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무지가 자기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태왕의 독단에 의해 나포되다시피 하여 국내성 왕궁에 들어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린 하무지가 태왕과 자리를 마주했다.
하무지는 태왕에게 두루마리로 접은 서찰을 올리며 아뢰었다.
“폐하! 이것은 소신의 내력을 적은 글이오니 살펴보시고 결단을 내리셔도 늦지 않사옵니다.”
“흠, 읽어보리다.”
하무지가 내민 서찰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상명세서인 셈인데 내용인즉, 자신은 중국 동진(東晉)의 무관(武官)인 하겸(河謙)의 서자(庶子)였으며 하무지의 부친인 하겸은 예주자사(豫州刺史) 사현(謝玄)의 부관으로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에 참전해 전공(戰功)을 세운 바 있었다. 그러나 간신 왕공(王恭)의 모함으로 사현이 억울하게 역모의 누명을 쓰고 사형당할 때에 사현의 측근이었던 하겸 역시 함께 붙잡혀 사형당했으며, 그의 가족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그리하여 하겸의 네 아들 가운데 서자인 하무지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고구려 땅으로 망명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하무지는 자신이 태왕의 신하가 되는 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점은 거의 없으나 고구려의 중앙권력에 자리잡고 있는 기존의 토착 세력과 중신들 간의 보이지 않는 견제 상황을 감안할 때 군사(軍師) 정도의 직책으로는 자기가 생각하는 세상의 중심이 되는 대고구려를 완성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염려했다.
따라서 태왕과 하무지 두 사람의 야망이 하나가 되어 천하를 주름잡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방법의 미흡함 때문에 여러 생각 끝에 이 글월로써 본인의 의사를 전하게 되었으며, 이 같은 무례함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평범한 진리 때문에 비롯되었으니 사죄한다는 내용의 글이 씌여져 있었다.
다 읽은 태왕은 내색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엄숙한 표정으로 하무지에게 말했다.
“군사님이야말로 하늘이 짐에게 보내주신 동지이자 스승이라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었소. 이것은 우리 고구려가 중원을 넘어 서역까지 정복하라는 하늘의 계시임을 알겠소이다.”
태왕은 서찰을 고이 접어 탁상 위에 가지런히 놓은 뒤 말을 이었다.
“짐은 군사님을 막리지(莫離支)로 임명해 고구려의 병권을 총괄하게 하겠소이다. 물론 대신들과 장수들이 크게 반발하겠지만 짐은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누르고 군사님을 막리지로 모실 수 있게 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도록 할 것이오.”
“폐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짐은 하무지 선생과 함께 하여 동방의 빛이 될 것이며 백성들에게는 소금 같은 군주로 우뚝 서겠소!”
“소신 하무지는 신명을 바쳐 태왕 폐하를 보좌하겠나이다.”
“고맙소! 짐은 군사님을 믿소! 함께 좋은 세상을 열어 나갑시다.”
태왕은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연살타에게 엄숙한 얼굴로 명령했다.
“연살타 장군은 모두루 장군과 의논해 제일 좋은 길일을 택해 군사님의 막리지 임명식을 거행하는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시게.”
“예, 폐하! 명심해서 일을 진행토록 하겠나이다.”
태왕은 하무지에게 귀족들의 반발 정도는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생각하며 제압할 수 있음을 과시했다. 또한 고구려의 영광이 펼쳐질 수 있다면 지존으로서의 모든 기득권도 포기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앞으로의 정사를 펼치겠다고 맹세했다.
광개토호태왕은 목욕재계하여 심신을 깨끗이 한 뒤에 열성조(列聖朝)를 모시는 사당으로 가서 선대(先代) 태왕들의 위패 앞에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국조(國祖)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과 모든 열성조께 고구려의 열아홉번째 태왕인 소손 담덕이 고하나이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신 덕분에 우리 대고구려의 찬란한 영광을 맞이하고 역사에 길이남을 패업을 달성하기 위한 천하의 기재(奇才)를 얻었사옵니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대고구려로 다시 태어나 후세에 태양처럼 길이 빛날 대영광의 시대를 열고자 하오니 부디 열성조께서 보우하사 이 소손으로 하여금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소서!”
