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레스토랑으로 들어선 수정은 럭셔리한 분위기에 어색하기만 하다. 평소에 자주 오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 이 곳에서 저녁 식사 한 끼 먹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준하와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이런 좋은 장소에 올 일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오늘 오후 3시에 신문사 정치부로 배달이 하나 왔는데 열어 보니 준하가 보낸 옷, 신발, 가방이 들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모두 다 명품인 듯 보였다. 바로 준하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지만 저녁 먹자는 말 뿐이다. 준하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안 이상 이런 악순환은 끊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약속에 응했다. 오랜 시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가족처럼 지낸 준하와 어색한 분위기를 다시 예전처럼 바꾸고 싶었고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전달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수정이 마음의 결심을 하고 퇴근하자마자 이 곳으로 온 것이다. 준하가 보낸 옷, 신발, 가방은 쇼핑백 안에 그대로 가지고 온 채.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예약자 이름을 말하니 직원이 안내를 돕는다. 안내를 받아 들어가 도착한 곳은 룸 형식으로 된 장소였다. 직원이 노크를 했고 이내 문이 열리고 수정이 룸 안으로 들어서자 준하가 일어나 수정을 맞이한다.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그 룸 안에는 준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눈앞에 있어 당황하는 수정. 장 회장과 미선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네 사람이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자 준하가 수정에게 다가와 수정을 자신의 부모님께 인사를 시킨다.
굳은 표정으로 일관하던 장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후에 일어서 밖으로 나가버린다.
“ 여.. 여보~! 준하야.. 나중에 이야기 하자. ”
미선마저 자리를 떠나자 룸 안에는 준하와 수정만이 남아 있다. 잠시 동안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고 코스 요리가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한다.
“ 맛있겠다. 배고팠는데.. 잘 먹을게.. 오빠. ”
애써 웃으며 음식을 먹는 수정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평소 활발하고 말을 많이 하던 수정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준하를 보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고 먹기만 한다. 입안에 음식이 있는데도 손은 바쁘게 움직이며 입 안으로 음식을 꾸역꾸역 넣는다. 물도 마시지 않고 억지로 먹고 있는 수정을 바라보며 준하가 손목을 잡는다.
“ 수정아! ”
잡은 손목의 손을 떼어 내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수정을 보며 이번에는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간다.
“ 수정아! 나 봐... ”
그 말에 준하를 똑바로 쳐다본다.
“ 화..났니.. ?”
“ 우리가 ...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 우리가 언제부터 결혼 할 사람이었어? ”
“ 난 분명히 말했잖아. 너랑 결혼하겠다고. 널 여자로 본다고! ”
“ 나도! 분명히 말했잖아! 나한테 오빤 남자 아니라고! 그냥 오빠일 뿐 이라고”
“ 아니! 네가 착각하는 거야. 네 감정을 잘 모르는 거야. 앞으로 내가 알려줄게. 네 마음이 어떤 건지. ”
“ 준하 오빠.. 왜 이래..? 요즘.. 내가 아는 오빠가 아닌 것 같아서 이상해.. 그러지마. 난.. 사랑하는 사람 있어. 그 사람 오빠도 알아.. 그 사람이 누구 ”
“ 말하지마..... 단 한마디도 하지마.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야긴 꺼내지 마... 오늘은 못 데려다주겠다. 나중에 연락할게. ”
화난 표정으로 룸을 나가버리는 준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정은 눈물이 나온다. 이 눈물의 이유를 알 수 없다. 무엇이 슬프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좀 전에 룸안에서 대한호텔 회장인 장기준회장과 와이프인 민선과 마주쳤을 때는 순간 꿈인가 하고 착각 할 정도였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대한호텔 장기준 회장의 아들이 준하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런 대단한 집안에 아들이었다는 준하가 다른 세상 사람인 것 같다. 모두가 떠나버린 그 장소에서 수정은 멍한 표정으로 한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 온 기준은 서재 책상에 앉아 양주를 마시고 있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오래된 시간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누군가를 떠올린다. 어느 바닷가에서 긴 머리를 휘날리며 걷는 여자의 모습을. 걸으면서도 뒤에 따라고 오고 있는 자신을 보느라 뒤를 돌아보며 해맑게 웃는 여자의 모습을. 그 여자를 머릿속에 떠올리자 기준의 눈이 심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눈에 눈물에 맺혀 눈가가 촉촉해진다. 다시 눈을 뜬 기준은 오늘 아들 준하를 만나러 나간 자리에서 소연과 닮은 여자를 만났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오래 전에 세상을 등지고 떠나 버린 소연이 살아 돌아온 거라고 착각에 빠진 정도로 닮은 외모의 한 여자를 만났다. 당황스럽고 믿겨지지 않는 상황에 적응할 수 없어 도망가듯 그 자리를 빠져 나온다. 수정을 보고 놀란 사람은 기준 뿐만이 아니었다. 미선 역시 죽은 소연과 너무도 닮아서 심장 박동수가 커졌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 불을 키지도 않은 채 미선은 불안감이 몰려온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숨이 거칠어진다.
