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전쟁의 대지존 광개토호태왕』8. 거란족 정벌 ⑴

개마기사단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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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리의 건장한 무사들이 말을 타고 초가을 만주의 가파른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군마(軍馬)와 한몸이라도 된 양 험한 길도 날듯이 달리는 그들의 기마술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감탄을 토해낼 만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선두에서 달리는 황금 갑주를 입은 청년과 철릭 차림의 중년 사내였다. 두 사람은 마치 비호(飛虎)가 바람을 밟고 나는 듯이 달리고 있었다. 기세에 놀란 산짐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거대한 성벽이 그들 앞을 가로막아 섰다. 황금 갑주를 입은 청년 무사와 철릭을 입은 사내는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어 세웠다. 철릭의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폐하, 신성(新城)에 도착한 듯 싶습니다.”

 

이때 성벽의 파수막에서 주위를 살피던 파수병이 이들을 발견하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어디서 오는 사람들이오?”

 

무리 중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더니 금패(金牌)를 들어 보였다. 그것을 본 파수병은 크게 놀라며 황급히 수문장에게 달려갔다.

 

파수병의 보고를 받은 수문장은 얼굴색이 변하며 병사들에게 성문을 열도록 한 후 병사 하나를 급히 성주에게 보냈다.

 

문이 열리자 대열의 선두에 섰던 황금 갑주의 청년 무사가 위엄을 드러내며 말을 몰아 안으로 들어섰다.

 

수문장을 비롯한 병사들이 일제히 엎드렸다.

 

“폐하의 홍복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좌중을 압도하는 기백을 발산하는 이 청년 무사는 바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었다. 또 태왕의 곁에서 말을 모는 중년 사내는 막리지(莫離支) 하무지(河茂祉)였다.

 

광개토호태왕이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을 때 여러 명의 장수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들은 태왕 앞에 이르자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무릎을 꿇었다. 한 백발 노장이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태왕에게 아뢰었다.

 

“소신 신성의 욕살(褥薩) 고루가(高樓可), 일월지자(日月之子) 하백지손(河白之孫)이신 태왕 폐하를 뵙습니다.”

 

고루가는 벅찬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있었다. 태왕이 직접 신성(新城)을 찾아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영광이었다. 고루가는 태왕을 모시고 성주부(城主府)로 향했다.

 

하무지를 비롯해 여석개(呂夕介)·연살타(淵薩陀) 등을 대동하고 고루가를 따라 성청(城廳)으로 들어간 태왕은 집무실의 상좌에 좌정하고 나서 섬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고루가를 보았다.

 

“짐이 들으니 근래 들어 거란족(契丹族)이 요하를 건너 우리 영토까지 들어와 무고한 인명을 해치고 약탈을 자행한다는데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고루가는 태왕의 질책에 모골이 송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두가 자신이 백성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토호진수(吐護眞水) 유역에서 일어난 거란족은 선비족(鮮卑族)이 남하한 뒤로 초원지대를 장악하고 힘을 키워왔사옵니다. 근래에는 강성해진 세력을 믿고 요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마을을 약탈하고 백성을 끌고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작년에는 이 근쳐까지 쳐들어와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하무지가 고루가의 대답을 듣고 반박하였다.

 

“저들이 강성하다고는 하나 우리 군사의 용맹에 비할 수 있겠소? 저들이 쳐들어왔다면 당연히 나가서 응징했어야 하지 않소? 만일 그들의 횡포를 그대로 둔다면 머지않아 이곳 신성까지 넘보려 할 것이오.”

 

“이곳 신성의 병력만 갖고는 저들과 전투를 벌일 수가 없었습니다. 도성에서 지원군을 파견해야만 요하를 건너 저들의 본거지를 소탕할 수 있사옵니다.”

 

태왕은 하무지의 말을 받는 고루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고루가는 노쇠하여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고 있었다. 태왕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하무지에게 물었다.