그렇게 고하고 일어난 태왕은 두 번 절하고 물러나왔다.
국내성 왕궁의 대전 입구와 성 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고조되고 있었다.
물론 태왕은 그 동안 하무지를 막리지로 발탁하기 위해 사전 작업을 했다. 5부족 사람이든 왕족이든 태왕인 자신을 보필해 야망의 뜻을 이루어줄 인재를 천거하되 하무지보다 지략이 뛰어난 자라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때문에 모든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리고 하무지를 막리지로 삼는 것에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하지만 그들은 만약 하무지가 정책을 수립하고 조정하는데 있어서 무리수가 보이면 막리지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막리지의 취임의식이 펼쳐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고구려의 역사에서 일개 신하의 벼슬길에 이처럼 화려하고 성대한 의식을 치르는 것은 태왕의 등극 때도 볼 수 없었다. 하무지가 들어갈 국내성 동문 입구부터 대궐까지의 길 양쪽에 무장한 태왕의 근위병들이 도열해 있었으며, 이십보 거리마다 많은 채색 깃발들이 세워져 있었다.
하무지가 동문 앞으로 들어서니 그 곳에서 대전 입구까지 붉은 주단이 깔려 있었으며, 태왕이 새로운 막리지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하무지가 황당해하며 말렸으나 듣지 않고 하무지에게 정성을 다해 큰절을 올렸다. 삼문과 중문을 거쳐 대전 입구까지 걸어갔는데 좌우에는 새 옷을 입고 단장을 곱게 한 궁녀들이 두 손을 배에 댄 자세로 시립하고 있었다.
대전 안으로 들어선 태왕이 용상(龍床)에 좌정하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짐에게 있어서 참으로 뜻깊은 날이오! 천하의 기재인 하무지 선생을 막리지로 모셨기 때문이오. 해서 대답해 주시기를 청하노니 무릇 천하를 평정하는 대제국의 군주가 되기 위해서 먼저 실행해야 할 바가 무엇이오?”
하무지가 즉시 읍하고는 말했다.
“지금 화북(華北)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 연나라와 남쪽의 백제·신라, 그리고 동부여와 거란 등에 첩자를 보내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지도자의 능력과 대신들의 충성도 그리고 그들의 병력의 높고 낮은 기세 등을 관찰하고 마지막으로 각국의 지리와 지형을 파악해서 지도를 그려 놓으면 고구려가 아무리 사방에 많은 적국을 두고 있다고 하여도 우리가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내치를 튼튼히 하면서 태학의 생도들을 늘리고 조의선인과 개마기사단의 전력을 증대하여 폐하의 명령이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강한 군대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나이다. 전쟁을 벌일 때는 군량만 확보되면 백성들에게서 걷는 세금을 감해 주고 한 가정에서 두 사람의 장정을 병사로 차출하지 마시옵소서.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을 유념하시면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농사지을 장정이 한 집안에 한 명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백성들이 흉년이 되면 먹어야 싸우는 병사들이 힘을 잃게 될 것이니, 풍년을 가꾸어야 태왕 폐하의 대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병사들도 힘을 내서 싸워 승리할 것이옵니다. 군주가 현명하면 백성들이 편안해져 잘 살 수 있으나, 군주가 무능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군주를 떠날 것이옵니다. 백성들이 화합하여 나라가 번성하거나 반대로 되는 것은 전적으로 군주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옵니다.”
“천재지변처럼 불가항력일 때도 군주의 능력 탓으로 치부할 수 있소이까?”
“천재지변은 자연적 현상에서 오는 것이니 전적으로 하늘의 뜻이라고 말함은 잘못된 것이옵니다.”
“그럼, 성군(聖君)은 어떤 자이고 악군(惡君)은 어떤 자인가요?”