경찰서로 들어오는 수정은 제일 먼저 주환의 책상 먼저 살핀다. 그런 수정의 모습이 이제는 모두가 익숙하다. 주환이 자리에 없자 정수를 쳐다보며 표정으로 묻자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 이제 곧 올 거에요. ”
“ 아.. 네. 커피 드실래요? 제가 커피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거든요. ”
“ 타주시면 저희야 좋죠~ ”
인원수를 세며 종이컵을 꺼내고 쟁반 위에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탄다. 커피를 열심히 타고 있을 때 일을 마치고 주환이 돌아온다. 커피 타느라 주환이 온 것도 모르고 있는 수정을 위해 정수가 알려준다.
“ 수정씨! 정팀장님 오셨어요. ”
“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
쟁반을 들고 있던 두 손 중에 한 손으로 쟁반을 받치고 주환에게 인사하기 위해 한 손을 빼고 흔들다가 균형을 잃고 쟁반이 엎어지면서 뜨거운 커피물이 옆을 지나던 여직원과 수정에게 엎질러진다.
“ 앗 뜨거워! ”
“ 아..! ”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고 놀란 주환이 뛰어 온다.
“ 죄송해요. 어떻게.. 괜찮아요? ”
수정이 여직원에 옷을 손으로 닦아주며 사과를 하고 있을 때 주환이 수정의 손목을 낚아챈다. 화들짝 놀란 수정이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본다.
“ 따라와요! ”
주환에게 이끌려 간 곳은 여자 화장실이었다. 세면대 물을 틀어 수정의 손등에 대준다. 갑작스런 사고에 놀란 수정이 자신의 손등이 얼마나 화상을 입었는지 모르고 상대방 옷에 튄 커피 물을 닦아내는 모습에 화가 난 주환은 주변에 누가 보고 있든 상관하지 않고 여자 화장실로 수정을 데려 온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상처가 손등에 남아 있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차가운 물에 손을 대주며 자신의 상처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이 남자를 보고 있는 수정은 그저 웃음이 나온다.
“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
“ 행복해서요. ”
“ 뭐라고요? 행복? ”
“ 네... 행복해요. 주환씨가 날 이렇게 걱정해 주니까. 헤헤. 이럴 때 보면 내가 생각해도 난 어린애 같다니까. 헤헤. 아.. 아파요.. ”
“ 차가운 물에 손 계속 대고 있어요. 난 구급상자 좀 가져 올 테니까. ”
“ 네~ ”
자신을 걱정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주환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손이 다쳐 아프긴 하지만 기분은 좋다. 이 남자에게 관심 받고 있다는 느낌. 보호 받고 있다는 느낌이 행복하다. 얼마 뒤 주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약봉지를 들고 들어선다.
“ 구급상자는 어디가고 약봉지에요? 약국 다녀왔어요? ”
“ 네.. 손 봐요. ”
“ 이 근처에 약국도 없던데...아... 아파라.. ”
“ 제발... 조심 좀 해요. 휴... ”
손 등에 상처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주환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기습뽀뽀를 해 버리는 수정. 주환의 볼에 뽀뽀를 하자 놀란 주환이 바라본다. 그리고 어색한 웃음을 보이는 두 사람. 지금 이 순간은 주환과 수정에게는 너무 행복한 시간이다.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신문사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수정. 아침부터 찾아오는 두통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손으로 머리를 지압했다가 눈을 깜박거리기 일쑤다.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 원고를 제출하고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가고 여자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어~ 수정아. ]
“ 지금 원고 제출하고 막 나가려고요. 안 막히면 3시간 후면 도착할 거에요. 아이들 뭐 먹고 싶은 거 없대요? 갈 때 사갈게요. ”
[ 빨리 오려다가 위험하니까 운전 조심해서 오고. 안 그래도 요즘 통닭 먹고 싶다고 노래 부르더라.]