 

“연나라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연나라는 새롭게 일어난 위나라와의 싸움으로 외부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사옵니다.”

 

후연은 지금의 하북성 일대를 장악하고 동진의 세력을 축출한 뒤 산동반도 거의 대부분을 점령했는데, 탁발규(拓跋珪)가 세운 북위(北魏)가 급격히 세력을 키워 변경을 위협하면서 위기가 닥쳐왔다. 후연(後燕) 성무제(成武帝) 모용수(慕容垂)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394년 태자 모용보(慕容寶)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북위를 치게 했다. 그러나 모용보는 참합피전투(參合陂戰鬪)에서 탁발규의 참모인 서칙(徐則)의 전략에 말려들어 10만 대군의 절반 병력이 몰살당하는 대패를 당하게 된다. 모용수는 비록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지만 아들의 패전을 보복하기 위해 1년 뒤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친정(親征)에 나섰다. 탁발규의 북위 군대는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모용수의 후연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했고, 결국 북위의 수도 평성마저 후연군에 의해 함락되는 불운을 겪는다. 하지만 모용수의 병세가 갑자기 위중해져서 후연군은 북위 정벌을 끝마치지 못한 채 철군해야 했고, 이 틈을 타서 탁발규는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여 빼앗겼던 영토를 거의 되찾게 되었다. 이때부터 강력한 군사강국이었던 후연은 차츰 국력이 쇠약해져갔다.

 

“그렇다면 거란을 칠 때 연나라에 신경 쓸 필요는 없겠군요.”

 

“지금이야말로 거란을 응징할 때입니다.”

 

태왕은 때가 무르익었음을 알았다. 북방의 숙적들에게 고구려의 진면목을 보여줄 때였다.

 

집무실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한 장수가 들어왔다.

 

“소장 기총(旗總) 고타하(高他荷), 폐하를 뵈옵니다.”

 

고타하가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서자 고루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네 이놈, 일개 기총 따위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처럼 무례하게 구느냐?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고루가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고타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자약(泰然自若)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고타하(高他荷)의 태도에서 대장부의 기상을 느꼈다. 임금 앞에서 이처럼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자는 흔치 않았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왔느냐?”

 

고타하는 공손하게 아뢰었다.

 

“소장은 지금 요하 근처에서 약탈을 자행하던 거란족을 소탕하고 1백여명을 생포해 오는 길이옵니다. 소장을 이번 거란족 정벌에 데려가 주옵소서.”

 

태왕은 짐짓 딴전을 피우며 고타하를 떠보았다.

 

“짐은 그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아무래도 자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구나. 짐은 단지 국경을 순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자 고타하는 안광(眼光)을 번뜩이며 말했다.

 

“거란족의 침입이 자심한 이때에 폐하께서 친히 이곳까지 왕림하신 이유가 어찌 그뿐이겠사옵니까? 소장이 아무리 어리석어도 그 정도는 능히 짐작할 수 있사옵니다.”

 

고타하의 얼굴에는 절실함이 묻어나 있었다.

 

태왕은 곁에 앉아있던 하무지를 돌아보았다. 하무지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태왕은 다시 시선을 고타하에게 돌렸다.

 

“너는 나라와 짐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겠느냐?”

 

“소장의 목숨은 폐하의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거라.”

 

고타하는 큰절을 올린 후 물러났다.

 

고루가는 황송하여 얼굴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폐하께 무례를 범한 저 자를 당장 처형하겠사옵니다.”

 

“나라의 동량을 베려 하느냐?”

 

태왕이 갑자기 정색을 하자 고루가는 머쓱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아이를 짐의 휘하에 거두겠다.”

 

고루가가 물러가자 태왕은 하무지에게 물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하무지는 방긋 웃었다.

 

“저도 폐하께서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쓸만한 재목입니다.”