“성군은 언제나 자기보다 백성을 생각하며 하늘의 변화를 주의깊게 관찰해서 지식을 쌓아 홍수가 나기 전에 방비하고 가뭄이 오기 전에 수로를 만들어서 가뭄에 대비하옵니다. 악군은 언제나 제 몸이 편한 것만 추구하고 주색에 젖어 백성들의 어두운 고통을 외면하는 자로 결국은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해 제왕의 지위를 백성들로부터 박탈당하기 마련이옵니다.”
“간신과 충신의 변별은 어떻게 판단하는 게 도리입니까?”
“충신이나 현신은 훌륭한 정책으로 백성의 안위와 왕실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나 간신은 간언으로 군주를 탕악에 물들게 하고 군주의 귀를 어지럽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자신들의 곡간에는 금은보화가 넘치며 대신일수록 뇌물을 바치려는 자들이 문전 성시를 이루는 집에 살고 있나이다.”
“지금까지 동방의 역사에 있었던 성군을 말한다면 어떤 제왕입니까?”
“옛날에 저 중원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요(堯) 임금이 있습니다. 그 분의 선조는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의 일곱번째 거련(居連) 환웅(桓雄)이었는데, 그 분은 누구보다 현명한 제왕이셨습니다. 겸손하고 청빈하여 백성들이 칭송했으나 모든 공로를 신하들에게 돌리셨고, 제왕이었으나 사치하지 않았으며 화려한 비단옷도 입지 않았고 귀한 물건에 애착을 두지 않았으며, 또한 미모의 여인을 봐도 치우치지 않았고 음탕함은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대궐도 담을 쌓고 치장하지 않았고 겉옷은 겨울엔 사슴가죽 옷, 여름엔 무명베로 만든 소박한 옷을 입고 식사 때 잡곡밥이 아니면 수라를 들지 않았으며 반찬도 콩이나 호박잎, 된장과 간장을 먹으며 언제나 백성들의 심정을 헤아리려고 애쓰셨다 하옵니다. 그리고 일이 생겼는데 관청이 처리를 못해 그 일을 백성이 처리하면 그 백성에게 충분한 돈을 주었으며 마음에 욕심을 두지 않으니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지는 무위의 정치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충성하고 법을 준수하는 관리는 벼슬을 높여 줬고, 부모에 효도하는 자는 선행을 포상해 줘 모든 이에게 본받도록 장려하니 사악한 자들은 자연히 없어졌습니다. 물론 그래도 법을 어기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가차없이 처벌해서 상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참으로 어진 성군이며 위대한 제왕이었군요.”
“헌데 그와 어깨를 나란히 견줄 만한 인물이 오늘날 한 사람 있사옵니다.”
“그게 누군가요?”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입니다.”
태왕도 후연(後燕) 성무제(成武帝)가 전연(前燕)의 왕자와 전진(前秦)의 장수 시절부터 쌓아온 공로와 덕망을 들어왔던 터라 하무지의 대답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짐도 모용수가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인품이 고결하다는 점을 누차 들어왔소. 개인적으로 독대해보고 싶은 인물이오.”
“그러나 모용수는 비록 요 임금과 비슷한 점이 많지만 다른 점도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그는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패왕(覇王)이라는 점이옵니다. 하지만 후사가 불안하다는 단점도 있사옵니다.”
“후사가 불안하다니요?”
“그의 넷째 아들 모용보(慕容寶)가 현재 연나라의 태자이옵니다. 그러나 모용보는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거만한 성격이라 나라의 관리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모용수는 현재 생존해 있는 아들 형제 가운데 가장 맏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용보를 태자로 삼았사옵니다. 그의 아우인 모용린(慕容麟)·모용농(慕容農) 등은 형이 어리석다는 이유로 태자로 인정하지 않사옵니다. 만약 모용수가 태자를 바꾸지 않고 죽는다면 연나라의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워질 것이옵니다.”
“하지만 지금 고구려에게 중요한 것은 연나라와 싸워 이기려면 더 많은 지혜와 준비를 필요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옵니다. 연나라는 현재 고구려보다 국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사옵니다.”