“하하. 그래요? 네.. 이따가 뵈요. 수녀님. ”
전화를 끊고 가방을 챙겨 일어서려는 순간 또 다시 핸드폰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는데 모르는 번호가 뜬다. 고개를 갸우뚱 하며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
[ 황수정씨? ]
“ 네.. 제가 황수정인데요... 누구시죠? ”
[ 나.. 준하 엄마에요. 좀 만나고 싶은데.. 오늘 시간 좀 내요. ]
“ 아.. 안녕하세요? 제가 오늘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어서... 지금 밖에는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요. 네.. 아..거기 압니다.. 네.. 이따가 뵙겠습니다. ”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짐을 챙겨 들고 건물 밖으로 나온다. 지상에 주차 되어 있는 차에 탑승하고 차에 시동을 건다. 다시 가방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에 장준하를 검색한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하다가 다시 종료버튼을 누른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약속 장소로 출발한다. 얼마 뒤 호텔 앞에 도착하고 주차를 맡기고 호텔 안으로 들어간다. 1층에 있는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미선을 찾는다. 창가 쪽에 미선이 보이고 조심스레 걸어가고 걸어오는 수정을 미선도 발견한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 전 아이스티 주세요. ”
직원에게 주문을 하고 미선을 바라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선의 표정이 어둡다는 것을 수정은 느낀다. 잠시 동안 어색한 긴장감마저 맴돈다.
“ 기자 일을 한다고? ”
“ 아.. 네..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
“ 휴.. 도대체 우리 준하랑은 어떻게 만난 사이지? ”
“ 네.. 준하오빠가 제가 살고 있는 고아원으로 봉사활동을 오면서부터 알게 됐어요. ”
“ 뭐? 뭐라고? 고아원? 그..그럼.. 부모님 안계시다는 건가요? ”
놀라고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수정을 쏘아 보며 질문하는 미선. 모든 부모가 없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런 반응은 예상할 수 있었다. 인상을 보고 좋게 봤다가도 고아라는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수정은 이미 너무 오래 전부터 경험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처를 많이 받았었지만 이런 아픔을 이겨내지 않으면 자신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실전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스스로 극복했고 지금은 무덤덤하게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 네. 전 부모님이 안계십니다. ”
“ 하... 기가 막혀서..정말!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감히 우리 준하를 넘보지? 가당키나 한가? 이게? 우리 준하가 어떤 아이인지 알고도? ”
가만히 미선의 말을 듣고 있던 수정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 사모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네요. 사모님이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준하 오빠 하고 전 친한 오빠 동생 사이였지. 연인 사이는 아닙니다. 그리고 전 그날 준하오빠가 장기준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걸 처음 알았고요. 그리고 제가 고아라서 준하오빠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사모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가 만약 준하오빠를 남자로 생각하고 사랑했었다면 그 사람의 배경을 보고 사랑한 게 아니라 마음을 보고 사랑했을 겁니다. 제가 오빠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사랑은 아니니.. 그렇게 걱정하실 일 없을 겁니다. ”
“ 아...하... 그럼.. 그날 준하가 결혼할 여자라고 말한 건.. ”
“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니까요. 쌍방이잖아요. 전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지금 좀 일이 있어서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도 괜찮을까요? ”
“ 그..그래요.. 가봐요.. ”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는 순간 수정을 다시 불러 세운다.
“ 저기! ”
“ 네.”
“ 그럼.. 부모님이 누군지는 전혀 모르고 있나? ”
“ 네.. 마음 아프지만 모릅니다. 그럼.. ”
수정이 커피숍을 나가고 혼자 남은 미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심호흡이 거칠어진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와 너무 닮아버린 수정을 보고 있는 내내 마음이 괴롭다. 앉아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에도 눈 코 입 하나 하나 뜯어보며 얼굴을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면서도 한 여자와 얼굴이 겹쳐진다.
호텔을 나와 햇빛을 쐬자 순간적으로 빈혈이 오는지 비틀거리는 수정. 그 때 뒤 따라오던 한 남자가 수정을 부축하며 묻는다.
“ 괜찮아요? ”
고개를 들어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순간 아는 얼굴이라 놀란다. 지석이다. 우연하게 마주치는 지석을 보며 반가움에 웃는다.
