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전쟁의 대지존 광개토호태왕』8. 거란족 정벌 ⑵

개마기사단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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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에 걸쳐 힘든 행군이 계속되었다. 낮은 산 하나 없는 드넓은 초원을 달리다 보니 산수(山水)에 익숙한 고구려 군사들은 곧 싫증을 느꼈다. 듬성듬성 나타나는 빈약한 수풀과 요하의 습기를 머금은 질척한 땅은 수려하고 쾌적한 숲 속을 마음놓고 누비고 다니던 고구려인의 기질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끝을 알 수 없는 지평선은 그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자칫 군사들이 의욕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용맹스러운 군사들에게는 목숨을 건 혈투보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더욱 견디기 어려운 법이었다.

 

광개토호태왕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군사들을 독려하여 행군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선두에서 들뜬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산이 보인다!”

 

고구려 군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얼마 후 그들의 눈앞에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산이 자태를 드러냈다. 수십개의 봉우리가 수려함을 뽐내며 어우러진 모습이 신선들이 산다는 금강산을 그대로 옮긴 듯 신령스럽게 보였다.

 

막리지(莫離支) 하무지(河茂祉)는 행렬의 선두에 섰던 철기군주(鐵騎軍主) 모두루(牟頭婁)를 불러 산 속에 혹시 복병이 없는지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뒤에 모두루가 태왕과 하무지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놀랍게도 산 아래 제법 큰 규모의 토성(土城)이 있사옵니다. 산사람에게 물어보니 무려성이라고 하는데, 한 무리의 거란군이 주둔하고 있다 하옵니다. 유목민이 성을 쌓고 산다니 기이한 일입니다.”

 

태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란족들이 유목민이라고 하여 모두 사냥이나 약탈만 하며 근거지를 자주 이동하는 게 아니오. 일부 부족은 농사를 지으며 목축도 하오. 아마 이 일대는 땅이 기름져서 거란의 별부(別部)가 머물며 성을 쌓고 장기간 주둔했을 것이오.”

 

하무지가 입을 열었다.

 

“자세히 보니 이곳은 거란인의 본거지인 송막(松漠)으로 가는 입구인 듯합니다. 경계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일단 적은 수의 군사를 보내어 적군의 반응을 탐색하도록 해서 병력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태왕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말객(末客) 저홍(猪洪)에게 개마기사단(鎧馬騎士團) 소속 병사 5백명을 거느리고 무려성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오도록 했다. 저홍이 기창(旗槍)을 높이 들고 뛰어나가자, 철린을 번쩍이는 기마병들이 날렵하게 말을 몰아 그의 뒤를 따랐다.

 

무려성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성 안의 파수병들이 북을 두드려서 고구려군의 침입을 알리자 성벽 꼭대기에 위치한 봉화대에서 불길이 올랐다.

 

저홍은 성 안의 거란족 군사들을 위협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성 주위를 빠른 속도로 돌았다. 무려성의 거란족 군사들은 난생 처음 보는 철갑기병의 기세에 겁을 먹고 감히 나서지 못했다.

 

무언의 시위가 열기를 더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성 위에서 화살 하나가 날더니 저홍의 가슴 부분에 맞고 튕겨서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저홍이 성벽 위를 쳐다보니 흉갑(胸甲)을 두르고 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젊은 장수가 활을 들고 서 있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고구려 무사의 불문율이었으므로 저홍은 안장(鞍裝)에 걸어둔 막강궁(莫强弓)을 잡아들고 화살을 매겨 성벽 위로 날렸다. 저홍의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활을 쏘았던 거란 장수의 목을 궤뚫었다. 장수가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거란족 군사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단 한발의 화살로 거란 군사들의 기세를 꺾어놓은 저홍은 병력을 돌려 유유히 본대로 귀환했다.

