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 레터

피오니201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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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긴 문장은 무려 522개의 단어로 이루어졌을 정도로 길고 복잡한 문장으로 구성된, 그래서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 귀에 익지만, 정작 읽어본 이는 거의 없는 작품이 있다. 1913년에 출간되어 프랑스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질 들뢰즈는 이 작품을 '기호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평했다. 바로 마르셀 푸르스트(Marcel Proust)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는 완역으로는 김창석 번역이 유일하며 총 12권으로 출간되었다. 그나마 가장 많이 읽힌 것은 1부에 해당하는 「스완네 집 쪽으로」. 대개 많은 이들이 1부에 해당하는 앞의 두권을 읽고난 후 더 읽기를 포기한다고 한다. 물론 난 이 작품의 한 글자도 본 적이 없다. 근데 왜 이 작품 이야기를 꺼내냐고..? 그건 이 작품이 이 영화 「러브 레터」 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기 때문.

 

이 둘의 공통점을 논하기 전에 「스완네 집 쪽으로」 의 작품내용을 대강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느 날 주인공은 마들렌느 과자를 차에 적셔먹다가 문득 아득히 잊혀졌던 어린 시적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른바 '뜻하지 않은 기억의 재생'. 되살아난 유년 시절의 기억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과거를 재구성해가는 긴 '의식의 흐름'을 만든다. 장황하고 세밀한 묘사를 거친 후 마침내 스스로의 진정한 존재 이유가 문학에 있음을 깨달은 주인공은 문학에 삶을 바치기로 결심,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며 작품은 끝을 맺는다. 즉 주인공이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데서 작가는 작품을 마무리하는 형식. 여기서 일종의 보이지않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진다.

 

[영화] 러브 레터

 

영화 「러브 레터」 에서 여자 이츠키(이츠키가 남·여 두명이므로 촌스럽지만, 앞에 성별을 붙여둔다)가 불현듯 잊고지내던 과거를 떠올리게되는 계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지독한 독감으로 인한 고열 속에서 보게되는 환각. 사실 이 과정이 우연히 히로코가 보낸 편지를 읽게되는 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직접적인 계기다. 마들렌느를 차에 담가 먹는 것보다는 덜 낭만적일지 몰라도 개연성과 임펙트는 오히려 더 강하다는 느낌도 든다.

 

[영화] 러브 레터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주인공은 '의식의 흐름'과 '내면의 목소리'라는 두 가지 과정을 통해 잊고지내던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해간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 여자 이츠키가 지난 과거를 떠올려가는 과정 역시 히로코의 다소 집요해보이는 질문이 담긴 편지와 그 질문에 해답을 애써 떠올려가는 여자 이즈키의 답장을 통해 자츰 선명해져간다. 빗대자면, 히로코의 질문은 '내면의 목소리'에 여자 이츠키의 해답은 '의식의 흐름'에 각각 빗대어 볼 수 있다.

 

[영화] 러브 레터

 

여자 이츠키가 맨 처음 떠올린 기억은 '후지이 이츠키'라는 같은 이름 때문에 학교에서 놀림꺼리가 되었던,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사소한 기억이다. 둘은 동급생 아이들의 장난으로 인해 함께 주번을 서기도 하고, 시험지가 서로 뒤바뀌기도 한다. 나중에 둘은 역시 아이들의 장난으로 함께 도서위원에 선출된다. 그러면서 남자 이츠키에게는 묘한 취미가 생겼는데, 그것은 아무도 빌려보지 않은 책들만을 골라 그 뒤 대출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는 것.

 

[영화] 러브 레터

 

히로코의 자극(?)으로 중학생 시절의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의 과거 행동에 흥미가 생긴다. 과거를 되짚어갈수록 그와의 인연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여자 이츠키. 그리고 그녀는 그 많은 추억에도 불구 그에 대한 기억이 희안할정도로 희미해진 이유가 바로 그 시기에 벌어진 아버지의 죽음과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덮는 과정에서 그와의 추억마처 함께 묻혀졌던 것.

 

[영화] 러브 레터

 

여자 이츠키는 후배들이 보여준 책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뒤 도서카드에 유일하게 적혀있는 후지이 이츠키의 이름을 본다. 그리고 돌려본 뒷면.. 자신의 중학교 시절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남자 이츠키가 남들이 보지 않는 책들을 찾아 카드에 적어놓은 이름은 남자 이츠키 자신의 이름이었을까.. 아니면 여자 이츠키의 이름이었을까..? 그는 왜 아무도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만을 골라 그 이름을 적은 것일까..?  이러한 일련의 연관성과 대비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셀 푸르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는 단지 소재로서만이 아니라, 이 영화 스토리 전반의 줄기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을 듯. 물론 작품을 한 글자도 읽어보지 않은 순진하고 무책임한 내 개인적 추측이다.

 

[영화] 러브 레터

 

이 영화는 너무도 닮은 두 여인(당연하다. 원래  나카야마 미호 혼자서 1인 2역을 한 거니까..)을 통해 사랑을 떠나보내는 애도의 과정과 새롭게 사랑을 깨달아가는 각성의 과정을 각각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히로코가 여자 이츠키보다 더 약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남자 이츠키가 자신에게 끌렸던 이유를 여자 이츠키에서 찾았고, 이를 통해 스스로에게 다가온 새로운 사랑으로부터 생길 수 있는 마음의 짐을 일부나마 덜어낼 수 있었으니까.

 

눈 쌓인 오타루와 고베의 멋진 설경과 이와이 슈운지 특유의 감성적 연출, 헨드핼드 카메라의 강한 몰입력(이런 말이 있나..? 흡입력이라기엔 좀 다른 의미라 쓴 건데. 어째 어색함)이 승수효과를 발휘, 90년대를 대표할만한 영화가 된 「러브 레터」..  내겐 어쩐지 눈발 날리는 겨울마다 한 번쯤 꼭 봐주고 넘어가야 할 영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