“ 아... 안녕하세요? 어떻게 여기서 만나네요? ”
“ 그러게요? 근데 어디 아파요? ”
“ 아.. 갑자기 밝은데 나오니까요. 진짜 신기하다. 세상 참 좁구나. 이렇게 우연하게 만나기도 하고”
“ 우연히 자주 겹치면 인연이 되기도 한다던데.. 하하하하. ”
“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헤헤헤. 아참.. 내가 이럴 시간이 없지.. 나중에 또 우연히 봐요. 제가 지금 좀 바쁘거든요. ”
“ 그래요....”
수정이 뛰어가 차를 타고 그 장소를 떠나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 아마.. 또 보게 될 거야. ”
[주환씨.... . 위험해요!!! 주환씨..!!! ]
큰 폭발음과 함께 자동차 한 대가 부서지는 모습. 차안에서 울며 주환을 부르던 미주의 입 모양. 창문을 두드리는 쿵쿵쿵 소리. 미주를 구하려도 뛰다가 폭발음과 함께 튕겨 나가며 바닥에 쓰러지는 주환. 정신을 차리고 차 쪽으로 향해 달려가지만 동료들이 몸으로 막아서며 울부짖던 주환의 모습이 매일 밤 꿈속에 생생하기만 하다. 벌써 3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악몽에 시달렸던 주환이 수정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면서 며칠은 그 꿈을 꾸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또 다시 그 악몽이 주환을 괴롭혔고 온 몸에 땀범벅이가 되어 잠에서 깨어난다. 일어나보니 땀과 눈물이 얼굴에 흥건하다.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 주환은 물을 틀어 놓고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다. 흐르는 물에 모든 기억이 씻어지기라도 바라는 사람처럼. 샤워를 마치고 나온 주환이 수건을 들고 걸어가다 선반에 놓여진 미주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치고 액자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그 순간 주환의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다. 이상한 생각이 들자 핸드폰을 찾아 수정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가고 다행히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 지금 어딥니까? ”
[ 어? 지금 지방가고 있는데.. 왜요? ]
“ 지방엔 왜요? ”
[주말이잖아요. 수녀님하고 아이들 보고 오려고요. 왜요? 주말 동안 내 얼굴 못 봐서 아쉬워요? ]
“ 하하하... ”
[웃었다. 그거 알아요? 요즘 주환씨 웃는 횟수가 늘어난 거요~ 기대해요. 내가 앞으로 더 웃게 해줄게요. 나 운전 중이라 통화 오래 못해요. 나중에 또 연락할게요. ]
전화를 끊고 수정의 언제 들어도 해맑은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깨진 유리파편을 치우고 집을 나선다. 운전을 하고 도착한 곳은 경찰서. 주말인데도 몇 명 형사들이 나와 일을 보고 있었다. 주환을 보자 정수가 다가온다.
“ 정팀장님. 오늘은 쉬시지. 왜 나오셨어요? ”
“ 집에 있어봤자. 딱히 할 일도 없고. 이따가 너랑 술 한 잔 하려고 ”
“ 수정씨는 뭐하는데요? 주말인데 출근 했대요? ”
“ 지방에 내려갔어. ”
“ 정팀장님! 보기 좋습니다. 행복해 보여요. ”
정수의 말에 대답대신 미소를 짓는다. 그 때 입구 쪽으로 모자를 쓴 남자가 들어오더니 퀵 서비스라며 주환을 찾는다. 그 남자가 주환이 있는 자리로 걸어오는데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저번에도 경찰서로 배달된 수정의 사진이 떠오른다. 이번에도 또 상자다. 상자를 뜯는 주환의 표정이 심오하다. 뜯어낸 상자 안에는 역시나 사진이었다. 역시나 수정의 사진이었고 사진을 넘겨가며 확인하는 순간 마지막 사진을 보며 심하게 일그러지는 주환의 표정. 수정이 한 남자의 부축을 받는 장면의 사진이다.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감정 조절이 안된다. 최지석.
“ 하..최지석~ 이자식! ”
분노하는 주환을 보며 놀란 정수가 달려와 그 사진을 확인한다. 주환이 의자를 박차고 건물 밖으로 나가 차에 탄다. 뒤 따라간 정수가 주환을 크게 불러보지만 외면하고 출발한다. 경찰서 안으로 들어온 정수는 이진욱 경감에게 전화를 건다.
수정에게로 전화를 거는 주환은 마음이 불안하고 다급하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지 수정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안감이 더 커져만 간다.