 

저홍이 쏜 화살을 맞고 즉사한 장수는 바로 무려성주 야율참(耶律參)의 아들 야율사명(耶律私銘)이었다. 성주인 야율참은 성벽 위에서 옮겨져 온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혈기왕성했던 자식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야율참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척후병으로부터 고구려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전갈이 왔다. 야율참은 당장이라도 성문을 열고 나가서 아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3천에 불과한 무려성의 병력으로는 고구려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기를 쓰고 저항해봤자 한나절을 버티기 어려웠다.

 

한참동안 고민을 거듭한 야율참은 초췌한 얼굴로 부하들에게 고구려군에 항복하겠다고 선언했다. 부하들은 찬반(贊反)으로 나뉘었다.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성을 포기한단 말입니까? 이는 야율사명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야율참의 부하 장수인 소극천(蕭克千)이 고함치듯 말했다.

 

“성은 사수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고구려군이 강병(强兵)이라 해도 죽을 각오로 성을 지킨다면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부하 장수인 야율병경(耶律秉景)은 이에 반대했다.

 

“소장이 듣기로 고구려군 가운데에는 개마기사단(鎧馬騎士團)이라는 초정예 병사들이 있어 당할 상대가 없을 만큼 막강하다고 합니다. 어제 우리의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 병사들도 화살조차 뚫지 못하는 철갑을 상대해서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공성전(攻城戰)에 있어서도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이들이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펼치고 있을 때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들어와 고했다.

 

“고구려의 대군이 성으로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야율참과 그의 부하 장수들은 기겁을 해서 성 위로 뛰어올라갔다. 산을 타고 넘어오는 고구려군의 행렬이 용처럼 길게 꿈틀대고 있었다.

 

야율참은 이처럼 많은 고구려 군사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할 말을 잃은 것은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에 야율병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십시오. 저런 대군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무모합니다. 우리가 소빈술거(昭斌術渠)에게 복속하기는 했지만 그를 위해 죽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야율참의 부족은 오랫동안 소빈술거의 부족과 패권을 다투었는데 근래에 와서 소빈술거의 힘이 강성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빈술거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고 싸울 충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차라리 강한 힘을 가진 고구려에 복속하여 부족을 보존하는 편이 훨씬 현명했다.

 

야율참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이러한 생각이었으므로 앞장서서 항복을 반대하던 소극천조차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야율참은 마침내 성벽 위에 항복을 뜻하는 백기를 올렸다.

 

거란군의 방비가 대단치 않다는 저홍의 보고를 받고 무려성으로 진군하던 모두루는 성벽 위에서 휘날리는 흰색 깃발을 보았다. 모두루는 진군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곧 성문이 열리더니 거란의 장수 하나가 백기를 펄럭이며 고구려군의 진영으로 달려왔다.

 

모두루는 거란의 사신을 광개토호태왕 앞으로 데리고 갔다. 사신으로 온 야율병경은 태왕 앞에 엎드려 말했다.

 

“소장은 무려성주 야율참의 부장 야율병경이라 하옵니다. 저희 성주는 평소 폐하의 명성을 듣고 받들어 모시기를 소원해 왔사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친히 궁벽진 이곳까지 왕림하셨으니 어찌 기쁘다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소장은 성주의 명에 따라 성문을 열고 폐하를 영접하겠다는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부디 거두어주소서.”

 

태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무려성주의 충정이 이처럼 지극한데, 짐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태왕은 야율참에게 사자(使者)의 벼슬과 함께 무려성주로 삼는다는 조칙을 내렸다. 야율병경은 태왕의 관대한 조치에 감격하여 연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야율병경은 성으로 돌아가 야율참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야율참은 태왕의 호방함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성문을 열고 나아가 기쁜 마음으로 태왕을 영접했다.

 

이리하여 태왕은 힘들이지 않고 무려성을 얻었다.

 

야율참은 먼 길을 달려온 태왕과 고구려의 장수들을 위해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갓 잡은 소와 돼지를 통째로 굽고 오래도록 땅 속에서 숙성한 술을 내어 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장수와 군사가 하나 되고, 고구려인과 거란인이 서로 어울려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비파(毘琶)와 뿔나팔, 피리와 같은 관악기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경쾌한 음악에 맞워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 서로 창검을 겨누고 대치했는가 싶게 정겨웠다.