광개토호태왕은 젊은 혈기에 앞서 성격이 다소 급한 자신을 자중시켜 만용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치밀함을 하무지가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경탄했다.
“막리지의 높고 깊은 지략과 슬기에 짐은 고개 숙여 경의를 보내며 깊은 뜻을 가슴 속에 새길 것이오. 그러니 막리지께서는 언제나 짐의 곁에서 보좌해 고구려의 영광된 대업을 함께 이루도록 합시다. 막리지가 짐에게 가르침을 줄 때마다 천명으로 여기고 따르겠다고 맹세하겠소.”
그 말은 능력이 좋은 전략가 하무지를 얻게 된 행운을 잡은 태왕의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신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소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신명을 다해서 이루도록 하겠으나, 폐하께서는 너무 소신을 믿고 의지하지 마시옵소서.”
“아니오. 짐은 참으로 막리지에게서 감명을 받았소! 결코 자만과 안일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겠다고 약속하는 바요.”
하무지가 맑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모두루·연살타·우나굴 장군처럼 하늘이 내린 기라성 같은 양장(良將)들이 폐하 곁에 있음은 달과 별들이 태양 주위에 있는 것과 같사옵니다. 그러니 그들이 앞으로는 병법의 지혜와 무예를 더욱 갈고 닦아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줌과 동시에 그 인재들을 꼭 맞는 적재 적소에 기용하는 것이 폐하의 책무이며 도리인 줄 아셔야 하나이다.”
“명심해서 처리하리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더욱 빛을 내는 법이옵니다. 지금은 전쟁을 벌일 때가 아니오니 방어에 진력하면서 오랜 전투로 인해 지친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몸을 강건하게 만들도록 해 주셔야 하옵니다.”
『정복전쟁의 대지존 광개토호태왕』7.태왕의 공명, 하무지 ⑵
하무지가 자기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태왕의 독단에 의해 나포되다시피 하여 국내성 왕궁에 들어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린 하무지가 태왕과 자리를 마주했다.
하무지는 태왕에게 두루마리로 접은 서찰을 올리며 아뢰었다.
“폐하! 이것은 소신의 내력을 적은 글이오니 살펴보시고 결단을 내리셔도 늦지 않사옵니다.”
“흠, 읽어보리다.”
하무지가 내민 서찰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상명세서인 셈인데 내용인즉, 자신은 중국 동진(東晉)의 무관(武官)인 하겸(河謙)의 서자(庶子)였으며 하무지의 부친인 하겸은 예주자사(豫州刺史) 사현(謝玄)의 부관으로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에 참전해 전공(戰功)을 세운 바 있었다. 그러나 간신 왕공(王恭)의 모함으로 사현이 억울하게 역모의 누명을 쓰고 사형당할 때에 사현의 측근이었던 하겸 역시 함께 붙잡혀 사형당했으며, 그의 가족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그리하여 하겸의 네 아들 가운데 서자인 하무지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고구려 땅으로 망명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하무지는 자신이 태왕의 신하가 되는 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점은 거의 없으나 고구려의 중앙권력에 자리잡고 있는 기존의 토착 세력과 중신들 간의 보이지 않는 견제 상황을 감안할 때 군사(軍師) 정도의 직책으로는 자기가 생각하는 세상의 중심이 되는 대고구려를 완성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염려했다.
따라서 태왕과 하무지 두 사람의 야망이 하나가 되어 천하를 주름잡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방법의 미흡함 때문에 여러 생각 끝에 이 글월로써 본인의 의사를 전하게 되었으며, 이 같은 무례함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평범한 진리 때문에 비롯되었으니 사죄한다는 내용의 글이 씌여져 있었다.
다 읽은 태왕은 내색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엄숙한 표정으로 하무지에게 말했다.
“군사님이야말로 하늘이 짐에게 보내주신 동지이자 스승이라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었소. 이것은 우리 고구려가 중원을 넘어 서역까지 정복하라는 하늘의 계시임을 알겠소이다.”