세상에 외치다.(15)
고급 레스토랑으로 들어선 수정은 럭셔리한 분위기에 어색하기만 하다. 평소에 자주 오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 이 곳에서 저녁 식사 한 끼 먹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준하와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이런 좋은 장소에 올 일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오늘 오후 3시에 신문사 정치부로 배달이 하나 왔는데 열어 보니 준하가 보낸 옷, 신발, 가방이 들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모두 다 명품인 듯 보였다. 바로 준하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지만 저녁 먹자는 말 뿐이다. 준하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안 이상 이런 악순환은 끊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약속에 응했다. 오랜 시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가족처럼 지낸 준하와 어색한 분위기를 다시 예전처럼 바꾸고 싶었고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전달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수정이 마음의 결심을 하고 퇴근하자마자 이 곳으로 온 것이다. 준하가 보낸 옷, 신발, 가방은 쇼핑백 안에 그대로 가지고 온 채.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예약자 이름을 말하니 직원이 안내를 돕는다. 안내를 받아 들어가 도착한 곳은 룸 형식으로 된 장소였다. 직원이 노크를 했고 이내 문이 열리고 수정이 룸 안으로 들어서자 준하가 일어나 수정을 맞이한다.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그 룸 안에는 준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눈앞에 있어 당황하는 수정. 장 회장과 미선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네 사람이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자 준하가 수정에게 다가와 수정을 자신의 부모님께 인사를 시킨다.
“ 아버지. 어머니. 제가 말씀 드린 사람이에요. 이름은 황수정이고요. 수정아. 이쪽은 아버지, 어머니셔. 인사해. ”
“ 아..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황수정입니다. ”
“ 준하야... 이게.. 도대체... ”
“ 제가 결혼 할 사람이에요. 그 동안 인사시키려고 했었는데 여유가 없었네요. ”
굳은 표정으로 일관하던 장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후에 일어서 밖으로 나가버린다.
“ 여.. 여보~! 준하야.. 나중에 이야기 하자. ”
미선마저 자리를 떠나자 룸 안에는 준하와 수정만이 남아 있다. 잠시 동안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고 코스 요리가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한다.
“ 맛있겠다. 배고팠는데.. 잘 먹을게.. 오빠. ”
애써 웃으며 음식을 먹는 수정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평소 활발하고 말을 많이 하던 수정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준하를 보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고 먹기만 한다. 입안에 음식이 있는데도 손은 바쁘게 움직이며 입 안으로 음식을 꾸역꾸역 넣는다. 물도 마시지 않고 억지로 먹고 있는 수정을 바라보며 준하가 손목을 잡는다.
“ 수정아! ”
잡은 손목의 손을 떼어 내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수정을 보며 이번에는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간다.
“ 수정아! 나 봐... ”
그 말에 준하를 똑바로 쳐다본다.
“ 화..났니.. ?”
“ 우리가 ...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 우리가 언제부터 결혼 할 사람이었어? ”
“ 난 분명히 말했잖아. 너랑 결혼하겠다고. 널 여자로 본다고! ”
“ 나도! 분명히 말했잖아! 나한테 오빤 남자 아니라고! 그냥 오빠일 뿐 이라고”
“ 아니! 네가 착각하는 거야. 네 감정을 잘 모르는 거야. 앞으로 내가 알려줄게. 네 마음이 어떤 건지. ”
“ 준하 오빠.. 왜 이래..? 요즘.. 내가 아는 오빠가 아닌 것 같아서 이상해.. 그러지마. 난.. 사랑하는 사람 있어. 그 사람 오빠도 알아.. 그 사람이 누구 ”
“ 말하지마..... 단 한마디도 하지마.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야긴 꺼내지 마... 오늘은 못 데려다주겠다. 나중에 연락할게. ”
화난 표정으로 룸을 나가버리는 준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정은 눈물이 나온다. 이 눈물의 이유를 알 수 없다. 무엇이 슬프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좀 전에 룸안에서 대한호텔 회장인 장기준회장과 와이프인 민선과 마주쳤을 때는 순간 꿈인가 하고 착각 할 정도였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대한호텔 장기준 회장의 아들이 준하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런 대단한 집안에 아들이었다는 준하가 다른 세상 사람인 것 같다. 모두가 떠나버린 그 장소에서 수정은 멍한 표정으로 한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 온 기준은 서재 책상에 앉아 양주를 마시고 있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오래된 시간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누군가를 떠올린다. 어느 바닷가에서 긴 머리를 휘날리며 걷는 여자의 모습을. 걸으면서도 뒤에 따라고 오고 있는 자신을 보느라 뒤를 돌아보며 해맑게 웃는 여자의 모습을. 그 여자를 머릿속에 떠올리자 기준의 눈이 심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눈에 눈물에 맺혀 눈가가 촉촉해진다. 다시 눈을 뜬 기준은 오늘 아들 준하를 만나러 나간 자리에서 소연과 닮은 여자를 만났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오래 전에 세상을 등지고 떠나 버린 소연이 살아 돌아온 거라고 착각에 빠진 정도로 닮은 외모의 한 여자를 만났다. 당황스럽고 믿겨지지 않는 상황에 적응할 수 없어 도망가듯 그 자리를 빠져 나온다. 수정을 보고 놀란 사람은 기준 뿐만이 아니었다. 미선 역시 죽은 소연과 너무도 닮아서 심장 박동수가 커졌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 불을 키지도 않은 채 미선은 불안감이 몰려온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숨이 거칠어진다.