 

태왕을 알현하고 나온 고타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지방 성의 말단 장수가 겁도 없이 태왕의 안전에 뛰어들었을 때는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고타하가 목숨을 걸고 거란 정벌에 참여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 거란족이 국경을 넘어 침입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신성의 성주인 고루가는 아장 고타하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고타하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국경 마을에 이르러 보니 거란족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마을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고타하가 마을을 둘러보니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민가는 모두 불타버려 간신히 뼈대만 남아 있었고 백성들의 주검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등에 칼을 맞고 엎어져 있는 청년, 옷이 모두 찢긴 채 목이 졸려 숨을 거둔 아낙, 창에 꿰인 채 죽어있는 아이의 모습이 고타하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고타하는 참혹한 살상의 현장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거란족을 추격해서 천인공노할 만행에 대한 대가를 치러주고 싶었다. 그런데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으려면 성주의 허락이 필요했다. 고타하는 성주에게 전령을 보내 월경(越境)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성주인 고루가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껏 거란족과의 충돌을 애써 피해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고타하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달이 떠오를 무렵 신성으로 갔던 전령이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들고 돌아왔다. 고타하는 당장이라도 거란족을 뒤쫓고 싶었지만 군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 칼이 다시 번뜩이는 날, 거란족의 피로 대지를 적시리라!”

 

달빛을 머금은 칼날이 부르르 떨었다.

 

며칠 후 철기군주(鐵騎軍主) 모두루(牟頭婁)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신성에 당도했다. 주력이라 할 수 있는 개마기사단(鎧馬騎士團)을 필두로 경기병과 궁수대, 도부수, 그리고 보병 등의 순서대로 행군했고, 뒤에는 철갑옷을 실은 수레가 따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맨 앞에 선 개마기사단이었다. 그들이 지나가자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찬탄이 터져 나왔다.

 

모두루는 광개토호태왕을 알현하고 출정할 채비가 끝났음을 보고했다. 태왕은 흡족한 얼굴로 모두루의 노고를 치하했다.

 

신성욕살 고루가가 다가와 아뢰었다.

 

“어제 잡혀온 거란 장수를 심문한 결과 그들의 대칸[大汗]인 소빈술거(昭斌術渠)가 지금 염수(鹽水) 근처에 있는 행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사옵니다.”

 

태왕은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거란족은 대칸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이 결속되어 있소. 대칸인 소빈술거만 사로잡는다면 힘들이지 않고 저들의 세력을 와해시킬 수 있을 것이오.”

 

하무지가 태왕에게 아뢰었다.

 

“폐하, 거란족의 지도자들 가운데 소빈술거보다 더욱 주의해야 할 자가 있사옵니다.”

 

“그 자가 누구요?”

 

“대칸의 이복 형인 좌현왕(左賢王) 소빈출거(昭斌出渠)이옵니다. 지략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따른다고 하옵니다. 서자(庶子)이기에 대칸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자이옵니다.”

 

신성욕살 고루가는 막리지 하무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도성의 대궐에서 책상놀음만 하고 있을 줄 알았던 대신이 지방의 무관인 자신보다 거란족에 대한 정보력이 더 넓다는 것은 분명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들 형제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이로 보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군왕이 뛰어난 신하를 두려워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태왕은 엷은 미소를 띠었다. 잘 하면 힘들이지 않고 거란족을 복속시킬 수 있을 듯했다.

 

신성을 떠난 고구려의 중앙군은 요하를 건너 서쪽으로 나아가 손성자성(孫城子城)에 이르렀다. 선봉에 선 모두루는 척후병들을 보내어 거란족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고구려군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모습을 감춘 후였다.

 

손성자성은 거란족의 약탈로 인해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부서진 벽돌과 깨진 토기, 부러진 농기구들 사이로 스산한 바람만이 흙먼지를 날릴 뿐이었다.

 

성에 도착한 모두루는 성주부 건물을 임시로 수리하여 태왕이 머물 거처를 마련하고, 군사들에게 각기 빈집에 자리 잡고 식사 준비를 하도록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