태왕은 서찰을 고이 접어 탁상 위에 가지런히 놓은 뒤 말을 이었다.
“짐은 군사님을 막리지(莫離支)로 임명해 고구려의 병권을 총괄하게 하겠소이다. 물론 대신들과 장수들이 크게 반발하겠지만 짐은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누르고 군사님을 막리지로 모실 수 있게 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도록 할 것이오.”
“폐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짐은 하무지 선생과 함께 하여 동방의 빛이 될 것이며 백성들에게는 소금 같은 군주로 우뚝 서겠소!”
“소신 하무지는 신명을 바쳐 태왕 폐하를 보좌하겠나이다.”
“고맙소! 짐은 군사님을 믿소! 함께 좋은 세상을 열어 나갑시다.”
태왕은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연살타에게 엄숙한 얼굴로 명령했다.
“연살타 장군은 모두루 장군과 의논해 제일 좋은 길일을 택해 군사님의 막리지 임명식을 거행하는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시게.”
“예, 폐하! 명심해서 일을 진행토록 하겠나이다.”
태왕은 하무지에게 귀족들의 반발 정도는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생각하며 제압할 수 있음을 과시했다. 또한 고구려의 영광이 펼쳐질 수 있다면 지존으로서의 모든 기득권도 포기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앞으로의 정사를 펼치겠다고 맹세했다.
광개토호태왕은 목욕재계하여 심신을 깨끗이 한 뒤에 열성조(列聖朝)를 모시는 사당으로 가서 선대(先代) 태왕들의 위패 앞에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국조(國祖)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과 모든 열성조께 고구려의 열아홉번째 태왕인 소손 담덕이 고하나이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신 덕분에 우리 대고구려의 찬란한 영광을 맞이하고 역사에 길이남을 패업을 달성하기 위한 천하의 기재(奇才)를 얻었사옵니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대고구려로 다시 태어나 후세에 태양처럼 길이 빛날 대영광의 시대를 열고자 하오니 부디 열성조께서 보우하사 이 소손으로 하여금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소서!”
그렇게 고하고 일어난 태왕은 두 번 절하고 물러나왔다.
국내성 왕궁의 대전 입구와 성 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고조되고 있었다.
물론 태왕은 그 동안 하무지를 막리지로 발탁하기 위해 사전 작업을 했다. 5부족 사람이든 왕족이든 태왕인 자신을 보필해 야망의 뜻을 이루어줄 인재를 천거하되 하무지보다 지략이 뛰어난 자라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때문에 모든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리고 하무지를 막리지로 삼는 것에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하지만 그들은 만약 하무지가 정책을 수립하고 조정하는데 있어서 무리수가 보이면 막리지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막리지의 취임의식이 펼쳐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고구려의 역사에서 일개 신하의 벼슬길에 이처럼 화려하고 성대한 의식을 치르는 것은 태왕의 등극 때도 볼 수 없었다. 하무지가 들어갈 국내성 동문 입구부터 대궐까지의 길 양쪽에 무장한 태왕의 근위병들이 도열해 있었으며, 이십보 거리마다 많은 채색 깃발들이 세워져 있었다.
하무지가 동문 앞으로 들어서니 그 곳에서 대전 입구까지 붉은 주단이 깔려 있었으며, 태왕이 새로운 막리지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하무지가 황당해하며 말렸으나 듣지 않고 하무지에게 정성을 다해 큰절을 올렸다. 삼문과 중문을 거쳐 대전 입구까지 걸어갔는데 좌우에는 새 옷을 입고 단장을 곱게 한 궁녀들이 두 손을 배에 댄 자세로 시립하고 있었다.
대전 안으로 들어선 태왕이 용상(龍床)에 좌정하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짐에게 있어서 참으로 뜻깊은 날이오! 천하의 기재인 하무지 선생을 막리지로 모셨기 때문이오. 해서 대답해 주시기를 청하노니 무릇 천하를 평정하는 대제국의 군주가 되기 위해서 먼저 실행해야 할 바가 무엇이오?”