경찰서로 들어오는 수정은 제일 먼저 주환의 책상 먼저 살핀다. 그런 수정의 모습이 이제는 모두가 익숙하다. 주환이 자리에 없자 정수를 쳐다보며 표정으로 묻자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 이제 곧 올 거에요. ”
“ 아.. 네. 커피 드실래요? 제가 커피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거든요. ”
“ 타주시면 저희야 좋죠~ ”
인원수를 세며 종이컵을 꺼내고 쟁반 위에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탄다. 커피를 열심히 타고 있을 때 일을 마치고 주환이 돌아온다. 커피 타느라 주환이 온 것도 모르고 있는 수정을 위해 정수가 알려준다.
“ 수정씨! 정팀장님 오셨어요. ”
“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
쟁반을 들고 있던 두 손 중에 한 손으로 쟁반을 받치고 주환에게 인사하기 위해 한 손을 빼고 흔들다가 균형을 잃고 쟁반이 엎어지면서 뜨거운 커피물이 옆을 지나던 여직원과 수정에게 엎질러진다.
“ 앗 뜨거워! ”
“ 아..! ”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고 놀란 주환이 뛰어 온다.
“ 죄송해요. 어떻게.. 괜찮아요? ”
수정이 여직원에 옷을 손으로 닦아주며 사과를 하고 있을 때 주환이 수정의 손목을 낚아챈다. 화들짝 놀란 수정이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본다.
“ 따라와요! ”
주환에게 이끌려 간 곳은 여자 화장실이었다. 세면대 물을 틀어 수정의 손등에 대준다. 갑작스런 사고에 놀란 수정이 자신의 손등이 얼마나 화상을 입었는지 모르고 상대방 옷에 튄 커피 물을 닦아내는 모습에 화가 난 주환은 주변에 누가 보고 있든 상관하지 않고 여자 화장실로 수정을 데려 온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상처가 손등에 남아 있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차가운 물에 손을 대주며 자신의 상처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이 남자를 보고 있는 수정은 그저 웃음이 나온다.
“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
“ 행복해서요. ”
“ 뭐라고요? 행복? ”
“ 네... 행복해요. 주환씨가 날 이렇게 걱정해 주니까. 헤헤. 이럴 때 보면 내가 생각해도 난 어린애 같다니까. 헤헤. 아.. 아파요.. ”
“ 차가운 물에 손 계속 대고 있어요. 난 구급상자 좀 가져 올 테니까. ”
“ 네~ ”
자신을 걱정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주환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손이 다쳐 아프긴 하지만 기분은 좋다. 이 남자에게 관심 받고 있다는 느낌. 보호 받고 있다는 느낌이 행복하다. 얼마 뒤 주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약봉지를 들고 들어선다.
“ 구급상자는 어디가고 약봉지에요? 약국 다녀왔어요? ”
“ 네.. 손 봐요. ”
“ 이 근처에 약국도 없던데...아... 아파라.. ”
“ 제발... 조심 좀 해요. 휴... ”
손 등에 상처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주환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기습뽀뽀를 해 버리는 수정. 주환의 볼에 뽀뽀를 하자 놀란 주환이 바라본다. 그리고 어색한 웃음을 보이는 두 사람. 지금 이 순간은 주환과 수정에게는 너무 행복한 시간이다.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신문사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수정. 아침부터 찾아오는 두통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손으로 머리를 지압했다가 눈을 깜박거리기 일쑤다.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 원고를 제출하고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가고 여자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어~ 수정아. ]
“ 지금 원고 제출하고 막 나가려고요. 안 막히면 3시간 후면 도착할 거에요. 아이들 뭐 먹고 싶은 거 없대요? 갈 때 사갈게요. ”
[ 빨리 오려다가 위험하니까 운전 조심해서 오고. 안 그래도 요즘 통닭 먹고 싶다고 노래 부르더라.]
