 하늘을 보며.

 

바다 위 하늘은 구름과 태양을 번갈아 보여준다.

 

역시 올레길 표시가 안 나와 결국 해양 경찰 경비병에게 물었다. 경비병 뒤로 마당의 개가 짖어댄다.

“이 길이 올레길 맞나요?”

아니란다.

“그럼 이 길로 저 같은 여행객들이 많이 다니나요?”

“많이 다녀요. 쭉 가시다가 횟집 있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돼요.”

 

 

 

 

 

 

 

 

700여 년 전, 바닷가 자연석을 채취하여 만들었다는 석성石城이 눈길을 끈다.

환해장성은 배를 타고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주도 해안선을 따라 쌓은 성을 말한다.

신산리의 환해장성, 신산환해장성이다.

 

 

 

석성을 구경하고 돌아서려는데 땅바닥에서 뭔가 움직여 보니 작은 게 한 마리가 옆으로 분주하게 걷는다.

막 도망간다.

“안 잡을게, 도망가지 마.”

멈추는 것 같더니만 풀 아래 숨는다.

비온 뒤라 땅이 축축하다.

 

천일수산 앞을 지나는데 이 번에는 개가, 개가 길을 건너와 바로 뒤에서 짖어댄다. 무서워서 다리에 찌릿찌릿 전율이 인다.

내가 무서워하면 개가 더 난리 칠 것 같아 무심한 척 걸었다. 개가 따라오기를 멈추는 듯 해 다행이다 했더니 다시 뒤따르며 짖어댄다.

 

다음 공장 앞에는 개 두 마리가 있다. 역시나 짖어대며 나를 향해 한적한 도로를 건너와 뒤따른다. 적막한 해안도로에는 개 두 마리가 내 뒤를 따르는 발자국 소리만 있다.

무서워서 뒤돌아보지는 못하고 고개를 살짝 돌려 그림자를 확인하려 했으나 보고 말았다. 개 두 마리가 얌전히 나를 따르고 있는 모습을.

내가 짖어대는 개라면 기겁을 하는 이유는 어렸을 적 옆동네에서 짖어대는 개를 피해 도망가다가 개가 쫓아와 무릎 뒤를 물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그 동네 어느 집 마당에서 개에게 물린 자리는 개털을 태워 된장에 발라 붙여줘야 한다며 그리 한 것 같은데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확신이 안 선다.

 

뒤따르던 개들도 어느 새 사라지고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으니 복통이 일었다. 화장실이 필요한 급작스러운 복통.

주위에는 어디 숨어 노상방변 할 만한 곳도 없다.

‘지환이네 횟집’이라는 포장마차가 있고 그 옆에는 간이 화장실이 놓여 있어 주인을 불렀으나 아무도 없다. 급해서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냄새가 약간 심하다. 숨구멍이라도 하려 문 틈을 살짝 벌려 놓으니 상큼한 바닷바람이 밀려온다. 해안가 도로가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바다 위로는 새 하얀 진주보다 더 빛을 내던 구름들. 이런 호사가 어디 있나.

해안 도로를 따라 가면 다른 것은 나올 것 같지 않을 분위기여서 횟집 옆으로 난 작은 길로 들어섰다. 마을길일까 했는데 단순한 농로이다.

사실 난 올레 3코스가 어디어디를 거치는지 모른다. 얼마 전 어떤 잡지에서 가을에 걷기 좋은 올레가 3코스라는 글을 봤고 역시 지난 봄에 구제역으로 이 코스를 걷지 못한 기억이 있어 무작정 올레 표시만 따를 생각에 온 것이다.

농로가 끝나자 대로이다. 길을 건너 직감으로 왼쪽으로 걸었다.

 

 

 

휴게소 간판이 보인다. 반갑다, 올레길을 물어볼 수 있어서.

식당과 매점이 있는 휴게소에는 아저씨 둘이 대화중이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친구가 매점을 보고 있다.

내가 올레 3코스를 묻자 학생이 한 번 설명해 주고 아저씨가 한 번 설명해 주고 다른 아저씨가 또 설명해주었다. 휴게소 옆길로 조금만 가면 올레 표시가 있을 것을 친절한 사람들은 길 잃은 방랑자보다 더 열성적으로 길을 알려준다.

 

 

 

 

 

 

 

 

 

성산기상대를 지나 10여분을 걸으니 올레꾼 2명도 보이고 올레길 화살표도 보인다.

반갑다, 반갑다.

 

혼자서 딴 길로 샌게 1시간 정도이다.

이제야 마음에 여유와 낭만이 들어선다.

 

 

 

 

 

 

 

 

 

 

 

 

 

난산리

제주도 말로 폭낭, 즉 팽나무이다.

 

 

마을 입구에 심어 마을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며 사람들이 어울리던 곳이란다.

이제는 마을에 사람이 없어 이끼만 무성하다.

 

 

 

난산리.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져 있다

 

 

 

 

볕이 초여름 햇볕처럼 뜨겁다.

고어텍스 모자로 햇빛을 가리자니 머리가 덥고 모자를 안 쓰자니 얼굴이 따갑다.

 

마을의 어느 집 대문이나 담장을 보면 그 생김을 보며 머뭇거리며 걷는 탓에 길에는 아무도 없이 나 혼자다.