하무지가 즉시 읍하고는 말했다.
“지금 화북(華北)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 연나라와 남쪽의 백제·신라, 그리고 동부여와 거란 등에 첩자를 보내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지도자의 능력과 대신들의 충성도 그리고 그들의 병력의 높고 낮은 기세 등을 관찰하고 마지막으로 각국의 지리와 지형을 파악해서 지도를 그려 놓으면 고구려가 아무리 사방에 많은 적국을 두고 있다고 하여도 우리가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내치를 튼튼히 하면서 태학의 생도들을 늘리고 조의선인과 개마기사단의 전력을 증대하여 폐하의 명령이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강한 군대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나이다. 전쟁을 벌일 때는 군량만 확보되면 백성들에게서 걷는 세금을 감해 주고 한 가정에서 두 사람의 장정을 병사로 차출하지 마시옵소서.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을 유념하시면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농사지을 장정이 한 집안에 한 명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백성들이 흉년이 되면 먹어야 싸우는 병사들이 힘을 잃게 될 것이니, 풍년을 가꾸어야 태왕 폐하의 대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병사들도 힘을 내서 싸워 승리할 것이옵니다. 군주가 현명하면 백성들이 편안해져 잘 살 수 있으나, 군주가 무능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군주를 떠날 것이옵니다. 백성들이 화합하여 나라가 번성하거나 반대로 되는 것은 전적으로 군주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옵니다.”
“천재지변처럼 불가항력일 때도 군주의 능력 탓으로 치부할 수 있소이까?”
“천재지변은 자연적 현상에서 오는 것이니 전적으로 하늘의 뜻이라고 말함은 잘못된 것이옵니다.”
“그럼, 성군(聖君)은 어떤 자이고 악군(惡君)은 어떤 자인가요?”
“성군은 언제나 자기보다 백성을 생각하며 하늘의 변화를 주의깊게 관찰해서 지식을 쌓아 홍수가 나기 전에 방비하고 가뭄이 오기 전에 수로를 만들어서 가뭄에 대비하옵니다. 악군은 언제나 제 몸이 편한 것만 추구하고 주색에 젖어 백성들의 어두운 고통을 외면하는 자로 결국은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해 제왕의 지위를 백성들로부터 박탈당하기 마련이옵니다.”
“간신과 충신의 변별은 어떻게 판단하는 게 도리입니까?”
“충신이나 현신은 훌륭한 정책으로 백성의 안위와 왕실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나 간신은 간언으로 군주를 탕악에 물들게 하고 군주의 귀를 어지럽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자신들의 곡간에는 금은보화가 넘치며 대신일수록 뇌물을 바치려는 자들이 문전 성시를 이루는 집에 살고 있나이다.”
“지금까지 동방의 역사에 있었던 성군을 말한다면 어떤 제왕입니까?”
“옛날에 저 중원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요(堯) 임금이 있습니다. 그 분의 선조는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의 일곱번째 거련(居連) 환웅(桓雄)이었는데, 그 분은 누구보다 현명한 제왕이셨습니다. 겸손하고 청빈하여 백성들이 칭송했으나 모든 공로를 신하들에게 돌리셨고, 제왕이었으나 사치하지 않았으며 화려한 비단옷도 입지 않았고 귀한 물건에 애착을 두지 않았으며, 또한 미모의 여인을 봐도 치우치지 않았고 음탕함은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대궐도 담을 쌓고 치장하지 않았고 겉옷은 겨울엔 사슴가죽 옷, 여름엔 무명베로 만든 소박한 옷을 입고 식사 때 잡곡밥이 아니면 수라를 들지 않았으며 반찬도 콩이나 호박잎, 된장과 간장을 먹으며 언제나 백성들의 심정을 헤아리려고 애쓰셨다 하옵니다. 그리고 일이 생겼는데 관청이 처리를 못해 그 일을 백성이 처리하면 그 백성에게 충분한 돈을 주었으며 마음에 욕심을 두지 않으니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지는 무위의 정치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충성하고 법을 준수하는 관리는 벼슬을 높여 줬고, 부모에 효도하는 자는 선행을 포상해 줘 모든 이에게 본받도록 장려하니 사악한 자들은 자연히 없어졌습니다. 물론 그래도 법을 어기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가차없이 처벌해서 상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참으로 어진 성군이며 위대한 제왕이었군요.”