“하하. 그래요? 네.. 이따가 뵈요. 수녀님. ”
전화를 끊고 가방을 챙겨 일어서려는 순간 또 다시 핸드폰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는데 모르는 번호가 뜬다. 고개를 갸우뚱 하며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
[ 황수정씨? ]
“ 네.. 제가 황수정인데요... 누구시죠? ”
[ 나.. 준하 엄마에요. 좀 만나고 싶은데.. 오늘 시간 좀 내요. ]
“ 아.. 안녕하세요? 제가 오늘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어서... 지금 밖에는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요. 네.. 아..거기 압니다.. 네.. 이따가 뵙겠습니다. ”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짐을 챙겨 들고 건물 밖으로 나온다. 지상에 주차 되어 있는 차에 탑승하고 차에 시동을 건다. 다시 가방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에 장준하를 검색한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하다가 다시 종료버튼을 누른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약속 장소로 출발한다. 얼마 뒤 호텔 앞에 도착하고 주차를 맡기고 호텔 안으로 들어간다. 1층에 있는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미선을 찾는다. 창가 쪽에 미선이 보이고 조심스레 걸어가고 걸어오는 수정을 미선도 발견한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 전 아이스티 주세요. ”
직원에게 주문을 하고 미선을 바라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선의 표정이 어둡다는 것을 수정은 느낀다. 잠시 동안 어색한 긴장감마저 맴돈다.
“ 기자 일을 한다고? ”
“ 아.. 네..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
“ 휴.. 도대체 우리 준하랑은 어떻게 만난 사이지? ”
“ 네.. 준하오빠가 제가 살고 있는 고아원으로 봉사활동을 오면서부터 알게 됐어요. ”
“ 뭐? 뭐라고? 고아원? 그..그럼.. 부모님 안계시다는 건가요? ”
놀라고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수정을 쏘아 보며 질문하는 미선. 모든 부모가 없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런 반응은 예상할 수 있었다. 인상을 보고 좋게 봤다가도 고아라는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수정은 이미 너무 오래 전부터 경험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처를 많이 받았었지만 이런 아픔을 이겨내지 않으면 자신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실전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스스로 극복했고 지금은 무덤덤하게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 네. 전 부모님이 안계십니다. ”
“ 하... 기가 막혀서..정말!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감히 우리 준하를 넘보지? 가당키나 한가? 이게? 우리 준하가 어떤 아이인지 알고도? ”
가만히 미선의 말을 듣고 있던 수정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 사모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네요. 사모님이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준하 오빠 하고 전 친한 오빠 동생 사이였지. 연인 사이는 아닙니다. 그리고 전 그날 준하오빠가 장기준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걸 처음 알았고요. 그리고 제가 고아라서 준하오빠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사모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가 만약 준하오빠를 남자로 생각하고 사랑했었다면 그 사람의 배경을 보고 사랑한 게 아니라 마음을 보고 사랑했을 겁니다. 제가 오빠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사랑은 아니니.. 그렇게 걱정하실 일 없을 겁니다. ”
“ 아...하... 그럼.. 그날 준하가 결혼할 여자라고 말한 건.. ”
“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니까요. 쌍방이잖아요. 전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지금 좀 일이 있어서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도 괜찮을까요? ”
“ 그..그래요.. 가봐요.. ”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는 순간 수정을 다시 불러 세운다.
“ 저기! ”
“ 네.”
“ 그럼.. 부모님이 누군지는 전혀 모르고 있나? ”
“ 네.. 마음 아프지만 모릅니다. 그럼.. ”
수정이 커피숍을 나가고 혼자 남은 미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심호흡이 거칠어진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와 너무 닮아버린 수정을 보고 있는 내내 마음이 괴롭다. 앉아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에도 눈 코 입 하나 하나 뜯어보며 얼굴을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면서도 한 여자와 얼굴이 겹쳐진다.
호텔을 나와 햇빛을 쐬자 순간적으로 빈혈이 오는지 비틀거리는 수정. 그 때 뒤 따라오던 한 남자가 수정을 부축하며 묻는다.
“ 괜찮아요? ”
고개를 들어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순간 아는 얼굴이라 놀란다. 지석이다. 우연하게 마주치는 지석을 보며 반가움에 웃는다.