하늘을 보면 또 그 빛깔에 감탄하느라 발걸음은 느려지고 길에는 또 나 혼자다.

길가의 거대한 나무나 감귤나무밭을 보면 그 자태를 구경하는라 길에는 또 나 혼자다.

 

앞서가던 두 올레꾼이 보이지 않아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하다.

더군다나  오늘 저녁 나는 6시 30분에 출항하는 평택행 배를 타러 가야하니 다른 올레꾼들보다 더 일찍 3코스를 마쳐야 한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3코스를 다 걷진 못하더라도 나만의 방식과 걸음과 시선으로 걸을 수 있는 데 까지 걸을 작정이다. 나는 지금 여행 중이지 않는가. 가능하다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까지 걷기로 한다.

 

이제 마음이 한결 느긋해진다.

 

귤 농장 입구에 해를 등지고 앉아 카스텔라 빵을 꺼냈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파란 하늘이며 돌담과 밭을 보니 호주 스탠소롭 농장에서 일할 때 갖던 브레이크 타임이나 런치 타임이 생각난다. 그 때 본 풍경과 지금이 너무 비슷하다. 포도밭에 앉아 숙소에서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먹던 그 때가.

 

 

 

통오름

 

 

통오름

 

통오름을 오르는데 거대한 구름이 바람에 실려 가는 장면이 장관이다. 꼭 바람이 목동이 되어 구름을 이끄는 것만 같다. 바람에 실려가는 구름은 심술이 났는지 해가 짱짱한데도 잠깐 비를 뿌렸다. 

 

 

독자봉.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노란 나비가 날개를 저으며 내 앞을 날아간다.

 

 

 ‘틀림없이 요정들이 살고 있을 거야. 분명 생명이 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이렇게 아기자기한 숲에는 피터팬과 그 친구들과 요정들이 살고 있을 거야.’

 

 

 

 

잔물결을 만들며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 그 위로 내리 쬐는 햇살이 눈부시다, 따갑다.

 

어제와 다른 하늘, 다른 날씨, 다른 마음.

 

언제나 흐린 날이 지나면 맑은 날이 올 것인가?

얼마만큼의 흐린 날이 지나야 맑아질 것인가?

맑은 날은 또 얼마만큼 지속될 것인가?

 

무엇을 가꾸고 있는지 분간이 안 되는 거대한 비닐하우스, 제주에서는 처음 본 녹차밭, 양 옆으로 감귤이 주렁주렁한 농로를 지났다.

 

 

 

 

 

 

 

이제 드디어 삼달리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다다랐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란다.

이곳이 둘러 볼만하다 소리를 예전부터 들어서 진즉부터 와보고 싶었다.

3코스를 다 못걷더라도 이곳만 보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제주의 아름다움에 미친(?) 사진작가가 20여년을 제주에서 지내며 제주의 속살을 렌즈에 담아 전시해 놓은 곳이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래며 제주의 오름과 바다, 들판과 억새, 구름을 찍었다.

창고에 있는 수많은 사진들을 위해 갤러리를 만들 생각을 하고 폐교를 구해 초석을 다질 무렵, 그는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2002년에 지금의 갤러리를 열었다. 2005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작가는 사진을 좋아하고 제주의 참모습을 보길 원하는 이들을 위해 일부러 중산간 마을에 갤러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때 아이들이 뛰놀았을 운동장은 이제 제주도를 옮겨놓은 모습을 한 정원이 되었다.

겹겹이 둘러진 흑갈색의 돌담은 에돌아서 갤러리로 향하고, 돌담 사이사이에는 오름도 봉긋 솟아 있다.

 

 

 

 

 

 

이곳 갤러리에선 김영갑의 작품과 그의 작업실, 생전의 모습을 담은 영상물을 볼 수 있다.

 

 

 

 

 

 

 

 

 

전시실을 둘러보고 옆문을 통해 뒷마당에 발을 내딛었다.

 

파란 하늘에 갑자기 바람이 일렁인다.

공해와 추위에 약해 제주에서만 자란다는 커다란 녹나무 잎도 바람에 소리를 낸다.

 

문득, 세상을 떠나 이 곳 정원에 뿌려졌다는 김영갑 작가가 분명 이 곳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몸에 전율이 일었다. 꼭 그가 여기를,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갤러리 뒤쪽엔 ‘두모악 찻집’이 있다

본래는 ‘두모악 무인찻집’이었는데 왜 굳이 무인이라는 말을 지웠을까?

 

무인이든 유인이든 이곳에선 커피향이 그윽하게 풍긴다.

 

 

 

 

살면서 문득 나를 돌아보고 싶다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싶다면

제주 올레길을 걸어보라. 그것도 혼자서!

 

제주의 물빛이, 바람이, 구름이 우리 길을 보여주고 열어 줄 것이다.

 

 

 

 

어제 해 질 무렵 걸었던 광치기 해안을 돌아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다시 보았다

 

 

 

 

올레 3코스를 11월 11일에 걷고 지금 12월 10일에 이 글을 쓴다.

친분이 없는 나를 배 여행으로 이끌어 주신 문은규 이사님께 많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