“헌데 그와 어깨를 나란히 견줄 만한 인물이 오늘날 한 사람 있사옵니다.”
“그게 누군가요?”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입니다.”
태왕도 후연(後燕) 성무제(成武帝)가 전연(前燕)의 왕자와 전진(前秦)의 장수 시절부터 쌓아온 공로와 덕망을 들어왔던 터라 하무지의 대답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짐도 모용수가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인품이 고결하다는 점을 누차 들어왔소. 개인적으로 독대해보고 싶은 인물이오.”
“그러나 모용수는 비록 요 임금과 비슷한 점이 많지만 다른 점도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그는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패왕(覇王)이라는 점이옵니다. 하지만 후사가 불안하다는 단점도 있사옵니다.”
“후사가 불안하다니요?”
“그의 넷째 아들 모용보(慕容寶)가 현재 연나라의 태자이옵니다. 그러나 모용보는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거만한 성격이라 나라의 관리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모용수는 현재 생존해 있는 아들 형제 가운데 가장 맏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용보를 태자로 삼았사옵니다. 그의 아우인 모용린(慕容麟)·모용농(慕容農) 등은 형이 어리석다는 이유로 태자로 인정하지 않사옵니다. 만약 모용수가 태자를 바꾸지 않고 죽는다면 연나라의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워질 것이옵니다.”
“참으로 막리지의 식견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소이다. 연나라의 정황을 언제 그토록 소상히 파악했단 말이오?”
“하지만 지금 고구려에게 중요한 것은 연나라와 싸워 이기려면 더 많은 지혜와 준비를 필요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옵니다. 연나라는 현재 고구려보다 국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사옵니다.”
광개토호태왕은 젊은 혈기에 앞서 성격이 다소 급한 자신을 자중시켜 만용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치밀함을 하무지가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경탄했다.
“막리지의 높고 깊은 지략과 슬기에 짐은 고개 숙여 경의를 보내며 깊은 뜻을 가슴 속에 새길 것이오. 그러니 막리지께서는 언제나 짐의 곁에서 보좌해 고구려의 영광된 대업을 함께 이루도록 합시다. 막리지가 짐에게 가르침을 줄 때마다 천명으로 여기고 따르겠다고 맹세하겠소.”
그 말은 능력이 좋은 전략가 하무지를 얻게 된 행운을 잡은 태왕의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신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소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신명을 다해서 이루도록 하겠으나, 폐하께서는 너무 소신을 믿고 의지하지 마시옵소서.”
“아니오. 짐은 참으로 막리지에게서 감명을 받았소! 결코 자만과 안일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겠다고 약속하는 바요.”
하무지가 맑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모두루·연살타·우나굴 장군처럼 하늘이 내린 기라성 같은 양장(良將)들이 폐하 곁에 있음은 달과 별들이 태양 주위에 있는 것과 같사옵니다. 그러니 그들이 앞으로는 병법의 지혜와 무예를 더욱 갈고 닦아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줌과 동시에 그 인재들을 꼭 맞는 적재 적소에 기용하는 것이 폐하의 책무이며 도리인 줄 아셔야 하나이다.”
“명심해서 처리하리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더욱 빛을 내는 법이옵니다. 지금은 전쟁을 벌일 때가 아니오니 방어에 진력하면서 오랜 전투로 인해 지친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몸을 강건하게 만들도록 해 주셔야 하옵니다.”
“그리하겠소. 더욱 확실하게 대업을 쟁취하기 위해 모두들 휴식을 취하기로 합시다.”
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무지의 조언에 가슴 깊이 경청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