“ 아... 안녕하세요? 어떻게 여기서 만나네요? ”
“ 그러게요? 근데 어디 아파요? ”
“ 아.. 갑자기 밝은데 나오니까요. 진짜 신기하다. 세상 참 좁구나. 이렇게 우연하게 만나기도 하고”
“ 우연히 자주 겹치면 인연이 되기도 한다던데.. 하하하하. ”
“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헤헤헤. 아참.. 내가 이럴 시간이 없지.. 나중에 또 우연히 봐요. 제가 지금 좀 바쁘거든요. ”
“ 그래요....”
수정이 뛰어가 차를 타고 그 장소를 떠나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 아마.. 또 보게 될 거야. ”
[주환씨.... . 위험해요!!! 주환씨..!!! ]
큰 폭발음과 함께 자동차 한 대가 부서지는 모습. 차안에서 울며 주환을 부르던 미주의 입 모양. 창문을 두드리는 쿵쿵쿵 소리. 미주를 구하려도 뛰다가 폭발음과 함께 튕겨 나가며 바닥에 쓰러지는 주환. 정신을 차리고 차 쪽으로 향해 달려가지만 동료들이 몸으로 막아서며 울부짖던 주환의 모습이 매일 밤 꿈속에 생생하기만 하다. 벌써 3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악몽에 시달렸던 주환이 수정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면서 며칠은 그 꿈을 꾸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또 다시 그 악몽이 주환을 괴롭혔고 온 몸에 땀범벅이가 되어 잠에서 깨어난다. 일어나보니 땀과 눈물이 얼굴에 흥건하다.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 주환은 물을 틀어 놓고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다. 흐르는 물에 모든 기억이 씻어지기라도 바라는 사람처럼. 샤워를 마치고 나온 주환이 수건을 들고 걸어가다 선반에 놓여진 미주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치고 액자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그 순간 주환의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다. 이상한 생각이 들자 핸드폰을 찾아 수정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가고 다행히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 지금 어딥니까? ”
[ 어? 지금 지방가고 있는데.. 왜요? ]
“ 지방엔 왜요? ”
[주말이잖아요. 수녀님하고 아이들 보고 오려고요. 왜요? 주말 동안 내 얼굴 못 봐서 아쉬워요? ]
“ 하하하... ”
[웃었다. 그거 알아요? 요즘 주환씨 웃는 횟수가 늘어난 거요~ 기대해요. 내가 앞으로 더 웃게 해줄게요. 나 운전 중이라 통화 오래 못해요. 나중에 또 연락할게요. ]
전화를 끊고 수정의 언제 들어도 해맑은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깨진 유리파편을 치우고 집을 나선다. 운전을 하고 도착한 곳은 경찰서. 주말인데도 몇 명 형사들이 나와 일을 보고 있었다. 주환을 보자 정수가 다가온다.
“ 정팀장님. 오늘은 쉬시지. 왜 나오셨어요? ”
“ 집에 있어봤자. 딱히 할 일도 없고. 이따가 너랑 술 한 잔 하려고 ”
“ 수정씨는 뭐하는데요? 주말인데 출근 했대요? ”
“ 지방에 내려갔어. ”
“ 정팀장님! 보기 좋습니다. 행복해 보여요. ”
정수의 말에 대답대신 미소를 짓는다. 그 때 입구 쪽으로 모자를 쓴 남자가 들어오더니 퀵 서비스라며 주환을 찾는다. 그 남자가 주환이 있는 자리로 걸어오는데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저번에도 경찰서로 배달된 수정의 사진이 떠오른다. 이번에도 또 상자다. 상자를 뜯는 주환의 표정이 심오하다. 뜯어낸 상자 안에는 역시나 사진이었다. 역시나 수정의 사진이었고 사진을 넘겨가며 확인하는 순간 마지막 사진을 보며 심하게 일그러지는 주환의 표정. 수정이 한 남자의 부축을 받는 장면의 사진이다.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감정 조절이 안된다. 최지석.
“ 하..최지석~ 이자식! ”
분노하는 주환을 보며 놀란 정수가 달려와 그 사진을 확인한다. 주환이 의자를 박차고 건물 밖으로 나가 차에 탄다. 뒤 따라간 정수가 주환을 크게 불러보지만 외면하고 출발한다. 경찰서 안으로 들어온 정수는 이진욱 경감에게 전화를 건다.
수정에게로 전화를 거는 주환은 마음이 불안하고 다급하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지 수정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안감이 더 커져만 간다.