 

광개토호태왕은 이들을 보면서 부족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태왕은 하무지와 함께 휘영청 떠있는 달을 바라보며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무려성을 떠난 고구려군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길을 따라 자작나무, 가래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고, 밤나무 혹은 도토리나 머루넝쿨이 병사들의 군침을 돌게 했다.

 

계곡에 이르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장수들과 상의하여 병사들에게 휴식을 허락하고 군마(軍馬)에서 내렸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만 듣고 있어도 그동안 평야를 달리면서 느꼈던 갈증이 송두리째 씻겨내려가는 듯했다. 바위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계곡물을 보고 있자니 도성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광개토호태왕이 푸른 숲의 풍요로움을 즐기고 있을 때, 뙤약볕 아래서 오랜 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은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계곡물로 묵은 흙먼지를 씻어낸 후, 시원한 나무그늘로 들어가 늘어져라 잠을 잤다.

 

기력이 회복된 병사들은 사냥을 하거나 밤이나 도토리같은 견과류를 따서 맛있는 간식거리를 장만했다. 고구려인들에게 산은 풍요와 안식을 제공해주는 공간이었다.

 

다음날 충분히 휴식을 취한 고구려군은 행군을 계속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은 쉽사리 끝을 보이지 않았다. 각양각색의 산봉우리가 나타나 한껏 자태를 뽐내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했다.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고구려군 병사들은 이 산을 풍요로운 산이란 뜻으로 부산(富山)이라 불렀다. 그들은 언제까지라도 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었다.

 

부산을 넘어 행군하던 고구려군은 다른 산과 맞닥뜨렸다. 그 산은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그리 험준하지 않았다. 원만한 경사의 산길을 따라 산중턱에 오르니 드넓은 벌판이 나타났다. 군사들은 행군하기 편한 길에 접어들자 마음이 풀어졌다.

 

고구려군이 벌판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들더니 차가운 가을비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빗물이 산줄기를 타고 벌판으로 흘러내렸다.

 

빗물을 막아줄 나무가 없어 벌판은 순식간에 진창길로 변했다. 수레바퀴가 진창에 빠지고 말과 군사들은 진흙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군사들은 악전고투를 거듭하면서 행군의 속도가 차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까지 어두워졌다.

 

어둠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준다. 고구려의 군사들처럼 용맹스러운 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사들은 악몽 속에서 허우적대야만 했다.

 

고구려군 병사들은 진창길을 벗어나기 위해 애썼는데 그것은 적군의 최정예 부대를 맞아 싸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주변을 밝히던 횃불은 쏟아지는 비에 젖어 꺼졌고, 진흙탕에 처박힌 수레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레에 줄을 매달이 끌어당기던 말과 소마저 발이 빠져 꼼짝하지 못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흙탕물까지 뒤집어 쓴 병사들은 눈에 흰자위만 희번덕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금방 무덤 속에서 튀어나온 시체와 같은 몰골이었다.

 

지옥같은 밤은 지나고 새벽이 찾아왔다. 온 세상을 삼킬듯이 내리던 비가 그치고 여명이 상처입은 대지를 어루만졌다. 간신히 산을 넘은 고구려군 병사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태왕은 갑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천재지변 아래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가 아닌가? 태왕은 지난밤에 겪은 일을 자만에 빠진 자신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광개토호태왕은 군사들이 힘들게 넘어선 산을 부산(負山)이라 명명했다. 어떤 길을 걷든 자신이 짊어져야 할 고통의 몫이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길이 끝날 때까지는 고통의 짐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고구려군의 앞길에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을 테지만 겸허한 자세로 헤쳐나간다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태왕은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수풀은 싱싱한 푸른빛을 뽐내고 있었다. 태왕은 온몸에 새로운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비가 수풀을 더욱 푸르게 만들듯이 고난은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부산을 벗어나자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태왕은 힘껏 말을 몰아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선두에 선 깃발이 바람을 등에 업고 마음껏 펄럭이자 초원의 풀도 온몸을 흔들며 맞이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